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간 사회이동의 변화 - 한국사회 얼마나 개방적으로 변화하였는가? 한국학 총서 한국의 교육과 사회이동 1
박현준 지음 / 박영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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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총서 서문


# OED 연구 모형

1. 부모 계급(Origin)과 자녀 계급(Destination)의 연관성

2. 부모 계급(Origin)이 자녀 교육(Education)에 미치는 효과

3. 자녀 교육(Education)이 자녀 계급(Destination)에 미치는 효과


1 서론


"부모의 계급·계층이 자식의 계급·계층 지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탐구하는 세대 간 사회이동에는 절대적 이동과 상대적 이동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절대적 이동은 특정한 계급·계층에 속했던 부모를 둔 자식 세대가 어떻게 다른 계급·계층으로 이동했는지를 말할 때 잘 적용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일어난 사회 변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급속하게 줄어든 것이다. 대신에 대학 교육의 팽창과 함께 전문·관리직 비중이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했다. 따라서 부모가 농민이었던 많은 자녀들이 더 이상 농민으로 머물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 상승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스토리텔링도 이런 농민에서 전문·관리직으로 세대 간 사회이동을 이룬 경험들을 반영한 것인데 이는 부모 세대 농민 계급·계층으로부터 자식 세대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의 (상승)이동을 가리킨다."(9)


"반면에 상대적 이동을 살필 때는 부모가 농민이었던 자녀들이 농민으로 남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 (상승)이동한 경우를 부모가 원래부터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속했던 자녀들이 농민 계급으로 '떨어지지' 않고 (즉, 하강 이동하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남게 되는 (즉, 세습하게 되는) 경우를 비교한다. 부모가 농민 계급·계층에 속했던 자녀들이 자신들 역시 농민으로 남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 상승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 경우 분명 절대적 이동이 늘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가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속했던 자식들이 농민으로 하강 이동하지 않고 자신들 역시 전문·관리직으로 남는 경우가 (즉, 세대 간 대물림, 혹은 세습 정도가) 마찬가지로 증가하면 결국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도달하게 되는 데 있어서 부모 계급의 영향력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상대적 이동은 변하지 않게 된다."(9-10)


2 사회이동의 개념적·이론적 논의


"결과의 불평등과 기회의 불평등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 구성원들이 인식하는 결과의 불평등 문제가 기회의 불평등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소득 분포 상위 10%에 속할 가능성이 부모의 지위나 재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즉,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상위 10%에 속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면,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더라도 그러한 상위 10%의 소득 집중도가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의 소득 상관성을 분석한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사용한 비유를 들자면, 소득 불평등이 증가함에 따라 계층 사다리의 제일 높은 발판과 제일 낮은 발판 사이의 간격이 늘었다고 해도 사다리의 제일 낮은 발판에서 제일 높은 발판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면, 결과의 불평등은 그런 공정한 기회를 기반으로 한 경쟁의 '당연한' 혹은 '필연적'인 결과로 인식될 수 있다."(26-7)


"사회 계층론(social stratification)이라는 사회학의 한 분야는 오랫동안 기회의 불평등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측정할지, 어떤 사회가 상대적으로 더 높거나 낮은 기회의 불평등을 보여주는지, 한 사회 내에서 기회의 불평등 정도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에 관한 다양한 이론적 논의와 풍부한 경험적 연구를 진행해왔다. 기회의 불평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사회학자들은 직업을 기준으로 사회 계급(social class)을 정의한 뒤, 개인이 성장할 시기에(예를 들어, 14살 혹은 15살 때 무렵) 부모가 어떤 계급에 속해 있었는지를 가지고 출신 계급(origin class)을 정의하고, 본인이 달성한 계급을 도달 계급(destination class)으로 삼아,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에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다시 말해, 사회학자들은 사람들이 어떤 계급에서 출발해서 어떤 계급에 도달했는지를 묻는 세대 간 (상대적) 사회이동을 기회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로 여겨왔다."(27)


"승산비(odds ratio)는 두 출신 계급들(지금 들고 있는 예에서는 전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전문가 계급에 도달할 두 승산 간의 비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대적인 이동 정도를 제대로 나타내준다. 승산비는 두 승산의 비율로 정의되기 때문에 특정 계급의 규모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절대적 이동, 특히 유출율을 계산하고 나서 많은 노동자 계급 출신 자녀들이 노동자 계급으로 머물지 않고 전문가 계급으로 상승 이동한다고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사회가 더 개방적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의 상승 이동 정도를 전문가 계급 출신 자녀들이 노동자 계급으로 하강 이동하지 않고 전문직 계급에 머물게 되는 정도와 비교해서, 노동자 계급 출신 자녀들의 상승 이동 정도가 전문가 계급 출신 자녀들의 재생산 정도보다 빠르게 증가했을 때 사회가 더 개방적이 되어 간다고, 즉 사회 유동성이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41-2)


"계층이동 사다리가 끊겼다는 담론의 주 근거는 한국인이 점점 더 계층상승 이동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 되어간다는 사회의식 조사이다. 계층상승 이동 인식과 실제가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잠시 잊더라도 계층상승 이동 가능성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들이 계층상승 이동 가능성을 말할 때 보통은 자신의 전 세대, 즉 부모 세대와 비교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상승 이동할 수 있는지, 혹은 자신의 세대를 중심으로 자기 자식 세대들은 얼마나 상승 이동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주로 직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절대적인 사회이동에 관한 것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상승 이동 가능성에 대한 비교를 포함하는 상대적인 사회 이동에 관한 것이 아니다. (특히 교육 팽창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직업구조가 더 이상 크게 변하지 않을 때, 개인들은 상승 이동의 가능성이 적다고 인식하게 된다."(66-7)


3 한국 사회의 세대 간 사회이동 추이


"정인관·박현준(2019)은 여러 서베이 자료들을 한데 모아, 아들들이 언제 태어났는지를 기준으로 1950-54년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부터 1980-84년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까지 총 일곱 개의 5년 단위 출생 코호트를 구분했다: 1950-54, 1955-59, 1960-64, 1965-69, 1970-74, 1975-79, 1980-84. 30세를 기준으로 하면 1950년대와 1960년대 코호트들은 한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을 무렵에 노동시장에 있었던 반면에 1970년대 코호트들은 경제 위기 이후 한국 경제 침체, 재구조 과정, 불평등 증가라는 상황에서 노동시장에 나와 있었다. 이런 노동 시장의 차이와 아울러 교육 팽창 측면에서도 코호트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이들 일곱 개 코호트들 사이에서 아버지 계급으로 대변되는 출신 계급과 아들 계급으로 대변되는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어떻게 변했는지 분석함으로써 세대 간 사회이동의 추세를 밝히려는 것이 정인관·박현준(2019) 연구의 기본 목표이다."(75-6)


"가장 오래된 1950-54년 출생 코호트부터 가장 최근의 1980-84년 코호트에 걸쳐 눈에 두드러지는 변화는 서비스 계급과 일상적 비육체노동자 계급의 증가이다. 이 두 계급은 주로 전문직, 관리직,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교육 팽창과 서비스 산업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계급들이다. 이른바 화이트칼라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계급은 계속 증가해서 가장 최근 코호트에 와서는 코호트의 반수 이상이 화이트칼라 계급에 속한다." "이렇게 계급구조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서비스 계급과 일상적 비육체노동자 계급의 비중이 늘어나는 동안 농민 계급과 자영업자 계급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처럼 네 개의 다른 계급들의 비중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직업·계급 구조는 급속하게 변했다. 다만 네 개의 다른 계급들 비중이 크게 변하는 동안에도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비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79-80)


"1950-54년 코호트의 경우 총이동율 75.6%은 상승 이동율 52.4%, 수평 이동율 17.1%, 하강 이동율 6.1%가 합쳐서 이뤄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상승 이동율은 1950-54년 코호트부터 1965-69년 코호트까지 큰 변화가 없다가 이후에 감소하기 시작해서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출생자들 사이에서는 40.5%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열 명 중에 네 명이 자신의 아버지 계급보다 높은 위계에 속하는 계급으로 상승 이동을 경험했다. 정점을 찍었던 1965-69년 코호트의 상승 이동율 53.6%와 비교해보면 제법 큰 감소이다. 상승 이동율이 1965-69년 코호트 이후 계속해서 줄어든 반면에 하강 이동율은 처음 코호트부터 꾸준히 증가한다. 1950-54년 코호트의 경우 6.1%에 불과했던 하강 이동율이 이후 계속 증가해서 1980-84년 코호트의 경우 17.3%나 된다. 이처럼 최근 코호트에서 상승 이동율과 하강 이동율 간의 차이가 가장 작다."(85)


"농민을 포함하는 상승 이동율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출생자들 사이에서 큰 변화가 없다가 1970년대 이후 출생자들 사이에서 제법 줄어든다. 그 결과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출생자들은 가장 낮은 상승 이동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농민을 제외하면 그 유형이 정반대이다. 계급구조에서 가장 낮은 지위를 차지했던 농민 계급을 제외하자 그만큼 상승 이동율이 줄어들어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출생자들의 경우 상승 이동율이 농민을 포함한 상승 이동율에 비해 현저히 낮다. 농민을 포함했을 때 1950-54년 코호트의 경우 과반수가 상승 이동을 경험했으나(52.4%), 농민을 제외하면 겨우 그 코호트의 열 명 중에 두 명만이(23%) 상승 이동을 경험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최근 코호트들이 예전 코호트에 비해 상승 이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담론은 농민을 제외하면 상승 이동이 지금보다도 더 낮았던 예전 코호트들의 경험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88-90)


