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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 - 프랑스 사회사상, 그 절망의 시대: 1930~1960 ㅣ 개마고원 서구 지성사 3부작 2
스튜어트 휴즈 지음, 김병익 옮김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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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장 서론 : 막다른 길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그 자체의 상처─프랑스는 돌이킬 수 없는 젊음의 손실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도 상처가 컸다─말고도, 4년동안의 유혈은 프랑스인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폭넓은 회의를 키웠다. 그것은 서서히 다가왔다. 양심에 대한 프랑스인의 사회적·정치적 검증이 1930년대로 미루어진 행위의 지체 효과가 문화 영역에도 뚜렷이 나타났다. 봄날처럼 화사한 가을의 영광인 듯 프랑스인과 그 바깥 사람들을 현혹시킨 우월감의 이미지들이 이미 사방에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환상의 첫 광휘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루르지역 점령의 불투명한 결과와 1924년 좌파의 총선 승리는 프랑스가 강대국 반열로부터 밀려난 것과 국민적 에너지가 내향화하는 것의 첫 표징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정치 생활의 측면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다음 5년은 본질적으로 여전히 자기 만족과 자부심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프랑스인을 전래의 안정으로부터 뒤흔들어놓은 것은 대공황과 히틀러의 출현이었다."(19)
"프랑스가 폭넓은 지적 교류에서 밀려나게 된 것은 훨씬 더 오래전, 그러니까 1930년대 초부터일 것이다. 고유의 토착적인 가치들을 향한 프랑스인의 몰두가 성마른 방어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문화적 자부심이야말로 군사 점령이라는 오랜 시련을 거치면서도 그들을 지탱해준 보이지 않은 힘 가운데 하나였다. 1940년 이전에는 프랑스인들이 망명할 이유가 없었다. 그 이후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게다가 자진 망명이란 생각 전반에 대해서는 179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편견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국내에 남았다. 다만 마리탱과 생-텍쥐페리 같은 몇몇 지도적 작가들만이 미국에서 얼마 동안 살았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거대한 사상의 교류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의 전통─그들이 언제나 중심 전통이었다고 생각해온─이 갑작스레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되었던 것이다."(24-6)
"뒤르켐의 사고 속에 칸트(도덕)와 콩트(실증과학)가 결합했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지적인 문제─그 스스로 몰두하고 제자들에게 권고하는 경험론적 작업을,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여러 사상들의 추상적 도식화 노력에 접합시키려는 소망에 모순이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뒤르켐 그리고 그와 비슷한 사람들은 프랑스 제3공화국에 뜨거운 충성심을 키웠는데 이 공화국은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유·민주주의·관용 그리고 인간적 행위의 위대한 추상들이 이룬 구현체였다." "그러나 제3공화국의 가치들과의 밀접한 관련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희미해졌고 또한 그 꽃도 사라졌다." "적어도, 뒤르켐과 그의 상속자들의 가치체계는 이제 도덕적으로 공허하게 보였다. 소르본의 저명인사들이 외부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며 얼빠져 보였는지를 음미하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사르트르 같은 젊은 철학자가 프랑스의 기성 지식층에 대해 가진 분노─구토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30-2)
2장 역사가와 사회질서
"독일이나 영미 세계에서는 최근까지 미슐레를 전혀 위대한 역사가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조심성이 없었고 너무도 '문학적'이었으며─스타일과 정신에서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프랑스인에게, 특히 프랑스의 전문 사학자들에게 미슐레를 재발굴하려는 자극은 강렬했다. 프랑스 민중에게 숨어 있는 거대한 힘에 가장 뛰어난 찬사의 글을 바친 이 저자를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그들은 이미 확립된 독일적 방법론의 추종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페브르는 그가 미슐레를 스승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신은 미슐레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그는 그 특유의 활력과 아이러니로 독자들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우리는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가 원하는 바는 〈또 하나의 미슐레─그러나 보다 강한 비판 정신을 갖고 보다 더 잘 갖춘 미슐레 (···) 그처럼 직감적이되 그러나 창조적 천재성 때문에 무절제해지지 않은 미슐레〉가 되는 것이었다."(40-1)
