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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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세계가 나치의 폭력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어느 화창한 여름 아침에 미국 대리인과 소련 대리인이 만났다." "우리가 아는 것은 논의를 마치고 나서 소련 측이 미국인에게 나무 상자 하나를 건넸고, 미국인이 상자를 들고 건물을 나갔다는 것이다. 상자 안에는 마이크로필름이 들어 있었다. 필름을 다 펼치면 길이가 30미터나 되었고, 거기에 글은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선들과 점들과 옛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상징들이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것이 전쟁의 판세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마이크로필름에는 신경과민의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악보 252페이지가 들어 있었다. 첫 페이지에는 〈레닌그라드에 바친다〉고 쓰여 있었다. 거기 적힌 암호와 상징들은 백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의해 소리로 바뀌어 라디오 앞에 앉은 수백만 사람들에게 방송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이 담고 있는 은밀한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9-14)


1부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에 음악원에 입학했다. 내전으로 러시아 전역이 아직도 몸살을 앓는 중이었으므로 음식도 난방도 충분치 않았지만, 미챠(드미트리의 '애칭')는 음악으로 힘을 얻었다." "러시아인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항상 시와 음악을 좋아했다. 1920년대 초에 정부는 이 같은 열정을 촉진하려고 애썼다. 볼셰비키 정부는 음악과 다른 예술들이 더 이상 부유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전 노동자에게 교육을 확산하는 일을 맡은 계몽위원회가 공장 근처에 음악학교를 마련하여 연령과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음악원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내보내 인민을 위해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부르주아 가정에 있던 피아노가 끌려 나와 트럭에 실렸다. 성악가,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트럭 뒤에 올라타고 시골을 돌며 쉬고 있는 붉은 군대와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공연을 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야외 현장과 식당에서 공연했다."(50-2)


"예술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열광적인 실험의 분위기가 휩쓸었다. 〈거리가 우리의 붓이고,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다.〉 러시아 미래파 시인이자 화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을 맞아 1만 명이 동원되어 〈차르의 겨울궁전 급습〉을 공연했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를 보며 경외하고 감동하고 즐거워했다. 실험적인 극단들이 시골을 돌며 새로운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광대극, 에스에프 드라마를 공연했다. 미래주의자 마야콥스키는 〈미스테리야-부프〉 같은 기괴한 선전물 연극을 만들었다. 성서의 대홍수에서 용케 살아남은 몇몇 노동자들이 천국과 지옥을 거쳐, 마침내 영광의 새 러시아가 전기와 제조업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새로운 공산주의 유토피아─기계 세상!─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페트로그라드에는 입체-미래파, 신-원시주의, 구성주의, 절대주의, 광선주의, 생산주의 등 새로운 미술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52-6)


"작곡가들도 러시아의 새로운 현대성을 찬양하고자 했다. 최전선에 선 이들은 이제 어둡고 뒤엉긴 화음이 난무하고 천둥처럼 요란한 곡을 쓰거나 크리스털 조각 같은 음악, 그러니까 급격하게 돌출하다가 눈부신 표면이 이어지는 날카롭고 딱딱한 구조의 곡들을 썼다. 미래파에 열광했던 이들은 기계 장치의 굉음과 반복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곡들도 쏟아냈다. 이름에서부터 잔혹한 기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모솔로프의 〈주물 공장〉(마지막에 가서는 타악기 주자들이 거대한 금속 조각을 요란하게 내리쳐서 혼을 빼놓는다), 프로코피예프의 《강철의 춤》, 데셰보프의 《철도》, 오른스테인의 《비행기에서의 자살》 같은 곡들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는 〈오케스트라는 공장처럼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음악을 평균적인 산업 노동자에게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페트로그라드의 한 제조공장에서는 공장의 경적과 터빈 돌아가는 소리로 '교향곡'을 빵빵거렸다."(57)


