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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인의 키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승주연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6월
평점 :
안톤 체호프의 이 단편집을 계기로 체호프의 단편을 얼마나 읽었나 궁금증이 일었다. 올해 들어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읽고는 있지만 그동안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멀리 한 시간이 너무 오래기도 했고 체호프의 작품을 굳이 찾아 읽지도 않아서인지 정말 읽은 책이 거의 없다. 정말정말 오래 전에 여기저기의 단편집에서 읽긴 했겠지만 상대적으로 장편 위주의 읽기였기 때문에 체호프 뿐만 아니라 푸시킨이나 고골 등의 단편 작품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체호프의 단편집으론 두 권인데 열린책들에서 2009년 출간했던 『벚꽃동산』과 올 2월에 출간된『아내.세자매』 두 권은 확실히 기억한다. 두 권은 간략하게나마 리뷰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이번이 세번째 단편집이니까 모두 합쳐도 20편이 채 되지 않는다. 세 권의 단편집이 거의 겹치는 작품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래도 올해 들어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꽤 읽고 있다. 북플로 검색해보니 8권을 읽었다. 알라딘 넘어오기 전에 교*에서 읽었던 책들은 리뷰는 커녕 독서목록도 남겨두지 않아서 그저 가물가물하고 열심히 읽었던 장편과 대작들은 북플에 올리지도 못하겠다. 이사오면서 대부분 정리한 책들도 아깝고... 함부로 서재 정리하면 낭패 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 낭패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정말로. 절대 함부로 서재 정리하지 마세요. ㅠㅠㅠㅠ 북플에 러시아 소설이 고작 9권이 등록이 되어 있는 걸 보니 속이 상한다. 고작 9권이라니. 올해의 소소한 러시아 소설 목록 중에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자그마치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야말로 대하소설이었다. 오랜만에 이런 장편을 읽어내다니.... 넘 뿌듯하니 뭔가 기분이 마구마구 업업 되는지라 바로 잠자냥님께 땡투해서 체호프를 읽기 시작했다. 검은 표지가 생소해서 녹색광선의 책 아닌 줄 알았다. 큰일 날 뻔! 녹색광선의 소설은 내가 모으는 몇 안되는 출판사 중 한 곳이다.
「벚꽃 동산」은 예전에 뮤지컬로도 공연이 되고 연극 무대에도 자주 올랐는데 평소 희곡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책으로는 읽지 않았다. 그러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벚꽃 동산」을 공연한단 포스터를 보고 혼자 가서 내용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는 공연을 보고 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기껏 가서 보고 왔는데 대체 무슨 뜻인지 도통 알지도 못하겠고 설명해 주는 사람도 물어볼 곳도 없으니 책을 보고 나면 좀 나으려나 싶어 읽기 시작한 것이. 물론 읽고 나서도 모르긴 매한가지였지만. 읽었다는 만족감만 남긴 채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볼 기회는 내게서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에 간단하게 몇 자 적어놓은 걸 읽어보니 당시에도 이해불가였었나 보다.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기는 단편소설의 결말을 보아도 그렇지만 희곡은 더 그렇다고 생각했다. 특히 「갈매기」의 이해불가함이야 말로 해서 뭐하리... 이것도 연극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그때도 고개 절레절레... 그래서 아마도 내 기억 속엔 안톤 체호프는 어렵다는 생각이 깊이 박혔었나 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귀여운 여인』등의 단편집이 꽤 자주 보였는데 그 후로 10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면했으니 말이다.
