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평점 :
2장 충성경쟁과 마법의 주문 '86·88' / 1981년
"5공은 정치권을 떡 주무르듯이 하기 위해 '관제야당' 설립을 꿈꾸었다. 그런 음모의 일환으로 1980년 11월 12일 국보위는 10대 국회의원 835명을 정치규제 대상자로 발표했다. 이들 가운데 569명이 재심을 청구했고 그 가운데 268명이 구제됐다. 정치인들이 재심을 청구해 규제대상에서 풀린다는 건 5공에 대한 협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군부의 이런 조치는 관제야당 창당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15일 자신을 총재로 한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였으며, 이로부터 2일 뒤 유치송을 총재로 한 민주한국당, 1월 23일에는 김종철을 총재로 '공화당 이념을 계승'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아니 정권이 야당을 창당하다니!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관제야당'이었기 때문에, 정가에서는 '1대대(민정당) 2중대(민한당) 3소대(국민당)'이라는 말이 떠돌았다."(17)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정권은 피로 얼룩진 정권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베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열린 '국풍 81'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가미카제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국풍'(國風)이었다. 그 정신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의 행렬이나 배의 노를 합심해 젓는 그림 등으로 모자이크된 포스터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어용화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이 행사는 행사장인 여의도를 통행금지까지 해제시켜가면서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으로 만들었다. 아니 '난장판'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48-9)
"서울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개최도시로 선정된 직후부터, 전두환정권에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였다. 아니 '전가의 보도'였다. '86· 88'은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보도한 『조선일보』 81년 10월 2일자가 주장했듯이, 올림픽은 '민족우수성 과시, 국제적 위치 입증, 세계 속의 한국부각'의 기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후일(86년) 『말』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86은 88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소위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86·88'은 현정권이 통치명분으로 내세운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 야릇한 관제 조어(造語)는 관제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선전되면서 대중세뇌의 핵으로 등장하여 대중을 그야말로 '입만 벙긋하면 86·88'을 읊조리는 백치와 같은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65)
"전두환 정권은 대학 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되었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 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가 조사한 다음, 곧바로 군대에 입영시켰다. 신체검사를 통하여 신체상의 결격사유 학생들마저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혔으면 입영시켰으며, 입대할 수 없는 가정환경을 가진 학생들도 입영시켰다. 이들 강제징집자들은 '순수학적변동자'라는 붉은 낙인이 신상카드에 찍혀서 군 수사기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돼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제대를 앞둔 강제징집자들에겐 '녹화사업'이라는 가공할 만한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심사를 통해 활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퇴계로의 진양상가 분실에서 교육을 시킨 뒤 대학가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70-2)
"녹화사업에 따라 강제징집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의식화의 정도를 측정받으며, 이후 체제를 긍정하도록 보름에서 두 달 간 이른바 '역의식화' 교육을 받게 되었다. 더욱 악랄한 것은 보안사가 이 작업 이후 그러한 교육성과의 검증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른바 '프락치' 임무를 맡기는 것이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녹화사업으로 인해 사망자가 잇달아 발생하자 84년 3월에 열린 제적생과 해직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것은 곧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정부는 여론에 밀려 84년 9월 '소요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하고 녹화사업을 전담했던 보안사 3처5과를 해체하고 사업을 공식 중단했다. 그러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6공정부에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72-3)
3장 밤의 자유와 프로야구에 취해 / 1982년
"1945년 9월 7일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국민들은 해방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해방감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자정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야간통금에 구애받지 않았던 경찰, 군인, 기자들의 특권이 사라졌다.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 제야(除夜)였다. 이 때만 되면 사람들은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통행금지 해제는 1년 365일의 '크리스마스화' 또는 '제야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으니, 통금이 해제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흥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83-5)
"통금해제가 가져다준 해방감은 민주화 쪽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통금이 해제된 후,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밤문화와 성적 욕망의 배설구들이었다."(87-8) "그랬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감은 꼭 정치적 해방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와 탄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런 해방감의 제공은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 폐지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전두환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 완화였다. ·····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90-1)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전한 여가선용을!〉 이런 슬로건을 내세운 프로야구가 82년 3월 23일 출범했다. 5공이 '스포츠공화국'임을 입증하겠다는 듯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다. 이미 3일 전인 3월 20일, 5공은 체육부를 신설하고 장관에 5공의 제2인자라 할 노태우, 차관에 이영호를 임명하였다.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전두환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경기로 첫발을 뗀 프로야구는 개막전부터 관중석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프로야구 출범이 전두환의 지엄한 명령이긴 했지만, 재원마련이 문제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우병규와 마산상고 동기이던 전 MBC 해설위원 이호헌은 우병규로부터 프로야구 출범안을 문의받고, 정부가 돈 한푼 들이지 않은 채 프로야구를 출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기업들이 야구단 운영을 맡는 방법이었다."(104-5)
