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육군 -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교와 같은 육군의 교육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한 기관에서 기대에 상응하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실전 경험이 적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세대는 1904년(메이지 37)과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사관학교 생도였거나 아직 육균유년학교 생도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 최초로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과 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결국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책에 충실한 지식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가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조슈벌長州閥'이 그들의 힘에 의해 타파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5-6)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일본 육군은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건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하자 이후 독일군을 따랐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군을 일본에 초청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친영미 감정을 가진 자가 몹시 적었고 일반 중학교 출신은 줄곧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현저하게 결여돼 있었다. 인간을 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 끝까지 보병을 중시하는 육탄 공격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병사를 '무기질의 병기'로 육성하려 했다는 것, 보급과 병참에 대한 중요성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 등에 잘 나타나 있다."(16)


"1882년 1월 4일, 메이지 천황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인훈계」를 간결하게 명문화한, 약 2700자에 이르는 「군인칙유」를 하사한다." "그리고 이 「군인칙유」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를 관통하는 일본 육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군인칙유」에서 〈군인은 충절을 다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표현은 천황의 군대라는 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반면 〈세론에 흔들리거나 정치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렵의 반정부적 운동(예를 들면 자유민권운동과 같은 정치활동)에 장교가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군의 기강을 공고히 세우면서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처럼 본래는 정치적 중립을 의미하는 문구인데, 쇼와 초년대 국가 개조 운동을 추진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정치나 세론이 어떠한 형태로든 육군 내부의 움직임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자가 많았다."(22-4)


"그 결과 육군이 일본제국 안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고, 누구보다 우월한 사명을 천황에게서 부여받았다는 오만한 착각을 낳았다.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이 착각 속에서 국가 그 자체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1875년 3월부터 약 3년 동안 공사관 소속 무관으로 독일에 주재했던 가쓰라 다로 소좌는 독일군을 예로 들며 육군성 내 부국 중 하나인 참모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야마가타에게 제안했다. 여기에는 군정軍政과 별도로 군사 작전이나 군사 행동에 관해 특별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야마가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78년 12월 참모본부를 독립시켰다. 1893년 5월에는 해군의 군령부가 독립했는데, 참모본부와 군령부 부장은 천황의 대권을 대리하는 책임자라는 의미를 지녔다. 군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정신적 기반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천황에 직결되는 특별한 기관이라는 우월의식이 이 무렵에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24-5)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처음으로 국외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1894~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이며, 이때 전쟁을 지도한 것이 대본영大本營이었다. 대본영은 1893년 5월 공포된 전시 대본영 조례에 기초하여 설치된 조직이다. 쇼와 육군도 이 조례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실제로 전시 태세에 돌입했을 때 육해군이 작전 측면에서 통일된 방침을 갖고 행동한다는 목적에 따라 생겨났다. 물론 천황의 대권을 위임받은 육군의 참모본부와 해군의 군령부가 각각 대본영 육군부와 대본영 해군부로 일체화하여 천황에게 군사 작전과 행동의 내실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대본영에 문관은 참가할 수 없게 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결국 전쟁 지도에는 군인만이 관여하고 문관(국무대신 등)은 군사에 관해 일절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따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쟁을 순전히 군사 행동만으로 파악하여 정치적인 배려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9-30)


"1907년 4월에 작성된 「제국 국방 방침」의 주안점은 우선 〈제국의 국방은 공세를 본령으로 한다〉는 데 있었고, 줄곧 공세 계획을 골자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 다음 〈장래의 적으로 상정해야 할 나라는 러시아를 제일로 하고 미국·독일·프랑스가 그 뒤를 잇는다〉고 명시했다. 〈국방에 요구되는 제국군 병비의 표준은 용병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러시아와 미국의 압력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정도로 한다〉라고 했듯이, 러시아와 미국에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수준의 군비를 갖추는 것을 국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방 방침에 따라 「제국군 용병 방침」 제1항에는 〈해군은 적에 대하여 힘써 기선을 제압하고 그 해상 세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육군은 적보다 앞서 필요한 만큼의 병력을 속히 한 지방에 집합시킴으로써 선제공격의 이점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작전을 펼친다〉고 적혀 있다. 모두 선제공격에 중점을 둔 작전을 고려한다는 게 특징이었다."(47)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 육군이 지나치게 많은 군사비를 요구해오자, 국가 재정을 우려한 정부는 조금씩 반격하기 시작했다." "1927년 6월에 열린 의회에서 정당 측은 집요하게 '군부대신현역무관제'에 반대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대신과 차관(당시는 총무장관)의 임용 자격이 적힌 비고란에 〈대신 및 총무장관에 임용되는 자는 현역 무관으로 한다〉고 쓰여 있던 문구를 삭제했다. 이리하여 예비역도 육해군 대신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상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자신의 권한을 점차 참모본부로 넘기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무력화했고, 이를 통해 '통수권 독립'이라는 명분을 지키면서 정치 쪽에서의 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쇼와 육군이 고압적인 자세로 '통수권 독립'을 외치게 된 것은 이러한 경위에서 비롯됐다. 1936년의 2·26 사건 때 '군부대신현역무관제'가 부활하는데, 참모총장에게 권한을 넘긴 사실만은 그대로 남아 쇼와 10년대 참모본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51-3)


