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음악의 글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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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모차르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1791년 35세의 나이로 죽었고 12월 6일 빈민 묘에 매장되었다. 이 요절을 불러온 급성질환이 무엇이었든 모차르트는 죽기 전 얼마 동안 종종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삶의 실패자라는 느낌이 서서히 엄습해왔다. 빚이 쌓여가고 가족은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에게 소중했던 빈에서의 성공은 불발에 그쳤다. 빈 상류 사회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의 급격한 진행은 아마 삶이 그에게 살 만한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의 사회적 실존이 좌절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의미가 공동화空洞化되었다는 느낌 속에서, 마음속 깊이 간절히 바랐던 소망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처절한 상실감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청중의 호응 상실과 아내의 애정 약화는 그가 마지막 몇 년 동안 체험했던 의미 상실로서 상호의존적인 두 층을 이룬다."(9-12)


"다른 한편 모차르트는 육체적이나 정서적 관계에 있어서 사랑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지닌 사람이었다. 모차르트가 어릴 적부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의 삶의 비밀스러운 부분에 속한다. 그의 음악은 많은 부분 호감을 얻으려는 부단한 노력 그 자체였다. 즉 그의 음악은 어린 시절부터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람, 아마 여러 면에서 자기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의 구애求愛였던 것이다. '비극'이란 단어는 피상적이고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즉 그토록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던 그가 아직 젊은 나이인 생애의 마지막 무렵 어느 누구로부터도,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는 것에 대하여 모차르트 일생의 비극적 측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12-3)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유명해진 이들을 이런저런 시대의 정점으로 서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은 이런 정태적 시대 개념을 사용할 경우 기껏해야 과도기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즉, 그것들은 항상 몰락하는 구 계급의 규범과 부상하는 신흥 계급의 규범 사이에 전개되는 역동적인 갈등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궁정 지도층의 기득권이 여전히 대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 덜 위험한 문화 영역에서 표출되는 저항을 원천봉쇄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았던 시대에, 모차르트의 생애는 궁정 귀족이 지배하는 경제에 종속된 국외자로 속해 있었던 시민 집단의 상황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모차르트는 시민 계급 출신 국외자로서 궁정에 근무하면서 놀랄 만한 용기로 자신의 귀족 고용주와 위임자를 상대로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는 개인적 품위와 음악 활동을 위해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패배하였다."(20-1)


"음악 분야에서 모차르트 세대에 이르기까지 음악가가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동시에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처지에 있으려면 궁정 귀족적 제도와 그 산하 기관의 관계망 안에 특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오로지 궁정, 특히 화려하고 부유한 궁정에서 상근직을 얻어야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제후들의 궁정이란 원래 제후의 가정을 의미했다. 음악가들은 그런 큰 집안에서 과자 제조공이나 요리사 또는 시종들처럼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고 궁정의 위상 서열에서 보통 이들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조금 비하해서 표현하자면, 그들은 '궁정 아첨꾼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음악 천재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쳐야 하는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조건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시대 음악의 종류, 소위 '양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4-5)


"시민 계급 출신으로 궁정에서 성공한 대예술가의 특징은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개의 사회적 세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일생과 작품 창작은 이러한 이중적 모순의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궁정-귀족 집단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의 취미 전통을 수용했고 또 반대로 그 집단 역시 그에게서 궁정의 표준에 일치하는 행동을 기대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우리가 좀 조야한 범주로 그 시대의 '소시민'이라 일컫는 특수한 유형을 대표하고 있는데 바로 그 자신이 중간급의 궁정 고용인층에 속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소궁정의 변두리에서 자라났고 훗날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특별한 궁정적 세련미를 몸에 익힌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사교인(homme du monde), 즉 18세기의 의미에서 신사(gentleman)가 결코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 동안 골수 시민의 면모를 지녔다."(30-2)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국가의 중앙집중화로 인해 음악가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자리는 거의 모두 수도 파리나 런던에 몰려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높은 직위의 음악가가 고용주인 제후들과 불화에 빠질 경우 도피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권력과 부, 명성에서 왕의 궁정에 비견되는, 그래서 왕의 노여움을 산 프랑스 음악가를 환대하며 망명처를 제공할 수 있는 경쟁 상대의 궁정들이 없었다. 이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위상과 음악가들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는 무수한 궁정과 도시들이 있었다. 구독일 제국의 승계 지역에서 궁정 음악의 뛰어난 생산성을 이 결합태─많은 궁정과 그에 따른 무수한 일자리─와 연관 짓는다 해도 지나친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결합태는 당시 이탈리아와 독일에 비교적 많은 수의 직업 음악가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으며, 동시에 음악가라는 지위와 그들이 고용주에 대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강화하는 요소였다."(43-4)