"1929년, 페브르와 블로크는 『연보』를 창간하여 경제와 사회, 지리학과 심리학 모두를 하나로 묶는 폭넓은 기반의 역사학을 위한 광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페브르는 이제 경제·사회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완전히 '통일'된, 수식어 없는 역사만이─다시 말해 〈다른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과 다양한 창조들에 대한 과학적 방법으로 수행된 연구〉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연구는 성격상 분명히 '사회적'이다. 페브르는 정치·외교의 연대사가年代史家들이 마치 피지배자들의 보다 깊고 보다 장구한 욕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통치자들의 고급 정책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공격해왔다. 그는 사상사가들에 대해서도 거의 비슷할 정도로 신랄했다. 이들 역시 추상적 개념들이 발생하게 된 정서적 분위기는 참조하지 않고 진공 속에서 그것들을 취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환경' '심성' 분위기'─이것들은 블로크와 페브르가 스스로의 과제를 수행하며 내놓은 용어들이었다."(63)
"『역사가의 재능』은 블로크가 이미 그의 주요 저서에 적용했던 여러 절차들─특히 『프랑스 농촌사의 근본 성격』에서 발전된, 현재의 관찰을 과거에 외삽外揷하는 방법, 그리고 『기적의 군주들』에서처럼 분명한 허위 뒤에 숨은 심리적 실체의 탐색─을 요약했다. 이 같은 구체적 사항들에 대해 블로크의 이 소책자는 엄밀하고 명쾌하다. 또한 역사가에 대한 요구들도 아주 또렷하다. 〈그처럼 많은 역사가들의 잇따른 태도에는 매우 기이한 모순이 있다. 어떤 인간행위가 실제로 일어났는가 안 일어났는가를 확인하는 문제일 때에는 그들은 얼마든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행위가 있게 된 이유로 넘어가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반대쪽보다 더도 덜도 아닌 진실성밖에 없는 상투적인 심리학의 한마디 격언에 근거한 가장 단순한 외형만으로도 만족해버린다.〉" "(그러나 저자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역사가의 재능』은 역사 설명 작업에 부딪히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난해한 암시만 남겨놓았다."(71-2)
"페브르의 콜레주 드 프랑스 후계자는 16세기의 지중해 연안국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그에게서 걸작이라고 평가받은 브로델이었다." "이 방대한 부피의 연구서에 서술된 지리와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신선한 관찰은 매혹적이리만큼 정밀하고 생생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초점이 없었다. 이 저자는 그가 〈정열적으로 사랑한〉 지역에 대한 20년에 걸친 연구과정에서 얻은 갖가지 잡다한 지식을 마구 쓸어넣었다." "브로델의 저서에는 중요한 세 부분─지리·사회 그리고 '사건'을 연속적으로 처리하는─이 결코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논조는 통계적인 것과 시적인 것 사이를 잘못 오가며 불안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페브르와 브로델을 지침으로 삼은 젊은 역사학자들이 이루어놓은 연구들의 상당수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었다. 양적으로 엄청나게 길게 늘어난 규모와 낭만적 비상을 이루는 풍요한 운문韻文과의 상호 교차─이것이 새로운 세대가 페브르의 방법을 이해한 방식이었다."(77-8)
"크로체와 베버는, 페브르도 그랬지만, 위대한 역사학 저술은 필연적으로 역사가 자신의 편에서 이루어진 열정적 참여로부터 탄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덧붙여 역사가는 반대편 또는 경쟁자편의 지속적인 참여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충분한 '객관성'과 분별력을 갖고 스스로의 가치관을 음미할 때에만 단순한 파쟁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기상대화' 과정을 블로크와 페브르는 결코 실천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닥친 삶의 선택은 절대로 불투명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너무나 뚜렷한 양심을 갖고 있었다." "블로크와 페브르는 19세기에 파편화한 인간의 연구에 새로운 통일성을 부여하려 했고─부분적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념형의 관계 설명에 대한 이론에 맞서서 의미의 핵심을 모색했다. 그들은 역사를 〈소급적 문화인류학〉으로 재정의하고,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이웃과 구별되는, 어떤 사회의 사고와 감정이 지닌 표현과 관용구, 양식에 강조점을 두었다."(81-2)
3장 가톨릭과 인간 조건