"일본의 국가 재정이 두드러지게 피폐해진 원인은 물론 군사비 팽창에 있었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내리 3년 동안 국가 예산의 40~50퍼센트를 군사비로 할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시베리아 출병은 당연하게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증유의 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난 후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고 그동안 쌓아놓았던 자금도 금세 써버리고 말았다. 1921년 11월 하라 다카시 수상이 암살되고, 이어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이 탄생했다. 다카하시 수상은 긴축 재정을 내걸었다. 그런데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다시 한번 크게 타격을 입었다. 군사비 팽창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외압에 대해 육군 내부에서 대응한 사람이 육군상 우가키 가즈시게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삭감을 우가키 군축이라 부른다."(62-3)


"감축 대상이 된 이들은 우카기를 원망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군 내부의 장교들도 우가키에게 불만을 품었다. 우가키가 육군의 입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좌관급 장교까지 내몰았다는 것이 불만의 이유였다. 육군의 막료는 우가키를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태도로 대하면서 그 원한을 이어나갔다. 쇼와 10년대에 우가키는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육군은 끝까지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가키 내각은 유산되고 만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이쇼 말기의 군축 분위기는 일본의 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군사에 대한 혐오, 군인에 대한 모멸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은 제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지 못했다. 서민들로부터 냉혹한 눈길을 받거나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육군은 가장 뿌리 깊은 집단사회여서 그 특이한 가족주의적 성향이 도시의 인텔리 계층에서는 혐오감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이다."(64-7)


"다이쇼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군사 집단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었다. 우가키 군축은, 우가키의 진의가 어떻든 그러한 시도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육성된 메이지 10년대 중반부터 20년대 전반에 태어난 제2세대 군인은 그러한 심리를 배척하는 것이 오히려 군인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떻게 군 내부의 지도층에 들어갔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새로운 파벌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1921년 10월 27일 나가타 데쓰잔, 오카무라 야스지, 오바타 도시로 등이 바덴바덴에서 가진 회합이, 조슈벌의 횡행을 대체하여 육대벌陸大閥이 군 내부에서 주류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 전쟁은 국가총력전〉이라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시찰한)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치·경제·산업·문화·사회의 모든 것을 전시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71-3)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쇼와 육군을 말할 때면 무엇보다 1928년 6월 4일에 일어난 '장쭤린 폭살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다. 동지들은 이 사건을 고모토의 애국적인 행위로 파악하고, 이전부터 중견 장교들이 활약했던 만몽 지역에 부동의 정치 권력을 수립한다는 계획이 육군 지도자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한 것에 분개했다." "고모토로부터 장쭤린 폭살 사건의 진상을 들은 후타바카이 회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모토를 지킬 것을 맹세했고, 심정적으로는 '고모토를 따르리라'는 기개를 품었다. 어떤 장교는 고모토의 손을 잡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잇겠습니다〉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 중견 장교들은 시라카와 육군대신이 점차 관동군의 음모라는 것을 알아챈 듯한 발언을 하자 육군대신 집무실로 몰려가서는 〈관동군은 관련이 없다〉며 윽박질렀다. 쇼와 육군의 사실을 은폐하는 기질은 이미 이때부터 중견 장교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102-3)


