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이 중세 전성기에 도달한 975년, 엔데(Ende)라는 이름의 스페인 수녀가 남긴 ‘화가이며 신의 종인 엔데‘ 라는 서명이 있다. 그녀는 에메테리우스라는 수도승과 함께 8세기에베아투스라는 수도승이 집필한 계시록에 주석을 단 「베아투스 계시록」을 섬세한 작업을 통해 완성하였다. 오늘날 게로나(Gerona)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이 필사본은 그녀가 그려 넣은 수많은 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인간의 나체는 죄악과 결합될 때만 그릴 수 있다는 중세의 이해에 따라, 엔데 수녀는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면서 지옥 속에 있는 죄인들의 벌거벗은 육체를 그렸다.
엔데 수녀가 자신의 책에 서명을 남기고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책과 책에 삽입되는 장식화는 물론이고 그림이나 조각조차도 대부분은 익명이었다. 중세에는수도원의 작업장이 예술 작품들이 창작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모든 그림들은 교회나 수도원의 주문에 의해 탄생하기 때문에 그림의 테마 역시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한 개인으로서의 예술가 개인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수녀나 수도승들은 자신들을 예술가 개인으로서의 야심이 전혀 없는 단순한 수공업자로서만 이해하였다. - P15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지은 이후에 비로소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죄악과 나체의 결합은 그 후 약 2천년 이상을 서양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회의 이러한 견해는 남성과 여성의 성과 육체에 대한 욕망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 P16

물론 여성상에 대한 인식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12세기 이후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기사들의 연애에 대한 숭배 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유랑하는 음유 시인 트루바두르는12세기와 13세기에 남편을 십자군 전쟁에 보내고 외롭게 살고있는 귀족 여인들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숭배가 단순히 귀족들 사이에서만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무지한 백성들 역시 여성적인 신을 섬기고 있었다. 중세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은 기독교 신앙 외에도 이교도의 자연 종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며, 이러한자연 종교의 중심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풍요의 여신이 있었다.
교회는 이러한 풍습에 맞서기 위해 마리아 숭배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동정녀 마리아는 유혹적이고 불행을 가져다주는 이브에 대한 반대극으로 형성된 것이다. - P18

수도승들과 함께 작업을 했던 수도원의 작업실과는 달리, 그자유로운 아틀리에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여성 예술가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에게는 오로지 수도원의 작업실만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수도원 안에 누드 모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에 따라 수녀들에게 해부학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P21


르네상스가 태동한 곳은 도시 국가인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통치하에서 무역과 은행업을 통해 매우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메디치 가의 코시모와 로렌초는 15세기 동안 자신들의 도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저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은 이제 더 이상 수도원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아틀리에를 마련하였다. 그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주체는 교회나 국가와 더불어 이제 부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된 신흥도시들이었다. 특히 초상화 예술이 번성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하는 것이 부를 얻게 된 시민들의 새로운 자기 이해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의 자의식 역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건축가이자저술가이기도 했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
1404~1472)는 수학을 통해 예술과 학문을 결합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에 따라 예술이나 학문에서 비례에 관한 이론이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알베르티의 이러한 이념은 조각가와 화가들이 자신들을 단순한 수공업자들과 구분 짓고 스스로를 예술가로서 이해하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예술가들의 위신도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들이 점차 자신들의 개성에 눈을 뜨기시작했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서 예술 작품들도 중세와는 달라 예술가 개개인의 개성의 발현으로 인식되었다. - P24

자유로운 아틀리에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인간의 몸을 조각할 때 자연과학에 토대를 두었던 알베르티의 지침을 따랐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처음엔 뼈에 대해 연구하고, 그 다음엔 근육과 피부에 대해 연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서 누드 모델이 없는 아틀리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ti, 1475~1564)와 같은 예술가들이 보인 인체에대한 관심은 철저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스케치하는 일에까지 이르렀다. - P26