"지적 엘리트들의 종교적 관심으로의 회귀는 고립적이며 비개성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에서만 의례적인 것이었다.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가톨리시즘의─혹은 기독교 전반의─처지란 19세기 후반과 별다름 없이 지적인 열정의 주류에서 떨어진 변두리에 불과했다. 명목상으로 가톨릭이란 점에서 프랑스와 비슷한 이탈리아에서는 사상가 거의 대부분이 교회의 바깥에 있었다. 독일 및 미국처럼 종교가 혼합된 나라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 신자들보다 분명한 우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실상,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부활은 프랑스 가톨릭 내에서 일어나고 있던 것과 견줄 수 있는 1920년대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폭은 매우 좁았다. 바르트의 신新정통주의는 프랑스의 신토마스주의보다 더 진지했지만 심미적인 것과의 관련 또는 제휴는 거의 없었다. 오직 프랑스에서만 가톨릭 사상가들이 지적·문화적 대화의 중심부에서 그들의 우주관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86-7)
"『진정한 휴머니즘』(1934)에서 마리탱이 제시하는 것은 중세의 영웅적·성자적 가치관을 어떻게 현대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용어로 번역하는가라는 문제였다. 마리탱은 아퀴나스의 방법론에 근거를 두고 이 스승의 건축적 질서로 전개시켜 그가 제안한 휴머니즘의 연원을 추적하고 기독교 사회에 대한 비전을 미래 속으로 기투企投했다. 그는 지난 두 세기 동안의 대중 정치적 신앙에서 무신론의 침식작용만 본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역사적 역할이란 역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죄악을 품은 자들이 사실은 은혜로운 변화의 예고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예가 마르크스로, 그의 '냉소주의'는 프로이트처럼 상당히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주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가치관이 지닌 물질주의와 무자비성을 폭로해주었고 노동자 계급을 존엄성과 굴욕감의 인식으로 일깨워주었다. 기독교인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체화하는 것이었다."(97)
# 기투企投 : 사르트르나 하이데거 실존주의의 기본 개념으로서,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4장 영웅주의의 추구
"1930년대 소설에서 보이는 새로운 진지성의 음조는 오직 시대의 중압이란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서구 세계를 움켜잡은 일련의 복합적인 위기들─경제적, 외교적, 이념적─은 어김없이 각성의 효과를 갖고 있었다. 영국 혹은 미국에서도 작가들의 반응은 아주 비슷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이례적인 정열로 다가왔다. 오직 프랑스에서만은 상반된 영웅적 가치의 확인과 부정이 지적 내란의 영역으로 소용돌이쳤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역사와 종교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인식이 행해졌다. 유독 프랑스 작가들만은 드골이 역사의 〈파도〉라고 말했음직한 격동 속에 처한 자기 자신과 자기 국민들의 입장을 설명할 의무를 느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기 선조들의 종교─그들 주위의 모든 것에 새로운 생기의 징표를 부여하는─를 심사숙고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역사와 종교가 살아 있는 실체였다. 교육받은 독자층으로부터 관심을 얻으려는 작가들이라면 그것들에 무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124-5)
"1930년대로 넘어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선배 작가들은 이 사회의 질서(내적 논리)를 발견했지만, 후배 작가들은 모순을─인간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과 불합리한 비극으로 지배되는 세계를 보았다. 〈숙명성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그들은 〈역사란 구제할 수 없이 공허한 것, 진보의 은밀한 법칙 혹은 은총의 뜻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순수한 우연과 우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근원적인 비관주의〉, 의미나 최종 목표는 집단 모험으로 기울어진 〈개인 의식의 번뇌〉─따라서 가톨릭의 지적 혁신과 그 뒤에 따라오는 실존주의 저술 사이에 다리를 놓는 불안의 문학이 나타난다. 이 번뇌의 음조는 마르셀이 제시한 가톨릭판 실존주의의 특색이 되어 앞으로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그것은 1930년대 문학에 팽배했던 긴장과 급박의 분위기 속에 뚜렷이 표명되었다. 이 모든 표현들에 공통된 것은 도덕적 파탄 의식과 그것을 포착할 상징적 공식에 대한 절망적 탐색이었다."(126)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새로운 주제 가운데 영웅주의의 추구는 가장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무관심한 독자들에게는 거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다양한 추구들 간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영웅적 이상은 서구 문학 전통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특이하게도 사회 전반이 의기소침해진 전쟁 시기에 이념계 전반에 걸쳐 동시에 부활한 것이다. 당시 가장 광범위하게 번져오는 확실한 모습들은 친파쇼적 우파의 지지자들이었다. 몽테를랑이나 드리외 라 로셸의 작품들에서 반反의회동맹의 젊은 열성파들은 귀족주의적 열망과 대중에 대한 경멸로 동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몽테를랑에게는 배음으로 깔린 자조와 괴팍한 허무주의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젊은이들의 모델로서는 자격을 잃어버렸다. 해방이 된 후 영웅적 이상의 구현체로 나타난 사람들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거나 그것과 연대성을 선언한 사람들─베르나노스, 말로와 생-텍쥐페리 같은─과 참여소설의 수줍은 선구자인 마르탱 뒤 가르였다."(127)
