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재조명
서중석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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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제가 만들려 한 국가, 한국인이 세우려 한 나라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관도 조선총독에 취임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변경했지만, 대만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 실제로는 육해군 현역 대장만 총독으로 부임했다. 조선총독은 종합행정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재무, 산업경제, 경찰, 문교, 사법, 교통, 통신, 전매 등의 각종 행정권을 총괄했던 바, 조선총독부 각 국부(局部)는 일본의 각 성(省)처럼 독립돼 있지 않았고 일원적으로 총독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조선총독은 또한 육해군사령관한테 출병을 청구할 수 있었고, 법률을 대신하는 제령(制令)을 발포(發布)할 수 있는 제령제정권(制令制定權)을 보유했으며, 직권 또는 위임에 의해 총독부령을 발하고 1년 이하의 자유형, 200원 이하의 범칙금을 부과할 수 있는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만큼 광범하고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호소카와 가코루는 이와 같이 총독한테 권력이 광범하게 집중된 것이 조선 정치의 근본이라고 조심스럽게 평했다."(37-8)


"일제의 지배정책 중 민족분열정책도 중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인도나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정치적·경제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는 백인 제국주의국가들처럼 분할통치정책을 쓰는 대신 계급분단정책을 썼다. 지주·자본가·유림·교육가·종교가를 비롯한 상층 인사를 회유하고 끌어들이는 한편, 소작인과 노동자들의 농민운동·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가혹한 억압정책을 쓴 것이다. 이러한 민족분열정책은 흥미롭게도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소위 문화정치를 펴면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민족분열정책은 문화정치와 표리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이토 총독은 친일세력과 민족개량주의세력을 육성·후원했다. 또한 자치운동과 참정권운동을 후원했고,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된 한국인의 문화운동을 지원했는데, 이것 또한 민족분열정책의 일환이었다."(40)


"일제는 한국이 일본제국에서 결단코 떨어져나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지만, 한국인은 강인한 민족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하여 소요나 쟁란이 발생할 수 있는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인은 언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동화정책과는 '모순'되게도 한국인을 사병으로 군대에 입영시키지 않았고, 1944년에 징병제가 실시되었을 때도 독자적인 한국인 부대는 없었다. 영국은 동아프리카에 1개 보병대대만 주둔시켰고, 대만에는 전간기에 보병 2개 연대와 포병부대 하나, 그리고 수개의 요새부대를 두었는데, 일본은 한국 곳곳에 헌병(1919년 이전)과 경찰을 배치하였고, 서울에 조선군사령부를 설치했으며, 나남과 서울 등지에 19, 20사단을 주둔시켰다." "그런데 한국의 '안정'을 위해 강력한 군대의 배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일제 또는 일본 천황한테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동화정책이었다."(48-9)


"일제는 동화정책을 강조했으면서도 한국인은 되도록이면 교육을 적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라우치 총독이 한국인 교육은 오로지 충량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목적 달성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학교 보급에 열의가 없었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사실 초등학교도 아주 적었다.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는 더욱 적어, 1918년 5월 현재 관공립 고등보통학교가 4개교, 여자고등보통학교가 2개교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이미 통감부가 설치된 해인 1906년에 관립 외국어학교인 육영공원 등을 폐지했고, 1911년에는 1895년에 세워진 한성사범학교를 폐지했다. 또 숭실학교의 대학과, 이화학당의 대학과도 인가를 취소했다. 사립학교인 경우 강점 초기에는 전문학교 인가도 소수로 제한했다." "대학은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설치되고 1926년에 본과가 설치되었을 뿐이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더 이상 대학이 존재하지 않았다."(54-5)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하다고 규정했고(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서신·주소 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享有)한다고 하였으며(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유(有)한다고 하였다(제5조). 제5조는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선거제 채택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제3조·제4조·제5조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일부 민주주의국가에서 실현된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일본제국 헌법이나 정치현실, 특히 한국에서의 정치현실과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보통선거제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는 1920년 이후 독립운동단체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였고, 해방 후 각 정당 사회단체에 의해 한층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82-3)


