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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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충성경쟁과 마법의 주문 '86·88' / 1981년


"5공은 정치권을 떡 주무르듯이 하기 위해 '관제야당' 설립을 꿈꾸었다. 그런 음모의 일환으로 1980년 11월 12일 국보위는 10대 국회의원 835명을 정치규제 대상자로 발표했다. 이들 가운데 569명이 재심을 청구했고 그 가운데 268명이 구제됐다. 정치인들이 재심을 청구해 규제대상에서 풀린다는 건 5공에 대한 협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군부의 이런 조치는 관제야당 창당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15일 자신을 총재로 한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였으며, 이로부터 2일 뒤 유치송을 총재로 한 민주한국당, 1월 23일에는 김종철을 총재로 '공화당 이념을 계승'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아니 정권이 야당을 창당하다니!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관제야당'이었기 때문에, 정가에서는 '1대대(민정당) 2중대(민한당) 3소대(국민당)'이라는 말이 떠돌았다."(17)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정권은 피로 얼룩진 정권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베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열린 '국풍 81'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가미카제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국풍'(國風)이었다. 그 정신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의 행렬이나 배의 노를 합심해 젓는 그림 등으로 모자이크된 포스터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어용화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이 행사는 행사장인 여의도를 통행금지까지 해제시켜가면서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으로 만들었다. 아니 '난장판'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48-9)


"서울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개최도시로 선정된 직후부터, 전두환정권에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였다. 아니 '전가의 보도'였다. '86· 88'은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보도한 『조선일보』 81년 10월 2일자가 주장했듯이, 올림픽은 '민족우수성 과시, 국제적 위치 입증, 세계 속의 한국부각'의 기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후일(86년) 『말』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86은 88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소위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86·88'은 현정권이 통치명분으로 내세운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 야릇한 관제 조어(造語)는 관제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선전되면서 대중세뇌의 핵으로 등장하여 대중을 그야말로 '입만 벙긋하면 86·88'을 읊조리는 백치와 같은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65)


"전두환 정권은 대학 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되었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 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가 조사한 다음, 곧바로 군대에 입영시켰다. 신체검사를 통하여 신체상의 결격사유 학생들마저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혔으면 입영시켰으며, 입대할 수 없는 가정환경을 가진 학생들도 입영시켰다. 이들 강제징집자들은 '순수학적변동자'라는 붉은 낙인이 신상카드에 찍혀서 군 수사기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돼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제대를 앞둔 강제징집자들에겐 '녹화사업'이라는 가공할 만한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심사를 통해 활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퇴계로의 진양상가 분실에서 교육을 시킨 뒤 대학가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70-2)


"녹화사업에 따라 강제징집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의식화의 정도를 측정받으며, 이후 체제를 긍정하도록 보름에서 두 달 간 이른바 '역의식화' 교육을 받게 되었다. 더욱 악랄한 것은 보안사가 이 작업 이후 그러한 교육성과의 검증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른바 '프락치' 임무를 맡기는 것이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녹화사업으로 인해 사망자가 잇달아 발생하자 84년 3월에 열린 제적생과 해직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것은 곧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정부는 여론에 밀려 84년 9월 '소요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하고 녹화사업을 전담했던 보안사 3처5과를 해체하고 사업을 공식 중단했다. 그러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6공정부에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72-3)


3장 밤의 자유와 프로야구에 취해 / 1982년


"1945년 9월 7일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국민들은 해방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해방감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자정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야간통금에 구애받지 않았던 경찰, 군인, 기자들의 특권이 사라졌다.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 제야(除夜)였다. 이 때만 되면 사람들은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통행금지 해제는 1년 365일의 '크리스마스화' 또는 '제야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으니, 통금이 해제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흥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83-5) 


"통금해제가 가져다준 해방감은 민주화 쪽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통금이 해제된 후,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밤문화와 성적 욕망의 배설구들이었다."(87-8) "그랬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감은 꼭 정치적 해방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와 탄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런 해방감의 제공은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 폐지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전두환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 완화였다. ·····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90-1)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전한 여가선용을!〉 이런 슬로건을 내세운 프로야구가 82년 3월 23일 출범했다. 5공이 '스포츠공화국'임을 입증하겠다는 듯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다. 이미 3일 전인 3월 20일, 5공은 체육부를 신설하고 장관에 5공의 제2인자라 할 노태우, 차관에 이영호를 임명하였다.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전두환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경기로 첫발을 뗀 프로야구는 개막전부터 관중석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프로야구 출범이 전두환의 지엄한 명령이긴 했지만, 재원마련이 문제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우병규와 마산상고 동기이던 전 MBC 해설위원 이호헌은 우병규로부터 프로야구 출범안을 문의받고, 정부가 돈 한푼 들이지 않은 채 프로야구를 출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기업들이 야구단 운영을 맡는 방법이었다."(104-5)


4장 '땡전뉴스'가 대변한 '전두환 공화국' / 1983년


"2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 등 모두 269명(미국인 51명, 일본인 28명 포함)을 태우고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대한항공(KAL) 정기여객기 007편은 중간 귀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을 8월 31일 밤 9시 58분에 이륙한 직후부터 조금씩 우측(북쪽)으로 항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KAL 007기는 소련영공을 침범해 세 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놀랍게도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겐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레이건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강조한 바 있는 국가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KAL기 격추 이전 MX미사일과 빅아이(BIGEYE)라고 하는 독가스 무기의 생산에 대한 미 의회의 견해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KAL기 격추사건은 미 의회의 반대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핵무기 감축마저도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152-5)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엉뚱하게도 5공치하에서 방송이 얼마나 권력의 주구로 유린됐는지를 웅변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국민 수백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인데도 그게 톱뉴스가 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공치하에서 신문과 방송은 5공정권 홍보와 미화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 일에 신문에게 선두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방송사들의 맹활약은 이른바 '땡전 뉴스'(또는 '뚜뚜전 뉴스')로 나타났다." "〈유린된 방송을 상징하는 사건 중의 하나를 살펴보면, 방송들은 83년 KAL기 실종 뉴스와 대통령 동정 중 어느 것을 톱뉴스로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한 방송사에서는 뚜뚜··· 하는 신호음에 뒤이어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 하고 뉴스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 TV 화면에 전씨가 서울 어느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를 하는 모습이 비쳤다. 뉴스시간에 뉴스는 뒤로 밀리고 권력이 판을 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156-7)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애초에 17박 18일로 계획되었던 전두환의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길에는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등 3개국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판에 미얀마가 추가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미얀마 방문은 외무부가 아닌 다른 정부기관의 지시에 의해 추가되고 준비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미얀마는 여러모로 남한의 대통령이 방문할 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남북한 동시수교를 하고 있었지만, 남한과는 별다른 거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쪽에 편향된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얀마 순방계획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5공의 핵심부가 미얀마의 통치체제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고 증언했다. 그 통치체제란 바로 『정권교체준비연구』에 나타난 섭정식 영구집권체제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 바로 미얀마체제였던 것이다."(163)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른바 유화(宥和)정책이었다." "학원자율화 조치는 우선 당장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병력이 철수하는 가시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100명 가까운 해직교수와 1천3백여 명의 시국관련 제적생을 복직, 복학시켜줌으로써 사람들을 적지않이 헷갈리게 했다. 전두환 정권의 준비도 제법 치밀했다. 전정권의 지시를 받은 대학은 학생선도위원회와 홍보위원회를 설치하여 학생시위에 대처키로 했다." 그러나 모든 게 전정권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결성되고 "대학에 자율적인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광주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광주문제는 지하유인물 형식이나, 구전형식으로만 전해졌었다. 그러다가 84년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광주민주화운동 알리기에 나선 것이다."(171-3)


5장 저항의 불꽃은 타오르고 /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조건을 개선해보려고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대학출신의 노동자 및 민주노조 운동 경력이 있는 운동가들을 노동현장에서 쫓아낸다는 목적 아래 84년부터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각 단위사업장에 배포했다. 이 '블랙리스트'는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노동부, 국가정보기관이 힘을 합해 작성한 것으로서, 125개 사업장의 해고자 681명, 복직자 60명, 재취업자 57명에 대한 신상명세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조사, 정리한 것이었다 후일(87년 10월 27일)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와 인천지역 해고노동자협의회가 공개한 또다른 '블랙리스트'에는 78년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24명과 태창섬유, YH무역 등에서 해고된 노동자 1662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 '블랙리스트'로 인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취업할 수 없었으며, 사업장에서는 불법적인 해고가 자행되었다."(182)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83년 황지우, 김정환, 김사인 등이 꾸려가고 있던 동인지 『시와 경제』 2호에 〈시다의 꿈〉, 〈하늘〉, 〈그리움〉 등 총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박노해의 등장에 대해 최재봉은 이렇게 말한다.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면서 노동자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205-6)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온 지 한 달 후인 1984년 10월엔 이문열의 『영웅시대』가 나왔다. 박노해는 노동자들의 한을 토로했던 반면, 이문열은 '선진조국'과 '번영의 조국'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210)


