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육군 -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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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교와 같은 육군의 교육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한 기관에서 기대에 상응하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실전 경험이 적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세대는 1904년(메이지 37)과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사관학교 생도였거나 아직 육균유년학교 생도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 최초로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과 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결국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책에 충실한 지식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가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조슈벌長州閥'이 그들의 힘에 의해 타파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5-6)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일본 육군은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건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하자 이후 독일군을 따랐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군을 일본에 초청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친영미 감정을 가진 자가 몹시 적었고 일반 중학교 출신은 줄곧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현저하게 결여돼 있었다. 인간을 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 끝까지 보병을 중시하는 육탄 공격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병사를 '무기질의 병기'로 육성하려 했다는 것, 보급과 병참에 대한 중요성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 등에 잘 나타나 있다."(16)


"1882년 1월 4일, 메이지 천황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인훈계」를 간결하게 명문화한, 약 2700자에 이르는 「군인칙유」를 하사한다." "그리고 이 「군인칙유」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를 관통하는 일본 육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군인칙유」에서 〈군인은 충절을 다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표현은 천황의 군대라는 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반면 〈세론에 흔들리거나 정치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렵의 반정부적 운동(예를 들면 자유민권운동과 같은 정치활동)에 장교가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군의 기강을 공고히 세우면서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처럼 본래는 정치적 중립을 의미하는 문구인데, 쇼와 초년대 국가 개조 운동을 추진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정치나 세론이 어떠한 형태로든 육군 내부의 움직임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자가 많았다."(22-4)


"그 결과 육군이 일본제국 안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고, 누구보다 우월한 사명을 천황에게서 부여받았다는 오만한 착각을 낳았다.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이 착각 속에서 국가 그 자체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1875년 3월부터 약 3년 동안 공사관 소속 무관으로 독일에 주재했던 가쓰라 다로 소좌는 독일군을 예로 들며 육군성 내 부국 중 하나인 참모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야마가타에게 제안했다. 여기에는 군정軍政과 별도로 군사 작전이나 군사 행동에 관해 특별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야마가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78년 12월 참모본부를 독립시켰다. 1893년 5월에는 해군의 군령부가 독립했는데, 참모본부와 군령부 부장은 천황의 대권을 대리하는 책임자라는 의미를 지녔다. 군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정신적 기반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천황에 직결되는 특별한 기관이라는 우월의식이 이 무렵에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24-5)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처음으로 국외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1894~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이며, 이때 전쟁을 지도한 것이 대본영大本營이었다. 대본영은 1893년 5월 공포된 전시 대본영 조례에 기초하여 설치된 조직이다. 쇼와 육군도 이 조례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실제로 전시 태세에 돌입했을 때 육해군이 작전 측면에서 통일된 방침을 갖고 행동한다는 목적에 따라 생겨났다. 물론 천황의 대권을 위임받은 육군의 참모본부와 해군의 군령부가 각각 대본영 육군부와 대본영 해군부로 일체화하여 천황에게 군사 작전과 행동의 내실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대본영에 문관은 참가할 수 없게 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결국 전쟁 지도에는 군인만이 관여하고 문관(국무대신 등)은 군사에 관해 일절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따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쟁을 순전히 군사 행동만으로 파악하여 정치적인 배려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9-30)


"1907년 4월에 작성된 「제국 국방 방침」의 주안점은 우선 〈제국의 국방은 공세를 본령으로 한다〉는 데 있었고, 줄곧 공세 계획을 골자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 다음 〈장래의 적으로 상정해야 할 나라는 러시아를 제일로 하고 미국·독일·프랑스가 그 뒤를 잇는다〉고 명시했다. 〈국방에 요구되는 제국군 병비의 표준은 용병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러시아와 미국의 압력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정도로 한다〉라고 했듯이, 러시아와 미국에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수준의 군비를 갖추는 것을 국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방 방침에 따라 「제국군 용병 방침」 제1항에는 〈해군은 적에 대하여 힘써 기선을 제압하고 그 해상 세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육군은 적보다 앞서 필요한 만큼의 병력을 속히 한 지방에 집합시킴으로써 선제공격의 이점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작전을 펼친다〉고 적혀 있다. 모두 선제공격에 중점을 둔 작전을 고려한다는 게 특징이었다."(47)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 육군이 지나치게 많은 군사비를 요구해오자, 국가 재정을 우려한 정부는 조금씩 반격하기 시작했다." "1927년 6월에 열린 의회에서 정당 측은 집요하게 '군부대신현역무관제'에 반대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대신과 차관(당시는 총무장관)의 임용 자격이 적힌 비고란에 〈대신 및 총무장관에 임용되는 자는 현역 무관으로 한다〉고 쓰여 있던 문구를 삭제했다. 이리하여 예비역도 육해군 대신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상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자신의 권한을 점차 참모본부로 넘기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무력화했고, 이를 통해 '통수권 독립'이라는 명분을 지키면서 정치 쪽에서의 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쇼와 육군이 고압적인 자세로 '통수권 독립'을 외치게 된 것은 이러한 경위에서 비롯됐다. 1936년의 2·26 사건 때 '군부대신현역무관제'가 부활하는데, 참모총장에게 권한을 넘긴 사실만은 그대로 남아 쇼와 10년대 참모본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51-3)


"일본의 국가 재정이 두드러지게 피폐해진 원인은 물론 군사비 팽창에 있었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내리 3년 동안 국가 예산의 40~50퍼센트를 군사비로 할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시베리아 출병은 당연하게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증유의 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난 후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고 그동안 쌓아놓았던 자금도 금세 써버리고 말았다. 1921년 11월 하라 다카시 수상이 암살되고, 이어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이 탄생했다. 다카하시 수상은 긴축 재정을 내걸었다. 그런데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다시 한번 크게 타격을 입었다. 군사비 팽창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외압에 대해 육군 내부에서 대응한 사람이 육군상 우가키 가즈시게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삭감을 우가키 군축이라 부른다."(62-3)


"감축 대상이 된 이들은 우카기를 원망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군 내부의 장교들도 우가키에게 불만을 품었다. 우가키가 육군의 입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좌관급 장교까지 내몰았다는 것이 불만의 이유였다. 육군의 막료는 우가키를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태도로 대하면서 그 원한을 이어나갔다. 쇼와 10년대에 우가키는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육군은 끝까지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가키 내각은 유산되고 만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이쇼 말기의 군축 분위기는 일본의 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군사에 대한 혐오, 군인에 대한 모멸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은 제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지 못했다. 서민들로부터 냉혹한 눈길을 받거나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육군은 가장 뿌리 깊은 집단사회여서 그 특이한 가족주의적 성향이 도시의 인텔리 계층에서는 혐오감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이다."(64-7)


"다이쇼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군사 집단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었다. 우가키 군축은, 우가키의 진의가 어떻든 그러한 시도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육성된 메이지 10년대 중반부터 20년대 전반에 태어난 제2세대 군인은 그러한 심리를 배척하는 것이 오히려 군인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떻게 군 내부의 지도층에 들어갔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새로운 파벌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1921년 10월 27일 나가타 데쓰잔, 오카무라 야스지, 오바타 도시로 등이 바덴바덴에서 가진 회합이, 조슈벌의 횡행을 대체하여 육대벌陸大閥이 군 내부에서 주류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 전쟁은 국가총력전〉이라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시찰한)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치·경제·산업·문화·사회의 모든 것을 전시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71-3)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쇼와 육군을 말할 때면 무엇보다 1928년 6월 4일에 일어난 '장쭤린 폭살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다. 동지들은 이 사건을 고모토의 애국적인 행위로 파악하고, 이전부터 중견 장교들이 활약했던 만몽 지역에 부동의 정치 권력을 수립한다는 계획이 육군 지도자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한 것에 분개했다." "고모토로부터 장쭤린 폭살 사건의 진상을 들은 후타바카이 회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모토를 지킬 것을 맹세했고, 심정적으로는 '고모토를 따르리라'는 기개를 품었다. 어떤 장교는 고모토의 손을 잡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잇겠습니다〉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 중견 장교들은 시라카와 육군대신이 점차 관동군의 음모라는 것을 알아챈 듯한 발언을 하자 육군대신 집무실로 몰려가서는 〈관동군은 관련이 없다〉며 윽박질렀다. 쇼와 육군의 사실을 은폐하는 기질은 이미 이때부터 중견 장교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102-3)


# 후타바카이二葉會 : 다이쇼 말기에 육사 15기부터 18기에 이르는 좌관급 장교가 중심이 되어, 전쟁론, 만몽 개발론, 군 개혁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1931년 10월 2일에 열린 관동군 막료 회의에서 이시하라 간지는 시종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개전 후 한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군사적으로는 지린 성을 진압하고 나아가 하얼빈까지 장악 영역을 넓혔으며, 각 지방의 유력자들도 관동군의 의향을 받아들여 일본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기득권의 옹호와 같은 낡은 표어가 아니라 신만몽국 건설이라는 표어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족협화五族協和·왕도낙토王道樂土의 국가로 정하는 게 우리 생각이다.〉 막료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동의했다. 모두가 〈이시와라의 말이 옳다〉며 맞장구쳤다. 군 중앙이나 정부가 이 방침에 반대하고 나설 경우 신만몽국을 독립시켜 대결 자세를 취해도 좋다는 것이 암묵적인 양해였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는 42세의 중좌로, 자신의 이념을 이 새로운 국가에 쏟아넣고 싶다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111-2)


"이시와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지구 전쟁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이 전쟁이 50년 정도 계속될 것이라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 전쟁의 시대에 들어섰다면서, 결국 1965년 무렵이면 지구 전쟁은 결말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 지구 전쟁에서 결말이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서양 문명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일본은 동양 문명의 축이 되었다. 두 문명의 대결이 바로 인류 최후의 결전 전쟁이며, 그것은 대략 1985년 무렵에 결말이 난다. 이 결전 전쟁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신병기도 개발되어 한 방으로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는 파괴 병기를 생산하게 될 것이며, 착륙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구를 돌 수 있는 비행기도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결전 전쟁을 마친 뒤에는 세계가 통일되어 민족 협화의 시대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민족협화民族協和야말로 결전 전쟁 후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이시와라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21)


"1936년 2월 26일의 이른바 2·26 사건은 육군 내부에서 국가 개조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20여 명의 청년 장교와 그들의 지휘 아래 있던 부사관 및 병사 15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쿠데타였다." "2·26 사건에 가담한 청년 장교들은 물론 자신들의 궐기 행동을 쿠데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유신이나 혁신과 같은 표현을 썼으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무라나카 다카지가 교묘하게도 〈우리는 유신의 전위전前衛戰을 벌인 것〉이라고 했듯이, 그들이 행동을 계기로 육군 당국이 새롭게 국내 체제 개혁을 위해 궐기하는 것으로 참된 '쇼와 유신'이 시작될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란 국체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대원수인 천황 폐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질적일 만큼 쿠데타나 혁명이라는 말을 피했다. 하지만 청년 장교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그랬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쿠데타 이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137-9)


"1933~1934년 무렵 육군 내부에서는 천황기관설을 신봉하고, 합법적으로 군부가 권력을 손에 넣은 다음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갖추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그룹을 통제파라고 불렀다.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 등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해 국체 명징운동에 적극적이고, 불법적으로라도 권력을 장악한 다음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를 목표로 삼은 그룹을 황도파라고 불렀다. 이 그룹은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를 받들었는데, 황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황도파였다." "「군인칙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그들은, 천황이 살아 있는 신이며 나를 버리고 신을 모시는 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배워온 세대다. 그들은 일본의 현실에 대해 살아 있는 신의 뜻을 따르는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렇게 된 것은 천황 주변에 있는 측근이 국민의 뜻을 왜곡하여 천황에게 전하고 있는 체제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그런 측근들이야말로 '임금 곁의 간신'이라는 것이다."(144-5)


"2·26 사건은 쇼와 초년대의 여느 국가 개조운동과 크게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년 장교가 부사관이나 병사에게 명을 내려 다수를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동원된 병사 중에는 이해 1월에 갓 징용되어 아직 무기를 취급하는 데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까지 있었다. 쇼와 초년대의 국가 개조운동에서는 실제로 병력을 움직일 많나 규모의 사건이 없었다. 게다가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천황의 대권임에도, 청년 장교들은 천황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뜻을 무시했다. 자신들의 행위는 큰 의미에서 천황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천황의 대권을 거스르는 행위도 허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선大善'이라 칭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 요인을 습격하여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 곁의 간신'에 대한 그들의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살해 방법은 쇼와 초년대의 테러 사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잔혹했다."(147)


"2·26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청년 장교들의 궐기는 4일 만에 천황의 강한 반대와 그것을 지지한 육군 주류파(이를 통제파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들의 호소는 묵살되고 만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2·26 사건 후의 정치 상황에서 육군 주류파는 〈이와 같은 불상사는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분 아래 육군 내부의 청년 장교들이 맡고 있던 지도부의 일파(황도파라고 불러도 좋다)를 숙군인사肅軍人事라는 명목으로 몰아냈고, '군부대신현역무관제'라는 제도를 부활시켜 육군상을 경질하거나 후임 육군상을 추천하지 않는 방법을 동원하여 내각의 생사여탈권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언제라도 육군이 주도하는 내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2·26 사건이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다. 물론 이 성공은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의 주체적인 의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형태의 것이었다."(140)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소련군은 중국을 지원하면서 자국의 근대적 병기의 위력을 시험이라도 하듯 관동군을 견제했고, 관동군도 소련이 어느 정도 항일 의욕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도발하곤 했다. 그리하여 1937년에는 113회, 1938년에는 166회나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그런 분쟁들은 점차 대규모 군사 충돌로 바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장고봉張鼓峯 산정에 소련군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동군이 처음 알아차린 것도, 국경 침범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보고를 받은 참모본부는 소련 측에 항의하는 게 좋겠다고 외무성에 제안했다. 외무성의 항의에 소련 측은 〈1886년 이후 이 지역은 소련 영토〉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이런 사태는 물론 참모본부의 막료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히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련군과 군사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했다."(234)


"그러나 일본군은 근대적 병기를 앞세운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제19사단의 참모장은 조선군 참모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 〈전선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전선의 지휘관과 병사는 오로지 수비를 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바, 전황이 '돌파구'를 찾기까지 외교 교섭을 통해 정전으로 나아갔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장고봉 사건은 결국 외교 교섭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사단장의 독단과 참모본부의 중견 막료들의 책임을 따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제19사단의 장병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소련군 앞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전사했다는 측면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외교 교섭에서 소련이 뜻밖에도 일본군을 최종 단계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합의한 사실을 핑계로, 이것 역시 일본군의 철저한 저항 때문이라고 말하고, 소련군은 대일전에서 앞서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리는 자료로 삼았다. 장고봉 사건은 책임도 묻지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일본군의 육탄 공격을 예찬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246-7)


"쓰지 마사노부는 노몬한 사건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참모이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한 쓰지는 육군 내부에서 단연 주목받는 존재였다. 성적 지상주의의 조직 원리하에서 단지 육군대학의 성적이 좋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언동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디에 배속되든 강경론을 주장했고 때로는 상관의 눈에 띄는 화려한 언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중론을 펼치는 상관을 험악하게 매도하기도 해서 군사령관이 일개 참모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온다. 1937년 11월 관동군 참모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줄곧 대소련전을 외쳤고, 그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소련군이나 몽골군의 국경 침범을 지적하면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고봉 사건에서 조선군이 소련 측에 철저하게 패한 것을 두고 〈저들은 조선군이어서 그렇다. 관동군이라면 절대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263-4)


