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슈베르트
한스-요아힘 힌리히센 지음, 홍은정 옮김 / 프란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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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베르트의 빈


"빈이 음악도시로서 명성을 다지던 기간이 '요제프의 10년'으로 역사에 기록된 시기와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제프 2세가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1780~1790)에 오스트리아는 계몽적 절대왕정의 전성기였고, 군주가 거주하는 빈은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가 1781년 잘츠부르크의 안정적 기반을 모두 포기한 채 이주해 올 만큼 매력적인 창작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다." "이 당시의 음악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인 '빈 고전주의'라는 가설이 수용사적으로나 양식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은 어쨌든 이 용어를 붙일 만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시기를 1781년부터 1804년까지로 규정하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하이든의 기념비적 작품인 현악 4중주 여섯 곡(Op. 33)이 출판되고 모차르트가 빈에 정착한 무렵에 시작되어, 하이든이 작곡을 그만두고 베토벤이《영웅 교향곡》으로 음악 지형에 영속적인 변화를 안겨준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끝난다고 보는 것이다."(13-4)


"슈베르트와 관련해서 짚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슈베르트는 빈 음악계의 핵심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고전주의'의 일원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베토벤의 중기와 후기를 통틀어 어떤 작품도 이 역사적 양식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얼핏 보기에는 동일한 공간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것 같지만(베토벤은 1827년에, 슈베르트는 그로부터 1년 반 뒤에 사망했다) 실은 한 세대가 차이 나는 두 작곡가가 '고전주의'라는 음악 유산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음을 의미한다. 베토벤이 젊은 시절의 스승이었던 하이든의 스타일을 모방하면서 고전주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었던 반면, 슈베르트는 살아 있는 듯 보이나 이미 완성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해당 작품들에서 고전주의의 규범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서 살고 활동한 것 같지 않다는 인상마저 든다. 즉, 베토벤의 빈은 슈베르트의 빈이었지만, 슈베르트의 빈은 베토벤의 빈이 아니었다."(15)


"그러나 이 짧은 전성기는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군은 충격적인 패배를 맛보았고, 귀족들의 사유재산은 붕괴했으며, 국가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 모두가 슈베르트의 유년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마침내 빈 회의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이후를 '비더마이어' 시대라 일컫는데, 1800년 이전의 공적 음악 생활은 대체로 귀족이 주도하고 소수 중심이었던 데 비해, 메테르니히 시대의 빈에서는 음악 활동이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귀족의 체계적인 비호 덕분에 비교적 일찍부터 견고한 명성을 얻었던 베토벤은, 이미 안정적인 작곡가로서 기존 제도의 붕괴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슈베르트가 음악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정확히 반나폴레옹적인 왕정복고의 전성기에 해당했고, 빈 소시민계급 출신인 슈베르트는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정 중심의 음악 문화와 더불어 성장했다. 슈베르트는 평생을 가정 음악회 같은 형식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16-8)


2 최초의 시도들과 대가의 기운


"놀랍게도 슈베르트의 초기작들은 단순히 시작을 알리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린 초보 작곡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모든 장르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도이치 번호 10번여까지의 작품들만 보더라도 피아노곡, 가곡, 4중주 혹은 5중주 편성의 현을 위한 실내악곡, 교향곡,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 연극을 위한 서곡, 미완성으로 남은 오페라 《거울의 기사》(D. 11) 등이 있다. 그중에서 적지 않은 곡, 특히 실내악과 관현악곡이 시도에 머무른 채 완성되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모두는 슈베르트가 걸음마 단계인 1810~1811년에 작곡한 것인 데다가 당시의 음악 장르 체계에 속하는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여기서 제외된 것은 교회음악과 협주곡뿐이다." "모든 초기작에서 슈베르트는 아직 서툴렀고,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나 유독 한 장르만큼은 먼 길을 돌아갈 필요 없이 즉시 그만의 스타일을 안착시킬 수 있었다. 바로 가곡이었다."(39-44)


