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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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점증하는 좌절의 혁명 /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항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으며, 대학생들의 참여도 서울 소재 대학보다는 지방대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고, 이승만의 하야를 외치는 최초의 목소리는 대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4·19 혁명의 성격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학생들은 단지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는 이유에 근거한 특권·선민의식에 물들어 있었고, 〈소수를 제외하고는 극우냉전 체제적 사고와 구미 제일주의의 근대화론 틀에서 벗어나 있지 못했다.〉 그들은 이승만 체제 하에서 〈자발적이고 반체제적인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4·19 당시에도 〈기성세대는 각성하라〉는 식의 소박한 분노를 표출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이는 종국엔 4·19 혁명의 주체가 된 대학생들에게 혁명 이후의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조차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23-4)


"동양통신 기자 김성진은 이승만이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화문에서 경무대 입구까지 순식간에 일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승만의 사임이 4·19의 주요 목표가 아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4·19 직후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84.5%는 자유당에 반대하여 데모에 참가했다고 답했고, 이승만에 반대한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11.3%에 지나지 않았다. 4·19가 일어난 주요 이유를 들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들은 ①정부의 부패 ②부정선거 ③경제불황 ④이승만의 장기 집권 ⑤경찰의 고대생 데모대 공격 ⑥장면 지지 등을 지적하였다.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①이기붕 ②자유당 지도층 ③경찰 아첨배·특혜 추구자들 ④부정축재자 및 모리배 ⑤이승만 ⑥정부관료 순이었다."(38-40)


"민주당이 당면한 진짜 문제는 4·19 혁명에 민주당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보다는 4·19 이후 민주당이 어떤 행태를 보였는가였다. 장면의 부통령 사임을 놓고도 구구한 해석이 난무한 가운데 내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거니와 집권 후엔 더욱 격렬한 내분의 양상을 보이게 되는 민주당을 고운 눈길로 보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4·19는 애초부터 '주인 없는 혁명'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직접 집권하지 않는 한 '무임승차설'은 나오게끔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의 '독식(獨食) 멘탈리티'였다. 7·29 총선 공천에 4·19 주도 인사들을 대거 참여시켰더라면 집권 이후 정국의 안정도 기할 수 있었을 텐데, 민주당은 파벌 간 나눠먹기를 하기에 바쁜데다 그 나눠먹기마저 여의치 않아 동일 선거구에 중복 출마하는 등 권력에 걸신들린 모습을 보였다. 이 경우엔 민주당에 강력한 보스가 없었던 것이 재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58-9)


"8월 19일에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장면은 8월 20일부터 조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조각에서부터 신구파간 이전투구의 격랑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 윤보선이 문제였다." "윤보선은 60년 당시 63세였는데,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77-9) "그러나 장면은 교육자나 성직자의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정치지도자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검소하고 온화한 반면 나약했고 의타적이었다. 죽도 밥도 아니라는 뜻에서 장면에겐 '짜장면'이라는 별명마저 붙었다. '착하지만 어리숙한' 모습을 꼬집은 것이었다. 장면의 정계 진출 자체가 천주교와 강한 친미주의라고 하는 배경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혁명 이후의 혼란한 사회를 이끌고 가기엔 역부족이었다."(81)


"(대한對韓 정책에 대한 권고를 담은) 콜론 보고서는 한국에서의 군사 쿠데타를 기대하는 미국 정계 일각의 기류를 반영했다. 예컨대,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풀부라이트는 59년 콜롬보에서 〈한국에서는 정치적 위기가 점차 커지고 있다. 정당 정치가 실패할 경우엔 군인 정치에 의한 교체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 무렵 일본 주재 미국대사 라이샤워는 〈한국을 계승할 사람은 전쟁 마당에서 자라온 새로운 젊은 군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주장은 제3세계에서 반공 우익정권을 지지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늘 민주주의를 외쳐온 미국의 대외정책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기회주의 성향을 잘 드러내준다." "콜론 보고서는 60년 1월부터 5월까지 『사상계』에 분할 게재됨으로써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특히 젊은 장교들을 자극하여 군인들이 너도 나도 우국방담에 뛰어들면서 강한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107)