"노몬한 사건의 발단은 장고봉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후인 1939년 4월 관동군이 정리한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이었다. 이 요강은 관동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시달되었는데, 실제로 이 요강을 기안한 사람은 쓰지였다. 일본의 판단만으로 국경선을 정하고 그곳에 소련군이나 몽골군이 들어오면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초원이나 강, 산 등에는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상대방이 그곳에 진입해오면 〈주도면밀한 준비 아래 철저하게 응징하여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더욱이 이 요강에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 이를 제일선 부대에 명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대소 군사 충돌 대망론'은 장고봉 사건의 교훈이 전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264)


"1940년 9월, 일본군은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주해 들어간다. 프랑스의 식민지 제독에게 억지스러운 요구를 들이밀고서 무력을 발동하여 진주한 것이었다. 이때 외무성은 프랑스 외무성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고, 하노이에 있는 육군의 장제스 원조 물자 저지를 위한 감시단 위원장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과 프랑스 측의 교섭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참모본부 작전부장 도미나가 교지와 남지나방면군 참모부장 사토 겐료는 제5사단을 움직여 무력 진주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는 이렇게 말한다. 〈쇼와 육군에는 세 가지 하극상 사건, 이른바 군기를 따르지 않았던 전투가 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만주사변, 쓰지 마사노부와 핫토리 다쿠시로의 노몬한 사건 그리고 도미나가 교지와 사토 겐료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입니다. 이것은 쇼와 육군의 불명예 사건이며, 특히 이시와라의 만주사변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341)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의 국책은 단숨에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기울었다. 일본이 이곳에 진주하는 것은 자존·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이고, 이것은 미국이 평소에 영국을 원조하는 것을 '정당방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로 앞뒤를 맞추었다. 해군성에서도 군무국 제2과장 이시카와 신고가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고, 이것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자며 자신감을 보였다. 주독 대사 오시마 히로시는, 독일은 단기간에 소련을 제압하고 우크라이나, 발틱(발트 해 연안부), 벨라루스, 캅카스 등을 소국으로 분할하여 소련을 실질적으로 해체할 작정이니, 일본도 이에 응하여 극동소련군을 제압하고 독일의 방침에 즉시 호응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침내 6월 24일 조정된 「제국 국책 요강」에서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중심으로 바뀌어 있었다."(346)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일본군 상륙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7월 25일 미국 내에 있는 일본 자산의 동결을 발령했고, 26일에는 영국, 27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그 뒤를 따랐다. 28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했다. 8월 1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일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 안에서 대미전의 목소리가 급속히 높아졌다. 전쟁지도반의 『기밀 전쟁 일지』 8월 2일자 기록을 보면, 〈대미 전쟁은 백 년 전쟁이다. 제국은 이미 이를 피할 방법이 없다〉고 적혀 있다." "전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측은 이미 이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 전보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는 군사적으로는 '무혈 점령'이라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쇼와 육군의 예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 점에서 실패했던 것이다."(352-5)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12일 트루크 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과다카날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하순부터 1943년 2월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을 과다카날에서 보낸 유일한 부대였다." "미군의 병력이나 병기와 비교하면 이치키 지대의 제1진은 5000 대 1 이상 차이가 있었음에도 대본영과 제17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일단 군을 투입했다가 패퇴하면 오기가 생겨 잇달아 병력을 쪼개서 보내는, 이른바 체면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쇼와 육군의 나쁜 전통인데, 그것이 여기서도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1943년 2월 7일 최후의 부대가 철수하기까지 육군 약 3만 600명, 해군 약 4700명을 쏟아부었고, 이 가운데 육군 약 2만 800명, 해군 약 3800명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보급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 쇠약해져서 죽거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치키 지대에 한정하면, 2500명이 조금 못 되는 병사 가운데 살아서 귀환한 이는 고작 1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493-4)


"이치키 지대와 (제2진으로 출병한) 가와구치 지대의 패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육상전에서는 처음으로 맛보는 굴욕이었다. 전후에 기록된 당시 참모들의 수기나 회상록에서는 본래대로라면 이 단계에서 과연 과달카날이 전략적으로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재검토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참모본부와 제17군사령부의 분위기는 그다지 냉정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비행장을 탈환해야겠다는 체면 문제가 앞섰다. 군인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재검토하자는 논의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의견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참모본부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 그리고 작전과의 쓰지 마사노부 등에게 도조 히데키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과달카날을 포기하지 마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참모본부는 그 말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작전과 자체가 개전 이래 연전연승이라는 '불패의 신화'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501-2)


"1943년 1월부터 2월까지 해군의 구축함이 라바울 기지에서 과달카날로 들어와 세 차례에 걸쳐 1만 명이 넘는 일본 병사를 철수시켰다." "2월 9일 오후 7시, 대본영 발표가 있었다. 1항과 2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2항 중반부터 과달카날에 대해 언급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 중인 부대는 작년 8월 이후 잇달아 상륙한 우세한 적군을 같은 섬 일각에서 압박하고 과감하게 격전을 치러 적의 전력을 분쇄해왔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2월 상순 이 섬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시종 적을 강하게 압박해 굴복시킨 결과 양 방면에서 엄호 부대의 전진轉進은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적에게 입힌 손해는 인원 2만 5000명 이상(실제로는 전사 1000명, 부상 4200명), 우리 쪽 손해는 1만 6734명(실제로는 전사자와 아사자를 합쳐 2만 4600명)이라고 덧붙였다. 대본영 발표가 '과장'과 '허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525-6)


"쇼와 육군을 조사하다 보면 알 수 있지만,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는 엘리트 관료에 관하여 은밀하게 내려오는 불문율이 있었다. 육군대학교 졸업자 50명(해마다 약간의 증감이 있다)은 쇼와 육군의 지도적인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 가운데 성적 우수자(상위 10퍼센트, 보통 5~6명)는 특히 군도쿠미軍刀組라 하여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며, 그들의 집무실은 작전부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벽에 걸린 남방 요역을 나타내는 대형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현지로부터의 전투 보고를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또는 국책의 핵심이 되는 전쟁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해군의 군령부 작전부와 조정하여 가끔은 정부에 대본영의 의향이라며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모본부 작전부에서 현지 파견군에 내려지는 명령은 통수권을 책임진 천황의 명령 그 자체였다. 현지 파견군은 그 어떤 명령도 어길 수 없었다."(572-3)


"작전부 참모들은 정보부를 포함해 다른 부문의 참모들에게 강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정보부가 수집한 다양한 데이터도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식에 따라 작전 명령을 내렸다." "정보부의 엘리트 군인들이 전후에 펴낸 글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것은 태평양전쟁이 틀림없이 정보전이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전쟁을 계속했다는 자성自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이 왜 이렇게 정보를 경시했는지에 관하여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정밀한 정보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 침략군에 협력한 중국인이나 특수 기관〉에 의지하다 보니 정보 수집이나 해석을 시스템으로서 구축할 수 없었고, 수상한 정보원에게 기밀비를 지불하고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573)


"1943년 4월 18일 오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일식육상공격기가 격추되었고, 야마모토는 부관 및 군의장 등과 함께 전사했다." "야마모토의 전사는 일본 해군의 굴욕이었음에도 이 사실을 오히려 담담하게 전함으로써 국민의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발표와 달리 야마모토의 최후를 본 육해군 수색대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전선으로 보내졌고 결국 전사를 강요당했다." "야마모토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제6사단 제23연대의 하스나 미쓰요시 소위가 지휘하는 수색대였다. 하스나를 포함하여 수색대 소속 병사 약 20명은 목격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금지당했고, 누설할 경우에는 〈군법 회의에 회부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이 병사들은 잇달아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형태의 전속이 되풀이되었다."(580-1)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後方思想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식량·의약품·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군수품을 나르는 이가 병사라면 나비와 잠자리도 새다〉라며, 치중輜重을 담당한 장교나 병사를 조롱하는 우스꽝스런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다. 치중이란 병참과 거의 같은 의미인데, 군대에 불가결한 식량·의복·무기·탄약 등을 총칭한다. 전투를 지원하는 후방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후방을 얕잡아보는 치명적인 결함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의 교육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육군대학교에서도 병참이란 전선으로 식량과 무기, 탄약 등을 나르는 전술이라 하여 도상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심부름'과 같은 단계에 머물렀을 뿐 일관된 교육도, 그 이론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638-9)


"일본군 안에서도 보기 드문 육군대학 출신 병참참모였던 이도 마쓰아키에 따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은 독일군을 모방하기는 했지만 병참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규율도 엄격해서 약탈 등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후방사상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도는 쇼와 시대에 들어 〈만주사변에서는 병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중일전쟁에서는 더욱 소홀하게 취급되었으며, 결국 대동아전쟁에서는 병참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일거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병참 사상에는 전쟁 억지력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냉철하게 숫자를 분석하고 군사를 직시하면 병사를 인간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이 일본에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도의 어조에는 병참을 작전이나 정보보다 상위에 두어야 한다는 확신이 배어 있었는데, 나는 태평양전쟁에서 그런 병참사상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했다."(639-40)


"「전진훈」은 1941년 1월 육군상 도조 히데키의 이름으로 군에 시달되었다. 원문을 작성한 사람은 시마자키 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군 막료들이 초안을 집요하게 손질하여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내용은 근대국가의 가치 기준을 모조리 부정한 것이었다. 「전진훈」의 '본훈 제1장 제1절 황국'은 〈대일본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위에 계시며, 조국肇國의 황모皇謨를 계승하여 무궁하게 군림하신다. 황은皇恩은 만민에게 널리 미치며, 성덕聖德은 팔굉八紘에 고루 미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생관死生觀을 보면, 〈생사를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헌신 봉공의 정신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오로지 임무를 완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름을 아낀다'라는 항목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늘 향당鄕黨과 가문의 면목을 생각하고 더욱 분려奮勵하여 그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향토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것이다."(684)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에 의한 특공 작전이 처음으로 펼쳐진 것은 1944년 10월 25일이었다. '인간' 그 자체가 폭탄이 되는 이 작전은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또 비참했다. 이 작전을 채택한 육해군 지도부의 책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 작전으로 사망한 병사들은 '신'으로 되살아나리라 강요받은 존재로, 오늘날에도 계속 거론되어야만 한다. 10월 25일은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시작된 다음 날이다. 레이테 결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발동되었고, 다바오 기지를 출발한 해군특공대 소속 비행대가 미 해군 항공모함을 목표로 고도 3500미터 높이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이날 필리핀 앞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던 미 기동부대를 향하여 특공대는 수차례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육해군 특공대 2367대가 출격하게 된다. 이는 그 숫자만큼의 생명이 사라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764)


"이 작전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해군 내부의 항공 관련 막료들이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밀고 나간 사람은 제1항공함대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였다. 당초 오니시는 이 작전을 '통솔의 외도外道'라고 자조했지만, 이미 전력이 바닥난 일본 해군으로서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러한 작전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전과가 예상 밖으로 컸기 때문에 이 작전이야말로 유효하다는 양해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특공 조종사의 양성, 특공기 개발 등에 힘을 쏟게 되었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쇼와 육군은 전군이 똘똘 뭉쳐 특공 작전을 외쳤다. 이것에 걸려든 이들은 주로 학도병이나 갓 소집된 신병들이었다. 다시 말해 군사 요원으로서 전력상 지위가 낮은 순으로 특공 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특공기 조종사들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의사만으로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반드시 따져야만 하는 쇼와 육군의 체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체질이 충분히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766, 781-2)


"1945년 3월, 고이소 내각은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국민의용대 조직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국민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6월 13일에는 각료회의에서 법적인 틀을 마련했다. 의용병역법으로 명명된 이 법률은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성,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의용 병역을 부과한다는 내용으로, 말하자면 국민을 모조리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민 전원이 병사가 되는 군사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이 국가총력전 구상의 귀결이었다." "이리하여 병사 수는 확보되었는데, 정부는 참모본부의 방침에 호응하여 본토 결전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지기 위해 국민의 사유재산에도 제한을 가하기로 했다. 3월 28일 공포된 「군사특별조치법」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진지를 구축할 때 국민의 모든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국민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어떤 항변도 허용되지 않았고, 참모본부나 군령부에서 명하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806)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GHQ 내부에서는 G2와 GS(민정국)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G2는 군인이 중심이어서 철저한 반공 노선을 취했고, 여차하면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추후 제정된 일본국헌법이 재군비를 금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가까운 시일 안에 재무장을 허용하여 반공의 보루로서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주도한 사람이 윌로비였다." "윌로비와 대립한 사람은 GS를 지휘하던 국장 휘트니였다. 그는 쇼와 육군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했고, 일본에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 군사 조직을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세력으로 간주했다. 윌로비와 휘트니는 맥아더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윌로비는 휘트니 등의 민주적 개혁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그가 (원칙대로라면 전범으로 간주되었어야 할) 핫토리를 비롯한 과거의 막료들을 감싸고 돈 것은 일본의 재군비가 진행될 경우 그들을 지도부에 포진시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978-9)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들 군인의 변절이 왜 이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느냐는 점이다. 작전참모의 졸렬한 작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장병을 생각하면 이들의 재빠른 변신을 다시금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핫토리는 작전과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모본부의 작전 전반을 관장했다. 그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그럼에도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은 핫토리 자신의 윤리관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맥아더의 전사를 집필하는 작업은 과거 일본군 군인들에게는 물론 알려지지 않았고 GHQ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947년 5월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2년 반 후인 1950년 12월에 마무리되었다. 개전부터 패전까지 일본 측의 핫토리 그룹이 작성한 원고는 방대한 분량이었던 듯하지만, 구성원 개개인에게는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핫토리와 윌로비가 암암리에 이들이 작성한 원고를 수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87)


"1953년에 간행된 『대동아전사』(저자명 핫토리 다쿠시로)에는 맥아더의 『태평양전쟁사』 편찬 그룹에 속한 멤버의 이름이 보인다. 이 10명의 면면을 보면 패전 시 대좌 3명, 중좌 6명, 소좌 1명이다. 그러니까 참모들이 전쟁사 편찬의 주체로 참가했던 셈이다." "패배한 군대의 장수(그들은 물론 좌관급이었다)는 전황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전장에서 싸운 적이 없다. 단지 참모본부 깊숙이 자리한 방에서 지도를 보며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시에 그들은 사이판의 방어진지가 맥없이 무너지자 이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사단의 잘못으로 돌렸고, 레이테 섬에서 일본군이 패배했을 때도 일방적으로 전략을 변경한 뒤 작전이 실패하자 그것을 현지 군의 무능 탓으로 돌렸다. '절대 국방권' 구상이나 '첩호 작전' 등도 책상에서 마련하여 현장에 들이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본영의 참모는 어떻게든 전사를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동아전사』를 관통하는 논조다."(988-9)


