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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4장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정전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한 상태였다.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 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미국은 이미 53년 2월 22일에 〈우선 부상 포로부터 교환하자〉는 제의를 한 바 있었는데, 이를 소련측이 수용키로 한 것이다.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중국의 주은래는 3월 30일 미국의 제안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일반 포로 교환 문제는) 주은래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즉각 송환하고,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일단 중립국인 인도 쪽에 넘쳐 처리하도록 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미국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6월 8일에는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20-1)
"이승만이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에게 은밀히 지시한 명령은 반공 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원용덕은 헌병들을 각 수용소로 나누어 파견했다. 이들은 미군 보초를 영창에 가두어 버리고 반공 포로 석방에 들어갔는데, 바로 6월 18일 새벽 5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포로교환 심사 과정에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린 것이다."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은 북한과 중국의 휴전회담 거부를 유도하여 휴전협정 체결을 지연 또는 파탄시키려는 계산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포로 석방이 휴전을 막을 순 없었다. 공산군측은 정말 휴전을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간 38선 근처에서 치열한 '땅따먹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전협정 체결이 다소 지연될 수는 있을 망정 움직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땅을 조금이라도 더 빼앗겠다는 싸움이었다."(34-7)
#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합의, 54년 11월 17일 정식 발효
"경제 제일주의와 더불어 일본 사회의 우경화도 한국전쟁의 영향이었다. 반공 전쟁을 틈타 전범들이 대거 사회에 복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 강화는 결국 55년 자유민주당 결성으로 나타났으며, 이 보수 우익 정당은 향후 끝이 없는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게 매우 관대한 평화조약 및 안보조약의 체결을 서두른 것도 한국전쟁의 산물이었다. 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 강화조약 및 태평양 안보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52년 4월 28일 공식적인 주권 독립국으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며, 56년 12월 18일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재일교포 문제 등에 대한 보상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성과와 더불어 영토 문제에서도 큰 이익을 안겨 주었다. 일본은 이 틈을 이용해, 독도까지 넘보았다."(54-5)
"반공은 곧 친미(親美)를 의미하고 친미(親美)는 곧 친기독교(親基督敎)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한국전쟁에선 더욱 그랬다." "기복(祈福)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돼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恨)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 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현실이 각박한 만큼 복을 구하는 신앙의 발현도 전투적이었다. 김흥수는 1951년 부산에서만 100여 개의 교회가 신축되었으며 그밖에도 교인들은 천막이나 창고 건물, 심지어는 언덕 풀밭 위에서 모이고 있었다고 말한다."(120-1)
"전쟁이 제공한 계급상승 혹은 사회이동의 기회 개방은 도덕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낳았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남한 사회의 자본주의 발전을 가져오는 이른바 '전쟁의 역설'로 나타났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혼자 하는 것보다는 잇속으로 결속된 파벌을 만들 때에 더욱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전쟁이 파벌 조직을 크게 키우는 동시에 악화시켰다며 이렇게 말한다. 〈파벌 사회에서는 주로 충성스런 부하를 돌보아주는 능력에 가치를 둔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파 사람들을 더 많이 돌볼 수 있다. ····· 파벌주의는 전쟁과 부패로 더욱 만연했다. 전쟁은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의 오류를 확대시켰으며 이를 호도하기 위한 파벌 보스의 보호막이 끊임없이 필요해 부패가 더욱 확산됐다. 죄상이 중하면 중할수록 일단 보호를 받게 되면 충성의 요구가 더 커졌다. 죄를 저지른 자는 파벌의 주요 모집 대상이다.〉"(129-30)
5장 자유당 독재체제의 구축 / 1954년
