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식민지의 영국인: <퍼포먼스>로서의 남성성
식민지 영국 남성의 남성성에 대한 심리를 잘 보여준 두 작품인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어둠의 심연>을 들어 설명을 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읽진 않았지만 예전에 오마 샤리프가 주연한 영화로서 티비에서 자주 방영해 본 기억이 남아있다. 아무튼 읽으면서 머릿 속에 <어둠의 심연>이 떠올랐는데 다음 페이지에 바로 나와 역시... 하며 읽었다.

... 식민 담론으로서 이상적인 제국주의자의 이미지를 먼저 식민 지배자가, 그리고 나중에는 흉내내기를 통해 피지배자가 차례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식민 모방은 이중의 행위라 볼 수 있다. 한편 실버만의 이중 모방은 식민 피지배자를 모방의 원형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기지시적인(自己指示的, self-referential) 성향의 이론으로서, 모방의 대상과 방향에서 기존의 개념과는 크게 대조된다. 이 이론에서도 근본적으로 원주민들은 영국인 식민 지배자를 모방한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영국인들을 모방하는 그 순간, 이미 영국인도 피지배자인 원주민의 행위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 P67
로렌스 T. E. Lawrence의 자전적 소설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에 대한 논의에서, 실버만은 흉내내기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비틀기에 관해 설명하며, <아라비아에서 로렌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아랍인들에게] 재생산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그들의 태도, 풍습, 의상 등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한다. 로렌스는 아랍인보다도 더 아랍인처럼 되고 싶어한다. 만일 아라비아 의상을 갖춰 입고자 한다면, 최고의 것을 선택하라고 그는 조언한다. 이어서 로렌스는 <유럽인들이 아랍인들의 게임에서 아랍인들을 거꾸러뜨리며 승리를 거두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 <유럽인들이 아랍인들의 게임에서 거둔 아랍인에 대한 승리>는 마치 지상 최고의 목표인 것처럼 여겨지며, 로렌스의 흉내내기 역시 그런 의도를 숨기고 있다. 실제로 <만약 그들(아랍인]을 능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완벽한 성공을 향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로렌스는 기술한다. 로렌스는 <스스로에게 역할 모델의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아랍인들이 그를 모방하게 되면서, 로렌스는 아랍인으로 가장한 채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 - P67
아랍인보다 더 아랍인처럼 된다는 것은 분명 문제의 여지가 있다. 아랍인에게 동화되지 않은 순수한 <로렌스>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로렌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라비아의 영향력에 대한 감수성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1910년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로렌스는 자신이 아라비아의 환경에서 받은 인상을 사진 찍기 원리를 통해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자신에게 투사된 모든 대상들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인화하는 민감한 감광 필름으로 스스로를 비유한다. 실버만이 지적하듯, 로렌스는 전통적으로 여성과 식민 피지배자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점에 스스로의 위치를 정한 것이다. 문제는 그가 강력한 제국주의자의 이미지와는 상치되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의도성이 결여된 영국 백인 남성으로서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지배자의 정체성을 지닌 채 그 공간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 P68
무엇보다 원주민들은 실버만이 지적하고 있듯, <항상 본래 모습으로 귀환하는 속성, 즉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로렌스는 궁극적으로 원래 자신과는 다른 모습과 위치에 머물고 만다. - P68
필자의 견해로는 <아랍인보다 더 아랍인처럼> 되고자 하는 로렌스의 흉내내기 전략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권력에 대한 실패를 감추기 위한 방어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랍인과 자신 사이에 거리 두기에 실패한 로렌스는 유럽인으로서 흉내내기의 원형 모델이 되어 아랍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붕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아라비아의 낯선 환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 P69
19세기 영국이 인도에서 제국주의적인 권력과 존재의 전형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를 위한 퍼포먼스 모델은 강력한 남성성을 외부로 발산할 수 있는 방법을 토대로 한다. 오히려 타자에게 동화되고마는 우를 범한 로렌스와 달리, 성공한 식민 지배자는 자신과 원주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모방 거부 성향을 가진다. 이상적인 제국주의자가 되지 못한 로렌스의 실패는 이미 19세기를 지나 20세기초를 살았던 그의 시대적 변화에도 원인이 있다. 19세기 말에는 제국주의 전략에 치명적인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로렌스 자신이나 조셉 콘라드 Joseph Conrad의 「어둠의 속 Heart of Dareness」에 등장하는 커츠의 예에서 드러나듯, 식민 사업의 <실패>나 원주민과의 동화, <원시로의 회귀going native>를 그린 소설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 P69
19세기 중반 식민지 인도에서 제국주의의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던 영국인들은 정체성과 행동, 자기 재현 전략을 규정하고 구성하는 방식에서 성 역할에 따른 퍼포먼스에 의존하였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영국 남성들의 남성성과 제국주의자로서의 우월성은 반복되는 퍼포먼스를 통해 식민 주체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대단히 성공적이고 지배적이어서 제국주의를 통해 새로이 구성된 그들의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 P69
한편 남성으로서, 그리고 제국주의자로서 그들이 채택했던 가면을 쓴 퍼포먼스들은 여성과 원주민에 의해 또 다른 가면을 쓴 퍼포먼스를 일으켰다. 리비에어가 가면극으로서의 퍼포먼스로 규정했던 여성성과, 바바의 식민 흉내내기는 근본적으로 억압받는 자를 중심으로 한 퍼포먼스이자 모방이다.
하지만 필자의 주장은 이른바 피지배자가 모방할 수 있었던 표준이자 모델로서의 영국 남성 제국주의자들의 정체성이 결코 고정되거나 불변하거나, 영속적이지 않으며, 반복과 강화로써 구성된 퍼포먼스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퍼포먼스를 통해 여성다움을 갖추게 되는 리비에어의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 역시 그들의 각본대로 남성성을 연기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원주민들의 모방 대상이 되는 제국주의자들 역시 권력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서 백인 남성 중심의 인종 담론과 성의 지배 담론은 결코 분리된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가부장적인 성 담론은 항상 다른 권력의 위계질서를 구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고, 이 두 지배 담론의 행위는 영국 남성이 인종적, 성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수행하였던 동일한 성격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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