"각 코호트별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 정도, 즉 상대적 이동 정도를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추세는 이 연관성이 전반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이다. 즉, 최근 코호트로 올수록 아들의 계급 달성에 미치는 아버지 계급의 영향력이 감소해왔음을 알 수 있다: 증가한 것이 아니다! 1950-54년 코호트 사이에서 드러나는 출생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을 1이라고 할 때 1955-59년 코호트의 연관성은 0.85로 1950-54년 코호트에 비해 15%나 감소했다. 그 이후로 1970-74년 코호트까지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없다가 가장 최근의 두 코호트에 와서 다시 감소 폭이 크다. 계속되는 감소 결과 출생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은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코호트의 경우 1950-54년 코호트의 66%에 불과하게 된다." "지난 30년간 아들이 특정 계급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 계급이 미치는 영향력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사회이동 기회는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108-9)


"앞서 절대적 이동율 추세를 살펴보면서 농민 계급을 포함할 때와 제외했을 때의 추세가 다름을 확인했다. 출신 계급이 농민이거나 도달 계급이 농민인 모든 경우를 제외하고 새로 구성한 5X5 사회이동표를 가지고 그 결과를 낳은 분석을 해보면 농민을 제외하더라도 비슷한 상대적 이동 추세를 발견할 수 있다. 농민을 제외하면 오히려 그 추세가 보다 분명해져서 일관되게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75-79년까지 줄어든다.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50-54년 코호트에서 1이라고 하면, 1955-59년, 1960-64, 1965-69, 1970-74, 1975-79 코호트 차례대로 0.96, 0.96, 0.83, 0.63, 0.60이다. 즉,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75-79년 코호트의 경우 기준이 되는 1950-54년 코호트의 연관성의 60% 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사회가 개방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가장 최근 코호트(1980-84)에 와서는 약간 증가하지만 여전히 0.65밖에 되지 않는다."(109)


"그렇다면 빠르게 지속되어 온 교육 팽창이 계속해서 약화되어 온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진다." "정인관·박현준(2019)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1950-54년 코호트부터 1980-84년 코호트에 이르기까지 급속한 교육 팽창에도 불구하고 출신 계급(즉, 아버지 계급)이 아들의 교육 수준에 미치는 효과는 계속해서 약화되어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 지속되었다. 이런 결과는 아들 세대가 겪었던 교육 기회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출신 계급에 따른 상대적인 교육 기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Shavit and Blossfeld(1993)의 '지속되는 불평등' 테제를 경험적으로 뒷받침한다. 교육 팽창 정도가 다른 많은 나라에 비교해서도 남달리 컸던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교육 불평등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시금 교육 팽창의 절대적 측면과 상대적 측면의 구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135-6)


"그렇지만 아들의 교육 수준이 본인의 계급(도달 계급) 성취에 미치는 영향력은 계속해서 약화되어 왔다. 본인 교육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50-54년 코호트에서 1이라고 할 때 1960-64년 코호트에서는 0.86, 1970-74년 코호트에서 0.80, 그리고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코호트에서는 0.70으로 지난 일곱 개 코호트를 거쳐 오는 동안 교육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30% 줄어들었다."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이라고 할 때, 전문대나 대학 중퇴자들 사이에서는 그 연관성이 0.80, 대학 졸업자들 사이에서는 0.61이다. 다시 말해, 대학 졸업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은 고졸 이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연관성의 61%에 지나지 않는다. 구성 효과에서 기대되는 것처럼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계급 성취에 아버지 계급이 미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136-8)


4 세대 간 사회이동의 국가 간 비교


# 절대적 이동율의 국가 간 비교

1. 총 이동율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 노르웨이(1995) 〉 폴란드(1994)

2. 상승 이동율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 노르웨이(1995) 〉 폴란드(1994)

3. 하강 이동율 : 노르웨이(1995) 〉 폴란드(1994)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4. 수평 이동율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 폴란드(1994) 〉 노르웨이(1995)


#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

이탈리아 1.0 〉 폴란드 0.75 〉 노르웨이 0.71 〉 한국 0.67 (즉, 한국의 세대 간 사회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


5 결론


"한국 사회에서 출신 계급·계층이 도달 계급·계층에 미치는 효과는 계속해서 약화되어 왔다." "이 책의 핵심적 결론의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 이동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 팽창은 이런 한국 사회 개방성 확대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교육 팽창과 함께 이뤄진 교육 평등화는 특히 1950-54년 코호트와 1970-74년 코호트 사이에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을 약화시켰다. 그 이후 코호트에서는 교육 팽창에 따라 대학졸업자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낮은 집단이 전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한 구성효과의 영향을 받아 세대 간 사회 불평등이 약화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요사이 대학 졸업장이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서 대학 교육이 더 이상 사회 이동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는 담론과는 거리가 멀다."(157-9)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사회이동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는 결론은 최근에 증가한 소득 불평등의 추세가 가지는 심각성이나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는다. 앞에서 계층이동 사다리를 비유로 든 미국 경제학자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밝혔듯이 상층 계급에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가능성이 예전 세대에 비해 최근에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즉, 상대적 사회이동이 변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심지어 상대적인 이동이 더 수월해졌다고 해도, 소득 불평등의 증가로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 간의 경제조건과 기타 생활조건 차이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상층과 하층 간에 더욱 늘어가는 경제조건의 차이는 아이들에게 투자되는 자원과 시간 측면에서 상층과 하층 사이에 그 격차가 더욱 벌어짐을 의미할 수 있으며 결국 다음 세대의 사회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159-60)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큰 한계 중의 하나는 세대 간 사회이동을 남성의 경험에서만 살펴본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들의 전반적인 낮은 노동시장 참여율, 그에 따른 계급 구성의 어려움, 결혼과 출산을 전후한 노동시장 이탈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성의 세대 간 이동을 살펴보지 못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나아가 한국 여성과 남성의 세대 간 사회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수직적 연관성뿐만 아니라 횡적 연관성 즉, 여성과 남성의 결혼 동질성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결혼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어떤 계급·계층 이동을 하게 되는지 또 그러한 계급 동질혼 혹은 이질혼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면 세대 간 사회이동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개방성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여러 국가 간 비교 연구는 한국 사회의 교육 동질혼 정도가 비교적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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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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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역사의 교차로에서


"18세기에 마침내 지구를 둘러싼 제국을 수립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식민지 중에서도 전설로 가득찬 동방에 대해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의기양양함에는 뜻밖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를 손에 넣어 승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좋았으나, 수송로와 병참선이 지나치게 멀어져 여러 곳에서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러한 취약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나중에 본인 스스로도 주장했듯이, 시리아에서 전설과 영광의 길을 따라 바빌론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내쳐 인도까지 쳐들어갈 계획으로 1798년 이집트 원정에 이어 시리아로 진군해 들어갔다. 이후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러시아 황제 파벨을 꼬드겨 러시아군도 같은 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중동의 토착 정권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이런 팽창을 막으려고 했다. 중동을 지배할 의도는 없었으나 유럽의 경쟁국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 또한 결단코 막으려고 했다."(51)


"영국정부가 19세기 내내 유럽 국가들의 간섭, 전복, 침략에 맞서 쇠락한 이슬람 정권들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자 이윽고 러시아제국이 영국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 계획을 막는 것은 영국 군부와 민관인 관리들의 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은 1829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웰링턴 공작이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인도를 지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 논의에서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접근을 막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이때부터 쇠락한 아시아의 이슬람 정권들을 영국령 인도와 이집트로 가는 통로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영국의 전략이 되었다. 특히 이것은 파머스턴이 오랫동안 외무장관과 총리로 재직할 때 추진했던 관계로, 그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51-3)


"거대한 게임이 특히 격렬하게 진행되던 서아시아에서는 다르다넬스의 좁은 해협 위쪽,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 통로와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북서 통로에 자리하여 수백 년 동안 세계정치의 교차로가 되었던 고대 비잔티움, 곧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콘스탄티노플이 적대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는 한, 강력한 영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들어가 러시아 해안선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러시아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점령하는 날에는, 영국 함대는 해협으로의 진입을 차단당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로 진출하여 영국의 생명선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아시아 대륙 저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접한 드높은 산맥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침략군이 영국령 인도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올 수 있는 요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가 그 고지대에 입지를 마련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영국의 정책 기조가 되었다."(53)


"오스만제국은 제1차 발칸전쟁(1912~1913)에서 발칸동맹(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 패해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제2차 발칸전쟁(1913)에서는 아시아 쪽 터키의 맞은편에 위치한 트라케(트라키아)를 용케 회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붕괴가 계속되는 와중에 찾아든 잠깐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권을 잡고 술탄의 각료로 제국을 지배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청년튀르크당은, 제국의 영토가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고 유럽의 포식자들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마저 분할했고, 이제 그들이 눈길을 돌릴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지표면의 4분의 1은 영국, 6분의 1은 러시아가 차지하여 대부분 지역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고, 서반구도 먼로주의에 포함돼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어서, 유럽 국가들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지역은 중동뿐이었다."(77-8)


