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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9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평점 :
1장 도시에 빨려 들어가는 농촌 / 1970년
"박정희는 1970년 여름까지만 해도 교련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학생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그들의 주장을 듣기도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학생들이 불의를 보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해 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을 바꾼다." "게다가 박정희는 한국인의 민족성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일제의 식민통치 선전술을 그대로 신봉한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결코 민족주의자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5천 년을 전면 부정한 후에 남을 수 있는 '민족'이란 게 과연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만이 5천 년의 역사를 개신(改新)할 수 있다는 '자기주의자'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는 점점 더 민주주의를 낭비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이런 생각은 1971년 대선 이후 더욱 심해졌다. 그는 '건설적인 토론과 경쟁' 대신 '억압적인 지시와 응징'이 자신의 종교라 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훨씬 더 적합하다는 빠져들게 되었다."(21-3)
"수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구호가 말해 주듯이, 오직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수출 경쟁력은 싼 노동력이었다. 군인이 돈 받고 일하는가? 아니다. 군인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군인들과 동일시된 수출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성한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해야만 했다." "반면 수출 전사 지휘관들이 받은 특혜는 엄청난 것이었다. 일반 대출 이자율이 25%를 할 때에도 수출 특융 이자율은 6%에 불과했고, 수출용 원자재 수입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했고, 수출 소득에 대해서도 소득세를 80%나 감면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해외여행도 수출 전사 지휘관들에겐 예외였다. 어디 그뿐인가. 수출 전사 지휘관들은 밀수를 저질러도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수출에 지장을 줄 것 같으면 박정희는 검찰에 수사 중단 지시를 내리곤 했다. 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출 전시(戰時) 상황이었기 때문이다."(24-5)
"(경제개발의 가시적인 성과 중에서도)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가장 드라마틱한 성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부고속도로는 〈가슴이 뛸 정도로 흥분되는 민족사적 금자탑〉으로 다가왔다. 박정희가 7월 7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 작품〉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66)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일본의 동명고속도로 건설비의 8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건설공사라기보다는 군사작전이었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의 경제 브레인 오원철이 고속도로 건설 동기, 추진 방법, 공사 방식이 모두 군대식이었다고 말한 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도 〈박 대통령이 현장을 돌며 마치 전쟁처럼 지휘한 것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박 대통령은 선전을 포고하고 전략을 세웠으며 직접 전투병사들을 지휘했다〉고 말한다."(69-70)
"고속도로는 농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속도로 개통 이전만 해도 농촌 인심은 매우 순박했다. 사실 바로 그 덕분에 고속도로 용지도 평당 평균 236원(당시 담배 한 갑에 40원)이라는 헐값에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속도로 개통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1967년 12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고, 뒤이어 1970년 1월 서울의 강남개발계획 발표 이후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려 수도권 토지는 '돈 놓고 돈 먹기판'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런 투기 열풍이 농촌까지 파고 들어간 것이다. 고속도로 건설은 땅값에 영향을 미쳐 영농의 영세화를 초래하고 농민들의 주거지 상실로 인한 이촌 현상을 유발시켰다. 게다가 고속도로 건설회사가 주변의 젊은 청년들을 고용함으로써 영농 의욕 감퇴와 노동력 부족 현상을 야기시켰다. 급속하게 진행된 고속도로 주변의 지붕개량 사업은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고 정부에 대한 반발 의식까지 자아내게 만들었다."(74-5)
"7월 6일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 방침을 한국 정부에 통고했다. 8월 24일 내한한 미국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는 1년 후인 1971년 6월 말까지 철수 방침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 5년 이내에 나머지 주한미군도 완전히 철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택한 것은 '자력 방위'였다. 박정희는 이미 1970년 1월 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1970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정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연 3년에 걸쳐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이라는 국정지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북한과의 대결에서 시간을 벌고 (1971년 대선에서 높은 통일 여론을 지지표로 연결하려는) 목적으로 8월 15일, 광복절 25주년 기념사에서 북한이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과 '선의의 경제 경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그간의 입장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북한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87-8)
