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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평점 :
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 했나? / 1980년
"1980년대의 한국에서 '중산층'의 체제친화적인 보수성에 심리적 면죄부로 작용한 건 바로 '86·88'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담론이었다. 물론 87년 6월항쟁이 잘 보여주었듯이, '중산층'이 독재체제에 대해 무한대의 친화성과 인내심을 발휘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몸에 밴 부정부패와의 친화성이 '하층'에까지 전염된 탓에 한국인들은 '이기적 탐욕'을 자극하는 선전·선동에 매우 취약하였던 바, 바로 이 지점을 독재체제의 지역분열주의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6·25 시절 자동차에 탄 미군에게 껌과 초콜릿을 구걸했던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팔아먹었다는 건 (정주영을 민중의 영웅으로 추켜세운) 김동길을 포함한 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살 떨리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광주'는 잊혀졌으면 하고 바라는 '과거지향적 갈등'이었을 뿐이고, 88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영광은 '미래지향적 비전'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23-4)
"신군부가 시도한 대대적인 여론조작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은 12·12쿠데타세력과 5·16쿠데타세력의 차이점이다. 12·12쿠데타는 5·16쿠데타로부터 18년이나 지난 시점에 일어났다. 18년 동안에 많은 변화를 겪은 한국인들이 또다시 일개 육군 소장이 집권하는 걸 반길 리는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처럼 국민이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어서 경제성장이라는 '기능적 필수조건'이 다른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던 사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군부에겐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치밀한 '음모와 공작'이 필요했다." "전두환의 부하들은 전두환의 리더십을 미화하지만, 과거 그 어떤 군인도 전두환만큼 사조직 결성과 유지에 공을 들이진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곧이어 발생할 '광주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도 바로 그런 사조직의 기이한 단결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55-6)
"신군부가 추진한 '음모와 공작'의 핵심은 여론조작이었다." "(언론이 자신들의 '애완견이자 보호견'이 되어주길 원했던) 신군부는 이미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보안사 언론대책반을 통해 이른바 'K(king)공작'을 입안하였다. 'K-공작'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여론조작 방안으로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과 허화평 사령관비서실장 등 이른바 전두환그룹의 '5인방'이 주도하였다. K-공작의 큰 시나리오는 3김을 민주정치세력,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하여 '선안정 이론'을 확산시키고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협조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한다는 두 가지로 구성돼 있었다. 이에 따라 보안사팀은 연일 계속되던 대학생 시위와 노동쟁의를 '혼란'으로 몰아붙였으며 3김의 대결양상을 '구태의연한 정치작태'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비춰지도록 언론 논조를 유도하였다."(57-8)
"당시의 유화 국면 속에서 언론 검열은 완화되기 시작했고, 휴교령이 내려졌던 대학도 3월 1일을 기해 다시 문을 열었다. 박정희 시절 축출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으며, 학생들에게는 거리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학내에서의 비폭력 시위와 자치권 일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권력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80년 2월부터 특전사는 '충정명령'이라는 강력한 폭동진압 훈련에 돌입했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이건 '인간폭탄 만들기' 훈련이었다. 영외 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외출과 외박이 전면금지된 상황에서 전 장병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가혹한 지옥훈련을 받으면서 까닭 모를 적개심과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다. 병행된 정신교육 훈련은 장병들이 그래야만할 이유를 제공했다. 그 주요 내용은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64)
"계엄사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 10호에 의거해 18일 새벽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었고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8일 새벽 2시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사실상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전두환은 미리 준비한 치밀한 전국계엄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보안사령부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이전인 16일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해, 17일 24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할 블랙리스트 8백여 명을 통보했다. 5월 17일 수배령이 떨어진 사람 가운데 6백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문과 방송은 수배자들의 명단과 죄목을 경쟁하듯 쏟아냈다.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조작을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들에게는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김대중과의 관계를 대라면서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115-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과 관련해 손호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두 야당지도자 중 김영삼 신민당 당수는 구속 대상에 제외됐고 김대중만이 구속됐다는 사실이다. 신군부는 정권장악의 마지막 장애물인 민중세력을 공격, 세칭 '시민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민주화진영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이를 위해 재야 민중세력과 좀더 직접적인 연계를 유지해왔고 박정희정권의 오랜 정치공작에 따라 '급진적' 이미지가 국민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으며 지역기반 역시 소외된 호남인 김대중을 내란혐의의 구속대상으로 삼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신군부는 광주·호남민들의 강한 반발이라는 효과를 초래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의 역사를 내다보고 말한다면, 신군부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행위는 바로 이처럼 지역분열주의 공작을 펼쳤다는 점이었다."(118-9)