"국외에서의 건국준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일제가 패망할 경우 바로 입국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한국인 대다수가 거주하는 국내 상황이 더 중요했다. 이 점에서 건국동맹은 역사적 의의가 있다. 여운형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을 내왕하며 정세를 관찰하고 동지들을 규합했으며, 1942년 초부터 치안대 조직에 착수하고 식량 문제 등에 대비했다. 그해 말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석방된 여운형은 한층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아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건국동맹의 강령은 간략했다. 첫째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를 구축하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고, 둘째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체 독립을 저해하는 반동세력을 박멸하고, 셋째 민주주의적 건설과 노농대중 해방에 치중하겠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학생·교사·철도원·여성 등도 조직하였고, 징용·징병·학병 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115-6)


2장 해방 직후 여운형의 국가 건설 방향


"여운형은 인민당을 결성해 인민당 노선과 성격을 밝힘으로써 공산당과의 차이점을 명백히 하고 민족통일전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여운형이 밝힌 바대로 인민당은 노동자, 농민을 대변할 뿐 아니라 자본가와 지주까지 망라했다. 좌파 인사와 우파 인사가 함께 당을 차린 것이다. 또한 인민당은 민족통일전선 형성으로 민족 문제를 해결코자 했는데, 그 전선에는 전 근로대중은 물론이고 자본가나 지주도 포함되어야 했다." "그는 공산당과 관련해서는 공산당이 가려는 길이 공식적이고 소아병적일 때에 이것을 교정하고 거부하고, 공산당을 맹목적으로 배제하려는 완고파로 인하여 통일전선에 분열이 생길 때에는 이를 조정하고 거부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공산당의 급진좌경화를 견제하고 비판함과 동시에 민족통일전선에 공산당 참여를 배격하는 것을 반대하고 공산당을 옹호하겠다는 점에서 (여운형의 입장은) 조공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150-1)


"여운형·인민당은 김구 등의 반탁투쟁이 연합국의 유일한 합의인 삼상회의 결정 실행을 방해하고 파탄에 이르게 해 민족분열의 해악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신탁통치 반대 의사는 조공과의 행동통일 문제 때문에 신중히 표출했다. 1945년 12월 말~1946년 1월 초 반탁투쟁의 격랑에서, 12월 28일 여운형이 경솔히 말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을 제외한다면, 그와 이승만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여운형이 장고를 거듭한 것은 삼상회의 결정은 연합국의 유일한 합의이기 때문에 이 결정을 무시하고는 통일독립국가가 실현될 수 없는데, 그 결정에 들어 있는 신탁통치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와 함께 격렬한 반탁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우합작을 이루어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삼상회의 결정은 미소의 타협과 절충의 산물이어서 일방적으로 좌나 우에 기울어진 정권은 들어설 수 없기 때문에 좌우합작이 성공해야 독립국가가 수립될 수 있었다."(160)


"여운형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반대했고, 영국의 노동당 집권처럼 선거와 의회를 통해 진보세력이 집권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그는 한국인의 일반적 정치의식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고, 지도자건 대중이건 민주주의국가 생활 경험이 없는 점을 중시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여운형은 일부 반동분자를 제외하고는 노동자, 자본가, 민주당, 공산당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합작을 성사시키고자 했다. 좌우합작은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11월 23일에 중국에서 김구 등 임정요인들이 환국함으로써 활기를 띠는 듯했다. 그러나 중경 임정 추대 측과 인공 지지 측의 대립은 약화되지 않았고, 기대를 걸었던 김구 등의 임정 요인은 법통을 강하게 고수하여 좌우간의 협력은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으로 삼상회의 결정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반드시 임시정부 수립이 성사되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다."(164-6)


