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지음, 이승훈 옮김 / 일조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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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모든 면에서 1942년 6월 4일은 분수령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미드웨이 해전은 지난 6개월간 거두어 온 승리의 갑작스런 종막이었다. 태평양에서 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대부분 소멸된 것이다. 일본 해군의 최강 항공모함인 아카기, 가가, 히류, 소류의 손실은 전쟁의 문을 연 세계 정상급 해군항공대를 회복 불가 수준으로 망가뜨렸다." "미드웨이 해전이 일본의 야욕에 제동을 걸고 공세의 주력을 꺾었다면 미군에게는 정확히 그 반대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진주만의 굴욕 이래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고려할수 있게 되었다. 미군이 미드웨이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전장인 과다카날섬에서 싸울 물적·정신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다음 해까지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입은 만큼의 피해는 아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은 1942~1943년에 벌어진 지옥 같은 소모전의 문을 열어젖힌 사건이었다."(16-7)


제1부 서막


"미드웨이 작전과 알류샨 작전은 일본 군부, 특히 1942년 초 일본 해군이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갈피를 못 잡은 결과였는데 넓게 보면 이 어려움의 원인은 전쟁 초 4개월 동안 일본이 거둔 예상외의 대승이었다." "1942년 3월경, 일본은 백인 식민세력을 모두 추방하고 새로운 태평양제국에 필요한 원유와 기타 전략자원을 즉시 조달할 수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남방 자원지대를 확보했다. 중국에서 이미 정복한 땅에 더해 일본은 북으로는 만주, 중국 중부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거쳐 남서쪽의 버마, 말라야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속령은 수마트라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따라 라바울까지 닿았고, 일본 해군의 거점인 추크섬을 거쳐 북으로 쿠릴 열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몇 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본은 인류 역사상 광대한 제국들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61-4)


"1942년 초, 일본 해군의 관점에서 보면 전략적 선택지가 여럿 있었다." "첫 번째 전략적 선택지는 공세에서 수세로의 태세 전환이었다. 나구모의 참모장 구사카 소장은 이 견해의 주요 지지자였다. 1942년 초에 일본은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얻은 것을 공고히 다지지는 못했다. 일본은 방어선 외곽을 강화하여 미국의 반격에 대비해야 했는데 외연을 확장하는 한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방어태세로 전환하면 이미 총력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연한 항공모함부대는 함재기와 조종사들을 보충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논점은 옳았으나 구사카는 이 계획을 대변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구사카와 상관 나구모는 진주만 기습계획에 반대했다. 그 결과 모순되게도 기동부대의 최고위 간부 두 사람은 연합함대에서 발언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접근은 일본 해군처럼 공격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직의 지지를 받기에 너무 수동적으로 보였다."(70)


"두 번째 선택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이었다. 목표의 크기로 볼 때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보였지만 몇 가지 매력적인 점도 있었다. 크기만 컸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인구밀도가 낮았고,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몇 개 사단 정도였다. 영토 크기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해안선 전체를 방어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이 '어딘가에는' 확실하게 상륙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육군은 작전 실행에 최소 10~12개 사단이 소요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 제안에 재빨리 찬물을 끼얹었다. 육군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인력을 빨아들이는 수렁이었다. 따라서 육군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복에 몇몇 이점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간단히 말해 필요한 병력과 수송수단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멀리 남쪽으로 작전을 확대하면 해상보급능력 밖에 있는 전역戰域을 추가하게 된다고 해군의 아픈 곳을 찔렀다."(71)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야마모토의 의중에서 과도한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했다. 쓸모가 있건 없건 항공모함의 존재는 일본이 벌인 전쟁에 내재된 모순 그 자체였다. 일본이 개전 초기에 거둔 승리는 눈부셨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의 산업 잠재력이 존재하는 한 결국 속빈 강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출구전략이 없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야마모토가 내놓은 '미 함대 격멸을 목표로 한 공세 지속'은 당연했으나 공허한 답이었다. 야마모토는 미국이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 항공모함을 유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야마모토는 하와이를 위협하는, 중간 어디쯤의 목표물을 공격한다면 미국이 격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목표물이 하와이 주둔 항공전력의 작전범위 밖에 있어야만 하와이 주둔 미군기가 전투에 끼어들 여지를 줄일 수 있었다. 야마모토가 선택한 목표물은 '미드웨이 제도'였다."(78-9)