6장 탄압과 고문의 광기 속에서 / 1985년


"양 김씨는 2·12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둔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열고 신민당(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선거 4일 전에는 미국에 사실상 망명중이던 김대중이 2년 만에 귀국하였다. 신민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국정감사권 부활'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언론기본법 폐지 및 노동관계법 개폐' 등의 선거공약을 확정하고 창당 25일 만에 총선에 뛰어들었다. 이 선거에 대해 임혁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월 12일의 총선은 사회운동세력들의 전략적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일단 선거유세가 시작되자마자 유세장은 정권에 의해서 금기되어왔던 언어가 분출하는 공간으로 화하였다. 집권자의 광주학살 관련, 영부인의 금융스캔들 관련 사실이 공개적으로 신당후보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기존의 충성스런 야당들은 '1중대, 2중대, 3중대'라는 언어로 비하되었다. 선거공간은 반대세력의 언술의 경계를 넓혀주었고, 2·12 총선을 개별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국민투표로 변모시켰다.〉"(223)


"2·12 총선은 11대 때의 78.4%를 훨씬 상회하는 84.2%의 높은 투표율을 보이면서 〈5·16 이후 최대 투표율〉이라는 기록을 남긴 가운데 신민당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신민당이 관제야당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함으로써 민한당 의원들은 대거 신민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선거 결과에 민정당만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게 아니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건 신군부 중심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민주화로 기울고 있었다. 2·12 총선 후 그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로 갈라져 있던 사회운동의 통합이 급진전되어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으며, 1985년 하반기부터 민통련과 신민당은 광범위한 국민 대중의 지지와 참여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투쟁에 임하게 되었다."(224-5)


"2·12 총선에서 분 신민당 바람엔 학생들의 적극적인 총선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학생들은 2·12 총선에 영향을 미친 동시에 역으로 2·12 총선결과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2·12 총선 후 대학가엔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선거열풍이 몰아쳤는데, 이에 대해 이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학생회 구성의 하이라이트는 후보자들의 합동유세였다. 후보들은 '강력한 민주투쟁'과 '학내문제의 우선해결'로 정견이 갈라졌으나 대체로 강력한 민주투쟁론자들이 당선되었다. 그것은 학원의 민주화투쟁이 격렬해지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학생세력 연합도 모색되었다. (···) 4월 17일 고려대에서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 결성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대통령의 방미성토대회를 갖고 '현정권에 보내는 경고장'을 채택하며 '매국방미 결사반대' '수입개방 결사반대' '경제종속 결사반대' '군부독재 퇴진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였다.〉"(231-2)


"전두환은 정치헌금을 뻔뻔하게 받는 걸로 유명했는데, 재계 순위 6위이던 국제그룹 해체 이후 재계에 공포 분위기가 감돌면서 정치헌금이 잘 걷혔다." "그렇게 돈을 뜯긴 재벌들은 노동자들로부터 그 몫을 짜내야 했고 노동자들이 저항하면 그 때엔 돈 받은 정권이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5공은 '조폭정권'이었던 것이다. 전두환의 공격적인 정치자금 수금은 사실상 자신의 평생집권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10월 아웅산사건 때 희생된 유족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추진된 일해재단이 전두환의 퇴임 후 위상과 관련된 연구소로 탈바꿈한 사실 자체가 그걸 잘 말해준다." "국제그룹 해체의 의미에 대해 김호진은 이렇게 분석한다. 〈자본가계급은 이러한 전(全)정권의 강압정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정부정책에 순응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은 곧 재벌이 전정권과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정경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246-8)


"1985년 5월부터 광주문제는 민주화세력의 본격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성명서를 낸 데 이어 5월 23일 12시 서울대 학생 함운경을 포함한 73명의 학생들은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을 72시간 동안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는 82년 3월 18일 문부식을 비롯한 부산 고신대생들에 의해 이뤄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에 뒤이은 것으로 광주학살을 외면하고 신군부를 지지한 미국에 대한 항거이자 응징이었다."(259) "이 점거사건은 당사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정권은 이 기회에 여론으로부터 학생운동을 격리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 사건을 언론을 통하여 크게 부각시켰지만, 오히려 이러한 언론의 대서특필은 국민들로 하여금 광주학살과 미국이 관련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역반응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학생들에게만 반향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미국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62)


"1984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1985년 4월 10일 '노동운동탄압 저지투쟁위원회'(노투)가 결성돼 지역단위 투쟁조직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서 지역적 연대와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6월 1일에는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연)이 결성되었다. 그러한 노동운동의 성과를 근거로 85년 6월 24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이른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구로동맹파업은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시도된 본격적인 동맹파업이었다. 이 동맹파업은 개별기업 단위의 노동조합주의, 조직보존주의를 뛰어넘는 연대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초보적이기는 하나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대중 스스로의 조직적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노동운동이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8월 25일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창립되면서 노동운동은 학생운동과 긴밀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283)


"1985년 10월 29일 5공정권은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흔히 '깃발사건'(혹은 민추위 사건)으로 불려져 왔는데, 이는 민추위가 내세운 '노학연대'로 인해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5공정권이 급조해낸 것이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에도 민청련이 배후 조종세력으로 몰려 김근태 등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서울대생 박종철은 이 사건의 마지막 수배자인 박종운을 하숙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비극을 겪게 된다."(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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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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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 했나? / 1980년


"1980년대의 한국에서 '중산층'의 체제친화적인 보수성에 심리적 면죄부로 작용한 건 바로 '86·88'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담론이었다. 물론 87년 6월항쟁이 잘 보여주었듯이, '중산층'이 독재체제에 대해 무한대의 친화성과 인내심을 발휘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몸에 밴 부정부패와의 친화성이 '하층'에까지 전염된 탓에 한국인들은 '이기적 탐욕'을 자극하는 선전·선동에 매우 취약하였던 바, 바로 이 지점을 독재체제의 지역분열주의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6·25 시절 자동차에 탄 미군에게 껌과 초콜릿을 구걸했던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팔아먹었다는 건 (정주영을 민중의 영웅으로 추켜세운) 김동길을 포함한 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살 떨리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광주'는 잊혀졌으면 하고 바라는 '과거지향적 갈등'이었을 뿐이고, 88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영광은 '미래지향적 비전'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23-4)


"신군부가 시도한 대대적인 여론조작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은 12·12쿠데타세력과 5·16쿠데타세력의 차이점이다. 12·12쿠데타는 5·16쿠데타로부터 18년이나 지난 시점에 일어났다. 18년 동안에 많은 변화를 겪은 한국인들이 또다시 일개 육군 소장이 집권하는 걸 반길 리는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처럼 국민이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어서 경제성장이라는 '기능적 필수조건'이 다른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던 사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군부에겐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치밀한 '음모와 공작'이 필요했다." "전두환의 부하들은 전두환의 리더십을 미화하지만, 과거 그 어떤 군인도 전두환만큼 사조직 결성과 유지에 공을 들이진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곧이어 발생할 '광주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도 바로 그런 사조직의 기이한 단결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55-6)


"신군부가 추진한 '음모와 공작'의 핵심은 여론조작이었다." "(언론이 자신들의 '애완견이자 보호견'이 되어주길 원했던) 신군부는 이미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보안사 언론대책반을 통해 이른바 'K(king)공작'을 입안하였다. 'K-공작'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여론조작 방안으로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과 허화평 사령관비서실장 등 이른바 전두환그룹의 '5인방'이 주도하였다. K-공작의 큰 시나리오는 3김을 민주정치세력,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하여 '선안정 이론'을 확산시키고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협조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한다는 두 가지로 구성돼 있었다. 이에 따라 보안사팀은 연일 계속되던 대학생 시위와 노동쟁의를 '혼란'으로 몰아붙였으며 3김의 대결양상을 '구태의연한 정치작태'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비춰지도록 언론 논조를 유도하였다."(57-8)


