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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평점 :
7장 히스테리와 광기 속에서 / 1976년
"긴급조치 9호 발표가 있은 지 9개월여 후인 1976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민주화 진영의 큰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또는 '명동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언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3·1 기념 미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3 ·1 민주구국선언’의 초안은 김대중이 작성했다. 김대중은 그 이전 명동성당에서 추기경 김수환을 만나 〈내가 투옥되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주고 싶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지기엔 세상은 너무 얼어붙어 있었다. 3월 5일 문공장관 김성진은 이 선언에 대해 〈헌법질서를 파괴하려는 비합법 활동〉이라고 주장했으며, 서울지검은 '정부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 여당의 '전가의 보도'는 여전히 월남 패망이었다. 3월 17일 신민당 의원 한병채가 명동 사건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공화당 의원 홍병철은 〈한 의원을 월남으로 보내라〉라고 야유했다."(25-8)
"1975년 5월 21일 박정희와 회담한 이후 변질된 김영삼의 행보는 민주화운동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만 아니라 신민당의 내분을 몰고 왔다. 1976년 5월 25일에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가 〈우리 야당사에서 가장 추악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당시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는 박 정권의 공작정치가 개입된 탓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과 신민당이 면책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5·25 전당대회를 전후하여 김영삼 등의 주류에 도전하는 비주류는 이철승, 고흥문, 신도환, 정해영, 김원만, 정운갑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75년의 '박-김 회담 의혹', '김옥선 파동 때의 굴복' 등을 걸고 넘어졌다. 비주류는 당헌을 고쳐 집단체제로 가자고 주장했고, 김영삼은 단일지도체제를 고수하겠다며 파벌 세력 강화로 맞섰다. 이런 갈등은 결국 수백 명의 주먹 부대와 각목이 난무하는 폭력 충돌로 이어졌다."(32-3)
# 각 파가 전당대회를 따로 개최하여 주류의 김영삼과 비주류의 김원만이 각각 선거관리위원회에 당 대표 등록을 신청했지만 모두 각하되고, 김영삼은 총재 지위가 6월 9일자로 소멸되자 6월 11일에 사퇴함. 9월 15일에 전당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이철승 389 대 김영삼 364로 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선출
"1976년 10월 24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정부의 기관 요원인 박동선 씨가 1970년대 연간 50만 내지 1백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 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한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에게 수백만 달러 뇌물 제공'이라는 톱기사 제목과 함께 무려 10면에 걸쳐 내보냈다."(61) "이 사건은 비단 미국의 정·관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박동선은 한국 권부와 유착, 미국의 쌀 수입 중개권을 획득해 커미션을 챙기는 방법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고, 그 돈 가운데 일부는 미국 정계뿐만 아니라 박 정권의 정치자금으로도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막대한 액수의 돈이 박 정권에 흘러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박동선이 미시시피나 루이지애나 같은 쌀 생산 주 출신 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결과) 한국은 비싼 값으로 쌀과 다른 작물을 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한국 내의 부정부패 차원에서도 깊이 살펴봐야 할 사안이었다."(63-4)
8장 '1백억 달러'의 빛과 그림자 / 1977년
"1977년 1월 20일 '인권대통령'을 표방한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이후 코리아게이트 파문은 더욱 확대되었다." "2월부터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 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미 선거 공약에서 인권·도덕 외교와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었던 카터는 3월 10일 한국 정부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11월에는 중앙정보부 워싱턴 실무책임자인 참사관 김상근이 망명을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이미 미국에 망명해 있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있었다. 김상근 망명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그 해 12월 4일 해직되고 그 후임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프레이저 위원회는 37명의 증인을 출석시킨 가운데 20여 회의 청문회를 열었는데, 이 청문회의 핵심은 김형욱과 김상근의 증언이었다. 김형욱과 김상근은 6월 10일까지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박정희의 가슴에 통한의 못질'을 하는 증언을 하였다."(69-70)