"1922년 2월, 폐렴으로 아버지를 잃은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애도를 담은 자료를 우리에게 남겼다. 바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이다." "열다섯 살의 작곡가가 쓴 음악치고 뛰어나다. 그와 마리아는 살롱에 모인 음악가들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하여 아버지에게 바쳤다. 모음곡 가운데 한 곡, 환상적인 춤곡은 조야를 위한 곡일 수 있다. 그녀는 댄서가 되고 싶어 했다(화가, 가수를 꿈꾸기도 했다). 드미트리는 종종 여동생을 위해 괴상한 춤곡들을 썼는데,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의 무릎과 뾰족한 팔꿈치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러나 이 밝은 춤곡, 조야의 장난을 나타내는 이 곡에서도 애도의 종소리가 메아리친다. 모음곡에서 가장 뭉클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분위기가 어떻든 간에 다급한 종소리가 가끔 끼어든다. 죽음을 겪고 나서 멍한 순간에 우리가 다른 뭔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슬픔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낚아채는 것처럼 말이다."(64)


"1926년 5월 12일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제2의 탄생'이라고 불렀던 날이다. 그는 평생 이날을 축하했다. 바로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된 날이다.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음악원을 졸업한 뒤에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의 초超현대주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부 극단주의자들만큼 멀리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이후 몇 년간 그의 음악은 보다 넓은 예술적 혁명의 요소들을 많이 보였다. 각진 구성의 묘미, 깜짝 효과가 주는 재미, 그로테스크함에 대한 집착, 아이러니와 빈정거림과 풍자, 밝은 색채와 평평하고 딱딱한 구조의 강조가 그런 예들이다. 글을 쓰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기계화된 세상의 동화 같은 에스에프 오락물, 방향과 논점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교훈 없는 우화들을 내놓았다. 말 없는 음악에 '등장인물'이라는 것이 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인물들은 작가 친구들의 부조리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하다."(75-9)


"1930년대 초반 소련에 불어 닥친 음울한 기운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쇼스타코비치가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얼마나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에 그는 자신이 작곡가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말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가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도록 할까 항상 고민하며, 여기에 실패하면 내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가 무슨 뜻으로 위의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의 옆 소파에는 미국인 인터뷰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부의 공식 통역자도 있었고, 미심쩍은 것은 무엇이든 상관에게 보고했을 소비에트 언론 담당관도 자리에 함께했다.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한 한 학자의 말대로 자유롭게 생각들을 터놓고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103-4)


"발레곡 〈볼트〉(1931)나 〈맑은 시냇물〉(1935)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 러시아 예술계를 휩쓸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요구에 충실했다.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게 되는 양식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딱히 사실적이지는 않다. 아무튼 작가들과 작곡가, 화가들은 더 이상 20년대처럼 꿈, 동화, 부조리, 에스에프적 상상물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묘사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소비에트의 현실이 보편적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소비에트 작곡가 연맹은 1934년 아래와 같은 지침을 내렸다.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무엇보다 현실이 승리를 향해 진보한다는 원칙, 영웅적이고 밝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맑은 시냇물〉을 작곡했을 때 그는 집단 농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불안, 굶주림, 필사적으로 곡식을 숨기려는 노력을 묘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현실이었다."(106)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초연은 1934년 1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두 극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19세기 단편 소살이 원작으로 줄거리는 낡았지만, 음악은 강렬하고 대담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살인을 저지르는 여주인공에 감동적인 숭고함과 깊은 슬픔이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쇼스타코비치는 계몽인민위원을 리허설에 초대했고, 공연을 보고 나서 정부는 《맥베스 부인》이 〈소비에트 오페라의 창조성이 찬란하게 꽃피는 출발점〉이었다고 선언했다. 오페라는 곧바로 성공을 거두었다. 첫 공연이 열리고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해서 쇼스타코비치는 막이 끝나고도 무대에 올라가서 인사를 해야 했다. 동료 작곡가들은 〈비범하고 깊이 있고 관현악 편곡이 뛰어난 작품〉, 〈쇼스타코비치의 창조력의 정점〉이라고 말했다. 레닌그라드 신문들은 오페라가 곧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 대열에 오를 것이라고 흥분했다."(113)


"맥베스 부인이 무대에서 연인과 함께 남편의 목을 졸라 죽인 바로 그해인 1834년 말,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총수 세르게이 키로프가 당 본부의 복도를 걷던 중에 암살범이 경호원들을 용케 피해 꺼내 든 권총에 목을 맞았다. 키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는 크렘린의 스탈린 방에서 묵기도 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스탈린은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들었다. 독재자는 친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처벌하도록 했다. 키로프가 암살된 12월 1일, 국가에 대한 테러로 체포된 사람들은 열흘 이내에 재판에 넘겨지고 유죄로 판명되면 항소 없이 즉각 처형되도록 하는 긴급명령이 통과되었다. 훗날 '대공포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1935년 4월 7일, 스탈린은 아이가 열두 살만 되어도 어른처럼 재판을 받고 처형될 수 있다고 알렸다. 아이들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은 부모는 반역자와 공모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야 했다."(114-6)


