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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7장 '동원 대중'과 '피해 대중' / 1956년
"50년대 이승만 반공체제의 히스테리, 바로 그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실천한 인물이 김창룡이었다. 이승만이 이론이었다면, 김창룡은 실천이었다." "이승만의 이론이 '빨갱이 사냥'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그의 '빨갱이 사냥'은 늘 정치적이었고 정치와 연관되었다. 이승만에게는 그것까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수하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을 위한 육군 특무대가 창설되었을 때, 특무대에 부여된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정치공작이었다." "이승만은 출신별, 지역별로 형성된 군내 파벌이 상호 반목하도록 조장하는 동시에 그 모든 걸 감시하고 공작을 추진하기도 하는 기구로 헌병대와 특무대를 이용하였다. 김창룡의 충성 경쟁 라이벌은 헌병대의 원용덕이었던 셈이다. 헌병대는 반민특위 활동에 쫓겨 입대한 이익흥, 전봉덕, 노덕술 등 경찰 간부들까지 가세해 정치 개입 성향이 매우 강했지만, 충성 경쟁에서는 김창룡보다 한 수 아래였다."(17)
"민주당은 3월 28일 전국대회를 열어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선거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걸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염증의 반사 효과였겠지만, 신익희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의 강연회에는 30만 인파가 몰렸다. 서울운동장도 장충당공원도 빌릴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장소였다."(33-5) "야권 후보 단일화의 기운도 무르익고 있었다. 진보당 후보 조봉암은 4월 3일 정부통령 후보 백지화, 나아가서는 자신의 출마까지도 취소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바로 그 날 신익희가 죽을 줄 누가 알았으랴. 신익희는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기차 안에서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37-8)
# 5·15 선거 결과 이승만이 52% 득표로 대통령 당선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의 인기가 시사하듯이, 신익희의 사망은 많은 사람들을 허탈과 좌절에 빠지게 만들었다. 박경수는 〈그런 민심의 허탈은 한편으로 '이승만은 하늘에서 낸 사람'이라는 엉뚱한 '신수설(神受說)'까지 떠돌게 하면서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전혀 반성이나 개전의 빌미조차 가져보지 못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랬다.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승만은 5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낙선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는 과거에 민중의 인텔리젠쓰, 즉 명철을 믿어왔던 것이나 지금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가진 그 날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장관에 이익흥을,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했다. 이익흥은 일제 때 경찰서장 출신으로 이승만의 방귀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김종원은 여순·거창 사건에서 이미 악명을 떨친 바 있는 인물이었다."(41)
"(야당 후보의 입후보 등록 방해 공작을 펼쳐) 야당의 손발을 꽁꽁 묶어 그라운드에 들어오지도 못하게끔 해놓고 치른 8월 8일의 기초의회 선거 결과가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권이 전국에서 90% 이상을 휩쓸었다. 선거 후 순경 박재표가 (투표함 2개를 수송 도중 바꿔치기한) 환표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자유당이 다단계 선거 대책을 세웠다는 게 알려졌다." "그러나 8월 13일에 치러진 서울특별시·도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22%의 당선자를 배출했으며, 서울에서는 자유당이 참패했다. 서울시의원 47명 중 민주당이 40명을 차지했다. 서울에서는 자유당원이 자유당으로 입후보하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나와 무소속 후보자들은 '순수 무소속'을 표방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서울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놓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른바 '가면(假面) 입후보자'가 42명이었는데, 이 중 5명만 당선되었다. 전형적인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었다."(64-5)
8장 '장길산'과 '홍길동'을 기다린 세상 / 1957년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미국의 원조에 기대 굴러가던 한국의 '원조 경제'는 심각한 제약 조건을 안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원조물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것을 판매한 뒤 그 대금을 대충자금(代充資金, Counterpart Fund)이라 하여 적립해야 했다. 이 자금은 한미합동경제위원회의 철저한 통제를 거친 뒤에 쓸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미국은 한국 정부와 경제를 통제하였다. 정부재정 가운데 절반이 넘는 대충자금은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는 등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건설업계에는 정부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자유당 5인조'라는 게 있었다. 대동공업, 조흥토건, 극동건설, 현대건설, 삼부토건 등이었다. 삼부토건은 국내 건설업 면허 1호로 도로·항만 등 각종 토목 공사에 주력하였고, 현대건설은 57년 9월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를 수주하면서 '자유당 5인조'에 진입하였다."(143-4)