4월 19일에 일어난 '백지 팸플릿' 사건은 1977년의 얼어붙은 정국을 잘 보여준다. "사건 내용은 간단하다. 4·19를 맞아 연세대 몇몇 학생들이 그날 백지를 돌렸을 뿐이다. 굳이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을 만큼 박 정권의 광기는 극을 치닫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지 성명서는 각자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백지를 돌린 지 채 1분도 안 되어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에선 그 흰 백지에 뭐가 들었나 싶어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백지를 마이크로필름쯤으로 아는 그 멍청이들의 눈에 그런다고 뭐가 보일 리가 있을까. 죄목은 씌워야겠고, 찾아낸 물증은 없고, 궁지에 몰린 멍청이들이 생각해낸 죄목은 참으로 기발하다. 이름하여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 결국 이 해괴망칙한 죄목에 걸린 4명 중 김철기 씨는 제적되고 나머지는 정학을 맞았다.〉"(96)
"박정희가 농촌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가 하는 증언은 무수히 많다. 그는 생각뿐만 아니라 직접 몸으로도 보여 주었다. 그는 농민들의 술인 막걸리를 좋아했고 자주 농민들과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혹자는 그게 다 '이미지 조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원초적인 농촌 사랑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의 농촌 및 농촌 사랑은 직접적이었으나 심리적이고 지엽적이었던 것임에 반해, 농촌과 농민에게 가해진 불이익은 간접적이었으나 사회적이고 구조적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흑백 TV도 제대로 못 보는) 가난한 농민을 위해 컬러 TV 방영을 할 수 없다는 박정희가 그 가난한 농민들의 자식들이 도시의 공장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는 것에 대해선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그들을 빨갱이로 모는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러한 이중성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109)
9장 동일방직과 현대아파트 / 1978년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은 주로 중소기업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박 정권의 폭압적인 노동 통제, 한국노총의 어용화, 상대적 임금 우위 등의 이유로 대기업에선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임금인상이나 부당해고 반대,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노조결성과 활동보장 등을 내걸고 싸웠는데, 운동이 크게 일어난 기업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인간적 모독이 투쟁의 주된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절대 빈곤하에서도 인권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박 정권하에서의 인권운동은 불가피하게 반독재투쟁의 성격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가공할 정권의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노조운동에 가장 큰 힘을 보태준 건 종교단체들이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도시산업선교회의 역할이 지대했다. 박 정권을 비롯하여 민주노조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이 도시산업선교회를 그대로 놔둘 리 만무했다."(134-5)
"동일방직은 전체 1천3백 명의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는데,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어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수준의 노조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자지부장을 선출해 모범적인 민주노조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회사는 1975년 말부터 남자 대의원들을 동원하여 어용노조화를 시도하였다. 회사 측의 공작에 대해 정현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 공원들이 대부분인 공장에서도 현장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남자이고, 여자들의 의견은 참고조차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을 경우에도 초기에는 대부분의 간부직은 남성들에 의해 독차지되기가 일쑤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깨뜨리려고 하는 기업주들은 노동조합의 힘의 원천이 남자 노동자라는 판단 아래 남자 분회 간부를 매수하는데, 이는 상당한 정도로 성공하여 그들은 주로 노동조합 파괴에 앞장서게 된다.〉"(148-9)
"4월 1일자로 무더기 해고를 당한 1백24 명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전국의 공장에 배포되었다. 이들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박 정권이 그렇게 한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박 정권의 재취업 방해 공작이 잘 말해 주듯이, 〈동일방직 사태는 단순한 노사분규나 노동청에서 말하는 노조 안의 조직분규가 아니라 정부·노총·회사가 합작하여 산업선교와 관련된 민주노동운동을 파괴함으로써 산업선교와 노동운동 모두를 말살하려는 첨예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박 정권의 만행에 대해 언론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156-8)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유신체제라는 거대한 바위에 던져진 한 알의 계란과도 다를 바 없었다. 여성 노동자들을 '공순이'로 조롱하거나 폄하했던 사람들 역시 유신체제의 그런 야만적인 음모극에 조연 역할을 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164)