"CUP(통일진보위원회) 내의 다양한 분파는 강력한 유럽 국가를 동맹으로 확보하는 것이 터키 의제의 가장 절박한 사안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유럽권의 한 나라, 아니 열강의 하나─영국, 프랑스, 혹은 독일─만 동맹으로 얻으면, 오스만제국은 영토를 침탈당하는 일 없이 안전해지리라고 청년튀르크당은 판단했다. 러시아와 러시아보다는 힘이 다소 약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그리스,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들이었다." "1914년 5월과 7월 사이에는 오스만의 정세가 더욱 악화되어 CUP 지도자들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세 강대국에도 동맹의 개연성 여부를 은밀히 타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프랑스파였던 해상장관 제말은 프랑스에 동맹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했다. 절망에 빠진 탈라트가 고심 끝에 러시아에까지 접근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나, 역시 퇴짜를 맞았다." "오스만제국은 열강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하는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83-4)


"불간섭 정책을 옹호하던 오스만제국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는 1914년 8월 말에 벌어진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해 9월에 시작된 마수리아 호수 전투에서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자, 오스만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하려면 독일이 단독으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러시아는 수십만 명의 병력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상황이어서, 엔베르처럼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도 러시아의 패배가 임박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의 승리 열차는 이제 막 역을 떠나려 했으므로, 엔베르로서는 이번이 기차에 올라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더욱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9월 26일 엔베르는 결국 동료들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외국 배들(사실상 연합국 선박)의 접근을 가로막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 독일 대사 폰 반겐하임에게, 대재상이 더는 오스만의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통보했다."(114-5)


2부 하르툼의 키치너, 장래를 준비하다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와 키프로스 문제를 명확히 해둘 필요를 느꼈다." "카이로의 영국청(이집트 총독 키치너가 근무하는 곳)이 원한 것은, 이름뿐이나마 언젠가는 독립시켜주겠다는 언질이 포함된 보호령이었는데, 영국정부는 두 나라의 병합이라는 본래의 결정을 번복하고 카이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영국 내각의 결정으로 키치너의 영국청은, 키치너와 그의 참모들이 훗날 아랍어권 전역으로 확대시킬 생각이었던 통치 형태의 원형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도에서와 같은 직접통치 방식이 아닌 보호령이 그것이다. 키치너의 이집트에서는 허울뿐이나마 세습군주와 토착 각료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영국 고문관들의 조언으로 결정된 사안이라 해도 모든 법령은 그들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그것이 바로 키치너 사단이 바란 정부 형태였던 것이다. 로널드 스토스의 표현을 빌리면, 〈영국은 명령법에 반대하고, 가정법을 좋아하며, 기원祈願법도 마다하지 않았다.〉"(136-7)


"1914년 영국인들의 관심은 온통 오스만제국이 참전하면 수에즈운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에 모아졌다. 로널드 스토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럽의 국방부 관리들이 철도 시설을 중심으로 적국의 군사력을 분석하듯, 낙타에 초점을 맞추어 오스만의 군사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실 낙타는 구실이었을 뿐, 스토스의 진짜 목적은 그 편지와 함께 1914년 9월 6일 클레이턴이 건네준, 낙타 이외의 또다른 문제들을 메카의 지도자와 논의해달라는 내용의 극비 비망록을 키치너에게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비망록에서 클레이턴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는 영국에 호의적인 아라비아 지도자를 이슬람의 칼리프로 만들어 오스만 술탄을 대체할 개연성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클레이턴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슬람 성지의 수호자인 메카의 아미르가 칼리프의 명백한 후보자라고 말햇다. 그렇게 되면 성지순례의 면으로도 영국에 중요한 조력자가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157-8)


"키치너는 외무장관 그레이의 승인을 받아 스토스에게 보낸 전문에서, 메카의 지배자에게 〈터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 전쟁에서 아랍이 영국을 도와주면, 영국도 아라비아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아랍인들이 외국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답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여기서 '아랍인'은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아라비아 반도가 술탄으로부터 해방되면 영국은 외세의 모든 침략으로부터 그곳 지배자들을 보호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월권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키치너의 발언이었다. 그는 아라비아의 역할이 전시보다 전후에 더 중요할 것이라고 여긴 자신의 믿음을 반영하듯, 메카에 보내는 메시지를 폭탄선언으로 마감했다. 〈메카나 메디나의 칼리프는 진정한 아랍 종족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지금 벌어지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그 선은 달성될 것입니다.〉"(161-3)


"키치너의 측근들은 그들이 이슬람권에 대해 안다고 믿은 그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슬람권의 불화와 분열상의 정도를 가볍게 본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슬람의 극단적 청교도 운동인 와하브파의 지도자 이븐 사우드에게 수니파인 메카 지배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한 키치너의 계획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수십 개로 쪼개진 이슬람의 종파들이 그랬듯, 그 둘도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키치너와 그의 측근들은 메카의 지배자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드는 오류도 범했다. 메카의 지배자는 그들이 보낸 전문을 보고 영국이 자신에게 거대한 왕국의 지배자를 제의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슬람의 새로운 칼리프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메카의 지배자가 자신의 새로운 왕국의 경계지가 될 곳을 언급할 때 스토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그래서였다. 키치너나 그나 아미르의 통치영역을 확대시켜줄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164)


3부 중동의 진창에 빠진 영국


"1915년 초 (서부전선 병력 차출을 거부하던) 키치너는 돌연 마음을 바꿔 영국의 다르다넬스 공격을 제안했다.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다르다넬스에 대한 양동 공격을 급히 요청해오자, 그 청에 응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렇게 되면 독일이 모든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여할 수 있게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견제 공격을 요청하고, 키치너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 엔베르의 카프카스 고원 지대 공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요청은 1951년 1월 러시아가 엔베르의 튀르크군에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전 영국에 전달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지도자들은 있지도 않은 튀르크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해주겠다며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처칠, 키치너, 애스퀴스, 로이드 조지, 영국, 중동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전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196-7)


"키치너와 처칠의 다르다넬스 작전이 막상 성공할 조짐이 보이자 원조를 요청했던 러시아 정부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작전 성공은 물론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영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할 것이 뻔했고, 그러자 러시아인들 마음속에 지난 1세기 동안 거대한 게임을 벌이며 느꼈던 공포와 시기심이 되살아난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우려한 것은, 영국이 일단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나면 내놓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5년 3월 15일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가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메시지가 담긴 비밀 통전通電을 런던과 파리에 각각 발송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다르다넬스 해협, 그리고 해협에 인접한 지역을 러시아에 인도할 것을 연합국에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의 다른 영토와 그 밖의 지역에 갖고 있는 야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양국의 계획을 호의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207)


"러시아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그레이가 콘스탄티노플 협정을 비밀에 부친 것은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인도의 무슬림 여론에 미칠 파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무슬림 독립국, 따라서 중요성이 적지 않은 오스만제국을 파괴한 장본인으로 비춰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레이는 또, 오스만제국이 파괴되는 데 따른 이슬람교도들의 손실을 다른 곳에 무슬림 국가를 세우는 방식으로 벌충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아라비아가 그 후보지로 가장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은 열강들도 탐내지 않았으므로 약속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훗날, 〈외국 군대가 아라비아 땅을 점령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마른 황무지여서 강대국이 목초지로 욕심 부릴 만한 곳도 아니었다〉고 썼다. 그때만 해도 아라비아에 엄청난 석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211-2)


"한편 사이크스가 외유에서 돌아와 내각에 던진 주요 메시지는, 그동안은 아랍이 전쟁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연합국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메카의 샤리프 아미르 후세인과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사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각료들의 토의 끝에 결국 (카이로에 교섭권을 주어 후세인과 합의해야 한다는) 키치너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헨리 맥마흔이 런던이 부여해준 권한과 지시사항으로 메카와 교신을 재개한 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토록 오랫동안 그 의미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만든 맥마흔 서한이었다."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사뭇 달라진 어조로 후세인에게 답변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원하는 약속을 해주라는 키치너의 지시를 받고 특정 영토와 경계지역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확실한 언질을 주는 데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헷갈리는 용어를 사용했다."(274-5)


"그가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1916년 초 윈덤 디즈가 상황 파악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아랍인이 세 부류로 갈라져 있던 것도 그 힌트가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영국이 그 모든 아랍인들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그중 첫 번째인 시리아인들만 해도 프랑스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겨 그들 영토에는 프랑스가 발을 들이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았고, 그것은 물론 프랑스의 요구와 상반되었다. 두 번째 아랍인인 후세인도 아랍왕국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디즈는 아랍인 대다수와 터키인 모두 그것에 반대한다고 썼다. 〈이 생각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 아랍인 다수, 모든 터키인들의 관점이다.〉 다른 아랍인들도 후세인을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라는 것이 디즈의 생각이었다. 끝으로 이라크의 아랍인들이 있었다. 그들도 (디즈가 보기에는) 독립을 원했지만 인도정부가 그곳을 병합해 지배하려는 것이 문제였다."(277-8)


"그러나 클레이턴과 그의 동료들은 몰랐지만, (아랍 비밀결사 지도자인) 알 미스리, (영국 관리와 아랍 지도자 간의 매개 역할을 한) 알 파루키, 아미르 후세인도 영국에 위조화폐를 남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세인에게는 군대가 없었고 비밀결사에도 부하들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아랍군을 결집할 수 있다고 장담한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처음에는 아랍 봉기를 약속한 알 파루키도 11월 15일 마크 사이크스를 만났을 때는 태도를 바꿔, 연합국이 시리아 해안지대에 군대를 먼저 상륙시키지 않으면 아랍 봉기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도 영국이 먼저 공격해주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아랍 봉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영국군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않으면 아랍은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이크스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영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281)


