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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평점 :
7장 대통령 직선제를 향하여 / 1986년
"직선제 개헌투쟁을 위해 뭉친 신민당과 재야단체 간의 합의가 깨진 것을 두고 임혁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화연합은 대중동원을 통한 협상테이블을 여는 데 성공했으나 협상의 정치가 열리자마자 각기 다른 민주화 전략의 차이로 연합은 해체되었다. 이러한 민주화연합의 분열은 5·3 인천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5월 3일의 직선제 개헌추진을 위한 인천대회는 4월 30일의 타협이 이뤄지기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타협이 이루어지자 신민당은 대회의 규모를 축소하고 대회를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낸 성공을 자축하는 축제로 이끌어가려고 한 데 반해, 사회운동 세력은 신민당과 정권간의 보수대연합 움직임에 쐐기를 박기 위한 선제공격의 기회로 이용하려 하였다. 사회운동 세력은 직선제 개헌투쟁이라는 신민당 주도의 민주화를 거부하고 현정권 타도와 민중의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민중민주헌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최대강령주의 전략을 고수했다.〉"(28)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의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는 바로 그런 배경을 깔고 있었다. 신민당의 집회를 1시간 앞두고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신민당이 개헌 현판식을 하기 위해 시민회관에서부터 신민당 인천시지부까지 행진할 계획이었는데, 그러한 폭력 사태로 인해 신민당 총재 이민우, 상임고문 김영삼 등은 최루탄에 범벅이 되어 시민회관 밖으로 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국의 조직적 유도와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가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인천사태는 급진좌경 세력에 의한 '민중봉기'로 비춰지게 되었다.〉" "공안당국은 5·3 인천시위를 좌경용공 세력의 반정부 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물론 재야 세력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은 제도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진영의 제휴를 깨뜨리고자 하는 의도였다."(28-31)
"1986년 6월 4일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학생 권인숙은 위장 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5·3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들의 소재를 집중 추궁하던 담당 형사 문귀동으로부터 6월 6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했다." "7월 16일 검찰은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언론에겐 보도지침을 통해 '부천서 성폭행 사건'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부천서 사건'이라고 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의 부도덕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와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른 왜곡된 보도만을 내놓았다."(37-9)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와 포섭으로도 모자라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매일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사실상 언론의 제작까지 전담하고자 하는 기이한 작태를 연출하였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은 실제로는 청와대 정무비서실 지휘하에 있었다." "정대수는 이 보도지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제도언론(신문)은 취재한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구애됨이 없이 '절대 불가'면 기사를 주저없이 빼고, '불가'면 조금 미련을 갖다가 버리며, '가'면 안심하고 서둘러 실었다. 이같은 빈틈없는 지시와 충실한 이행과정 속에서 당시 상황은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작은 것이 큰 것으로,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뒤바뀌는 어이없는 대중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실로 미개 사회의 암흑을 방불케 했다.〉"(47-8)
"1986년 10월 28일 오후 1시부터 건국대 민주광장에선 전국의 29개 대학 학생 2천여 명이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열었다. 3시 20분쯤 학생들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학교 주변에 포위하고 있던 1천5백여 명의 경찰들이 불시에 최루탄을 난사하며 밀려들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으나 힘에 밀려 건물 안으로 피신하였고, 경찰은 건물을 에워싸고 물샐틈없는 경비를 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건물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학교측은 학생들이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면 자진 해산하겠다'는 입장이라며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전두환 정권은 이 요구를 묵살하고 언론을 동원해 학생들을 '친북 공산혁명분자'로 매도하였다. 학생들이 단수와 단전 그리고 초겨울의 한파를 버텨내며 농성에 돌입한 지 나흘째 되던 31일, ‘황소 31 입체작전’이라 명명한 대규모 진압작전이 펼쳐졌다."(90)
# 단일 사건으로 1290명 구속이라는 세계 기록 달성
11월 5일 돌연 발표된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11월 7일에 비상조치와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해 대선에서 이 불출마 선언은 대통령 후보 김대중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다. 그의 정적(政敵)들이 김대중을 '거짓말 잘하는 정치인'으로 매도하는 데 이 선언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김영삼은 그런 추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김영삼도 85년 3월 7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83년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했으며, 그 이후로도〈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되풀이했다. 또 김영삼은 서독에서의 발언에서도 〈'당신이 나이도 위이고 하니 사면복권이 되면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얘기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후 계속 불출마 발언 번복의 장본인으로 김대중만 지목되었다."(106-8)