"물론 모차르트가 아무리 무모하다 할 만큼 대담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미래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우리가 빈 상류 사회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집단 역시 궁정 귀족 가문들이었고, 모차르트는 그들 중 몇 명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선 그는 음악 수업을 통해, 그리고 귀부인과 신사들이 그를 가정으로 초대하거나 그를 위해 주선해주는 연주회를 통해 생활해나갈 작정이었다." "모차르트가 독자적 길을 선택했을 때 잘츠부르크 궁정의 한 동료는 거의 예언자적 형안으로 빈 궁정 사회의 호의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의 명성이 오래가지 않아. 몇 달만 지나면 빈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지.〉 그러나 모차르트는 이미 온 희망을 빈 청중의 호응에, 수도 상류 사회의 여론적 성공에 걸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생애 최고의 염원이었고 동시에 그의 비극의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음은 분명하다."(49-53)


"모차르트의 개인적 모반은 언뜻 보기에 당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제국 내에서 '교양'이나 '문화' 개념들을 지향하는 인본주의 저서들 속에 반영되었던 반향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 자신이 한낱 아랫사람이며 기껏해야 고급 연예인 부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게 해준 귀족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보편적 원리들을 통해 정당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이런 악감정들을 근거 짓기 위해 보편적인 인류 이데올로기를 끌어대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베토벤과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이념에 대한 무관심인데 그 차이는 개인적 차이일 뿐 아니라 세대 차이라 할 수 있다. 자신도 귀족보다 못하지 않다는 느낌, 동급으로 대우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주로 그의 음악, 즉 그의 작품과 업적에 근거를 둔다." "궁정 사회에 대한 모차르트의 관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중적이었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는 요원해진다."(54-5)


"우리는 '천재적 재능'의 성숙이 그 개인의 인간적 운명과는 별개로 완성되는 자동적이고 '내면적인' 과정이라는 생각과 드물지 않게 마주친다." "그러나 그런 미화─예술가 모차르트와 인간 모차르트를 분리하는 식의─는 '위대한' 인물들을 신격화하는 형태들 중 하나로서, 그 이면에는 평범한 사람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쪽을 인간 수준 이상으로 높임으로써 다른 쪽을 낮추는 것이다. 한 예술가의 업적에 대한 이해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인간 사회 속에서의 그의 운명과 그 작품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깊어지고 강화될 수가 있다. 특출한 재능, 또는 모차르트 시대의 용어로 말한다면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을 뜻하는 '천재'는 그의 사회적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며, 이런 점에서 천재가 아닌 범인凡人들의 범상한 재능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다."(78-80)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아마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자력으로는 만족스럽게 되지 않는, 자기 기대에도 못 미치는 정도로밖에 이룰 수 없었던 사회적 상승을 아들을 통해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희망을 일찍이 가슴에 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그의 이런 헌신은 보통 수준을 넘어서서 과하다 할 정도였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을 소유물로 점유하고 신동의 아버지로서 그때까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삶을 살아간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를 아들을 통해 구하려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 실현이 문제될 때 인간은 무자비하고 가혹해질 수 있다. 20년 동안 아버지는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빚듯이 아들에게 공을 들이고 작업한다."(107-8)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아버지의 욕구는 아들이 어린 동안에는 아들의 욕와 특정한 방식으로 일치했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하겠다는 아버지의 희망은 그의 음악적 자극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아이의 강한 애정 욕구 속에서 반향을 얻는다." "모차르트가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그는 너무 성급하게 17세의 소녀, 훗날 자신의 처형이 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애인을 열심히 교육시켜 이탈리아 공연에서 가수로 출세시키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계획한 파리 여행을 포기하려 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계획이었고 프랑스의 수도에서 아들이 성공을 거두리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이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아들의 구상에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설득하여 아들의 반항을 제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편지로 서서히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는 아들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었다."(113-6)


