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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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장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근본주의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자체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공갈 정책'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정도로 그의 '무력통일 공갈'은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허세를 부림으로써 국내외에서는 그의 실력과 의도에 관해 많은 오해를 하게 되었다.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이 북한에 비해 우월한 힘을 갖고 있거나 적어도 자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 박사에게 더욱 무기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 있어 열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무기만 주면 이 대통령과 그의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해 그에게 무기를 공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그의 공갈 정책의 결과는 이승만의 위협이 실현되어 한국군이 북진할 경우에 대비해서 김일성과 그의 북한 공산정권이 더욱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라는 점이다."(31-2)


박명림은 7월 1일 새벽의 대전 탈출은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되기 어려운 '도망'이었다고 말한다. "6월 25일 전쟁 시작 이후, 특히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한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 공백,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처음엔 대구로 혼자 도망하였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열차 내에서 머문 12시간 30분이었고, 두 번째는 훨씬 더 길어서 대전-부산 간 이동에 소요된 32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군대통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입만을 바라보던 각료들이 황망히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정부로서 아무런 정상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였다."(66-7)


"(민간인 대량학살을 일컫는) '뿌리뽑고 씨 말리기' 원칙은 열 명 가운데 하나를 잡기 위해선 열을 다 죽여도 좋다는 발상에 근거한 것이었다."(89-90) "6·25전쟁 중 저질러진 '뿌리뽑고 씨 말리기' 가운데 그 정신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한 학살극은 이른바 '나주 부대'의 학살 사건일 것이다." "나주 부대란 인민군이 공격해오자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전남 강진·해남·완도·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나주 부대는 7월 하순께 전남 해남군 남창에서 완도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완도중학교 교사가 전화를 받자, 〈우리는 인민군이다. 완도로 간다〉고 밝혔다. 이에 완도에서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시가지 환영대회까지 준비했다. 나주 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그 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그 자리에서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92)


"학살은 악순환의 게임이었다. 네가 죽였으니 나도 죽여야겠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복수의 질과 양이 똑같이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으니 증폭은 필연적이었다." "경기도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도 바로 그런 악순환 때문에 빚어진 참사였다. 그 지역에서 좌익세력이 우익단체 단원 50여 명을 처형했다. 9·28 수복 직후 국군과 치안대에 의해 보복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희생자가 1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피를 본 사람들이 더욱더 피에 굶주리게 되는 악순환 속에서 '범주의 폭력'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좌익세력이 비교적 왕성해 일단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히면 그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우익일지라도 자신의 마을이 '빨갱이 마을'로 소문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보복에는 '병균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이 논리는 학살의 현장에서 급조된 게 아니라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게임의 법칙'이었다."(132-4)


2장 '톱질전쟁'의 와중에서 / 1951년


"한반도 땅덩이가 좁은 탓이었겠지만, 6·25전쟁은 전형적인 '톱질전쟁'이었다. 톱질을 하듯이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었다. 전선이 왔다갔다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누구를 지지하는가? 이들에게는 이런 고문이 강요되었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게다가 톱질전쟁은 전선이 따로 없는 전 국토의 전선화를 초래하면서 빨치산 투쟁을 낳았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원한관계를 만들어 그 원한이 민간인들 상호간에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2월 24일 서울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빽'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얻어들은 게 있어 이미 12월 초부터 피난길에 나섰다." "지난 여름 서울 잔류로 수복 후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너나할 것 없이 피난길에 올라 중국군이 입성하기 하루 전인 1월 3일 서울은 '무인지경'이었다."(183-4)


"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돼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기막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징집된 사람들은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나섰는데, 아무것도 주질 않았으니 얼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잠잘 때는 2명당 가마니 1장이 전부였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아사·병사·낙오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들을 가리켜 나온 '죽음의 행렬' 또는 '해골의 행렬'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교육대에 수용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수용되지 못한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 신세가 돼 해골 모습을 해가면서 계속 죽어 나갔다."(200-2)


"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천454동을 불태웠던 11사단 예하 부대의 이른바 '견벽청야' 학살극은 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719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죽은 사람 가운데 14세 이하가 전체 사망자의 절반인 359명이었으며, 60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사망자의 10%, 그리고 나머지 40%의 사망자 중에서도 3분의 2는 부녀자들이었다." "'톱질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의 구조상 전선이 따로 없는 가운데 빨치산 출몰 지역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의 지배하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낮에는 국군에 협조하고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는 '이중 생활'을 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 토벌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협조하는 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212-3)