"4월 18일 아침,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미드웨이 작전계획을 히로히토에게 상주한 지 불과 이틀 뒤, 미 육군 B-25 쌍발 중형폭격기 16기가 마법처럼 도쿄와 다섯 도시 상공에 나타났다. 육군항공대 제임스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폭격기들은 일본 해안에서 약 400해리(74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도달한 항공모함 호닛에서 발진했다." "직설적으로 말해 둘리틀 공습의 군사적 결과는 웃어넘길 정도로 미미했다. 몇몇 목표물이 눈먼 폭탄 몇 개를 맞았고 요코스카의 선대에서 개장 작업 중이던 항공모함 류호가 가벼운 손상을 입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습의 심리적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둘리틀 공습의 효과는 바늘에 찔린 정도였지만 야마모토가 중부태평양 작전에 대하여 육군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확고한 역할을 했다. 미 항공모함들이 확실하게 바다 밑에 가라앉지 않는 한 본토는 이런 공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4월 18일 이후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연합함대, 군령부, 육군 공통의 절대 목표가 되었다."(90-1)


모든 것이 계획대로 풀린다면 미 함대는 일본군 상륙 후 미드웨이 수역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야마모토는 적 함대가 미드웨이 부근에서 여봐란 듯 움직일 곤도 부대를 습격하기 위해 오아후섬에서 서쪽으로 출격하여 북쪽으로 항해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연합함대는 미 해군이 항공모함뿐만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전함까지도 이 결전에 끌고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더 나아가 연합함대는 미국 항공모함들이 전함 중심의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작전하며 서북서쪽에서 이들을 엄호할 것이라고 상정했다. … 그러나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이 노후 전함을 빠른 항공모함과 같이 운용한다는 개념을 폐기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 일본 해군은 잠수함 공격과 항공모함의 공습으로 약회된 미 함대를 마지막에 전함들이 포착하여 격멸할 것으로 기대했다. 어떤 의미에서 야마모토의 계획은 함포 위주 철학으로의 회귀였다. 여기에서 나구모 부대 항공모함의 역할은 결전 전에 적의 전력을 소모하는 역할로 격하되었다. 102-3)


"쓸데없이 교묘하고 복잡한 작전은 전전戰前 일본 해군 작전의 전매특허였다. 일본 해군의 함대 연습은 대개 일본 측의 정교하게 짜인 함대 기동에 편리하게 맞춰 미숙한 미국 해군이 서투른 기동으로 맞대응하다가 언제나 결국 전멸당하는 판에 박힌 공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전략적 꿈나라에 빠진) 야마모토는 함선 22척만으로 작전의 핵심인 미드웨이 무력화를 수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본의 수적 우위를 무위로 돌리는 어리석은 작전을 폈다. 22척은 야마모토가 다양한 작전목표로 태평양 전역에 뿌려 놓으려 한 함선 수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알류샨 작전은 일본 해군이 경솔하게 정한 목표들의 정점에 있다. 어떤 기준으로도 더치하버 공습은 50여 척에 이르는 함선을 보내기에 좋은 구실이 아니었다. 알류샨 작전이 양동작전으로조차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귀한 전략자산을 이렇게 비전략적 목적에 쏟아부은 결정을 이해하기가 어렵다."(104)


"그러나 1942년의 일본은 극히 제한적으로 미국의 전력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해전을 벌인 경우가 많았다. 일본 해군은 전투를 피하는 적을 공격하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 4개월 동안 일본군의 이러한 자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적대관계가 시작된 이래 연합군은 끝없는 패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장병 개개인의 용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연합군의 장비, 교리, 훈련 등 많은 부분에서 일본보다 뒤쳐졌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미국의 사기가 완전히 무너진 적은 없었으나 그때까지 미군의 군사적 능력에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껏 미 해군이 겪은 패배를 볼 때 일본 해군이 당연히 미 해군이 원양에서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105)


"많은 전후 연구자들은 야마모토가 나구모 부대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위치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결정을 비판해 왔다." "나구모 부대가 전함의 포격지원이 필요했다면 주력부대를 분리해서 유지하되 나구모 부대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운용하는 방법이 더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사실 나구모 부대 지원은 주력부대의 목표인 미 함대 격멸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었다. 야마모토 계획의 핵심은 격멸이었다. 만약 미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진주만 밖으로 유인해야 한다면 일본군 총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도록 적을 기만함과 동시에 상호지원이 가능하게 함대를 배치할 길은 없다. 이 두 목표는 양립할 수 없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두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음을 알았고 따라서 필요하다고 여긴 은폐를 위해 상호지원을 기꺼이 희생했다. 사실 적을 속여서 꾀어낼 수 있다고 본 전제가 처음부터 작전계획을 망쳐 놓았다."(108-9)


