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저항의 축
어느 날, 미크가 린테에게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헤이그의 란 판메이르데르보르트의 식량사무소에 다녀오길 요청했다. 사무소에 동지가 있다고 했다. 미크는 동지의 생김새를 자세히 묘사하며 일렀다.
"잊지 마. 무조건 그 사람이어야 해. 혹 다른 사람이 근무 중이거든 바로 돌아서서 나와."
린테가 할 일은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다음 달 배급카드를 수령하는 일이었다. 배급카드를 구하면 조직원들이 이를 품목별 교환티켓과 거래했다. - P74

자그마한 사무소로 들어서는 린테의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린테는 미크가 설명한 사람을 알아봤고 그에게 위조 서류를 건넸다. 그가 린테를 쳐다봤을 때 린테는 모든 것이 들통났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무심히 배급카드를 넘겨 줬다. 린테는 그 순간을 평생 기억했다. - P74

...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이 그저 서로를 믿어야만 했던 그 순간을. 더 큰 위험에 처한 타인을 돕기위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의연하게 행동했던두 사람의 모습을. - P75

8. 구금
브릴레스레이퍼르 가 사람들이 거취를 재정비하는 가운데, 나치는 인구 정책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네덜란드 거주 유대인의 대다수를 암스테르담 일대로 이주시킴으로써 네덜란드 국가위원장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유대인 강제 추방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무직이거나 비非 네덜란드 국적인 유대인은 모두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로 이송됐다.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는 인접 국가의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용도로 1938년 지어졌으나, 
나치는 이 수용소를 다른용도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유대인들을 각국의 수용소로 보내기 전 환승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 P97

베스테르보르크에서 약 1,126km 떨어진 
폴란드의 작은 도시 오시비엥침. 엄청난 수의 폴란드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해 나치는 1940년 오시비엥침의 전 병영에 수용소를 건설했다. 도시의 이름은 곧 독일식 발음인 ‘아우슈비츠 Auschwitz‘로 더 유명해졌다. 

이 수용소의 벽돌 건물들은 대략 1만 5,000명에서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턱없이 작은 규모였다. 히틀러는 해당 수용소의 증축을 명했고, 1941년 3월 기존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2수용소, 즉 아우슈비츠 ㅡ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지어졌다. 전쟁이 이어지면서 아우슈비츠 주변에 약 40개의 보조수용소가 증축됐고 수감자들은 공장
일에서 농사까지 다양한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 P97

한편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서는 독가스인 ‘치클론B‘ 상용화를위한 실험이 한창이었다. 수용소의 화장장 한곳에서 소련군 포로와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수감자 1,000여 명이 실험 쥐로 전락했다. 과립 형태의 독성 물질을 화장장 내부에 흩뿌린 후 화장장을 완전 밀폐하면 공기와 접촉한 과립이 기화하면서 사이안화 수소, 즉 청산을방출했다. 모든 수감자가 사망하기까지는 불과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P99

1941년과 1942년 사이, 나치는 더 많은 실험을 통해 집단 학살에최적화된 독가스의 정량을 확립했다. 실험 희생자 대부분이 폴란드의 강제 거주지에서 끌려온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였다. 1942년, 유럽전역에서부터 유대인을 실은 열차가 수용소로 밀려들어 왔다. 이는나치가 고안한 대규모 공장식 살상을 향한 첫걸음이었음이 드러났다.
곧 기존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 인구 약 10만 명의 소도시 비르케나우에 더 큰 규모의 제2수용소 개설이 허가됐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에서 최종 해결책인 ‘절멸‘이 벌어졌다. - P100

수용소의 구조를 살펴보면 모든 요소가 유대인 절멸 목표를 위해 고안됐음을 알 수 있다. 수도관도 연결돼 있지 않고 몸을 씻을 수 있는 공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수용소 내 질병 감염율이 비약적으로 높았다. 독일 내 수용소는 의례적으로 1인 1실이 원칙이었으나 아우슈비츠에서는 4인 1실이 기본이었다. 그렇게 수용소의 수감가능 인원이 약 13만 명으로 늘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옆에는 4개의 거대한 가스실과 화장터가 지어졌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의 수는, 5대 유대인 처형장 중 두 곳인 트레블링카와 베르제크 수용소에서 목숨 잃은 유대인을 합한 수를 금세 뛰어넘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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