"리지웨이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7월 10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북한과 중국 공산군에게 최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겨 줌으로써〉 협상이 타결될 수 있도록 군사적으로 압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년 후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는 존 포스터 덜레스에 따르면 〈중국군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명백한 우위를 (모든 아시아 국가들 앞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의 협상에서 얻어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8개월 동안 미 공군은 적의 통신망과 보급로 타격을 이유로 철도, 차량, 도로, 교량 파괴는 물론 마차나 손수레, 창고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주택과 방공호에 네이팜탄과 소이탄, 세열탄 등을 퍼부었다." "미국은 51년 8월 내부적으로 미군이 군사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경우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10월에 '허드슨 하버'라는 암호명 아래 몇 차례 원자탄 투하 연습까지 실시하였다."(243-4)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그 시기에 미군은 북한을 폭격하기에 바빴고, 남한 산악 지대를 파고든 북한군 잔류 세력은 빨치산 투쟁을 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빨치산 세력이 가장 왕성한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뒤바뀌곤 하였다. 빨치산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휴전회담의 한국측 대표였던 백선엽은 51년 11월 16일 토벌군사령관으로 차출되었다. 최전선의 2개 사단도 토벌군으로 차출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8군사령관 벤플리트에게 간곡히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군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60여 명의 미군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선전전도 미군이 주도했다. 미군은 남원에 방송 시설을 갖추고 투항 권유 방송을 송출했으며, 투항 권유 전단을 동경에서 인쇄해 공수해 왔다. 전단은 〈그 넓은 지리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대량으로 공중 살포했다〉 살포된 전단은 모두 992만 장이었다."(248-9)


3장 '군사 전쟁'과 '정치 전쟁' / 1952년


"1952년 들어서도 휴전회담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흥미로운 건 북한의 지도부에서는 이런 논란이 있었던 반면 남한에선 오직 한 목소리뿐이었으며 휴전을 찬성했다간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52년 3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는 진단을 내리면서 〈민족국가로 생존을 위하여 단독으로라도 계속하여 싸워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런 주장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휴전 불가'를 협상 카드로 이용하였다. 트루먼은 3월 4일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정부가 계속 유엔군사령부와 협력하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3월 21일 답신에서 그런 약속에 대한 대가로 한미간의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 병력의 증강을 요구하였다. 52년 4월에는 '통일없는 휴전 반대 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렸으며, 이런 종류의 데모는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그 날까지 계속될 이승만의 협상 카드가 되었다."(277-9)


"1952년 내내 남한은 '군사 전쟁'과 동시에 '정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51년 11월 30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공고 기간을 마치고 52년 1월 28일 표결에 들어갔는데, 재석의원 163명 가운데 가결이 19표, 부결이 143표, 기권이 1표 나왔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국민의 투표로써 소환한다〉는 협박 성명을 냈다. 그 성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원외 자유당'은 18개 사회단체들을 규합해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원들을 소환하라〉는 소위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했다. 52년 1월 말부터 부산에는 백골단, 땃벌떼, 민족자결단 등 각종 단체들 명의로 된 〈살인 국회를 해산하라〉는 구호 및 각종 전단이 넘쳐 흐르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국회는 52년 4월 17일 개헌선을 한 명 초과하는 123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280-2)


"6월 21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내각제 추진 의원들은 국회 출석을 거부하고 잠적하였다. 정족수 미달로 개헌안 심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7월 1일부터 국회 임시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의원들의 강제 연행이 시작되었다. 개헌안의 의결 정족수는 123명이었는데 도무지 의원들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붙잡혀 온 의원들은 임시의사당에 연금되어 정족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일을 위해 국제공산당 혐의로 체포된 10명의 의원들까지 석방 및 동원당했다. 7월 4일 185명 가운데 166명이 출석하여 정족수에 이르렀다. 그 날 밤 9시 30분 경찰과 관제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완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 안건에 대한 표결에 들어갔다. 표결 방법은 기립 표결이었다. 개헌은 출석의원 166명 가운데 163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3명은 기권이었으며, 반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289-91)


# 8월 16일 이승만 2대 대통령 취임(부통령 함태영)


"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에서 포로의 '자동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북한과 미군은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측은 포로들의 의사를 먼저 묻고 원하는 대로 보내주자는 '자유송환'(또는 자원송환)을 주장했고, 북한측은 포로들을 의무적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자동송환'을 주장했다." "한홍구는 미국이 자원송환을 고집한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나마 결정적 승리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박명림도 미군측이 자유송환 원칙을 고수한 본질적인 이유는 공산 포로들이 모국 송환을 거부할 때 또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반사적 이익, 즉 체제간 대결에서의 심리적·도덕적·선전적 승리를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52년 5월 휴전회담은 딱 하나만 빼고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했는데, 바로 그 마지막 하나가 포로교환 문제였다."(304-5)


"미국은 52년 11월로 예정된 미 대통령 선거 전에 협상에서 개가를 올리기 위해 북한을 압박하는 강경 대응책을 썼다. 그건 바로 대대적인 북한 폭격이었다. 6월 23일 미군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해 압록강에 위치한 수풍댐과 10개의 수력발전소를 폭파하였다." "북한 지도부의 조기 정전 희망은 수풍발전소가 폭격당한 이후 더욱 강렬해졌다. 8월 20일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중국 외상 주은래는 〈수풍발전소가 폭격당한 이후 북한 주민들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북한 지도부까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며 〈이에 부담을 느낀 북한 동지들이 정전협상에 집착하게 됐다〉고 밝혔다. 미군의 폭격은 7~8월 '압력펌프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강화되어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78개 도시와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10월로 접어들자 폭격 목표물로 삼을 만한 도시와 산업시설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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