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4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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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중산층 신화와 공안정국의 결탁 / 1989년


"1989년 2월, 정부는 대학생의 비영리 과외를 전면 허용하고 중고교 재학생들의 방학 중 학원수강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35)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은 (명문대와 비명문대) 학생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과외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입시 학원들은 80년대 내내 누려보지 못한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과외 허용 조치 이후로 (속셈학원 같은) 새로운 형태의 준입시 학원들도 생겨났다. 원칙적으로는 입시 학원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입시 학원의 기능을 발휘하는 학원이었다."(37-9) "중산층은 '계급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어떤 비리와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감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대학생 과외에서조차 벌어지는 명문대생과 비명문대생의 현격한 수입 격차는 평생 영향을 미칠 계급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41)


"4월 13일에 실시된 동해 보궐선거에서의 후보 매수 사건은 김영삼과 민주당의 발목을 잡는 대형 악재로 떠올랐다. 이는 민주당측이 공화당 후보 이홍섭을 1억 5천만 원에 매수한 사건이었는데, 민주당 사무총장 서석재가 5월 30일 구속되고 김영삼의 사전 공모설이 유포되면서 김영삼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용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총재는 정부측에 코가 꿰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 총재는 민정당이 중간평가를 유보한 이후 기세 좋게 나갔으나 후보 매수 사건이 터지면서 형세가 역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의 정치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잖아도 제2야당 총재로 김대중에게 눌려지내는 치욕을 감수하기 어려웠던 김영삼은 이 사건으로 6공 정권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잡히자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결행하게 된다."(59)


"노태우와 김영삼의 '밀월관계'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5월 31일에 열린 노태우·김영삼의 청와대 회담이었다. 김영삼은 이 회담에서 '초당적 북방외교'에 합의했다. 김영삼은 6월 중 소련과 미국을 방문했는데, 6월 6일 소련에서 청와대가 주선해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과의 회담에 응하고 이 회담에서 정부측 입장을 지지해줌으로써 3당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을 밟아갔다." "김영삼은 잇따라 터진 임수경, 서경원 사건에 대해서도 노태우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89년 8월 18일에 실시된 영등포 을구 재선거는 김영삼의 3당 통합 결심을 확실하게 굳혀주는 또다른 사건이 되었다. 공안정국으로 인해 김대중과 평민당이 위기에 처해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 이원범의 득표율은 2등으로 낙선한 평민당 후보의 득표율 30%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18.8%로 나타났기 때문이다."(61)


"1988년 12월 5일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한 정원식은, 취임 직후부터 사학분규를 비롯해 학원문제에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정원식은 학원안정 4단계 방안을 마련했는데, 89년 4월 11일 서울 동부와 남부지역 18개 대학 보직교수와 학부모 간담회에서 직접 〈학생들의 점거 농성 사태가 장기화되면 계고-임시휴업-전원유급-폐교의 단계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한 뒤, 경기대와 한림대 등에 계고 조치를 취했고, 고려대와 서울교대에는 임시휴업을 지시하기도 했다. 5·3 동의대 사건에 대한 강경 진압은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89년 5월 3일 새벽, 부산 동의대에서 학생들이 점거농성 중이던 도서관에 불이 나 진압하려 들어갔던 경찰관 7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알려진 5·3 동의대 사건은 학생운동 역사상 단일 대학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구속자와 제적생, 그리고 최대 형량 등의 기록을 낳은 만큼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90-1)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학생 임수경은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1989년 6월 21일에 서울을 출발, 도쿄와 베를린을 경유하여 6월 30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6월 30일 전대협 의장 임종석과 축전준비위원장 전문환은 한양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대협의 공식대표로 임수경을 평양 청년학생축전에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파견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들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대표 파견이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불가피한 과정을 조국통일의 단심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며 아울러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불순한 마음도 없는 우리의 통일을 향한 평양행을 지지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그러나 경찰은 바로 그 날 평양축전 참가 출정식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무려 7천 5백여 명의 병력을 한양대로 진입시켜 학생 2천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118-9)