"이승만은 1954년 5월 20일로 예정된 제3대 총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52년 발췌개헌 때 2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싶었지만 당시 여건이나 분위기가 그것까진 못한 터라 그 일을 해내야만 할 3대 국회에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5·20 총선에선 최초로 정당이 각 선거구마다 1인의 후보를 공천하는 공천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승만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였다. 4월 6일 이승만은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자유당에선 개헌 지지는 공천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경찰은 마을 반장회의 등을 열어 야당은 반정부당으로 공산당보다 더 나쁘며, 공산당보다 더 나쁜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면 너희 마을은 공산당 소굴로 본다, 너희 마을 표가 120인데 야당 표가 한 표 나오면 너희 부락에 공산당이 하나 있고, 열이 나오면 열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식의 협박을 일삼았다."(188-9)
# 11월 27일 국회 본회의 표결 '사사오입' 통과
"5·20 총선의 최연소 당선자는 경남 거제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한 26세 청년 김영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대통령 꿈을 키워온 김영삼 학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웅변 연습이었다." "김영삼이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받은 2등상은 외무부장관상이었는데, 당시 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그 인연으로 김영삼은 서울대 3학년 재학 중이던 50년 4월 초순에 장택상의 요청을 받아 장택상의 지역구인 경북 칠곡에서 웅변으로 장택상 선거운동을 도와 주었다. 또 이게 인연이 돼 김영삼은 얼마 후 장택상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52년 5월 24일 이승만이 총리를 장면에서 장택상으로 바꿨을 때 장택상은 자신이 이끌고 있던 신라회 회원 21명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려놓은 바 있었다. 신라회는 영남 및 대한청년단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 신라회의 운영을 도맡다시피 한 사람이 바로 장택상의 비서인 김영삼이었다."(192-3)
# 김대중은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
"(원조 요청차 미국 방문길에 오른) 이승만은 7월 28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을 하였다." "(중국과의 즉시 결전을 요구하는 주장에서) 이승만이 역점을 두고자 했던 것은 〈미국의 보병은 단 1명도 필요치 아니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한국을 이용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이승만이 역설해온 것이었다. 이승만은 54년 5월 8일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한국이 인도차이나에 2개 사단을 파견할 뜻이 있다는 제안을 했었다는 걸 상기시키면서 그 제안은 제스처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방미는 '불행한 방문'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의 귀국 직후 미국은 이승만의 호전성에 불안감을 느껴 주한미군을 2개 사단만 남겨놓고 나머지 4개 사단을 수개월 내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8월 18일 야간에 국회를 소집하여 유엔군 일부 철수에 대한 반대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197-9)
6장 '우상 정치'와 '동원 정치' / 1955년
"수난의 역사를 겪은 한국 민중은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해 왔다. 이승만은 그런 요청에 부응했고 그런 토양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그건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승만에 대한 충성이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곡필(曲筆) 연구 전문가인 김삼웅은 자유당 시절 3월 26일은 '어용곡필배들의 잔칫날'이었다고 말한다. 그 날이 이승만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49년부터 시작된 '이승만 우상화'는 50년대 내내 조선조의 왕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을 치달았다. 이승만의 귀환일과 생일은 국경일처럼 경축되었다. 학교마다 이승만의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의 생일에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야 했다. 지폐엔 이승만의 초상화가 인쇄되고 이승만 동상까지 세워졌다. 55년 3월 26일 이승만의 80회 생일 기념식은 '80'이라는 십진법의 원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승만 우상화의 정점을 보여 주었다."(240)