"모든 합리적 기준으로 봤을 때, 나구모 부대가 미드웨이에서 물량 우세를 유지하려면 5항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실제로 미드웨이 작전의 실행 가능성은 포트모르즈비 공략작전에서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보유한) 5항전이 심각한 손해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도박은 큰 실수였는데 두 작전 중 더 중요한 작전이 덜 중요한 작전의 인질로 잡힌 모양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효용 극대화'와 전력 분산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력을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 더 신속한 세력 확장을 기대할 수도 있으나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국지적으로 우세한 적이 작게 나뉜 아군 전력을 각개 격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일본이 점유한 항공모함 전력의 우위는 예상보다 빨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한 번 수적 우위를 잃으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12-3)


"도상연습 종료 이틀 후인 1942년 5월 8일, 제4함대의 이노우에와 5항전으로부터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과 교전을 치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첫 상황보고의 내용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정규 항공모함들과 떨어져 단독 작전 중이던 경항공모함 쇼호가 공습을 받아 격침당했고, 후속 교전에서 일본 함대는 요크타운과 새러토가라고 여긴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침몰 직전 상태로 만들었다고 믿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일본이 새러토가로 잘못 본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손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도망쳤다." "일본군이 생각했듯이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이 모두 격침되었다고 가정해도 미 해군은 태평양에서 가용한 항공모함 3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이 최대 3척의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고 미드웨이 기지항공대가 다가오는 전투에 투입된다면 기동부대는 더 이상 물량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119-21)


"일본 해군 교리의 기본 원칙은 미국의 수적 우위 상쇄였다. 수적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는 통합·집중된 화력 사용의 원칙을 신이 정한 법의 차원으로 격상한 전술교리라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은 강력한 무기로 보다 먼 거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미국의 수적 우세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 임무에 과도하게 편중된 일본 해군의 교리는 왜곡되었다. 교리는 한 종류의 전투만 비현실적으로 강조했고 제해권 확립, 수륙양용 세력투사, 통상보호 같은 다른 열강 해군들이 수행하던 전통적 임무를 깡그리 무시했다. 그 결과 1930년대 말에 일본 해군의 전술 교리는 기형적으로 공격 원리에만 집중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교리에는 전쟁 전반기에 실전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부분이 많았으나(예를 들어 뛰어난 야간전투 능력)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 진정한 지적 기반은 되지 못했다."(147-8)


"일본 해군이 받은 압박은 무기체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의미에서 전투함과 비행기는 교리의 물질적 형태이다. 따라서 무기체계는 해군 전체의 전투 방법에 맞추어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야 의미가 있다." "일본 함선은 속력과 화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본 해군이 변함없이 추구한 전술적 통일성에 잘 맞는 요소였다. 항공기에도 해군의 항속거리, 화력, 기동성 선호라는 교리 일반이 반영되었다. 반면 일본 함선 설계에서는 구조강성, 항해안정성, 방어력, 손상통제가 경시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 항공기들은 공격력을 갖추었으나 그만큼 공격받을 때 버텨내기가 어려웠으며, 잘 훈련된 조종사가 조종하면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나 조종사를 보호하는 기능은 뒷전이었다. 일본 함선과 항공기는 인명손실이 덜 치명적인 요소인 단기 해상분쟁에 적합했으며, 장기전이 가능한 진정 저력 있는 해군이 의지할 비장의 카드는 아니었다."(148-9)


제2부 전투일지


"6월 4일 오전 7시~8시 사이, 일본군이 도모나가 공격대 108기를 띄우는 데 고작 7분이 걸린 반면,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고작 9기가 더 많은 공격대를 발진시키는 데 거의 한 시간 동안 고전했다. 미군 공격대는 전투기 20기, 급강하폭격기 68기, 뇌격기 29기로 총 117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연합 공격대를 편성하는 대신 2개 비행단을 3개 방향에서 접근시켰다. 나중에 같이 발함한 공격대 일부는 잠시 후 따로 떨어져 나가 목표를 향해 각자 비행했고, 그 결과 전력이 더욱 분산되었다. 따라서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 함대에 어찌어찌 도착했더라도 요크타운 공격대를 제외하고는 비행대 단위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8시경에는 나구모와 기동부대의 운명이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위치를 파악했고 확실하게 큰 타격을 입힐 전력을 상공에 띄울 수 있었다. 이제 적을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265)


