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갈색 역병






1940년 11월 26일 아침, 메이에르스의 강의를 대체하게 된 클레베링아는 레이던 대학으로 향했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던 학생들 앞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로 손꼽히는 저항 연설을 펼쳤다. 자신의 스승이자 동료인 에두아르트 메이에르스에 대한 헌사로, 메이에르스의 연구 업적이 네덜란드 법체계에 어떻게 생명을 불어넣었는지 논했고, 
나아가 법 분야의 초석이 된 개념들에 그의 이론이 어떻게 적용됐는지를 밝혔다. 메이에르스의 기라성 같은 업적을 증명한 클레베링아는 젊은 관중들의 정의감과 양심, 이성에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 P38

학자이자 학생들의 아버지, 훌륭한 이웃이자 우리 네덜란드의 고귀하고 참된 아들이며 국민인
 메이에르스, 그를 연구실에서 쫓아낸 것은 바로 적의에 가득 차 우리를 통치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입니다!
나는 오늘 내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내 감정이 들끓는 용암처럼 모든 균열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머리와 가슴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아도,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 선생의 의무이기에, 나는 진실이 묵과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그 진실이란 바로 네덜란드의 전통을 계승한 네덜란드 헌법은, 모든 네덜란드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에 봉사할 수 있으며 어떤 직위에도
임명될 수 있고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종교에 관계없
이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것을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P38

한편 야니는 독일군의 자비도, 네덜란드인의 도움의 손길도 기대하지 않았다. 공직자들의 아리아인 혈통 증명이 시행되고 몇 개월 후인 1941년 1월, 시행령 대상이 네덜란드에 거주 중인 모든 유대인으로 확대됐을 때에도 야니는 증명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녀 주변의 몇몇 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자신의 신분증에 ‘유대인‘을 뜻하는 
검은 알파벳 J가 새겨지는 것을 거부했다.  - P40

훗날, 그녀가 이 결정에 대해 유일하게 후회한 부분은 바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등록제를 거부하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 방침을 순순히 따르던 언니에게도 숨기지 않고 얘기할걸. 그래서 네덜란드의 16만 유대인들처럼 신분증에 표식이 새겨지는 일은 극구 말릴걸. 독일인들이 그토록 칭찬하는 ‘네덜란드인 특유의 효율성과 전문성‘이 낳은 이 별것 아닌 듯한 행정 절차가, 이후 벌어지는 유대인 강제 이주 및 추방 정책에 엄청난 효율을 더했다.
- P40

암스테르담에서만 7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등록됐는데 이는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의 10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기에 다다르면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에서는 단순한 인적 사항이 적힌 카드만으로 누가 수용소로 이송됐고 누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가능해졌다. 수용소행 기차가 출발하면 승객 명단 사본이 중앙사무소로 전달됐고, 사무소 경리는 각 승객의 이름과 일치하는 카드를 한쪽 상자에서 다른 쪽 상자로 옮겼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명당 한 장,
그렇게 ‘암스테르담에 등록된 유대인‘ 상자는 텅
비어 갔고 ‘이송 완료된 유대인‘ 상자는 꽉 차 버렸다.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