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덮기 -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
욘 엘스터 지음, 최용주 옮김 / 진인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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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부 이행기 정의의 세계


제1장 기원전 411년과 403년의 아테네


"완전한 형태의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시민들이 민회의 결정을 실행할 사람들─추첨이든 선출이든 모든 행정관─에게 행사하는 통제의 정도일 것이다." "BC 5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잇따른 개혁으로 통제되지 않은 대중권력이 남용될 개연성이 점점 커졌다. 마틴 오스트발트 저작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인들은 인민으로서 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 법 지배의 골격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발트가 기술한 바와 같이, 한동안 〈페리클레스의 지적, 심리적, 그리고 정치적 통찰력이 비이성적 정책이 집행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력이 창출하는 결과만으로 제도의 견고함을 판단할 수는 없다. 계몽된 정치가가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약하고 신중하지 못한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제도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체제 안에 몇몇 통제장치를 갖추고는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군사적 결정 영역에서는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18-9)


"411년의 정권교체는 정권 내부붕괴와 반란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403년에는 스파르타의 통제 아래 타협적 이행이 있었다." "411년 이행기 정의의 주된 목적은 응보적 조치에 있었다. 참주들의 처형과 관련해서 그들을 투옥해서 무해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아테네에는 감옥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무력화하는 것이 주된 동기였을 것이다. 403년에는 응보적 조치와 억제 효과도 작용했을 수 있으나, 주된 목표는 화해였다. 광범위하게 소추를 면제하고 사면이 곤란한 사람에게 망명선택권을 제공하는 등 화해조약을 통해 매우 온건한 형태의 이행기 정의를 구현했다. 아테네사람들은 이전 경험을 통해 가혹한 처벌이 원래 목적에 반해 억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온건한 조치는 ① 스파르타에 의해 주어졌거나, ② 권력을 포기한 대가로 참주들이 요구조건으로 내걸었거나 ③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37-8)


"411년 이후, 참주들은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군인들은 400인체제 기간 동안 아테네에 남아있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403년 이후, 살인교사는 사면대상이었지만, 그 살인에 직접 가담한 경우는 제외되었다. 30인 폭군이 통치하는 동안, 기병이나 평의회 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으면 공직후보자가 될 수 없었다. 위법행위(그리고 위법행위로 얻은 이득)에 대한 제재는 처형, 벌금, 면직, 시민 및 정치적 권리의 상실 등이었다. 403년의 화해조약은 참주들에게 추방을 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비록 자발적으로 선택했더라도 제재의 일종으로 받아들였다." "이행기 정의는 사적 개인의 실천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기소, 공직후보자에 대한 이의제기, 임기만료된 공직자에 대한 고발 등이 있다. 배심원들은 대체로 시민들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했지만, 403년 이후 사후조사를 담당하는 배심원은 참주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성되었다. 이것을 〈패자의 정의〉라 부를 수 있다."(38-9)


"403년 후 승리한 민주주의자들은 노예와 그들 편에서 싸운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을 폐지할 때 자제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도시의 권력균형이 패배한 참주들을 도외시하는 것을 방지했다. 참주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사면조약 위반으로 연결되는 소송제기의 위험부담을 늘리는 절차를 도입하여 온건한 조치를 더 강화했다. 이때 소급입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행기 정의는 합법적 형태로 수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행기 정의는 사법개혁과 헌정질서 개혁으로 보완되었다. 411년 이후, 주요 목표는 쿠데타를 획책하려는 참주들에게 부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403년 이후, 목표는 과거에 전권을 행사한 민회에 제약을 가하여 의원들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인센티브를 제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403년 이후에는 추방됐던 민주주의자들이 몰수당한 재산을 반환받을 수 있는 조항을 마련했다. 다만 개인에게 팔린 유동자산(노예를 포함하여)은 돌려받을 수 없었다."(39-40)


제2장 프랑스의 1814, 1815년 왕정복고


"두 차례의 왕정복고는 타협적 이행이었고, 연합국 세력의 후원 아래 전개되었다. 연합국 세력은 또한 이행기 정의를 통제했는데, 한편으로(1814년) 복귀하는 부르봉 왕조를 자제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1815년) 나폴레옹 지지자들의 숙정을 요구했다. 1814년 이행을 수행해야 했던 나폴레옹 정권 하 상원의원들은 과거의 정치적 행위와 견해들에 대한 사면, 처벌의 형태로서 몰수 효력의 폐지, 혁명기간 동안에 몰수되어 개인에게 매각된 자산 인정 등을 요구하면서 자기이익 중심적 동기에 따라 행동했다. 이는 사회적 평화와 화해를 열망하던 루이 18세의 의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국유재산의 전前소유자에 대한 배상을 제안하거나 지지투표한 사람들 일부는 이기심이 동기가 되기도 했다. 재산구매자는 배상이 소유권을 둘러싼 의혹과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자산가치가 높아지게 되므로 이해관계가 동일했다. 자유주의자만이 구입자들의 불안에 의존(그리고 자극)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상충했다."(69-70)


"배상계획은 여러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① 재산이 매각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재산을 돌려받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금전적 보상만 받았다. ② 몰수된 교회재산은 매각되지 않았음에도 반환되지 않았다. ③ 보상은 몰수된 현물자산에만 한정되었고, 훼손된 자산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양한 배상계획을 여러 주장들이 옹호했다. ① 이주자에 대한 배상은 대부분 엄격하게 자격의 문제와 관련되었다. ② 그 중 일부, 재산의 원상회복 또는 구입자가 조성한 기금으로 배상 받는 행위는 구입자에 대한 징벌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③ 혁명에서 피해를 입은 여러 집단들에 대한 차등적 대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통을 가장 심하게 겪은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④ 일부는 또한 자격이나 과거의 고통보다는 현재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⑤ 많은 사람들은 국가이익에 기여하는 복구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70-1)