"당시의 유화 국면 속에서 언론 검열은 완화되기 시작했고, 휴교령이 내려졌던 대학도 3월 1일을 기해 다시 문을 열었다. 박정희 시절 축출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으며, 학생들에게는 거리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학내에서의 비폭력 시위와 자치권 일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권력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80년 2월부터 특전사는 '충정명령'이라는 강력한 폭동진압 훈련에 돌입했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이건 '인간폭탄 만들기' 훈련이었다. 영외 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외출과 외박이 전면금지된 상황에서 전 장병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가혹한 지옥훈련을 받으면서 까닭 모를 적개심과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다. 병행된 정신교육 훈련은 장병들이 그래야만할 이유를 제공했다. 그 주요 내용은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64)


"계엄사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 10호에 의거해 18일 새벽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었고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8일 새벽 2시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사실상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전두환은 미리 준비한 치밀한 전국계엄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보안사령부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이전인 16일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해, 17일 24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할 블랙리스트 8백여 명을 통보했다. 5월 17일 수배령이 떨어진 사람 가운데 6백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문과 방송은 수배자들의 명단과 죄목을 경쟁하듯 쏟아냈다.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조작을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들에게는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김대중과의 관계를 대라면서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115-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과 관련해 손호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두 야당지도자 중 김영삼 신민당 당수는 구속 대상에 제외됐고 김대중만이 구속됐다는 사실이다. 신군부는 정권장악의 마지막 장애물인 민중세력을 공격, 세칭 '시민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민주화진영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이를 위해 재야 민중세력과 좀더 직접적인 연계를 유지해왔고 박정희정권의 오랜 정치공작에 따라 '급진적' 이미지가 국민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으며 지역기반 역시 소외된 호남인 김대중을 내란혐의의 구속대상으로 삼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신군부는 광주·호남민들의 강한 반발이라는 효과를 초래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의 역사를 내다보고 말한다면, 신군부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행위는 바로 이처럼 지역분열주의 공작을 펼쳤다는 점이었다."(118-9)


"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쥐죽은듯 조용해졌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을 광주로 내려보냈다. 이른바 '충정훈련'으로 이미 '인간폭탄'이 돼 있는 병력이었다. 5월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병력 1천여 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그러나 그 '휴가'는 차마 필설로 다하기 힘든 '인간사냥'을 위한 것이었다."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백여 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오후 3시에는 공용터미널에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120-3)


"신군부는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인 후에 그 진실을 은페하기 위한 공작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시도된 건 붙잡힌 광주시민군들을 '비열한 짐승'으로 만들어 그들의 저항의지, 아니 복수욕을 완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최정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엄사는 27일 새벽, 투항한 시민군들을 체포하여 버스 4대에 실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끌고 가는 과정이나 그곳에서 계엄사가 시도한 일은, 모진 구타와 고문 그리고 배고픔으로 시민들이 투사가 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생명을 구걸하게 하는 비열한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적은 양의 식사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은 먹이를 구하는 동물에 불과하다는 자기확신을 심으려 했고 살인적인 구타는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신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연출한 '지상의 지옥'이야말로 광주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행위였다."(177-8)


"광주학살 후,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국방정보국이 작성한 1980년 6월 25일자 비밀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두환은 정부조사관들에게 학생이나 민간인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필름)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음. 이 사진을 구하려는 것은 『타임』, 『뉴스위크』 등 외신이, 저항하는 민간인에 대해 군인들(대부분 특전사 병력)이 잔혹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도한 것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임. 또한 그러한 물증은 반정부활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음.〉" "광주의 진실에 대해 티끌만큼이라도 말하는 건 모두 유언비어 유포로 체포되었고, 모든 사람은 오직 신군부의 발표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어야만 했다. 출판물 탄압은 80년대 내내 상시적으로 자행되었다. 5공은 분서갱유라 해도 좋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에 억압적인 족쇄를 채움으로써 국민이 광주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끔 하였다."(181)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열성을 다했듯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만들기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KBS는 8월 2일 『김대중과 한민통』이라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내보냈는데, 이 프로그램은 김대중을 거의 간첩 수준으로 묘사했다. 차라리 간첩 수준이기만 했더라면 좋았겠지만(나중에 진실규명이 될 수 있으므로) 그것만도 아니었다.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인간이며 이중인격자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하였다. 방송에 뒤질 신문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와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경향신문』의 9월 11일자 특집기사는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변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당시 모든 언론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조작에 혈안이 돼 있었다."(208-9)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 단일후보를 총투표자 2525명 중 2524표의 찬성과 1표의 무효표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전두환은 9월 1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했는데, 이는 12·12 쿠데타 이후 164일 만의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였던 것이다. 대통령 전두환은 9월 29일 개헌심사위원회를 통해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의 7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공고했고, 10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 새 헌법안은 한국 투표사상 최고인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률을 기록하면서 10월 27일 공포되었다." "제8차 개정헌법에 따라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했고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은 모두 전두환이 임명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11대 국회가 개원하기까지 156일 동안 215건의 안건을 접수하여 100% 가결했다."(233-6)


"1980년 신군부가 일련의 가혹한 조치들을 통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정도를 넘어서 수족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건, 5공의 '파시즘 체제'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어준 효과를 내게 되었다는 걸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70년대를 겪은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탄압하는 권력, 탄압받는 언론'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들어 신군부가 언론장악을 위해 저지른 일련의 조치들도 국민의 눈에는 '탄압받는 언론'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물론 국민들은 언론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보도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식이 곧 신군부와 언론의 유착관계에 대한 인식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간 건 아니었다." "언론이 사실상 5공 파시즘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여론조작을 왕성하게 전개하면서 최소한 국민의 '수동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에 5공 파시즘의 작동 방식이 비교적 부드러울 수 있었던 것이다."(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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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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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히스테리와 광기 속에서 / 1976년


"긴급조치 9호 발표가 있은 지 9개월여 후인 1976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민주화 진영의 큰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또는 '명동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언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3·1 기념 미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3 ·1 민주구국선언’의 초안은 김대중이 작성했다. 김대중은 그 이전 명동성당에서 추기경 김수환을 만나 〈내가 투옥되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주고 싶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지기엔 세상은 너무 얼어붙어 있었다. 3월 5일 문공장관 김성진은 이 선언에 대해 〈헌법질서를 파괴하려는 비합법 활동〉이라고 주장했으며, 서울지검은 '정부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 여당의 '전가의 보도'는 여전히 월남 패망이었다. 3월 17일 신민당 의원 한병채가 명동 사건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공화당 의원 홍병철은 〈한 의원을 월남으로 보내라〉라고 야유했다."(25-8)


"1975년 5월 21일 박정희와 회담한 이후 변질된 김영삼의 행보는 민주화운동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만 아니라 신민당의 내분을 몰고 왔다. 1976년 5월 25일에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가 〈우리 야당사에서 가장 추악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당시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는 박 정권의 공작정치가 개입된 탓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과 신민당이 면책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5·25 전당대회를 전후하여 김영삼 등의 주류에 도전하는 비주류는 이철승, 고흥문, 신도환, 정해영, 김원만, 정운갑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75년의 '박-김 회담 의혹', '김옥선 파동 때의 굴복' 등을 걸고 넘어졌다. 비주류는 당헌을 고쳐 집단체제로 가자고 주장했고, 김영삼은 단일지도체제를 고수하겠다며 파벌 세력 강화로 맞섰다. 이런 갈등은 결국 수백 명의 주먹 부대와 각목이 난무하는 폭력 충돌로 이어졌다."(32-3)


# 각 파가 전당대회를 따로 개최하여 주류의 김영삼과 비주류의 김원만이 각각 선거관리위원회에 당 대표 등록을 신청했지만 모두 각하되고, 김영삼은 총재 지위가 6월 9일자로 소멸되자 6월 11일에 사퇴함. 9월 15일에 전당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이철승 389 대 김영삼 364로 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선출


"1976년 10월 24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정부의 기관 요원인 박동선 씨가 1970년대 연간 50만 내지 1백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 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한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에게 수백만 달러 뇌물 제공'이라는 톱기사 제목과 함께 무려 10면에 걸쳐 내보냈다."(61) "이 사건은 비단 미국의 정·관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박동선은 한국 권부와 유착, 미국의 쌀 수입 중개권을 획득해 커미션을 챙기는 방법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고, 그 돈 가운데 일부는 미국 정계뿐만 아니라 박 정권의 정치자금으로도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막대한 액수의 돈이 박 정권에 흘러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박동선이 미시시피나 루이지애나 같은 쌀 생산 주 출신 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결과) 한국은 비싼 값으로 쌀과 다른 작물을 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한국 내의 부정부패 차원에서도 깊이 살펴봐야 할 사안이었다."(63-4)