# 후타바카이二葉會 : 다이쇼 말기에 육사 15기부터 18기에 이르는 좌관급 장교가 중심이 되어, 전쟁론, 만몽 개발론, 군 개혁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1931년 10월 2일에 열린 관동군 막료 회의에서 이시하라 간지는 시종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개전 후 한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군사적으로는 지린 성을 진압하고 나아가 하얼빈까지 장악 영역을 넓혔으며, 각 지방의 유력자들도 관동군의 의향을 받아들여 일본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기득권의 옹호와 같은 낡은 표어가 아니라 신만몽국 건설이라는 표어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족협화五族協和·왕도낙토王道樂土의 국가로 정하는 게 우리 생각이다.〉 막료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동의했다. 모두가 〈이시와라의 말이 옳다〉며 맞장구쳤다. 군 중앙이나 정부가 이 방침에 반대하고 나설 경우 신만몽국을 독립시켜 대결 자세를 취해도 좋다는 것이 암묵적인 양해였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는 42세의 중좌로, 자신의 이념을 이 새로운 국가에 쏟아넣고 싶다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111-2)


"이시와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지구 전쟁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이 전쟁이 50년 정도 계속될 것이라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 전쟁의 시대에 들어섰다면서, 결국 1965년 무렵이면 지구 전쟁은 결말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 지구 전쟁에서 결말이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서양 문명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일본은 동양 문명의 축이 되었다. 두 문명의 대결이 바로 인류 최후의 결전 전쟁이며, 그것은 대략 1985년 무렵에 결말이 난다. 이 결전 전쟁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신병기도 개발되어 한 방으로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는 파괴 병기를 생산하게 될 것이며, 착륙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구를 돌 수 있는 비행기도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결전 전쟁을 마친 뒤에는 세계가 통일되어 민족 협화의 시대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민족협화民族協和야말로 결전 전쟁 후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이시와라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21)


"1936년 2월 26일의 이른바 2·26 사건은 육군 내부에서 국가 개조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20여 명의 청년 장교와 그들의 지휘 아래 있던 부사관 및 병사 15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쿠데타였다." "2·26 사건에 가담한 청년 장교들은 물론 자신들의 궐기 행동을 쿠데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유신이나 혁신과 같은 표현을 썼으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무라나카 다카지가 교묘하게도 〈우리는 유신의 전위전前衛戰을 벌인 것〉이라고 했듯이, 그들이 행동을 계기로 육군 당국이 새롭게 국내 체제 개혁을 위해 궐기하는 것으로 참된 '쇼와 유신'이 시작될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란 국체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대원수인 천황 폐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질적일 만큼 쿠데타나 혁명이라는 말을 피했다. 하지만 청년 장교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그랬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쿠데타 이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137-9)


"1933~1934년 무렵 육군 내부에서는 천황기관설을 신봉하고, 합법적으로 군부가 권력을 손에 넣은 다음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갖추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그룹을 통제파라고 불렀다.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 등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해 국체 명징운동에 적극적이고, 불법적으로라도 권력을 장악한 다음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를 목표로 삼은 그룹을 황도파라고 불렀다. 이 그룹은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를 받들었는데, 황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황도파였다." "「군인칙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그들은, 천황이 살아 있는 신이며 나를 버리고 신을 모시는 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배워온 세대다. 그들은 일본의 현실에 대해 살아 있는 신의 뜻을 따르는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렇게 된 것은 천황 주변에 있는 측근이 국민의 뜻을 왜곡하여 천황에게 전하고 있는 체제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그런 측근들이야말로 '임금 곁의 간신'이라는 것이다."(144-5)


"2·26 사건은 쇼와 초년대의 여느 국가 개조운동과 크게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년 장교가 부사관이나 병사에게 명을 내려 다수를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동원된 병사 중에는 이해 1월에 갓 징용되어 아직 무기를 취급하는 데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까지 있었다. 쇼와 초년대의 국가 개조운동에서는 실제로 병력을 움직일 많나 규모의 사건이 없었다. 게다가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천황의 대권임에도, 청년 장교들은 천황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뜻을 무시했다. 자신들의 행위는 큰 의미에서 천황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천황의 대권을 거스르는 행위도 허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선大善'이라 칭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 요인을 습격하여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 곁의 간신'에 대한 그들의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살해 방법은 쇼와 초년대의 테러 사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잔혹했다."(147)