"이 사실은 나구모의 선택을 둘러싼 질문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가장 속력이 느린 일본군 함상기인 97식 함상공격기의 순항속력은 138노트(255킬로미터)였다. 따라서 일본군 공격대가 미 기동함대까지의 거리인 200해리(370킬로미터)를 가려면 약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러나 최선의 상황에서도 08시 38분에야 겨우 공격대 발진을 개시한 요크타운을 공격하려면 나구모는 07시 15분에는 공격대를 띄워야 선제공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구모는 적어도 06시 30분에는 공격대 배치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더 나아가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이 공격대를 발진시키기 전에 공격하려면 늦어도 05시 30분에는 공격대를 발진시켜야 했다. 따라서 나구모가 관련 정보를 가지고 참모들과 토론하던 07시 45분~08시에는 미군의 선제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날 아침의 사건들을 되돌리기 위해 나구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266)


"이 상황을 야기한 진짜 중요한 정찰 실패 책임은 지쿠마 1호기에 있었다. 지쿠마 1호기는 나구모에게 제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유일한 정찰기였다. 이 정찰기가 정확하게 항로를 따라 수면에 더 가까이 붙어 비행했더라면 06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미 기동함대를 발견했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나마 결정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시간대였다.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로 나구모는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한 시간 이상 잃었다. 도네 4호기의 지각 발함이 아니라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가 전술적으로 부정적 효과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지쿠마 1호기의 실수는 더 큰 실패의 일부일 뿐이다. 아침 정찰에 쥐꼬리만 한 수의 비행기를 투입한 것이야말로 나구모의 성공 가능성을 해친 원인이다." "일본군은 정찰에 좀 더 많은 비행기를 투입했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교리와 공격 위주의 가치관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266-7)


"08시 00분~09시 17분, 공중에서 난타전이 벌어지던 당시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사건의 전후관계를 재구성하려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나 당시 아키기의 함교에 있던 이들에게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군은 물리적으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끊임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불행히도 기동부대는 자신의 박자에 맞춰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적에게 끌려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적의 공격에 대한 기동부대의 여러 반응 가운데 최소한 함대방공만큼은 중앙통제를 거의 받지 못했다. 08시 00분경 직위전력이 급격히 감소한 데 대해 각 항공모함의 비행장은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해 직위전력을 보강했다.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며 필요한 일을 파악하고 교통정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상황이 조금 잠잠해지나 싶으면 공습경보가 또 울렸다. 일본군은 미군 공격대들이 계속 밀려들자 거의 반사적으로 대응했고 되는대로 찔끔찔끔 직위기들을 올려 보냈다."(282)


"레이더는 다가오는 위협을 미리 보여 주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이 장면은 일본군이 사전에 적기 내습을 경고해줄 레이더가 없어서 전투에서 이길 기회를 상실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직위기와 미군기의 교전 가능한 유효거리가 짧아졌다. 일본군의 조기경보는 진형 외곽에 있는 순양함과 구축함이 담당했다. 조기경보를 맡은 순양함과 구축함은 항공모함에서 보이는 거리까지만 대형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직위기들은 자주 항공모함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미군기와 교전했다. 제로센은 아군 함대 상공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미군기를 추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 행동일뿐더러 직위대가 효율적으로 작전하기에 필요한 공간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좀 더 먼 거리에서 적기를 탐지할 수 있었다면 미군 공격대의 상당수는 일본 함대에 도달하기 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282-3)


"10시 00분 경, 지금까지 연이은 미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에 대한 일본군의 태도가 경멸로 변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B-17을 제외하고 내습한 모든 미군 공격대를 분쇄했다.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 자만심이 만연했을 것이다. 공격대 발진이 지연되어 다소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나 고급 간부들의 증언 어디에도 이때 진심으로 전투의 최종결과를 걱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월드론과 린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자 겐다는 공습으로부터 함대를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는 작전 초기의 우려가 사라졌다고 언급했다. 미군의 공격이 성가셨고, 심지어 미드웨이 공습이 지연될까 봐 우려한 것도 사실이나 진정으로 절박함을 느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실제로 그러했다면 이는 기동부대 수뇌부가 적의 능력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계점에 다다른 함대방공 체계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319)