4장 이승만의 단정운동·반공국가와 여순사건


"해방 후 지도자들의 좌우대립을 지켜본 한국인들은 분단되면 남북 간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심해질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극좌극우가 각각 강대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1948년에 남북협상을 촉구하거나 지지하는 성명서 등 각종 글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 전쟁에 대한 심각한 우려이다." "통일에 대한 열망과 전쟁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에, 그에 역비례해서 이승만·한민당·친일파를 주축으로 한 단정운동에 대한 비판이나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등 단정운동세력이 경원시된 데에는 단정운동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점이 작용했다. 이승만의 단정운동은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불가피한 국내외정세로 어쩔 수 없이 분단정부를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의 입장은 우선 단독정부라도 세워놓고 그다음에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겠다는 태도와도 거리가 멀었다."(211-2)


"1946년 6월 3일 남한에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는 '정읍 발언'을 할 무렵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는 길밖에 없으며, 심지어 당장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단정운동은 미소 대결을 넘어 미소전쟁이라는 대단히 위험한 사고와 직결되어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이승만은 1946년 12월 도미하여 올리버 등과 함께 "한국은 내란의 위기 직전에 있다" "하지는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 한다"라고 선동하며 단정수립 여론을 조성했다. 1947년 3월 12일 냉전이 가시화된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자, 이승만은 '트루먼독트린'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었다고 찬양하고,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선전했다. 그는 3월 22일 뉴욕에서 "미국은 30일 내지 60일 이내에 남조선 독립정부 수립을 용허할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미 국무부는 그의 발언이 광신적이며 언어도단이라고 반박했다."(215)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정부 수뇌층이 발 빠르게 이승만의 정적을 모해하고 탄압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움직였다는 것은 이승만정권이나 극우반공체제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10월 21일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와 또 하나 대한민국에 반감을 가진 일부 극우 정객 분자가 결탁해서", "미리부터 계획했던 음모를 이번 기회에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일찌감치 발표했다." "10월 29일 기자가 "반란 사건 배후에 이 총리가 극우진영과 좌익 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사실인가?"라고 묻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을 줄로 믿는다"라고 답변을 회피했다. 이승만정권의 수뇌부들은 하나같이 연거푸 거짓말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국민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으며, 그들이 이 사건과 연관된 일정한 '계획' 또는 '음모'를 공동으로 세워놓았음을 시사한다."(228-30)


"김구는 이범석이 여순사건의 배후를 발표했던 10월 21일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유엔총회에서 통일 문제가 적극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승만으로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했지만, 그의 통일운동은 이승만의 단정운동을 도덕적인 면에서나 대의명분에서 비수처럼 날카롭게 찔렀다. 김구의 통일운동은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가 지방에 내려가면 일하던 농부들조차 일손을 멈추고 그를 따를 만큼 열광적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이승만 권력의 핵심이 그를 모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었다. 그런데 김구 암살 행동대원인 홍종만이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에 한독당에 입당한 것은 이미 그 무렵에 모해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시사한다. 안두희는 홍종만의 추천으로 김학규 조직부장을 소개받아 1949년 2월경 한독당에 입당했다. 결국 김구는 1949년 6월 안두희 소위한테 대낮에 살해당했다."(231)


5장 4월혁명 이후 새나라 건설 방향과 혁명입법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함에 따라 외무부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장면 부통령이 4월 23일 부통령직을 사임하여 부통령도 궐위 상태였기 때문에 외무부장관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과도정부의 수반이 된 것이다."(249) "허정과도정권이 이승만·자유당체제를 청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허정은 이승만이 가장 신뢰한 측근의 한 사람이었고, 과도정부의 관리나 경찰, 판검사는 거의 다 이승만정권하에서 복무했던 자들이었다. 허정은 부정축재자와 부정선거 원흉을 미온적으로 처리해 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재산을 빼돌릴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혁명정신을 냉각시켰다. 그는 부패한 군 고위 지휘관을 숙정하지 않았고, 경관은 자리바꿈만 했으며, 부정 공무원을 그대로 눌러앉혔다. 그렇지만 권력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고 3개월여 동안 관리내각을 지키고 별 무리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255-6)