8장 '1백억 달러'의 빛과 그림자 / 1977년


"1977년 1월 20일 '인권대통령'을 표방한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이후 코리아게이트 파문은 더욱 확대되었다." "2월부터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 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미 선거 공약에서 인권·도덕 외교와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었던 카터는 3월 10일 한국 정부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11월에는 중앙정보부 워싱턴 실무책임자인 참사관 김상근이 망명을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이미 미국에 망명해 있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있었다. 김상근 망명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그 해 12월 4일 해직되고 그 후임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프레이저 위원회는 37명의 증인을 출석시킨 가운데 20여 회의 청문회를 열었는데, 이 청문회의 핵심은 김형욱과 김상근의 증언이었다. 김형욱과 김상근은 6월 10일까지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박정희의 가슴에 통한의 못질'을 하는 증언을 하였다."(69-70)


4월 19일에 일어난 '백지 팸플릿' 사건은 1977년의 얼어붙은 정국을 잘 보여준다. "사건 내용은 간단하다. 4·19를 맞아 연세대 몇몇 학생들이 그날 백지를 돌렸을 뿐이다. 굳이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을 만큼 박 정권의 광기는 극을 치닫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지 성명서는 각자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백지를 돌린 지 채 1분도 안 되어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에선 그 흰 백지에 뭐가 들었나 싶어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백지를 마이크로필름쯤으로 아는 그 멍청이들의 눈에 그런다고 뭐가 보일 리가 있을까. 죄목은 씌워야겠고, 찾아낸 물증은 없고, 궁지에 몰린 멍청이들이 생각해낸 죄목은 참으로 기발하다. 이름하여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 결국 이 해괴망칙한 죄목에 걸린 4명 중 김철기 씨는 제적되고 나머지는 정학을 맞았다.〉"(96)


"박정희가 농촌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가 하는 증언은 무수히 많다. 그는 생각뿐만 아니라 직접 몸으로도 보여 주었다. 그는 농민들의 술인 막걸리를 좋아했고 자주 농민들과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혹자는 그게 다 '이미지 조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원초적인 농촌 사랑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의 농촌 및 농촌 사랑은 직접적이었으나 심리적이고 지엽적이었던 것임에 반해, 농촌과 농민에게 가해진 불이익은 간접적이었으나 사회적이고 구조적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흑백 TV도 제대로 못 보는) 가난한 농민을 위해 컬러 TV 방영을 할 수 없다는 박정희가 그 가난한 농민들의 자식들이 도시의 공장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는 것에 대해선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그들을 빨갱이로 모는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러한 이중성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109)


9장 동일방직과 현대아파트 / 1978년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은 주로 중소기업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박 정권의 폭압적인 노동 통제, 한국노총의 어용화, 상대적 임금 우위 등의 이유로 대기업에선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임금인상이나 부당해고 반대,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노조결성과 활동보장 등을 내걸고 싸웠는데, 운동이 크게 일어난 기업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인간적 모독이 투쟁의 주된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절대 빈곤하에서도 인권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박 정권하에서의 인권운동은 불가피하게 반독재투쟁의 성격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가공할 정권의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노조운동에 가장 큰 힘을 보태준 건 종교단체들이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도시산업선교회의 역할이 지대했다. 박 정권을 비롯하여 민주노조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이 도시산업선교회를 그대로 놔둘 리 만무했다."(134-5)


"동일방직은 전체 1천3백 명의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는데,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어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수준의 노조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자지부장을 선출해 모범적인 민주노조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회사는 1975년 말부터 남자 대의원들을 동원하여 어용노조화를 시도하였다. 회사 측의 공작에 대해 정현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 공원들이 대부분인 공장에서도 현장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남자이고, 여자들의 의견은 참고조차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을 경우에도 초기에는 대부분의 간부직은 남성들에 의해 독차지되기가 일쑤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깨뜨리려고 하는 기업주들은 노동조합의 힘의 원천이 남자 노동자라는 판단 아래 남자 분회 간부를 매수하는데, 이는 상당한 정도로 성공하여 그들은 주로 노동조합 파괴에 앞장서게 된다.〉"(148-9)


"4월 1일자로 무더기 해고를 당한 1백24 명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전국의 공장에 배포되었다. 이들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박 정권이 그렇게 한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박 정권의 재취업 방해 공작이 잘 말해 주듯이, 〈동일방직 사태는 단순한 노사분규나 노동청에서 말하는 노조 안의 조직분규가 아니라 정부·노총·회사가 합작하여 산업선교와 관련된 민주노동운동을 파괴함으로써 산업선교와 노동운동 모두를 말살하려는 첨예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박 정권의 만행에 대해 언론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156-8)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유신체제라는 거대한 바위에 던져진 한 알의 계란과도 다를 바 없었다. 여성 노동자들을 '공순이'로 조롱하거나 폄하했던 사람들 역시 유신체제의 그런 야만적인 음모극에 조연 역할을 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164)


"박정희 정권은 점점 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와 박정희 이상으로 심한 권력 중독에 빠진 그 주변 충성파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조갑제는 1979년 박 정권의 파국은 이미 1978년에 시작된 것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8년은 긴급조치 9호의 공포에서 벗어난 민주화운동 세력의 저항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했다. 3년 묵은 긴급조치 9호는 그 약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중요 학생 사건 일지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1975년엔 10건, 1976년엔 13건, 1977년엔 23건으로 늘더니 1978년엔 31건으로 급증했다. 1978년의 학생 사건들 가운데 3분의 2는 통일주체대의원 선거와 그들에 의한 대통령 선거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났다.〉 대통령 선거는 1978년 7월 6일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대통령 선거를 (공산국가에서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빗대어) 조롱하는 전단을 찍어 뿌렸다."(175-6)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한 건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통행금지까지 하루 해제하고 고궁을 무료 개방하였으며, 1천3백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취임식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서중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국의 축하사절로는 만주침략의 중심 인물로 전범 A급이었던 전 일본수상 기시가 이끈 일본인 12명뿐이었다. 유신체제의 '원조격'인 대만에서조차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어서인지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외국특별경축사절을 공식 초청하지 않았다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체육관에서 당선된 유신 대통령 취임에 경축사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유신체제로 한국은 따돌림 받았고 한국인 모두는 미개인 취급을 받았다.〉" "김대중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2월 27일 서울대병원에서 가석방되었지만 곧바로 자택 연금을 당했고, 신문 방송은 김대중에 대해 일체 보도를 금지당했다."(179-80)


"투기와 부정부패 열풍 속에서 죽어나는 건 가난한 서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겐 탈출구가 없었다. 저항의 길을 꽉 막혀 있었다. 점점 더 두텁게 형성되어 가고 있던 중산층은 탐욕의 문화에 몸을 내맡겼다. 이와 관련, 김교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 욕구의 충족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찾게 됨에 따라 박정희의 통치는 끝없는 경제과실을 약속해야 했으며, 이를 공급하는 것을 정치의 전부로 생각하게끔 되었다. 여기에 중독되다시피 하여 국민 쪽에서도 한 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은 또다른 경제 욕구를 요구하여 성장정책은 멈출 줄 모르는 직선행을 계속해야 했다. ····· 이 같은 물질적 상승 작용이 몰고 온 국민적 규모의 과열 현상은 마침내 모두가 앞을 다투어 돈을 벌겠다는 배금사상을 초래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기열병으로 말미암아 유신 후반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열병이 뒤범벅이 된 사회 불안과 혼미의 길을 치닫게 되었다.〉"(187)


10장 박정희 시대의 종말 / 1979년


"1979년 4월 16일 중앙정보부는 소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내 불법 용공 비밀서클 결성〉이라는 제목의 반공법 위반 사건이었다. 3월 9일부터 4월 4일까지 중앙정보부에서 관련자들에게 갖은 고문을 해서 조작해낸 이 사건은 박 정권의 말기적 증상을 잘 보여 주었다. (중간에 서서 화해를 모색해보겠다는 이들의 '중간집단운동'에 대해서조차 박 정권은 반공법을 들이밀고 고문을 자행했다.) 1980년 1월 항소심 판결에서 이우재는 징역 및 자격정지 5년, 한명숙은 2년 6월, 장상환은 2년을 선고받았으며, 신인령은 집행유예, 김세균은 선고유예, 황한식과 정창렬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주도했던 목사 강원용도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은 인권침해를 아예 상습화, 생활화하였고, 고문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듯 그것마저 상습화, 생활화하였다."(205-7)