# 실제로는 스탈린 본인이 키로프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1월 28일,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를 한 부 샀다. 페이지를 훑어보다가 자신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음악은 없고 혼란 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하여」라는 표제의 기사였다." "스탈린은 왜 젊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고발하려고 했을까? 그것도 2년 가까이 공연되면서 큰 사랑을 받았고 소비에트 오페라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맥베스 부인》을 보고 나서 말이다. 확실한 대답은 모르겠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세계적 명성이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묘사된 성적 분출에 스탈린이 혐오를 느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를 본보기로 삼아 〈진정한 예술, 진정한 과학, 진정한 문학〉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 지도자들 전체를 꾸짖고 괴롭히려 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정권의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고, 그들에게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123-5)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인민의 적이 작곡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특히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은 기이했다. 거대하고 요란하고 성난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조가 이리저리 뻗어가고 모호한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 교향곡이 작아지고 대화의 분위기로 접어들 때면 여지없이 거대하고 섬뜩한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 "결국 결정적인 타격이 찾아왔다. 쇼스타코비치는 강압에 못 이겨 초연을 취소해야 했다. 『소비에트 예술』 잡지에 이런 안내문이 올라왔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자신의 《교향곡 4번》 공연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창조적 확신이 없고 길고 낡은 국면으로 여겨진다는 이유에서다.〉" "잔혹하면서 복잡하게 얽힌 《교향곡 4번》은 쇼스타코비치의 가장 매혹적이고 독창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지만, 공포에 재갈이 물려 대중과 만나기까지 사반세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142-4)


"곡조의 변형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4번》 같은 교향곡들은 특정 사건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예컨대 1악장에서 더듬거리고 덜컹대고 무력해 보였던 여러 주제들이 교향곡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여 쾌활한 거리 무용처럼 연주된다. 그런 다음에 그것들은 짓눌리고 침묵에 던져진다. 뭔가 극적인 것을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에 요동치는 악마적 송가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의 한 구절이 들어 있다. 오페라에서 왕비에게 환호하는 합창단이 노래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왕과 왕비가 벌인 죄 때문에 자신들에게 역병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전의 교향곡에서라면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에게 바치는 찬가를 넣었을 바로 그 대목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이런 구절을 사용했다는 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의 갈채는 병들어 죽어가면서 역병의 책임이 있는 지도자에게 환호하는 도시에서 가져왔다."(146-7)


"쇼스타코비치는 무엇이라도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조만간 그의 침묵도 주위에서 벌어지는 문화 혁명에 대한 논평으로 읽힐 터였다. 침묵은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는 봄에 《교향곡 5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37년 11월 21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번호 47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모두가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다.〉 한 전기 작가의 말이다." "피날레가 결말을 향해 치달을 때 청중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다들 히스테리 같은 흥분에 빠졌다." "청중에게 이 교향곡의 승리는 단순히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날 밤 공연장에 모인 모두가 생존자였다. 모두가 작곡가가 겪었던 고통을 나름의 방식으로 겪었다. 그들은 이제 막 애도할 기회를 얻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함께 슬퍼할 기회를."(175-81)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체포를 피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국제적 명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대공포 소식이 서방으로 새어나갔지만, 스탈린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은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비에트의 가장 유명한 시민이 실종된다면 전 세계가 의심할 게 뻔했다. 그러는 동안 NKVD는 작곡가를 기소할 수 있는 사건을 꾸미려고 자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을 것이다." "나데즈다 만델시탐은 이렇게 썼다. 〈공포의 공기를 들이마신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파멸한 것이다. 모두가 희생자이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인자들,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눈을 감거나 손을 씻은 공범과 아첨꾼들도, 밤에 몰래 후회에 시달린다 해도 그렇다. 전 부문에 걸쳐 모두가 공포로 인한 혹독한 병에 시달렸고, 지금까지 아무도 회복하거나 일상적인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195)