"허정과도정권·장면정권 시기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물게 자유가 많았고 민주주의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실행되었다. 1950년대에는 사회 영역이 관권에 의해 지배받아 각종 사회단체 또는 이익단체는 자율성이 미약했고 관권 선거에 동원되었지만, 이승만정권 붕괴 이후 박정희의 쿠데타에 의해 저지될 때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율성이 확대되었다. 상급에서부터 하급에 걸쳐 자행되던 공권력 남용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만큼 공공성이 제고되고 법치주의가 영역을 넓힌 것이다. 4월혁명의 충격과 4월혁명이 열어놓은 공간에 의해, 그간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던 정신적·지적·사상적 영역이 활기를 찾고 확대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쿠데타세력조차 일방적으로 봉쇄하기 어려웠고, 해방 직후 우익과 좌익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했던 상황과도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장면정권은 보수반공적이고 냉전적 사고에 찌들어 있다는 점에서 이승만정권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294-5)


"민주당 내부의 통합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장면정권은 혁명입법 요구 같은 새로운 사태와 구세력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무기력했고, 장면에게는 난국을 헤쳐나갈 만한 리더십이 부족했다." "1950년대에 민주당은 불만에 찬 도시 유권자와 비판적인 언론 덕택으로 야당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가 극적으로 바뀌었던 4월 19, 25, 26일 시위 장소의 어디에서도 민주당 간부는 찾아볼 수 없었다. 4월혁명에 소극적이었던 민주당은 4월혁명세력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4월혁명 관련 단체와 여론은 이승만정권과 부정축재자를 단죄할 혁명입법을 요구했지만, 장면정권은 보수·반공·냉전 세력을 제거하는 혁명입법에 주저했다. 이 때문에도 장면정권은 집권 초기 몇 개월 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장면정권은 경찰을 비롯해 공무원, 검찰, 군을 대량으로 숙정해야 할 임무를 맡아 부분적으로는 수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보수적인 장면정권의 집행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295-6)


"통일관에서 이승만정권과 큰 차이가 없었던 장면정권은 통일운동이나 진보적 사회운동, 학생운동을 '북괴'의 '흉계'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4월혁명의 정신에 모순되게 반공법(또는 국가보안법 개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 함으로써 혁신계의 2대악법 반대투쟁을 불러왔다." "언론 자유는 언론의 범람과 횡포를 낳았다. 이승만정권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악명 높은 '언론 조항'을 삽입한 바 있는데, 장면정권은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에 약간 손댄 것을 제외하고는 언론 규제는 감히 생각조차 못 했다." "언론들은 과장·왜곡 보도하기 일쑤였고, 특히 정쟁을 부추겼다. 언론은 비난을 퍼부어야 주목받았기 때문에 장면정권의 실정과 무능을 쉬지 않고 보도했다. 장면을 지지하는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정부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서울신문』과 KBS조차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297)


"4월혁명으로 여러 변화가 일어났고, 과도기였기 때문에 장면정권은 여러 면에서 어려움에 부딪혔지만, 짧은 존속기간에 비하면 과도기답게 의미 있는 변화와 성취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4월혁명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및 인권 확대, 사회단체·이익단체의 자율성 확대, 혁명입법, 통일 논의 활성화, 학생들의 민족 자주성 강조와 신생활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 활성화, 집단학살 의혹 사건 등에 대한 진상규명운동, 지방자치제 선거 확대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장면정권하에서 공무원 사회와 교육계에도 변화가 일어났고, 일정하게 동태성이 부여됨에 따라 '성취형' 관료도 생겨났다. 공무원·경찰 공채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경찰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경제제일주의 기치 아래 경제 건설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것과 테크노크라트, 경제개발 계획, 국토건설 사업, 기간사업 중시 등은 다음 정권으로 인계되었다."(298)