"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쥐죽은듯 조용해졌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을 광주로 내려보냈다. 이른바 '충정훈련'으로 이미 '인간폭탄'이 돼 있는 병력이었다. 5월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병력 1천여 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그러나 그 '휴가'는 차마 필설로 다하기 힘든 '인간사냥'을 위한 것이었다."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백여 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오후 3시에는 공용터미널에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120-3)
"신군부는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인 후에 그 진실을 은페하기 위한 공작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시도된 건 붙잡힌 광주시민군들을 '비열한 짐승'으로 만들어 그들의 저항의지, 아니 복수욕을 완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최정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엄사는 27일 새벽, 투항한 시민군들을 체포하여 버스 4대에 실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끌고 가는 과정이나 그곳에서 계엄사가 시도한 일은, 모진 구타와 고문 그리고 배고픔으로 시민들이 투사가 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생명을 구걸하게 하는 비열한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적은 양의 식사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은 먹이를 구하는 동물에 불과하다는 자기확신을 심으려 했고 살인적인 구타는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신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연출한 '지상의 지옥'이야말로 광주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행위였다."(177-8)
"광주학살 후,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국방정보국이 작성한 1980년 6월 25일자 비밀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두환은 정부조사관들에게 학생이나 민간인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필름)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음. 이 사진을 구하려는 것은 『타임』, 『뉴스위크』 등 외신이, 저항하는 민간인에 대해 군인들(대부분 특전사 병력)이 잔혹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도한 것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임. 또한 그러한 물증은 반정부활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음.〉" "광주의 진실에 대해 티끌만큼이라도 말하는 건 모두 유언비어 유포로 체포되었고, 모든 사람은 오직 신군부의 발표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어야만 했다. 출판물 탄압은 80년대 내내 상시적으로 자행되었다. 5공은 분서갱유라 해도 좋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에 억압적인 족쇄를 채움으로써 국민이 광주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끔 하였다."(181)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열성을 다했듯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만들기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KBS는 8월 2일 『김대중과 한민통』이라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내보냈는데, 이 프로그램은 김대중을 거의 간첩 수준으로 묘사했다. 차라리 간첩 수준이기만 했더라면 좋았겠지만(나중에 진실규명이 될 수 있으므로) 그것만도 아니었다.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인간이며 이중인격자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하였다. 방송에 뒤질 신문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와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경향신문』의 9월 11일자 특집기사는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변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당시 모든 언론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조작에 혈안이 돼 있었다."(208-9)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 단일후보를 총투표자 2525명 중 2524표의 찬성과 1표의 무효표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전두환은 9월 1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했는데, 이는 12·12 쿠데타 이후 164일 만의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였던 것이다. 대통령 전두환은 9월 29일 개헌심사위원회를 통해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의 7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공고했고, 10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 새 헌법안은 한국 투표사상 최고인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률을 기록하면서 10월 27일 공포되었다." "제8차 개정헌법에 따라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했고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은 모두 전두환이 임명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11대 국회가 개원하기까지 156일 동안 215건의 안건을 접수하여 100% 가결했다."(233-6)
"1980년 신군부가 일련의 가혹한 조치들을 통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정도를 넘어서 수족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건, 5공의 '파시즘 체제'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어준 효과를 내게 되었다는 걸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70년대를 겪은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탄압하는 권력, 탄압받는 언론'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들어 신군부가 언론장악을 위해 저지른 일련의 조치들도 국민의 눈에는 '탄압받는 언론'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물론 국민들은 언론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보도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식이 곧 신군부와 언론의 유착관계에 대한 인식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간 건 아니었다." "언론이 사실상 5공 파시즘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여론조작을 왕성하게 전개하면서 최소한 국민의 '수동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에 5공 파시즘의 작동 방식이 비교적 부드러울 수 있었던 것이다."(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