"1915년 11월 23일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후속 조치를 위한 협상을 벌였고, 갑론을박 끝에 서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사이크스 쪽에서 보면 프랑스가 확대된 레바논을 지배하고 여타 시리아 지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니, 모술까지 이어지는 세력권을 프랑스에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이고, (프랑스 협상대표) 피코는 피코대로 그것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지방 바스라와 바그다드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걸림돌이 된 것은 팔레스타인이었다." "그리하여 두 항구도시 아크레(아코)와 하니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철도로 연결되는 영토 지대는 영국이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의 여타 지역은 모종의 국제기구 통치를 받도록 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나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중동의 나머지 지역은 아랍국 혹은 독립의 허울은 쓰겠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권을 분할될 국가들이 연합을 만들기로 했다."(289)


# 사이크스-피코 예비 협정(1916년 1월 3일 체결)


4부 전복


"서방권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시간상의 문제일 뿐 쇠락한 오스만제국이 언제든 붕괴되거나 혹은 해체될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으므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벌이는 긴박한 전쟁의 과정에서 오스만제국은 와해될 것이고, 제국 내에서 일어난 분란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16년 중엽의 양상은 그와 다르게 나타났다." "오스만군에 속한 다수의 독일장교들이 명령이 잘 먹히지 않는 것에 좌절과 혐오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국 관계에 균열이 갈 만큼 그것이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전쟁이 승리하는 쪽으로만 힘을 행사했을 뿐, 오스만 정부의 독립이나 혹은 CUP 지도자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독일은 연합국이나 동맹국의 그 어느 강대국보다 능란하게, 전후 아시아에 가진 영토적 야망을 전시 행동에 개입시키지 않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후방을 교란시키는 기회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었다."(309-10)


"우연인지 필연인지 키치너가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과 때를 같이해 메카에서는 아미르 후세인의 봉기가 일어났다. 후세인이 청년튀르크당이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로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것이 키치너 사단의 노력이 가져온 성과로 믿었다." "그러나 후세인이 바란 아랍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오스만군에 속한 아랍부대들 중 후세인 편으로 넘어온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오스만제국을 변절하고 연합국 측으로 넘어온 정치인이나 군인도 없었다. 알 파루키가 후세인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약속한 강력한 비밀 군사조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세인의 병력은 영국 돈에 매수된 수천 명의 부족민이 전부였다. 후세인에게는 정규군도 없었다. 헤자즈와 헤자즈 부족민들이 사는 인근 지역을 벗어나면, 후세인의 봉기를 지원해줄 곳 또한 없었다." "결국 후세인이 아랍 봉기를 선언한 지 1년 뒤에는 데이비드 호가스가 그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상황이 되었다."(327-34)


5부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진 연합국


"행정부에 일어난 변화는 영국의 중동정책에도 우연치 않은 변화를 초래했다. 동방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애스퀴스와 그레이가 내각에서 퇴출되고, 자신의 중동관을 내각에 강요했던 키치너도 죽고 없어진 뒤, 키치너와 모든 면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로이드 조지가 총리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처음부터 동방을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 변수로 보았다는 점에서 키치너와 달랐다." "중동에 관한 로이드 조지의 미래관은 많은 부분 기독교 백성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오스만제국을 혐오한 그의 첫 정치적 스승이자 자유당 출신 총리였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튀르크 정부를 증오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그는 소아시아에 영토적 야망을 가진 그리스에는 호의를 보였고, 성지(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도 지지했다. 다만 두 번째 경우는, 유대인의 조국이 세워지더라도 그것이 영국의 통치를 받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66-7)


"1917년 5월 전쟁에 혐오감을 느낀 프랑스군이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에서는 정치인들이 그간 편안하게 느꼈던 마지막 전시내각마저 붕괴했다. 전통적 지도력이 신뢰를 잃은 탓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총리 후보자였던 조르주 클레망소도 로이드 조지처럼 정치적 '고독자'였다." "클레망소는 그 무엇에 앞서 증오자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한 것이 또 독일이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프랑스에 부과한 가혹한 강화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열린 보르도 국민회의에서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 클레망소였던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힘을 모아야 하고, 그러므로 프랑스가 식민지 사업에 힘을 분산시킨 것은 실책이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따라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에 병합시키려고 하는 프랑스 상·하원의원들에게는 그가 당연히 주적일 수밖에 없었다."(369-70)


6부 신세계와 약속의 땅


"로이드 조지는 1917년 5월 10일에 열린 하원 비밀회의에서 영국이 전쟁 중에 점령한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를 독일에 반환하지 않을 것이고,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도 터키가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선언을 하여 그의 긴밀한 협력자마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각료들 중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마크 사이크스가 약속한 전후 중동에서의 프랑스 권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이크스-피코 협정도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본 것은 물리적 소유뿐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그는 1917년 4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에게 〈우리는 정복으로 그곳을 차지할 것이고, 이후에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프랑스도 종래에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로이드 조지는 내각에서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획득을 시종일관 원한 인물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조국을 조성하는 안도 지지했다."(412-3)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는 논지를 펼쳐) 정부의 주요 민간인 각료들이 시온주의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전시내각의 레오 에이머리와 마크 사이크스는 전후에 독일이 오스만제국을 독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인도로 가는 길이 적국 수중에 떨어져 영국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튀르크와 독일을 격퇴하고 오스만제국의 남쪽 주변부를 차지하는 것이 첩경이었다. 내각이 개전 초부터 메소포타미아 병합을 염두에 둔 것도 그래서였다. 아라비아도 독립을 주장한 현지 지배자들과 협상을 벌여 보조금도 주고 지원도 약속하여 친영파로 만들어놓았다. 그리하여 그 지역에서 취약지로 남은 곳은 이제 팔레스타인뿐이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다리로서 이집트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가로막는데다, 수에즈운하와도 가까워 운하는 물론이고 운하와 연결되는 해로도 함께 위협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425-6)


"전시내각의 또다른 인물인 옴즈비 고어가 팔레스타인 농업연구소에서 아론손이 거둔 성과에 감격한 것은, 그것이 시온주의 논점의 핵심을 건드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커즌이 의회에서 개진한 시온주의 문제도, 팔레스타인 정착을 원하는 수백만 유대인들을 부양하기에는 그곳의 땅이 지나치게 척박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인 원주민들도 추가 정착민을 받을 여지는 없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나라를 제거하지 않고는 두 번째 나라를 세울 공간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아론손의 발견으로 그 논점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아론손의 연구대로라면 과학적 영농기술로 땅이 비옥해져 팔레스타인의 주민 60여만 명을 쫓아내지 않고도 수백만 명이 추가로 정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옴즈비 고어도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중동의 아랍어권 및 여타 민족들을 도와 그 지역이 갱생되면, 사막이 다시금 번영을 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런던으로 돌아왔다."(429-30)


7부 중동 침략


"영국 지도자들은 중동 아랍어권 지역의 정복이 끝나갈 시점이 다가오자, 후세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1914년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및 다마스쿠스의 분리주의 지도자들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기울였던 클레이턴의 노력도, 비무슬림 통치에 반대하는 현지인들이 저항에 막혀 좌초된 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마스쿠스가 영국군의 진군로에 포함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중동의 미래를 위해 연합국의 대의와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그곳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파이살이 연합국의 계획에 동의한 것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스만 정부가 시리아에 즉각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아랍 민족주의에 선수를 치려 했던 보고서들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영국은 시리아 지방들에서 후세인보다 한층 좋은 평판을 얻을 조짐을 보인 다마스쿠스의 토착 아랍 지도부에 맞서, 후세인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곤혹스런 입장에 빠질 수도 있었다."(503-4)


"마크 사이크스는 1918년 중반 7인위원회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영국의 의도를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이크스의 외무부 상관들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선언문으로도 새로운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사이크스의 필치에서 나온 것들이 그렇듯 그 선언문도 사용된 단어만 달랐을 뿐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아랍권 모두, 이런저런 유럽세력권이나 통치권에 포함되도록 만든 영국의 전후 중동정책을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이크스의 선언이 인정한 완전한 독립은 아라비아 반도에 국한돼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독립된 지역이거나 혹은 아랍인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지역들만 독립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1918년 11월 8일에는 마침내 중동에 토착정부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영국-프랑스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주장에 따라 아랍 '독립'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506-7)


"외무부는 육군성으로 하여금 앨런비에게 새롭고 중요한 지시를 내리게 함으로써, 전부터 징후를 보여온 정치적 논제를 계속 진행시켰다. 앨런비가 점령한 시리아 영토를 점령된 적의 영토가 아닌 〈독립국 지위를 갖는 동맹의 영토〉로 취급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외무부가 〈주요 지역들에 아랍 기를 게양하고 그것에 경례하는 것과 같은 특징적 혹은 형식적 행위를 함으로써 아랍의 토착 지배권을 인정하고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간 수차례 논의되었던 지시를 내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10월 1일 사이크스는 앨런비에게 군정 지역을 최소화하고, 프랑스의 역할도 그에 맞춰 축소시키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듯 외무부는 앨런비에게 형식적으로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따르되 실제로는 다르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고, 그 점에서 외무부의 조치는 더 많은 것을 원한 프랑스, 프랑스에는 아무것도 주고 싶어 하지 않은 파이살, 혹은 카이로 아랍부의 어느 곳도 만족시키지 못한 해법이었다."(512-3)