"박정희 정권은 점점 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와 박정희 이상으로 심한 권력 중독에 빠진 그 주변 충성파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조갑제는 1979년 박 정권의 파국은 이미 1978년에 시작된 것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8년은 긴급조치 9호의 공포에서 벗어난 민주화운동 세력의 저항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했다. 3년 묵은 긴급조치 9호는 그 약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중요 학생 사건 일지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1975년엔 10건, 1976년엔 13건, 1977년엔 23건으로 늘더니 1978년엔 31건으로 급증했다. 1978년의 학생 사건들 가운데 3분의 2는 통일주체대의원 선거와 그들에 의한 대통령 선거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났다.〉 대통령 선거는 1978년 7월 6일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대통령 선거를 (공산국가에서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빗대어) 조롱하는 전단을 찍어 뿌렸다."(175-6)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한 건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통행금지까지 하루 해제하고 고궁을 무료 개방하였으며, 1천3백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취임식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서중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국의 축하사절로는 만주침략의 중심 인물로 전범 A급이었던 전 일본수상 기시가 이끈 일본인 12명뿐이었다. 유신체제의 '원조격'인 대만에서조차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어서인지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외국특별경축사절을 공식 초청하지 않았다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체육관에서 당선된 유신 대통령 취임에 경축사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유신체제로 한국은 따돌림 받았고 한국인 모두는 미개인 취급을 받았다.〉" "김대중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2월 27일 서울대병원에서 가석방되었지만 곧바로 자택 연금을 당했고, 신문 방송은 김대중에 대해 일체 보도를 금지당했다."(179-80)
"투기와 부정부패 열풍 속에서 죽어나는 건 가난한 서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겐 탈출구가 없었다. 저항의 길을 꽉 막혀 있었다. 점점 더 두텁게 형성되어 가고 있던 중산층은 탐욕의 문화에 몸을 내맡겼다. 이와 관련, 김교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 욕구의 충족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찾게 됨에 따라 박정희의 통치는 끝없는 경제과실을 약속해야 했으며, 이를 공급하는 것을 정치의 전부로 생각하게끔 되었다. 여기에 중독되다시피 하여 국민 쪽에서도 한 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은 또다른 경제 욕구를 요구하여 성장정책은 멈출 줄 모르는 직선행을 계속해야 했다. ····· 이 같은 물질적 상승 작용이 몰고 온 국민적 규모의 과열 현상은 마침내 모두가 앞을 다투어 돈을 벌겠다는 배금사상을 초래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기열병으로 말미암아 유신 후반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열병이 뒤범벅이 된 사회 불안과 혼미의 길을 치닫게 되었다.〉"(187)
10장 박정희 시대의 종말 / 1979년
"1979년 4월 16일 중앙정보부는 소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내 불법 용공 비밀서클 결성〉이라는 제목의 반공법 위반 사건이었다. 3월 9일부터 4월 4일까지 중앙정보부에서 관련자들에게 갖은 고문을 해서 조작해낸 이 사건은 박 정권의 말기적 증상을 잘 보여 주었다. (중간에 서서 화해를 모색해보겠다는 이들의 '중간집단운동'에 대해서조차 박 정권은 반공법을 들이밀고 고문을 자행했다.) 1980년 1월 항소심 판결에서 이우재는 징역 및 자격정지 5년, 한명숙은 2년 6월, 장상환은 2년을 선고받았으며, 신인령은 집행유예, 김세균은 선고유예, 황한식과 정창렬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주도했던 목사 강원용도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은 인권침해를 아예 상습화, 생활화하였고, 고문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듯 그것마저 상습화, 생활화하였다."(205-7)
"박 정권의 정보기관들은 정권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는 데에도 치열한 경쟁을 했다. 중앙정보부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한 지 4일 후인 4월 20일, 치안본부는 〈북괴 지령에 따라 통혁당을 재건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결정적 시기에 봉기하여 대한민국을 전복, 적화를 기도해 오던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 임동규 등 7명을 간첩 및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송치했다〉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조사가 착수되어 한 달 후 같은 시기에 대대적으로 발표된 것인데,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은 중앙정보부 작품인 반면, 이 사건은 치안본부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1980년 4월 22일 항소심에서 임동규는 무기(남민전 사건에도 연루), 지정관은 징역 및 자격정지 7년, 양정규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6월, 박현채는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를 받았다."(210-1)
