소름 끼칠 정도의 자기혐오가 가장 달콤한 유혹과 하나가 되어, 자기 존재의 부정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는 불사의 관념과 결합된다. 존재의 치유 불가능이야말로 불사라는 감각의 유일한 실질이었다. - P395

젊은 시절부터 혼다의 인식의 사냥개는 극히 기민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한도의, 보는 한도의 잉 찬은 거의 혼다의 인식 능력에 부합한다고 봐도 된다. 그 한도의 잉 찬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혼다가 가진 인식의 힘이다. - P402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잉 찬의 알몸을 보고싶은 혼다의 욕망은 인식과 사랑의 모순에 양다리를 걸친 불가능한 욕망이었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이미 인식의 영역이고, 설령 잉 찬이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그때 책장 안쪽 빛의 구멍으로 엿본 순간부터 이미 잉 찬은 혼다의 인식이 만든 세계의 주민이 됐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보자마자 오염되는 잉찬의 세계에는 혼다가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이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보지 않는다면 다시 사랑은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것이었다. - P402

비상하는 잉 찬을 보고 싶으나 혼다가 보는 한도의 잉 찬은 비상하지 않는다. 혼다의 인식 세계의 피조물에 머물러 있는 한 잉 찬이 이 세계의 물치 법칙에 반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꿈속을 제외하고) 잉 찬이 벌거벗고 공작새에 올라타 날아가는 세계는 그러기 일보 직전에 혼다의 인식 자체가 흐림이 되고 티끌이 되어 하나의 미미한 톱니바퀴에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로 그 원인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고장을 수리하고 톱니바퀴를 교체하면 될까? 그것은 혼다를 잉 찬과 공유하는 세계에서 제거하는 것, 즉 혼다의 죽음을 뜻한다. - P403

이제 분명한 점은 혼다의 욕망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 그가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그가 없는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엿보는 자가 언젠가 엿보기라는 행위의 근원을 말살해야만 광명이 비칠 수 있음을 인식할 때, 그것은 곧 엿보는 자의 죽음이다. - P403

현재의 이 세계는 혼다의 인식이 만든 세계이므로 잉 찬도 함께 이곳에 살고 있다. 
유식론에 따르면 그것은 혼다의 아뢰야식이 만든 세계였다. 그러나 혼다가 유식론에 완전히 무릎을 꿇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그 인식에 집착하고, 자기 인식의 근원을 저 영원한 곳에 순간순간 미련 없이 세계를 폐기하며 갱신하는 아뢰야식과 동일시하는 데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404

오히려 혼다는 마음속으로 장난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그 감미로움에 취하며, 인식이 부추기는 자살의 순간에 간절히 보기만을 바랐던,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잉 찬의 호박색으로 빛나는 순진무구한 나체가 찬란한 달이 떠오르듯 나타나는 행복을 꿈꿨다.
공작 성취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공작명왕화상의궤(王畵像儀軌)』에 따르면 그 본원을 나타낸 삼매야형에는 공작새 꼬리 위에 반달이, 또 그 위에 보름달이 있고, 반달이 보름달이 되듯 수법(修法)을 성취함을 나타낸다.
혼다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 공작 성취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 세상의 사랑이 모두 반달로 끝난다면, 공작새 꼬리 위에 보름달이 뜨기를 누가 꿈꾸지 않겠는가? - P4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