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들어오는 시 한 편을 남겨본다.



꽃밭의 경계


꽃밭을 일구려고 괭이로 땅의 이마를 때리다가

날 끝에 불꽃이 울던 저녁도 있었더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로 삼으려고 돌을 주우러 다닐 때

계곡이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공사장을 지나갈 때면 목

빼고 기웃거리고 쓰러지는 남의 집 됫박만 한 주춧돌에도

눈독을 들였어라

물 댄 논에 로터리 치는 트랙터 지나갈 때 그 뒤를 겅중겅

중 좇는 백로의 눈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렸어라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

하였어라

하지만 좋았어라 돌을 주워들 때의 행색이야 손바닥 붉은 

장갑이지만 이 또한 꽃을 옮기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한동

안 아득하기도 하였어라

그렇다면 한낱 돌덩이가 꽃이라면 돌덩이로 가득한 이 세

상은 꽃밭인 것인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아무 욕심

이 없어졌어라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를 짓고 여기와 여기 아닌 것들

의 경계를 가르는 일을 돌로 누를 줄 모르고 살아왔어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는 다 소용없는 것이기는 하

지만

경계를 그은 다음에 꽃밭 치장에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

은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어라




시를 쓰는 과정이 꽃밭을 일구는 과정과 포개지고 "언 땅을 파내는 괭이질처럼 어렵고 고독한 노동이 시 쓰기라는 점이 강조된다."고 한다.  의미를 다 알 수도 없고 마음 속에 들어차는 느낌이 있지만 뭐라 표현할 길이 없어 아쉬웠는데 약간의 해설이 있으니 상쇄가 된다.


시를 읽다가 안도현 시인의 주위 친지들, 가족들 모두 마주하는 경험도 하게 된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사연 많은 고모님들도 한 분, 두 분 떠나가신 듯한데 이 분들의 삶의 모습들이 시로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이 못내 아름다웠다. 우리의 삶과 시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일까...



고모


...   ...

  넷째 고모 안금분(安今粉)은 1929년생 기사생이다. 우리는

논실고모라 불렀는데 고모부 이두형의 첫 부인 택호를 이

어받아 마을에서는 수곡댁이로 불렀다고 한다. 고모는 안동

풍산읍 하리 최씨 집안으로 처음 시집을 갔는데 신랑은 안

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6.25전쟁이 터지자 신랑

은 월북한 뒤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고모는 시댁에서

남편도 없이 삼년 시집살이를 하였다. 결국 친정으로 돌아

온 고모는 혼수로 가져갔던 무명 이불과 옷가지들을 풀어서

할머니와 무명베를 짜서 팔기도 했고, 길쌈을 누구보다 잘

했다고 한다. 이후 논실 동네 부자이며 이장인 고모부가 동

생을 시켜 큰아버지에게 혼인을 청했다. 고모부는 첫 부인

이 있었으나 딸만 둘을 낳아서 소박을 놓았다고 한다. 고모

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고, 현재 치매를 앓고 있어 가끔 찾

아뵐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십만원쯤 용돈을 쥐어드

리는 일뿐이다. 논실고모네 석감주는 정말 입에 착착 달라

붙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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