5장 현상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죽음의 거부, 고상한 인간 행위의 기록을 통한 역사에의 각인─전쟁과 점령과 저항의 시대에 있던 이런 것들이 영웅적 이상의 유일한 선언은 아니었다. 사회정의에 대한 갈증 또한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고 나치 통치의 가혹성이 더욱 심해지면서 그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더 굳게 단결하고 공동의 도덕적 목표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해방의 순간이 다가오자 새로운 프랑스를 어떻게 갱신하느냐는 문제가 절박하게 제기되었다." "두 세대 전의 드레퓌스 사건 때처럼 레지스탕스는 과거와 미래를 심판할 판단 기준, 즉 규준점을 마련했다. 이런 심사 아래 우파 이론가들이 붕괴되었고 이들의 대변자들이 개척한 언어적 고상함도 붕괴되었다. 레지스탕스의 관점으로 보면 언어적 세련성이란 의심스런 여운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들은 세계의 비참과 사회적 갈등을 부드러운 표현 속으로 숨기는 것으로 보였다. 레지스탕스의 글은 전쟁의 고통으로 드러난 인간의 실체를 잔인하고 공포스럽게 재현하는 것이었다."(178-9)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의 기억은 하나의 숭배였고, 그 뒤를 이은 현실에 부닥쳐 그 주요 모습들이 녹슬어버리긴 하지만, 소렐 식의, 하나의 사회적 신화였다. 전쟁 말기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여론을 뒤흔든 갖가지 '진보된 '사회운동이나 사상 조류들은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거의 다 레지스탕스에서 나왔다. 전위적 지식인들의 영역에서 레지스탕스의 승리는 자기 비판과 그 승리를 기반으로 한 전제들의 검토를 통해 스스로를 옹호했다. 레지스탕스의 고참들이 동료 시인들 혹은 그들과 상응하는 해외 지식인들 간에 자신들에 대한 몰이해와 적의가 높아가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지방주의가 강화되고 엄격한 자기 합리화가 강조되었다. 그 결과는 새로운 고립이었다. 레지스탕스 이후의 사회사상에 주조를 이루는 신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적 추상의 야릇한 결합이 프랑스 지식인들로부터 각층의 세대들에게 부여된 마지막의, 가장 집중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큰 도덕적 탐구로 곧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180)
"좌파의 새로운 정통파들 사이에 레지스탕스에의 향수감이 전후의 첫 10년 동안을 지배했다. 그러나 공공사업의 국유화와 사회복지 제도의 광범한 확대가 실시된 이후에 프랑스는 중산계층의 의회민주주의라는 낯익은 절차로 돌아갔다." "현실적으로 국민 대다수가 레지스탕스 노선에 추종하기를 거부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어떻든 레지스탕스는 열성적인 소수파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관망주의 태도를 취했다. 최후의 승리가 레지스탕스 우파에게 돌아갔음이 판명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은 것은 아니었다. 레지스탕스 퇴역자들이 시민들로부터 불쾌감을 사게 된 것이 아마도 역사적 증거일 것이다. 1944년과 1945년의 승리로 갖게 된 도덕적 우월감으로 치장한 영웅적 소수파들을 냉정한 다수파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우월감은 레지스탕스 중 상당수가 드러낸 정치적 무능력 때문에 이중으로 부당하게 보였다."(188-9)
"1947년─혹은 소련의 강제노동에 대해 격론이 벌어지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늦어도 1950년─에 이르러 레지스탕스 작가들은 주체할 수 없이 분열되었다. 카뮈를 비롯해 상당수의 작가들은 약간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정치적 중도파의 통치와 미국에의 의존을 순응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계열 중 좌파 지식인들은 드골주의도, 의회민주주의도 선택하지 않았다. 이들은 마찬가지로 동과 서 사이에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으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가장 엄격하게 존중하는 사람들은 중립정책을 지지했는데 이 중립정책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소련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바, 그 제창자들은 공산주의 작가들과의 유대를 깨뜨리는 것을 반대했을뿐더러 정치적 중용과 서구와의 연대라는 정부 노선에 집요하게 대항했다. 이 같은 입장으로 영국과 미국 지식사회의 주류들과 소원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1950년대가 시작되면서 프랑스는 다시 한 번 문화적 고립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189)