이번 녹색광선의 『낯선 여인의 키스』에 실린 단편들은 그동안의 편견 아닌 편견을 불식시킬만큼 재미있었다. 표제작을 비롯해서 총 8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귀여운 여인」은 올해 읽은 러시아 문학 단편집 중 단연 백미라 할 수 있는,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쎄네스트, 2013/ 이 아름다운 단편집도 역시 잠자냥 님 글에서... 너무 좋아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다시 알라딘에서 주문해 소장 중. 가끔 그냥 펼쳐본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든다. 강추!)에 실려 있어 읽었다. 나머지 7편은 첫 만남인 셈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미심쩍고 거기다 사랑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그것도 세번이나 한 남자의 진심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첫 단편 「농담」, 결혼을 앞둔 신부가 무위도식하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여기 이 시골을 떠나 너의 삶을 살아가라는 충고를 듣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길을 떠나는 나쟈(첫 단편에서 어이없는 사랑고백을 받는 여주인공도 '나쟈', 마지막 단편의 주인공도 '나쟈'였어!)가 등장하는 마지막 단편인 「신부」까지 각각의 개성을 가진 단편들 모두가 다시 읽게 된다면 문득 떠오를테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작품을 꼽으라면 「6호실」을 말할 것이다. 「6호실」의 이반 드미트리치와 안드레이 예피미치의 대화를 읽으면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의 "페르디난트가 절절하게 토해내는 항변들"이 떠올라 그때와 같은 답답함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체국 아가씨 리뷰는 → https://blog.aladin.co.kr/734483154/14613804)
'6호실'은 병원 마당에 따로 떨어져 있는 별채의 병동을 말하는데 이곳은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다. 짐승의 우리라 해도 이곳보다는 나을 듯한 곳에 5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고 쓰레기로 가득한 대기실엔 "순박하고 긍정적이며, 성실하고 멍청하지만, 무엇보다도 질서를 가장 사랑해서 환자란 자고로 때려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 중 한 명"인 퇴역군인 출신 수위 니키타가 항시 대기중이다. 질서 유지를 위한 구타는 무시로 일어난다. 뚱뚱하고 맹한 표정, 동작이 굼뜨고 식탐이 많으며 잘 씻지도 않아서 심한 악취를 풍기는 환자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니키타는 주먹으로 있는 힘껏 그를 때린다. 하지만 환자는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고 문제는 맞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며 심지어는 눈동자에도 변화가 없이 그 큰 몸이 흔들릴 뿐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곳은 정신 병동이 아니라 집단 수용소다. 그러나 이 병원의 의사들은 환자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이곳 별채처럼 단조로운 삶은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것이다. 사지에 마비가 온 사람과 뚱뚱한 사내만 빼고 아침이 되면 모든 환자들이 현관 앞 창고에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물통에 물을 채워서 세수를 하고 가운의 끝자락으로 얼굴을 닦는다. 그런 후에는 니키타가 본관에서 가져오는 차를 주석 컵에 따라서 마신다. 차는 한 잔씩 마실 수 있다. 정오에는 삭힌 양배추를 넣어서 만든 '시'라는 수프와 죽이 나오고 저녁에는 점심때 남은 죽을 먹는다. 끼니 사이에 환자들은 누워 있거나 잠을 자거나 창밖을 보고 병실 안을 왔다 갔다 한다. 매일 이런 식의 일과가 반복되는 것이다." (213~214쪽)
이 환자들 중에 귀족 출신의 젊은이인 이반 드미트리치 그로모프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늘 흥분상태이고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늘 누워있거나 병실을 이 구석 저 구석 돌아다니며 한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가 드물고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엄청난 불안 상태에 빠져있다. 이러한 그이지만 그는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욕스럽게 읽는 사람이고 독서는 그의 병적인 습관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것이 제한된 '6호실'에서의 삶은 그에게는 더욱 불안을 유발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안드레이 예피미치 라긴이 이반을 만나기 위해 '6호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진다. 어릴 때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지식인으로서, 외과의사로서 안락한 삶을 살아온 안드레이 예피미치가 이 병원의 의사다. 그는 부도덕이 만연한 병원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선량하고 어진 마음의 소유자이지만 주변의 삶이 변화하도록 하기엔 자신이 의지도 약하고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면서 주위를 보살피려 하지 않고 방관한다. 소심한 성격 탓에 주위의 사람들이 불의한 일을 저질러도 눈을 감고 묵인하기에 이른다. 지식인으로서 나름의 의식이 있는 그였기에 이런 의사 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고 물론 '6호실' 환자들의 상태조차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병원에도 가끔 출근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참 좋겠군! 그러던 그가 '6호실'을 진료도 아니고 방문한다니. 왜? 바로 이반을 만나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안드레이는 환자들 중에서 드디어, 유일하게,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대화가 통하는 상대인 이반을 만나 유익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매일이 즐겁고 행복하다. 그와의 대화는 '삶의 낙'을 찾아주었다. 참.... 정말... 이렇게 현실 감각이 떨어진 지식인이라니...!