"2·26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청년 장교들의 궐기는 4일 만에 천황의 강한 반대와 그것을 지지한 육군 주류파(이를 통제파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들의 호소는 묵살되고 만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2·26 사건 후의 정치 상황에서 육군 주류파는 〈이와 같은 불상사는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분 아래 육군 내부의 청년 장교들이 맡고 있던 지도부의 일파(황도파라고 불러도 좋다)를 숙군인사肅軍人事라는 명목으로 몰아냈고, '군부대신현역무관제'라는 제도를 부활시켜 육군상을 경질하거나 후임 육군상을 추천하지 않는 방법을 동원하여 내각의 생사여탈권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언제라도 육군이 주도하는 내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2·26 사건이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다. 물론 이 성공은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의 주체적인 의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형태의 것이었다."(140)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소련군은 중국을 지원하면서 자국의 근대적 병기의 위력을 시험이라도 하듯 관동군을 견제했고, 관동군도 소련이 어느 정도 항일 의욕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도발하곤 했다. 그리하여 1937년에는 113회, 1938년에는 166회나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그런 분쟁들은 점차 대규모 군사 충돌로 바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장고봉張鼓峯 산정에 소련군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동군이 처음 알아차린 것도, 국경 침범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보고를 받은 참모본부는 소련 측에 항의하는 게 좋겠다고 외무성에 제안했다. 외무성의 항의에 소련 측은 〈1886년 이후 이 지역은 소련 영토〉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이런 사태는 물론 참모본부의 막료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히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련군과 군사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했다."(234)


"그러나 일본군은 근대적 병기를 앞세운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제19사단의 참모장은 조선군 참모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 〈전선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전선의 지휘관과 병사는 오로지 수비를 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바, 전황이 '돌파구'를 찾기까지 외교 교섭을 통해 정전으로 나아갔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장고봉 사건은 결국 외교 교섭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사단장의 독단과 참모본부의 중견 막료들의 책임을 따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제19사단의 장병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소련군 앞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전사했다는 측면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외교 교섭에서 소련이 뜻밖에도 일본군을 최종 단계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합의한 사실을 핑계로, 이것 역시 일본군의 철저한 저항 때문이라고 말하고, 소련군은 대일전에서 앞서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리는 자료로 삼았다. 장고봉 사건은 책임도 묻지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일본군의 육탄 공격을 예찬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246-7)


"쓰지 마사노부는 노몬한 사건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참모이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한 쓰지는 육군 내부에서 단연 주목받는 존재였다. 성적 지상주의의 조직 원리하에서 단지 육군대학의 성적이 좋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언동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디에 배속되든 강경론을 주장했고 때로는 상관의 눈에 띄는 화려한 언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중론을 펼치는 상관을 험악하게 매도하기도 해서 군사령관이 일개 참모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온다. 1937년 11월 관동군 참모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줄곧 대소련전을 외쳤고, 그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소련군이나 몽골군의 국경 침범을 지적하면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고봉 사건에서 조선군이 소련 측에 철저하게 패한 것을 두고 〈저들은 조선군이어서 그렇다. 관동군이라면 절대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263-4)


"노몬한 사건의 발단은 장고봉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후인 1939년 4월 관동군이 정리한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이었다. 이 요강은 관동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시달되었는데, 실제로 이 요강을 기안한 사람은 쓰지였다. 일본의 판단만으로 국경선을 정하고 그곳에 소련군이나 몽골군이 들어오면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초원이나 강, 산 등에는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상대방이 그곳에 진입해오면 〈주도면밀한 준비 아래 철저하게 응징하여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더욱이 이 요강에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 이를 제일선 부대에 명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대소 군사 충돌 대망론'은 장고봉 사건의 교훈이 전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264)