"전태일의 분신은 지식인들의 양심을 강타했다. 이광일은 전태일의 자살이 〈이제까지 대중의 가슴속에 '위대한 작가' 또는 '보편적 지식의 소유자'로 새겨져 있던 지식인에 대한 관념을 뒤흔든 계기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11월 21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전태일 사건과 관련하여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를 '정치 문제화'하였다. 11월 22일 새문안교회 대학생부 학생 40여 명은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와 그 공모자인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는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박정희는 1971년 1월 17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노동 문제를 거론하였으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공약으로 내놓았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 사건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04-5)
"1970년 12월 10일엔 대통령 특별보좌관 제도가 발족되었다. 이 제도도 대학교수 등과 같은 지식인 영입의 창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20세기 초반 한국 철학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어 온 박종홍이었다. 박종홍은 이미 5·16 쿠데타 직후부터 쿠데타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사회분과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군사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지만, 그의 특별보좌관직 수락은 이제 한 발이 아닌 두 발을 다 군사정권에 들이밀겠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당시 〈한국 지식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박종홍은 1971년 1월 1일자 일기에서 〈나는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 왔다. 왜 스스로 실천을 못하고 진리라면서 그 실천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참으로 교육자라면 스스로 실천해 보여야 할 것이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은 진리뿐이다. 나는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몸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고 썼다."(111-3)
2장 박정희 1인 체제의 완성 / 1971년
"4·27 선거가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인 4월 18일 '선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왔다는 혐의로 재일교포 대학생 서승, 서준식 형제 등 '간첩' 10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준식은 7년 형을, 서승은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서승이 10개월 가량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 공산혁명 기도, 김대중과의 관계를 자백하라고 서승을 포함한 다른 관련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129-30) "물론 그 사건은 철저히 조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들 형제의 북한 여행을 간첩 행위로 연관시키며 한 편의 무서운 음모극을 연출했다.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박정희 후보가 질 경우 서승 사건과 연계시켜 선거 자체를 뒤엎어 버리려는 전략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이 그런 식으로 죽어 갔던 것 아닌가.〉"(132)
"박정희는 4·27 대선에서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약한 우리 국민의 심성을 파고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다. 김대중이 4월 17일 전주 유세부터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라고 폭로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그에 대항할 필요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조선일보』에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 초기부터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의 집을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질 만큼 『조선일보』와는 가까웠는데,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상부상조 관계는 70년대 내내 지속된다." "4월 25일 서울 유세에서 박정희는 눈물까지 흘리며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호소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대중의 폭로 그대로 박정희는 이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유신으로 국민의 투표권을 아예 박탈해 버렸으니 말이다."(139-40)
"곧이어 치러진 5·25 총선에서는 153개 지역구에서 공화당 86명, 신민당 65명이 당선되었고, 전국구를 합친 의석 수는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이 되었다. 공화당 현역 의원 26명이 무더기로 낙선한데다 공화당은 서울의 17개 지역에서 단 1석만을 건졌고, 제7대 국회 때보다 야당 의석이 2배로 늘어나, 5·25 총선 결과는 〈당시의 형편으로 미루어선 야당의 실질적인 대승〉으로 간주되었다. 이 선거 결과를 1년 5개월 후에 나타난 유신체제와 연계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정치학자 김세중의 주장이다. 〈1971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3분의 2 의석 확보에 실패한 박정희는 헌법개정이라는 법 절차를 밟아 장기집권을 모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는 비상계엄의 선포 아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식의 비상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신체제 도입의 권력정치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147)