1479년의 한 발굴 작업에서 기원전 3세기경의 그리스 조각품으로 추정되는 「벨베데레의 아폴로」 복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품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은 당시 세간의 이목을 불러일으켰다.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르네상스 역시 오로지 남성의 육체만을 찬미하였다. 남성은 힘과 활기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가치의 주체였다. 이제 남성의 나체는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테마의 서열에서 단연 선두에 서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서열은 거의19세기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예술가들이 테마로 선택하는 모든 분야는 ‘조형 예술 최고의 대상인 인간‘ 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철저한 해부학적 지식을 요구했다. 고대에 대한 재발견과 더불어 신화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일기 시작했다.
이로써 예술가들에게는 나체로 표현하는 테마 영역이 한층 더 확대되었다.
남성의 육체에 대한 숭배에 따라 많은 예술가들이 동성연애자였으며, 그 가운데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 P26

한편 성의 역할에 대한 문학 내의 논쟁은 20세기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14세기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radio,
1313~1375)는 1361년에 고명한 여성들에 대하여 (De ClarisMulieribus)』라는 저서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일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1405년경에는 서양 최초로 저술 활동을 전문적으로 했던 여류 작가 크리스티네 데 피잔(Christine de Pizan, 1365~대략 1430년경)이 문학 논쟁을 시작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저서 「여성들의 국가에 대하여」에서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 지적 동등함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녀는 이를 위해 성경과 신화, 역사 속에 등장하는 탁월한 여성들에 대한 수많은 보기를 제시하였다. 30년 후 이와 같은 논쟁에 참여한 알베르티는 자신의 저서 「가족에 대하여」에서 여성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르네상스 초기, 새로운 인문주의적 이상에 대한 모범으로 간주되고 있는 그의 저서가 성의 역할 변화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던 알베르티는 여성이 있을 자리는 가정이지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영역을 분리하고자 하는 단호한 태도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여성화가들이 아틀리에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P28

 남성 예술가들은 남성의 육체를 찬미하는 가운데 자기들끼리만 교류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 유명한 비트루브(Vinuv)』(나체의 한남자가 팔다리를 넓게 벌린 채로 사각형 안에 서 있고, 이 사각형은 다시둥그런 원에 둘러싸여 있음)에서 스케치한 것처럼, 조화로운 균형을 갖춘 육체의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성뿐으로 파악되었다. 반면 여성의 몸에서는 어떠한 균형도 찾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여성의 몸은 심지어 동물의 몸과 동일한 단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당시의 한 설명에 의하면 여성과 동물에게는 ‘정신적인 의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남성 예술가들이 여성들과의 경쟁에서 느끼게 된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국가와 특히 교회 기관들은 여성들이 예술 활동을 위한 해부학적 연구를 넘어서, 그들 자신의 육체와 성적 욕구에 대면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아가 르네상스의 계몽적 정신은 정반대의 반향으로서 종교재판이라는 재앙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1487년 베네딕트 파의 수도사인 슈프렝어(Sprenger)와 인스티토리스(Institoris)에 의해 집필된 마녀의 망치(Hexenhammer)라는책이 발표되었다. 이 책은 교회가 자신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일에 법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교회는 광범위한 사회적 영역에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에 제동을 걸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산파라는 직업은 언제나 눈엣 가시였다. 그것은 이들이 전통적으로 이교도적인 숭배 의식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의식의 중심에는 보통 여신에 대한 숭배가 놓여 있었다. - P29

볼로냐 출신의 또 한 사람의 여성 예술가 역시 높은 명성을얻을 수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화가 라비니아 폰타나(LaviniaFontana 1552~1614)였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이주했다. 라비니아 폰타나는 화가 프로스페로 폰타나의 딸이었고 아버지의 아틀리에에서 교육을 받은 최초의여성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볼로냐를 감싸고 있던 여성을 환대하는 풍토 외에도 소포니스바 앙구이솔라가 누렸던명성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겨우 17세 연상이었던 앙구이솔라는 폰타나에게 많은 자극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폰타나의 명성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화가로서벌어들이는 수입도 함께 증가했다. 그녀는 로마에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교황 파울 5세가 자신의 초상화를그리게 할 정도로 초상화가로서의 명성도 아주 높았다. 그녀는 죽기 바로 직전에 매우 특별한 종류의 영예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의 초상이 들어간 동전이 볼로냐 출신의 펠리체카소니 (Felice Casoni)에 의해 주조된 것이다. 동전에는 라비니아폰타나가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있다.
소포니스바 앙구이솔라와 라비니아 폰타나는 16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여성 예술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누렸던 높은 명성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들이 받은 특별한 교육 덕분이기도 했는데......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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