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한 권도 안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기억이 안난다... 왜 안 읽었을까..
꽤 많은 일본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검색해봐도 없다.. 충격적이다!





1
아침 식탁에서 수프를 한 숟가락 뜨신 어머니가 "아" 하고 가는신음 소리를 내셨다.
"혹시 머리카락이라도?"
수프에 뭔가 비위 상하는 거라도 빠졌나 싶어 여쭈었다.
"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살짝 수프를 한 숟가락떠서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고개를 돌려 부엌 창문 너머 만개한 산벚꽃에 시선을 보내며 얼굴을 그대로 모로 둔 채 다시 수프를 살짝작은 입술 사이로 떠 넣으셨다. 살짝이라는 표현은 어머니에겐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잡지 등에 나오는 식사 예법과는 정말이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 P7

"자, 모두 묵념하자."
HPHA내가 몸을 구부리고 합장하자 아이들도 얌전히 내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합장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과 헤어져 혼자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오는데, 계단 위로 늘어진 등나무 덩굴 밑 그늘에 어머니가 서서 말씀하셨다.
"아주 몹쓸 짓을 했구나."
"살무사인 줄 알았더니 그냥 뱀이었어요. 그래도 잘 묻어줬으니괜찮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런 일을 어머니께 들킨 게 영 찜찜했다.
어머니는 결코 미신을 믿는 분은 아니었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 P16

니시카타초 집에서 돌아가신 이후 뱀을 아주 무서워하신다. 아버지가 임종하시기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머리말에서 가늘고 새까만줄이 떨어져 있는 걸 보고 뭔가 하고 집어 들었는데 그게 바로 뱀이었단다. 스르르 도망쳐 복도로 나가서는 그 뒤론 어디로 갔는지 그대로 사라져버렸단다. 그것을 본 사람은 어머니와 외삼촌 두 분이었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임종 전에 집안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앉아 계셨다고 한다. 우리도 그 자리에 같이 앉아 있긴 했지만, 그래서 그때 뱀이 나타났었는지는 전혀 몰랐다. - P17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저녁, 정원 연못가 나무에 올라가있던 뱀은 나도 직접 보았다. 나는 지금 스물아홉 살 아줌마가 되었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열아홉이었다. 이미 꼬마는아니었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한데, 내가 영전에 꽂아둘 꽃을 꺾으러 정원 연못 쪽으로 걸어 내려가 연못가 바위 옆 철쭉이 핀 곳에 서서 힐끔 쳐다보니 철쭉 가지 끝에 작은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흠칫 놀라 그 옆 황매화 가지를 꺾으려 했더니 그 가지에도 뱀이 감겨 있었다. 또 그 옆에 있던 물푸레나무에도 어린 단풍나무 가지에도 금작화에도 등나무에도 벚나무에도 이나무 저 나무에 모두 뱀들이 몸을 둘둘 말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무섭진 않았다. 뱀도 나처럼 우리 아버지의 임종을 슬퍼해 구멍에서 기어 나와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곧 정원에서 보았던 뱀 이야기를 어머니께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침착하게 무언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시고는 딱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 P18

하지만 이 두 번의 뱀 사건이 그날 이후 어머니가 뱀을 질색하게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뱀을 질색한다기보다는뱀을 무슨 영물인 양 생각해 두려워하는, 다시 말해서 공포심을 갖게 된 것 같다. - P18

우리가 도쿄 니시카타초에 있는 집을 버리고 이즈에 있는 약간중국풍의 산장으로 이사한 때는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한 그 해 12월 초였다. - P20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집안의 경제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현재는 어머니의 유일한 혈육이며 와다에 사시는 외삼촌이 전적으로 돌봐주고 계셨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로는 세상이 전과 달라져 와다의 외삼촌이 이젠 안 되겠으니 집을 팔아야겠다고, 하녀도 내보내고 모녀 둘이서 어디 시골에 작은 집 한채를 마련해 형편에 맞춰 사는 게 낫겠다고 어머니께 충고했는지,
어머니는 돈에 관해서는 아이들보다 더 아는 게 없는 분이라 외삼촌에게 그런 말씀을 듣고 그럼 알아서 잘 좀 처리해달라고 부탁한모양이었다.
- P21