"1940년 9월, 일본군은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주해 들어간다. 프랑스의 식민지 제독에게 억지스러운 요구를 들이밀고서 무력을 발동하여 진주한 것이었다. 이때 외무성은 프랑스 외무성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고, 하노이에 있는 육군의 장제스 원조 물자 저지를 위한 감시단 위원장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과 프랑스 측의 교섭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참모본부 작전부장 도미나가 교지와 남지나방면군 참모부장 사토 겐료는 제5사단을 움직여 무력 진주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는 이렇게 말한다. 〈쇼와 육군에는 세 가지 하극상 사건, 이른바 군기를 따르지 않았던 전투가 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만주사변, 쓰지 마사노부와 핫토리 다쿠시로의 노몬한 사건 그리고 도미나가 교지와 사토 겐료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입니다. 이것은 쇼와 육군의 불명예 사건이며, 특히 이시와라의 만주사변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341)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의 국책은 단숨에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기울었다. 일본이 이곳에 진주하는 것은 자존·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이고, 이것은 미국이 평소에 영국을 원조하는 것을 '정당방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로 앞뒤를 맞추었다. 해군성에서도 군무국 제2과장 이시카와 신고가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고, 이것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자며 자신감을 보였다. 주독 대사 오시마 히로시는, 독일은 단기간에 소련을 제압하고 우크라이나, 발틱(발트 해 연안부), 벨라루스, 캅카스 등을 소국으로 분할하여 소련을 실질적으로 해체할 작정이니, 일본도 이에 응하여 극동소련군을 제압하고 독일의 방침에 즉시 호응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침내 6월 24일 조정된 「제국 국책 요강」에서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중심으로 바뀌어 있었다."(346)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일본군 상륙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7월 25일 미국 내에 있는 일본 자산의 동결을 발령했고, 26일에는 영국, 27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그 뒤를 따랐다. 28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했다. 8월 1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일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 안에서 대미전의 목소리가 급속히 높아졌다. 전쟁지도반의 『기밀 전쟁 일지』 8월 2일자 기록을 보면, 〈대미 전쟁은 백 년 전쟁이다. 제국은 이미 이를 피할 방법이 없다〉고 적혀 있다." "전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측은 이미 이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 전보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는 군사적으로는 '무혈 점령'이라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쇼와 육군의 예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 점에서 실패했던 것이다."(352-5)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12일 트루크 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과다카날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하순부터 1943년 2월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을 과다카날에서 보낸 유일한 부대였다." "미군의 병력이나 병기와 비교하면 이치키 지대의 제1진은 5000 대 1 이상 차이가 있었음에도 대본영과 제17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일단 군을 투입했다가 패퇴하면 오기가 생겨 잇달아 병력을 쪼개서 보내는, 이른바 체면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쇼와 육군의 나쁜 전통인데, 그것이 여기서도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1943년 2월 7일 최후의 부대가 철수하기까지 육군 약 3만 600명, 해군 약 4700명을 쏟아부었고, 이 가운데 육군 약 2만 800명, 해군 약 3800명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보급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 쇠약해져서 죽거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치키 지대에 한정하면, 2500명이 조금 못 되는 병사 가운데 살아서 귀환한 이는 고작 1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493-4)


"이치키 지대와 (제2진으로 출병한) 가와구치 지대의 패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육상전에서는 처음으로 맛보는 굴욕이었다. 전후에 기록된 당시 참모들의 수기나 회상록에서는 본래대로라면 이 단계에서 과연 과달카날이 전략적으로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재검토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참모본부와 제17군사령부의 분위기는 그다지 냉정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비행장을 탈환해야겠다는 체면 문제가 앞섰다. 군인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재검토하자는 논의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의견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참모본부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 그리고 작전과의 쓰지 마사노부 등에게 도조 히데키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과달카날을 포기하지 마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참모본부는 그 말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작전과 자체가 개전 이래 연전연승이라는 '불패의 신화'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501-2)


"1943년 1월부터 2월까지 해군의 구축함이 라바울 기지에서 과달카날로 들어와 세 차례에 걸쳐 1만 명이 넘는 일본 병사를 철수시켰다." "2월 9일 오후 7시, 대본영 발표가 있었다. 1항과 2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2항 중반부터 과달카날에 대해 언급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 중인 부대는 작년 8월 이후 잇달아 상륙한 우세한 적군을 같은 섬 일각에서 압박하고 과감하게 격전을 치러 적의 전력을 분쇄해왔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2월 상순 이 섬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시종 적을 강하게 압박해 굴복시킨 결과 양 방면에서 엄호 부대의 전진轉進은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적에게 입힌 손해는 인원 2만 5000명 이상(실제로는 전사 1000명, 부상 4200명), 우리 쪽 손해는 1만 6734명(실제로는 전사자와 아사자를 합쳐 2만 4600명)이라고 덧붙였다. 대본영 발표가 '과장'과 '허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525-6)


"쇼와 육군을 조사하다 보면 알 수 있지만,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는 엘리트 관료에 관하여 은밀하게 내려오는 불문율이 있었다. 육군대학교 졸업자 50명(해마다 약간의 증감이 있다)은 쇼와 육군의 지도적인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 가운데 성적 우수자(상위 10퍼센트, 보통 5~6명)는 특히 군도쿠미軍刀組라 하여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며, 그들의 집무실은 작전부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벽에 걸린 남방 요역을 나타내는 대형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현지로부터의 전투 보고를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또는 국책의 핵심이 되는 전쟁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해군의 군령부 작전부와 조정하여 가끔은 정부에 대본영의 의향이라며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모본부 작전부에서 현지 파견군에 내려지는 명령은 통수권을 책임진 천황의 명령 그 자체였다. 현지 파견군은 그 어떤 명령도 어길 수 없었다."(572-3)