"6월 29일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동경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내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과 7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국제 관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최악의 것이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 대통령이 약속을 깨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들먹이자 다음 날 2차 회담에서는 미국 측이 한국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구속 중인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카터는 준비해 둔 100명의 정치범 구속자 명단까지 내밀면서 벤스 국무장관에게 이를 발표토록 했다. 박 대통령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음은 물론이다.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한국에는 한국식의 인권이 있다'며 카터의 구속자 석방 요구를 '지나친 내정 간섭'이라고 몰아붙였다. 박정희·카터 회담은 결국 참담하게 막을 내렸다.〉"(220-2)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박정희는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백87명이 사기성 폐업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사 4층을 점거하고 벌인 항의 농성 사건도 박정희의 종말을 재촉한 사건이었다."(227)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님의 약값을 벌기 위해 철야작업한다는) 노동자들의 사연은 박 정권의 안중에 없었다. 박 정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오직 정권안보였다. 8월 11일 새벽 2시경 경찰은 이른바 '101호 작전'으로 불리는 농성 진압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그 와중에 YH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박 정권의 폭력에 항의하여 신민당은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카터가 방한한 지 불과 40여일 만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미 국무부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8월 14일 미 국무부는 〈경찰측 행위의 책임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합당한 처벌을 하기 바란다〉라고 논평했고, 8월 15일 박 정권은 〈미국은 명백한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230-1)
"박 정권은 1979년 들어 '성장'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한 방향을 향해 밀어붙이기만 하는 개발독재 성장주의의 부작용과 폐해가 극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는 단호한 의지나 군사작전식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상호는 〈1978년부터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경제위기는 박 정권의 해결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태생적 한계인 정당성의 부재를 보완하기 위해 성장과 수치의 경제에 포박당해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에서 안정화 기조로의 전환은 단순히 관련 장관의 교체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신 선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중화학공업 정책의 전반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신 정권의 물적 토대였던 독점자본의 이해와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이었다.〉"(254-5)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열흘 후에 10·26 사건이 벌어지자)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임명했다. 그러나 실세는 정승화가 아니었다. 10월 27일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에 완전히 접수당했고, 중앙정보부의 부서장급 20여 명은 온갖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절대권력 박정희가 사라진 공간에서 주도권이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사로 넘어간 것이었다. 한국 군부의 노른자위를 점령하고 있는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1월 3일 박정희의 국장(國葬)이 치러졌고, 11월 6일 전두환이 TV 카메라 앞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의 서거로 공석이 된 총재를 선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 11월 12일 당 고문 김종필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267)
"12·12 쿠데타가 벌어진 1979년 말은 정치적으론 '서울의 봄'을 예고하는 상황이었는지 몰라도 경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 해 초 '이란혁명'으로 이란의 석유 생산량이 감소되면서 번진 파장은 12월 중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산유국회의(OPEC)가 원유값을 일시에 4배로 올리기로 결정하는 사태까지 빚고 말았다. 이른바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해 기름값이 2배로 뛰면서 한국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었다." "대중은 절대 빈곤하에서보다는 경제성장의 과실의 맛을 조금 본 상태에서 경제에 대해 더욱 큰 두려움을 갖는다는 가설은 1980년대 초 한국 사회에서 설득력을 갖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재규는 사형당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3일에 남긴 유서에서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고 말했지만, 바로 그 며칠 전 민주주의는 광주에서 처참한 학살극과 함께 다시 무덤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304-6)
맺음말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