4장 '땡전뉴스'가 대변한 '전두환 공화국' / 1983년
"2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 등 모두 269명(미국인 51명, 일본인 28명 포함)을 태우고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대한항공(KAL) 정기여객기 007편은 중간 귀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을 8월 31일 밤 9시 58분에 이륙한 직후부터 조금씩 우측(북쪽)으로 항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KAL 007기는 소련영공을 침범해 세 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놀랍게도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겐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레이건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강조한 바 있는 국가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KAL기 격추 이전 MX미사일과 빅아이(BIGEYE)라고 하는 독가스 무기의 생산에 대한 미 의회의 견해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KAL기 격추사건은 미 의회의 반대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핵무기 감축마저도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152-5)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엉뚱하게도 5공치하에서 방송이 얼마나 권력의 주구로 유린됐는지를 웅변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국민 수백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인데도 그게 톱뉴스가 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공치하에서 신문과 방송은 5공정권 홍보와 미화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 일에 신문에게 선두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방송사들의 맹활약은 이른바 '땡전 뉴스'(또는 '뚜뚜전 뉴스')로 나타났다." "〈유린된 방송을 상징하는 사건 중의 하나를 살펴보면, 방송들은 83년 KAL기 실종 뉴스와 대통령 동정 중 어느 것을 톱뉴스로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한 방송사에서는 뚜뚜··· 하는 신호음에 뒤이어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 하고 뉴스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 TV 화면에 전씨가 서울 어느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를 하는 모습이 비쳤다. 뉴스시간에 뉴스는 뒤로 밀리고 권력이 판을 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156-7)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애초에 17박 18일로 계획되었던 전두환의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길에는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등 3개국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판에 미얀마가 추가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미얀마 방문은 외무부가 아닌 다른 정부기관의 지시에 의해 추가되고 준비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미얀마는 여러모로 남한의 대통령이 방문할 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남북한 동시수교를 하고 있었지만, 남한과는 별다른 거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쪽에 편향된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얀마 순방계획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5공의 핵심부가 미얀마의 통치체제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고 증언했다. 그 통치체제란 바로 『정권교체준비연구』에 나타난 섭정식 영구집권체제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 바로 미얀마체제였던 것이다."(163)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른바 유화(宥和)정책이었다." "학원자율화 조치는 우선 당장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병력이 철수하는 가시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100명 가까운 해직교수와 1천3백여 명의 시국관련 제적생을 복직, 복학시켜줌으로써 사람들을 적지않이 헷갈리게 했다. 전두환 정권의 준비도 제법 치밀했다. 전정권의 지시를 받은 대학은 학생선도위원회와 홍보위원회를 설치하여 학생시위에 대처키로 했다." 그러나 모든 게 전정권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결성되고 "대학에 자율적인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광주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광주문제는 지하유인물 형식이나, 구전형식으로만 전해졌었다. 그러다가 84년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광주민주화운동 알리기에 나선 것이다."(171-3)
5장 저항의 불꽃은 타오르고 /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조건을 개선해보려고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대학출신의 노동자 및 민주노조 운동 경력이 있는 운동가들을 노동현장에서 쫓아낸다는 목적 아래 84년부터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각 단위사업장에 배포했다. 이 '블랙리스트'는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노동부, 국가정보기관이 힘을 합해 작성한 것으로서, 125개 사업장의 해고자 681명, 복직자 60명, 재취업자 57명에 대한 신상명세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조사, 정리한 것이었다 후일(87년 10월 27일)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와 인천지역 해고노동자협의회가 공개한 또다른 '블랙리스트'에는 78년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24명과 태창섬유, YH무역 등에서 해고된 노동자 1662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 '블랙리스트'로 인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취업할 수 없었으며, 사업장에서는 불법적인 해고가 자행되었다."(182)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83년 황지우, 김정환, 김사인 등이 꾸려가고 있던 동인지 『시와 경제』 2호에 〈시다의 꿈〉, 〈하늘〉, 〈그리움〉 등 총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박노해의 등장에 대해 최재봉은 이렇게 말한다.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면서 노동자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205-6)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온 지 한 달 후인 1984년 10월엔 이문열의 『영웅시대』가 나왔다. 박노해는 노동자들의 한을 토로했던 반면, 이문열은 '선진조국'과 '번영의 조국'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210)
6장 탄압과 고문의 광기 속에서 / 1985년