"작전부 참모들은 정보부를 포함해 다른 부문의 참모들에게 강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정보부가 수집한 다양한 데이터도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식에 따라 작전 명령을 내렸다." "정보부의 엘리트 군인들이 전후에 펴낸 글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것은 태평양전쟁이 틀림없이 정보전이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전쟁을 계속했다는 자성自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이 왜 이렇게 정보를 경시했는지에 관하여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정밀한 정보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 침략군에 협력한 중국인이나 특수 기관〉에 의지하다 보니 정보 수집이나 해석을 시스템으로서 구축할 수 없었고, 수상한 정보원에게 기밀비를 지불하고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573)


"1943년 4월 18일 오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일식육상공격기가 격추되었고, 야마모토는 부관 및 군의장 등과 함께 전사했다." "야마모토의 전사는 일본 해군의 굴욕이었음에도 이 사실을 오히려 담담하게 전함으로써 국민의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발표와 달리 야마모토의 최후를 본 육해군 수색대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전선으로 보내졌고 결국 전사를 강요당했다." "야마모토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제6사단 제23연대의 하스나 미쓰요시 소위가 지휘하는 수색대였다. 하스나를 포함하여 수색대 소속 병사 약 20명은 목격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금지당했고, 누설할 경우에는 〈군법 회의에 회부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이 병사들은 잇달아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형태의 전속이 되풀이되었다."(580-1)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後方思想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식량·의약품·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군수품을 나르는 이가 병사라면 나비와 잠자리도 새다〉라며, 치중輜重을 담당한 장교나 병사를 조롱하는 우스꽝스런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다. 치중이란 병참과 거의 같은 의미인데, 군대에 불가결한 식량·의복·무기·탄약 등을 총칭한다. 전투를 지원하는 후방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후방을 얕잡아보는 치명적인 결함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의 교육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육군대학교에서도 병참이란 전선으로 식량과 무기, 탄약 등을 나르는 전술이라 하여 도상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심부름'과 같은 단계에 머물렀을 뿐 일관된 교육도, 그 이론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638-9)


"일본군 안에서도 보기 드문 육군대학 출신 병참참모였던 이도 마쓰아키에 따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은 독일군을 모방하기는 했지만 병참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규율도 엄격해서 약탈 등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후방사상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도는 쇼와 시대에 들어 〈만주사변에서는 병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중일전쟁에서는 더욱 소홀하게 취급되었으며, 결국 대동아전쟁에서는 병참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일거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병참 사상에는 전쟁 억지력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냉철하게 숫자를 분석하고 군사를 직시하면 병사를 인간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이 일본에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도의 어조에는 병참을 작전이나 정보보다 상위에 두어야 한다는 확신이 배어 있었는데, 나는 태평양전쟁에서 그런 병참사상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했다."(639-40)


"「전진훈」은 1941년 1월 육군상 도조 히데키의 이름으로 군에 시달되었다. 원문을 작성한 사람은 시마자키 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군 막료들이 초안을 집요하게 손질하여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내용은 근대국가의 가치 기준을 모조리 부정한 것이었다. 「전진훈」의 '본훈 제1장 제1절 황국'은 〈대일본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위에 계시며, 조국肇國의 황모皇謨를 계승하여 무궁하게 군림하신다. 황은皇恩은 만민에게 널리 미치며, 성덕聖德은 팔굉八紘에 고루 미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생관死生觀을 보면, 〈생사를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헌신 봉공의 정신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오로지 임무를 완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름을 아낀다'라는 항목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늘 향당鄕黨과 가문의 면목을 생각하고 더욱 분려奮勵하여 그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향토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것이다."(684)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에 의한 특공 작전이 처음으로 펼쳐진 것은 1944년 10월 25일이었다. '인간' 그 자체가 폭탄이 되는 이 작전은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또 비참했다. 이 작전을 채택한 육해군 지도부의 책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 작전으로 사망한 병사들은 '신'으로 되살아나리라 강요받은 존재로, 오늘날에도 계속 거론되어야만 한다. 10월 25일은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시작된 다음 날이다. 레이테 결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발동되었고, 다바오 기지를 출발한 해군특공대 소속 비행대가 미 해군 항공모함을 목표로 고도 3500미터 높이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이날 필리핀 앞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던 미 기동부대를 향하여 특공대는 수차례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육해군 특공대 2367대가 출격하게 된다. 이는 그 숫자만큼의 생명이 사라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764)