"기동부대의 일부 조종사들은 상황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미군은 쉴 틈 없이 공격해 왔으며 이제 전방위에서 기동부대에 도달했다. 직위대는 원거리에서 적을 탐지할 방법이 없었고 모함의 관제유도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 오는 '위험 방향' 단 하나만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조종사들은 거의 모든 방향에서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협에 계속 눈을 부릅떠야 했다. 따라서 직위기대는 대형 곳곳에 분산되어 대공경계를 맡은 함선이 내는 시각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며 모함 근처에서 작은 소대 단위로 비행하다가 자신의 구역으로 날아오는 적기를 덮치기 위해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투기의 탄약 소진은 함대방공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위험신호였다. 특히 방금 적을 격퇴했다면 더 그랬다. 결론적으로 조종사와 비행장은 나구모의 참모 누구보다도 현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320)


"10시 02분과 03분 각각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공격대에 포착된 일본 기동부대는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이전에는 제병통합의 이점이나 전투기 지원도 없이 단독 행동한 비행대들(해병항공대의 VMSB-241, 해군항공대의 VT-6, VT-8 및 육군항공대 소속대 등)이 진입해 와서 다시 둘로 나뉘어 일본 항공모함 1척을 양면에서 공격했다. 이번에는 3개 폭격비행대와 1개 뇌격비행대가 동시에 공격했다. 미군 비행단 2개[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가 2개 축선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는데 게다가 우연의 일치로 이들은 같은 시간에 목표물 상공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두 비행단의 3개 비행대[VS-6, VB-6, VB-3]는 고고도에서, 1개 비행대[VT-3]는 비교적 저고도에서 다가왔고 추가로 전투기[VF-6]까지 투입되었다. 이번 공격은 이날 아침 일본군이 마주친 공격 중 가장 위험했다. 그리고 일본군 함대방공은 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게 된다. (항공모함 3척의 대파로 이어지는) 파멸적 실패였다."(324)


"제2차 세계대전기의 군함은 놀랍도록 화재에 취약했다. 윤활유, 용제, 가솔린, 수천 톤의 연료 등의 형태로 실린 석유 제품에서 풍기는 강한 냄새가 함선에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에서 가장 큰 위험은 항공유[경질유] 급유체계였다. 항공모함에서는 격납고 안이나 비행갑판에서 비행기에 급유할 수 있었다." "전·후방 항공유 탱크는 수직으로 설치된 항공유 주관主管들로 수평배관(고옥탄 항공유와 일반유용 하나씩)과 연결되었고, 수평배관은 격납고 갑판 전체를 둘러 설치되었다. 비행갑판 주변의 움푹 들어간 곳에 설치된 항공유 공급장치는 수직배관으로 연료를 공급받았다. 따라서 모든 항공모함은 항공유 공급배관으로 촘촘히 둘러싸여 있고 항공작전 중에 모든 배관은 가연성이 높은 항공유로 가득 찼다. 더구나 모든 배관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연료배관을 타고 멀쩡한 부분까지 영향을 받아 결국 항공유 탱크까지 문제가 퍼질 소지가 있었다."(361-2)


"일본 항공모함 설계와 운용의 두 번째 문제점은 항공병장의 이송과 보관이었다. 충실한 화염방지 설비 및 바베트barbette와 주포탑의 장갑으로 탄약이송 시설을 보호하던 전함이나 순양함과 달리 항공모함, 특히 일본 항공모함의 보호설비는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항공병장의 반출은 전함의 포탄 반출보다 더 위험했다. 범용 고폭탄과 대함용 철갑탄은 장갑 관통을 위한 탄체에 대부분의 무게가 실린 전함 철갑탄보다 작약량이 많았다. 범용 고폭탄은 무게의 약 50퍼센트를 작약이 차지했고 경장갑 목표에 투하했을 때 같은 무게의 포탄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불행한 점은, 폭탄이 아군 항공모함의 내부에서 터져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항공모함 폭탄고의 장갑방어 수준은 최소한도였다. 이러한 설비는 평시 운용조건에도 간신히 적합한 수준이었으며 만약 격납고 갑판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다면 대참사로 이어질 터였다."(362-3)