"신민당은 9월 30일 '실미도 특수군 난동, 광주단지 시위, 한진빌딩 난동, 기동경찰 총기 난사, 무장공비 마을 점거, 독침간첩 자살 등 흐뜨러진 치안에 대한 문책'을 이유로 내무부 장관 오치성 해임건의안을 발의하였다." "찬성에 표를 던진 공화당 표가 20표 넘게 나와 해임결의안이 통과되자 박정희는 자신의 지시를 거부한 일부 공화당 의원의 항명에 격노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항명 주동자를 색출해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다음 날 23명의 공화당 의원이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극심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강제 탈당 당하고 국회의원직마저 박탈된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치적으로 모든 걸 잃고 한동안 미국으로 유랑 생활을 떠났으며, 공화당 지도부는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박정희 친정체제가 강화되었다. 공화당은 이후 박정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청와대에 종속되었다."(183-4)
# 10·2 항명 사건 : 김종필 견제용으로 박정희가 구축해놓은 공화당 4인(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체제 붕괴
"10월 12일에는 국방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의 공동 명의로 교련거부학생 전원을 징집한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다. 학원자유화를 외치던 학생들은 부정부패자 공개를 요구하면서 군인들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였으며, 중앙정보부 철폐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는 박 정권의 최대 약점들을 건드린 것이었다. 이에 박 정권은 '10·15 위수령' 발표로 대응하였다. 10월 15일 박정희는 특별법령 9개항을 발표하면서 서울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을 내렸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에는 위수군이 진주하면서 1천8백89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이어 전국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이 제적되어 그 중 대부분이 강제 징집되었으며 군대에서도 끊임없는 보안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0월 16일에는 고려대 무장군인 난입에 항의하는 '지식인 64인 선언'이 나왔고, 이로 인해 리영희, 천관우 등 언론인들이 언론계에서 쫓겨났다."(189-90)
3장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 / 1972년
"1972년 7월 4일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전 국민을 통일 열기에 들뜨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합의했다는 남북공동성명은 첫째로 민족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둘째는 통일은 무력 행사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해야 하고, 셋째는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무엇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즉, 평화통일의 3대 원칙으로서 자주·평화·대단결을 내걸었던 것이다."(211-2) "7·4 남북공동성명은 나중에 남북 양쪽에서 동시에 일어난 체제상의 대변화로 인해 '정치적 쇼'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그런 문제들을 떠나서도 그 기본 정신이 관련 사안에서마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유럽거점 간첩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김규남을 비롯하여 각종 간첩 혐의로 복역중인 30여 명의 사상범들이 남북공동성명 직후에 전부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215)
"70년대 초, 박정희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한국 경제는 엉망이었다. 외국 차관을 가져다 쓴 기업체들이 대규모로 부실 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1969년 5월, 83개 업체 중 45%가 부실 기업체로 분류되었다. 부실 기업들은 더욱 사채에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금융 부담이 가중되어 부실화되는 악순환의 덫에 갇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사채를 동결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기업들이 쓰는 돈의 30%가 사채였는데, 금리가 연리 30% 이상이었다." "이른바 '8·3 긴급경제조치'의 주요 내용은 8월 9일까지 신고된 기업보유 사채는 앞으로 3년간 갚지 않고(3년 거치) 그 후 5년간 월리 1.35%(연리 16.2%)로 분할 상환토록 하며, 정부가 2천억 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 고리의 대출금 중 30%를 연리 8%,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대환해 준다는 것 등이었다." "'8·3 긴급경제조치'로 사채 전주 노릇을 하던 5·16 주체들의 부정축재 규모가 꼬리를 잡히기도 했다."(217-8)
"1972년 10월 17일 중앙청 앞에 탱크가 등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7·4 남북공동성명'으로 국민의 통일 열기를 한껏 고조시킨 뒤, 그로부터 3개월여 후인 10월 17일, 통일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대통령 종신제를 보장하기 위한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언하였다. 박정희가 보기에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건 북한 공산당이나 할 짓이었기 때문에, 반대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문으로 '빨갱이'라고 실토케 한 다음 죽이거나 오랫동안 감독에 가둬야 마땅했다."(222) "10월 17일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국회를 강제 해산했고 정당과 정치 활동도 금지되었다. 헌법 기능은 정지되었고 그 권한은 박정희가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비상국무회의가 가져갔다. 쉽게 말해, 박정희 개인이 곧 법이요 진리인 그런 철권통치 체제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물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았으며 대학은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224)
