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위대한 작가 이사벨 아옌데가 들려주는 그녀의 인생, 그리고 페미니즘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들려주는 노작가의 이야기가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듯 읽힌다. 그의 어조가 그렇다. 내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지금까지 쓴 소설 속 인물 중 한 명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된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운명의 딸》 속 여주인공 엘리사 서머스를 선택했다는 글을 읽었다. 인터뷰어는 그 책이 ‘우의적인 페미니즘의 발현‘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했는데 그 질문에 그래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 생각을 작가 스스로는 해본 적 없었단다. 나도 그 책 읽으며 여주인공 엘리사가 시대를 앞서가는 당차고 강인한 여성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페미니즘으로까진 연결시키지 못했는데 ˝얍삽한 기자 하나˝ 라고 표현한 것을 보니 그 질문에 기분이 꽤 나빴던게 아닐까 싶어 살짝 웃음이 났다.
엘리사가 살았던 개척시대 미국도 그랬지만 사실 여성 해방을 위해 우리 여성들은 남성의 전략을 배워야했고 그들과 겨루어야 했으며 남성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여성들이 쟁취한 자유를 더 지키고 , 저 신장시켜 나가고, 이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전파시키기 위하여 싸워나갈 것임을, 엘리사와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꼭 이야기해주고 싶단다.

<첫 문장> 한 치의 과장도 없이 말하지만, 나는 유치원 시절, 그러니까 우리식구들이 ‘페미니스트‘라는 게 도대체 뭔지도 몰랐던 그 시절부터 이미 페미니스트였다. 내가 1942년에 태어났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내 기억에, 내가 처음 남성들의 권위주의에 반감을 갖게 된 건 엄마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 엄마의이름은 판치타. 내 아버지는 페루에서 살 당시, 아직도 젖먹이였던 어린 두 자녀, 그리고 갓난쟁이와 내 엄마 판치타를 버렸다. 결국 엄마는 칠레의 친정으로 돌아와 얹혀살아야 했고, 그 덕분에 나는 외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 P7
‘페미니즘‘이란 어휘는 매우 급진적인 느낌이 들고 때론 남성 혐오로 해석될 수 있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따라서 나의 이야기를 이어가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이 점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럼 우선 ‘가부장주의‘라는 말에서부터 시작해보자. - P23
내가 생각하는 ‘가부장주의‘는 어쩌면 위키피디아나 스페인 한림원이 발간하는 사전상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이 말은 여성이나 다른 그 어떤 종에 대해 남성이 갖는절대적인 권한을 의미한다. 그런데 페미니즘 운동이 일면서 일부 측면에서 이런 절대 권력이 손상되었다. - P23
물론 또 다른 많은 측면에서는 지난 수천 년을 이어온 남성들의 전권이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지만 말이다. 성차별적 요소가 잠재된 수많은 법률이 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는 남성만이 지배력과 특권을 누려왔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부문에서 여전히 남성에게만 억제력을 부여하는 지배적 체계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가부장적 체계는 여성에 대한 반감, 즉 ‘여성 혐오‘도 불러올 수 있지만, 동시에배타성과 공격성을 내포한 다양한 형태의 문제를 야기한다.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 계급 차별, 외국인 혐오,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척 등이 그 예다. 가부장주의는 타인의권리를 침해하며, 복종을 강요하고, 이에 도전하려는 자들을 응징한다. - P24
그렇다면 나의 ‘페미니즘‘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두 다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고, 두 귀 사이에 존재한다. 즉 나의 페미니즘은 철학적 태도이자 남성만이 가진 권위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정의에 대한 주장이다. 또한 여성의 해방과 동성애자, 성소수자(LGTBIQ 등)‘를 비롯해 제도에 의해박해당하는 모든 이들의 해방, 그리고 나의 이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하는 또 다른 모든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 P24
동참하고자 하는 노고자 하는 이들을 나는 언제라도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표현대로 ‘격하게 환영 Avemenide‘ 한다.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젊은 시절에 나는 양성평등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쳐 일했고, 남성들의 게임에 끼어보려 했다. 그러나 좀 더 어른이 되면서 그런 게임은 미친 짓이며,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의 윤리의식을좀먹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이세상을 망가뜨렸다고 비난하는 건 아니다. 다만 망가진 세상을 고쳐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원리주의, 파시즘, 전통 등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더욱이 수많은 저항 세력 속에서 변화를 두려워하며 확연히 다를 미래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수많은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면 절망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 P25
이렇게 가부장주의는 거대한 바윗돌 같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바다처럼 유연하고, 강력하며, 깊고, 삶의 무한한 복잡성을 제 안에 담고 있다.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며, 가볍게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성난 풍랑처럼 요동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그렇게 바다처럼 언제나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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