"박 정권의 정보기관들은 정권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는 데에도 치열한 경쟁을 했다. 중앙정보부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한 지 4일 후인 4월 20일, 치안본부는 〈북괴 지령에 따라 통혁당을 재건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결정적 시기에 봉기하여 대한민국을 전복, 적화를 기도해 오던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 임동규 등 7명을 간첩 및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송치했다〉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조사가 착수되어 한 달 후 같은 시기에 대대적으로 발표된 것인데,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은 중앙정보부 작품인 반면, 이 사건은 치안본부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1980년 4월 22일 항소심에서 임동규는 무기(남민전 사건에도 연루), 지정관은 징역 및 자격정지 7년, 양정규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6월, 박현채는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를 받았다."(210-1)


"6월 29일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동경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내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과 7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국제 관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최악의 것이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 대통령이 약속을 깨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들먹이자 다음 날 2차 회담에서는 미국 측이 한국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구속 중인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카터는 준비해 둔 100명의 정치범 구속자 명단까지 내밀면서 벤스 국무장관에게 이를 발표토록 했다. 박 대통령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음은 물론이다.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한국에는 한국식의 인권이 있다'며 카터의 구속자 석방 요구를 '지나친 내정 간섭'이라고 몰아붙였다. 박정희·카터 회담은 결국 참담하게 막을 내렸다.〉"(220-2)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박정희는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백87명이 사기성 폐업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사 4층을 점거하고 벌인 항의 농성 사건도 박정희의 종말을 재촉한 사건이었다."(227)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님의 약값을 벌기 위해 철야작업한다는) 노동자들의 사연은 박 정권의 안중에 없었다. 박 정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오직 정권안보였다. 8월 11일 새벽 2시경 경찰은 이른바 '101호 작전'으로 불리는 농성 진압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그 와중에 YH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박 정권의 폭력에 항의하여 신민당은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카터가 방한한 지 불과 40여일 만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미 국무부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8월 14일 미 국무부는 〈경찰측 행위의 책임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합당한 처벌을 하기 바란다〉라고 논평했고, 8월 15일 박 정권은 〈미국은 명백한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230-1)


"박 정권은 1979년 들어 '성장'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한 방향을 향해 밀어붙이기만 하는 개발독재 성장주의의 부작용과 폐해가 극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는 단호한 의지나 군사작전식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상호는 〈1978년부터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경제위기는 박 정권의 해결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태생적 한계인 정당성의 부재를 보완하기 위해 성장과 수치의 경제에 포박당해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에서 안정화 기조로의 전환은 단순히 관련 장관의 교체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신 선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중화학공업 정책의 전반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신 정권의 물적 토대였던 독점자본의 이해와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이었다.〉"(254-5)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열흘 후에 10·26 사건이 벌어지자)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임명했다. 그러나 실세는 정승화가 아니었다. 10월 27일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에 완전히 접수당했고, 중앙정보부의 부서장급 20여 명은 온갖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절대권력 박정희가 사라진 공간에서 주도권이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사로 넘어간 것이었다. 한국 군부의 노른자위를 점령하고 있는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1월 3일 박정희의 국장(國葬)이 치러졌고, 11월 6일 전두환이 TV 카메라 앞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의 서거로 공석이 된 총재를 선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 11월 12일 당 고문 김종필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267)


"12·12 쿠데타가 벌어진 1979년 말은 정치적으론 '서울의 봄'을 예고하는 상황이었는지 몰라도 경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 해 초 '이란혁명'으로 이란의 석유 생산량이 감소되면서 번진 파장은 12월 중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산유국회의(OPEC)가 원유값을 일시에 4배로 올리기로 결정하는 사태까지 빚고 말았다. 이른바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해 기름값이 2배로 뛰면서 한국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었다." "대중은 절대 빈곤하에서보다는 경제성장의 과실의 맛을 조금 본 상태에서 경제에 대해 더욱 큰 두려움을 갖는다는 가설은 1980년대 초 한국 사회에서 설득력을 갖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재규는 사형당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3일에 남긴 유서에서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고 말했지만, 바로 그 며칠 전 민주주의는 광주에서 처참한 학살극과 함께 다시 무덤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304-6)


맺음말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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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0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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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수출전쟁과 안보전쟁 / 1973년


"6개의 전략 산업을 선정해 육성하겠다는 1 ·12 선언에 따라 1973년 5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박 정권은 재정·금융·조세상의 특혜와 지원을 주어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산업별로 울산(석유화학·비료), 구미(전자), 포항(철강), 옥포(조선), 온산(비철금속), 창원(기계) 등에 특화된 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박 정권은 1974년엔 '국민투자기금법'을 마련하여 조성한 기금 가운데 해마다 68%를 중화학공업 부문에 지원하였다. 또 14개 중요 산업에 처음 3년 동안 100%, 다음 2년 동안 50%의 내국세 감면 혜택을 주었고, 중화학고업 제품을 수출하여 생긴 소득에도 소득세와 법인세를 50% 감면하는 파격적인 조취를 취하였다. 이러한 여러 특혜 때문에 국민의 조세 부담은 점점 늘어나 1973년에는 12.6%이던 것이 1981년에는 18.2%까지 뛰었다."(16-7)


"1972년 사토 이후 총리가 된 다나카는 포항제철에 대한 일본의 자금 및 기술 지원에 대해, 포항제철이 건설되면 남한은 북한보다 더 우월한 철강 생산 능력을 갖게 될 수 있으며 일본의 1차적 의도는 남한 내의 저항 세력이 북한의 이익에 따르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2차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자본이 침투하면서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깊어지고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미국의 지위를 점차 대신해 나갔다. 한국의 공장들은 주요한 설비재뿐만 아니라 원자재·중간재와 기술을 일본에서 계속 도입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가동할 수 없었다. 한국은 일본에서 반도체·통신장비·기계 같은 자본재·내구소비재·중간재를 수입하고 이를 텔레비전·자동차·철강재로 만들어 미국에 되팔았다. 한·미·일 무역구조는 일본이 미국과의 무역마찰을 줄이는 데 이용되었다.〉"(54)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의 수는 1971년 9만 6천여 명에서 1972년 21만 7천여 명으로 급증하였고, 1973년에 43만 6천여 명으로 또 한번 급증하였는데, 그것은 1972년 일본이 중국과 외교 정상화를 하면서 대만과의 유대가 끊어지는 바람에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바뀐 것에 기인한다." "1973년은 외화벌이를 위해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부터 관광 기생들에게 허가증을 주어 호텔 출입을 자유롭게 했고,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박 정권은 매매춘 여성들에게 안보 교육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국가 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교양 교육을 실시하여 외국인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교육 내용은 〈일제시대 정신대를 독려하였던 독려사와 너무 흡사하여 '신판 정신대 결단식' 같았다.〉"(58-9)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는 비단 일본인 관광객들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70년대부터 주한미군이 그러한 국책사업의 주요 고객으로 등장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박 정권은 기지촌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70년대 초에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의 발표 이후에는 주한미군을 붙잡아 두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주로 미군의 기지촌 환경 개선 요구에 적극 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주한미군과 박정희 정권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합동으로 '군기지 정화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이 운동은 사실상 박 정권이 전담하다시피해서 추진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교양 강좌에서는 시장, 지역의 공보관, 경관 등이 인사말을 하면서 〈미군을 만족시키는 여러분 모두가 애국자들이다. 여러분 모두는 우리 조국을 위해 외화를 벌려고 일하는 민족주의자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70-1)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1970년 대통령 선거 당시 그걸 예견했던 김대중은 신병 치료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그 다음 날 동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비상계엄령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박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이다.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행위는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위대한 한국민의 손에 의해 반드시 실패하리라고 확신한다.〉"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대회를 연 김대중은 4일 후 한민통 동경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에 입국한 7월 10일에서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8월 8일, 김대중은 동경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되었다. 결국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납치된 지 5일 만인 8월 13일 살아서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78-80)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터진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가공할 공포로 다가왔다." "정부는 유류 공급을 17%로 줄이고 제한적으로 송전 조치를 단행하였다. 공장들은 일제히 조업 단축에 들어갔다. 11월 8일자 신문들에 실린 대형 기사의 제목들은 당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차량, 난방 유류 5% 절감〉, 〈걷기운동〉, 〈대낮 소등 생활화〉, 〈광고 네온사인 규제〉, 〈목욕탕 신규허가 억제〉, 〈광광, 레저여행도 규제〉, 〈계속 악화되면 택시 풀제 등 2단계 조치 실시〉. 거리엔 가로등이 꺼졌고, 상점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밤거리는 어두워져 사람들은 서둘러 귀가했으며 가정에서도 전등을 한 등씩만 켰다." "이듬해 3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가를 3개월간 동결하겠다고 발표해 한숨 돌리긴 했으나, 그 파동의 영향은 1974년에 물가가 42.1%나 인상되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100-2)