2부


"소비에트 연방 시민들은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나치에 협력한 시민들을 무참하게 죽였던 소비에트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치를 비판하면 투옥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쇼스타코비치와 어울리던 사람들에서 보자면,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과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얼마 전에 〈알렉산드르 넵스키〉라는 걸작을 완성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야만적인 독일 기사단과 전투를 벌여 기념비적 승리를 거둔 중세 러시아 영웅의 이야기다." "1938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화가 개봉했을 때 스탈린은 영화의 친러시아적, 반독일적 정서를 찬양하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영화는 곧 소비에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학생들은 영화에 나오는 합창곡을 노래하고 다녔다. 이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9년에 독일이 동맹국이 되자 뿔 달린 튜턴족 기사들이 침략자로 나오는 영화는 상영관에서 사라졌다. 영화는 나중에 다시 상영되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207)


"전쟁이 발발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군부대를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부대를 돌아다니며 사기를 진작하는 소규모 앙상블이 연주할 수 있도록 노래와 클래식 곡을 단순하게 편곡했다." "소비에트는 슬라브 문화를 열등하고 심지어 인간 이하라고 여기는 적과 싸우는 중이었다. 나치는 특히나 러시아의 문화유산들을 업신여겼다. 마치 러시아의 위대한 사상가, 시인, 음악가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작가 안톤 체호프의 집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레프 톨스토이의 육필원고로 불을 붙였다. 박물관을 약탈했다.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마을을 차지했을 때는 그의 집을 모터바이크 차고로 만들었다." "음악 공연단들이 붉은 군대 해군, 공군, 지방의용군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도록 한 목적은 침략군에 의해 더럽혀진 러시아 문화의 힘과 정통성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레닌그라드 음악단은 시민들과 병사들을 위해 매달 평균 160회의 공연을 했다."(241-3)


"1941년 7월 18일, 시 관료들은 배급카드를 나눠주었고 빵과 버터 같은 생필품을 구입하려면 카드를 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게에는 여전히 값비싼 물품들이 있었다. 아무도 굶주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공식 신문들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식량이 부족해지는 일은 없을 터이고, 독일군은 결코 그곳까지 오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 이런 거짓말에 시 정부도 넘어갔다. 포위되었을 때 사용하라고 소비에트 상공장관이 레닌그라드에 생필품을 실은 거대한 차량을 보냈을 때, 보로실로프 원수와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시 정부가 물품을 받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창고에 공간이 부족〉하다면서 수송된 물품을 거절했다. 훗날 레닌그라드가 굶주림에 허덕이며 1년을 보내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7월 19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 향하고 있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교향곡 7번》 서두를 써 내려갔다. 훗날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 불리게 될 작품이었다."(257-8)


"〈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아주 빠르게 썼다.〉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이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전쟁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 말 그대로 그의 사방이 전쟁이었다. 도시 북쪽에는 핀란드군이 있었다. 서쪽은 핀란드만이었는데 부유기뢰가 떠다니는 죽음의 바다였다. 동쪽에는 라도가 호수가 있었고, 독일군이 호수 남쪽 연안에서 폭격을 가했다. 남쪽은 독일군이 쫙 깔린 전선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세 갈래가 악마의 쇠스랑처럼 러시아의 살갗에 깊게 박혔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포위했고, 소비에트 네 개 부대를 함정에 몰아넣었다. 중부집단군은 스탈린과 국가방위위원회가 두려움에 떨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이제 불과 32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275-7)


"9월 8일,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2악장 작곡을 시작했다. 레닌그라드가 보다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기분으로 작곡된 조심스러운 춤곡 악장이다. 그는 여기에 '회상' 또는 '꿈'이라는 제목을 붙일까 생각했다. 전날 거센 폭격이 있었지만, 기분 좋은 간주곡의 우아한 첫 마디에는 그런 공포의 기색이 전혀 없다. 대대적이고 잘 조직된 독일 공군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로 쳐들어오는 것을 못 본 체 무시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음표를 그렸다." "가볍게 흔들리는 춤곡 악장이 중간쯤에 이르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를 비웃는 패러디가 된다. 중간에 폭발하는 대목은 9월 8일 폭탄이 터졌을 때 그가 작곡했을 법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회상'의 주제를 전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작곡가의 경험과 그가 작곡하는 음악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것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작곡된 온화한 음악이었다."(278-82)