"1815년 6월 28일 루이 18세는 징벌적 조치를 의회에 위임한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연합국 세력과 이주자의 압력으로 그는 7월 24일에 제한적이지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로 하원을 장악하게 된 급진왕당파는 루이 18세에게 모든 '국왕살해 재범자'들을 축출할 압박했고, 더 급진적인 조치를 도입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백일천하 기간 중 나폴레옹에 합세한 사람들에 대한 이주자들의 1815년의 분노는 국왕살해(1793년) 가담자에 대한 이전(1814년)의 처벌요구보다 더 강했다. 정부는 공공행정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을 단행했다. 현직에 남아 있던 추종자 때문에 나폴레옹의 복귀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정부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1815년 여름의 〈백색테러〉에서 수백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대 받았다. 루이 18세는 그의 조카가 남부에서 자신과 대립하는 독립행정부를 수립하면서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잠시 잃었다."(71)


제3장 이행기 정의의 새로운 세계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나라들이 독립전쟁에 성공하면 대체로 식민지권력과 함께 했던 내부부역자들을 처벌대상으로 삼는다. 전쟁이 끝난 후 그 세력은 이전 동맹 상황을 완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한 예로 미국과 알제리의 독립전쟁을 잠깐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 내부협력자들은 영국정부 충성파(Loyalist) 또는 〈토리당〉이었고, 알제리에서는 〈하르키스〉(harkis)였다. 각각의 경우, 이 협력자들은 전 인구의 15% 정도에 달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국에서 적과 협력했던 사람들의 비율보다 훨씬 많았다. 충성파와 하르키스파는 각각의 평화조약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미국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알제리에서는 아예 무시되었다. 이런 장기화된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건 어렵다. 알제리해방전선(FLN)은 의도적으로 온건파 알제리인들과 프랑스인들을 암살대상으로 지목했다. 미국에서도 역시 〈무관심과 중립은 지지받을 입장이 아니었다.〉"(81-2)


# 하르키스 :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군대에 협력한 알제리 무슬림인들


"2차대전 이후 몇몇 국가에서는 〈국가모독〉이라는 새로운 범죄를 적용했다. 이 범죄는 〈국민박탈〉─즉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상실─의 형벌을 받는 하급반역의 한 형태였다. 프랑스에서 이 자격박탈은 투표권, 피선거권, 공공부문 취업금지, 법조계와 교적을 비롯하여 준공기업, 은행, 신문, 라디오 등의 분야 진출금지 등을 포함했다." "벨기에에서는 자격박탈의 범위에 정치적 권리를 포함하여 의사, 변호사, 성직자, 언론인, 교사직은 물론이고, 조직 형태와 관계없이 그 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법원이 부역자의 투표권, 피선거권, 군복무, 공무원 진출 등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고 특정분야로의 진출도 금지할 수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투표권, 피선거권, 병역의무가 박탈되고, 공공부문에 진출할 수 없고, 변호사와 의사 또는 기타 자격증이 필요한 직종과 교사, 성직자로 일할 수 없었으며, 영화, 극장, 신문사 등의 관리직과 경리직에도 진출할 수 없었다."(89-90)


"스페인은 민주주의 이행에서 이행기 정의를 실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유일한 사례다. 1976년 7월, 정부는 부분적 사면을 선언하여 약 400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다음으로, 〈1977년 10월의 사면법은 새롭게 들어선 민주정부가 의회 지지로 승인한 최초의 정치적 조치로 다음 두 가지를 달성했다. 첫째, 대부분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는데, 여기에는 폭력 혐의로 기소된 사람도 포함되었다. 둘째, 물러나는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전면적 기소중지를 승인했다.〉 또한 실직 공직자들의 복직과 연금지급을 승인했는데, 실직기간 중 받지 못한 급여는 보상하지 않았다. 비밀경찰의 기록은 전부 봉인했다(왜 소각하지 않았을까?). 이 법은 공산당 합법화와 새 헌법에 대한 합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과도기 협상의 일부였다. 스페인 사례는 헝가리나 폴란드 등에서 하나의 모델로 구상되기는 했으나, 과거를 문제삼지 않기로 한 이 타협적 결정을 실제로 직접적으로 모방한 사례는 없었다."(92-3)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이행은 대부분 퇴장하는 군사정권 인사들이 자신들의 면책을 보장받기 위해 벌인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는 군 간부들을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한 두 국가 중 하나이지만, 수많은 기소에 반발한 군부의 무력시위 이후 도입된 '기소전면금지법'과 '명령준수법'으로 대다수가 기소면제된 반면, 소수 고위급 장교만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볼리비아는 오랜 지연 끝에 몇몇 군 장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를 선고한 또 다른 국가다. 유죄선고를 받은 48명 중 11명만 실제로 수감되었고, 나머지는 도피했다." "브라질에서는 군장성들이 1978년에 자기사면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브라질의 민주주의로의 긴 여정이 1990년 카르도소 대통령 선출로 이어질 때까지 유효했다." "칠레에서는 피노체트가 설계한 상원, 국가안전보장회의, 헌법재판소 그리고 대법원으로 구성된 중추적 세력집단들이 민주적 개혁과 이행기 정의의 실행을 방해했다."(93-6)


