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의 단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1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표제작이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은 장편이었던 <밝은 밤>도 단편들도 주인공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은 수록된 두개의 단편을 읽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몫‘이다. 두 단편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에세이(‘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자신들이 쓴 글(‘몫‘)을 읽는 장면이 등장한다. 읽기와 쓰기를 매개로 사회적 맥락에 다가서는 여성 등장인물들의 변화된 시각과
행동이 짧은 글에서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러면서 삶의 한순간을 포착해내어 절묘하게 표현해 낸 문장들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표제작이기도 한 첫 수록작품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오래도록, 강렬하게 기억하게 될 것 같은 문장이 있었는데...
‘더 가보고 싶었다‘
이는 화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 * *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그 수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시멘트에 밴 습기가 오래도록 머물던 지하 강의실의 서늘한 냄새, 천원짜리 무선 스프링 노트 위에 까만 플러스펜으로 글자를 쓸 때의 느낌,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에 퍼져나가던 울림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고른 에세이도 좋았고, 혼자 읽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머릿 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1쪽)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가깝게 느껴졌다고도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 주는 경험을 했다.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43~44쪽)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몫‘ 52쪽)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글을 처음 읽고 받았던 충격을. 담요를 뒤집어 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 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희영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편집실은 고요했다. 낭독이 끝났는데도 편집실을 채운 팽팽한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59쪽)

희영이 정윤의 말을 끊었다.
아니요. 남편을 죽여야만 아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의 잔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 부분이 빠져서는 안되고요. 왜 여자들이 경찰을 불러도, 이혼을 하고 싶어도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제가 다음 글에서 분석했으니 읽어보세요.
희영은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써온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명확한 주장과 그를 받쳐주는 논리적인 근거로 짜인 단단한 글이었다. 같이 공부하며 준비했지만, 당신은 당신 역시 오래도록 남자들의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희영의 글을 읽으며 깨달았다. (67쪽)


자주 여러번 읽고 싶은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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