"1953년 간행된 논문 「차기 대전과 일본방위론」에서 핫토리는 미일 전쟁의 발발을 미국의 도발과 일본 '중추부'의 개전 의사가 만나 벌어진 결과라고 보는 듯히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 곳곳에서는 그의 자기변명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참모의 명령에 따라 사지로 달려간 200만여 명의 일본군 병사는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패전 후 8년, 전시 지도를 담당했던 장관將官은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총살을 당하거나 자결을 하거나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으며, 사회에 나와서도 생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부사관이나 병사는 시베리아에 억류되거나 남방에서 얻은 병을 치유하는 데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거나, 생활고와 싸우고 있었다. 많은 병사는 가혹한 전장 체험에 가위눌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전참모는 GHQ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일본군 부활안'이라는 두렵고도 무책임한 문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전후사회에서 가장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쇼와 육군 작전참모'의 처세술이었다."(995)


"쇼와 육군의 위계질서는 엘리트 군인과 병사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거니와, 병사란 1전 5리(엽서 한 장 값, 즉 소집영장을 말한다)로 징용된 자이다. 일본은 징병령을 시행했기 때문에 만 20세가 되면 본적지에서 징병 검사를 받는다. 피검자는 신체 조건, 운동신경 등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등급이 나뉘는데, 평시라면 갑종은 2년에서 3년 동안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시민의식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자립적인 개인과 같은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싸우다 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윤리라고 배웠을 따름이다. 쇼와 1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학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신들린 듯 신민 교육이 실시되었다. 전후 쇼와 육군이라는 조직은 해체되지만 그와 같은 일본적 공동체의 잔재는 전우회라는 모임을 통해 이어졌다."(1018-9)


"다수의 전우회에서는 사상적으로 대동아전쟁이 긍정되었고, 전장에서 싸운 병사들의 감정을 반영한 형태로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이처럼 일본군의 행위는 모두 옳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쇼와사의 전승傳承은 옛 병사들의 감정을 기초로 한 것이다. 전우회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월보를 발행하는 곳일수록 이러한 감정론이 활개를 친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인식과 다른 인식(예를 들면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론 등)은 대부분 도쿄전범재판사관이라 결론짓고, 선두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는 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주장은 쇼와 육군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전우회의 단골 메뉴다." "'다른 사람은 나쁘다'라는 이런 주장은 태평양전쟁을 선택한 당시 지도자의 이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해도 좋다. 역사 인식이 그 단계에 멈춰 있다는 얘기다."(1023-4)


"'영령'에 대한 애도와 추도는 전우회의 중요한 역할이다. 전우회원들이 침략 전쟁의 첨병으로 낙인찍힌다면 전사한 동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행하는 추도와 위령은 쇼와 육군이 중심이 된 태평양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는데, 전장에서 싸운 병사의 심정은 도미오카의 말로 대표되듯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나자'는 표어 아래 죽어간 전우에게 미안하다는 것, 그 하나로 수렴된다. 이것은 더 이상 이론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죽은 자는 두번 다시 의사표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야스쿠니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셔지는 것을 양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확인할 길이 없다. 전사 당시의 단계로 한정하여 추도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일본인의 '사생관'에 관련된 문제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전쟁으로 내몰린 세대의 사생관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는 그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1031)


# 전우회의 여러가지 활동

1.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 정당화

2. 전쟁사의 다양화에 대한 통제

3. 전장에서 있었던 행위의 공동 치유

4. 전후사회에서의 이해관계

5. '영령'에 대한 공양과 추도

6. 군인연금 지급 등의 명령서 전달


"1978년 3월 10일,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7명과 스가모 형무소 안에서 병사한 7명 등 총 14명을 합사했다. 이때 궁사였던 마쓰헤이 나가요시는 훗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완전히 전투를 멈춘 것은 국제법상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투 상태에 있을 때 열린 도쿄전범재판은 군사재판이고, 그 재판에 따라 처형된 사람들은 전투가 한창일 때 적에게 살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전장에서 죽은 사람과 처형된 사람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 인식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전투'는 1945년 8월 15일에 끝났지만 '정치'는 1952년 4월 27일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다. 이 전투와 정치를 아울러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야스쿠니 신사는 GHQ의 방침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들(국제주의자부터 사회주의자까지)의 영혼도 함께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1033)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매년 문제가 되고, 〈개인이냐 공인이냐〉는 기자의 질문도 이 합사 사실이 밝혀진 이후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까닭은 가해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고민해야 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우회 중에서 도조가 합사되었다고 하여 야사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곳이 있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야스쿠니 신사는 과연 역사를 모두 팽개치고 성립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으며, 적어도 도조 등을 합사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의 사생관이라는 영역을 넘어 이를 정치 문제화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사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영령을 국가적으로 총동원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역사적으로는 과거의 침략 행위 비판에 정색하고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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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지음, 이승훈 옮김 / 일조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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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모든 면에서 1942년 6월 4일은 분수령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미드웨이 해전은 지난 6개월간 거두어 온 승리의 갑작스런 종막이었다. 태평양에서 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대부분 소멸된 것이다. 일본 해군의 최강 항공모함인 아카기, 가가, 히류, 소류의 손실은 전쟁의 문을 연 세계 정상급 해군항공대를 회복 불가 수준으로 망가뜨렸다." "미드웨이 해전이 일본의 야욕에 제동을 걸고 공세의 주력을 꺾었다면 미군에게는 정확히 그 반대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진주만의 굴욕 이래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고려할수 있게 되었다. 미군이 미드웨이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전장인 과다카날섬에서 싸울 물적·정신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다음 해까지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입은 만큼의 피해는 아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은 1942~1943년에 벌어진 지옥 같은 소모전의 문을 열어젖힌 사건이었다."(16-7)


제1부 서막


"미드웨이 작전과 알류샨 작전은 일본 군부, 특히 1942년 초 일본 해군이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갈피를 못 잡은 결과였는데 넓게 보면 이 어려움의 원인은 전쟁 초 4개월 동안 일본이 거둔 예상외의 대승이었다." "1942년 3월경, 일본은 백인 식민세력을 모두 추방하고 새로운 태평양제국에 필요한 원유와 기타 전략자원을 즉시 조달할 수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남방 자원지대를 확보했다. 중국에서 이미 정복한 땅에 더해 일본은 북으로는 만주, 중국 중부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거쳐 남서쪽의 버마, 말라야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속령은 수마트라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따라 라바울까지 닿았고, 일본 해군의 거점인 추크섬을 거쳐 북으로 쿠릴 열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몇 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본은 인류 역사상 광대한 제국들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61-4)


"1942년 초, 일본 해군의 관점에서 보면 전략적 선택지가 여럿 있었다." "첫 번째 전략적 선택지는 공세에서 수세로의 태세 전환이었다. 나구모의 참모장 구사카 소장은 이 견해의 주요 지지자였다. 1942년 초에 일본은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얻은 것을 공고히 다지지는 못했다. 일본은 방어선 외곽을 강화하여 미국의 반격에 대비해야 했는데 외연을 확장하는 한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방어태세로 전환하면 이미 총력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연한 항공모함부대는 함재기와 조종사들을 보충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논점은 옳았으나 구사카는 이 계획을 대변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구사카와 상관 나구모는 진주만 기습계획에 반대했다. 그 결과 모순되게도 기동부대의 최고위 간부 두 사람은 연합함대에서 발언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접근은 일본 해군처럼 공격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직의 지지를 받기에 너무 수동적으로 보였다."(70)


"두 번째 선택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이었다. 목표의 크기로 볼 때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보였지만 몇 가지 매력적인 점도 있었다. 크기만 컸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인구밀도가 낮았고,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몇 개 사단 정도였다. 영토 크기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해안선 전체를 방어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이 '어딘가에는' 확실하게 상륙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육군은 작전 실행에 최소 10~12개 사단이 소요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 제안에 재빨리 찬물을 끼얹었다. 육군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인력을 빨아들이는 수렁이었다. 따라서 육군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복에 몇몇 이점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간단히 말해 필요한 병력과 수송수단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멀리 남쪽으로 작전을 확대하면 해상보급능력 밖에 있는 전역戰域을 추가하게 된다고 해군의 아픈 곳을 찔렀다."(71)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야마모토의 의중에서 과도한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했다. 쓸모가 있건 없건 항공모함의 존재는 일본이 벌인 전쟁에 내재된 모순 그 자체였다. 일본이 개전 초기에 거둔 승리는 눈부셨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의 산업 잠재력이 존재하는 한 결국 속빈 강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출구전략이 없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야마모토가 내놓은 '미 함대 격멸을 목표로 한 공세 지속'은 당연했으나 공허한 답이었다. 야마모토는 미국이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 항공모함을 유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야마모토는 하와이를 위협하는, 중간 어디쯤의 목표물을 공격한다면 미국이 격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목표물이 하와이 주둔 항공전력의 작전범위 밖에 있어야만 하와이 주둔 미군기가 전투에 끼어들 여지를 줄일 수 있었다. 야마모토가 선택한 목표물은 '미드웨이 제도'였다."(78-9)


"4월 18일 아침,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미드웨이 작전계획을 히로히토에게 상주한 지 불과 이틀 뒤, 미 육군 B-25 쌍발 중형폭격기 16기가 마법처럼 도쿄와 다섯 도시 상공에 나타났다. 육군항공대 제임스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폭격기들은 일본 해안에서 약 400해리(74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도달한 항공모함 호닛에서 발진했다." "직설적으로 말해 둘리틀 공습의 군사적 결과는 웃어넘길 정도로 미미했다. 몇몇 목표물이 눈먼 폭탄 몇 개를 맞았고 요코스카의 선대에서 개장 작업 중이던 항공모함 류호가 가벼운 손상을 입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습의 심리적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둘리틀 공습의 효과는 바늘에 찔린 정도였지만 야마모토가 중부태평양 작전에 대하여 육군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확고한 역할을 했다. 미 항공모함들이 확실하게 바다 밑에 가라앉지 않는 한 본토는 이런 공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4월 18일 이후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연합함대, 군령부, 육군 공통의 절대 목표가 되었다."(90-1)


모든 것이 계획대로 풀린다면 미 함대는 일본군 상륙 후 미드웨이 수역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야마모토는 적 함대가 미드웨이 부근에서 여봐란 듯 움직일 곤도 부대를 습격하기 위해 오아후섬에서 서쪽으로 출격하여 북쪽으로 항해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연합함대는 미 해군이 항공모함뿐만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전함까지도 이 결전에 끌고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더 나아가 연합함대는 미국 항공모함들이 전함 중심의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작전하며 서북서쪽에서 이들을 엄호할 것이라고 상정했다. … 그러나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이 노후 전함을 빠른 항공모함과 같이 운용한다는 개념을 폐기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 일본 해군은 잠수함 공격과 항공모함의 공습으로 약회된 미 함대를 마지막에 전함들이 포착하여 격멸할 것으로 기대했다. 어떤 의미에서 야마모토의 계획은 함포 위주 철학으로의 회귀였다. 여기에서 나구모 부대 항공모함의 역할은 결전 전에 적의 전력을 소모하는 역할로 격하되었다. 102-3)


"쓸데없이 교묘하고 복잡한 작전은 전전戰前 일본 해군 작전의 전매특허였다. 일본 해군의 함대 연습은 대개 일본 측의 정교하게 짜인 함대 기동에 편리하게 맞춰 미숙한 미국 해군이 서투른 기동으로 맞대응하다가 언제나 결국 전멸당하는 판에 박힌 공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전략적 꿈나라에 빠진) 야마모토는 함선 22척만으로 작전의 핵심인 미드웨이 무력화를 수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본의 수적 우위를 무위로 돌리는 어리석은 작전을 폈다. 22척은 야마모토가 다양한 작전목표로 태평양 전역에 뿌려 놓으려 한 함선 수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알류샨 작전은 일본 해군이 경솔하게 정한 목표들의 정점에 있다. 어떤 기준으로도 더치하버 공습은 50여 척에 이르는 함선을 보내기에 좋은 구실이 아니었다. 알류샨 작전이 양동작전으로조차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귀한 전략자산을 이렇게 비전략적 목적에 쏟아부은 결정을 이해하기가 어렵다."(104)


"그러나 1942년의 일본은 극히 제한적으로 미국의 전력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해전을 벌인 경우가 많았다. 일본 해군은 전투를 피하는 적을 공격하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 4개월 동안 일본군의 이러한 자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적대관계가 시작된 이래 연합군은 끝없는 패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장병 개개인의 용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연합군의 장비, 교리, 훈련 등 많은 부분에서 일본보다 뒤쳐졌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미국의 사기가 완전히 무너진 적은 없었으나 그때까지 미군의 군사적 능력에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껏 미 해군이 겪은 패배를 볼 때 일본 해군이 당연히 미 해군이 원양에서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105)


"많은 전후 연구자들은 야마모토가 나구모 부대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위치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결정을 비판해 왔다." "나구모 부대가 전함의 포격지원이 필요했다면 주력부대를 분리해서 유지하되 나구모 부대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운용하는 방법이 더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사실 나구모 부대 지원은 주력부대의 목표인 미 함대 격멸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었다. 야마모토 계획의 핵심은 격멸이었다. 만약 미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진주만 밖으로 유인해야 한다면 일본군 총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도록 적을 기만함과 동시에 상호지원이 가능하게 함대를 배치할 길은 없다. 이 두 목표는 양립할 수 없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두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음을 알았고 따라서 필요하다고 여긴 은폐를 위해 상호지원을 기꺼이 희생했다. 사실 적을 속여서 꾀어낼 수 있다고 본 전제가 처음부터 작전계획을 망쳐 놓았다."(108-9)


"모든 합리적 기준으로 봤을 때, 나구모 부대가 미드웨이에서 물량 우세를 유지하려면 5항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실제로 미드웨이 작전의 실행 가능성은 포트모르즈비 공략작전에서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보유한) 5항전이 심각한 손해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도박은 큰 실수였는데 두 작전 중 더 중요한 작전이 덜 중요한 작전의 인질로 잡힌 모양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효용 극대화'와 전력 분산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력을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 더 신속한 세력 확장을 기대할 수도 있으나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국지적으로 우세한 적이 작게 나뉜 아군 전력을 각개 격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일본이 점유한 항공모함 전력의 우위는 예상보다 빨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한 번 수적 우위를 잃으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12-3)


"도상연습 종료 이틀 후인 1942년 5월 8일, 제4함대의 이노우에와 5항전으로부터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과 교전을 치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첫 상황보고의 내용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정규 항공모함들과 떨어져 단독 작전 중이던 경항공모함 쇼호가 공습을 받아 격침당했고, 후속 교전에서 일본 함대는 요크타운과 새러토가라고 여긴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침몰 직전 상태로 만들었다고 믿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일본이 새러토가로 잘못 본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손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도망쳤다." "일본군이 생각했듯이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이 모두 격침되었다고 가정해도 미 해군은 태평양에서 가용한 항공모함 3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이 최대 3척의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고 미드웨이 기지항공대가 다가오는 전투에 투입된다면 기동부대는 더 이상 물량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119-21)


"일본 해군 교리의 기본 원칙은 미국의 수적 우위 상쇄였다. 수적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는 통합·집중된 화력 사용의 원칙을 신이 정한 법의 차원으로 격상한 전술교리라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은 강력한 무기로 보다 먼 거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미국의 수적 우세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 임무에 과도하게 편중된 일본 해군의 교리는 왜곡되었다. 교리는 한 종류의 전투만 비현실적으로 강조했고 제해권 확립, 수륙양용 세력투사, 통상보호 같은 다른 열강 해군들이 수행하던 전통적 임무를 깡그리 무시했다. 그 결과 1930년대 말에 일본 해군의 전술 교리는 기형적으로 공격 원리에만 집중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교리에는 전쟁 전반기에 실전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부분이 많았으나(예를 들어 뛰어난 야간전투 능력)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 진정한 지적 기반은 되지 못했다."(147-8)