"2차대전 이후 서유럽의 이행기 정의와─그리고 그 가해행위의 규모와─비교해볼 때, 탈공산주의 이행에서는 재판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몇몇 지도급 인사들이 기소되기는 했지만, 유죄판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탈공산주의 사회에서 공공부문 숙정은 여러 형태를 취했다. 구 동독에서는 부패관리 해고라는 전통적인 방식이 관찰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이 지역의 여러 국가들이 〈정화〉(lustration)라는 명목의 인적 청산 방식을 채택했다." "정화조치의 동기는─최소한 공식적인─보안분야에 몸담고 있던 고위급 공산당간부와 협력자들이 새로운 체제에서 중요직책을 맡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치는 해고, 자격상실, 또는 단순한 경력공개 등을 포함했다." "폴란드에서는 고위 선출직 또는 임명직 후보자는 1945년부터 1990년 사이에 자신이 〈적극적인 협력자〉였는가 여부를 선서해야 했다. 이를 인정하면 기록 공개 말고는 다른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98-100)


"남아프리카는 민주주의로의 타협적 이행의 산물인 진실화해위원회라는 독특한 과거청산 방식을 제시하였다." "사면(형사 및 민사소송 면제)은 신청인의 행동이 ① 악의나 개인적인 이익 추구가 아닌 정치적 동기로 이루어졌고, ② 그 행동을 촉발한 경우와 비례적으로 관련이 있음이 증명될 때 가능하다. 또한 신청인은 자신이 관여한 행위와 관련된 명령계통의 증거를 비롯한 범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사면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은 기소나 소송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소명 메커니즘은 자신의 행위가 ①과 ②의 조건을 만족한다고 주장하거나 완전한 진실을 말할 의사가 있다고 나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면청문회에서는 불법행위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가해자의 이름도 공개하였기 때문에 대중의 보복이 두려워서 신청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한 평가에 따르면 〈많은 수의 가해자들은 신청하지 않았다. 이것은 앞으로도 기소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03-4)


"민주주의 이행에 선행하는 독재체제는 국가 그 자체에서 기원하거나 아니면 외세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행기 정의의 과정은 새로운 체제가 스스로 시작하거나 아니면 외부의 퉁제 아래 진행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사회가 '스스로를 정리해야 하는' 이중으로 내생적인(내생적 독재 체제와 내생적 이행기 정의) 경우다. 이행 이후에도 구체제의 지도자와 행위자들은 여전히 사회조직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폭력수단이나 투표함을 이용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든 경제재건과 발전에 갖는 비중에서 기인하는 간접적인 방식이든 할 것 없이 그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사회는 아무리 결함이 있더라도 일단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열린 바다에서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법관들이 민주주의 이전 체제와 깊이 관여됐더라도 그들을 활용하거나 아니면 그들 중에서 가장 덜 타협적인 인물과 타협하는 것 외에는 실질적인 대안이 없을 수 있다."(105-7)


제2부 전환기 정의의 분석학


제4장 이행기 정의의 구조


"나는 (정의의 개념과 집행에 영향을 미치는) 동기의 삼분법─이성, 이익 그리고 감정─을 18세기 프랑스 도덕주의자들, 특히 라브뤼예르에서 차용한다." "프랑스 왕정복고의 경우, 현물배상을 원한 원소유자들에게 추상화된 신성한 재산권 개념(이성), 구입자들을 향한 복수의 욕구(감정), 그리고 재산을 되찾고 싶어하는 욕구(이익) 동기가 동시에 작용했다. 물론 이성적 동기가 사실은 감정이나 이익추구 동기의 반영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1789년 이후 왕당파 출신으로서 귀족도 이주자도 아닌 베르가세 역시 똑같이 현물보상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런 의구심이 다소 줄어든다. 1989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현물보상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사익을 기대하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익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평의 원칙을 주장한다 해서 그들을 위선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정말 그런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의 행위를 다른 맥락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122-3)


"정의실현의 욕구가 이행기 정의 행위자를 추동하는 여러 동기들 가운데 하나의 동기에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회에는 1차 동기에 메타동기를 유발하는 '동기화의 규범적 위계'(normative hierarchy of motivation)가 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의 선을 고취하는 열망이 가장 가치 있는 동기였으며, 두번째는 적에 대한 복수의 열망이고, 세번째는 사익추구, 그리고 질투의 동기가 최악으로 간주되었다. 동기의 위계를 전제할 때, 낮은 수준의 동기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마치 높은 수준의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가능한 한, 자신들의 참된 동기가 자신들에게 제시하는 그런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 사람은 개인적인 이익에 이끌려 행동하면서 동시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자기의 행동이 그런 동기에 이끌리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작동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1차동기화와 메타동기화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 각각 고유한 전략적 배열을 사용한다."(123)


# 이행기 정의의 제도적 유형

1. 사법적 정의

2. 행정적 정의(사법적 정의와 정치적 정의 사이의 연결지점)

3. 정치적 정의


"내가 〈순수한 정치적 정의〉라 부르는 유형은 새로운 정부(또는 집권세력)의 집행기구가 일방적으로 그리고 상대방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가해자를 지목하고 처리절차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1815년에 연합군세력이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로 유배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순수한 정치적 정의는 '극장재판'(show trials)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재판의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합법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연합국 간의 합의과정에서 소련은 재판정이 단지 주요전범의 형량만 결정하는 극장재판을 원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재판은 사법적 정의의 두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즉 적법절차의 준수와 재판결과의 불확실성(23명의 피고 중 3명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처럼)이 그것이다." "반면, 도쿄재판은 순수한 정치적 정의에 가장 근접한 사례다.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라는 용어는 도쿄재판에서 가장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125-7)


# 순수한 사법적 정의의 특징

1. 법을 가능한 한 모호하지 않게 규정해야 한다. 

2. 사법부는 정부의 다른 기구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3. 판사와 배심원들은 법을 해석할 때 편견이 없어야 한다.