"사르트르의 대자對自, pour soi는 첫눈에 보면 서양의 철학적·심리학적 전통에 속하는 정신이나 영혼 혹은 자아나 의식과 닮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모두와 다른 것으로, 그것은 정의定義가 없다─다시 말해 무無라는 용어로 정의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비개인적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가장 작은 존재의 미립자〉를 거기에 부여한다는 것은 〈결정주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예비한다는 것〉, 따라서 〈순수하고 투명한 의식〉의 자유를 깨뜨린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를 향한 사르트르의 완강한 탐구는 그 자체의 부정으로 끝난다. 모든 내용물을 〈대자로부터 비워내는 절대적 과정〉 속에서 그는 〈그 자유를 죽여버렸다.〉 의식이 무로 수렴됨으로써 유일하게 남은 근거는 유물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적 정의를 고수하는 데 실패했다. 자아가 없다면, 인간 개체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실존적 심리학'이란 그의 사상 전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209)
"제2차 세계대전까지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 지도자들은 마르크스 이론의 간략한 개념 정도로 만족했고 그 이론을 독특한 프랑스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프랑스인이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을 따라잡으려면 거의 1세대 기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망명한 러시아인 코제브가 행한 1936년의 헤겔 강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의 프랑스 청년들은 시기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속편 격으로 마르크스에 다가갔다. 그것도 직접 그에게로 간 것이 아니라 영미에서 경제 불황이 일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걸맞지 않게 헤겔을 거쳐 그에게로 간 것이었다. 헤겔을 거친 접근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프랑스인의 인식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관념주의로 만들었다. 독일의 추상성에 대한 이러한 편향은, 몇 년 후 특히 점령기 중에, 전혀 비非마르크스적인 후설과 하이데거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실존주의적 용어로 이해하게끔 촉진했을 때 다시 확인되었다."(214-5)
"메를로-퐁티의 사회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인간 존재의 관점은 정신과 육체를 불가분의 것으로 보고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의 전前의식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 관계가 지닌 무한한 복합성에 대해 멀리서나마 설명해줄 적절한 공리─그것이 추상적이든 경험적이든─를 전혀 설정할 수 없는 삶에 충격을 받았다. 메를로-퐁티는 마르셀처럼 자신의 비밀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세계 속을 더듬어 길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세계에는 종교적 신앙이라는 지침도 없었다. 인간 세계란 우연의, 애매모호의 영역이며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의미로 충만해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 진실이 결여된, 인간적 의미이다. 이 같은 철학은 현상의 서술에서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엄격한 객관주의와 결합하는 것이며, 그 근원적인 태도는 인간 모험의 경이로운 다양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생애 말기에 메를로-퐁티는 현상의 세계를 뛰어올라 조감도를 만들려는 어떤 철학적·역사적 이론에도 적개심을 보였다."(219)
"메를로-퐁티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의 몸뚱이〉라고 명명한 인식, 곧 존재의 물질적 하부 구조와 그에 관해 인간이 형성한 사고와의 상호 관계를 발견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사고 방법이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훨씬 분명하게 그가 '실존철학'이라고 부르려는 것과 마르크스주의를 연결지었다. 그가 보기에, 헤겔과 마르크스는 본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 '원초적 실존주의자'였다. 전자는 그의 '과격한 철학'을 관념주의자의 수동적 주체성에서가 아니라 간주체성間主體性의 역동적인 사상 위에 수립했으며, 후자는 자신의 드러난 체계를 뛰어넘어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로 자신의 삶을 참여시킬 때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인간관계의 개념을 설정했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전혀 추상적인 점이 없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 계급 간의 구체적인 관계를 다루며, 그것이 가르치는 도덕성은 형식 윤리학자들과 대립되는 진정한 책임과 정열의 도덕이었다."(222-3)
6장 출구
"카뮈의 레지스탕스 체험은 이후의 그에 관한 많은 오해─사후에까지─의 근원이 되었다. 그가 획득한 지도적 지위, 그리고 해방 후 3년 동안 계속 지켜온 『콩바』 지의 편집자 자리로 인해 그는 공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거슬러가며 모든 주제의 공적 논쟁에 발언해야 할 의무를 느꼈고 그중 상당수는 본래의 관심 영역 밖의 일이었다. 카뮈는 기질에서나 교육에서나 절대로 이념가나 정치 비평가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 문학인이었고 그 다음이 철학자, 그것도 시적이며 직관적인 철학자였다. 그가 좌파에 이끌린 것은 타고난 윤리적 관용성 때문이며, 이미 자기 고향의 토착민들에 대한 차별에서 경험한 성향이기도 하다. 나치의 범죄는 억압에 대한 숨은 분노와 증오를 결정적인 격분으로 향하게 했으며, 〈순결성의 암살〉이라근 비극 때문에 지하투쟁으로 정력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 도덕적 분노는 거의 언제나 잔혹과 불의에 지상명령적 비판을 가하는 데서 그 분출구를 찾았다."(260)