5장 긴급조치와 민주화투쟁 / 1974년


"1973년 12월 24일 김수환,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김동길, 계훈제, 백기완, 법정, 김재준, 박두진, 이호철, 백낙준, 김윤수, 김찬국, 안병무, 홍남순 등 각계 민주 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선언이 터져 나왔다. 그 날 민주 인사들은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걸 선포했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26일 밤 9시 40분부터 1시간 40분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특별연설에서 개헌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면서 강력한 처벌을 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이는 다음 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개원 청원 서명운동은 그런 정도의 위험으로 주저앉을 성질의 운동이 아니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박 정권은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 제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는 이른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었는데, 박정희는 이 긴급조치라는 전가의 보도를 빼든 것이다."(121-3)


"(대학생 총궐기가 일어난) 4월 3일 밤 10시,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온 박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는데, 이는 민청학련 관련자 처벌을 주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긴급조치 4호는 문교부 장관에게 학생들이 반체제운동을 계속하면 대학을 폐교시킬 수 있는 권한마저 부여했으며, 심지어 학생의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 거부 행위'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도 선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130) "핵심 주동자인 이철이 체포된 다음 날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을 적발하였다〉고 주장했다. 민청학련은 학생들이 유인물에 편의상 붙인 호칭이었는데도, 중앙정보부는 이를 폭력으로 정부 전복을 노린 전국적인 불순 학생조직인 양 거창하게 부풀려서 발표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만들어내는 낯익은 용공 조작 수법을 되풀이했다."(132)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서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도 1천2백4명에 달했으며, 피고인들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나병식, 윤한봉, 정상복, 안양로, 이근성, 김영일(김지하), 류근일, 김병곤 등 기독청년 및 학생운동권 핵심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약 3개월 후 군법회의는 1백80명의 피고인 중에서 14명에 사형, 13명에 무기징역, 그리고 28명에는 15년에서 20년을 구형했다. 당시 선고는 구형한 그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변호사 한승헌은 그러한 재판에 대해서 '자판기 판결' 또는 '정찰제 판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기소자들의 선고형량 합계가 1천6백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는 세계 사법사에도 전무후무한 기록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아울러 또 하나의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는데, 변호사 강신옥이 법정에서 변론 도중 끌려나가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133-4)


1974년 8월 15일에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8월 21일,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었다." "(박정희에게 신앙과도 같은 충성심을 지녔던) 차지철은 경호실 차장 밑에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새로 만들어 현역 장성들을 데려다 앉혔으며, 청와대 내외 경호병력인 수경사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대대급에서 연대급으로 격상시켰다. 또 경호실 요원의 복장을 히틀러의 SS친위대 복장처럼 변경시켰다. 더욱 놀라운 건, '경호목적상 필요한 경우 수경사를 지휘할 수 있다'는 대통령령을 제정하여 민간인 경호실장이 군 지휘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었다. 전임 경호실장 박종규는 대통령의 '신변 경호' 뿐만 아니라 '심기 경호'를 내세웠는데, 차지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위(保衛) 경호'라는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152-3)


"또 차지철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대통령 경호위원회'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기까지 했다." "차지철이 친 '인의 장막'은 그 누구도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장관도 차지철이 허락하지 않으면 박정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장관들에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를 꼭 하루 전에 자기 방에 갖다 놓도록 요구했다. 그는 〈일본 명치유신 때 어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귀퉁이에 독약을 발라 놓은 일이 있었다〉라는 이유를 댔지만, 그 핑계를 대고 정보를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 1976년 12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유로 장관의 정강이를 발로 차는 차지철과 명색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상호 충돌은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에 따른 '정보 전쟁'과 그 여파는 박정희 유일체제를 용납한 한국 사회의 비극이었다."(156-7)


"박 정권은 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앞장서는 『동아일보』에 대해 집중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12월 16일에 시작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었다. 이는 박정희의 〈『동아일보』를 혼내 주라〉는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획책한 것이었다. 박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1975년 1월 23일까지 『동아일보』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광고탄압을 주도한 중앙정보부 뒤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당시 대미 로비스트 김한조는 미국의 반응이 나쁘므로 광고탄압을 중단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지만, 박정희는 듣지 않았다." "그 대신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쇄도하여 『동아일보』 광고면은 한동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 같은 국민들의 격려문으로 채워졌다."(182-3)


6장 폭력과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 1975년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은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새벽 6시에 사형을 집행했으니 상고가 기각된 지 채 하루도 안 된 20시간만이었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흥선, 이수병, 하재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중형 선고를 받은 학생들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니, 이는 당시의 법이라는 건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의 기분 내키는 대로였다는 걸 의미한다. 김삼웅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긴급조치 4호를 통해 반체제적인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라고 판단한 교수, 종교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조작이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안 사건을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학생 시위가 북한측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선전하여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227-8)


"4월 30일 패망한 베트남은 한국에게 무엇이었을까? 베트남 특수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파병 군인들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 군인들은 지금까지도 고엽제 피해와 다른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정부는 그간 그들을 외면해왔다. 또다른 문제도 있다. 문부식은 베트남전쟁과 광주민중항쟁이 무관치 않다며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끔찍한 폭력을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참전 용사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그들의 부모 형제가 사는 한국 사회의 농촌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한국인들이 그야말로 고루고루 '달러의 맛'을 본 시기가 그때이다. 그것을 대가로 한국인들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되어도 된다는 윤리적 감각의 황폐화, 말하자면 '성장의 열매'와 폭력이 공존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249)


"5월 13일에 공표된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였다.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 금지〉 등도 당연히 따라 붙었다." "변호사 이정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하여 긴급조치 9호! 산천이 떠는 법률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권자이고 헌법 재정 권력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이라고 입만 벙긋해도 긴급조치 9호의 올가미가 다가오고 있었고, '헌법'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유인물만 들고 다녀도 수사기관에 불려가야 했다. ····· 망치질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제3의 쿠데타임과 동시에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1974년 1월 8일에 나온 긴급조치 1호 이래로 그간 공표된 긴급조치의 모든 반민주성을 포괄한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었다. 긴급조치는 한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9호는 햇수로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250-2)


"1975년 7월 8일 사회안전법, 민방위기본법, 방위세법, 교육관계법 개정안 등 소위 '4대 전시입법'이 발표되었고, 7월 16일 국회 회기 만료 직전에 휴회 선언을 틈타 새벽 3시에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사회안전법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에 대해 출옥 후에도 보안처분을 하도록 규정하였고, 보안처분은 2년 단위로 무제한 연장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방위법은 '베트남 사태'를 계기로 안보 위기 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제정된 것으로 17~50세의 남자를 대상으로 준군사적인 민방위대를 조직하도록 규정하였다. 교육관계법 개정안은 교수 재임용제의 신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법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병영 체제화를 위한 것이었다." "1971년 4월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복역 기간 중인 1975년에 제정된 바로 이 사회안전법에 소급 적용당하여 모두 4차례에 걸친 보호감호 처분으로 계속 감옥살이를 하였다."(261-3)


"4·19 이후 폐기되었던 이승만 시기 어용의 대명사인 학도호국단이 이름 하나 바뀌지 않은 채 25년 만에 다시 등장하였다. 학도호국단 창설 설치령은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이 있은 후 5월 2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고, 그 결과 9월 2일 중앙학도호국단이 발단하였다." "그 시절 학도호국단을 직접 겪은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일주일씩 경주 화랑 수련원에 보냈는데, 일정에는 매일 한두 시간씩 박정희 전 대통령 어록을 들으며 명상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정신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일주일 후 퇴교할 때에는 정말로 애국심에 불타 올라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 부르면서 감격에 겨워 엉엉 울면서 나오게 만들었다. 나치 치하 독일이나 북한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 대한민국이 이야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랐던 청년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으니, 그에게 당시의 청년문화는 사회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2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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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9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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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시에 빨려 들어가는 농촌 / 1970년