# 〈이렇게 위대한 리 대통령을 영도자로 모신 우리 민족의 영광이야말로 그 어느 민족에 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오직 대통령의 영도에 따름으로써 행운의 열쇠를 간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리 대통령이 오래 생존해 계시면 그만큼 민족의 활로는 열리게 된다. 우리 민족만의 행복이 아니라 실로 전 자유세계의 광명이다〉 - 『서울신문』 칼럼 〈인심천심〉
"이승만은 수많은 관변단체들의 총재이기도 했다. 이 단체들은 모두 이승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걸 공식적으로 선서하였다. 이승만을 위한 것이라면 테러도 정당화되었다. 애국심은 초법적인 것이었다." "정당도 이승만 임금을 모시는 '내시 정당'이었다. 이기붕은 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때 자유당의 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자유당으로서는 '제도보다 인물'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승만 박사의 정치이념과 그분의 통일 방략을 절대 지지하는 인사들에 의하여 조직된 이 박사님을 지지하는 정치단체가 자유당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보다는 관료조직을 더 좋아했다. 그는 정권 경쟁을 해야 하는 정당체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경찰과 행정조직을, 그것도 측근을 통해 맹목적 충성을 유도하는 형태로 모든 걸 해결하고자 했다." "이승만의 인사 정책에서는 '충성' 하나면 족했다."(245-6)
"(인도에서 반둥회의가 개최된) 1955년경 제3세계의 화두는 '평화공존'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걸 '친공(親共)'으로 간주하고 배격하였다. 이승만은 이미 54년에 〈미국이 공존주의를 주장하게 될 지라도 우리로서는 자유독립의 권리를 위하여 싸워 죽기로 결심한 것이니 모든 친일친공 분자들은 극히 조심해서 외국인과 연락하여 시국을 혼란케 만든다는 것을 생각도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공존주의' 사상을 〈반정부 분자들의 파괴모략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니 이런 분자들을 먼저 제지하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신경질적인 반응과는 달리, 반둥회의에서 제기된 '반식민주의'와 '비동맹주의'는 당시 국내의 지식인과 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나세르는 52년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를 주도해 정권을 잡았는데, 훗날 한국에서 5·16쿠데타에 대한 초기의 호의적 반응은 나세르의 활약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것이 힘입은 바 컸다."(251-3)
"1955년은, 반일운동과 반공운동이 결합해 이승만식 '동원 정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해였다." "45년 9월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열도 주변에 선을 그어 일본 어선의 조업을 제한하였다. 이는 맥아더 라인으로 불렸다. 미국은 49년까지 맥아더 라인을 세 번에 걸쳐 확장해주었지만 일본 어선은 50년부터 맥아더 라인을 침입해 한국 근해에서 마구잡이 조업을 해왔다." "이승만은 (52년 4월로 예정된) 맥아더 라인 철폐에 대비하여 한국의 어업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구상하게 되었다. 51년 9월 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52년 1월 18일에 공포된 이 선언은 연안으로부터 평균 60마일을 한국의 해양 주권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이 선이 바로 '평화선'이다." "52년 9월 이승만이 해군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261-4)
"1955년 여름은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와 더불어 범 야권 통합신당 창당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9일에는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은 55년 10월 8일 유엔이 북괴군을 무장해제하고 북한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더니, 11월에는 일본이 이북 공산당과 합해서 남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더욱 놀라운 주장마저 하였다. 근거는 없었다. 이승만에게 중요한 건 이렇게 위기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국민을 시위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손호철은 이승만 정권의 반일주의에는 체제정당화와 대중동원을 위한 목적 이외에도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려는 당략적 목적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반대 세력이었던 민주당, 특히 민주당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친일 지주들이 실세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 이 정권의 반일주의는 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269-70)
"원내 15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한 범야권 통합의 첫 번째 움직임은 54년에서 55년에 이르는 시기에 민국당 중심의 '호헌동지회'가 결성되고, 55년 초에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당 창당에 있어서 가장 큰 쟁점은 조봉암 세력의 참여 문제였다." "민국당의 대주주였던 김성수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종용하였다. 보수파들이 김성수의 권유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노선을 지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자,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명확히 태도를 밝힐 것을 권고했다." "이에 조봉암은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신당운동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보수파들은 계속 색깔 공세를 취했다. 신도성을 비롯하여 김성수의 유언을 들은 사람들이 보수파 간부들의 모임에서 김성수의 뜻에 따르자고 역설하였지만 조병옥과 장면 등이 강력히 반대하였다."(297-9)
# 신당 참여가 배제된 조봉암 세력은 진보당 창당으로 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