"해방 직후기에 카뮈 주변으로 몰려든 가장 집요한 전설 중 하나는 그가 실존주의자이며 사르트르의 전우라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에게 레지스탕스란 억압받은 사람들 편에 선 필생의 싸움의 시작이었다. 전후의 평온기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자유와 평등을 위한 범세계적인 투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카뮈에게는 전쟁과 점령, 레지스탕스의 체험은 인간 규범을 넘어선 지옥과 같은 것이며, 그래서 그는 자신이 쫓겨난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를 열망했다. 이념적 동기에 목숨을 맡기는 것을 그는 비정상적인 편법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정당화되고 또 그럴 때나 요구되는 편법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로든 인식의 모든 능력을 실현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르트르가 (전후에) 더욱더 투사적이고 단호해질 때─동시에 공산당에 더욱 접근해갈 때 카뮈는 해방 직후 옳음과 그름의 극단적인 양분 태도를 풀어가면서 관용과 자유제도라는 서구 전통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261-2)
"블로크와 페브르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에게 그 무한한 다양성을 부여하는 연구모형을 개발하는 데 깊은, 거의 강박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식한 바를 서술하기에 가장 적합한 메타포를 흐름에서가 아니라 구조에서 발견했다. 실제로 그는 이런 유형의 사회연구에서 그의 선배 누구보다도 더 멀리 구조의 개념을 밀고 나갔다. 그는 또한 블로크나 페브르와 달리 자기 작업을 서구사회의 분석으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생-텍쥐페리나 말로 같은 창작 문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바다 건너 이민족의 가치관을 열린 마음으로 대면함으로써 프랑스의 전투적인 자민족 우월주의에 도전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말로처럼 비서구사회가 '역사 없이' (혹은 반反역사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의 연구에서 주인공이 될 '원시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사고함으로써 방법적 생기와 철저성에서 영웅주의 작가들보다 훨씬 더 진전하고 있었다."(291)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에 대해서만 주목하며 그 의미들을 철저히 꿰뚫어보는 중일지라도 감정이 끓어오를 때에는 서슴없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발언한다. 그래서 서구 기술의 파괴력 때문에 태평양 제도를 〈정지한 항공모함〉으로 바꾸어놓고 그 〈오물을 (···) 인간의 얼굴에〉 뿌려놓는 데 대해 뜨거운 분개심으로 고발할 수 있었고 〈사라진 진실을 찾도록〉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자기 직업의 아이러니에 애통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의 폭넓은 영향력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은, 자기 재능을 〈생생하고도 엄격한 과학 직업을 수행하는 데 바치는 한편, 동시에 이 작업을 반성하고 그 방법론을 검토하며 그것으로부터 철학적 요소들을 끌어내고, 그러는 가운데, 인간을 혐오하면서도 친구가 되는 일종의 루소와 같은 인물로 남으면서 때로 불교에서 연유한 영혼의 해방과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한 경제적 해방을 성취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을 화해시키는 꿈꾸는 사람〉이라는 데 있다."(305)
"1960년대의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들은 그의 연구에서 모럴리스트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그의 구조적 방법론에만 절대적인 관심을 보였다." "언어·논리 그리고 약호화가 그 자체의 목적이 되면서 프랑스 사상은 〈30년 동안의 지체로 논리적 실증주의의 위기〉에 부닥친다. 이는 곧 한 세대 전에 영미 철학계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변화를 겪는 셈이었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그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구조주의자들의 저술에는 훌륭한 분석철학의 영문 저서에서 보여주는 문학적 취향과 담화체 문체가 부족했다. 그것은 지나치게 토론적이고 지나치게 현학적이며 감정적이고 과장적이며 비의적인 말놀이─그 말의 가장 나쁜 뜻에서의 '지식인'적이었다. 사회사상이라는 수식어로 비추어보면 구조주의 혁명은 철학이란 엄격성 아래 오랜 프랑스적 정신의 폐해를 새로이 도입하는 감상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리고 이런 약점들 때문에 푸코와 같은 사람이 보여주었던 풍요함과 독창성마저 흐려져버렸다."(3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