"박정희는 1970년 여름까지만 해도 교련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학생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그들의 주장을 듣기도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학생들이 불의를 보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해 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을 바꾼다." "게다가 박정희는 한국인의 민족성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일제의 식민통치 선전술을 그대로 신봉한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결코 민족주의자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5천 년을 전면 부정한 후에 남을 수 있는 '민족'이란 게 과연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만이 5천 년의 역사를 개신(改新)할 수 있다는 '자기주의자'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는 점점 더 민주주의를 낭비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이런 생각은 1971년 대선 이후 더욱 심해졌다. 그는 '건설적인 토론과 경쟁' 대신 '억압적인 지시와 응징'이 자신의 종교라 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훨씬 더 적합하다는 빠져들게 되었다."(21-3)


"수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구호가 말해 주듯이, 오직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수출 경쟁력은 싼 노동력이었다. 군인이 돈 받고 일하는가? 아니다. 군인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군인들과 동일시된 수출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성한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해야만 했다." "반면 수출 전사 지휘관들이 받은 특혜는 엄청난 것이었다. 일반 대출 이자율이 25%를 할 때에도 수출 특융 이자율은 6%에 불과했고, 수출용 원자재 수입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했고, 수출 소득에 대해서도 소득세를 80%나 감면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해외여행도 수출 전사 지휘관들에겐 예외였다. 어디 그뿐인가. 수출 전사 지휘관들은 밀수를 저질러도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수출에 지장을 줄 것 같으면 박정희는 검찰에 수사 중단 지시를 내리곤 했다. 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출 전시(戰時) 상황이었기 때문이다."(24-5)


"(경제개발의 가시적인 성과 중에서도)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가장 드라마틱한 성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부고속도로는 〈가슴이 뛸 정도로 흥분되는 민족사적 금자탑〉으로 다가왔다. 박정희가 7월 7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 작품〉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66)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일본의 동명고속도로 건설비의 8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건설공사라기보다는 군사작전이었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의 경제 브레인 오원철이 고속도로 건설 동기, 추진 방법, 공사 방식이 모두 군대식이었다고 말한 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도 〈박 대통령이 현장을 돌며 마치 전쟁처럼 지휘한 것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박 대통령은 선전을 포고하고 전략을 세웠으며 직접 전투병사들을 지휘했다〉고 말한다."(69-70)


"고속도로는 농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속도로 개통 이전만 해도 농촌 인심은 매우 순박했다. 사실 바로 그 덕분에 고속도로 용지도 평당 평균 236원(당시 담배 한 갑에 40원)이라는 헐값에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속도로 개통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1967년 12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고, 뒤이어 1970년 1월 서울의 강남개발계획 발표 이후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려 수도권 토지는 '돈 놓고 돈 먹기판'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런 투기 열풍이 농촌까지 파고 들어간 것이다. 고속도로 건설은 땅값에 영향을 미쳐 영농의 영세화를 초래하고 농민들의 주거지 상실로 인한 이촌 현상을 유발시켰다. 게다가 고속도로 건설회사가 주변의 젊은 청년들을 고용함으로써 영농 의욕 감퇴와 노동력 부족 현상을 야기시켰다. 급속하게 진행된 고속도로 주변의 지붕개량 사업은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고 정부에 대한 반발 의식까지 자아내게 만들었다."(74-5)


"7월 6일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 방침을 한국 정부에 통고했다. 8월 24일 내한한 미국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는 1년 후인 1971년 6월 말까지 철수 방침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 5년 이내에 나머지 주한미군도 완전히 철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택한 것은 '자력 방위'였다. 박정희는 이미 1970년 1월 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1970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정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연 3년에 걸쳐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이라는 국정지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북한과의 대결에서 시간을 벌고 (1971년 대선에서 높은 통일 여론을 지지표로 연결하려는) 목적으로 8월 15일, 광복절 25주년 기념사에서 북한이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과 '선의의 경제 경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그간의 입장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북한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87-8)


"전태일의 분신은 지식인들의 양심을 강타했다. 이광일은 전태일의 자살이 〈이제까지 대중의 가슴속에 '위대한 작가' 또는 '보편적 지식의 소유자'로 새겨져 있던 지식인에 대한 관념을 뒤흔든 계기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11월 21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전태일 사건과 관련하여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를 '정치 문제화'하였다. 11월 22일 새문안교회 대학생부 학생 40여 명은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와 그 공모자인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는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박정희는 1971년 1월 17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노동 문제를 거론하였으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공약으로 내놓았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 사건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04-5)


"1970년 12월 10일엔 대통령 특별보좌관 제도가 발족되었다. 이 제도도 대학교수 등과 같은 지식인 영입의 창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20세기 초반 한국 철학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어 온 박종홍이었다. 박종홍은 이미 5·16 쿠데타 직후부터 쿠데타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사회분과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군사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지만, 그의 특별보좌관직 수락은 이제 한 발이 아닌 두 발을 다 군사정권에 들이밀겠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당시 〈한국 지식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박종홍은 1971년 1월 1일자 일기에서 〈나는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 왔다. 왜 스스로 실천을 못하고 진리라면서 그 실천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참으로 교육자라면 스스로 실천해 보여야 할 것이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은 진리뿐이다. 나는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몸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고 썼다."(111-3)


2장 박정희 1인 체제의 완성 / 1971년


"4·27 선거가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인 4월 18일 '선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왔다는 혐의로 재일교포 대학생 서승, 서준식 형제 등 '간첩' 10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준식은 7년 형을, 서승은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서승이 10개월 가량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 공산혁명 기도, 김대중과의 관계를 자백하라고 서승을 포함한 다른 관련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129-30) "물론 그 사건은 철저히 조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들 형제의 북한 여행을 간첩 행위로 연관시키며 한 편의 무서운 음모극을 연출했다.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박정희 후보가 질 경우 서승 사건과 연계시켜 선거 자체를 뒤엎어 버리려는 전략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이 그런 식으로 죽어 갔던 것 아닌가.〉"(132)


"박정희는 4·27 대선에서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약한 우리 국민의 심성을 파고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다. 김대중이 4월 17일 전주 유세부터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라고 폭로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그에 대항할 필요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조선일보』에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 초기부터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의 집을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질 만큼 『조선일보』와는 가까웠는데,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상부상조 관계는 70년대 내내 지속된다." "4월 25일 서울 유세에서 박정희는 눈물까지 흘리며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호소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대중의 폭로 그대로 박정희는 이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유신으로 국민의 투표권을 아예 박탈해 버렸으니 말이다."(139-40)


"곧이어 치러진 5·25 총선에서는 153개 지역구에서 공화당 86명, 신민당 65명이 당선되었고, 전국구를 합친 의석 수는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이 되었다. 공화당 현역 의원 26명이 무더기로 낙선한데다 공화당은 서울의 17개 지역에서 단 1석만을 건졌고, 제7대 국회 때보다 야당 의석이 2배로 늘어나, 5·25 총선 결과는 〈당시의 형편으로 미루어선 야당의 실질적인 대승〉으로 간주되었다. 이 선거 결과를 1년 5개월 후에 나타난 유신체제와 연계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정치학자 김세중의 주장이다. 〈1971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3분의 2 의석 확보에 실패한 박정희는 헌법개정이라는 법 절차를 밟아 장기집권을 모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는 비상계엄의 선포 아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식의 비상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신체제 도입의 권력정치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147)


"신민당은 9월 30일 '실미도 특수군 난동, 광주단지 시위, 한진빌딩 난동, 기동경찰 총기 난사, 무장공비 마을 점거, 독침간첩 자살 등 흐뜨러진 치안에 대한 문책'을 이유로 내무부 장관 오치성 해임건의안을 발의하였다." "찬성에 표를 던진 공화당 표가 20표 넘게 나와 해임결의안이 통과되자 박정희는 자신의 지시를 거부한 일부 공화당 의원의 항명에 격노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항명 주동자를 색출해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다음 날 23명의 공화당 의원이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극심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강제 탈당 당하고 국회의원직마저 박탈된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치적으로 모든 걸 잃고 한동안 미국으로 유랑 생활을 떠났으며, 공화당 지도부는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박정희 친정체제가 강화되었다. 공화당은 이후 박정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청와대에 종속되었다."(183-4)