"이 작전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해군 내부의 항공 관련 막료들이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밀고 나간 사람은 제1항공함대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였다. 당초 오니시는 이 작전을 '통솔의 외도外道'라고 자조했지만, 이미 전력이 바닥난 일본 해군으로서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러한 작전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전과가 예상 밖으로 컸기 때문에 이 작전이야말로 유효하다는 양해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특공 조종사의 양성, 특공기 개발 등에 힘을 쏟게 되었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쇼와 육군은 전군이 똘똘 뭉쳐 특공 작전을 외쳤다. 이것에 걸려든 이들은 주로 학도병이나 갓 소집된 신병들이었다. 다시 말해 군사 요원으로서 전력상 지위가 낮은 순으로 특공 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특공기 조종사들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의사만으로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반드시 따져야만 하는 쇼와 육군의 체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체질이 충분히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766, 781-2)


"1945년 3월, 고이소 내각은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국민의용대 조직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국민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6월 13일에는 각료회의에서 법적인 틀을 마련했다. 의용병역법으로 명명된 이 법률은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성,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의용 병역을 부과한다는 내용으로, 말하자면 국민을 모조리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민 전원이 병사가 되는 군사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이 국가총력전 구상의 귀결이었다." "이리하여 병사 수는 확보되었는데, 정부는 참모본부의 방침에 호응하여 본토 결전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지기 위해 국민의 사유재산에도 제한을 가하기로 했다. 3월 28일 공포된 「군사특별조치법」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진지를 구축할 때 국민의 모든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국민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어떤 항변도 허용되지 않았고, 참모본부나 군령부에서 명하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806)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GHQ 내부에서는 G2와 GS(민정국)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G2는 군인이 중심이어서 철저한 반공 노선을 취했고, 여차하면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추후 제정된 일본국헌법이 재군비를 금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가까운 시일 안에 재무장을 허용하여 반공의 보루로서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주도한 사람이 윌로비였다." "윌로비와 대립한 사람은 GS를 지휘하던 국장 휘트니였다. 그는 쇼와 육군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했고, 일본에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 군사 조직을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세력으로 간주했다. 윌로비와 휘트니는 맥아더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윌로비는 휘트니 등의 민주적 개혁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그가 (원칙대로라면 전범으로 간주되었어야 할) 핫토리를 비롯한 과거의 막료들을 감싸고 돈 것은 일본의 재군비가 진행될 경우 그들을 지도부에 포진시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978-9)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들 군인의 변절이 왜 이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느냐는 점이다. 작전참모의 졸렬한 작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장병을 생각하면 이들의 재빠른 변신을 다시금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핫토리는 작전과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모본부의 작전 전반을 관장했다. 그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그럼에도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은 핫토리 자신의 윤리관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맥아더의 전사를 집필하는 작업은 과거 일본군 군인들에게는 물론 알려지지 않았고 GHQ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947년 5월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2년 반 후인 1950년 12월에 마무리되었다. 개전부터 패전까지 일본 측의 핫토리 그룹이 작성한 원고는 방대한 분량이었던 듯하지만, 구성원 개개인에게는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핫토리와 윌로비가 암암리에 이들이 작성한 원고를 수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87)


"1953년에 간행된 『대동아전사』(저자명 핫토리 다쿠시로)에는 맥아더의 『태평양전쟁사』 편찬 그룹에 속한 멤버의 이름이 보인다. 이 10명의 면면을 보면 패전 시 대좌 3명, 중좌 6명, 소좌 1명이다. 그러니까 참모들이 전쟁사 편찬의 주체로 참가했던 셈이다." "패배한 군대의 장수(그들은 물론 좌관급이었다)는 전황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전장에서 싸운 적이 없다. 단지 참모본부 깊숙이 자리한 방에서 지도를 보며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시에 그들은 사이판의 방어진지가 맥없이 무너지자 이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사단의 잘못으로 돌렸고, 레이테 섬에서 일본군이 패배했을 때도 일방적으로 전략을 변경한 뒤 작전이 실패하자 그것을 현지 군의 무능 탓으로 돌렸다. '절대 국방권' 구상이나 '첩호 작전' 등도 책상에서 마련하여 현장에 들이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본영의 참모는 어떻게든 전사를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동아전사』를 관통하는 논조다."(988-9)