8부 승리의 떡고물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독일의 입김 아래 있을 것으로만 알았지, 오스만정부와 독일정부의 틈이 어느 정도나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1918년에도 그들은 독일이 아시아 북부 지역 점령을 끝내고, 이제는 중부를 탈취하는 과정에 있으며, 아시아 남부의 영국 입지도 뒤흔들 채비를 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전시에 팽배했던 관점, 다시 말해 독일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야망을 갖고 있고, 그러므로 종전 뒤 아시아의 모든 지역은 독일의 거대한 노예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며, 아시아의 부와 천연자원 또한 독일 산업의 연료가 되어 종국에는 독일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과도 부합했다." "에이머리가 1917년 말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은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전쟁은 이제 문자 그대로 동방으로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국-독일 경계선을 결정짓기 위해 아시아의 남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546)


"1918년 여름 전시내각 회의에서 영국군 참모총장은 유럽전의 승리가 1919년 여름에는 힘들고 1920년 여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 내각도 적군이 그토록 신속히 아니 별안간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 (적국들과의 휴전협정을 고려하거나 그 문안을 작성하는 등의)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실제로 며칠 뒤 영국정부의 현안이 되었다. 10월 1일에서 6일 사이에는 오스만제국 정부와 몇몇 튀르크 요인들이 강화를 타진해 오고,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독일이 윌슨 대통령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협상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국의 전시내각은, 영국이 지배하기를 바라는 중동 지역이 행여 영국군에 점령되기 전 전쟁이 끝날까봐 안절부절 속을 태웠다. 레오 에이머리가 종전이 되기 전에 사실상 중동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스뫼츠와 참모총장을 닦달한 것도 그래서였다."(554-6)


"1919년 겨울 총리실은 영국 언론에 파이살의 아랍군이 앨런비 장군의 시리아 정복에 〈현저하게 기여했다〉는 것과, 그들이 〈앨런비의 군대에 앞서 시리아 내륙의 4대 도시(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에 입성했다〉는 취지의 기밀 비망록을 배포했다. 비망록에는 파이살군이 헤자즈의 외국군이 아닌 원주민군으로서 시리아 도시들에 입성했으며, 〈그러므로 시리아를 해방시키는 데 조력한 아랍군의 대부분은 그 지방 원주민들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비망록의 취지는 아랍어권 시리아는 그들 스스로 봉기를 일으켜 해방되었고, 그러므로 (튀르크에 이어) 그곳을 다시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진 서구 민주주의의 원리 또한 그곳과는 맞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실제로는 아랍인들이 기여한 부분이 〈지극히 미미〉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영국의 또 다른 주요 동맹인 파이살에게 불리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자, 파이살과 시리아의 대군이 그들 나라를 직접 해방시켰다고 주장한 것이다."(575-6)


9부 썰물은 빠지고


"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영국제국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중동과 여타 지역에서 점령한 영토를 추가하여, 과거 그 어느 때 혹은 세계의 그 어느 제국보다 광대한 대제국이 된 것이다. 로이드 조지는 전쟁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생이 큰 모험을 치르느라 지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시에 얻은 영토를 하나라도 더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로이드 조지는 중동에 파견된 영국군만 해도 250만 명에 달하고 그중 25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반면, 갈리폴리 전투를 제외하면 프랑스군은 사상자가 거의 없었고 미군 또한 중동에는 발도 디밀지 않았다고 하면서, 영국은 중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평화회의에서도 그는 108만 4000명에 달하는 영국 및 제국 병력이 오스만 영토에 주둔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와 더불어 영국을 제외하면 점령군에 의미 있는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583-7)


"중동의 평화협상은 기본적으로 로이드 조지가 짠 각본에 따라 전개되었다. 이는 미국을 소비에트 러시아나 혹은 소생하여 재무장한 독일이 제기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삼는 동시에, 이탈리아 및 프랑스와도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챙기려는 두 가지 속셈을 가진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1918~1919년에서 1919~1920년으로 협상시점이 넘어가면서 미국이 영국의 동맹도 아니고 어느 나라의 동맹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정세와 '헝클어진 동맹관계'로부터 발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어려워지자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모색하여 예전과 반대되는 길을 걸을 요량으로, 그간 중동에서 취했던 반프랑스 정책을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국-프랑스 동맹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은 뒤였다. 결국 중동 평화협상은 출발도 어설프고 끝은 더욱 어설픈 것이 되고 말았다."(592-3)


"미국은 터키와 싸운 교전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윌슨은 오스만과 관련된 협상에 참여했다. 그가 제안한 14개 조항이 오스만 문제의 타결에는 적용할 수 없었지만, 정치철학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국제문제는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조지도 그것을 알고 우드로 윌슨이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방들의 안건을 심의하려고 하자, 시리아의 독립을 위협하는 프랑스─윌슨의 14개 조항과 원칙에 반하는 위협이었다─로 그의 관심을 바꿔놓았다." "윌슨은 당연히 시리아인 스스로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했다." "아랍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파이살도 회의 참석자들에게, 그가 독립을 주장하는 아랍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은 배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주장에 대해 보이는 파이살의 이런 합리성은, 아랍인들의 독립 주장을 영국의 사주에 의한 속임수로 보고 그에 대해 강경노선을 고수한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600-1)


10부 아시아를 덮친 폭풍우


"중동 지역에서 이윽고 분란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 시작된 독립의 요구가 1919년에 들어서는 소요로 발전해간 이집트를 시작으로, 표면상으로 이집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인도 변경지에서도 1919년 전쟁이 발발했다. 아라비아의 영국 정책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와해되는 조짐을 보였다. 불행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당시 중동의 영국 당국에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형국이었다. 트란스요르단만 해도 부족 간 투쟁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서팔레스타인에서도 1920년 봄 유대인을 향한 아랍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며, 1920년 여름에는 이라크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마도 종전 뒤 (재정난으로 인해) 중동에 주둔한 영국군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들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629)


"전후 영국이 중동에서 갖고 있던 입지에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곳은 수십 년 간 영국이 '임시' 보호령으로 통치했고, 그곳의 영국 통치자들이 처음부터 아랍어권 사람들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영국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이집트였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이집트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한 점에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 정치인들이 그 약속을 믿고, 1차 세계대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영국도 이제는 이집트에 독립의 일정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고 해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술탄과 이집트의 지도부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에 많이 의존했던 영국으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집트 지도부와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마저 실패하여 영국은 결국 현지 정치인들의 동의 없이 군대의 힘으로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631-6)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평원으로 이어지는 고개들이 있는 영국의 또 다른 전략거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도 1세기 동안 여러 차례 유혈낭자한 전쟁을 치르며, 적대국(러시아)이 그 험준한 산악왕국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1907년 영국-러시아 협정 체결로, 아프가니스탄이 영국 보호령임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문제도 일단락된 것으로 여겨졌다." "재차 발발한 제3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결짓는 라왈핀디 조약이 조인된 것은 1919년 8월 8일 오전이었다. 영국이 적대적 외세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악왕국으로부터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보유했던 외교권을 철회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그런데 라왈핀디 조약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아프간 정부는 새롭게 얻은 자국의 독립을 볼셰비키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영국이 지난 십수년 간 아프간을 보호령으로 삼은 결과 얻은 것은 우호가 아닌 원한이었다."(637-40)


"아라비아에서는 영국의 두 주요 동맹인 헤자즈의 왕 후세인과 나지드의 왕 이브 사우드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분쟁은 후세인의 지배권이 끝나고 이븐 사우드의 지배권이 시작되는 국경지대의 조그만 도시풍 오아시스들이었던 (알)쿠르마와 투라바에 집중되었다. 그곳들의 점유가 보기보다 중요했던 것은 너른 목초지와 더불어 부족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븐 사우드는 선대로부터 18세기의 종교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와하브주의 신봉자였다. 1745년에 맺은 양가의 동맹관계도 두 집안의 잦은 혼인으로 더욱 돈독해졌다. 문제는 이 와하브주의자들(와하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와하비로 불렀다)이 그것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광신도로 보일 만큼 엄격한 청교도적 이슬람을 표방했고, 예리한 감각을 지닌 이븐 사우드가 와하브의 그런 광신적 에너지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 있었다."(642-3)


"후세인이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도 이런 청교도적 이슬람이 부근의 헤자즈 지방으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다. 정통 수니파였던 그에게 와하브주의는 교의적이고 정치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근절시키기 위해 쿠르마와 투라바로 되풀이해서 군대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패하기만 했다." "1921년 말에 이르면, 전투병력만 15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흐완('종교상의 형제들'이라는 뜻)을 선발대로 내세운 이븐 사우드군은 아라비아를 완전히 정복할 기세였다. 1920년 9월 20일에는 《타임스》의 중동 전문 특파원마저, 카이로의 아랍부가 후세인을 이슬람 칼리프로 만들려고 한 정책은 실패작이었음이 드러났다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이븐 사우드가 헤자즈를 점령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그의 말대로 이븐 사우드는 4년 뒤인 1924년 헤자즈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망명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이렇듯 중동제국의 서쪽과 동쪽뿐 아니라 남쪽 경계지에서도 더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644-5)


"한편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19년 말엽 오스만제국에서 실시된 하원 총선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새로 뽑힌 의원들은 하원이 소집되기도 전, 터키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바다와 영국 함대의 대포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고, 서른여덟 살의 민족주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이 새로운 투쟁기지로 삼은 곳이기도 한 앙고라(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에 모여들어, 민족계약National Pact으로 알려진 케말주의적 정치원리가 담긴 선언문을 채택하여 열화와 같은 대중의 성원을 받았다." "1920년 1월 중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원이 소집되고 1920년 1월 28일에는 하원이 비밀회의를 열어 민족계약의 채택을 의결한 뒤 2월 17일 대중에 그 사실을 공표했다." "20세기의 정치적 논제가 유럽 주변 대륙들에 대한 유럽 지배의 종식에 있었다면, 오스만 의회의 독립선언이야말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만했다."(646-7)