"슈베르트가 가곡에서 그렇게 일찍부터 성숙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의 월등한 시적 재능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슈베르트는 시의 형태로 접하게 된 거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창작했다." "또한 가곡은 별다른 준비 없이 즉석에서 바로 부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사전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칠 필요 없이 초고 악보 한 장만 있으면 연주가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곡은 비더마이어적인 사교나 교양 모임에 딱 들어맞는 예술 형식이었다. 게다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는 장르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작곡 세계와 맞닥뜨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슈베르트는 그 안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여러 기악 장르와는 달리 가곡 분야에서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처럼 그를 주눅 들게 만드는 대가와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Op. 98, 1816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44-5)


"슈베르트의 유년작인 여섯 교향곡은 놀랄 만큼 성숙하고, 음향이 거의 예외 없이 우아하게 울리며, 힘들게 애쓰지 않고 만들어진 듯이 보인다. 게다가 그는 당시 빈에 살고 있던 거장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이 순진하게 작곡했고, 이 장르를 대표하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견줄 생각도 없었다. 물론 이 본보기들이 그에게 자극이 되었을 수는 있다. 여섯 개 중 첫 교향곡은 기숙학교에서 나오기 직전에 완성되었고, 마지막 곡(1818년 2월에 완성)은 부모 집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작곡되었다." "여기에는 독특한 역사적 아이러니도 있다. 21세의 작곡가가 베트벤식 장르 모델과 동떨어진 작품을 쓰고 난 다음에 비로소 베토벤 교향곡을 더 이상은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향곡 작곡가 슈베르트는 유년작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에 수년간 침묵을 지켰고, 그것은 그가 역사적인 모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57-61)


3 위기, 돌파, 자기 결정


"베토벤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슈베르트가 작곡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진작부터 싹텄다. 진지하고 믿음직한 목격자인 요제프 폰 슈파운은 어린 슈베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을 전해주었다. 그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기숙학교 시절 초반이었을 것이다. 〈은밀하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베토벤 이후에 누가 해낼 수 있단 말인가?〉(『회고』, 150).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이 발언은 열 살 더 많은 슈파운이 슈베르트의 첫 가곡을 열광적으로 칭송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슈베르트는 여기서 〈베토벤 이후〉의 근본적인 문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비판적으로 이해했다. 비판적인 자기 이해가 이렇게 일찍, 더군다나 가곡 분야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아 보이지만, 자의식 강한 어린 작곡가의 한숨은 베토벤이라는 철옹성 같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왔을 것이다."(67)


"슈베르트는 1822년 10월 30일에 《미완성》 교향곡 b단조(D. 759)를 악보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1821년 8월에 작곡한 교향곡 E장조에 이어, 베토벤 교향곡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조성으로 작곡하는 두번째 시도였다." "《미완성》 교향곡의 첫 악장은 슈베르트가 처음으로 자기만의 선율적, 화성적 어법을, 베토벤에 의해 숭고하고 장대한 것으로 격상된 대규모 교향곡 형식과 설득력 있게 결합해낸 모델이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해법은 현악 4중주 c단조나 교향곡 E장조의 첫 악장에서 시도했던 형식 실험의 성과가 직접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친구에게 선물로 건넨 것만 봐도 슈베르트가 이 교향곡을 실패작으로 여긴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이미 끝낸 악장들에서 어떤 결함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이 미완성 작품을 갑자기 중단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후 그의 말을 통해 짐작해 보자면, 이 시기에 슈베르트는 아직 자신이 대규모 교향곡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76-9)


4 비운의 사랑: 음악극


"진작부터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보편주의자라 자처했던 젊은 작곡가가 일찍부터 오페라 작곡에 이끌렸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작곡 영역과는 달리, 빈의 극장과 오페라 시스템은 풋내기가 섣불리 파악하고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1820년에 케른트너토어 극장과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두 개의 소규모 무대 작품이 무사히 상연되었고, 그 뒤를 이어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대규모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질 참이었다. 빈의 언론도 이미 여러 차례 기대감을 드러냈다. 1823년에는 오페라 작곡가 슈베르트의 성공이 코앞에 다가온 듯 보였고, 친구들도 신문기사를 통해 그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를 돌파하지 못했고,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가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이 분야에서 충분한 입지를 굳히지 못한 탓이었다. 친구들의 호의적인 지원도 이런 불행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고, 이로써 슈베르트는 빈 오페라계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88-92)