"일본 해군이 받은 압박은 무기체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의미에서 전투함과 비행기는 교리의 물질적 형태이다. 따라서 무기체계는 해군 전체의 전투 방법에 맞추어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야 의미가 있다." "일본 함선은 속력과 화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본 해군이 변함없이 추구한 전술적 통일성에 잘 맞는 요소였다. 항공기에도 해군의 항속거리, 화력, 기동성 선호라는 교리 일반이 반영되었다. 반면 일본 함선 설계에서는 구조강성, 항해안정성, 방어력, 손상통제가 경시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 항공기들은 공격력을 갖추었으나 그만큼 공격받을 때 버텨내기가 어려웠으며, 잘 훈련된 조종사가 조종하면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나 조종사를 보호하는 기능은 뒷전이었다. 일본 함선과 항공기는 인명손실이 덜 치명적인 요소인 단기 해상분쟁에 적합했으며, 장기전이 가능한 진정 저력 있는 해군이 의지할 비장의 카드는 아니었다."(148-9)


제2부 전투일지


"6월 4일 오전 7시~8시 사이, 일본군이 도모나가 공격대 108기를 띄우는 데 고작 7분이 걸린 반면,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고작 9기가 더 많은 공격대를 발진시키는 데 거의 한 시간 동안 고전했다. 미군 공격대는 전투기 20기, 급강하폭격기 68기, 뇌격기 29기로 총 117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연합 공격대를 편성하는 대신 2개 비행단을 3개 방향에서 접근시켰다. 나중에 같이 발함한 공격대 일부는 잠시 후 따로 떨어져 나가 목표를 향해 각자 비행했고, 그 결과 전력이 더욱 분산되었다. 따라서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 함대에 어찌어찌 도착했더라도 요크타운 공격대를 제외하고는 비행대 단위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8시경에는 나구모와 기동부대의 운명이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위치를 파악했고 확실하게 큰 타격을 입힐 전력을 상공에 띄울 수 있었다. 이제 적을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265)


"이 사실은 나구모의 선택을 둘러싼 질문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가장 속력이 느린 일본군 함상기인 97식 함상공격기의 순항속력은 138노트(255킬로미터)였다. 따라서 일본군 공격대가 미 기동함대까지의 거리인 200해리(370킬로미터)를 가려면 약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러나 최선의 상황에서도 08시 38분에야 겨우 공격대 발진을 개시한 요크타운을 공격하려면 나구모는 07시 15분에는 공격대를 띄워야 선제공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구모는 적어도 06시 30분에는 공격대 배치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더 나아가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이 공격대를 발진시키기 전에 공격하려면 늦어도 05시 30분에는 공격대를 발진시켜야 했다. 따라서 나구모가 관련 정보를 가지고 참모들과 토론하던 07시 45분~08시에는 미군의 선제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날 아침의 사건들을 되돌리기 위해 나구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266)


"이 상황을 야기한 진짜 중요한 정찰 실패 책임은 지쿠마 1호기에 있었다. 지쿠마 1호기는 나구모에게 제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유일한 정찰기였다. 이 정찰기가 정확하게 항로를 따라 수면에 더 가까이 붙어 비행했더라면 06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미 기동함대를 발견했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나마 결정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시간대였다.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로 나구모는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한 시간 이상 잃었다. 도네 4호기의 지각 발함이 아니라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가 전술적으로 부정적 효과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지쿠마 1호기의 실수는 더 큰 실패의 일부일 뿐이다. 아침 정찰에 쥐꼬리만 한 수의 비행기를 투입한 것이야말로 나구모의 성공 가능성을 해친 원인이다." "일본군은 정찰에 좀 더 많은 비행기를 투입했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교리와 공격 위주의 가치관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266-7)


"08시 00분~09시 17분, 공중에서 난타전이 벌어지던 당시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사건의 전후관계를 재구성하려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나 당시 아키기의 함교에 있던 이들에게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군은 물리적으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끊임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불행히도 기동부대는 자신의 박자에 맞춰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적에게 끌려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적의 공격에 대한 기동부대의 여러 반응 가운데 최소한 함대방공만큼은 중앙통제를 거의 받지 못했다. 08시 00분경 직위전력이 급격히 감소한 데 대해 각 항공모함의 비행장은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해 직위전력을 보강했다.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며 필요한 일을 파악하고 교통정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상황이 조금 잠잠해지나 싶으면 공습경보가 또 울렸다. 일본군은 미군 공격대들이 계속 밀려들자 거의 반사적으로 대응했고 되는대로 찔끔찔끔 직위기들을 올려 보냈다."(282)


"레이더는 다가오는 위협을 미리 보여 주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이 장면은 일본군이 사전에 적기 내습을 경고해줄 레이더가 없어서 전투에서 이길 기회를 상실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직위기와 미군기의 교전 가능한 유효거리가 짧아졌다. 일본군의 조기경보는 진형 외곽에 있는 순양함과 구축함이 담당했다. 조기경보를 맡은 순양함과 구축함은 항공모함에서 보이는 거리까지만 대형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직위기들은 자주 항공모함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미군기와 교전했다. 제로센은 아군 함대 상공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미군기를 추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 행동일뿐더러 직위대가 효율적으로 작전하기에 필요한 공간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좀 더 먼 거리에서 적기를 탐지할 수 있었다면 미군 공격대의 상당수는 일본 함대에 도달하기 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282-3)


"10시 00분 경, 지금까지 연이은 미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에 대한 일본군의 태도가 경멸로 변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B-17을 제외하고 내습한 모든 미군 공격대를 분쇄했다.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 자만심이 만연했을 것이다. 공격대 발진이 지연되어 다소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나 고급 간부들의 증언 어디에도 이때 진심으로 전투의 최종결과를 걱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월드론과 린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자 겐다는 공습으로부터 함대를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는 작전 초기의 우려가 사라졌다고 언급했다. 미군의 공격이 성가셨고, 심지어 미드웨이 공습이 지연될까 봐 우려한 것도 사실이나 진정으로 절박함을 느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실제로 그러했다면 이는 기동부대 수뇌부가 적의 능력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계점에 다다른 함대방공 체계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319)


"기동부대의 일부 조종사들은 상황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미군은 쉴 틈 없이 공격해 왔으며 이제 전방위에서 기동부대에 도달했다. 직위대는 원거리에서 적을 탐지할 방법이 없었고 모함의 관제유도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 오는 '위험 방향' 단 하나만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조종사들은 거의 모든 방향에서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협에 계속 눈을 부릅떠야 했다. 따라서 직위기대는 대형 곳곳에 분산되어 대공경계를 맡은 함선이 내는 시각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며 모함 근처에서 작은 소대 단위로 비행하다가 자신의 구역으로 날아오는 적기를 덮치기 위해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투기의 탄약 소진은 함대방공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위험신호였다. 특히 방금 적을 격퇴했다면 더 그랬다. 결론적으로 조종사와 비행장은 나구모의 참모 누구보다도 현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320)


"10시 02분과 03분 각각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공격대에 포착된 일본 기동부대는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이전에는 제병통합의 이점이나 전투기 지원도 없이 단독 행동한 비행대들(해병항공대의 VMSB-241, 해군항공대의 VT-6, VT-8 및 육군항공대 소속대 등)이 진입해 와서 다시 둘로 나뉘어 일본 항공모함 1척을 양면에서 공격했다. 이번에는 3개 폭격비행대와 1개 뇌격비행대가 동시에 공격했다. 미군 비행단 2개[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가 2개 축선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는데 게다가 우연의 일치로 이들은 같은 시간에 목표물 상공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두 비행단의 3개 비행대[VS-6, VB-6, VB-3]는 고고도에서, 1개 비행대[VT-3]는 비교적 저고도에서 다가왔고 추가로 전투기[VF-6]까지 투입되었다. 이번 공격은 이날 아침 일본군이 마주친 공격 중 가장 위험했다. 그리고 일본군 함대방공은 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게 된다. (항공모함 3척의 대파로 이어지는) 파멸적 실패였다."(324)


"제2차 세계대전기의 군함은 놀랍도록 화재에 취약했다. 윤활유, 용제, 가솔린, 수천 톤의 연료 등의 형태로 실린 석유 제품에서 풍기는 강한 냄새가 함선에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에서 가장 큰 위험은 항공유[경질유] 급유체계였다. 항공모함에서는 격납고 안이나 비행갑판에서 비행기에 급유할 수 있었다." "전·후방 항공유 탱크는 수직으로 설치된 항공유 주관主管들로 수평배관(고옥탄 항공유와 일반유용 하나씩)과 연결되었고, 수평배관은 격납고 갑판 전체를 둘러 설치되었다. 비행갑판 주변의 움푹 들어간 곳에 설치된 항공유 공급장치는 수직배관으로 연료를 공급받았다. 따라서 모든 항공모함은 항공유 공급배관으로 촘촘히 둘러싸여 있고 항공작전 중에 모든 배관은 가연성이 높은 항공유로 가득 찼다. 더구나 모든 배관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연료배관을 타고 멀쩡한 부분까지 영향을 받아 결국 항공유 탱크까지 문제가 퍼질 소지가 있었다."(361-2)


"일본 항공모함 설계와 운용의 두 번째 문제점은 항공병장의 이송과 보관이었다. 충실한 화염방지 설비 및 바베트barbette와 주포탑의 장갑으로 탄약이송 시설을 보호하던 전함이나 순양함과 달리 항공모함, 특히 일본 항공모함의 보호설비는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항공병장의 반출은 전함의 포탄 반출보다 더 위험했다. 범용 고폭탄과 대함용 철갑탄은 장갑 관통을 위한 탄체에 대부분의 무게가 실린 전함 철갑탄보다 작약량이 많았다. 범용 고폭탄은 무게의 약 50퍼센트를 작약이 차지했고 경장갑 목표에 투하했을 때 같은 무게의 포탄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불행한 점은, 폭탄이 아군 항공모함의 내부에서 터져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항공모함 폭탄고의 장갑방어 수준은 최소한도였다. 이러한 설비는 평시 운용조건에도 간신히 적합한 수준이었으며 만약 격납고 갑판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다면 대참사로 이어질 터였다."(362-3)


"자랑스러운 아카기는 제1항공함대 창설 이래 14개월 동안 나구모의 기함이었다. 나구모는 이제 아카기 (그리고 가가와 소류) 없이 항공모함(히류) 1척과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5척으로 이기든 지든 싸워야 했다." "나구모의 항공전력이 항공모함 1척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히류의 비행기들이 반격 중이었으므로 승리할 가능성을 조금 더 높일 수 있었다. 일본군이 미군 뇌격비행대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음을 알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뇌격기 없이 미군이 나구모의 전함들을 격침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전함은 항공모함보다 급강하폭격기의 폭탄을 훨씬 잘 견딜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3전대의 하루나와 기리시마, 그리고 빠른 속도의 강력한 어뢰를 갖춘 8전대의 도네와 지쿠마가 공습을 뚫고 적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만했다. 만약 히류 공격대가 단 1척이라도 적 항공모함을 무력화한다면 이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392-4)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적의 전력이 확실히 압도적이었으므로 히류 혼자서 전투의 향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영리하게 싸워야 했다. 히류를 곤란한 상황에서 끄집어내려면 히류가 적 항공기의 행동반경 한계점에 있어야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후퇴시킬 수 있었다. 나구모나 야마구치가 이런 방책을 떠올렸다 해도 이대로 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둘 다 당연히 싸우고 싶어 했고 싸움은 공격을 뜻했다. 그러나 이대로 공격하는 것은 적의 배만 불려 주고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 다 비난받을 부분이 있다. 나구모는 히류의 운용과 관련해 직접명령을 등한시함으로써 야마구치가 히류를 직접 운용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나구모는 수뢰전 지휘관으로 퇴행해 버리고 말았다. 나구모는 일본군 전체 전력에서 가장 중요한 단 1척의 함선[히류]의 운명에 신경 쓰는 대신 자신이 하려는 수상전투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396-7)


"히류가 동쪽으로 돌격하는 동안 공격당한 세 동료는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렸다. 아카기, 가가, 소류에 화재가 발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자 영구적 구조 손상이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통로가 추락한 아카기와 가가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는데, 엘리베이터 통로가 일종의 연통 역할을 하면서 위로 연기를 뿜어내고 아래로 외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양 함 내부는 일종의 용광로가 되었다. 고온으로 장시간 가열된 강철 구조물들이 붉게 달아올라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변형되고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13시 38분, 아오키 함장은 현실을 인정하고 어진영御眞影[덴노의 초상 또는 사진]을 노와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어진영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명정에 실려 노와키로 이동했다. 이제 덴노에 대한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난 아오키 함장에게는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만 남았다. 아카기는 음울한 선회를 계속했다."(436)


"야마구치는 나름의 이유로 미국 항공모함 2척을 대파시켰다고 믿었고(실제로는 요크타운 1척), 이제 세 번째 항공모함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손에 쥔 것이 거의 없었다." "히류의 마지막 시련이 닥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혼성 급강하폭격대가 거의 근접했다." "17시 01분~17시 10분, 이제 히류는 가가와 마찬가지로 폭탄세례를 맞게 되었다. 히류는 왼쪽으로만 선회했고 적이 너무 많은 데 반해 대공화기가 너무 적었다. 엄호하는 제로센 조종사들은 용감했으나 SBD에 비하면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첫 명중탄은 셤웨이가 올린 것으로 보이며 이어서 세 발이 연속으로 명중했다. 모두 1,000파운드짜리였고 전방 엘리베이터 앞에 명중했다. 흥미롭게도 나중에 미군 조종사들은 히류의 비행갑판 앞부분에 칠해진 식별용 히노마루를 편리한 조준점으로 이용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결과는 없었다."(467-71)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전시 공보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중국 및 남방전선의 전황과 관련하여 일본 언론은 관례적으로 불편한 세부상황을 빼고 여과된 소식만을 전했지만 철면피한 날조 보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대중에게 미드웨이 해전은 대승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6월 11일자 『재팬타임스 앤드 애드버타이저』 지는 〈해군 다시 역사적 대첩!〉이라는 제호하에 일본 해군이 미국 항공모함 두 척을 격침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며칠 후 전과에 미군 중순양함 1척과 잠수함 1척이 추가되었다. 언론 보도에서 일본군의 손실은 애매하게 표현되었으나 6월 11일, 유명한 해군기자이자 군사평론가인 이토 마사노리가 한 방송에서 일본이 항공모함 2척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토는 미드웨이에서 거둔 〈상상을 초월한〉 성과에 비해 미미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상상을 초월한〉은 사실이었으나 이토가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른 의미였다."(555-6)


"대다수의 부상병들은 비밀 환자로 분류되어 특별병동에 따로 수용되어 다른 환자, 수병, 가족들과 완전히 격리되었다. 기동부대의 파멸에 대해 어떤 말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이등국민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간부 대다수는 격오지로 발령 받았다. 수병들은 남태평양에서 전투 중인 부대들의 보충병력으로 지정되어 가급적 신속히 배치되었다. 생존자들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남태평양의 최전방으로 보내져 최후를 맞았다. 일본 해군은 아군조차도 모욕적으로 처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실수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반면 이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연합함대 지휘부와 참모진에는 부상자들이 겪은 불명예스러운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여전히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 나구모는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중심으로 새로 편성된 항공모함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555-7)


제3부 결산


"일본 해군이 경험에서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1905년 쓰시마 해전의 승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쓰시마 해전에 승리한 후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에서 결정적 패배의 원인이 될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이 세 가지 전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대결할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불건전한 방향으로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뿌리 내렸다. 미국과의 분쟁은 압도적 산업생산량으로 계속 양적 우위를 누릴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양 대 양으로 싸울 수 없었던 일본 해군은 우월한 기술과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일본민족의 고유한 정신]가 결합하면 질로써 양을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근본적 믿음에서 모든 교리와 함선설계 사상이 탄생했다. 그 결과 일본 해군에게는 열강 해군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역할들, 예를 들면 교역로 보호, 통상 파괴, 상륙 지원 등은 부차적 위치에 머물렀다. 일본 해군에게는 오로지 속도, 거리, 화력이 전부였다."(575-6)


# 쓰시마 해전(1905)이 일본 해군 교리에 미친 영향

1. 분쟁을 국지화하고 제한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 해군력이 분쟁의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 지리적 길목만 수호하면 되었던 러일전쟁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은 광대한 태평양 전체가 활동영역이었다.