"앙고라에 수립된 케말의 터키정부가 처음 결정한 사항은 러시아로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 간에는 우호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약)1921년 3월 16일에 조인된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1년 여의 기간이 걸렸다." "당시 스탈린은 인종문제와 국가통제인민위원이었다. 그랬던 만큼 볼셰비키 이데올로기보다는 러시아의 국가 이익을 우선시했을테고, 그래서 케말이 (볼셰비키 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과는 별개로) 영국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 현실주의적 아니 냉소적 볼셰비키였던 그로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케말을 지원할 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소비에트 자금과 물자가 반볼셰비키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터키 국경지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외국의 정치운동에 제공한 최초의 중요한 군사원조였다."(649-50)


"시리아에서는 세 개의 주요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가 활동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아랍계 오스만군 장교들로 구성되었던 만큼 당연히 메소포타미아 지방들의 미래를 관건으로 삼은 알 하드,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들이어서 파이살이 시온주의자들에게 해준 약속을 철회하도록 압력 넣는 것에 전력투구한 반시온주의 조직인 아랍 클럽, 세 단체들 중 명성이 가장 높았던 알 파타트(청년 아랍협회)가 그들이었다." "시리아 의회는 1919년 중반 소집되기 무섭게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냈다.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 포함되는 대시리아 독립국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방식, 혹은 프랑스의 요구에 맞서 미국, 영국, 시온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파이살의 계획과는 상충하는 요구사항이었다." "1920년 1월 말에는 호전적 민족주의자들이 시리아 의회를 장악한 채 (프랑스의 느슨한 위임통치를 인정한) 파이살-클라망소 협정을 부결시켰다."(658-60)


"그러나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지와 파이살의 입지 모두 영국이 없으면 무너질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1920년 7월 26일에는 프랑스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7월 28일에는 파이살이 망명을 떠났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몇 개의 하부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금의 레바논이 된 대레바논도 그중 하나였다. 1920년 8월 1일 구로 장군이 선언한 대레바논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프랑스의 직접 통치지역으로 명시된 곳과도 대체로 일치했다. 그곳에는 옛 오스만제국의 한 지방이었던 레바논─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전통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드루즈파의 중심지─외에 해안가 도시들인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티레, 그리고 레바논 내륙의 상당 지역에 걸쳐 있던 알비카(베카) 골짜기도 포함되었다. 기독교도 근거지인 레바논에 생경한 지역들이 추가된 것이고, 그에 따라 다수의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인구도 그곳으로 유입되었다."(662-4)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부근의 팔레스타인이 '시온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외교와 선전운동도 함께 펼쳤다." "하지만 1920년 프랑스가 영국의 이익에 직접적 위협을 가한 곳은 그곳들이 아닌, 장차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75퍼센트 정도를 접하게 될 요르단 강 동안의 인구가 적은 트란스요르단이었다. 부족적 삶과 구조로 보면 아라비아에 가깝고, 역사적으로는 많은 지역이 성서의 땅에 속해 있었으며, 과거 한때는 아라비아의 로마 속주에 속해 있기도 했던 복잡다단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가을에는 앨런비 장군이 그곳을 점령한 뒤 파이살이 통치하는 무능한 다마스쿠스 정부에 일임해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곳은 방치돼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실책이었다. 프랑스가 다마스쿠스에서 파이살 세력을 몰아낸 뒤 파이살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트란스요르단의 지배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666-8)


"1917~1918년 앨런비 장군의 점령에 이어 팔레스타인에는 군정이 수립되었다. 그와 더불어 평판 나쁘고 수행하기 힘든 짐을 떠맡은 것에 대한 영국정부의 고난도 함께 시작되었다. 벨푸어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조국을 창설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 당사자들끼리 군정 기간 내내 실랑이를 벌인 탓이다." "클레이턴만 해도 시온주의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전 세계 유대인들의 문화·정서적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확장하되, 유대인 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로서의 영국 통치령으로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영국군 장교들은 심지어 그런 한정된 시온주의조차 인정하지 않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을 지지했다." "반면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벨푸어선언이 영국정부의 확고한 정책이고 따라서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군말 없이 그 정책을 따를 것이고, 나아가 그것의 이점에도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672-3)


"로이드 조지는 바스라와 바그다드 그리고 모술에 대한 통치방법을 구상할 때, 그 세 곳이 단일 정치체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라크(영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 아랍식 명칭)는 단일 정치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분열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술을 구태여 이라크에 포함시키려 한 것도, 그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유전을 보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널드 윌슨은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을 메소포타미아의 근본적 문제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200만 명에 달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시아파 무슬림이 소수파인 수니파 무슬림의 지배를 수용하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수니파 지배가 수반되지 않은 정부 형태 또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윌슨의 보고에 따르면 이라크 주민의 75퍼센트는 〈정부에 한 번도 복종해본 적이 없는〉 부족이었다."(679-80)


"페르시아의 스러져 가는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무력한 젊은 군주 아흐마드 샤는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형편인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친영파 인물을 총리에 앉혀두는 조건으로 영국정부의 정례 보조금을 받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커즌의 지휘 아래 테헤란의 영국 공사와 페르시아 총리 및 그의 두 동료 관리들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에서 페르시아 대표들은 조인의 조건으로 영국에 13만 파운드를 요구하여 몰래 받아 챙긴 뒤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영국-페르시아 협정은 이런 협잡 끝에 1919년 8월 9일 조인되었다." "그러나 1921년 2월 21일 대령 레자 칸이 카자크 병력 3,000명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군, 권력을 탈취하고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지 고작 닷새밖에 안 된 2월 26일 테헤란의 신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세 이슬람 국가들(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반영 동맹국이 되었다."(689-96)


11부 러시아, 중동에 돌아오다


"소비에트가 페르시아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터키 민족주의를 후원하고, 이라크 봉기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들 중 어느 것도 그들이 직접 고취하거나 지휘하지는 않았다. 중동 일대를 휩쓴 봉기가 볼셰비키 러시아가 연루된 광범위한 국제 음모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은 것은 영국의 망상이었다. 중동 사태는 일련의 어설픈 봉기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개별적 혹은 지역적 상황에 따라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따라서 그 운동들을 이용은 했을망정, 볼셰비키와 볼셰비키주의가 그 운동들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 것은 없었다." "영국 관리들은 종전 뒤 중동에서 일어난 봉기들을 오래된 음모자들이 꾸민 사악한 음모로 규정했다. 영국 정보부는 볼셰비키와 국제 금융, 범아랍주의와 범튀르크주의, 이슬람과 러시아도 거대한 음모의 공범자들인 국제적 유대인 공동체들과 독일-프로이센이 이용한 재료로 보았다."(701-3)


"1919년 외무장관이 된 조지 커즌은 러시아와의 거대한 게임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답게 러시아의 세력 팽창에 맞서 영국의 군사적 입지를 높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남카프카스와 북부 페르시아에도 확고한 방어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커즌과 외무부 사무차관 하딩은 중동의 어느 한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기면 도미노효과로 나머지 지역도 잃게 될 것이고, 그러다 나중에는 인도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도장관 에드윈 몬터규와 인도 부왕 쳄스퍼드 남작 3세는 볼셰비키 러시아의 위협이 군사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치중될 것이고, 그러므로 러시아와의 경쟁도 이슬람권 아시아 일대의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영국은 중동의 민족주의 세력을 러시아로 돌아서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상황에 영국군까지 주둔시키면 민족주의 세력은 영국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710-1)


12부 1922년의 타결


"1921년 2월 식민장관으로 취임했을 당시 처칠에게는 이미 적은 비용으로도 중동을 지배할 수 있는 광범위한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난날 육군장관과 공군장관을 겸직했을 때도 그는 비행기와 장갑차로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여, 중동의 유지비를 줄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그가 쓴 글에) 방비가 잘된 공군 기지 몇 곳만 있으면 〈병력과 돈만 잡아먹는 기나긴 병참선 없이도〉 영국 공군은 〈보호령들을 충분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된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처칠도 인정했듯이 외부의 침략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내적 안정 유지'를 유일한 목표로 삼은 전략이었다. 처칠이 중동에서의 영국 문제를 외부가 아닌 내부, 내적 분란에서 찾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대에 뒤쳐진 제국주의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처칠의 전략은 토착민의 봉기 진압에 주안점을 두었던 만큼, 동의가 아닌 강압으로 아랍인을 통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51-2)


# 카이로 회의의 네 가지 기본 안건(1921년 3월 21일)

1.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문제 : 파이살에게 왕위를 부여하며,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왕위를 제공한 것처럼 꾸민다.

2. 쿠르드족 지역 문제 : 이라크 편입 또는 쿠르디스탄 독립 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현행 독립체 상태를 유지한다.

3. 트란스요르단 문제 : 파이살의 형 압둘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하여 반프랑스 운동과 반시온주의 운동을 억제한다.

4. 이븐 사우드 문제 : 하심가 왕족(파이살, 압둘라)의 승승장구에 반발할 여지가 있으므로 연간 보조금을 인상해준다.