이반: "이곳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란 없어요."
안드레이: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그곳에 수감되거나 입원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내가, 내가 아니라면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야겠죠. 먼 미래에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 철창도 병원 가운도 없을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요. 그런 날은 언젠간 반드시 올 겁니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지만 정신병자는 아닌 사람들, 비정상이지만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 과연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고민하게 하는 대화들을 나누지만 의사 안드레이는 자신도 정신병원에 수감될 수 있다고 말을 하지만 결코 그런 시설에 수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저 쓸모없는 대화를 위한 말일 뿐.
"나는 삶을 단순히 사랑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랑해요! 나는 피해망상이 있어서 늘 고통스러운 공포에 시달리지만 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기는 순간에는 미칠까 두려워요. 살고 싶어서 미치겠단 말입니다!"
이렇게 절규하는 이반의 외침이 너무 절절해서 가슴이 답답할 지경인데 조언이랍시고 하는 것이 너무 피상적이어서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힘겹게 헤쳐온 이반에게는 결코 와닿지 않는다. 결국 이반은 안드레이를 향해 일침을 날리고 그를 경멸하기에 이르지만 이마저도 안드레이는 알아채지 못한다.
" ... 젊은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조언을 얻으려고 한다 칩시다. 다른 사람이라면 대답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할 텐데 선생님은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거나 진정한 행복을 찾으라'는 식의 준비된 대답을 해준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적인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물론 해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곳 철창에 갇혀서 고통당하는데 이 상황은 아주 좋은 데다 합리적입니다. 그 이유는 이 병실과 따뜻하고 쾌적한 선생님의 서제 사이에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하는 일도 없고, 양심에 거리낌도 없으며, 자신을 현자라고 느낄 수도 있는 이 얼마나 편리한 철학이란 말입니까... 아니요, 선생님, 이것은 철학도 사유도, 폭넓은 사고도 아니며 게으름이고 고행 수도이며, 불분명한 의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말입니다... (250쪽)
정신병동인 '6호실' 수용자와의 대화를 위해 병원의 환자들도 팽개친 그의 실상이 주위 사람들에게 점점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결국 그는 병원에서 퇴직을 권고 받는다. 이제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정상적인 교류를 하지 않으려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그도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결코 들어오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6호실'에 환자로 수용된 그는 수용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항하다 니키타에게 구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또 맞을까봐 두려움에 떨며, 숨죽이며 누워있다.
... 혼란 속에서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섭고 괴로운 생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지금 달빛을 받아서 검은 그림자 같은 형상을 한 이 사람들은 이 같은 통증을 수년째 매일 겪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는 20년이 넘도록 이러한 사실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까? 그는 고통을 몰랐고, 통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으니 그의 잘못은 없다. 하지만 니키타처럼 거칠고 완고한 그의 양심은 가책을 느끼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한을 느꼈다.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는 요소가 많은 만큼 우리에게 여러가지 고민거리도 안겨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를 고민하고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인식의 전환이야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해서 소외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모른다고, 몰랐기 때문에 잘못이 없는 거라고 간단히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닐까! 우리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은 사회에 일정 부분 빚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고통을 분담하고 경감시켜주려 애쓰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아닐 것이다. 꼭 찍어먹어봐야만 똥인지 된장인지 안다고 말하는 그런 배움에 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런지...? 그렇기 때문에 안드레이의 저 말..."그는 고통을 몰랐고, 통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으니 그의 잘못은 없다."는 저 말의 판단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넘긴 체호프의 문장에 더 힘이 실리는 거 아닐까!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자꾸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니 이래서 명작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