2. 주력함대 사이의 결전에서 승리해야만 완전한 제해권을 획득할 수 있다. → 미국 같은 거대한 나라는 아무리 크게 패배하더라도 단 한번의 결전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 즉, 전쟁의 향배를 결정할 결전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3. 방어보다 공격이 우선한다. 적절한 거리에서 적보다 큰 화력을 동원하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일본해군의 일선 전력은 막강하지만,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장기전을 치를 만한 특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가장 중요한 학습 실패는 태평양전쟁의 첫 5개월간의 경험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관념과 정반대로, 적에 대한 일본군의 물량우세가 미드웨이 직전까지 대승을 거둘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원인이 승리병이건 전훈에 대한 대한 무관심이건 간에 결과적으로 1942년 상반기에 일본 해군에서는 치열한 지적 고민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항공모함 집중운용의 이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작전을 적게 수행하되 항공모함을 한꺼번에 많이 투입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정확하게 그와 반대로 행동했다.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이 지나치게 많은 목표를 한 번에 달성하려 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전력을 분산함으로써 지금까지 거둔 승리의 공식을 버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보다 약한 적이 일시적으로 전력을 집중해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밀어 넣음으로써 불필요한 위험성을 높였다."(577-8)


"학습 실패 다음은 예측 실패이다. 코언과 구치가 지적하듯이 〈예측 실패의 핵심은 원래 알 수 없는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지한 위험에 대해 적절한 예방책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학습 실패에 이어 명백히 예측 실패까지 범했다." "야마모토가 놓친 부분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작전계획에서 예상한 시간보다 미군이 더 일찍 현장에 와 있을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군은 이미 패배했으며, 미군을 유인해야만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야마모토의 믿음이 여기에 한몫 했다. 야마모토는 미군이 미리 와서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야마모토의 가장 큰 실책은 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적의 의도에 맞추어 작전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적이 패했고, 적을 유인해야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작전을 세운 결과 야마모토는 적을 눈앞에 두고 전력 분산을 결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581-2)


"마지막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현재 상황에 대한) 적응 실패는 신줏단지 모시듯 작전계획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적당한 용어를 쓰자면 '계획 타성'이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만연했는데 이것은 여러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다." "개전 초기에 일본 육해군은 계획에 집착한 데 대한 보상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 시 일본 해군이 보여준 능숙함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의 계획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한 번 공식화된 계획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드웨이 작전을 연기하지 않음으로써 야마모토는 5항전의 항공모함들을 전열에 추가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구모는 미드웨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미군과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작전수행 차원에서 계획 타성은 전투 전이나 전투 중에 상황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금언인 〈적과 접촉함과 동시에 계획의 수명은 끝난다〉를 귀담아들을 사람은 일본 해군에 없었던 것 같다."(585-6)


"종합적으로 전투 경과를 상세히 살펴본 후 나온 불가피한 결론은, 일본군의 패배가 계획의 중요한 부분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리병 때문도, 몇몇 지휘관의 실책 때문도 아니었다. 일본군의 패배는 전투의 모든 측면, 즉 전략, 작전, 전술에 퍼진 실패들이 복잡하게 얽힌 총체적 난국으로 인한 결과였다. 모든 부분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다. 표면상 드러난 문제의 근저에 있는 원인은 수많은 개개인이 저지른 실수의 총합일 수도 있다. 그중에는 중대한 실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일본 군부와 일본 해군의 문화, 교리, 그리고 선호한 전투방법에 내재된 더 큰 문제점이 일으킨 병의 증상에 불과하다. 이 모든 실패는 과거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배우지 않고, 미래를 위해 견실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계획에 결함이 있음을 인지하고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조직의 최종 산물이다. 이 모든 문제의 씨앗은 일본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인 쓰시마 해전 이후에 뿌려졌다."(589)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초창기 연구들은 흔히 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면서 일본 해군 최정예 비행사들도 크게 손실되어 일본의 세력 확장이 저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탑승원 121명의 전사, 실종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자체가 재앙은 아니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개전 전에 항공모함 발착함이 가능한 비행기 탑승원 2,000명을 보유한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반적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지는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지독한 소모전을 겪으며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력은 급전직하했으며 산타크루스 해전을 거치며 전쟁 전의 정예 탑승원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존 프라도스는 여기에 더해 정예 정비원과 기술인력의 손실을 지적한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항공모함의 정비기술 인력 중 721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승선 인원의 40퍼센트에 해당한다. 미국보다 덜 산업화된 일본 사회를 생각해 보면 대체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592-3)


"탑승원, 기술인력, 조직 지식의 상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42년에 일본 입장에서 비행기는 귀중한 자산이었으며 인적, 조직적, 전술적 자원의 총체적 가치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중요한 자원을 자주 낭비했다. 그러나 항공모함 손실의 중요성에 비하면 앞서 말한 자원의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행기와 조종사를 싣고 전장으로 갈 항공모함 없이는 해군항공전의 혁명도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세력투사Power Projection'란 투사될 전력이 발진할 기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동기지는 전체 시스템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요소이다." "개전 당시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6척에 상응하는 정규 항공모함 5척─렉싱턴, 새러토가,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와스프─을 보유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직후 양군의 전력차는 4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 새러토가] 대 2척[쇼카쿠, 즈이카쿠]으로 미군에게 극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반전되었다."(593-5)


"일본 해군은 1944년 11월 시나노가 준공된 후에야 미드웨이에서 잃은 4척을 채울 수 있었다. 항공모함 4척을 상실함으로써 일본 기동부대의 전술적 균일성은 사라졌다. 특성이 비슷한 함들을 함께 운용한다는 생각은 도입될 때부터 일본 해군의 건함 준칙이었으며 쓰시마 해전 때부터 미드웨이 해전 때까지 잘 활용되어 왔다. 진주만을 기습한 기동부대는 견실한 1항전, 재빠른 2항전, 미숙하나 잠재력 있는 5항전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함대였다. 각 항전은 속력, 항속거리, 탑재기 구성 면에서 잘 어울리는 항공모함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비슷한 성능의 함선들을 한 부대로 기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투를 벌이는 중에 함선마다 성능이 다르다면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복잡한 요소 하나를 추가하게 된다. 통일성은 지휘 통제 시 생기는 불필요한 마찰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1, 2항전의 상실은 일본 기동부대의 놀라운 균형과 통일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597)


"단기적으로 보면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이 거둔 승리로 인해 미일 양국 항공모함 수가 균형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이로써 전쟁의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전투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보다 덜했다.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에서 살아남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군이 1943년 말쯤에 바란 최선의 상황은 실제처럼 완전히 절망적이지 않고 근소하게 열세한 상황에서 교전하는 것이었다. 진주만을 기습한 항공모함 6척이 모두 살아남아 1943년에 길버트 제도에서 미군을 상대했더라도 전투는 일본군의 대참패로 끝났을 것이다. 미드웨이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도 낙관적으로 보아 일본군이 전략적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기간은 18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을 손실하여 이 18개월을 잃은 셈이다. 미드웨이의 승패와 상관없이 미국의 거대한 산업생산력은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군이 절대적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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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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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세계가 나치의 폭력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어느 화창한 여름 아침에 미국 대리인과 소련 대리인이 만났다." "우리가 아는 것은 논의를 마치고 나서 소련 측이 미국인에게 나무 상자 하나를 건넸고, 미국인이 상자를 들고 건물을 나갔다는 것이다. 상자 안에는 마이크로필름이 들어 있었다. 필름을 다 펼치면 길이가 30미터나 되었고, 거기에 글은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선들과 점들과 옛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상징들이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것이 전쟁의 판세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마이크로필름에는 신경과민의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악보 252페이지가 들어 있었다. 첫 페이지에는 〈레닌그라드에 바친다〉고 쓰여 있었다. 거기 적힌 암호와 상징들은 백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의해 소리로 바뀌어 라디오 앞에 앉은 수백만 사람들에게 방송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이 담고 있는 은밀한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9-14)


1부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에 음악원에 입학했다. 내전으로 러시아 전역이 아직도 몸살을 앓는 중이었으므로 음식도 난방도 충분치 않았지만, 미챠(드미트리의 '애칭')는 음악으로 힘을 얻었다." "러시아인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항상 시와 음악을 좋아했다. 1920년대 초에 정부는 이 같은 열정을 촉진하려고 애썼다. 볼셰비키 정부는 음악과 다른 예술들이 더 이상 부유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전 노동자에게 교육을 확산하는 일을 맡은 계몽위원회가 공장 근처에 음악학교를 마련하여 연령과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음악원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내보내 인민을 위해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부르주아 가정에 있던 피아노가 끌려 나와 트럭에 실렸다. 성악가,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트럭 뒤에 올라타고 시골을 돌며 쉬고 있는 붉은 군대와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공연을 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야외 현장과 식당에서 공연했다."(50-2)


"예술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열광적인 실험의 분위기가 휩쓸었다. 〈거리가 우리의 붓이고,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다.〉 러시아 미래파 시인이자 화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을 맞아 1만 명이 동원되어 〈차르의 겨울궁전 급습〉을 공연했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를 보며 경외하고 감동하고 즐거워했다. 실험적인 극단들이 시골을 돌며 새로운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광대극, 에스에프 드라마를 공연했다. 미래주의자 마야콥스키는 〈미스테리야-부프〉 같은 기괴한 선전물 연극을 만들었다. 성서의 대홍수에서 용케 살아남은 몇몇 노동자들이 천국과 지옥을 거쳐, 마침내 영광의 새 러시아가 전기와 제조업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새로운 공산주의 유토피아─기계 세상!─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페트로그라드에는 입체-미래파, 신-원시주의, 구성주의, 절대주의, 광선주의, 생산주의 등 새로운 미술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52-6)


"작곡가들도 러시아의 새로운 현대성을 찬양하고자 했다. 최전선에 선 이들은 이제 어둡고 뒤엉긴 화음이 난무하고 천둥처럼 요란한 곡을 쓰거나 크리스털 조각 같은 음악, 그러니까 급격하게 돌출하다가 눈부신 표면이 이어지는 날카롭고 딱딱한 구조의 곡들을 썼다. 미래파에 열광했던 이들은 기계 장치의 굉음과 반복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곡들도 쏟아냈다. 이름에서부터 잔혹한 기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모솔로프의 〈주물 공장〉(마지막에 가서는 타악기 주자들이 거대한 금속 조각을 요란하게 내리쳐서 혼을 빼놓는다), 프로코피예프의 《강철의 춤》, 데셰보프의 《철도》, 오른스테인의 《비행기에서의 자살》 같은 곡들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는 〈오케스트라는 공장처럼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음악을 평균적인 산업 노동자에게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페트로그라드의 한 제조공장에서는 공장의 경적과 터빈 돌아가는 소리로 '교향곡'을 빵빵거렸다."(57)


"1922년 2월, 폐렴으로 아버지를 잃은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애도를 담은 자료를 우리에게 남겼다. 바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이다." "열다섯 살의 작곡가가 쓴 음악치고 뛰어나다. 그와 마리아는 살롱에 모인 음악가들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하여 아버지에게 바쳤다. 모음곡 가운데 한 곡, 환상적인 춤곡은 조야를 위한 곡일 수 있다. 그녀는 댄서가 되고 싶어 했다(화가, 가수를 꿈꾸기도 했다). 드미트리는 종종 여동생을 위해 괴상한 춤곡들을 썼는데,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의 무릎과 뾰족한 팔꿈치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러나 이 밝은 춤곡, 조야의 장난을 나타내는 이 곡에서도 애도의 종소리가 메아리친다. 모음곡에서 가장 뭉클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분위기가 어떻든 간에 다급한 종소리가 가끔 끼어든다. 죽음을 겪고 나서 멍한 순간에 우리가 다른 뭔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슬픔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낚아채는 것처럼 말이다."(64)


"1926년 5월 12일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제2의 탄생'이라고 불렀던 날이다. 그는 평생 이날을 축하했다. 바로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된 날이다.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음악원을 졸업한 뒤에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의 초超현대주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부 극단주의자들만큼 멀리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이후 몇 년간 그의 음악은 보다 넓은 예술적 혁명의 요소들을 많이 보였다. 각진 구성의 묘미, 깜짝 효과가 주는 재미, 그로테스크함에 대한 집착, 아이러니와 빈정거림과 풍자, 밝은 색채와 평평하고 딱딱한 구조의 강조가 그런 예들이다. 글을 쓰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기계화된 세상의 동화 같은 에스에프 오락물, 방향과 논점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교훈 없는 우화들을 내놓았다. 말 없는 음악에 '등장인물'이라는 것이 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인물들은 작가 친구들의 부조리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하다."(75-9)


"1930년대 초반 소련에 불어 닥친 음울한 기운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쇼스타코비치가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얼마나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에 그는 자신이 작곡가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말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가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도록 할까 항상 고민하며, 여기에 실패하면 내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가 무슨 뜻으로 위의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의 옆 소파에는 미국인 인터뷰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부의 공식 통역자도 있었고, 미심쩍은 것은 무엇이든 상관에게 보고했을 소비에트 언론 담당관도 자리에 함께했다.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한 한 학자의 말대로 자유롭게 생각들을 터놓고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103-4)


