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니커즈를 신고 세상 밖으로 나가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다. 배터리파크부터 조지워싱턴브리지까지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하지만 커다란 쇠망치 같은 피로가 덮쳐오는 바람에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진심으로 절망했다. 아무리 차별화하려고, 달라지려고 기를 써도 나는 결국 엄마처럼 돼버리는구나. 소파에 누워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여자가 되는구나. 내가 조와 잤던 게 아빠와 잔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던 건 조가 나이 많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보는 관점에 남자-남편-아빠, 여자-아내-아이라는 철옹성 같은 구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 P293
언제나 나에게 왜냐고 물었다. 한 번씩 숨쉬기가어렵다고 느끼는 건 왜인가요? 마음이 직사각형 공간인건 왜 그래요? 왜 특정한 작은 공간만 항상 공격을 받는걸까요? 그 공간이 넓어지고 확장돼 삶을 채워주지 못하는 건 왜죠? 왜 그럴까요? - P295
모든 ‘왜‘가 달리는 순간마다 도시의 거리를 달리고 내삶의 거리를 달릴 때마다 위에서 아래로 고꾸라지듯 내게쿵 하고 떨어졌다. 책상에 묶여 있는 게 아닐 땐 나가서달리곤 했다. 숨이 찰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미칠 것같을 때까지. 당장 행동해! 움직여! 채워 넣어! 너한테는시간이 없고 멈춰서 숨 고를 시간은 더더욱 없어. 물론 언젠가는 숨도 편하게 쉴 수 있고, 여유를 부릴 수도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냥 맨발로 필요한 것을 향해뛰어. 내면 공간이 잠깐 넓어졌다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게 느껴지니, 더 빨리 더 많이 일해 더 빨리 끝내라니까. 못하겠어. 가슴 안쪽에서부터 고통이 느껴졌다. 사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몸 어딘가가 아팠고, 일어나면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 상태로 30분을더 그 앞에서 버텼다. 그러다가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다시 나를 타자기 앞으로 질질 끌고 가 묶었다. 그게 차라리 나았다. 그러지 않으면... - P295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가다가 뭉텅이로 사라져버리기도한다…………. 마흔여섯, 마흔일곱, 마흔여덟・・・・・・ 이제 과거는 없고 계속 진행되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일흔여덟, 일흔아홉, 여든, 맙소사. 엄마가 팔순이 되었다. 우리는여전히 가만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거실 소파에 앉는다. - P298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무척 어여쁘게 보인다. 결이 고운 흰머리, 보드라운 피부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처럼 보이는 주름지고 지친 노인의얼굴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말한다. - P300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 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 P301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 P301
"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 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안 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짓누르는 것만 같다. - P309
엄마는 겁에 질렸다가 이내 뉘우치고 나를 가여워하기 시작한다. 요즘 들어 엄마는 부쩍 유순해졌고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아니야, 아니다." 엄마는 황급히 수습한다. "엄마 이야기야. 그때는 그랬다고. 뜻 있어서 한 말 아니야. 넌 당연히 잘 살았지. 그건 세상이 다 알아줘. 그렇게 성내지 마라. 세게 말하려던 것뿐이니까. 엄마가 잘못 말했다. 이제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쏟아지던 말이 느닷없이 멈춘다. 다른 생각이 엄마를 사로잡은 것이다. 엄마가 방어의 방향을 튼다. "너 정말 모르겠니?" 엄마는 애원하듯 말한다. "엄마한테는사랑밖에 없었잖아. 내가 뭘 가져봤겠니.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달리 뭘 가질 수 있었겠니? 네가 인생 얘기하는거 다 옳지. 다 맞는 말이야. 너한테는 일이 있었잖아. 너만의 일이 있잖아. 너는 여행도 많이 했고, 세상에나, 여행이라니! 넌 지구 반 바퀴는 돌아봤지. 난 여행은 꿈도 못 꿔봤는데! 나한테는 네 아빠 사랑밖에 없었어. 인생 살면서 누릴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했다. 아니면 뭘 어쩔 수 있었겠니?" - P317
엄마가 침묵을 깬다. 이제 격한 감정이 거둬진 목소리, 그저 호기심에 대답을 바라는 초연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 나는 방 안의 빛을 본다. 거리의 소음을 듣는다. 이 방에 반쯤 들어와 있고 반은 나가 있다.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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