만약 어머니가 심술궂은 구두쇠여서 자식들을 구박하고 자기 앞날만 생각해 돈을 몰래 숨겨두는그런 사람이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뀐다 해도 이렇게 죽고 싶은 심정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속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나는 빳빳이 굳어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다음 날 어머니는 여전히 좋지 않은 낯빛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잠깐이라도 더 이 집에 머물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외삼촌이 오셔서 이제 짐은 거의 다 부쳤으니 오늘 이즈로 출발하자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마지못해 코트를 입고 작별 인사하는 키미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를 대신하고는, 외삼촌과 나와 함께 셋이서 니시카타초 집을 나섰다. - P25

"정말 명의시다. 나는 이제 다 나았어."
아주 말간 얼굴에 부드러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말씀하셨다.
"어머니, 창문을 좀 열까요? 눈이 오고 있어요."
탐스러운 함박눈이 벚꽃잎 흩날리듯 나풀나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유리문 너머 이즈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젠 아프지 않아."
어머니는 다시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옛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 같아. 실은 난 말이야, 막상 이사할 때가 돼서 이즈로 떠나오기가 아무리 맘을 바꾸려애써봐도 싫었어. 니시카타초의 그 집에서 하루라도, 아니 반나절동안만이라도 더 있고 싶었어. 기차에 올라탔을 때는 거의 절반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지. - P31

여기 도착했을 때도 처음에만 잠깐 정신이 들었을 뿐 날이 어둑해지니까 벌써 도쿄가 그리워서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거야. 보통 병이 아니지. 신께서 날 한번 죽이고는 어제까지와는 다른 나로 다시 환생시켜주신거야." - P31

2
뱀 알 사건이 있고 열흘정도 지나면서 불길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 어머니를 더 깊은 슬픔 속에 빠뜨리고 숨통을 옥죄었다.
내가 불을 내고 말았다.
내가 집에 불을 내다니. 내 생애에 그런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리라곤 태어나서 지금까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불을 소홀히 다루면 큰일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도 깨닫지못할 정도로 나는 철부지 ‘아씨‘였던가. - P33

"그전부터 하고 싶은 얘기였는데, 우리 서로 기분이 좋을 때 하려고 오늘까지 기다렸어.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야. 왠지 오늘은나도 맘 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어서 그러니까 음, 너도 끝까지 잘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사실 말이야, 나오지는 살아 있단다."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5, 6일 전에 와다의 외삼촌한테 연락이 왔어. 예전에 외삼촌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 최근에 남쪽 지방에서 돌아와 외삼촌 계신곳으로 인사를 왔는데 그때 이런저런 얘기 끝에 우연히도 나오지와같은 부대에 있었다고, 그래서 나오지는 무사하다고, 이제 곧 돌아올 거라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영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그 사람 얘기로는 나오지가 아주 심한 아편중독 상태였대………."
"또!"
나는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입을 일그러뜨렸다.  - P50

아버지와 비와 호수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내가 물속으로 뛰어들자 물풀 사이에 사는 작은 물고기들이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가고, 호수 속으로 내 다리의 그림자가 또렷이 떠올라 울렁울렁 움직이던그 모습이, 지금 어머니와 둘만 있는 이 상황에 어떠한 연관성도 없이 불현듯 가슴속에 떠오르다 사라졌다. 나는 침대에서 미끄러지듯내려와 어머니의 무릎을 껴안고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어머니, 아까는 죄송했어요."

생각해보면 그즈음이, 어머니와 나에게 마지막 행복의 불꽃이 반짝였던 때였고, 나오지가 남쪽 지방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우리의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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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4-26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경험이 있죠. 저도 톨스토이 책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 작년에 부활을 읽었더랬습니다. 왜 안읽었는지 저도 모르죠..ㅎㅎ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을 읽고 사양도 읽었는데...그리고 또 한 작품을 읽었는데...인간실격만 줄거리가 생각나고 나머지 작품들은 암것두 생각이 안나요...ㅠㅠ 오래 전에 한 번 휘리릭 읽으면 바로 증발하나 봅니다. 인간실격은 3번 읽었거든요..ㅎㅎ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나요..ㅎㅎ

은하수 2023-04-27 00:25   좋아요 1 | URL
당연히 읽었다고 착각하는 단계가 있나봐요^^ 작가를 혼동하기도 하구요.
읽은 책 까먹는거야 그냥 예사로운 일이죠~~ㅎ
yamoo님께선 인간실격이 더 좋으셨나봐요 저도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