"발레곡 〈볼트〉(1931)나 〈맑은 시냇물〉(1935)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 러시아 예술계를 휩쓸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요구에 충실했다.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게 되는 양식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딱히 사실적이지는 않다. 아무튼 작가들과 작곡가, 화가들은 더 이상 20년대처럼 꿈, 동화, 부조리, 에스에프적 상상물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묘사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소비에트의 현실이 보편적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소비에트 작곡가 연맹은 1934년 아래와 같은 지침을 내렸다.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무엇보다 현실이 승리를 향해 진보한다는 원칙, 영웅적이고 밝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맑은 시냇물〉을 작곡했을 때 그는 집단 농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불안, 굶주림, 필사적으로 곡식을 숨기려는 노력을 묘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현실이었다."(106)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초연은 1934년 1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두 극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19세기 단편 소살이 원작으로 줄거리는 낡았지만, 음악은 강렬하고 대담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살인을 저지르는 여주인공에 감동적인 숭고함과 깊은 슬픔이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쇼스타코비치는 계몽인민위원을 리허설에 초대했고, 공연을 보고 나서 정부는 《맥베스 부인》이 〈소비에트 오페라의 창조성이 찬란하게 꽃피는 출발점〉이었다고 선언했다. 오페라는 곧바로 성공을 거두었다. 첫 공연이 열리고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해서 쇼스타코비치는 막이 끝나고도 무대에 올라가서 인사를 해야 했다. 동료 작곡가들은 〈비범하고 깊이 있고 관현악 편곡이 뛰어난 작품〉, 〈쇼스타코비치의 창조력의 정점〉이라고 말했다. 레닌그라드 신문들은 오페라가 곧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 대열에 오를 것이라고 흥분했다."(113)


"맥베스 부인이 무대에서 연인과 함께 남편의 목을 졸라 죽인 바로 그해인 1834년 말,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총수 세르게이 키로프가 당 본부의 복도를 걷던 중에 암살범이 경호원들을 용케 피해 꺼내 든 권총에 목을 맞았다. 키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는 크렘린의 스탈린 방에서 묵기도 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스탈린은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들었다. 독재자는 친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처벌하도록 했다. 키로프가 암살된 12월 1일, 국가에 대한 테러로 체포된 사람들은 열흘 이내에 재판에 넘겨지고 유죄로 판명되면 항소 없이 즉각 처형되도록 하는 긴급명령이 통과되었다. 훗날 '대공포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1935년 4월 7일, 스탈린은 아이가 열두 살만 되어도 어른처럼 재판을 받고 처형될 수 있다고 알렸다. 아이들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은 부모는 반역자와 공모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야 했다."(114-6)


# 실제로는 스탈린 본인이 키로프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1월 28일,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를 한 부 샀다. 페이지를 훑어보다가 자신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음악은 없고 혼란 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하여」라는 표제의 기사였다." "스탈린은 왜 젊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고발하려고 했을까? 그것도 2년 가까이 공연되면서 큰 사랑을 받았고 소비에트 오페라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맥베스 부인》을 보고 나서 말이다. 확실한 대답은 모르겠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세계적 명성이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묘사된 성적 분출에 스탈린이 혐오를 느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를 본보기로 삼아 〈진정한 예술, 진정한 과학, 진정한 문학〉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 지도자들 전체를 꾸짖고 괴롭히려 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정권의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고, 그들에게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123-5)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인민의 적이 작곡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특히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은 기이했다. 거대하고 요란하고 성난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조가 이리저리 뻗어가고 모호한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 교향곡이 작아지고 대화의 분위기로 접어들 때면 여지없이 거대하고 섬뜩한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 "결국 결정적인 타격이 찾아왔다. 쇼스타코비치는 강압에 못 이겨 초연을 취소해야 했다. 『소비에트 예술』 잡지에 이런 안내문이 올라왔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자신의 《교향곡 4번》 공연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창조적 확신이 없고 길고 낡은 국면으로 여겨진다는 이유에서다.〉" "잔혹하면서 복잡하게 얽힌 《교향곡 4번》은 쇼스타코비치의 가장 매혹적이고 독창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지만, 공포에 재갈이 물려 대중과 만나기까지 사반세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142-4)


"곡조의 변형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4번》 같은 교향곡들은 특정 사건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예컨대 1악장에서 더듬거리고 덜컹대고 무력해 보였던 여러 주제들이 교향곡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여 쾌활한 거리 무용처럼 연주된다. 그런 다음에 그것들은 짓눌리고 침묵에 던져진다. 뭔가 극적인 것을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에 요동치는 악마적 송가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의 한 구절이 들어 있다. 오페라에서 왕비에게 환호하는 합창단이 노래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왕과 왕비가 벌인 죄 때문에 자신들에게 역병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전의 교향곡에서라면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에게 바치는 찬가를 넣었을 바로 그 대목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이런 구절을 사용했다는 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의 갈채는 병들어 죽어가면서 역병의 책임이 있는 지도자에게 환호하는 도시에서 가져왔다."(146-7)


"쇼스타코비치는 무엇이라도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조만간 그의 침묵도 주위에서 벌어지는 문화 혁명에 대한 논평으로 읽힐 터였다. 침묵은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는 봄에 《교향곡 5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37년 11월 21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번호 47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모두가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다.〉 한 전기 작가의 말이다." "피날레가 결말을 향해 치달을 때 청중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다들 히스테리 같은 흥분에 빠졌다." "청중에게 이 교향곡의 승리는 단순히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날 밤 공연장에 모인 모두가 생존자였다. 모두가 작곡가가 겪었던 고통을 나름의 방식으로 겪었다. 그들은 이제 막 애도할 기회를 얻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함께 슬퍼할 기회를."(175-81)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체포를 피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국제적 명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대공포 소식이 서방으로 새어나갔지만, 스탈린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은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비에트의 가장 유명한 시민이 실종된다면 전 세계가 의심할 게 뻔했다. 그러는 동안 NKVD는 작곡가를 기소할 수 있는 사건을 꾸미려고 자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을 것이다." "나데즈다 만델시탐은 이렇게 썼다. 〈공포의 공기를 들이마신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파멸한 것이다. 모두가 희생자이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인자들,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눈을 감거나 손을 씻은 공범과 아첨꾼들도, 밤에 몰래 후회에 시달린다 해도 그렇다. 전 부문에 걸쳐 모두가 공포로 인한 혹독한 병에 시달렸고, 지금까지 아무도 회복하거나 일상적인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195)


2부


"소비에트 연방 시민들은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나치에 협력한 시민들을 무참하게 죽였던 소비에트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치를 비판하면 투옥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쇼스타코비치와 어울리던 사람들에서 보자면,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과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얼마 전에 〈알렉산드르 넵스키〉라는 걸작을 완성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야만적인 독일 기사단과 전투를 벌여 기념비적 승리를 거둔 중세 러시아 영웅의 이야기다." "1938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화가 개봉했을 때 스탈린은 영화의 친러시아적, 반독일적 정서를 찬양하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영화는 곧 소비에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학생들은 영화에 나오는 합창곡을 노래하고 다녔다. 이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9년에 독일이 동맹국이 되자 뿔 달린 튜턴족 기사들이 침략자로 나오는 영화는 상영관에서 사라졌다. 영화는 나중에 다시 상영되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207)


"전쟁이 발발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군부대를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부대를 돌아다니며 사기를 진작하는 소규모 앙상블이 연주할 수 있도록 노래와 클래식 곡을 단순하게 편곡했다." "소비에트는 슬라브 문화를 열등하고 심지어 인간 이하라고 여기는 적과 싸우는 중이었다. 나치는 특히나 러시아의 문화유산들을 업신여겼다. 마치 러시아의 위대한 사상가, 시인, 음악가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작가 안톤 체호프의 집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레프 톨스토이의 육필원고로 불을 붙였다. 박물관을 약탈했다.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마을을 차지했을 때는 그의 집을 모터바이크 차고로 만들었다." "음악 공연단들이 붉은 군대 해군, 공군, 지방의용군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도록 한 목적은 침략군에 의해 더럽혀진 러시아 문화의 힘과 정통성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레닌그라드 음악단은 시민들과 병사들을 위해 매달 평균 160회의 공연을 했다."(241-3)


"1941년 7월 18일, 시 관료들은 배급카드를 나눠주었고 빵과 버터 같은 생필품을 구입하려면 카드를 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게에는 여전히 값비싼 물품들이 있었다. 아무도 굶주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공식 신문들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식량이 부족해지는 일은 없을 터이고, 독일군은 결코 그곳까지 오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 이런 거짓말에 시 정부도 넘어갔다. 포위되었을 때 사용하라고 소비에트 상공장관이 레닌그라드에 생필품을 실은 거대한 차량을 보냈을 때, 보로실로프 원수와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시 정부가 물품을 받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창고에 공간이 부족〉하다면서 수송된 물품을 거절했다. 훗날 레닌그라드가 굶주림에 허덕이며 1년을 보내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7월 19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 향하고 있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교향곡 7번》 서두를 써 내려갔다. 훗날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 불리게 될 작품이었다."(257-8)


"〈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아주 빠르게 썼다.〉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이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전쟁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 말 그대로 그의 사방이 전쟁이었다. 도시 북쪽에는 핀란드군이 있었다. 서쪽은 핀란드만이었는데 부유기뢰가 떠다니는 죽음의 바다였다. 동쪽에는 라도가 호수가 있었고, 독일군이 호수 남쪽 연안에서 폭격을 가했다. 남쪽은 독일군이 쫙 깔린 전선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세 갈래가 악마의 쇠스랑처럼 러시아의 살갗에 깊게 박혔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포위했고, 소비에트 네 개 부대를 함정에 몰아넣었다. 중부집단군은 스탈린과 국가방위위원회가 두려움에 떨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이제 불과 32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275-7)


"9월 8일,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2악장 작곡을 시작했다. 레닌그라드가 보다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기분으로 작곡된 조심스러운 춤곡 악장이다. 그는 여기에 '회상' 또는 '꿈'이라는 제목을 붙일까 생각했다. 전날 거센 폭격이 있었지만, 기분 좋은 간주곡의 우아한 첫 마디에는 그런 공포의 기색이 전혀 없다. 대대적이고 잘 조직된 독일 공군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로 쳐들어오는 것을 못 본 체 무시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음표를 그렸다." "가볍게 흔들리는 춤곡 악장이 중간쯤에 이르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를 비웃는 패러디가 된다. 중간에 폭발하는 대목은 9월 8일 폭탄이 터졌을 때 그가 작곡했을 법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회상'의 주제를 전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작곡가의 경험과 그가 작곡하는 음악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것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작곡된 온화한 음악이었다."(278-82)


"《교향곡 7번》의 3악장은 느리고 긴 명상으로, 간간이 삭막한 팡파르가 반복되고 변형되어 끼어든다. 원래 그는 여기에 '조국의 광야'라는 제목을 붙였다. 아마도 러시아의 광활함, 시베리아의 타이가 삼림지대, 외로운 자작나무 숲, 찰싹거리는 라도가 호수 연안, 풍요로운 우크라이나 들판에 대한 자부심을 담으려 했던 것 같다. 북쪽으로는 툰드라, 동쪽으로는 사막, 남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록빛 언덕이 닿은 땅, 갈망으로 가득한 곡이다. 지독하게 여린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최종적으로는 악장에 붙인 제목들을 지웠다." "어떤 사랑은 너무도 강력해서 결국에는 슬픔을 항상 속에 묻어야 한다. 그 안에 암호로 새겨진 것은 언젠가는 사랑이 끝나리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를 화염과 먼지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울음으로 채웠을 때 쇼스타코비치가 쓴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9월 29일에 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를 마무리했다."(318-9)


"전세는 1941년 12월 둘째 주에 역전되었다. 소비에트가 모스크바 근처에서 독일의 3개 기갑사단을 모두 물리친 것이다. 거의 500대의 전차를 파괴하여 독일 중부집단군을 흩어지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히틀러의 육군이 진격을 멈추었다. 엄청난 소식이었다. 소비에트 정보국은 며칠째 승리를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3일 마침내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실었다.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접수하려던 독일의 계획이 무너지다: 독일군 패배.〉 (쿠이비셰프로 피난해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어쩌면 이 소식을 듣고 교향곡 작곡을 재개하여 승리의 피날레를 쓰고자 생각했을 것이다." "니콜라이 소콜로프의 회상에 따르면 〈파시스트들이 모스크바 외곽에서 박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쇼스타코비치는] 자리에 앉아 활기차게 신이 나서 작곡을 했다.〉" "잠깐 동안 세계는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얻었다." "그리고 12월 27일, 쇼스타코비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 《교향곡 7번》을 마침내 끝냈소.〉"(358-64)


"오랫동안 러시아인들과 미국인들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5개년 계획과 대공포 시대의 참상을 제대로 아는 미국인은 드물었어도 스탈린과 공산당에 대해 깊이 불신할 만큼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미국의 도를 넘는 자본주의를 경멸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정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것은 전쟁에 관한 곡으로 소비에트 시민의 삶과 독일 침공의 공포, 다가올 영광의 승리를 묘사했다. 작곡가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국제적 유명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 곡으로 서구인들에게 러시아인이 볼셰비키 야만인이 아님을 보란 듯이 말해줄 수 있었다. 그들은 포위된 와중에도 교향곡을 쓰고 있었다. 미국의 전차와 비행기, 통조림 고기들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가 돌아다니는 바다와 독일 공군이 정찰하는 하늘을 넘어 러시아로 전달되는 동안, 러시아 외교관들은 교향곡 악보를 서방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397-401)


"이 작품 덕분에 실질적으로 원조가 늘었을까? 교향곡은 스탈린이 그토록 바랐던 제2의 전선을 만들지는 못했다. 1942년 여름에 동맹국은 유럽으로 치고 들어가 독일을 공격할 생각을 할 만큼 두터운 전열을 갖추지 못했다. 스탈린은 격노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1944년에 가서야 제2의 전선을 펴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 전차, 무기, 의료품, 식량 형식으로 러시아에 보내는 원조는 가파르게 늘었다. 덕분에 소련이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원조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은 전쟁에서 절망적으로 내몰린 러시아를 돕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대중을 설득하는 캠페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였다. 1943년 1월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90퍼센트가 설사 자국의 식량을 줄여서라도 러시아에 더 많은 식량을 원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과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소련은 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430-1)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레닌그라드 초연은 1942년 8월 9일에 열렸다. 의도적인 도발의 제스처로 선택한 날짜였다. 1년 전 히틀러가 아스토리아 호텔 무도회장에서 축배를 들겠다고 떠벌렸던 바로 그날이었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많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의미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강력한 연대감과 우정을 심어주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승리의 희망을 꿈꾸게 했다. 일부 독일인들에게는 슬라브족을 인간 이하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주민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하나 된 일체감을 갖도록 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음악을 와서 들으려고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그날 밤 공연장에 있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진짜 교향곡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향곡, 레닌그라드 주민들의 교향곡입니다.〉"(444-50)


3부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역사는 완벽한 마무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연주한 것은 공세를 전환시킨 계기였다고 지금 기억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전세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그것은 기억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포위는 이후로도 1년 반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점차적으로 레닌그라드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되찾았다. 이미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라도가 호수를 건너 도시로 수백 톤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전함, 화물선, 바지선들이 줄을 이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호수 아래로 파이프가 설치되어 레닌그라드는 겨울이 와도 연료가 부족하지 않게 되었다." "1943년 1월 18일, 마침내 도시를 에워싼 독일의 포위망에 균열을 냈다. 도시 안쪽 군인들과 봉쇄 고리 바깥쪽 군인들이 서로 얽혀 기쁨의 포옹을 나누었다. 포위는 이어졌지만 봉쇄는 끝났다."(457-8)