"박 정권은 10월 27일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표했는데, 이 헌법 개정안은 11월 21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으나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고, 각급 법관에 대한 임명권을 모조리 대통령에게 귀속시켜 사법부까지 행정부에 종속시켰다. 국회의원 선출은 임기 6년에 전국 73개 지역구에서 1구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동반 당선' 또는 '나눠먹기식' 제도였다. 또 제6대 국회부터 채택한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국회의원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을 일괄 선출하는 제도(유신정우회)가 도입되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임명하는 새로운 전국구 제도였던 것이다."(230-3)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승인을 확대한) 김일성은 대내적으로 더욱 큰 것을 얻었다. 김일성 1인 지배체제 및 세습을 강화한 것이다." "북한도 북한식 '10월 유신'을 꿈꾸었으며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거의 동시에 그걸 해치웠다. 북한은 '10월 유신'이 있은 지 2개월여 후인 12월 27일, 1948년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새로 만들어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새 헌법은 집단 지도체제에서 후퇴하는 것과 기존의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강화하였다. 즉, 〈헌법에 내놓고 김일성 1인의 절대적 독재체제를 보장〉한 것이다. 김일성은 그러한 체제 구축의 다음 수순으로 1973년 9월 김정일을 조선노동당의 최고 권력기관인 비서국의 비서로 격상시켰다. 1970년 발행된 『정치용어사전』은 '세습적 계승'을 '착취사회의 반동적 관행'이라고 비난했으나, 1973년 12월에 대체 출판된 『정치사전』은 이 항목을 삭제했다."(238-9)
"유신헌법안 기초에 참여한 중앙대 교수 갈봉근은 『신동아』 기고 글에서 '권력의 인격화'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권력의 인격화 현상이 정치적 후진국가권에 속하는 국가군에 있어서는 발전의 첫 단계가 될 뿐만 아니라 통합과 통치의 최적 수단〉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권력의 인격화 현상은 실은 보편적이며 정상적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은 세계 도처에서 모든 정치체제에 확대 편재하고 있다. 오히려 권력이 비인격화될 때가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번 유신헌법안의 특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가와 민족의 번영 및 안정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프랑스의 영광된 회복을 위하여 제정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이 드골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의 구현이었다는 점과 비길 수 있을 것이다.〉"(245-6)
"박정희가 생각한 새마을운동은 일종의 '민족성 개조운동'이었다. 그의 새마을 관련 담론에는 반드시 '근면·자조·협동'이 들어간다. 이는 박정희가 보기에 한국인, 특히 농민들에게 그게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박정희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1971년은 바로 우리가 자조와 근면과 협동의 정신을 전국의 마을마다 번지게 만든 획기적인 한 해였다. 긴 겨울철의 농한기에 아무 하는 일 없이 나태와 안일에 빠져 음주나 도박으로 소일하는 퇴폐적인 풍조를 없애기 위해, 대대적인 환경개선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렇듯 인간성 개조를 꿈꾼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공화당의 산하 운동쯤으로 만드는 걸 어찌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박 정권의 외무장관을 지낸 이동원도 〈이렇게 게으르고 단결심이 없어서야 어찌 일본을 이기겠소〉라는 박정희의 말이 〈소위 '새마을운동'으로 불리는 민족성 개조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265)
"박정희는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생각〉하고 이순신 숭배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극성스러운 성웅 만들기 작업에 대해 최상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순신은 욕망도 야망도 없다. 나라사랑만 있을 뿐이다. 민족반역자도 독재자도 욕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이든 대한제국이든 국가라면 무조건 받들 뿐이다. 빨갱이로 집어넣고 고문을 해도 '아야' 소리도 안 낸다. 묵묵히 백의종군을 다짐할 뿐이다. 이 사람이 바로 민족반역자들이 발명한 성웅, 일명 '바보 이순신'이다. ····· 성웅은 머릿속에 '나'는 없고 '국가'만 있는 인간상이다. '나'를 잃어버린 존재다. 이런 성웅의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다. 즉 '성웅=멸사봉공 정신'이다. 멸사봉공, 박정희는 이 말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는 1939년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충성 혈서'에도 이 구절을 빠뜨리지 않았다.〉"(273-4)
"한국노총은 1970년 1월 30일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선언하였다. 원칙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오직 여당에만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은 1971년 국가보위법 선포 직후 국가비상사태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으며, 국가비상사태에서 정권이 내건 총화단결 등과 같은 슬로건에 호응하여 모든 노동자들이 따라야 할 행동지침까지 선포하였다. 또 그 해에 노총위원장 최용수는 직능대표로서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였다." "10월 유신 선포 후에는 〈구국통일을 위한 영단을 적극 지지한다〉는 제하의 성명을 내고 산별 노조별로 계몽유세반을 편성하여 유신체제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전국 유세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유세 활동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노총 사업보고에 따르면, 1971년 1천6백56건에 달했던 노사분규 발생 건수는 1972년 346건, 1973년 367건으로 감소하였다."(2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