8장 6월항쟁과 대통령 선거 / 1987년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진 후 3월 13일 하원에 전달된 정책교서에서 레이건은 '미국 정부는 친소좌익 정권의 독재자는 물론 반공친미 독재자에게도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요컨대, '독재정권'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 전술을 적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한국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점차 가열되어 동북아의 보수적인 지배구조가 흔들릴 조짐을 보이자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레이건 집권2기의 제3세계 정책인 친미(親美)의 범위 내에서 '민주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신개입주의의 한국적 적용이었다. 그리하여 슐츠, 시거, 솔라즈 등 국무부의 고위관리들이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전두환 정권에게 '보수대연합'을 종용하였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도 바로 그런 '보수대연합'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이는 '국민적 민주열망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138-9)
"6·10 항쟁에서도 4·19 혁명 때처럼 한 장의 사진이 큰 기여를 하였다.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탄(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에 의해 촬영되었다."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출정식을 갖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도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6시경에는 학생과 야당의원들이 노상 규탄대회를 열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고, 가두시위를 벌이다 경찰에게 쫓기던 학생 1천여 명이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명동성당은 6월항쟁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이 날의 시위는 전국 514곳에서 연인원 5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되었는데, 경찰은 이 날의 국민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에 나섰지만, 국민들의 성난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157-9)
"범국민적인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 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폭탄선언'을 하였다. 전두환에게 건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김대중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당시 노태우는 광주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그건 아주 잘 꾸며진 한 편의 '쇼'였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만든 각본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전두환이 직선제 수용을 결정한 뒤 노태우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조치를 취해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171-2)
"12월 16일 대선을 2주일여 앞둔 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5분경, 대한항공 소속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에서 공중 폭발해 추락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 비행기는 전날 밤 11시 27분(현지시각)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를 기착한 뒤 방콕을 향하던 중이었다. 29일 오후 2시 1분경 이 비행기는 미얀마의 뱅골만 상공인 어디스에서 방콕공항으로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 비행 중 이상은 없다〉는 무선보고를 하였으나, 그로부터 4분 후에 그런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12월 1일 바레인에 머물던 용의자들은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가 위조여권이 적발되어 붙잡혔다. 이 순간 이들은 담배 필터 속에 숨겨둔 독약 앰플을 깨물었다. 이로 인해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만, 여자는 바레인 여자 경찰관의 날렵한 동작으로 인해 미처 치사량을 삼키기도 전에 담배를 빼앗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04-5)
"하치마 마유미라는 가명으로 KAL 858편에 탑승, 폭발물을 설치했던 김현희에 따르면 김정일은 1987년 10월 7일 이들에게 〈88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친필 공작 지령을 내렸다. 그 후 두 사람은 11월 10일에 〈11월 28일 23시 30분 바그다드발 서울행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하라〉는 최종 지령을 받았다. 이들은 라디오에 시한폭탄과 액체 폭약을 몰래 숨겨 탑승해 9시간 뒤에 폭발하도록 장치한 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소련에 이어 중국까지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느낀 북한의 내부 국면 전환용으로 기도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또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하필이면 김현희가 서울로 이송된 날이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이었다."(207)
"1987년 7월 17일엔 김대중의 계보조직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함으로써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김대중은 8월 8일 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하였다. 양김은 8월 11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209-10) "10월 27일 거행된 국민투표에서 신헌법은 93.1%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다음날 김영삼은 〈당총재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김대중에게) 경선을 제의했으나 이를 거부한 것은 국민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며 자신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김대중은 10월 30일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과 함께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11월 12일 평화민주당(평민당)의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민주당은 11월 9일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 임시전당대회에선 전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영입돼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214)
# 13대 대통령 선거 득표율 :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
"87년 대선은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건 5공 정권의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라 부추겨진 것이었다." "후일, 『조선일보』 기자 방준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때 돌멩이를 투척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 당시 이 공작을 주도한 사람은 H처장(준장)이었다. 그는 보안사 내에서 '흑색 선전의 귀재'로 불리는 사람으로 80년 광주사태 때 전두환 사령관의 특명을 받고 전남도청에 있던 폭약의 뇌관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H씨는 87년 대선 때 보안사 본부에서 김모 소령을 광주에 직접 내려보내 '돌멩이 투척 사건'을 지휘하도록 했다. 한 보안사 장교는 '이상하리만큼 YS를 집중 공략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텔레비전이었다. 그런 폭력 사태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의 안방에 전달되었을 때 유권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233-5)