"『현대문학』 59년 10월호에 발표된 이범선의 〈오발탄〉은 뿌리뽑힌 월남민 가족이 겪는 처참한 가난의 고통을 다룸으로써 남한 사회가 자랑으로 내세우는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수영은 〈어머니,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라는 말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대화는 〈오발탄〉 가운데서도 가장 냉소적인 부분이다. 주인공 송철호의 이 설득은 그 자신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한 것이다. 실성한 어머니와 임신중독에 걸린 아내, 영양실조로 말라가는 어린 딸, 상이용사로 제대해 은행강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아우, 양공주인 누이들에게도 이 설득은 효력 상실이다. 요컨대, 이 독백에 가까운 설득은, 삶과 송두리째 맞바꾼 자유의 가치가 남한 사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월남민 주인공의 역설이며, 체제 유지의 내적 동의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50년대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148-9)
9장 '생각하는 백성'과 '인의 장막' / 1958년
"이승만의 '세계 4대 강국론'은 그가 평소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온 '반공적 선민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평소 주장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반공진영의 중심지이자 '자유진영의 보루'였다. 그런데 이는 오직 공산주의에 대한 호전성을 강경하게 드러낼 때에만 유지할 수 있는 타이틀이었다. 그래서 국민에게는 늘 '성스러운 사명'이 강조되었다. 한국인은 세계를 구출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한국인은 자유세계를 구해야만 할 세계 정의의 사도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목숨은 한국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는 한국인에게 세계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은 물질적 도움을 받는 대신에 세계에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당당하게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건 세계적인 반공 지도자인 이승만의 뜻과 명령에 복종할 때에만 세계를 구원해야 할 한국인의 사명이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183-4)
"제4대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남겨둔 58년 1월 11일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진보당의 주요 간부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다음 날 (소위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된) 박정호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부장검사 조인구는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박정호 등 10여 명에 대한 공소 내용을 설명했다. 조인구는 〈평화통일이란 구호는 남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방편으로서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이다. '북진없는 정강정책을 갖는 정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령 내용은 바로 진보당의 확대 공작에 귀착된다〉고 말했다. 조인구는 〈진보당이 박정호 사건에 관련되어 수사 대상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문제는 진보당이 내건 평화통일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규명한 후 그것이 북괴의 지령과 동일할 때는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정부는 재판도 열리기 전인 2월 25일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시켰다."(190)
"자유당과 폭력조직의 유착은 진보당 사건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들었다. 조봉암은 1958년 7월 2일 1심 재판에서 평화통일 주장이나 간첩혐의는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가운데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판결 뒤 이기붕 수하의 반공청년단 수백 명이 동원돼 법원청사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고 외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승만은 1심 판결이 내려지자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라고 분노했다." "10월에 열린 2심 재판에서 검사 조인구는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조인구는 훗날(1994년)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한 것은 검찰총장·서울시경국장 등 나의 윗선에서 사형을 협의하여 지시한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뜻과 그 뜻에 충실한 공포의 관제 시위에 '겁먹은' 고등법원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4-6)
"1958년 11월 18일, 자유당은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하는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구성된 신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검찰 실무자인 오제도, 문인구, 조인구 등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 법안은 강력한 언론제한 규정과 더불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되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고,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 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 법안에는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여 종래 북괴의 지령에 의해 운영되는 단체라고 규정된 적용 대상 외에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집단 또는 단체의 조직을 추가했다. 또한 이적행위의 개념을 확대시켜 종래 군사상의 비밀탐지에만 적용하던 간첩에 대한 개념을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수집을 국가보안법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207-8)