# 10·2 항명 사건 : 김종필 견제용으로 박정희가 구축해놓은 공화당 4인(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체제 붕괴


"10월 12일에는 국방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의 공동 명의로 교련거부학생 전원을 징집한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다. 학원자유화를 외치던 학생들은 부정부패자 공개를 요구하면서 군인들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였으며, 중앙정보부 철폐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는 박 정권의 최대 약점들을 건드린 것이었다. 이에 박 정권은 '10·15 위수령' 발표로 대응하였다. 10월 15일 박정희는 특별법령 9개항을 발표하면서 서울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을 내렸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에는 위수군이 진주하면서 1천8백89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이어 전국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이 제적되어 그 중 대부분이 강제 징집되었으며 군대에서도 끊임없는 보안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0월 16일에는 고려대 무장군인 난입에 항의하는 '지식인 64인 선언'이 나왔고, 이로 인해 리영희, 천관우 등 언론인들이 언론계에서 쫓겨났다."(189-90)


3장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 / 1972년


"1972년 7월 4일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전 국민을 통일 열기에 들뜨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합의했다는 남북공동성명은 첫째로 민족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둘째는 통일은 무력 행사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해야 하고, 셋째는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무엇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즉, 평화통일의 3대 원칙으로서 자주·평화·대단결을 내걸었던 것이다."(211-2) "7·4 남북공동성명은 나중에 남북 양쪽에서 동시에 일어난 체제상의 대변화로 인해 '정치적 쇼'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그런 문제들을 떠나서도 그 기본 정신이 관련 사안에서마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유럽거점 간첩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김규남을 비롯하여 각종 간첩 혐의로 복역중인 30여 명의 사상범들이 남북공동성명 직후에 전부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215)


"70년대 초, 박정희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한국 경제는 엉망이었다. 외국 차관을 가져다 쓴 기업체들이 대규모로 부실 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1969년 5월, 83개 업체 중 45%가 부실 기업체로 분류되었다. 부실 기업들은 더욱 사채에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금융 부담이 가중되어 부실화되는 악순환의 덫에 갇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사채를 동결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기업들이 쓰는 돈의 30%가 사채였는데, 금리가 연리 30% 이상이었다." "이른바 '8·3 긴급경제조치'의 주요 내용은 8월 9일까지 신고된 기업보유 사채는 앞으로 3년간 갚지 않고(3년 거치) 그 후 5년간 월리 1.35%(연리 16.2%)로 분할 상환토록 하며, 정부가 2천억 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 고리의 대출금 중 30%를 연리 8%,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대환해 준다는 것 등이었다." "'8·3 긴급경제조치'로 사채 전주 노릇을 하던 5·16 주체들의 부정축재 규모가 꼬리를 잡히기도 했다."(217-8)


"1972년 10월 17일 중앙청 앞에 탱크가 등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7·4 남북공동성명'으로 국민의 통일 열기를 한껏 고조시킨 뒤, 그로부터 3개월여 후인 10월 17일, 통일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대통령 종신제를 보장하기 위한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언하였다. 박정희가 보기에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건 북한 공산당이나 할 짓이었기 때문에, 반대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문으로 '빨갱이'라고 실토케 한 다음 죽이거나 오랫동안 감독에 가둬야 마땅했다."(222) "10월 17일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국회를 강제 해산했고 정당과 정치 활동도 금지되었다. 헌법 기능은 정지되었고 그 권한은 박정희가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비상국무회의가 가져갔다. 쉽게 말해, 박정희 개인이 곧 법이요 진리인 그런 철권통치 체제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물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았으며 대학은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224)


"박 정권은 10월 27일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표했는데, 이 헌법 개정안은 11월 21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으나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고, 각급 법관에 대한 임명권을 모조리 대통령에게 귀속시켜 사법부까지 행정부에 종속시켰다. 국회의원 선출은 임기 6년에 전국 73개 지역구에서 1구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동반 당선' 또는 '나눠먹기식' 제도였다. 또 제6대 국회부터 채택한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국회의원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을 일괄 선출하는 제도(유신정우회)가 도입되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임명하는 새로운 전국구 제도였던 것이다."(230-3)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승인을 확대한) 김일성은 대내적으로 더욱 큰 것을 얻었다. 김일성 1인 지배체제 및 세습을 강화한 것이다." "북한도 북한식 '10월 유신'을 꿈꾸었으며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거의 동시에 그걸 해치웠다. 북한은 '10월 유신'이 있은 지 2개월여 후인 12월 27일, 1948년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새로 만들어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새 헌법은 집단 지도체제에서 후퇴하는 것과 기존의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강화하였다. 즉, 〈헌법에 내놓고 김일성 1인의 절대적 독재체제를 보장〉한 것이다. 김일성은 그러한 체제 구축의 다음 수순으로 1973년 9월 김정일을 조선노동당의 최고 권력기관인 비서국의 비서로 격상시켰다. 1970년 발행된 『정치용어사전』은 '세습적 계승'을 '착취사회의 반동적 관행'이라고 비난했으나, 1973년 12월에 대체 출판된 『정치사전』은 이 항목을 삭제했다."(238-9)


"유신헌법안 기초에 참여한 중앙대 교수 갈봉근은 『신동아』 기고 글에서 '권력의 인격화'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권력의 인격화 현상이 정치적 후진국가권에 속하는 국가군에 있어서는 발전의 첫 단계가 될 뿐만 아니라 통합과 통치의 최적 수단〉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권력의 인격화 현상은 실은 보편적이며 정상적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은 세계 도처에서 모든 정치체제에 확대 편재하고 있다. 오히려 권력이 비인격화될 때가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번 유신헌법안의 특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가와 민족의 번영 및 안정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프랑스의 영광된 회복을 위하여 제정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이 드골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의 구현이었다는 점과 비길 수 있을 것이다.〉"(245-6)


"박정희가 생각한 새마을운동은 일종의 '민족성 개조운동'이었다. 그의 새마을 관련 담론에는 반드시 '근면·자조·협동'이 들어간다. 이는 박정희가 보기에 한국인, 특히 농민들에게 그게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박정희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1971년은 바로 우리가 자조와 근면과 협동의 정신을 전국의 마을마다 번지게 만든 획기적인 한 해였다. 긴 겨울철의 농한기에 아무 하는 일 없이 나태와 안일에 빠져 음주나 도박으로 소일하는 퇴폐적인 풍조를 없애기 위해, 대대적인 환경개선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렇듯 인간성 개조를 꿈꾼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공화당의 산하 운동쯤으로 만드는 걸 어찌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박 정권의 외무장관을 지낸 이동원도 〈이렇게 게으르고 단결심이 없어서야 어찌 일본을 이기겠소〉라는 박정희의 말이 〈소위 '새마을운동'으로 불리는 민족성 개조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265)


"박정희는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생각〉하고 이순신 숭배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극성스러운 성웅 만들기 작업에 대해 최상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순신은 욕망도 야망도 없다. 나라사랑만 있을 뿐이다. 민족반역자도 독재자도 욕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이든 대한제국이든 국가라면 무조건 받들 뿐이다. 빨갱이로 집어넣고 고문을 해도 '아야' 소리도 안 낸다. 묵묵히 백의종군을 다짐할 뿐이다. 이 사람이 바로 민족반역자들이 발명한 성웅, 일명 '바보 이순신'이다. ····· 성웅은 머릿속에 '나'는 없고 '국가'만 있는 인간상이다. '나'를 잃어버린 존재다. 이런 성웅의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다. 즉 '성웅=멸사봉공 정신'이다. 멸사봉공, 박정희는 이 말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는 1939년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충성 혈서'에도 이 구절을 빠뜨리지 않았다.〉"(273-4)


"한국노총은 1970년 1월 30일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선언하였다. 원칙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오직 여당에만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은 1971년 국가보위법 선포 직후 국가비상사태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으며, 국가비상사태에서 정권이 내건 총화단결 등과 같은 슬로건에 호응하여 모든 노동자들이 따라야 할 행동지침까지 선포하였다. 또 그 해에 노총위원장 최용수는 직능대표로서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였다." "10월 유신 선포 후에는 〈구국통일을 위한 영단을 적극 지지한다〉는 제하의 성명을 내고 산별 노조별로 계몽유세반을 편성하여 유신체제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전국 유세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유세 활동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노총 사업보고에 따르면, 1971년 1천6백56건에 달했던 노사분규 발생 건수는 1972년 346건, 1973년 367건으로 감소하였다."(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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