"두말할 필요 없이 87년 대선에선 텔레비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노태우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비호남인으로 늦게 결정한 사람들이 많았고, 텔레비전을 정보원으로 비교적 더 많이 활용하였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은 노태우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KBS와 MBC가 오직 노태우의 이미지 메이킹만을 위해 기능했다면 문제는 덜했겠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투표가 임박한 시기에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와 함께 캄보디아·월남의 공산화와 필리핀의 사회 혼란을 다룬 프로를 집중 방영하였으며, 『TV 특강-민중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프로그램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방영하였다. 아니 그런 이데올로기 공세를 하는 데에만 머물렀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이 (호남인을 과격·체제 전복세력으로 반복 선전하여 타지역에) 반(反)호남 정서를 유포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었다."(238-40)
9장 서울올림픽의 빛과 그림자 / 1988년
"전두환 정권하에서 전 정권의 정당화와 예찬에 가장 앞장섰으며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도 크게 기여한 『조선일보』가 80년대에 가장 큰 성장을 했다는 건, 권언유착이 신문의 성장과 직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980년 매출액에 있어서 『조선일보』는 161억 원으로 『동아일보』(265억 원)와 『한국일보』(217억 원)에 비해 한참 뒤처지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5공을 거치고 난 88년에 이르러 『조선일보』의 매출액은 914억 원으로 『동아일보』(885억 원)와 『한국일보』(713억 원)를 압도하게 되었다. 권언유착을 신문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재미를 본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권력 창출에 앞장서는 '정치 신문'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 "후일 90년대까지 『조선일보』는 자사 기자 출신으로 14명의 장관을 배출할 정도로 정언(政言) 분리를 하지 않는 강한 당파성을 가진 신문이었으며, 이 나라를 정쟁(政爭)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261-3)
"7월 7일 노태우는 6공화국의 주요 외교 이념이라 할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선언'의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하고, 이를 대전제로 '북방외교'를 추진함으로써 '북한과 한국의 우방들 간의 관계 개선을 적극 도우며, 동시에 한국도 중·소 등 공산국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 가겠다'는 것이었다. 7·7 선언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88년 상반기 학생들과 재야 단체의 올림픽 공동개최 투쟁으로 인해 통일 열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노태우 정부는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즉, 7·7 선언으로 대표되는 북방외교로 공산주의 국가들의 올림픽 참여에 방해가 되는 정치적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계산이었다."(281-2)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의 후속 조치로 대북 비난 방송의 전면 중지, 통일 논의의 제한적 허용, 북한 관계 자료의 부분적 공개, 북한 외교관과의 적극적 접촉 허용, 북한과의 교역에 대비한 대북 경제조치 등을 발표하였다. 노태우는 더 나아가 8·15 경축사와 10월 18일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 행한 유엔 연설을 통해 '남북불가침선언'을 비롯하여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군축, 남·북한 간의 교류와 협력의 증진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북아 6개국 평화협의회의 구성'과 '비무장지대 내 평화촌 건설' 그리고 '남·북한 무력불사용 원칙' 등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노태우의 이런 모든 선언은 '쇼'였음이 곧 드러나게 된다. 이 일련의 선언들에 고무돼 다음해 방북을 한 인사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하면서 온 나라를 살벌한 공안정국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284)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차지한 〈올림픽은 우리 국민의 위대한 저력을 보여줘 자존심, 자부심, 미래의 가능성을 심어주고 성숙시켜 주었다. 올림픽 이후 고양될 국민의 자부심, 사회의 다양성, 민주화의 자신감은 소수 군인의 쿠데타와 극렬 좌경세력의 민중혁명을 있을 수 없게 할 것이다.〉 88년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일을 맞아 김영삼이 한 발언이다. 여론은 김영삼의 견해를 뒷받침해주었다. 올림픽 폐막 직후인 10월 4일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서울올림픽에 대한 여론조사'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한국인의 95.4%가 올림픽을 잘 치렀다고 응답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한국의 이미지 개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걸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불안한 분단국'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털어냈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비수교국이었던 32개국이 참석해 외교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308-9)
"88년 11월 23일 전두환 부부의 백담사 '유배'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5공 청산' 신호탄이었지만, 어찌됐건 공식적으론 전두환 정권이 청산의 대상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의미에서 민주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물론 언론도 어설픈 하이에나가 되어 그 분위기에 엉거주춤 편승하였다. 전두환의 백담사행을 전후로 하여 언론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국회 문공위(위원장 정대철·평민당) 주관으로 11월 21, 22일, 그리고 12월 12, 13, 31일 등 5일 간에 걸쳐 열린 청문회는 신군부에 의한 80년 언론학살과 5공의 언론탄압 및 통제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일정 성과를 거두었지만 언론사주들의 '오리발 작전'으로 모든 걸 속속들이 파헤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청문회가 5공 비리를 속시원하게 밝히기에 역부족이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비리를 밝혀내야 할 청문회 의원들이 (재벌들에게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또다른 비리와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3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