4. 적법절차─변호사 선임 권리, 항소권, 무죄추정의 원칙, 반대심문과 공개 청문 등─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 이행기 정의의 행위자들

1. 가해자(wrongdoers)

2. 피해자(victims)

3. 가해행위의 수혜자(beneficiaries)

4. 가해행위를 막고자 노력한 조력자(helpers)

5. 가해자들에게 대항하고 투쟁한 저항자(resisters)

6. 가해자, 피해자, 조력자, 저항자도 아닌 중립자(neutrals)

7. 이행 이후 이행기 정의의 옹호자와 조직가인 촉진자(promoters)

8. 이행기 정의의 집행을 반대, 방해하고 지연하는 파괴자(wreckers)

※ 하나의 행위자는 연속적, 동시적으로 하나 이상의 행위자 범주에 중첩되어 나타날 수 있다.


"진주만 공습, 북아프리카, 스탈린그라드, 시실리 침공 이후 독일 점령국가의 많은 지도자들과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4년 봄, 출판계의 거물인 장 프로보스트는 거액의 자금을 레지스탕스에게 제공하고 받은 영수증을 고등법원에 증거로 제출해서 자신의 행위를 '속죄'받으려고 했다. 1944년 1월, 어느 피고는 감동적인 사직 편지(라발Laval이 수취인이었다)를 보냈는데 〈아마도 언젠가는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또 어떤 사람은 〈SS 대원들에게 동료들이 죽을 때 르노 공장의 옥상에 삼색기를 게양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영웅적인(의도는 불분명하지만) 행위를 인정받아 1944년 8월에 무죄방면되었다. 당시 고등법원에서 재판 받은 사람들 중에는 독일 패전이 가까워오자 재빨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해 무죄를 받은 경우도 제법 있었다."(145-6)


"저항자들은 그들 행동이 전체주의 정권의 복수를 촉발하면 가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종전이 다가오면서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지만, 1944년에 독일로부터 야만적인 보복행위를 당했던 이탈리아 중북부의 세 마을의 경우는 달랐다. 50년이 지난 후에 이뤄진 인터뷰에 따르면, 〈빨치산을 향한 세 마을 일부 주민들의 적대감은 여전했다.〉 이 마을에서 빨치산은 학살에 간접적 또는 심지어 '실제로' 책임이 있다고 간주됐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었다. 저항자들은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 또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저항조직에게 가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레지스탕스 집단은 〈독일에 정보를 제공한 부역자로서 '명백히' 반역자이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고 비난받았다. 각 집단은 자기들만의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집단의 블랙리스트가 다른 집단과 연계된 사람을 포함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151)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 가해행위를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1954년 독일헌법재판소가 1945년의 공직자 지위는 제3제국에 협조한 행위이므로 박탈해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대법원은 해당 관리들이 〈사실상 피해자인 자신들에게 가한 부당한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나치 가해자들도 다른 의미에서─요컨대 히틀러체제가 아니라 전후 처리 과정에서─피해자임을 강조했다. 1950년, 일부 연방의회 의원들은 나중의 모호한 기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엄격한 기준 때문에 이른 시기에 탈나치정책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에 〈나치에게 억압받은 사람에게 보상을 실시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된 용어인 '회복'(Wiedergutmachung)이 탈나치화 과정에서 해고당한 관리들의 복직에도 적용〉되었다. 결국 이런 나치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처음에는 히틀러, 나중에는 연합군에게 부당하게 피해받은 〈이중의 피해자〉로 간주했다."(151-2)


"새롭게 들어선 민주체제가 과거와 직면하게 되면 대답해야 할 수많은 질문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정의와 진실'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그 중 하나다.(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정의보다 진실을 우선시하는 결정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낮은 기소율과 과거의 가해행위에 대한 정보제공 간에는 간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 1982년 이후 설립되어 활동한 20여 개가 넘는 진실위원회는 대부분 가해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처벌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남아프리카진실화해위원회는 대표적인 예외인데, 여기서도 정치적 동기로 자행된 가혹행위는 기소를 면제했다. 엘살바도르의 진실위원회는 가해자 실명을 공개했으나, 위원회의 보고서가 발간된 지 5일만에 의회는 전면적인 사면을 결정했다. 브라질에서 상파울로 교구가 실명을 공개한 444명의 고문행위자들은 이미 사면된 상태였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1990년대에 등장한 〈진실재판〉은 사면법 때문에 기소로 이어지지 못했다."(162-3)


제5장 가해자


# 가해자의 범주 분류

1. 기회주의자 :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

2. 패배자 : 자기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로 비치기를 바라는 심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

3. 악당들 : 적이나 경쟁자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에 만족하는 자

4. 순응주의자 : 물질적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로 작동하는 자

5. 광신자 :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자

6. 원리주의자 : 광신자와 유사하지만 특정이념이나 가치가 없거나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경로를 변경하는 자

7. 무無사유자 : 무관심과 부주의가 행위의 동기를 형성하는 자


"대부분의 독재정권 하에서 하위직급 가해자는 순응자와 무사유자인 경우가 많은데, 주로 원리주의자들이 이들을 후원하고 결속한다. 엘리트 가해자들은 대부분 광신자들이다. 기회주의자와 악당은 가해자정권을 유지하는 동력이 아니라 거기 빌붙는 기생세력이다.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말기처럼 정권이 주로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면 체제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순응주의자와 무사유자들은 분노(anger)와 격분(indignation)을 유발하고, 광신자와 악당은 증오를 촉발하며, 기회주의자와 패배자는 경멸을 자극한다. 순응주의자와 무사유자는 그들의 '행위'가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데 반해서, 그 외 다른 유형은 그들의 '존재' 때문에 감정을 유발한다. 후자 중에서 광신자와 악당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증오를 유발하고, 기회주의자와 패배자는 허약하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된다. 가해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적 대응은 이러한 정서적 반응과 연계된 내재적 행위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204-5)


# 가해혐의의 반사실적(counterfactual) 정당화

1. 차악적 정당화 1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했을 것이며,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2. 차악적 정당화 2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일이 벌어졌을 것이며,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3. 도구적 정당화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억압적인 체제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대체적 변명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그걸 했을 것이다.