# 1944년 1월 27일, 고보로프 원수가 공식적으로 해방 선언


"전쟁이 끝나고 소련과 다른 연합국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소련 내에서 서구의 자본주의 정권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제 무엇이든 위험했다. 이미 전쟁 말년부터 NKVD는 미국의 과학기술을 칭찬하는 것을 범죄로 취급했다. 이제 서구 영화, 서구 소설, 서구 음악이 또다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러시아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다. 프랑스의 바게트 빵은 '도시 빵'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렸다. 정부는 다른 나라와 혈통으로 연결된 〈뿌리 없는 세계인〉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뜻하는 말임이 곧 드러났다.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에서 칭송을 받았다. 『타임』 표지에 등장했다. 기사들은 그가 '부르주아'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레닌그라드의 작가들이 또다시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전쟁을 도우려고 애쓴 노력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공격이 다가오고 있었다."(472-3)


"1948년 2월,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명망 있는 음악가, 작곡가, 음악학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소비에트 음악에 대해 논의하고 그들에게 법령 하나를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현대 음악의 〈형식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같은 〈반인민〉 작곡가들의 음악이 〈도로를 뚫는 드릴 소리나 음악적 가스실〉처럼 들린다고 불평했다. 1936년의 공격과 「음악은 없고 혼란뿐」 논란의 재현이었다." "《교향곡 7번》의 성공은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시 그를 공격하고 나선 당의 입장에 자기도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부르주아, 퇴폐적 서구에 영합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러시아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그는 승리의 《7번》을 작곡했고, 전세가 역전되어 러시아가 승기를 잡았을 때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8번》을 작곡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473-4)


"1948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돈을 벌었다." "1953년 3월 1일 이른 아침, 공산당 서기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침대에서 쓰러졌다." "스탈린 동지는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그는 3월5일에 죽었다." "감옥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유대인인) 바인베르크는 간수들이 갑자기 공손해진 것을 알아챘다. 그는 곧 서류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이제 더 이상 숙청은 없을 터였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자신의 이니셜로 만든 음악 모노그램─DSCH─을 선율 속에 은밀히, 하지만 반항적으로 끼워 넣은 곡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불안하게 부르지만 교향곡의 후반부로 가면 위풍당당하게 돌아온다. 마치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하고 소리치는 듯하다."(477-80)


"쇼스타코비치는 남은 세월 동안 교향곡을 계속해서 써서(총 15곡을 작곡했다) 연민과 저항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현악 4중주곡도 잇달아 썼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느린 《현악 4중주 15번》을 어떻게 연주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파리가 공중에서 죽은 채로 떨어지도록, 청중들이 그냥 지루해서 연주회장을 떠나도록 그렇게 연주하시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마지막 악장에 보면 그가 50년도 더 전인 열다섯 살 때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에 썼던 다급하게 울리는 조종 소리의 흔적이 들린다. 당시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금은 조용히 무시무시하게 자신의 죽음을 위한 종을 울린다. 선율은 점차 흐릿해지고 약해지고 아마도 온화해지다가 마침내 알쏭달쏭한 수평선으로 사라진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8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교향곡 7번》이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던 바로 그날이었다."(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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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베르트
한스-요아힘 힌리히센 지음, 홍은정 옮김 / 프란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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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베르트의 빈


"빈이 음악도시로서 명성을 다지던 기간이 '요제프의 10년'으로 역사에 기록된 시기와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제프 2세가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1780~1790)에 오스트리아는 계몽적 절대왕정의 전성기였고, 군주가 거주하는 빈은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가 1781년 잘츠부르크의 안정적 기반을 모두 포기한 채 이주해 올 만큼 매력적인 창작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다." "이 당시의 음악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인 '빈 고전주의'라는 가설이 수용사적으로나 양식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은 어쨌든 이 용어를 붙일 만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시기를 1781년부터 1804년까지로 규정하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하이든의 기념비적 작품인 현악 4중주 여섯 곡(Op. 33)이 출판되고 모차르트가 빈에 정착한 무렵에 시작되어, 하이든이 작곡을 그만두고 베토벤이《영웅 교향곡》으로 음악 지형에 영속적인 변화를 안겨준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끝난다고 보는 것이다."(13-4)


"슈베르트와 관련해서 짚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슈베르트는 빈 음악계의 핵심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고전주의'의 일원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베토벤의 중기와 후기를 통틀어 어떤 작품도 이 역사적 양식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얼핏 보기에는 동일한 공간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것 같지만(베토벤은 1827년에, 슈베르트는 그로부터 1년 반 뒤에 사망했다) 실은 한 세대가 차이 나는 두 작곡가가 '고전주의'라는 음악 유산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음을 의미한다. 베토벤이 젊은 시절의 스승이었던 하이든의 스타일을 모방하면서 고전주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었던 반면, 슈베르트는 살아 있는 듯 보이나 이미 완성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해당 작품들에서 고전주의의 규범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서 살고 활동한 것 같지 않다는 인상마저 든다. 즉, 베토벤의 빈은 슈베르트의 빈이었지만, 슈베르트의 빈은 베토벤의 빈이 아니었다."(15)


"그러나 이 짧은 전성기는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군은 충격적인 패배를 맛보았고, 귀족들의 사유재산은 붕괴했으며, 국가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 모두가 슈베르트의 유년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마침내 빈 회의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이후를 '비더마이어' 시대라 일컫는데, 1800년 이전의 공적 음악 생활은 대체로 귀족이 주도하고 소수 중심이었던 데 비해, 메테르니히 시대의 빈에서는 음악 활동이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귀족의 체계적인 비호 덕분에 비교적 일찍부터 견고한 명성을 얻었던 베토벤은, 이미 안정적인 작곡가로서 기존 제도의 붕괴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슈베르트가 음악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정확히 반나폴레옹적인 왕정복고의 전성기에 해당했고, 빈 소시민계급 출신인 슈베르트는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정 중심의 음악 문화와 더불어 성장했다. 슈베르트는 평생을 가정 음악회 같은 형식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16-8)


2 최초의 시도들과 대가의 기운


"놀랍게도 슈베르트의 초기작들은 단순히 시작을 알리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린 초보 작곡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모든 장르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도이치 번호 10번여까지의 작품들만 보더라도 피아노곡, 가곡, 4중주 혹은 5중주 편성의 현을 위한 실내악곡, 교향곡,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 연극을 위한 서곡, 미완성으로 남은 오페라 《거울의 기사》(D. 11) 등이 있다. 그중에서 적지 않은 곡, 특히 실내악과 관현악곡이 시도에 머무른 채 완성되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모두는 슈베르트가 걸음마 단계인 1810~1811년에 작곡한 것인 데다가 당시의 음악 장르 체계에 속하는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여기서 제외된 것은 교회음악과 협주곡뿐이다." "모든 초기작에서 슈베르트는 아직 서툴렀고,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나 유독 한 장르만큼은 먼 길을 돌아갈 필요 없이 즉시 그만의 스타일을 안착시킬 수 있었다. 바로 가곡이었다."(39-44)


"슈베르트가 가곡에서 그렇게 일찍부터 성숙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의 월등한 시적 재능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슈베르트는 시의 형태로 접하게 된 거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창작했다." "또한 가곡은 별다른 준비 없이 즉석에서 바로 부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사전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칠 필요 없이 초고 악보 한 장만 있으면 연주가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곡은 비더마이어적인 사교나 교양 모임에 딱 들어맞는 예술 형식이었다. 게다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는 장르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작곡 세계와 맞닥뜨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슈베르트는 그 안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여러 기악 장르와는 달리 가곡 분야에서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처럼 그를 주눅 들게 만드는 대가와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Op. 98, 1816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44-5)


"슈베르트의 유년작인 여섯 교향곡은 놀랄 만큼 성숙하고, 음향이 거의 예외 없이 우아하게 울리며, 힘들게 애쓰지 않고 만들어진 듯이 보인다. 게다가 그는 당시 빈에 살고 있던 거장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이 순진하게 작곡했고, 이 장르를 대표하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견줄 생각도 없었다. 물론 이 본보기들이 그에게 자극이 되었을 수는 있다. 여섯 개 중 첫 교향곡은 기숙학교에서 나오기 직전에 완성되었고, 마지막 곡(1818년 2월에 완성)은 부모 집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작곡되었다." "여기에는 독특한 역사적 아이러니도 있다. 21세의 작곡가가 베트벤식 장르 모델과 동떨어진 작품을 쓰고 난 다음에 비로소 베토벤 교향곡을 더 이상은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향곡 작곡가 슈베르트는 유년작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에 수년간 침묵을 지켰고, 그것은 그가 역사적인 모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57-61)


3 위기, 돌파, 자기 결정


"베토벤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슈베르트가 작곡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진작부터 싹텄다. 진지하고 믿음직한 목격자인 요제프 폰 슈파운은 어린 슈베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을 전해주었다. 그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기숙학교 시절 초반이었을 것이다. 〈은밀하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베토벤 이후에 누가 해낼 수 있단 말인가?〉(『회고』, 150).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이 발언은 열 살 더 많은 슈파운이 슈베르트의 첫 가곡을 열광적으로 칭송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슈베르트는 여기서 〈베토벤 이후〉의 근본적인 문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비판적으로 이해했다. 비판적인 자기 이해가 이렇게 일찍, 더군다나 가곡 분야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아 보이지만, 자의식 강한 어린 작곡가의 한숨은 베토벤이라는 철옹성 같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왔을 것이다."(67)


"슈베르트는 1822년 10월 30일에 《미완성》 교향곡 b단조(D. 759)를 악보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1821년 8월에 작곡한 교향곡 E장조에 이어, 베토벤 교향곡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조성으로 작곡하는 두번째 시도였다." "《미완성》 교향곡의 첫 악장은 슈베르트가 처음으로 자기만의 선율적, 화성적 어법을, 베토벤에 의해 숭고하고 장대한 것으로 격상된 대규모 교향곡 형식과 설득력 있게 결합해낸 모델이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해법은 현악 4중주 c단조나 교향곡 E장조의 첫 악장에서 시도했던 형식 실험의 성과가 직접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친구에게 선물로 건넨 것만 봐도 슈베르트가 이 교향곡을 실패작으로 여긴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이미 끝낸 악장들에서 어떤 결함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이 미완성 작품을 갑자기 중단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후 그의 말을 통해 짐작해 보자면, 이 시기에 슈베르트는 아직 자신이 대규모 교향곡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76-9)


4 비운의 사랑: 음악극


"진작부터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보편주의자라 자처했던 젊은 작곡가가 일찍부터 오페라 작곡에 이끌렸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작곡 영역과는 달리, 빈의 극장과 오페라 시스템은 풋내기가 섣불리 파악하고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1820년에 케른트너토어 극장과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두 개의 소규모 무대 작품이 무사히 상연되었고, 그 뒤를 이어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대규모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질 참이었다. 빈의 언론도 이미 여러 차례 기대감을 드러냈다. 1823년에는 오페라 작곡가 슈베르트의 성공이 코앞에 다가온 듯 보였고, 친구들도 신문기사를 통해 그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를 돌파하지 못했고,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가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이 분야에서 충분한 입지를 굳히지 못한 탓이었다. 친구들의 호의적인 지원도 이런 불행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고, 이로써 슈베르트는 빈 오페라계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88-92)


"슈베르트는 한참 동안 휴식기를 가졌다가 몇 년 뒤에 마지막으로 다시 이 장르로 돌아온다. 끝내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음악극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히 컸지만, 1824년 이후 음악극은 결국 채워지지 않는 불운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생의 막바지인 1827년 6월에 작곡을 시작한 《글라이헨 백작》(D. 918)이 그 증거다." "이런 상황은 그의 작품 목록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흔히 언급되는 '위기의 시간'은 바로 무대에서의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분투하던 시기였다. 1819년에서 1823년까지의 슈베르트의 창작 활동을 종합해보면, 작곡 위기의 징후로 여겨질 수도 있는 기악 장르의 현저한 감소는 음악극 분야에서의 성공적인 성과와 확실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다가 1824년 초 슈베르트가 갑자기 음악극에서 등을 돌리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내 중심축은 다시 기악으로 옮겨 갔다. 이제 작곡가의 사후 명성의 기반이 되어줄 대작들을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02-4)


5 대중을 위한 작곡


"오페라 무대로 향하는 문은 가로막혔고, 슈베르트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폭넓은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두 선배 작곡가는 피아노 독주자로 직접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데 비해, 그는 경험은 많으나 실력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슈베르트가 1824년 실내악 작곡에 착수해서 단계적으로 '대교향곡'의 청중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은 대단하다. 그렇게 되면, 그가 작곡한 작품의 실제적인 수혜자는 돈을 지불하고 음악회를 방문한 청중이 된다. 이는 실내악만이 아닌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슈베르트에게도 새로운 방식이었고, 그와 동시에 작곡에서의 사회적 패러다임의 급진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과거에 친구와 가족을 위해 작곡했던 실내악곡이라든가 기숙학교 오케스트라나 하트비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했던 관현악 서곡과 초기 교향곡과는 달리, 1824년 초의 작품들은 확실히 대중을 겨냥한 것이었다."(110-1)


"슈베르트의 후기 현악 4중주는 분명 콘서트용 음악이고,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기존의 가정 음악회와 사교 음악회를 위해 쓰인 곡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디베르티멘토와 세레나데 전통에 젖어 있는 여섯 악장짜리 8중주 F장조(D. 803)만이 여전히 사교 음악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어쩌면 슈베르트가 유명한 베토벤 7중주(Op. 20)를 표본으로 삼아 이 곡을 작곡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8중주에는 슈베르트의 고유한 특성이 잘 담겨 있다. 《송어 5중주》(D. 667)와 《방랑자 환상곡》(D. 760) 같은 대규모 순환 형식의 작품에서 이미 시도해본 것이자 앞으로 등장할 실내악곡에서도 계속 이어질 특성으로, 예전에 작곡한 성악 선율을 변주를 위한 주제로 다시 활용하는 것이었다. 위의 두 작품도 잘 알려진 가곡 선율을 인용했기 때문에 '송어'니 '방랑자'니 하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좌절된 오페라 프로젝트에 쓰인 유용한 재료를 다른 분야에서 재활용하고 보존하려는 것이 슈베르트의 전략이었다."(113)


"그러나 작곡가가 이 시기에 중점을 둔 프로젝트는 '대교향곡'이었다. 《그레이트》 교향곡(D. 944)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의 교향악적 콘셉트를 최대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많은 후세대 작곡가들이 베토벤의 대작 교향곡에 맞먹는 대안으로 생각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알게 된 이후(쿠펠비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1824년 5월 음악회에서 들었을 것이다) 어떤 위협이나 불안도 느끼지 않고 일관성 있게 독자적인 교향곡 모델을 추구했다. 베토벤 교향곡의 특징을 '극적'이라 한다면, 슈베르트 교향곡의 특성은 C장조 교향곡에서 드러난 것처럼 '서사적'이다.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은 훗날 로베르트 슈만이 깊이 매료되어 '천상의 길이'라고 했을 만큼 그 발전과 전개의 폭이 엄청난데, 그로 인해 음악적 시간을 전혀 새롭게 조직하는 방식이 교향곡 장르에 도입되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화성을 새롭게 형상화하는 기술인데, 슈베르트는 이 무렵에 그 기술을 스스로 터득했다."(121)