# 1990년 9월 26일 대법원은 임수경, 문규현에게 각각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함


"89년 하반기 들어 학생운동 진영은 NL(민족해방)·PD(민중민주주의)라는 두 계열로 결집 및 분화되었다." "임수경의 방북은 NL과 PD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부터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투쟁에 반대했던 PD 계열의 학생운동권은 평축 참가 투쟁이 ① 반파쇼 투쟁 도중에 깃발을 내린, 민중에 대한 반역 행위이며, ②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평축에 참가하자는 무원칙적 투쟁이자 개량주의적 통일운동이며, ③ 적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 어리석은 투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전대협은 NL 노선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민족분열주의라고 반박하였다. 89년 2학기 말의 총학생회장 선거에선 NL파가 퇴조하고 PD파와 비운동권 세력이 부상해 이후 학생운동은 NL, PD, 비운동권의 3각 구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적어도 87년 이후 학생운동 정파간 갈등은 매우 치열하고 격렬했다. 분명히 과잉이었다."(128-31)


"6공 정권은 1988년 8월 1일 〈집시법 위반자의 경우 실형 3년 이하는 징집〉하던 기존의 시행령을 〈실형 1년 또는 집행유예 2년 미만을 선고받은 자〉만을 징집하는 것으로 개정했다. 6공 정권은 시행령을 개정한 지 불과 7개월만인 89년 3월 25일 공안정국을 틈타 〈실형 2년 미만을 선고받은 자는 모두 징집〉하는 것으로 오히려 '개악'해 버렸다. 더욱이 개정된 시행령에는 살인, 강도, 강간범 등 일반 사범의 경우 〈군 사고예방과 군 지휘부담을 감안하여 입영 순위를 후위로 조정한다〉는 단서를 붙여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일반사범은 사실상 입영이 면제되게 되었는데 이는 형평의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시국사범에 대한 녹화사업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6공은 5공의 그 악명 높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걸 한 단계 발전시킨 이른바 '학원 프락치 공작'을 유감없이 구사하였다."(146-7)


# 학원 프락치 공작 유형(김동훈)

1. 정보기관에서 선발해 조직적인 교육을 받고 경찰상황실(이른바 'CP')를 통해 활동하는 경우 : 동아대 CP사건, 부울총협 사건

2. 안기부나 경찰에 붙잡힌 운동권 학생이 회유와 협박 끝에 프락치로 전락한 경우 : 국민대 김정환 사건

3. 입대한 운동권 학생이 보안사(기무사)의 회유와 협박으로 프락치가 되는 경우 : 윤석양 이병 사건

4. 정보를 넘겨주는 댓가로 돈이나 신분보장을 받는 유급프락치 유형 : 한성대 교직원 프락치 사건, 전남대 나윤성 의경 사건

5. 범죄를 저지른 재수생에게 범죄 무마를 조건으로 학원 내 정보원 활동을 시킨 경우 : 성균관대, 한양대 프락치 의혹 사건


"신문들의 치열한 경쟁이 말해주듯이, 노 정권 하에서의 언론 민주화는 왜곡된 시장 민주화였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노 정권에서 재벌들의 신문 소유가 크게 늘어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화약이 『경향신문』을, 롯데가 『국제신문』을, 대우가 『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으로 개제)를, 대농이 『내외경제신문』과 『코리아헤럴드』를, 갑을이 『영남신문』을 인수하였으며, 현대가 『문화일보』를 창간하였다. 또한 재벌들은 앞다투어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문화재단을 설립하였지만 대부분 변칙 상속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다. 재벌의 광고를 통한 언론 통제는 종합광고대행사의 계열화를 통해서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는데, 8대 대행사의 4대 매체 광고물량 처리액은 4대 매체 총 광고비의 40.8%에 달했다." "아울러 재벌들은 언론에 대한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정치 권력과의 통혼(通婚) 관계를 통해서도 한국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186-7)


"89년 12월 15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4당대표가 모여 영수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12월 31일에 전두환의 증언을 듣고 5공 특위를 마무리짓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노태우는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국회에 출석해 증언해 줄 것을 설득했다." "12월 31일, 자신의 은둔지인 백담사에서 새벽에 출발한 전두환은 오전 10시부터 국회에 출석하였다. 이 날 전두환이 증인으로 출석한 국회청문회는 14시간여나 진행되었으나, 전두환의 증언 시간은 모두 합해봐야 두 시간도 채 안되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흥분한 야당 의원들의 규탄과 이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맞대응으로 채워졌고 그래서 일곱 차례에 걸친 정회가 이루어졌다." "전두환이 퇴장한 뒤 노무현 의원은 증언대를 향해 명패를 집어던졌다. 그는 이 같은 '품위 잃은 행동'을 사과했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증언의 내용과 저의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비난받아야 하는지·····.〉"(193-4)


