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기억에 오래 남을 문장이다.


그 일이 처음 일어난 것은 어느 따뜻한 봄날, 할리우드 근처평지에 있는 우리 집으로 서쪽 바다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화분에 새로 심은, 가운데가 검은 팬지 꽃잎을 흩어놓던 화요일 오후였다. - P11

그러나 바깥이 어둑해지고, 내가 베어 문 한 입의 케이크가 목구멍을 다 타고 넘어갔을 즈음, 그 첫맛이 사라져갈 즈음, 나는 예상치 못한 내 안의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내 안에 깊숙이 묻혀 있던 센서 같은 것이 이제 막 탐지기를 곧추세우고 몸속을 돌아다니며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고 내 입에 경고하는 것 같았다. 최고급 초콜릿과 가장 신선한 레몬 같은 좋은 재료들은 더 커다랗고 어두운 무언가를 덮어버리려는 연막에 불과한 양, 그 아래 숨어 있던 것의 맛이 치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분명 초콜릿 맛이었지만, 그 맛이 퍼지며 흔적을 남기는 동안 동시에 내 입안에 가득 차는 것은, 하찮음과 위축된, 화가 난 느낌의 맛, 어쨌든 엄마와 연관이 되어 있는 듯한 거리감의 맛, 엄마의 복잡한, 소용돌이 같은 생각의 맛이었다. 마치 아스피린을 여러 알 집어 먹게 만드는 두통 때문에 이를 앙다무는 엄마의 느낌까지 맛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 좀 누웠다 올게... 하던 엄마 말 속의 말줄임표처럼 침대 탁자 위에 흰 줄을 이루며 나란히 놓여 있던 아스피린의 맛... - P21


그중 어느 것도 아주 고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맛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듯한,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맛이 났다. 레몬과 초콜릿이 그 뚫린 구멍을 그저 감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엄마의 솜씨 좋은 손이 케이크를 만들었고 머릿속은 재료의 비율을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거기, 그 케이크안에, 엄마는 없었다.

- P21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열 살에야 나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번 오빠 손을 잡고 길을 건넜지만, 오빠 손을 잡는 것은 그저 식물을 붙잡는 느낌이었고, 맞잡아주지 않는 손가락에서 오는 실망은 너무나 날카로워 어떤 때는 대신 팔뚝을 잡는 쪽을 택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처음 몇 번은 길을 건널 때 그렇게 했지만, 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 P88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 P88

아이들은 겁이 없다. 두려움도 전과 같았고 희망도 변함 없었지만, 바로 그 희망 때문에, 나는 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작은 흰 접시 위에 놓인 엄마의 파이 한 조각을, 천장의 붙박이 이중 전구 아래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목 늘어난 버니 양말에 데이지꽃 잠옷바람으로, 맛은 너무 고약해서 입안에 물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어떠니? 엄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맛을음미하며 물었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시작이 케이크였다면, 끝은 파이였다. - P10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3-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페이지의 문장은 제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라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

은하수 2023-03-21 19:14   좋아요 0 | URL
ㅎㅎ
사실은 저도 반가웠어요^^
다락방님 글에 등장할 때마다 궁금했거든요. 발견의 기쁨이 꽤 큽니다. 잊기 힘들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