6 젊은 작곡가의 후기작


"슈베르트와 친구들은 메테르니히 시대를 냉혹한 시기라고 느꼈다. 그에 따라 《겨울 나그네》(D. 911)에 깃든 절망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며, 억압과 경직으로 점철된 절망적인 상태를 음악적으로 그려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슈베르트가 빌헬름 뮐러의 제스처를 하인리히 하이네에게서 재발견했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다. 그는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이면서 (훗날의 슈만처럼) 거기에 내재한 순수한 아이러니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이른바 '세계고世界苦, Weltschmerz'라 지칭되는 존재론적 불안감에 대한 비극적인 풍자에 관심을 가졌다. 《겨울 나그네》 전반부를 당혹스러워하는 친구들에게 슈베르트는 〈몸서리쳐지는 노래 연작〉(『회고』, 161)이라고 소개했다." "비극적 세계관과 불안감에 에술적으로 접근했던 슈베르트는 이를 상쇄할 만한 더 많은 사교와 우정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말년의 그는 와인하우스 렝카이나 징거슈트라세에 있는 카페 보그너를 자주 드나들었다."(141-2)


"1928년 늦여름 슈베르트는 함께 살던 도심의 쇼버 집을 떠나 남쪽 변두리 비덴에 사는 형 페르디난트네로 거처를 옮겼다.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의 뜨거운 여름을 잠시 피해 있을 생각이었으므로, 친필 악보 대부분은 쇼버 집에 두었다. 의사의 충고에 따라 거주지를 바꿨는데, 그것이 도리어 건강에 해가 되고 말았다. 역사의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빈 변두리 신시가지의 열악한 위생 상태는 감염을 일으켰다. 나중의 연구에서는 이를 확실한 근거로 삼아 슈베르트의 병이 장티푸스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쇼버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은 감염이 무서워서 병상의 슈베르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본인조차도 상황이 그렇게 나빠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1828년 11월 19일 심각한 고열과 함께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왔다. 아마 몇 년 전에 받은 수은 치료로 이미 손상된 체력이 병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149-50)


"1828년 7월, 라이프치히의 프롭스트 출판사는 피아노 3중주(D. 929)를 누구에게 헌정하고 작품번호를 어떻게 매길 것이지 물어왔고, 슈베르트는 8월에 이에 대해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답신을 보냈다.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의 기념비를 세울 때 같이 새겨 넣어도 좋을 만큼 중요한 문구이다. 〈존경하는 귀하께! 3중주의 작품번호는 100번입니다. 이 판본이 한 치의 흠도 없었으면 하고, 그렇게 출판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이를 마음에 들어할 사람들에게만 헌정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수익을 낳는 헌사일 것입니다.〉 이제껏 출판된 작품번호 중에서 가장 높은 100에는 명백한 상징성이 깃들어 있다. 슈베르트는 외국에서 출판되는 첫 악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음악을 이해해줄 광범위한 대중을 위해 개인을 겨냥한 헌정을 자랑스럽게 포기했다. 그러나 피아노 3중주의 견본 악보가 11월 빈에 도착했을 때, 슈베르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161-2)


7 에필로그: 슈베르트 수용


"슈베르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차적으로 가곡 작곡가로 여겨졌다. 베토벤의 기악 유산이 작곡가 사후에 더욱 명성이 높아진 반면, 슈베르트의 것은 중심에서 자꾸 밀려났다. 그의 기악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일찍부터 간파한 이들은 연주자나 저널리스트, 학자들이 아니라 베토벤의 유산을 버겁게 여겼던 작곡가들이었다. 1839년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에게서 C장조 교향곡 《그레이트》를 발견한 사람은 로베르트 슈만이었고,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와 프란츠 리스트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슈베르트 음악에 매료되었다. 슈베르트를 평생 동안 깊이 존경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그의 작품을 일찍 접한 덕분에 베토벤의 그늘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경우도 그와 비슷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편파적인 수용은 서서히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곡뿐만 아니라 피아노 음악, 실내악곡, 관현악곡이 제대로 대중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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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음악의 글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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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모차르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1791년 35세의 나이로 죽었고 12월 6일 빈민 묘에 매장되었다. 이 요절을 불러온 급성질환이 무엇이었든 모차르트는 죽기 전 얼마 동안 종종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삶의 실패자라는 느낌이 서서히 엄습해왔다. 빚이 쌓여가고 가족은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에게 소중했던 빈에서의 성공은 불발에 그쳤다. 빈 상류 사회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의 급격한 진행은 아마 삶이 그에게 살 만한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의 사회적 실존이 좌절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의미가 공동화空洞化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마음속 깊이 간절히 바랐던 소망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처절한 상실감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청중의 호응 상실과 아내의 애정 약화는 그가 마지막 몇 년 동안 체험했던 의미 상실로서 상호의존적인 두 층을 이룬다."(9-12)


"다른 한편 모차르트는 육체적이나 정서적 관계에 있어서 사랑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지닌 사람이었다. 모차르트가 어릴 적부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의 삶의 비밀스러운 부분에 속한다. 그의 음악은 많은 부분 호감을 얻으려는 부단한 노력 그 자체였다. 즉 그의 음악은 어린 시절부터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람, 아마 여러 면에서 자기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의 구애求愛였던 것이다. '비극'이란 단어는 피상적이고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즉 그토록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던 그가 아직 젊은 나이인 생애의 마지막 무렵 어느 누구로부터도,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는 것에 대하여 모차르트 일생의 비극적 측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12-3)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유명해진 이들을 이런저런 시대의 정점으로 서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은 이런 정태적 시대 개념을 사용할 경우 기껏해야 과도기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즉, 그것들은 항상 몰락하는 구 계급의 규범과 부상하는 신흥 계급의 규범 사이에 전개되는 역동적인 갈등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궁정 지도층의 기득권이 여전히 대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 덜 위험한 문화 영역에서 표출되는 저항을 원천봉쇄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았던 시대에, 모차르트의 생애는 궁정 귀족이 지배하는 경제에 종속된 국외자로 속해 있었던 시민 집단의 상황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모차르트는 시민 계급 출신 국외자로서 궁정에 근무하면서 놀랄 만한 용기로 자신의 귀족 고용주와 위임자를 상대로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는 개인적 품위와 음악 활동을 위해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패배하였다."(20-1)


"음악 분야에서 모차르트 세대에 이르기까지 음악가가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동시에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처지에 있으려면 궁정 귀족적 제도와 그 산하 기관의 관계망 안에 특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오로지 궁정, 특히 화려하고 부유한 궁정에서 상근직을 얻어야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제후들의 궁정이란 원래 제후의 가정을 의미했다. 음악가들은 그런 큰 집안에서 과자 제조공이나 요리사 또는 시종들처럼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고 궁정의 위상 서열에서 보통 이들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조금 비하해서 표현하자면, 그들은 '궁정 아첨꾼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음악 천재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쳐야 하는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조건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시대 음악의 종류, 소위 '양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4-5)


"시민 계급 출신으로 궁정에서 성공한 대예술가의 특징은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개의 사회적 세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일생과 작품 창작은 이러한 이중적 모순의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궁정-귀족 집단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의 취미 전통을 수용했고 또 반대로 그 집단 역시 그에게서 궁정의 표준에 일치하는 행동을 기대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우리가 좀 조야한 범주로 그 시대의 '소시민'이라 일컫는 특수한 유형을 대표하고 있는데 바로 그 자신이 중간급의 궁정 고용인층에 속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소궁정의 변두리에서 자라났고 훗날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특별한 궁정적 세련미를 몸에 익힌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사교인(homme du monde), 즉 18세기의 의미에서 신사(gentleman)가 결코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 동안 골수 시민의 면모를 지녔다."(30-2)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국가의 중앙집중화로 인해 음악가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자리는 거의 모두 수도 파리나 런던에 몰려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높은 직위의 음악가가 고용주인 제후들과 불화에 빠질 경우 도피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권력과 부, 명성에서 왕의 궁정에 비견되는,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산 프랑스 음악가를 환대하며 망명처를 제공할 수 있는 경쟁 상대의 궁정들이 없었다. 이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위상과 음악가들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는 무수한 궁정과 도시들이 있었다. 구독일 제국의 승계 지역에서 궁정 음악의 뛰어난 생산성을 이 결합태─많은 궁정과 그에 따른 무수한 일자리─와 연관 짓는다 해도 지나친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결합태는 당시 이탈리아와 독일에 비교적 많은 수의 직업 음악가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으며, 동시에 음악가라는 지위와 그들이 고용주에 대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강화하는 요소였다."(43-4)


"물론 모차르트가 아무리 무모하다 할 만큼 대담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미래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우리가 빈 상류 사회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집단 역시 궁정 귀족 가문들이었고, 모차르트는 그들 중 몇 명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선 그는 음악 수업을 통해, 그리고 귀부인과 신사들이 그를 가정으로 초대하거나 그를 위해 주선해주는 연주회를 통해 생활해나갈 작정이었다." "모차르트가 독자적 길을 선택했을 때 잘츠부르크 궁정의 한 동료는 거의 예언자적 형안으로 빈 궁정 사회의 호의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의 명성이 오래가지 않아. 몇 달만 지나면 빈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지.〉 그러나 모차르트는 이미 온 희망을 빈 청중의 호응에, 수도 상류 사회의 여론적 성공에 걸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생애 최고의 염원이었고 동시에 그의 비극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음은 분명하다."(49-53)


"모차르트의 개인적 모반은 언뜻 보기에 당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제국 내에서 '교양'이나 '문화' 개념들을 지향하는 인본주의 저서들 속에 반영되었던 반향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 자신이 한낱 아랫사람이며 기껏해야 고급 연예인 부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게 해준 귀족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보편적 원리들을 통해 정당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이런 악감정들을 근거 짓기 위해 보편적인 인류 이데올로기를 끌어대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베토벤과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이념에 대한 무관심인데 그 차이는 개인적 차이일 뿐 아니라 세대 차이라 할 수 있다. 자신도 귀족보다 못하지 않다는 느낌, 동급으로 대우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주로 그의 음악, 즉 그의 작품과 업적에 근거를 둔다." "궁정 사회에 대한 모차르트의 관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중적이었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진다."(54-5)


"우리는 '천재적 재능'의 성숙이 그 개인의 인간적 운명과는 별개로 완성되는 자동적이고 '내면적인' 과정이라는 생각과 드물지 않게 마주친다." "그러나 그런 미화─예술가 모차르트와 인간 모차르트를 분리하는 식의─는 '위대한' 인물들을 신격화하는 형태들 중 하나로서, 그 이면에는 평범한 사람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쪽을 인간 수준 이상으로 높임으로써 다른 쪽을 낮추는 것이다. 한 예술가의 업적에 대한 이해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인간 사회 속에서의 그의 운명과 그 작품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깊어지고 강화될 수가 있다. 특출한 재능, 또는 모차르트 시대의 용어로 말한다면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을 뜻하는 '천재'는 그의 사회적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며, 이런 점에서 천재가 아닌 범인凡人들의 범상한 재능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다."(78-80)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아마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자력으로는 만족스럽게 되지 않는, 자기 기대에도 못 미치는 정도로밖에 이룰 수 없었던 사회적 상승을 아들을 통해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희망을 일찍이 가슴에 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그의 이런 헌신은 보통 수준을 넘어서서 과하다 할 정도였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을 소유물로 점유하고 신동의 아버지로서 그때까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삶을 살아간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를 아들을 통해 구하려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 실현이 문제될 때 인간은 무자비하고 가혹해질 수 있다. 20년 동안 아버지는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빚듯이 아들에게 공을 들이고 작업한다."(107-8)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아버지의 욕구는 아들이 어린 동안에는 아들의 욕와 특정한 방식으로 일치했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하겠다는 아버지의 희망은 그의 음악적 자극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아이의 강한 애정 욕구 속에서 반향을 얻는다." "모차르트가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그는 너무 성급하게 17세의 소녀, 훗날 자신의 처형이 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애인을 열심히 교육시켜 이탈리아 공연에서 가수로 출세시키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계획한 파리 여행을 포기하려 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계획이었고 프랑스의 수도에서 아들이 성공을 거두리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이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아들의 구상에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설득하여 아들의 반항을 제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편지로 서서히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는 아들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었다."(113-6)


제2부 모차르트의 반란: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1781년 5월 기분이 상해 있던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 못지않게 화가 나 있던 고용주이자 공국의 지배자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 백작 사이의 긴장관계는 노골적인 갈등으로 증폭된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원만치 못했고 따라서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별의 순간에는 모차르트 자신도 안정된 직장 없이 빈에서 살아갈 삶이 가져다줄 고난을 어느 정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황제가(또는 그와 비슷한 서열의 왕이) 정식 일자리로 자신과 같은 재능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그동안에는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거라는, 자신을 믿는 사람 특유의 막연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5세의 나이로 그는 자신의 욕구와 재능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온 세상의 반대에도, 심지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을 밀고 나갈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171, 186)


"모차르트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사소하고 세부적인 사항까지도─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 감각은 제한되어 있었고 소망과 환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었다. 그가 여행하면서 새 궁정에 도착했을 때 제후가 친절한 말을 건네거나 그의 작품들 중 하나에 박수갈채를 보내면, 안정되고 명예로운 일자리에 대한 자신의 꿈이 이제 곧 이루어지리라는 절대적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말하다 보면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그가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그 증거는 한 나라의 군주인 자신의 고용주에 대한 개인적 반란을 실행하면서 그가 보였던 단호함이며, 그 못지않게 중요한 증거는 훨씬 더 어려웠을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다." "아버지와의 분리 자체는 그 선행 단계인 결합의 강도와 기간을 생각할 때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교육에 비추어볼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의 강한 성격을 증명해준다."(189-91)


"모차르트가 내린 결단은,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음악가로서는 극히 평범하지 않은 결정이다. 그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궁정 음악가가 다른 일자리 없이 현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 이 사회에서는 다른 대안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차르트는 빈을 방문하면서 평소 알고 지냈던 궁정 귀족들의 도움으로 밥벌이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이들이 일깨워주었던 희망이 잘츠부르크의 자리를 버리겠다는 결정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했던 모차르트는 '자유 예술가'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그러나 사회의 지도자층이 예술이나 의복, 가구가 건축물에 관한 섬세한 미적 감각을 자기네 사회 집단의 자명한 특권으로 간주할 경우 사태는 전혀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 기존의 규범을 넘어서서 혁신을 지향하는 '자유 예술가'의 성행은 그에게 극도의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196-200)


"독일 징슈필의 전형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의 기획에 참여했던 황제 요제프 2세는 완성된 작품이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빈 초연 후 작곡가에게 〈친애하는 모차르트,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라고 말했다." "옛 양식의 궁정 오페라에서는 성악가들이 지배자였다. 기악 음악은 그 밑에 종속되어 있는 처지였다. 기악곡은 성악가들의 반주를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에서 이를 변화시켰다. 인간의 음성과 악기의 음을 일종의 대화 속에 엮어놓으면서 그는 기쁨을 느꼈다. 이로써 모차르트는 특권을 누리던 성악가들의 지위를 추락시켰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음성만을 듣고 공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관현악의 반주에는 낯설어하던 궁정 사회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에도 무언가 말할 것을 부여했지만 청중은 그것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너무 많은 음'을 들었을 뿐이다."(200-1)


제3부 계획: 표제어로 본 모차르트의 삶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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