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일 우리 공장에서 주관하는 연수에 다녀왔다. 교육 프로그램중 하나가 이동순 교수의 <노래로 배우는 한국현대사>다. “황성옛터”, “비내리는 고모령”, “굿세어라 금순아” 등 옛 가요의 역사와 노래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한국 현대사와 더불어 살펴보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황성옛터 하나만 소개한다. <황성옛터>는 한국 사람이 작사와 작곡을 한 최초의 대중가요다. 가요사적 의미가 실로 중차대하다.

 

1920년대 말 순회극단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전수린이 어느 달밝은 밤, 개성에서 고려의 옛 궁궐터 만월대를 둘러보다 역사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었다. 이 곡조를 듣고 같은 극단의 배우이자 극작가였던 왕평이 가사를 붙인 것이 바로 “황성옛터”이다. 음반 출판당시의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跡)>이다. 돌보지 않아 거칠고 낡은 성의 자취라는 뜻이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러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같은 극단의 배우였던 당시 18세의 이애리수가 연극무대 막간에 이 노래를 불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황성의 적>이 크게 유행하면서 1932년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식 음반으로 취입하게 된다. 전국의 가요팬들이 이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이 음반은 5만장이 판매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가요시장이란 것이 개념조치 없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노래에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이 감정이입 되어 있었다.  

 

이애리수가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을 무렵 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배동필. 부자집 외아들이자 연희전문에 다니는 잘생긴 엘리트 대학생으로 두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배동필은 양반가 출신이고 이애리수는 말하자면 천한 딴따라였으니 배동필의 집안에서 이를 허락할리 없다. 더구나 배동필은 이미 부모가 맺어준 아내도 있었다. 두사람은 죽어서라도 사랑을 이루겠다는 비장한 의지로 정사(情死)를 계획하게 되고 실제로 동맥을 끊고 극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당시 신문기사의 제목 부분이다.

 

死後天國(사후천국)의 佳緣期約(가연기약)코

悲戀靑春(비련청춘)의 情死騷動(정사소동)

- 歌姬 李愛利秀(가희 이애리수), 學生 裵東必(학생 배동필) 동맥을 끈코서 “칼모친”까지 마시었다.

- 鮮血(선혈)로 물드린 사랑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모 허락을 받아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단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결혼식은 올리지 않는다. 둘째는 가수 출신임을 절대로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후 이애리수는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 모습을 감추었다. 이애리수가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근 80년만인 2008년 신문 지면을 통해서이다.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형 요양원에서 자녀과 손자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생존해 있다는 보도였다. 2009년에 돌아가셨다. 향년 99세.

 

영남대 교수인 이동순 시인이 한국가요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지 몰랐다. 옛가요사랑모임인 <유정천리> 전국회장이다. 1천여장의 가요 SP음반을 소장하고 있다. 1932년 나온 황성옛터는 가격이 1천만원선이라고 한다. 가요관련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대구MBC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오늘 강의에서는 이동순 시인의 수준급 아코디언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시인이 직접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들려주는 우리 옛 가요 이야기는 예상외로 무척 재미있고 또 그 가요에 얽힌 사연들을 알게되니 노래가 더욱 새롭고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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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4-16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책도 있군요. 바로 담아갑니다. 저는 큰 회사생활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단체로 연수가거나 놀이가는게 부럽네요. 물론 여러 사람들이 섞이는만큼 문제도 많고 피곤하기도 하겠지만요.ㅎ

붉은돼지 2015-04-16 11:13   좋아요 0 | URL
우리 옛가요에 얽힌 이야기들도 재미있더라구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이가 부산 국제시장에 있다가 나중에 대구의 양키시장(지금의 교동시장)에 와서 장사를 했는데 당시 대구 송죽극장 위에 있던 오리엔트 레코드사 관계자가 금순이의 파란많은 이야기를 듣고 깊이 공감하여 <굳세어라 금순아> 곡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 배경은 부산이지만 만들어지기는 대구에서 만들어졌다는 등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요~~

문단야사도 재미있지만 가요계 야사도 재미가 솔솔....

여운 2015-04-1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순 교수님과 사석에서 커피 한 잔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멋진 교수님이시죠 ^^

붉은돼지 2015-04-20 14:48   좋아요 0 | URL
연세가 환갑을 훨 넘으셨는데도 청바지에 중절모에 은발에 아코디언까지 멋지시던데요^^

여운 2015-04-2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가요사 책 저도 구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