"자랑스러운 아카기는 제1항공함대 창설 이래 14개월 동안 나구모의 기함이었다. 나구모는 이제 아카기 (그리고 가가와 소류) 없이 항공모함(히류) 1척과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5척으로 이기든 지든 싸워야 했다." "나구모의 항공전력이 항공모함 1척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히류의 비행기들이 반격 중이었으므로 승리할 가능성을 조금 더 높일 수 있었다. 일본군이 미군 뇌격비행대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음을 알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뇌격기 없이 미군이 나구모의 전함들을 격침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전함은 항공모함보다 급강하폭격기의 폭탄을 훨씬 잘 견딜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3전대의 하루나와 기리시마, 그리고 빠른 속도의 강력한 어뢰를 갖춘 8전대의 도네와 지쿠마가 공습을 뚫고 적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만했다. 만약 히류 공격대가 단 1척이라도 적 항공모함을 무력화한다면 이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392-4)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적의 전력이 확실히 압도적이었으므로 히류 혼자서 전투의 향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영리하게 싸워야 했다. 히류를 곤란한 상황에서 끄집어내려면 히류가 적 항공기의 행동반경 한계점에 있어야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후퇴시킬 수 있었다. 나구모나 야마구치가 이런 방책을 떠올렸다 해도 이대로 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둘 다 당연히 싸우고 싶어 했고 싸움은 공격을 뜻했다. 그러나 이대로 공격하는 것은 적의 배만 불려 주고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 다 비난받을 부분이 있다. 나구모는 히류의 운용과 관련해 직접명령을 등한시함으로써 야마구치가 히류를 직접 운용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나구모는 수뢰전 지휘관으로 퇴행해 버리고 말았다. 나구모는 일본군 전체 전력에서 가장 중요한 단 1척의 함선[히류]의 운명에 신경 쓰는 대신 자신이 하려는 수상전투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396-7)


"히류가 동쪽으로 돌격하는 동안 공격당한 세 동료는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렸다. 아카기, 가가, 소류에 화재가 발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자 영구적 구조 손상이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통로가 추락한 아카기와 가가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는데, 엘리베이터 통로가 일종의 연통 역할을 하면서 위로 연기를 뿜어내고 아래로 외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양 함 내부는 일종의 용광로가 되었다. 고온으로 장시간 가열된 강철 구조물들이 붉게 달아올라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변형되고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13시 38분, 아오키 함장은 현실을 인정하고 어진영御眞影[덴노의 초상 또는 사진]을 노와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어진영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명정에 실려 노와키로 이동했다. 이제 덴노에 대한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난 아오키 함장에게는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만 남았다. 아카기는 음울한 선회를 계속했다."(436)


"야마구치는 나름의 이유로 미국 항공모함 2척을 대파시켰다고 믿었고(실제로는 요크타운 1척), 이제 세 번째 항공모함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손에 쥔 것이 거의 없었다." "히류의 마지막 시련이 닥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혼성 급강하폭격대가 거의 근접했다." "17시 01분~17시 10분, 이제 히류는 가가와 마찬가지로 폭탄세례를 맞게 되었다. 히류는 왼쪽으로만 선회했고 적이 너무 많은 데 반해 대공화기가 너무 적었다. 엄호하는 제로센 조종사들은 용감했으나 SBD에 비하면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첫 명중탄은 셤웨이가 올린 것으로 보이며 이어서 세 발이 연속으로 명중했다. 모두 1,000파운드짜리였고 전방 엘리베이터 앞에 명중했다. 흥미롭게도 나중에 미군 조종사들은 히류의 비행갑판 앞부분에 칠해진 식별용 히노마루를 편리한 조준점으로 이용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결과는 없었다."(467-71)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전시 공보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중국 및 남방전선의 전황과 관련하여 일본 언론은 관례적으로 불편한 세부상황을 빼고 여과된 소식만을 전했지만 철면피한 날조 보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대중에게 미드웨이 해전은 대승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6월 11일자 『재팬타임스 앤드 애드버타이저』 지는 〈해군 다시 역사적 대첩!〉이라는 제호하에 일본 해군이 미국 항공모함 두 척을 격침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며칠 후 전과에 미군 중순양함 1척과 잠수함 1척이 추가되었다. 언론 보도에서 일본군의 손실은 애매하게 표현되었으나 6월 11일, 유명한 해군기자이자 군사평론가인 이토 마사노리가 한 방송에서 일본이 항공모함 2척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토는 미드웨이에서 거둔 〈상상을 초월한〉 성과에 비해 미미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상상을 초월한〉은 사실이었으나 이토가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른 의미였다."(555-6)