"파이살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임통치령에 반대하고 이라크('뿌리가 튼튼한 나라'라는 뜻)의 정식 독립을 요구하여 영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라크와 영국의 관계를 국제연맹의 결정이 아닌, 양국 간의 조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에 대해 영국은 국제연맹의 승인 없이 이라크의 지위를 바꿀 법적 권한이 자신들에게는 없다고 맞섰다. 다만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것이면 조약 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파이살은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조약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런 식으로 협상은 런던에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며 1년 넘게 지지부진 계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라크와 이집트가 얻은 것은 제한된 자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국가의 지위는 갖게 되었다. 이라크와 이집트 모두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 영국에 의해 임명된 군주들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764-6)


"압둘라를 트란스요르단 지배자로 남겨둠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처칠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것은, 그로 인해 영국이 사우드가와 하심가가 벌이는 아라비아의 극렬한 종교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식민성이 트란스요르단에 잠정적으로 취한 일련의 행정적 조치들로 그곳은 영속적인 정치적 실체로 굳어져 갔다. 아라비아 왕자가 외국 수행원들과 암만에 정착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라는 복잡한 통치체제 속에 항구적 요소로 뿌리내린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본래 그곳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간 되풀이된 제안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영토의 75퍼센트가 이미 그곳 사람도 아닌 아랍 왕조에 돌아가 버린 형국이었다. 훗날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트란스요르단은 이렇게 팔레스타인에서 분리된 개별 정치체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요르단이 지난날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는 사실마저도 잊을 정도가 되었다."(772-3)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과 요르단 하심 왕국의 대립


"1921년 아민 알 후세이니가 예루살렘의 대 무프티(최고의 법률적 권위자) 겸 팔레스타인 무슬림 지도자가 되었을 때 리치먼드는 그로 인해 시온주의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타격을 받은 쪽은 오히려 아랍인들이었다. 대 무프티가 아랍인들을 피투성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감으로써, 시온주의에 가하려던 것보다 오히려 더 끔찍하고 파괴적인 피해를 그들에게 입힌 탓이었다. 아만 알 후세이니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모험가였다. 그러다 보니 아랍인-유대인 문제도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어느 한쪽이 쫓겨나거나 소멸되어야 끝장이 나는 극단으로 몰고 가 아랍 영토와 아랍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런 극단적 행보를 이어가던 끝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결국은 나치 독일에 가서 아돌프 히틀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랍권 팔레스타인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아민 알 후세이니와 지도자 자리를 놓고 겨룬 여러 명의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779-80)


"아랍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는 벨푸어선언을 구체화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위임통치령 내용과 시온주의에 대한 영국의 공약이 대폭 축소된 영국정부의 백서도 거부한다는 전문을 런던 식민성에 보낸 아랍회의 집행위원회와 달리, 하임 바이츠만 박사는 일단 그것으로 유대인들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에서 발전을 이루어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틀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영국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시간이 가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으로 처칠이 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아랍회의 집행위원회는 시간이 가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처칠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거부한 것이다. 1922년 7월 22일에는 국제연맹이, 영국이 요르단 강 서안에 (처칠이 고쳐 쓴) 벨푸어선언을 실행하도록 명시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을 최종 승인했다."(791-2)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역은 튀르크의 지배를 더는 받지 않게 되었다. 동쪽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라비아 왕자(파이살)가 지배하고 쿠르드족,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유대인 인구가 뒤섞인 신생국가 이라크가 세워졌다. 독립국의 외양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이라크에 접한 시리아와 크게 확대된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강 동안에는 앞으로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신생 아랍국이 수립되고, 요르단 강 서안은 유대민족의 조국이 들어설 때까지 당분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따라서 처칠이 원했던 오스만제국의 재건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재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식민장관 처칠이 설정했던 주요 목표들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가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비용절감을 관철시킨 것만 해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체계를 확립한 것도 처칠이 거둔 큰 성과였다."(795)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전시와 종전 뒤 영국과 연합국은 중동의 구질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숴놓았다. 아랍어권 지역에서의 오스만 체제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시킨 뒤 그 자리에 나라들을 세우고, 지배자들을 임명하며, 국경선을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시스템 비슷한 것을 도입했으나, 그것에 반발하는 현지인들의 저항까지 죄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동 분규가 여타 지역의 분규와 비교하여 특별했던 것은, 1922년 초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내용에 따라 그 즉시 모습을 드러냈거나 혹은 종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나라들의 규모와 경계는 물론이고 그 나라들의 존립권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었다."(863-4)


"유럽의 정치 가설은 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중 하나, 세속적 문민정부에 대한 현대적 믿음만은, 정치를 포함해 삶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는 이슬람 율법을 1,000년 넘게 신봉해온 사람들이 사는 중동에서는 이질적 존재였다." "종교적 이유로든 그밖의 또 다른 이유로든, 1922년의 타결 혹은 그것의 토대가 된 근본적 가설에 맞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중동 정치의 특징이 된 것도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에는 합법성에 대한 인식─게임의 규칙이 없다는 것─이 없고,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믿음도 없으며, 경계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든 나라로 부르면 나라가 되고, 지배자를 칭하면 지배자가 되는 곳이었다. 그 점에서 연합국이 제아무리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오스만제국의 계승자들을 들어앉혔다고 주장한다 한들, 중동에는 아직 술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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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는가?
로드니 스타크 지음, 허성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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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부 성탄 전야


"수많은 신들을 섬기긴 했지만 로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회는 신앙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신들에게 각자의 신전이 있었지만, 그 모두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세세하게 통제되던 단일한 국가 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교 신전이 맡은 주된 소임은 국가와 그 지배 귀족이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신전에 갈 뿐이었고, 그곳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특정한 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을 그 신을 믿는 신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자신을 제우스(Zeus)를 믿는 신자 내지 유피테르(Jupiter)를 믿는 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한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필요에 따라 여러 신전과 다양한 신들을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중으로 조직된 종교생활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통된 종교적 구심점과 소속감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모이는 회합이라는 뜻에서 회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22-3)


"로마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국교가 없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데, 로마의 사제집단을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전통적인 신전들조차 전문적인 전임 사제를 두지 않았다." "로마의 사제는 사제 노릇이 그의 주된 역할이 아닌, 다시 말해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로마의 신전은 권력이나 영향력 내지 부가 모이는 독자적 중심이 될 수 없었다.···신전에 배속된 사제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전은 사제들에게 권력의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다.〉" "로마의 이교 신앙은 별도의 재정적 후원이 필요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나면, 신들의 수와 성격과 특화된 역할에 있어 다른 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까닭은 로마의 신들이란 거의 모두 그리스에서 온 것이었고, 그리스의 신들 역시 이집트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신들은 수메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신들이 이동하면서 그냥 이름만 갈아치웠던 것이다." "이렇게 제국의 동부와 이집트에서 유입된 새로운 종교들이 이른바 '동양 종교들'(Oriental faiths)이었다."(27-9)


# 로마에서 동양 종교들이 성공한 이유 (퀴몽+스타크)

1. 동양 종교는 종교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감각에 호소하는 측면이 한층 더 강하다. (감각)

2. 로마의 전통 신들이 도시와 국가의 신들이었다면, 동양 종교의 신은 개인의 신이다. (양심-속죄, 용서와 결부된)

3. 로마의 전통 종교는 '경전'이 없었지만, 동양 종교는 성문화된 경전을 제공한다. (지성)

4. 동양 종교는 여성에게 적극적인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젠더)

5. 동양 종교는 평신도들을 신도단, 즉 활동적인 신도 공동체 안으로 모여들게 한다. (조직화)


"로마의 신들은 그저 고객과 축제만 있었을 뿐, 신도나 정기적 예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양 종교는 〈새로운 공동체 의식과···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소속감을 제공했다.〉" "동양 종교는 분명한 종교적 정체성을 채택했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긴밀하게 결속된 매우 활동적인 종교 공동체, 즉 고객이 아닌 신도단을 필요로 했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동양 종교의 신자들도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을 사회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헌신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헌신의 자세를 통해 훨씬 더 큰 보상을 얻었는데, 그것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헌신에 대해 보답으로 베풀어주는 것이었다. 종교 집단이 최고 수준의 헌신과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신자들을 따로 모아서 친밀한 상호 교제를 가능케 하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이들 간에 끈끈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로마의 통치자들과 쓰라린 갈등을 초래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38-9)


"유일신교와 접촉한 여러 이교 집단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 중 하나를 다신교의 제한된 틀 안에서 가능한 대로 유일신교와 유사하게 변형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장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바로 이시스교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시스를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있는 신〉으로 부른다고 해도, 이시스교가 이교주의에 속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시스를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유일한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시스의 아들인 호로스를 포함하여 여러 신들로 구성된 만신전(pantheon)의 존재를 이교주의의 맥락에서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백한 유사성을 지닌 유대교에 비하면, 이시스 신화는 온통 저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럴 베일리(1871-1957)의 말마따나 〈한편에는 비역사적이고 단지 이야기 속 꼭두각시에 불과한 전설적 인물들이 있었다. 반면에 유대교에는 참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51-3)


"이전에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종교들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나태하고, 현세적인 성격이 되기 때문에, 그 반대 세력은 대부분 이보다 강렬한 신앙을 추구하는 집단 곧 〈소종파〉(높은 헌신도를 지닌 종교단체를 지칭하는 명칭)로부터 나오게 된다. 독점적 종교가 처음에는 강렬한 신앙에 헌신된 이들에 의해 창설되었을지라도, 점차 주변의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독점적 종교가 점점 태만해지는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종교적 강렬함이 결코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물 흐르듯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종파를 이끌던 교인 자녀 중 대다수가 그 부모들보다 긴장감이 덜한 신앙을 선호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러한 과정은 오랫동안 〈종파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sects), 즉 성공적인 종파들이 보다 온건한 종교 집단으로 변모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지칭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나 경제와 같은 현세적 활동에 관여하면서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다."(62-3)