"슈베르트는 한참 동안 휴식기를 가졌다가 몇 년 뒤에 마지막으로 다시 이 장르로 돌아온다. 끝내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음악극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히 컸지만, 1824년 이후 음악극은 결국 채워지지 않는 불운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생의 막바지인 1827년 6월에 작곡을 시작한 《글라이헨 백작》(D. 918)이 그 증거다." "이런 상황은 그의 작품 목록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흔히 언급되는 '위기의 시간'은 바로 무대에서의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분투하던 시기였다. 1819년에서 1823년까지의 슈베르트의 창작 활동을 종합해보면, 작곡 위기의 징후로 여겨질 수도 있는 기악 장르의 현저한 감소는 음악극 분야에서의 성공적인 성과와 확실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다가 1824년 초 슈베르트가 갑자기 음악극에서 등을 돌리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내 중심축은 다시 기악으로 옮겨 갔다. 이제 작곡가의 사후 명성의 기반이 되어줄 대작들을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102-4)


5 대중을 위한 작곡


"오페라 무대로 향하는 문은 가로막혔고, 슈베르트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폭넓은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두 선배 작곡가는 피아노 독주자로 직접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데 비해, 그는 경험은 많으나 실력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슈베르트가 1824년 실내악 작곡에 착수해서 단계적으로 '대교향곡'의 청중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은 대단하다. 그렇게 되면, 그가 작곡한 작품의 실제적인 수혜자는 돈을 지불하고 음악회를 방문한 청중이 된다. 이는 실내악만이 아닌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슈베르트에게도 새로운 방식이었고, 그와 동시에 작곡에서의 사회적 패러다임의 급진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과거에 친구와 가족을 위해 작곡했던 실내악곡이라든가 기숙학교 오케스트라나 하트비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했던 관현악 서곡과 초기 교향곡과는 달리, 1824년 초의 작품들은 확실히 대중을 겨냥한 것이었다."(110-1)


"슈베르트의 후기 현악 4중주는 분명 콘서트용 음악이고,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기존의 가정 음악회와 사교 음악회를 위해 쓰인 곡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디베르티멘토와 세레나데 전통에 젖어 있는 여섯 악장짜리 8중주 F장조(D. 803)만이 여전히 사교 음악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어쩌면 슈베르트가 유명한 베토벤 7중주(Op. 20)를 표본으로 삼아 이 곡을 작곡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8중주에는 슈베르트의 고유한 특성이 잘 담겨 있다. 《송어 5중주》(D. 667)와 《방랑자 환상곡》(D. 760) 같은 대규모 순환 형식의 작품에서 이미 시도해본 것이자 앞으로 등장할 실내악곡에서도 계속 이어질 특성으로, 예전에 작곡한 성악 선율을 변주를 위한 주제로 다시 활용하는 것이었다. 위의 두 작품도 잘 알려진 가곡 선율을 인용했기 때문에 '송어'니 '방랑자'니 하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좌절된 오페라 프로젝트에 쓰인 유용한 재료를 다른 분야에서 재활용하고 보존하려는 것이 슈베르트의 전략이었다."(113)


"그러나 작곡가가 이 시기에 중점을 둔 프로젝트는 '대교향곡'이었다. 《그레이트》 교향곡(D. 944)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의 교향악적 콘셉트를 최대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많은 후세대 작곡가들이 베토벤의 대작 교향곡에 맞먹는 대안으로 생각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알게 된 이후(쿠펠비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1824년 5월 음악회에서 들었을 것이다) 어떤 위협이나 불안도 느끼지 않고 일관성 있게 독자적인 교향곡 모델을 추구했다. 베토벤 교향곡의 특징을 '극적'이라 한다면, 슈베르트 교향곡의 특성은 C장조 교향곡에서 드러난 것처럼 '서사적'이다.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은 훗날 로베르트 슈만이 깊이 매료되어 '천상의 길이'라고 했을 만큼 그 발전과 전개의 폭이 엄청난데, 그로 인해 음악적 시간을 전혀 새롭게 조직하는 방식이 교향곡 장르에 도입되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화성을 새롭게 형상화하는 기술인데, 슈베르트는 이 무렵에 그 기술을 스스로 터득했다."(121)