"한용원은 5·16 쿠데타 촉발 요인으로 ①정군파와 만군출신 비주류파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파벌주의 ②진급 적체현상의 심화에 따른 경비사 5기 및 육사 8기의 불만 증대 ③장면 정권의 10만 감군 계획으로 인한 군부의 제도적 이익의 손상 우려 ④정군을 추진한 '말썽 장교' 예편 계획에 따른 정군파 장교들의 불안 의식 고조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소장파 장교들이 갖고 있던 강한 자부심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군의 성장'이라고 하는 구조적 배경으로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장교들 개개인에겐 강한 자부심 또는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구하랴〉하는 식의 소영웅주의의 형태로 나타나 쿠데타의 촉발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과대 성장한 국가의 제 부문에서 군은 초과대 성장한 집단이었다. 한홍구는 적어도 1970년대 초반까지 장교 집단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109)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44년 4월 일본육사까지 졸업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이름을 다카기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다카키 마사오는 창씨개명에 의한 이름으로 조선이름 박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사람은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과 진짜 일본이름을 금방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짜 일본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를 씀으로써 '조선민족의 흔적 지우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1936년에 일어났던 일본의 2·26 쿠데타 사건에 심취했다. 그 쿠데타 주동자들을 '정신적 선배'로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훗날 초급 영관장교 시절부터 가까운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2·26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게 한국에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발언을 하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해방 덕분에 "1944년 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한 박정희가 긴 칼 차는 기쁨을 누린 건 1년여에 지나지 않았다."(124)


"한홍구는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라는 글에서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 번의 결정적 변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 광복군에 가담한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입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 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 곡절이 많다지만 박정희만큼 변신을 자주 한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급히 변하다 보니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시류에 휩싸여 변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옛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변심은 횟수도 그렇지만 남다른 데가 있었다. 앞의 세 번의 변신은 불행한 기회주의자의 막차를 탄 변신이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의 변신은 계속되지만, 매번 변신의 동력은 '야심'이었다." "자신의 야심을 받쳐줄 배경이 없던 그가 택한 방식은 '목숨을 걸고' 크게 먹는 '올인' 방식이었다."(136)


2장 '역사의 지체'에 대한 분노 / 1961년 1


"장면 정부가 안정된 내각을 갖고 국정운영을 해 나간다 해도 돌파해야 할 난관은 만만치 않았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제난이 워낙 심각한데다 4·19 혁명으로 인해 새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과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내각마저 불안정한 정도를 넘어서 휘청대고 비틀거림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건 이미 60년 7·29 총선을 전후로 해서 나타난 민주당 신·구파의 이전투구 때문이었다. 장면은 자신의 파벌인 신파조차 전혀 장악하지 못한 채 어찌 보면 '얼굴 마담' 가까운 노릇만 하고 있었으니 그 이전투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윤보선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장면 정부 비판은 타당했을망정 그에겐 장면의 그런 한계까지 껴안으면서 국정운영의 안정을 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비공개로 협상과 타협을 모색해야 할 사안도 공개적인 발표로 대신함으로써 갈등을 더욱 악화시켰다."(191-2)


장면 정부 출범 초기부터 소장파가 줄기차게 요구한 "국방장관직을 (소장파 리더인) 이철승에게 주었더라면 적어도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왜 노장파는 한사코 소장파의 요구를 거절해 분란을 키웠던 건가? 장면과 민주당 노장파가 소장파의 요구를 외면한 이유는 소장파들이 정부나 당의 요직을 차지할 경우 그것은 중진들의 권력에 대한 직접적이고 심각한 도전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내부 헤게모니 투쟁에 몰두하다가 민주당 정권을 통째로 날린 것이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5·16 주체세력들도 정권 장악 후 군사적 위계질서라고 하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못지않은 내부 헤게모니 투쟁으로 몸살을 앓았다는 사실이다. 즉, 엘리트 집단의 내분은 정치 엘리트와 군 엘리트 모두 억눌리고 허기진 게 많은데다 '권력 잉여'가 너무 컸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어느 정도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199-200)


"16인 항명사건의 후유증까지 겹치는 바람에 61년 4월 초순, 박정희의 예편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예편 일자는 5월 하순경으로 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5·16 거사계획이 사전에 누설된 것을 무릅쓰고 마구잡이로 일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누구나 다 동의하지만 5·16 쿠데타는 사실상 드러내놓고 한 엉터리 쿠데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기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 지지자들은 '드러내놓고 한 쿠데타'를 박정희의 대담무쌍, 확고한 소신, 웅대한 비전 등으로 미화하지만, 그건 엄밀히 따지고 보면, '조폭논리'와 유사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무슨 일이건 '목숨을 걸고' 하면 목숨을 걸지 않은 사람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심하거나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치였다."(240-1)