6장 부마항쟁과 박정희 유신국가의 말로


"부마항쟁은 김영삼제명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주요한 투쟁 목표는 유신체제 타도였다. 10월 15일 부산대 교정에 뿌려진 '민주선언문'에서는 유신헌법을 '악의 근원'이라고 규정했고, 같은 날 뿌려진 '민주투쟁선언문'에서는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조치 등은 불의의 날조와 악의 표본"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민심이 유신체제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1978년 12월 12일 치른 총선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 1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공화당은 4명만 당선되었다. 5명은 신민당 소속이었고, 1명은 무소속의 예춘호였는데, 그는 야당과 행보를 같이하고 있었다." "부산만이 아니었다. 12·12 총선에서 박정희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엄혹하게 통제되고 있었는데도 신민당이 32.82%를 득표해 공화당의 31.70%보다 1.1%나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신민당보다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던 통일당이 7% 이상 득표한 것까지 감안하면, 공화당의 패배는 더욱 분명했다."(312-3)


"박정희와 유신체제가 붕괴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경제 문제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박정희의 치적 하면 대부분 경제발전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유신 붕괴 전해인 1978년 12·12 총선에서 공화당이 패배한 데에는 1977년부터 시행된 부가가치세 강행, 노풍(벼 품종) 피해, 재벌·특권층 중심의 경제 운용이 큰 역할을 했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이 민란 또는 민중봉기의 형태로 일어나고, 다른 5대 도시에도 확산될 것으로 파악한 것은 유신체제 및 정치파동에 대한 불만에다가 물가고·조세저항 등 경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부산계엄사령부가 중심이 된 합동수사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침체에 의한 서민과 상인층의 불만을 부산항쟁의 첫째 이유로 꼽았고,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그에 항의하여 제출한 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겠다고 한 정치적 이유가 두번째로 제시되어 있다."(314-5)


"유신쿠데타 다음 해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산업 구조를 바꿔놓은 중화학공업이 유신체제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하다. 재벌의 판도는 정경유착과 관련돼 있었는데, 정부 보증으로 얼마나 큰 규모의 중화학 설비를 위한 차관을 도입하느냐에 의해 판가름 났다. 대재벌들은 자기 자본 없이 무리하게 차입해 중화학산업의 평균 자기자본 비율이 22%에 머물렀다. 과도한 중복투자로 문제가 심각해지자 박 정권은 1979년 5월 총투자 규모의 약 30%나 투자보류 또는 중지시킨 대규모 투자조정을 해야만 했다. 1979~1980년에 창원공단의 중화학공업 가동률은 현저히 떨어져 50% 안팎이었고, 현대양행의 대규모 공장은 가동이 멈춰 세계 최대의 창고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중화학공업계가 불황에 허덕이자 경기는 곤두박질쳤다. 외채가 1979년 말 기준 200억 달러를 넘어서 외채망국론이 제기되었다."(317)


"부마항쟁은 10·26 거사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김재규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18일 0시가 조금 지난 새벽에 부산계엄사령부에 도착해 보고를 받았다. 김재규는 7년 동안 유신체제의 억압이 계속되는 사이에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졌다고 판단했는데, 그 자리에서 부마항쟁 같은 국민적 항거라는 우려했던 사태가 결국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인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박정희에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에 대한 저항에다가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기입니다. 불순세력은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으나, 박정희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10월 26일 저녁에도 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했다고 말하면서─여기서 광주사태에 김대중이 개입했다는 전두환·신군부의 주장이 상기될 것이다─부산사태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식당 뽀이나 똘마니들이 많이 가담했다고 억지를 부렸다."(331-2)


"(유신체제에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부마항쟁이 촉발한 10·26 거사는 대규모 유혈참극을 방지하는 데 기여했다. 유신 말기의 정치적 폭주와 독재, 장기집권, 경제 약화, 빈부격차 등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사태 악화에 따라서 서울, 광주 등 다른 지역에서 제2의 학생·민중 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승만이나 전두환·신군부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박정희와 차지철은 유신체제를 보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유혈참극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부마항쟁으로 인한 10·26 거사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고, 그것은 살얼음판 비슷한 희망이었지만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었다.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활기가 있었다. 전두환·신군부의 5·17쿠데타로 민주화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지만, 그것은 1985년 2·12총선에 부분적으로 표출되었고, 6월항쟁으로 진전하였다."(341)