"대다수의 부상병들은 비밀 환자로 분류되어 특별병동에 따로 수용되어 다른 환자, 수병, 가족들과 완전히 격리되었다. 기동부대의 파멸에 대해 어떤 말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이등국민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간부 대다수는 격오지로 발령 받았다. 수병들은 남태평양에서 전투 중인 부대들의 보충병력으로 지정되어 가급적 신속히 배치되었다. 생존자들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남태평양의 최전방으로 보내져 최후를 맞았다. 일본 해군은 아군조차도 모욕적으로 처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실수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반면 이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연합함대 지휘부와 참모진에는 부상자들이 겪은 불명예스러운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여전히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 나구모는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중심으로 새로 편성된 항공모함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555-7)


제3부 결산


"일본 해군이 경험에서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1905년 쓰시마 해전의 승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쓰시마 해전에 승리한 후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에서 결정적 패배의 원인이 될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이 세 가지 전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대결할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불건전한 방향으로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뿌리 내렸다. 미국과의 분쟁은 압도적 산업생산량으로 계속 양적 우위를 누릴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양 대 양으로 싸울 수 없었던 일본 해군은 우월한 기술과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일본민족의 고유한 정신]가 결합하면 질로써 양을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근본적 믿음에서 모든 교리와 함선설계 사상이 탄생했다. 그 결과 일본 해군에게는 열강 해군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역할들, 예를 들면 교역로 보호, 통상 파괴, 상륙 지원 등은 부차적 위치에 머물렀다. 일본 해군에게는 오로지 속도, 거리, 화력이 전부였다."(575-6)


# 쓰시마 해전(1905)이 일본 해군 교리에 미친 영향

1. 분쟁을 국지화하고 제한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 해군력이 분쟁의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 지리적 길목만 수호하면 되었던 러일전쟁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은 광대한 태평양 전체가 활동영역이었다.

2. 주력함대 사이의 결전에서 승리해야만 완전한 제해권을 획득할 수 있다. → 미국 같은 거대한 나라는 아무리 크게 패배하더라도 단 한번의 결전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 즉, 전쟁의 향배를 결정할 결전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3. 방어보다 공격이 우선한다. 적절한 거리에서 적보다 큰 화력을 동원하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일본해군의 일선 전력은 막강하지만,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장기전을 치를 만한 특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가장 중요한 학습 실패는 태평양전쟁의 첫 5개월간의 경험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관념과 정반대로, 적에 대한 일본군의 물량우세가 미드웨이 직전까지 대승을 거둘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원인이 승리병이건 전훈에 대한 대한 무관심이건 간에 결과적으로 1942년 상반기에 일본 해군에서는 치열한 지적 고민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항공모함 집중운용의 이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작전을 적게 수행하되 항공모함을 한꺼번에 많이 투입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정확하게 그와 반대로 행동했다.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이 지나치게 많은 목표를 한 번에 달성하려 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전력을 분산함으로써 지금까지 거둔 승리의 공식을 버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보다 약한 적이 일시적으로 전력을 집중해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밀어 넣음으로써 불필요한 위험성을 높였다."(577-8)


"학습 실패 다음은 예측 실패이다. 코언과 구치가 지적하듯이 〈예측 실패의 핵심은 원래 알 수 없는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지한 위험에 대해 적절한 예방책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학습 실패에 이어 명백히 예측 실패까지 범했다." "야마모토가 놓친 부분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작전계획에서 예상한 시간보다 미군이 더 일찍 현장에 와 있을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군은 이미 패배했으며, 미군을 유인해야만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야마모토의 믿음이 여기에 한몫 했다. 야마모토는 미군이 미리 와서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야마모토의 가장 큰 실책은 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적의 의도에 맞추어 작전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적이 패했고, 적을 유인해야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작전을 세운 결과 야마모토는 적을 눈앞에 두고 전력 분산을 결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581-2)


"마지막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현재 상황에 대한) 적응 실패는 신줏단지 모시듯 작전계획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적당한 용어를 쓰자면 '계획 타성'이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만연했는데 이것은 여러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다." "개전 초기에 일본 육해군은 계획에 집착한 데 대한 보상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 시 일본 해군이 보여준 능숙함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의 계획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한 번 공식화된 계획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드웨이 작전을 연기하지 않음으로써 야마모토는 5항전의 항공모함들을 전열에 추가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구모는 미드웨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미군과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작전수행 차원에서 계획 타성은 전투 전이나 전투 중에 상황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금언인 〈적과 접촉함과 동시에 계획의 수명은 끝난다〉를 귀담아들을 사람은 일본 해군에 없었던 것 같다."(585-6)