"수십 년간 권력에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살아온 한국 민중에게 신문의 1차적 사명은 권력을 때리는 것이라는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었고, 신문들은 새롭게 얻은 무제한의 자유를 그런 민심에 영합하는 데에 바쳤다." "김정원은 신문 권력의 남용을 포함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장면 정권의 무력한 대응을 '자유 지상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혼란을 야기토록 한 사태 중이 하나는 사이비 언론의 방종이었다. ····· 시가지의 교통을 마비시키는 시위대가 '집회의 자유'를 구실로 하듯, 이들 사이비 언론들의 방종도 '언론의 자유'라는 기치 아래 보호되고 있었다. ····· 이승만 정권을 뒤이은 민주당의 무능은 4월 혁명의 성공으로 의기양양해진 지식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불안을 조성했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는 한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상투어가 되기에 이르렀다.〉"(247-8)


"그러나 5월 16일 거사마저도 행동개시 5시간 전에 정보가 누설되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제30사단장 이상국(준장)이 방첩대장 이철희(준장)에게 알려주고, 이철희는 요정 은성에서 회식 중이던 장도영에게 보고했다. 이게 밤 10시경이었다. 장도영은 서울지구 방첩부대에 임시 지휘본부를 설치하였다. 5월 16일 새벽 1시 45분, 해병대 1개 대대가 한강 다리를 향해 진격해온다는 보고를 받은 장도영은 육군본부 헌병대에 한강 다리 사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장도영은 중화기 무장에 반대하면서 카빈총만 가지고 가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한강다리를 막되 차가 한 대 정도 통과할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두라는 명령도 내렸다. 쿠데타를 막겠다는 뜻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한편 거사계획이 누설되면서 30, 33사단의 출동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박정희와 한웅진은 초조감을 견디지 못해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262-3)


"쿠데타가 발발하자 오전 11시 매그루더와 그린이 윤보선을 방문했다. 매그루더는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은 3천 600명밖에 안 된다. 충분히 무력진압할 수 있다. 대통령이 동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거듭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버텼다." "미 국무차관 체스터 보울즈는 국무장관 딘 러스크에게 보낸 17일자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은 (청와대 요담에서) '장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과 불만족은 확산되었고 부정은 광범위하고 정부의 상층부까지 오염시키고 있으며 한국은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도 장면은 그런 지도력을 제공하는 데 무능했다'고 지적했다. 윤보선은 국회 내외의 인물을 망라하는 거국 내각을 구성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276-8)


"18일 육사생도 800여 명은 졸업생 장교 200여 명과 함께 동대문-남대문-반도호텔-시청 앞 광장에 이르는 행진을 벌인 뒤 시청 앞 광장에서 '혁명 축하식'을 열었다."(295) "18일 낮 12시 30분, 55시간 동안 잠적해 있던 장면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중앙청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해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 장면 내각 총사퇴와 함께 국회의사당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와 혁명5인위원회(박정희, 윤태일, 송찬호, 채명신, 김동하)를 구성하였던 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은 장도영, 부의장은 박정희가 맡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3권을 장악한 기구로 각 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32명으로 구성되었다 육사생도의 지지 시위에 공을 세운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 요원으로, 이상훈은 경호실 요원으로 일하면서 '정치'를 배우게 되었다."(297-8)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이 나간 지 8시간 뒤인 16일 하오 5시, 미 합참의장 리먼 렘니처는 매그루더에게 〈앞으로는 더 이상의 논평은 삼가고 꼭 해야 할 경우는 유엔군의 목적이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것이란 사실만 강조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5월 19일 아침 장도영과 박정희가 쿠데타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용공 및 혁신을 빙자하는 친용공분자' 93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자, 바로 그날 미 국무성은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 조야의 일각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미 상원 외교위원장 풀브라이트는 5월 20일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신정부를 지지하고 승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군사정권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찬양하면서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300-1)


"박정희는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는 장성들을 경멸하기까지 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박정희는 더더욱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 공약'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겠다는 것과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고 내세운 것도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321) "쿠데타 주체 세력으로선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은데, (미 국무성의) '고무적'이라는 논평 정도론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정권은 22일에는 용공분자 2천 1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진보 인사 3천여 명이 투옥되었다. 검거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모두 4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진짜 '빨갱이'도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대량 검거의 동기가 말해주듯이, 그야말로 마구잡이 사냥이었다.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내야 했다.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했거나 2대 악법 반대운동을 했으면 무조건 검거 대상이었다."(323-4)


# 미국의 환심을 얻기 위한 '빨갱이 만들기'의 대표적 사례 :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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