# 12월 19일, 야당 의원 감금 후 날치기 통과
10장 파국을 향한 질주 / 1959년
"50년 3월 '귀속재산처리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정부 소유의 귀속재산 불하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이 작업이 본격화된 것은 전쟁이 끝난 54년 이후부터였으며 58년까지 거의 처분되었다. 귀속재산은 자본가에게 자본축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권력과의 줄만 있으면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었다. 귀속재산은 10분의 1에 불과한 가격에 특혜 불하되었으며, 15년 이상 할부불의 지급조건으로 책정된 구입대금마저도 저리의 은행융자로 조달되었기 때문이다. 장하진에 따르면, 〈고정된 구입대금에 비해 15년 동안 물가 등귀에 따라 공장 가치는 약 260배나 상승하여 사실상 무상으로 공장을 취득한 결과가 되었다. 곧 이 시기에는 자산이 없이도 불하만으로 하나의 재벌이 창조되는 신화를 낳았다. 50년대의 89개 주요 대기업체 가운데 불하된 귀속기업체는 36개로 전체의 40.4%를 차지하였으며, 22개 거대 기업체 중에서는 그 비중이 더욱 높아 15개 업체(68%)나 되었다."(271-2)
"1957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은행 민영화는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재벌 구조를 형성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인학은 〈기업과 정부의 유착관계의 대표적인 사건은 4개 시중은행의 민영화와 관련되어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6년에 종결된 시중은행주 불하공매인 바, 불하공매 과정은 정치적 영향력의 대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치적 파워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말한다. 〈삼성그룹을 비롯한 당시 대표적 재벌들은 시중은행 불하공매에 참여하여 시중은행의 소유권을 취득하면서 재벌의 기본적인 형상을 이루게 되었다. 삼성그룹은 흥업은행(한일은행) 지분의 83%, 조흥은행 지분의 55%를 취득하면서 4개 시중은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여 한국 최초로 완전한 재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성그룹 이외에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제일은행), 대한제분이 상업은행,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하게 되어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는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275)
"대중의 침묵에 대해 이승만 정권의 억압과 공포 분위기 조성에만 그 책임을 돌릴 순 없을 것이다. 우선 민주당이 문제였다. 민주당은 미 대사관 못지않게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잘되었다는 반응이었다. 58년 2월 이승만 정권이 사실과 거리가 먼 이유로 재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진보당 등록 취소를 공포했을 때에도 역시 민주당은 정략적인 주판알을 튕기면서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언론, 특히 야당지들은 어떠했던가? 이들 역시 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를 이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 사형에 아무런 사회적 저항이 없는 것에 대해 득의양양해 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자유당 정권은 59년 11월부터는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등에게 사전 사표를 받아 놓고 사전 선거운동을 강요하였다."(262)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이미 59년 11월에 세운 부정투표 계획에는 '4할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전략이 들어 있었다. '4할 사전투표'란 자연 기권자, 무효표, 번호표를 교부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생길 조작 기권자, 유령 기권자, 매수 기권자, 전출자, 노쇠자 등을 전 유권자의 4할로 책정하고, 이 4할의 투표자를 자유당 후보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 전에 미리 무더기로 집어넣는다는 계획이었다. 또 '공개투표'란 유권자를 3인조·9인조로 편성해서 자유당 당원, 경찰관, 공무원 또는 그 가족, 매수자가 조장이 되어 공개투표로 여당 후보를 찍게끔 하는 계획이었다. 여당계 유권자들에게 자유당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장 주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며,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불가능할 때는 시비를 걸어서 함께 퇴장하도록 소동을 일으키라는 구체적인 행동요령까지 들어 있었다."(301-2)
"3·15 선거는 '불법·무효'라기보다는 그냥 '장난'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그런 선거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총 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대의 개표 결과는 유권자 수의 120%가 이승만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또 한번의 장난질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득표율은 80%, 이기붕의 득표율은 70에서 75% 정도로 하향 조정하라는 경찰 지령이 전국 개표소로 하달되었다." "마산 경찰당국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 시위를 〈공산당 지하조직의 폭동〉으로 조작했다. 경찰은 주모자로 구속한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정남규를 남조선 노동당원으로 둔갑시키고 각종 증거물을 조작해 제시했다. 마산경찰서 형사주임 노장광은 시위대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 시체실에 들어가 자신이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전단을 숨진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집어넣기까지 했다."(3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