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진이 자아내는 친숙함은 현재, 그리고 얼마 안 된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감각을 형성해 놓는다. 사진은 [감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 놓으며, 그 판단의 근거를나타내는 일종의 토템 기능을 한다. 말로 된 표어보다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의 정서를 훨씬 더 구체화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진은좀더 먼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감각을 구성하는 데, 그리고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태껏 알고 있지 못했던 사진이 유포되어우리에게 사후적으로 충격을 주는 경우가 그렇다. 오늘날 모든 이들이 알아보는 사진은 특정 사회가 한번쯤 생각해 보자고 선택해놓은 것, 그도 아니면 그러리라고 표명된 것을 구성하는 일부이다. - P130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기억하기‘라고 말하는데, 결국에 가서 이것은 일종의 허구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단적 기억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적 죄의식 같은 그럴싸한 관념들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지만 집단적 교훈은 존재한다. - P131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란 것은 그기억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우리가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기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약정이다. 즉,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것이다.  - P131

이데올로기는 뭔가를 구체화할 수 있는 이미지, 즉 중요하기 그지없는 공통 관념을 담고 있으며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예측 가능하도록 움직이게 하는 재현적 이미지의 저장소를 만들어 둔다. 곧장 포스터로 만들 수 있는 사진들, 가령 원자폭탄 실험 뒤에 생긴 버섯구름,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에서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 달에 착륙한 우주 비행사 등의 사진들은 중요한 사건들의 핵심을 전달해 주는 시각적 등가물이다. 이런 사진들은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을 기념우표들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상기시켜 준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순간들, (원자폭탄 사진을 빼고는) 일종의 개선식 같은 이 순간들은 기념 우표에 담겼다. 나치의 강제수용소 사진이 실린 전지우표가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 P131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W.G. 제발트 같이 19세기와 초기 모더니즘의 문학적 엄숙함에 깊이 물든 작가조차도 잃어버린 생명, 잃어버린 자연, 잃어버린 도시풍경을 다룬 자신의 비탄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들에 사진을 끼워 넣으려 했다. 제발트는 단순한 애가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전투적인 애가 시인이었다. 상기하라, 그는 자신이 상기하는 것을 독자들도 상기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 P135

가슴이 미어질 듯한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줄 수있는 능력을 좀체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사진들은 뭔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사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은 뭔가 다른 일을 수행한다. 사진은 우리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이다.  - P137

보스니아 전쟁을 찍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 중의 하나, 즉 『뉴욕타임스」의 해외 특파원 존 키프너가 다음과 같은 언급을 붙여놓은 사진을생각해 보라. "이 적나라한 이미지는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만들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세르비아의어느 민병대 병사가 죽어 가고 있는 이슬람 여인의 머리를 무심하게 발로 차고 있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미지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것을 말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 P137

이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한 론 하비브라는 사진작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는 세르비아가 보스니아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던 첫 번째 달인 1992년 4월 비옐지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주도]에서 이 사진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진에서 제복을 입은 세르비아 민병대의 젊은 병사, 머리 위쪽으로 선글라스를 낀 채 약간 들린 왼쪽 손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담배를 끼고 있고, 오른손에는 장총을 들고 있는 병사를 볼 수 있다. 그는 두 사람의 몸 사이에 낀 채 얼굴을 보도에 묻고 누워 있는 여인을 오른발로 차려 하고 있다. 이 사진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이슬람교도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비록 그 여인을 이슬람교도라고 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 P137

 도대체 왜 그 여인과 나머지 두사람은 세르비아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곳에서 죽은 듯이(그런데 왜 ‘죽어 가는‘일까?) 누워 있는 것일까? 사실상, 이 사진은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거의 없다. 전쟁은 지옥이며, 말끔하게차려 입은 젊은이가 총을 든 채 무력하게 누워 있는 (그도 아니면이미 죽어버린) 살쪄 보이는 늙은 여인의 머리를 발로 찰 수도 있다는 점만을 빼고 말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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