"종합적으로 전투 경과를 상세히 살펴본 후 나온 불가피한 결론은, 일본군의 패배가 계획의 중요한 부분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리병 때문도, 몇몇 지휘관의 실책 때문도 아니었다. 일본군의 패배는 전투의 모든 측면, 즉 전략, 작전, 전술에 퍼진 실패들이 복잡하게 얽힌 총체적 난국으로 인한 결과였다. 모든 부분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다. 표면상 드러난 문제의 근저에 있는 원인은 수많은 개개인이 저지른 실수의 총합일 수도 있다. 그중에는 중대한 실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일본 군부와 일본 해군의 문화, 교리, 그리고 선호한 전투방법에 내재된 더 큰 문제점이 일으킨 병의 증상에 불과하다. 이 모든 실패는 과거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배우지 않고, 미래를 위해 견실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계획에 결함이 있음을 인지하고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조직의 최종 산물이다. 이 모든 문제의 씨앗은 일본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인 쓰시마 해전 이후에 뿌려졌다."(589)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초창기 연구들은 흔히 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면서 일본 해군 최정예 비행사들도 크게 손실되어 일본의 세력 확장이 저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탑승원 121명의 전사, 실종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자체가 재앙은 아니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개전 전에 항공모함 발착함이 가능한 비행기 탑승원 2,000명을 보유한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반적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지는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지독한 소모전을 겪으며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력은 급전직하했으며 산타크루스 해전을 거치며 전쟁 전의 정예 탑승원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존 프라도스는 여기에 더해 정예 정비원과 기술인력의 손실을 지적한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항공모함의 정비기술 인력 중 721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승선 인원의 40퍼센트에 해당한다. 미국보다 덜 산업화된 일본 사회를 생각해 보면 대체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592-3)


"탑승원, 기술인력, 조직 지식의 상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42년에 일본 입장에서 비행기는 귀중한 자산이었으며 인적, 조직적, 전술적 자원의 총체적 가치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중요한 자원을 자주 낭비했다. 그러나 항공모함 손실의 중요성에 비하면 앞서 말한 자원의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행기와 조종사를 싣고 전장으로 갈 항공모함 없이는 해군항공전의 혁명도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세력투사Power Projection'란 투사될 전력이 발진할 기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동기지는 전체 시스템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요소이다." "개전 당시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6척에 상응하는 정규 항공모함 5척─렉싱턴, 새러토가,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와스프─을 보유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직후 양군의 전력차는 4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 새러토가] 대 2척[쇼카쿠, 즈이카쿠]으로 미군에게 극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반전되었다."(593-5)


"일본 해군은 1944년 11월 시나노가 준공된 후에야 미드웨이에서 잃은 4척을 채울 수 있었다. 항공모함 4척을 상실함으로써 일본 기동부대의 전술적 균일성은 사라졌다. 특성이 비슷한 함들을 함께 운용한다는 생각은 도입될 때부터 일본 해군의 건함 준칙이었으며 쓰시마 해전 때부터 미드웨이 해전 때까지 잘 활용되어 왔다. 진주만을 기습한 기동부대는 견실한 1항전, 재빠른 2항전, 미숙하나 잠재력 있는 5항전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함대였다. 각 항전은 속력, 항속거리, 탑재기 구성 면에서 잘 어울리는 항공모함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비슷한 성능의 함선들을 한 부대로 기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투를 벌이는 중에 함선마다 성능이 다르다면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복잡한 요소 하나를 추가하게 된다. 통일성은 지휘 통제 시 생기는 불필요한 마찰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1, 2항전의 상실은 일본 기동부대의 놀라운 균형과 통일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597)


"단기적으로 보면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이 거둔 승리로 인해 미일 양국 항공모함 수가 균형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이로써 전쟁의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전투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보다 덜했다.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에서 살아남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군이 1943년 말쯤에 바란 최선의 상황은 실제처럼 완전히 절망적이지 않고 근소하게 열세한 상황에서 교전하는 것이었다. 진주만을 기습한 항공모함 6척이 모두 살아남아 1943년에 길버트 제도에서 미군을 상대했더라도 전투는 일본군의 대참패로 끝났을 것이다. 미드웨이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도 낙관적으로 보아 일본군이 전략적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기간은 18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을 손실하여 이 18개월을 잃은 셈이다. 미드웨이의 승패와 상관없이 미국의 거대한 산업생산력은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군이 절대적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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