"이 당시의 중산층 의식은 상당 부분 소비 자본주의 체제의 진입으로 인한 변화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거품'이었다. 정권안보 차원에서 강력 추진된 '스포츠 과소비'는 제쳐놓더라도, 각종 가전제품과 백화점의 과시적 소비문화, 그리고 3대 붐(마이카, 증권투기, 부동산투기)에 대한 희망 욕구가 가세했다." "컬러 텔레비전은 이미 80년대 중반에 보유율 90%를 넘어섰고 냉장고와 세탁기의 보급도 대단히 빨랐다. 80년에 37.8%였던 냉장고 보급률은 90년에 93%를 넘어섰다. 백화점 건설 붐은 89년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재벌들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앞다투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높은 현금 수익 외에도 백화점 그 자체가 엄청난 부동산이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은 〈가장 적은 세금을 내면서 가장 값비싼 땅을 보유하고 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훌륭한 재산증식 수단〉이었다."(200-1)


"30대 재벌그룹의 경우 88년 말 현재 10조원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하였으며, 지가 상승에 비례해 이들 그룹에 막대한 자산 소득이 돌아갔다. 특히 삼성, 롯데 등 일부 재벌그룹들은 85년부터 88년까지 4년 사이에 총 보유 부동산의 70% 이상을 집중 매입하였다. 삼성은 이 기간 동안 기업투자 2천388억 원의 약 4배인 1조 원 상당의 부동산을 매입하여 총 보유 부동산의 74%를 차지했고, 롯데그룹은 기업투자 1천168억 원의 약 5배인 6천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사들여 88%를 차지했다. 그밖에도 기아, 금호, 두산 등이 각기 기업 투자액의 3~4배에 이르는 수천억 원을 부동산 매입에 사용하였다. 자기 돈으로 땅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다 은행에서 빌린 돈이었다." "박세길은 이렇게 말한다. 〈(권력이 미리 언질을 준) 개발이 진행된 이후 땅값이 엄청나게 뛰어오름으로써 막대한 투기 이익을 얻게 된 재벌은 당연히 그 답례로서 권력에게 상당한 자금을 바치는 게 기본 상식이다.〉"(218-9)


"1980년대는 광주학살과 더불어 극심한 호남 차별이 판을 친 시대였다. 5·6공 모두 대구·경북 중심의 이른바 TK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극심했던 정부 인사에서의 호남 차별은 5공을 거치고 6공 들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노태우는 대통령 취임 전 〈임기 중에 호남 출신 참모총장을 내겠다〉고 했던가 하면 취임 연설에서는 〈이제 지역감정은 새로운 출발의 광장에 묻자〉고 선언했지만, 호남 차별을 심화시키는 데에 골몰했다. 골몰까지 하지 않았다면, 공공성 의식이 없는 패거리주의라는 '시장 논리'에만 모든 걸 맡겨 두었다. 5공 시절 차관급 이상 관료 155명 중 43.6%인 67명이 경상도 출신(호남 출신은 9.6%)이었으며, 6공시 영남 출신은 전 각료의 48%, 차관급에서 60%에 이르렀다. 또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주요 실국장 등 요직은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이 차지했고, 특히 청와대와 검찰은 영남 출신이 거의 독점했다."(227-9)


맺는말 한국인의 '정치와의 전쟁'


"다수 한국인들은 광주학살과 호남 차별 문제를 '김대중'으로 의인화시키는 데에 공모했다. 호남인들 역시 그들의 한(恨)을 '김대중'으로 의인화하였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호남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실적 방안에 주력했던 반면, 비호남 다수 한국인들에게 다급한 건 자신들도 잘 깨닫지 못하는 일종의 면책 심리였다. 그들에게 한동안 '정치와의 전쟁'은 상당 부분 '김대중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비호남 다수 한국인들은 정권을 잡기 위한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을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의 음모와 공작 수준의 것으로 폄하하고 매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을 핑계 삼아 자신들의 군사독재 정권 지지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조갑제의 논리를 원용하자면,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보는 자신들의 눈을 '다소 맑게 해주었다'는 자기 기만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273-4)


"정의와 풍요는 결코 손에 손을 맞잡고 나아가지 않는다." "아울러 기득권은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건 아니다. 80년대의 불의와 모순에 순응하고 타협했던 사람들에게도 최소한 '정서적 기득권'이라는 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정서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맹목적인 당파성은 80년대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광주의 피로 얼룩진 80년대는 모든 걸 뒤틀어지게 만들어 버렸으며, 변화의 원동력이라 할 정치를 시궁창에 처넣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리가 80년대에 이룬 경제적 업적과 성과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걸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이면의 고통과 희생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국민화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전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80년대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의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제대로 깨닫는 일일 것이다."(2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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