6 젊은 작곡가의 후기작


"슈베르트와 친구들은 메테르니히 시대를 냉혹한 시기라고 느꼈다. 그에 따라 《겨울 나그네》(D. 911)에 깃든 절망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며, 억압과 경직으로 점철된 절망적인 상태를 음악적으로 그려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슈베르트가 빌헬름 뮐러의 제스처를 하인리히 하이네에게서 재발견했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다. 그는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이면서 (훗날의 슈만처럼) 거기에 내재한 순수한 아이러니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이른바 '세계고世界苦, Weltschmerz'라 지칭되는 존재론적 불안감에 대한 비극적인 풍자에 관심을 가졌다. 《겨울 나그네》 전반부를 당혹스러워하는 친구들에게 슈베르트는 〈몸서리쳐지는 노래 연작〉(『회고』, 161)이라고 소개했다." "비극적 세계관과 불안감에 에술적으로 접근했던 슈베르트는 이를 상쇄할 만한 더 많은 사교와 우정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말년의 그는 와인하우스 렝카이나 징거슈트라세에 있는 카페 보그너를 자주 드나들었다."(141-2)


"1928년 늦여름 슈베르트는 함께 살던 도심의 쇼버 집을 떠나 남쪽 변두리 비덴에 사는 형 페르디난트네로 거처를 옮겼다.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의 뜨거운 여름을 잠시 피해 있을 생각이었으므로, 친필 악보 대부분은 쇼버 집에 두었다. 의사의 충고에 따라 거주지를 바꿨는데, 그것이 도리어 건강에 해가 되고 말았다. 역사의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빈 변두리 신시가지의 열악한 위생 상태는 감염을 일으켰다. 나중의 연구에서는 이를 확실한 근거로 삼아 슈베르트의 병이 장티푸스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쇼버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은 감염이 무서워서 병상의 슈베르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본인조차도 상황이 그렇게 나빠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1828년 11월 19일 심각한 고열과 함께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왔다. 아마 몇 년 전에 받은 수은 치료로 이미 손상된 체력이 병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149-50)


"1828년 7월, 라이프치히의 프롭스트 출판사는 피아노 3중주(D. 929)를 누구에게 헌정하고 작품번호를 어떻게 매길 것이지 물어왔고, 슈베르트는 8월에 이에 대해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답신을 보냈다.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의 기념비를 세울 때 같이 새겨 넣어도 좋을 만큼 중요한 문구이다. 〈존경하는 귀하께! 3중주의 작품번호는 100번입니다. 이 판본이 한 치의 흠도 없었으면 하고, 그렇게 출판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이를 마음에 들어할 사람들에게만 헌정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수익을 낳는 헌사일 것입니다.〉 이제껏 출판된 작품번호 중에서 가장 높은 100에는 명백한 상징성이 깃들어 있다. 슈베르트는 외국에서 출판되는 첫 악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음악을 이해해줄 광범위한 대중을 위해 개인을 겨냥한 헌정을 자랑스럽게 포기했다. 그러나 피아노 3중주의 견본 악보가 11월 빈에 도착했을 때, 슈베르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161-2)


7 에필로그: 슈베르트 수용


"슈베르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차적으로 가곡 작곡가로 여겨졌다. 베토벤의 기악 유산이 작곡가 사후에 더욱 명성이 높아진 반면, 슈베르트의 것은 중심에서 자꾸 밀려났다. 그의 기악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일찍부터 간파한 이들은 연주자나 저널리스트, 학자들이 아니라 베토벤의 유산을 버겁게 여겼던 작곡가들이었다. 1839년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에게서 C장조 교향곡 《그레이트》를 발견한 사람은 로베르트 슈만이었고,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와 프란츠 리스트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슈베르트 음악에 매료되었다. 슈베르트를 평생 동안 깊이 존경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그의 작품을 일찍 접한 덕분에 베토벤의 그늘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경우도 그와 비슷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편파적인 수용은 서서히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곡뿐만 아니라 피아노 음악, 실내악곡, 관현악곡이 제대로 대중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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