"《교향곡 7번》의 3악장은 느리고 긴 명상으로, 간간이 삭막한 팡파르가 반복되고 변형되어 끼어든다. 원래 그는 여기에 '조국의 광야'라는 제목을 붙였다. 아마도 러시아의 광활함, 시베리아의 타이가 삼림지대, 외로운 자작나무 숲, 찰싹거리는 라도가 호수 연안, 풍요로운 우크라이나 들판에 대한 자부심을 담으려 했던 것 같다. 북쪽으로는 툰드라, 동쪽으로는 사막, 남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록빛 언덕이 닿은 땅, 갈망으로 가득한 곡이다. 지독하게 여린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최종적으로는 악장에 붙인 제목들을 지웠다." "어떤 사랑은 너무도 강력해서 결국에는 슬픔을 항상 속에 묻어야 한다. 그 안에 암호로 새겨진 것은 언젠가는 사랑이 끝나리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를 화염과 먼지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울음으로 채웠을 때 쇼스타코비치가 쓴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9월 29일에 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를 마무리했다."(318-9)


"전세는 1941년 12월 둘째 주에 역전되었다. 소비에트가 모스크바 근처에서 독일의 3개 기갑사단을 모두 물리친 것이다. 거의 500대의 전차를 파괴하여 독일 중부집단군을 흩어지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히틀러의 육군이 진격을 멈추었다. 엄청난 소식이었다. 소비에트 정보국은 며칠째 승리를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3일 마침내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실었다.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접수하려던 독일의 계획이 무너지다: 독일군 패배.〉 (쿠이비셰프로 피난해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어쩌면 이 소식을 듣고 교향곡 작곡을 재개하여 승리의 피날레를 쓰고자 생각했을 것이다." "니콜라이 소콜로프의 회상에 따르면 〈파시스트들이 모스크바 외곽에서 박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쇼스타코비치는] 자리에 앉아 활기차게 신이 나서 작곡을 했다.〉" "잠깐 동안 세계는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얻었다." "그리고 12월 27일, 쇼스타코비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 《교향곡 7번》을 마침내 끝냈소.〉"(358-64)


"오랫동안 러시아인들과 미국인들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5개년 계획과 대공포 시대의 참상을 제대로 아는 미국인은 드물었어도 스탈린과 공산당에 대해 깊이 불신할 만큼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미국의 도를 넘는 자본주의를 경멸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정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것은 전쟁에 관한 곡으로 소비에트 시민의 삶과 독일 침공의 공포, 다가올 영광의 승리를 묘사했다. 작곡가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국제적 유명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 곡으로 서구인들에게 러시아인이 볼셰비키 야만인이 아님을 보란 듯이 말해줄 수 있었다. 그들은 포위된 와중에도 교향곡을 쓰고 있었다. 미국의 전차와 비행기, 통조림 고기들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가 돌아다니는 바다와 독일 공군이 정찰하는 하늘을 넘어 러시아로 전달되는 동안, 러시아 외교관들은 교향곡 악보를 서방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397-401)


"이 작품 덕분에 실질적으로 원조가 늘었을까? 교향곡은 스탈린이 그토록 바랐던 제2의 전선을 만들지는 못했다. 1942년 여름에 동맹국은 유럽으로 치고 들어가 독일을 공격할 생각을 할 만큼 두터운 전열을 갖추지 못했다. 스탈린은 격노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1944년에 가서야 제2의 전선을 펴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 전차, 무기, 의료품, 식량 형식으로 러시아에 보내는 원조는 가파르게 늘었다. 덕분에 소련이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원조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은 전쟁에서 절망적으로 내몰린 러시아를 돕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대중을 설득하는 캠페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였다. 1943년 1월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90퍼센트가 설사 자국의 식량을 줄여서라도 러시아에 더 많은 식량을 원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과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소련은 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430-1)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레닌그라드 초연은 1942년 8월 9일에 열렸다. 의도적인 도발의 제스처로 선택한 날짜였다. 1년 전 히틀러가 아스토리아 호텔 무도회장에서 축배를 들겠다고 떠벌렸던 바로 그날이었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많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의미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강력한 연대감과 우정을 심어주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승리의 희망을 꿈꾸게 했다. 일부 독일인들에게는 슬라브족을 인간 이하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주민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하나 된 일체감을 갖도록 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음악을 와서 들으려고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그날 밤 공연장에 있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진짜 교향곡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향곡, 레닌그라드 주민들의 교향곡입니다.〉"(444-50)