5. 강압의 변명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해당하거나 심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6. 무익의 변명 : 내가 그걸 거절했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차악적 정당화 주장은 자기보호를 위한 위장이 태반이지만, 많은 경우 진실을 포함하기도 한다." "독일점령하 프랑스에서 페탱에게 충성맹세를 거절한 판사는 괴팍한 딱 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잡혀온 레지스탕스들이 자신들보다 더 페탱에 충성하는 법관들에게 재판을 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비시 정권에 충성한 광신자들에게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받는 사태는 피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독일인들은 중형을 선고해서 인질로 잡으려고 했으며, 반면에 무죄판결을 받으면 격리나 추방 등이 뒤따를 수도 있기 때문에 판사들은 때때로 변호인의 요청에 따라 〈중간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사임한 법관들은 임무수행을 포기한 군인 또는 중환자의 고통을 외면한 의사에 비교되었다. 덴마크에서도 점령세력이 사법제도를 장악하여 결국은 자국민들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힐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관들이 독일과 협력한 사례가 있었다."(206-7)


"1989년 이후 동유럽에서 반사실적 정당화의 변종이 등장했다. 즉 〈우리가 반대파를 호되게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침공했을 것이고 그 결과는 훨씬 참혹했을 것이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1981년 계엄령 주모자의 기소 가능 여부를 조사한 폴란드의회 위원회가 이 조사를 철회했을 때, 이 주장이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이 차악의 선택이었으며, 그것은 소련의 침략뿐만 아니라 국가를 파멸시키는 경제적 무정부 상태에 비교해서도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관심을 끄는 추가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 야루젤스키가 계엄령 발동에 실패했더라도 소련이 침공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행 이후 〈폴란드 법학자 대다수는 위험을 초래하는 잘못된 판단이 졸속과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잘못된 신념도 행위 당시에 획득가능한 증거로 잘 설명된다면 용인할 수(정당화는 안되더라도) 있는 것이다."(209-10)


"'적'의 존재는 개별적으로 보면 가해로 비칠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축소하면서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만행을 볼셰비즘과의 전투 때문에 불가피하게 빚어진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어느 영국인은 〈(서)독일인들은 수세기 동안 아시아의 야만에서 유럽문명을 지키는 것을 자기가 부여받은 역사적 사명으로 간주했다〉고 썼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그들을 기소하기보다 연합국은 그들이 한 일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독에서 과거의 나치즘은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한 사람들에 대한 전후 독재를 정당화하는데〉 활용되었다.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은 진부할 정도로, 때로는 진지하게, 공산주의와 테러리즘, 그리고 게릴라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라면서 억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을 만행의 정당화로 삼기 어려운 것은 그 적이 가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점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 폭력은 그에 대한 무장저항에 선행했다."(213-4)


"나치와 공산정권 인사 중에서 광신자 또는 기회주의자는 더 엄하게 처벌되어야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비인간적 이념에 대한 개인적 헌신은 가중처벌 사유인가 아니면 정상참작 사유인가?" "똑같이 나쁜 이상을 신봉하고 실행했더라도 경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런 행위를 한 기회주의자가 더 나쁘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덴마크 검찰총장은 독일을 위해 급여를 받는 일에 종사한 행위는 군인으로 복무한 것보다 〈윤리적 관점에서 훨씬 나쁘다〉고 지적했다." "기회주의보다는 광신주의에 대한 선호(이렇게 불러도 된다면)는 악독한 반유태주의 프랑스 정치인 자비에르 발라에 대한 고등법원 재판에서도 잘 나타났다. 검사는 〈발라의 행위에 광신주의 요소가 있지만, 그것이 저급하고 이기적인 동기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것이 검사가 발라는 '중형'을 받아야 하지만 '극단적인 제재'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근거다. 곧 광신주의는 경감사유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224-5)


제6장 피해자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가해행위는 피해자(또는 제3자)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첫째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가해자에게 부과하려는 욕구다. 이른바 눈에는 눈이다. 둘째로는 피해를 가능한 한 수준에서 원상회복하려는 욕구가 있다. 영국의 속죄금(Wergeld) 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균형을 회복하려는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대체 가능하다." "범죄자가 속죄금을 지불할 수 없으면 처벌이 그 대체물이 된다. 그러나 현재 법제도에서 처벌은 피해자의 요구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가해행위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가해자 처벌과 분리되어 있다. 그럼에도 보상절차는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징벌적 목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왕정복고 과정에서 일부 이주자들은 자기 재산을 구입한 사람에게 처벌적 목적의 배상금을 부과하기 원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현금보상이나 바우처 대신 현물배상에 치중했는데, 그 목적 중 하나는 재산이 과거 특권계급에 귀속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241-2)


# 피해자의 고통의 유형

1. 물질적 고통 : 개인재산의 손실

2. 신체적 고통 : 신체 또는 자유 등에 걸친 피해

3. 무형의 고통 : 기회 박탈이나 기회 상실


"파괴된 재산은 몰수된 재산보다 인색하게 보상되는 경향을 보였다. 1815년 이후 프랑스에서 국왕을 위해 싸우다가 재산이 파괴된 방데 반란 가담자들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한 반면, 왕에 대한 충성보다 자신들의 안정을 더 중요시하다가 재산을 몰수당한 이주자들은 나중에 보상을 받았다. 이 차이는 결국 국가가 재산 몰수와는 다르게 재산 파괴에서는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걸 의미한다. 일부를 대상으로(상대적으로) 완전한 보상을 실시하는 대신 모두를 대상으로 부분적인 보상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결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45년 이후, 많은 독일 점령국가에서 파괴된 재산을 개인별로 보상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조치의 개념적 기초는 보상 권리가 아니라 필요와 연대였다. 노르웨이에서도 전쟁피해에 대한 '회복적 보상(regressive compensation) 원칙이 확립되었다. 즉 〈모든 국민이 고통을 겪었으며, 각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정서가 일반화되어 있었다.〉"(245)