7장 친일파가 만들려 한 국가


"(친일파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받아 정치행보를 펼쳐나가던) 이승만은 정부수립 이전에 이미 친일파 청산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가 입법의원 의원 등 고위 공직에 취임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1946년 10월 입법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서울에서 장덕수와 김성수가 당선되는 등 친일행위자들이 당선되자 부정선거 문제와 함께 논란이 일어났고, 김규식 등 좌우합작위원회에서는 이 선거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여 재선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입법의원 선거가 정식으로 되었으니 우리 민족이 다 축하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친일파 문제는 우리 환경이 해결할 수 없으니 미리 제출되는 것은 민심만 혹란(惑亂)하게 한다"고 말하며 '극렬' 친일 분자라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일파 청산을 완강히 반대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친일파 의원 당선자가 포함된 입법의원 선거를 우리 민족이 다 축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55)


"극우반공주의는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굳건하지 못했다. 오히려 친일 경찰이 경원시되거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1950년 5·30 선거가 보여준 대로 애국자는 존경받고 있었다. 극우반공주의는 한국전쟁을 통해 강고히 뿌리를 내렸다. 다른 요인도 작용했지만, 특히 제주 4·3사건에서부터 일어난 군·경에 의한 대규모 주민 집단학살은 극우반공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력은 오로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민중은 숨을 죽였다." "일례로 안두희 사건 재판이 열릴 때 재판정 밖에서는 안두희를 '의사'로 치켜세우는 벽보가 붙었고, 변호인은 피고의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라고 변론했다. 검찰관이 이를 반박하자 재판장이 검찰관을 제지했다. 안두희는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 만일 이 자리에서 공산당과 한독당이 같은 노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라"라고 있는 대로 소리를 높여 말했다."(360-1)


"박정희 유신체제를 만들고 수호한 고위 관리는 거의 다 친일파 또는 친일행위와 관련 있는 자였다. 유신 수호의 첨병인 유정회의 초대 회장인 백두진은 일제의 국책은행인 조선은행 간부였다." "제2대 회장인 태완선 역시 조선총독부 국책은행인 식산은행 등에서 근무했다. 제3대로 유신 말기 회장인 최영희는 일제가 패망하던 해에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여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유신체제에서 6년이나 국회의장을 맡은 정일권은 만주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정일권은 박 정권 초기에 6년 7개월이나 국무총리를 지냈다. 1978년 12월까지 10년 이상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는 친일파 거두 민병석의 아들로 조선총독부 판사였다. 유신 말기에 대법원장이 된 이영섭은 해방되던 해에 경성지법 판사였다. 이처럼 유신체제는 박정희를 포함해 3부의 장과 유정회장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친일파이거나 친일행위와 관계가 있었다."(365-6)


"일본이 우경화하고 전쟁국가로 치닫는 것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긴장을 고조시킬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거사 청산을 어렵게 한다. 특히 일본의 극우와 한국의 극우가 결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기시 등 일본의 '친한파'는 유신체제를 붕괴할 때까지 지원했는데, 10·26정변 이후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해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다시 지원했다. 일본은 12·12쿠데타 이후 1980년 5월 10일까지 최소한 여섯 차례에 걸쳐 출처가 불분명한 북의 남침설을 전달해 전두환의 권력 강화를 도왔고, 5·17쿠데타를 일으키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던 5월 20일에는 마에다를 특명전권대신으로 파견했고, 6월과 8월에는 세지마 류조가 비공식 특사로 방문했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광주 유혈사태의 방조자였다. 나카소네 정권은 전두환 정권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오늘날에도 두 나라의 극우는 상당수가 손을 잡고 있다."(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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