3부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역사는 완벽한 마무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연주한 것은 공세를 전환시킨 계기였다고 지금 기억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전세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그것은 기억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포위는 이후로도 1년 반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점차적으로 레닌그라드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되찾았다. 이미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라도가 호수를 건너 도시로 수백 톤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전함, 화물선, 바지선들이 줄을 이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호수 아래로 파이프가 설치되어 레닌그라드는 겨울이 와도 연료가 부족하지 않게 되었다." "1943년 1월 18일, 마침내 도시를 에워싼 독일의 포위망에 균열을 냈다. 도시 안쪽 군인들과 봉쇄 고리 바깥쪽 군인들이 서로 얽혀 기쁨의 포옹을 나누었다. 포위는 이어졌지만 봉쇄는 끝났다."(457-8)


# 1944년 1월 27일, 고보로프 원수가 공식적으로 해방 선언


"전쟁이 끝나고 소련과 다른 연합국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소련 내에서 서구의 자본주의 정권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제 무엇이든 위험했다. 이미 전쟁 말년부터 NKVD는 미국의 과학기술을 칭찬하는 것을 범죄로 취급했다. 이제 서구 영화, 서구 소설, 서구 음악이 또다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러시아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다. 프랑스의 바게트 빵은 '도시 빵'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렸다. 정부는 다른 나라와 혈통으로 연결된 〈뿌리 없는 세계인〉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뜻하는 말임이 곧 드러났다.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에서 칭송을 받았다. 『타임』 표지에 등장했다. 기사들은 그가 '부르주아'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레닌그라드의 작가들이 또다시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전쟁을 도우려고 애쓴 노력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공격이 다가오고 있었다."(472-3)


"1948년 2월,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명망 있는 음악가, 작곡가, 음악학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소비에트 음악에 대해 논의하고 그들에게 법령 하나를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현대 음악의 〈형식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같은 〈반인민〉 작곡가들의 음악이 〈도로를 뚫는 드릴 소리나 음악적 가스실〉처럼 들린다고 불평했다. 1936년의 공격과 「음악은 없고 혼란뿐」 논란의 재현이었다." "《교향곡 7번》의 성공은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시 그를 공격하고 나선 당의 입장에 자기도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부르주아, 퇴폐적 서구에 영합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러시아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그는 승리의 《7번》을 작곡했고, 전세가 역전되어 러시아가 승기를 잡았을 때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8번》을 작곡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473-4)


"1948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돈을 벌었다." "1953년 3월 1일 이른 아침, 공산당 서기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침대에서 쓰러졌다." "스탈린 동지는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그는 3월5일에 죽었다." "감옥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유대인인) 바인베르크는 간수들이 갑자기 공손해진 것을 알아챘다. 그는 곧 서류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이제 더 이상 숙청은 없을 터였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자신의 이니셜로 만든 음악 모노그램─DSCH─을 선율 속에 은밀히, 하지만 반항적으로 끼워 넣은 곡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불안하게 부르지만 교향곡의 후반부로 가면 위풍당당하게 돌아온다. 마치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하고 소리치는 듯하다."(477-80)


"쇼스타코비치는 남은 세월 동안 교향곡을 계속해서 써서(총 15곡을 작곡했다) 연민과 저항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현악 4중주곡도 잇달아 썼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느린 《현악 4중주 15번》을 어떻게 연주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파리가 공중에서 죽은 채로 떨어지도록, 청중들이 그냥 지루해서 연주회장을 떠나도록 그렇게 연주하시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마지막 악장에 보면 그가 50년도 더 전인 열다섯 살 때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에 썼던 다급하게 울리는 조종 소리의 흔적이 들린다. 당시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금은 조용히 무시무시하게 자신의 죽음을 위한 종을 울린다. 선율은 점차 흐릿해지고 약해지고 아마도 온화해지다가 마침내 알쏭달쏭한 수평선으로 사라진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8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교향곡 7번》이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던 바로 그날이었다."(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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