"몰수의 경우에는 흔히 제기되는 이중소유라는 골치 아픈 쟁점이 있다. 국가가 몰수재산을 선의로 구매할 의사를 밝힌 사적 개인에게 팔았을 경우, 새 소유자는 취득한 재산이 법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 재산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보상하기 위해서 불의를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잘못이 초래한 불의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그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불의와 사회적 분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증가하게 되며 결국에는 최초의 불의를 지배하게 된다." "부당취득 후 한 세대가 지났을 때에만 새로운 소유자에게 재산을 보유할 자격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 왕정복고와 1990년 이후 구동독에서 새로운 소유주가 〈정직한 방식〉으로 취득했을 때 몰수재산 반환에 예외가 가능하다는 예외조항을 둔 독일의 통일 조약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영국의 왕정복고 때 재산은 대부분 원래 소유자에게 반환되었다."(247-8)


"과거의 고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필요 중 무엇이 타당한 보상근거일까? 두 사람의 피해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과거에 심하게 고통을 겪었지만 현재는 회복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적인 상태로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은 과거에 고통을 덜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지금은 일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목표가 과거의 후생손실을 보상하는 것이라면 첫 번째를 우선시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 후생에 관심이 있다면 두 번째 사례가 더 강력한 근거를 갖는다. 프랑스 왕정복고 과정에서 나온 이 질문은 나치만행을 둘러싼 보상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1953년에 독일 최초의 보상법이 제정됐을 때, 피해자배상권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인 오토 퀴스터는 필요를 보상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정부관리와 정당 대표들을 비판했다. 퀴스터는 박해당한 사람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상황에 기초한 특수한 권리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정당한 보상권이다.〉"(253)


"무형의 고통은 기회의 결여 또는 상실로 구성된다. 직관적으로, 모든 기회의 박탈을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고통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 기회─예를 들면 법조인 경력 취득─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의 후생은 기회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의 박탈이 피해로 간주되는 이유 또한 다양하다. 만일 그 사람이 법률적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이 경력을 향한 욕망의 결여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부재에 기인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불확실성도 피해로 간주된다. 특정 측면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 역시 피해의 유형에 속한다.(이 효과는 모든 사람이 박탈당한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좀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후생 자체보다는 후생의 기회가 도덕적으로 더 중요한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배상·보상 프로그램은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을 포함하지 않는다."(256-7)


제7장 제약요인


"사면 또는 관대한 처분이 포함된 타협을 통해 체제 이행이 시작되는 경우, 차기정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이행기 정의를 구현할 자유가 제약된다." "새로운 세력은 성공적인 이행과 이행기 정의라는, 상충하는 두 가지 열망을 갖는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물러나는 지도자들과 협상을 하면, 두 번째 목표를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협상자가 자신들이 차기 첫 정부를 구성하고 일정기간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믿으면 사면과 불처벌 약속은 평판에 대한 의식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퇴장하는 엘리트가 이행 이후 협상자가 나중에 그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로 대체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메커니즘은 성공하지 못한다. 또한 구엘리트가 미래의 법원과 입법부가 독립적인 지위를 잡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 최종협상 역시 성사되지 않을 수 있다. 모순적이지만, 법원이 부패해 있거나 과거체제와 얽혀 있을수록 면책 약속은 더 신뢰를 받는다."(272-5)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이행기 정의는 복합적인─서로 충돌하기도 하는─제약 요인에 사로잡혀 있었다. 몇몇 연합국은 독일인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특히 그 생산기반의 철저한 파괴─만이 독일군국주의의 부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봤다. 모겐소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독일이 1810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징벌적 조치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별로 효과적이지 않으며, 이런 〈카르타고적 평화〉는 비생산적이라고 보는 측도 있었다. 또 서유럽 전체가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있는데, 그 산업적 기반을 파괴해 독일을 응징하는 행위는 유럽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은 연합국으로 하여금 초기의 엄격한 대독일 조치를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소비에트연방의 도발에 맞서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강력한 독일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전범기소와 보상조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282-3)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이행기 정의의 핵심적 딜레마는 베르사이유조약에 대한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평가에서 이미 잘 드러나 있다. 〈관대함과 공정 그리고 평등한 대우에 입각한 평화만이 독일재건 기간을 단축하고 독일이 또다시 수많은 우수한 자원과 기술을 프랑스에 내던지는 날을 늦추는 효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보증'이 필요한데, 각각의 보증은, 독일의 점점 커지는 분노와 거기서 이어질 일련의 보복 가능성 때문에 또 다른 추가적인 조항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 카르타고적 평화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이다.〉 관대하게 다루면 독일은 새로운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원〉을 갖게 되고, 혹독하게 다루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초에 클레이 장군은 독일인을 궁핍으로 몰아넣는 정책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500 칼로리의 공산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1,000 칼로리의 민주주의 신봉자가 될 것인가 사이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293)


"경제적 제약요인은 또한 정권 퇴진(1815년의 프랑스 또는 1945년 이후의 유럽처럼)이나 정권 붕괴(1989년 이후의 동유럽)에 따른 이행과정의 처벌과 보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만일 새로운 체제가 광범위한 보상을 실시(1815년 이후)하거나, 경제재건을 추진(1945년 이후처럼)하거나, 또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촉진한다면(1989년 이후처럼), 이행과정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과제들은 이행기 정의를 심대하게 제약할 것이다." "1945년 이후, 독일에 협력했거나 또는 점령됐던 국가에서 경제적 협력자에 대한 기소는 활발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 〈경제재건과 나치청산 사이의 선택〉은 전자를 선호하는 쪽으로 귀착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중앙(산업 부문)숙정위원회는 경제협력자가 경제재건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되면 숙정대상에서 제외했다.〉 벨기에에서 적과 경제적으로 협력한 행위를 다소 관대하게 다룬 1945년 5월 25일의 특별법은 경제재건과 사회적 화합을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294)