제2부 모차르트의 반란: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1781년 5월 기분이 상해 있던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 못지않게 화가 나 있던 고용주이자 공국의 지배자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 백작 사이의 긴장관계는 노골적인 갈등으로 증폭된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원만치 못했고 따라서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별의 순간에는 모차르트 자신도 안정된 직장 없이 빈에서 살아갈 삶이 가져다줄 고난을 어느 정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황제가(또는 그와 비슷한 서열의 왕이) 정식 일자리로 자신과 같은 재능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그동안에는 어떻게든 연명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거라는, 자신을 믿는 사람 특유의 막연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5세의 나이로 그는 자신의 욕구와 재능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온 세상의 반대에도, 심지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을 밀고 나갈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171, 186)


"모차르트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사소하고 세부적인 사항까지도─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 감각은 제한되어 있었고 소망과 환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었다. 그가 여행하면서 새 궁정에 도착했을 때 제후가 친절한 말을 건네거나 그의 작품들 중 하나에 박수갈채를 보내면, 안정되고 명예로운 일자리에 대한 자신의 꿈이 이제 곧 이루어지리라는 절대적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말하다 보면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그가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그 증거는 한 나라의 군주인 자신의 고용주에 대한 개인적 반란을 실행하면서 그가 보였던 단호함이며, 그 못지않게 중요한 증거는 훨씬 더 어려웠을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다." "아버지와의 분리 자체는 그 선행 단계인 결합의 강도와 기간을 생각할 때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교육에 비추어볼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의 강한 성격을 증명해준다."(189-91)


"모차르트가 내린 결단은,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음악가로서는 극히 평범하지 않은 결정이다. 그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궁정 음악가가 다른 일자리 없이 현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 이 사회에서는 다른 대안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차르트는 빈을 방문하면서 평소 알고 지냈던 궁정 귀족들의 도움으로 밥벌이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이들이 일깨워주었던 희망이 잘츠부르크의 자리를 버리겠다는 결정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했던 모차르트는 '자유 예술가'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그러나 사회의 지도자층이 예술이나 의복, 가구가 건축물에 관한 섬세한 미적 감각을 자기네 사회 집단의 자명한 특권으로 간주할 경우 사태는 전혀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 기존의 규범을 넘어서서 혁신을 지향하는 '자유 예술가'의 성행은 그에게 극도의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196-200)


"독일 징슈필의 전형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의 기획에 참여했던 황제 요제프 2세는 완성된 작품이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빈 초연 후 작곡가에게 〈친애하는 모차르트,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라고 말했다." "옛 양식의 궁정 오페라에서는 성악가들이 지배자였다. 기악 음악은 그 밑에 종속되어 있는 처지였다. 기악곡은 성악가들의 반주를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에서 이를 변화시켰다. 인간의 음성과 악기의 음을 일종의 대화 속에 엮어놓으면서 그는 기쁨을 느꼈다. 이로써 모차르트는 특권을 누리던 성악가들의 지위를 추락시켰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음성만을 듣고 공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관현악의 반주에는 낯설어하던 궁정 사회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에도 무언가 말할 것을 부여했지만 청중은 그것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너무 많은 음'을 들었을 뿐이다."(200-1)


제3부 계획: 표제어로 본 모차르트의 삶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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