"1953년 간행된 논문 「차기 대전과 일본방위론」에서 핫토리는 미일 전쟁의 발발을 미국의 도발과 일본 '중추부'의 개전 의사가 만나 벌어진 결과라고 보는 듯히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 곳곳에서는 그의 자기변명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참모의 명령에 따라 사지로 달려간 200만여 명의 일본군 병사는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패전 후 8년, 전시 지도를 담당했던 장관將官은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총살을 당하거나 자결을 하거나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으며, 사회에 나와서도 생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부사관이나 병사는 시베리아에 억류되거나 남방에서 얻은 병을 치유하는 데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거나, 생활고와 싸우고 있었다. 많은 병사는 가혹한 전장 체험에 가위눌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전참모는 GHQ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일본군 부활안'이라는 두렵고도 무책임한 문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전후사회에서 가장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쇼와 육군 작전참모'의 처세술이었다."(995)


"쇼와 육군의 위계질서는 엘리트 군인과 병사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거니와, 병사란 1전 5리(엽서 한 장 값, 즉 소집영장을 말한다)로 징용된 자이다. 일본은 징병령을 시행했기 때문에 만 20세가 되면 본적지에서 징병 검사를 받는다. 피검자는 신체 조건, 운동신경 등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등급이 나뉘는데, 평시라면 갑종은 2년에서 3년 동안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시민의식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자립적인 개인과 같은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싸우다 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윤리라고 배웠을 따름이다. 쇼와 1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학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신들린 듯 신민 교육이 실시되었다. 전후 쇼와 육군이라는 조직은 해체되지만 그와 같은 일본적 공동체의 잔재는 전우회라는 모임을 통해 이어졌다."(1018-9)


"다수의 전우회에서는 사상적으로 대동아전쟁이 긍정되었고, 전장에서 싸운 병사들의 감정을 반영한 형태로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이처럼 일본군의 행위는 모두 옳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쇼와사의 전승傳承은 옛 병사들의 감정을 기초로 한 것이다. 전우회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월보를 발행하는 곳일수록 이러한 감정론이 활개를 친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인식과 다른 인식(예를 들면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론 등)은 대부분 도쿄전범재판사관이라 결론짓고, 선두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는 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주장은 쇼와 육군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전우회의 단골 메뉴다." "'다른 사람은 나쁘다'라는 이런 주장은 태평양전쟁을 선택한 당시 지도자의 이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해도 좋다. 역사 인식이 그 단계에 멈춰 있다는 얘기다."(1023-4)


"'영령'에 대한 애도와 추도는 전우회의 중요한 역할이다. 전우회원들이 침략 전쟁의 첨병으로 낙인찍힌다면 전사한 동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행하는 추도와 위령은 쇼와 육군이 중심이 된 태평양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는데, 전장에서 싸운 병사의 심정은 도미오카의 말로 대표되듯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나자'는 표어 아래 죽어간 전우에게 미안하다는 것, 그 하나로 수렴된다. 이것은 더 이상 이론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죽은 자는 두번 다시 의사표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야스쿠니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셔지는 것을 양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확인할 길이 없다. 전사 당시의 단계로 한정하여 추도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일본인의 '사생관'에 관련된 문제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전쟁으로 내몰린 세대의 사생관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는 그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1031)


# 전우회의 여러가지 활동

1.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 정당화

2. 전쟁사의 다양화에 대한 통제

3. 전장에서 있었던 행위의 공동 치유

4. 전후사회에서의 이해관계

5. '영령'에 대한 공양과 추도

6. 군인연금 지급 등의 명령서 전달


"1978년 3월 10일,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7명과 스가모 형무소 안에서 병사한 7명 등 총 14명을 합사했다. 이때 궁사였던 마쓰헤이 나가요시는 훗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완전히 전투를 멈춘 것은 국제법상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투 상태에 있을 때 열린 도쿄전범재판은 군사재판이고, 그 재판에 따라 처형된 사람들은 전투가 한창일 때 적에게 살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전장에서 죽은 사람과 처형된 사람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 인식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전투'는 1945년 8월 15일에 끝났지만 '정치'는 1952년 4월 27일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다. 이 전투와 정치를 아울러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야스쿠니 신사는 GHQ의 방침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들(국제주의자부터 사회주의자까지)의 영혼도 함께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1033)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매년 문제가 되고, 〈개인이냐 공인이냐〉는 기자의 질문도 이 합사 사실이 밝혀진 이후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까닭은 가해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고민해야 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우회 중에서 도조가 합사되었다고 하여 야사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곳이 있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야스쿠니 신사는 과연 역사를 모두 팽개치고 성립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으며, 적어도 도조 등을 합사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의 사생관이라는 영역을 넘어 이를 정치 문제화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사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영령을 국가적으로 총동원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역사적으로는 과거의 침략 행위 비판에 정색하고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10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