"이행기 정의의 저변에 깔려 있는 감정의 급박한 특성을 감안하면 신속한 재판에 대한 요구가 과도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속함에 대한 열망은 철저함과 정의(절차적 공정의 의미에서)를 동시에 추구하는 열망과 자주 충돌한다." "법의 지배가 제약요인(또는 파괴되는)이 아닌 때에도 사법제도의 제한된 능력 때문에 신속함과 철저함에 대한 열망이 상호배타적 관계에 놓일 수 있다." "사법부는 재판을 받아야 할 정권의 일부이자 나아가 그 핵심 세력인 경우가 아주 많다. 1945년 이후의 독일사법부는 나치범죄자(특히 나치판사들)의 기소를 방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나아가 유죄판결이 자신들의 유죄증거를 없애는 인센티브로 작용하는 문제가 있다. 가해자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으면 한결 수월하게 그 기회를 갖는다. 패전 이후 〈종전과 점령 간의 상당한 지연은 일본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와 기록을 조직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다.〉"(299-300)


제8장 감정


"감정은 그 고유의 '행동 경향' 때문에 신중하게 고려된 행동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가장 중요한 방해기제가 감정의 두 가지 특성과 관련있다고 주장한다. 긴급성(urgency)과 조급성(impatience)이 그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조급성은 후일 보상보다 조속한 보상에 대한 선호, 즉 시간 할인율을 1 이하로 낮추려는 경향이고, 긴급성은 나중 행동보다 조속한 행동에 대한 선호이다. 조급성은 신중함과 양립 불가능하며, 장기적인 이기심에 따른 행동으로 이해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늘 비루하고, 잔인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긴급성은 신중함과 양립할 수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신중함의 요청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진출하는 기회비용은 엄청나게 비쌀 수 있다. 자기방어를 위한 행위는 지체를 허용하지 않지만, 응보적 행위는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311-2)


"감정의 세 번째 특징은 감정의 짧은 반감기다. 예를 들어 폴 에크만은 그가 〈기본감정〉이라고 정의한 특징 중에서 〈급발진〉(sudden onset)과 〈짧은 지속〉(brief duration)을 제시한다. 많은 헌법의 핵심적 이념, 즉 양원제가 속도조절 및 냉각효과로 정당화된다는 논리는 이와 같은 감정기제에 의존하고 있다. 감정 소멸과 기억 소멸 간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개입한다. 일반적인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멸한다. 감정이 기억에 의해서 촉발되는 한, 감정 소멸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감정이 개입된 사건의 기억은 좀 더 느리게 소멸한다. 〈감정은 망각을 늦추기는 하지만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진술은 이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기억이 관련된 감정의 행동 경향을 촉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가 여부다. 모욕의 기억이 총천연색에서 흑백 상태로 희미해지면, 사건의 정확성은 유지할지 모르나, 그 생생함과 동기부여의 힘은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313)


"많은 이행에서 즉각적인 정의실현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관찰된다. 객관적인 차원에서는 경제재건과 같은 다른 문제들이 우선 과제일 수 있다. 주관적인 차원에서는 이전체제의 독재자들과 협력자들의 처벌이 더 시급한 과제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초법적 처벌은 한 가지 설명지표를 제공한다. 프랑스는 사람들이 자의적 기준으로 직접 정의를 집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식 군사재판정을 설치했다. 모라스 롤랑은 〈정부는 철도 건설보다 정의를 먼저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속한 재판 요구가 감정으로 촉발된 긴급성과 연결되는 한, 즉각적인 재판결론에 대한 요구는 재판에 임하는 우리가 느끼는 조바심과 연결되기도 한다. 따라서 법적 절차를 단순화하는 작업은 단지 다뤄야할 사건이 많아서가 아니라 복수에 대한 열망을 즉각적으로 충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실제의 경우 긴급성과 조급성의 효과를 각각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315-6)


"감정이 그것을 촉발한 사건 이후에 시간경과에 따라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이탈리아, 덴마크, 프랑스에서는 1942~43년 이후 새롭고 더 억압적인 점령정권이 등장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퇴각하는 과정에서 초토화 전술을 펼쳤다. 이런 최근의 기억은 부역자 처벌요구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1945년 여름에 독일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그간 다소 침잠해있던 처벌 요구가 최고조에 달했다. 반대로, 1989~1990년 동유럽의 공산당정권이 몰락할 당시, 이 체제는 이미 50년이나 이어졌고, 최악의 만행은 비교적 먼 과거에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최악이었던 스탈린시대는 1953년에 끝났다. 무력으로 진압된 항쟁(1953년의 동독, 1956년의 헝가리), 침공(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계엄령(1981년의 폴란드)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과거에 속했다. 따라서 1945년 이후와 같은 처벌에 대한 긴급한 요구는 없었다."(317-8)


# 기억과 감정의 소멸을 막는 기제들

1. 가해행위의 피해자 간 소통

2. 피해자에게 복수를 요구하는 사회의 명예 규범

3. 가해 행위를 상기시키는 물리적 흔적

4. 가해 행위가 초래한 사건의 영속성


"체코의 반정부활동가였던 작가 야힘 토폴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94년에 나는 수사과정에서 나를 고문했던 공산당비밀경찰(StB)의 주소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내 친구 중 하나를 죽이고 다른 하나를 감옥에서 강간했다. 나와 두 동료는 그를 처벌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그 전직 비밀경찰을 납치해 은밀한 장소로 옮겼다. 우리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잠시 그와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그가 너무나 두려워하고 낙담한 상태여서 그를 풀어주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한 짓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세 개의 동기부여가 작동한다. 복수를 향한 열망, 실질적인 응보적 정의를 향한 열망, 그리고 실질적 정의의 실행에서 절차적으로 정확한 원칙을 따르려는 열망이 그것이다."(329-30)