"양 김씨는 2·12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둔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열고 신민당(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선거 4일 전에는 미국에 사실상 망명중이던 김대중이 2년 만에 귀국하였다. 신민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국정감사권 부활'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언론기본법 폐지 및 노동관계법 개폐' 등의 선거공약을 확정하고 창당 25일 만에 총선에 뛰어들었다. 이 선거에 대해 임혁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월 12일의 총선은 사회운동세력들의 전략적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일단 선거유세가 시작되자마자 유세장은 정권에 의해서 금기되어왔던 언어가 분출하는 공간으로 화하였다. 집권자의 광주학살 관련, 영부인의 금융스캔들 관련 사실이 공개적으로 신당후보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기존의 충성스런 야당들은 '1중대, 2중대, 3중대'라는 언어로 비하되었다. 선거공간은 반대세력의 언술의 경계를 넓혀주었고, 2·12 총선을 개별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국민투표로 변모시켰다.〉"(223)
"2·12 총선은 11대 때의 78.4%를 훨씬 상회하는 84.2%의 높은 투표율을 보이면서 〈5·16 이후 최대 투표율〉이라는 기록을 남긴 가운데 신민당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신민당이 관제야당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함으로써 민한당 의원들은 대거 신민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선거 결과에 민정당만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게 아니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건 신군부 중심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민주화로 기울고 있었다. 2·12 총선 후 그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로 갈라져 있던 사회운동의 통합이 급진전되어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으며, 1985년 하반기부터 민통련과 신민당은 광범위한 국민 대중의 지지와 참여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투쟁에 임하게 되었다."(224-5)
"2·12 총선에서 분 신민당 바람엔 학생들의 적극적인 총선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학생들은 2·12 총선에 영향을 미친 동시에 역으로 2·12 총선결과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2·12 총선 후 대학가엔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선거열풍이 몰아쳤는데, 이에 대해 이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학생회 구성의 하이라이트는 후보자들의 합동유세였다. 후보들은 '강력한 민주투쟁'과 '학내문제의 우선해결'로 정견이 갈라졌으나 대체로 강력한 민주투쟁론자들이 당선되었다. 그것은 학원의 민주화투쟁이 격렬해지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학생세력 연합도 모색되었다. (···) 4월 17일 고려대에서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 결성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대통령의 방미성토대회를 갖고 '현정권에 보내는 경고장'을 채택하며 '매국방미 결사반대' '수입개방 결사반대' '경제종속 결사반대' '군부독재 퇴진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였다.〉"(231-2)
"전두환은 정치헌금을 뻔뻔하게 받는 걸로 유명했는데, 재계 순위 6위이던 국제그룹 해체 이후 재계에 공포 분위기가 감돌면서 정치헌금이 잘 걷혔다." "그렇게 돈을 뜯긴 재벌들은 노동자들로부터 그 몫을 짜내야 했고 노동자들이 저항하면 그 때엔 돈 받은 정권이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5공은 '조폭정권'이었던 것이다. 전두환의 공격적인 정치자금 수금은 사실상 자신의 평생집권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10월 아웅산사건 때 희생된 유족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추진된 일해재단이 전두환의 퇴임 후 위상과 관련된 연구소로 탈바꿈한 사실 자체가 그걸 잘 말해준다." "국제그룹 해체의 의미에 대해 김호진은 이렇게 분석한다. 〈자본가계급은 이러한 전(全)정권의 강압정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정부정책에 순응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은 곧 재벌이 전정권과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정경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246-8)
"1985년 5월부터 광주문제는 민주화세력의 본격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성명서를 낸 데 이어 5월 23일 12시 서울대 학생 함운경을 포함한 73명의 학생들은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을 72시간 동안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는 82년 3월 18일 문부식을 비롯한 부산 고신대생들에 의해 이뤄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에 뒤이은 것으로 광주학살을 외면하고 신군부를 지지한 미국에 대한 항거이자 응징이었다."(259) "이 점거사건은 당사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정권은 이 기회에 여론으로부터 학생운동을 격리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 사건을 언론을 통하여 크게 부각시켰지만, 오히려 이러한 언론의 대서특필은 국민들로 하여금 광주학살과 미국이 관련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역반응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학생들에게만 반향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미국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62)
"1984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1985년 4월 10일 '노동운동탄압 저지투쟁위원회'(노투)가 결성돼 지역단위 투쟁조직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서 지역적 연대와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6월 1일에는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연)이 결성되었다. 그러한 노동운동의 성과를 근거로 85년 6월 24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이른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구로동맹파업은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시도된 본격적인 동맹파업이었다. 이 동맹파업은 개별기업 단위의 노동조합주의, 조직보존주의를 뛰어넘는 연대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초보적이기는 하나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대중 스스로의 조직적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노동운동이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8월 25일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창립되면서 노동운동은 학생운동과 긴밀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283)
"1985년 10월 29일 5공정권은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흔히 '깃발사건'(혹은 민추위 사건)으로 불려져 왔는데, 이는 민추위가 내세운 '노학연대'로 인해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5공정권이 급조해낸 것이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에도 민청련이 배후 조종세력으로 몰려 김근태 등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서울대생 박종철은 이 사건의 마지막 수배자인 박종운을 하숙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비극을 겪게 된다."(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