"많은 경우 절차적 정의를 향한 열망과 실질적 정의를 향한 열망─자신을 이전체제와 구분하려는 열망과 그 체제를 엄중하게 처벌하려는 열망─간에는 갈등이 있다." "내 견해로는, 새롭게 들어선 민주주의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 첫째, 소급입법의 금지나 공소시효 연장 등 기본적인 사법원칙의 존중을 강조할 수 있다. 1989년 이후 헝가리 헌법재판소의 일관된 접근방식이 그 예다." "둘째, 새로운 체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이 원칙을 파괴해야 할 필요를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소급입법을 채택했다." "셋째, 가장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절차인데, 위장술을 사용해 위 두 방법을 모두 시도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법무부는 특정범죄에 대해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은 그 가해자가 전쟁 전의 법체계에서도 똑같은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소급입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331-2)


"이행 이후, 중립을 지켰던 사람들은 자신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으며, 분노와 경멸적 행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설사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가해자들에 대한 이행 이후의 공격이 마치 이행 이전의 그들의 소극성을 마술적으로 무효화할 수 있는 것마냥 응징에 대한 요구를 강화한다. 협력과 저항 사이의 회색지대에 놓여있는 중립자들이 오히려 더 보복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1944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부역자로 의심받던 판사들이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엄하게 재판에 임했다." "프랑스에서 해방 이후 초기의 법원선고가 엄중했던 이유를 〈많은 배심원들이 레지스탕스에 늦게 가담했으며 그들이 이전에 증명하지 못한 열의를 증명하고 싶어한 사실〉로 설명하기도 한다." "알제리 독립 과정에서 가장 늦게 민족해방정선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슬림 알제리인(하르키스) 살해에 가장 열성적으로 가담했다."(336-8)


제9장 정치


"정당은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여 표획득(vote seeking)에 전념한다. 또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안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는 측의 선거권을 빼앗는 표저지 전략(vote denying)을 구사─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원의 선거권 박탈─할 수도 있다." "프랑스 왕정복고 정치에서 소수의 자유주의 진영 의원들은 재산환수에 반대했고 국유재산 구입자의 권리를 옹호했다. 따라서 몰수된 재산을 둘러싼 의혹과 불확실성의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의원들은 원래 소유주들에 대한 보상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고객은 자기 이익이 관철되었다고 생각하면 계속 고객으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같은 논리로 선거에 임하는 의원들의 관심사는 지지자의 경제적 이익증진에 있지 않았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재산환수 소문을 퍼뜨리는 등 사실을 왜곡한 선거전략을 동원하여 재산구입자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지지로 연결되기를 원했다.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착취행위였다."(351-3)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톨그리아티는 모스크바 망명 시절에는 숙정과 재판의 필요성에 대해 강경노선을 취했다. 1944년 봄, 귀국했을 때 그의 입장은 다소 완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주력정당으로 키우고 〈탈파시즘 정책의 추진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게 자명한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톨그리아티는 북부에서 일어난 이른바 〈야만의 숙정〉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1946년,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그는 이탈리아의 이행기 정의를 거의 종식시킨 사면법을 제안했다. 이 법은 특히 법원에 재량권을 크게 위임하였다. 〈파시스트와의 거래에서 항상 단호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사면반대 투쟁에 앞장 섰다. 물론, 공산당과 양립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다음 해에 연립정부를 떠났을 때, 그들은 비타협적인 노선으로 돌아섰으며, 사면을 반동세력의 작태로 규정하고 강경한 어조로 반대했다."(354-5)


"〈퇴장하는〉 엘리트들은 의회정치에 참여하는 유권자의 힘을 빌려야 했다. 이 전략은 이전의 독재체제가 정치적 추종세력이나 협력자를 광범위하게 구축할 만큼 장기간 권력을 쥐고 있었거나, 새로운 체제가 자신들에게 정당 또는 압력단체를 조직하여 기존 정당에 영향력을 발휘할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1989-90년 이후에도 구공산권 국가에서는 공산당을 계승한 정당들이 합법인 가운데 정화법(lustration law) 제정은 동유럽 이행기 정의 정치의 주요 골격을 이루었다." "헝가리에서는 이행 이후 첫 번째 정부가 1994년 3월에 1만 2천명이 심사대상이 되는 가혹한 정화법을 통과시켰지만, 같은 해 12월에 헌법재판소가 폐지했다. 1994년 5월의 선거 이후, 후기 공산주의자들이 집권에 성공했다. 헌법재판소가 이미 정화법을 위헌 처리했기 때문에 새 정부도 그대로 따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는 1996년에 600명을 심사대상으로 하는 온건한 수준의 정화법을 새로 제정했다."(364-5)


"모니카 날레파는 이러한 자기징벌 조치는 사실상 차기정부가 더 강력한 숙정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선제적 조치'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숙정문제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차기정부가 더 가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소 온건한 조치를 도입하면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선제적 조치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아래로부터의 개정 전망이 없도록 정부가 독점적으로 법안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후기공산주의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잃겠지만, 강경파인 반공산주의 세력이 의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반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강경파보다는 덜하지만 후기공산주의자에 비해서는 엄격한 이행기 정책을 선호하는 온건파 주류정당의 지지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후기공산주의자들은 집권기간 동안 온건한 법을 제정할 인센티브를 가진다."(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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