"그러한 종교 기관이 경쟁적 충동을 억누를 만한 강제력을 결여하고 있을 경우, 그 종교는 곧바로 긴장도 높은 신앙을 원하는 이들이 출범시킨 소종파 운동에 의해 포위당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기를 거쳐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에서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대 지도자들이 내세운 유대교는 철저한 율법 준수와 다신교에 대한 절대적 불관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정통주의에 대한 지도 권한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었고 전문화된 세습 제사장 계층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에 따라 성전도 재건되었다. 성전을 유지하고 세습 제사장직을 후원하기 위해 전체 유대인을 대상으로 십일조가 부과되었다.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성전이 재정 기관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성전이 국가의 금고, 심지어 투자 은행 같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환전상들을 유치하기도 했다. 여기서 투자 은행이란 자본의 예치 장소를 말한다."(63)


"이것은 두 집단이 결합된 형태로서, 한편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으며 성전을 관장하는 부유하고 상대적으로 현세적인 제사장 계층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순응을 강요하길 꺼려했던 〈외부인들〉인 정치적 지배자들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다양한 범위의 유대교 종교 집단들(탈무드에서는 24개의 종파를 언급한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종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들의 이름 정도인데,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있다. 논쟁에 휩싸인 유대교 종교 집단들 중에는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알려진 것은 대부분 외부인들이 작성한 것이며, 이것들은 대부분 상당히 비우호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1세기의 유대인 모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약 37-100)였는데, 그는 자기가 적어도 유대교의 세 주요 집단, 곧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에 가담해서 활동했었다고 말한다."(64-5)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 〈마쉬아흐〉(mashiah)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주님〉(그리스어로 christos)이라는 뜻이다. 수 세기 동안─특히 강력한 적들로부터 괴롭힘 당하던 시기에─유대인의 사고 속에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던 주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충만한 영광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을 다스리는 지복의〉 시대를 시작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을 넘어서면, 제이콥 뉴스너의 말마따나 유대교는 〈메시아에 대한 깔끔한 교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실제로 쿰란 문서를 기록했던 유대인들은 심지어 두 명의 메시아, 곧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과 기름 부은 받은 왕〉의 출현을 예견하기도 했다.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아 대망은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한 관념들의 거대한 덩어리〉였다고 하겠다." "메시아의 강림은 종종 종말 곧 〈죽은 의인들의 부활 및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곤 했다."(70-1)


제2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일반 교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운동의 활력은 〈공동 식사를 핵심으로 삼아〉 가정집에서 함께 모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필시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키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그 거룩한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단체의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복음서의 전승을 구성하는 문서자료를 최초로 수집하는 일이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점이 바로 복음서들이 때때로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을 나타내는 이유를 밝혀준다. 맨 처음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운동이 처한 전투적 상황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극히 적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로마인들이 가한 박해보다 이 박해가 기독교 신앙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97-9)


"바울은 혼자 여행하는 법이 없었다. 소수의 조력자들만을 대동하고 여행하는 법도 없었다. 도리어 많을 때는 40명이나 되는 신자들을 수행단으로 삼아 동행하였다. 이 정도 규모면 초기 〈회중〉을 구성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이를 통해 믿음직한 예배 분위기를 유지하고 새 신자를 맞이하여 이들과 더불어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바울의 수행원 가운데는 틀림없이 필경사(scribes)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제작하기 위해 손으로 받아쓰고, 한 번에 하나씩 옮겨 적는 방식을 사용했던 당시에는 필경사를 대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필경사 중에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가 로마서의 말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Tertius, 롬 16:22)─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헬무트 쾨스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사역은 외로운 선교사 한 사람이 벌인 소박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리어 치밀하게 준비된 대규모의 조직적 활동이었다.〉"(105-6)


"이교 세계에서는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고대 영웅 설화의 모든 요소, 곧 어떻게 한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완결판이었다." "더욱이 그리스도 이야기가 지닌 〈이교적 요소〉는 그리스-로마의 이교 신앙과 기독교 간의 문화적 연속성을 극대화시켰다. 이교도 출신의 개종자들은 자기들에게 친숙한 신들과 기적들에 대한 개념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훨씬 더 강한 수준의 헌신과 더 포괄적인 도덕성 및 훨씬 더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다신교로 퇴행하는 경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예수가 신성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인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그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되돌릴 수 없이 갈라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129-31)


"고대 도시에 만연한 불결함과 고통과 질병 및 익명성의 한복판에서 기독교는 긍휼을 베풀고 안전을 보장하는 섬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교 세계에서, 특히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긍휼을 〈성격적 결함〉으로, 동정을 〈병적 감정〉으로 간주했다. 긍휼이란 무상의 도움이나 구호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정의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지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긍휼은 이성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충동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과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긍휼을 간청할 때〉 철저히 〈외면할〉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저지는 계속해서 〈동정은 현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성격적 결함이므로 아직 미성숙한 자들에게만 용납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덕적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가 보여준 참으로 혁명적인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비가 자기 가족뿐 아니라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뻗어나간다는 점이다."(170-1)


"그리스도인 작가들은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혁명적이라는 점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예수에게 있어 남녀는 평등했다는 말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성차별적이지 않은 예수의 말이나 행동이 성차별이 만연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실제 젠더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객관적 증거에 따르면, 의심할 여지 없이 초기 기독교 여성이 이교도 여성이나 유대인 여성에 비해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 훨씬 더 평등한 권리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로마시의 지하에 위치한 지하묘지 중 기독교 구역에 있는 3,733기의 묘실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인 여성에 대한 추모 비문이 그리스도인 남성에 대한 추모 비문과 그 길이에서 차이가 거의 없음을 밝혀냈다. 이렇듯 〈추모 비문에서 남녀 간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유독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징이었고, 이 점은 그들을 도시의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별해주었다.〉"(186-7)


제3부 기독교화된 유럽의 성장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한 한 가지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필시 로마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다수의 시민이 신봉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비약적 성장 곡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수천 명이 개종하게 된 상황을 모르고 지나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를 군중들이 〈진심이 담긴 환호소리와 함께〉 맞이한 것은 그가 단지 승리자로서 입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주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가 예전이 관례대로 유피테르 신전에 올라가 이교의 신들에게 제사 드리기를 거부하자, 로마시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을 것이다."(250-1)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기여한 주요 업적은 성직자들을 부와 권력과 신분이 보장된 고위층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삼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한 것은 기독교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수혜자로 만들어 제국의 재화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누리도록 한 것이었다.〉 법률상의 특권과 권력이 성직자들에게 아낌없이 하사되었다. 주교가 주관하는 교회 법정이 공식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세금을 비롯한 공적 의무를 면제받았다. 아울러 주교들은 〈이제 가장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과 동급의 고위층이 되었으며···이에 따라 그들은 국가를 위한 재판관과 지사와 정무관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귀족 가문 출신의 사람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쇄도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한층 더 세속적으로 변질되면서 이전의 활력을 상실한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255-6)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주의를 불법화하지 않았고,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도 용인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가 이교 신전을 용인한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가 계속해서 이교도들을 집정관이나 지사를 비롯한 최고 고위직에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 철학자들이 그의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태양신을 묘사한 그림이 그가 주조한 동전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실로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신랄한 언사를 내뱉은〉 대상은 이교도가 아니라 도나투스파와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 및 발렌티누스파 마르키온파 같은 영지주의 분파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기번 이래로 주요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신실성이 결여된 정치적 꼼수로 격하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진정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치세 동안 이교적 요소를 존치시킨 것을 종교적 화합을 추구하는 그의 의중이 반영된 사례로 인용한다."(261-2)


"통념적인 역사관과는 달리 이교주의는 즉시 소멸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것은 아주 서서히 종적을 감추었다." "초기 무슬림 군대가 639년 하란(Haran)을 공격할 당시 그 도시에서는 아직도 이교도가 그리스도인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아랍인들과 협상하기 위해서 파견된 대표단은 모두 이교도였다. 사실 10세기 말까지도 그리스를 포함하여 그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다수의 이교도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이교의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도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당한 시기 동안 로마의 몇몇 주요 도시를 포함하여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던 종교적 관점과 관행은 이교주의와 기독교가 습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끝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교주의가 유럽에서 결코 완전히 소멸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에 동화된 형태로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교의 축제들이 매우 얄팍한 기독교적 외피를 입고 계속되었으며, 이교의 신들도 그런 식으로 많이 살아남았다."(270-1)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교회에 대한 국가지원을 중단하고 이교의 신전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는 제국의 고위 관직을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교도들로 교체하였다. 그가 시행한 조치 가운데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전을 가르치는 것을 불법화한 것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상류층 부모가 자식을 이교도에게 보내어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전 교육(paideia)의 커리큘럼 안에 무의식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언어 및 표정과 더불어 무수히 코드화된 기호체계를 습득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이러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고대 로마의 엘리트 문화 속에서 경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가 가한 가장 심한 상처〉는 끔찍한 박해의 시대가 또다시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안겨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원주의를 반대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리아누스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276-7)


"이교도의 영향과 세력의 쇠퇴는 매우 서서히 나타났는데,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에 작용한 주요 요인은 다름 아닌 기회주의(opportunism)다. 율리아누스의 짧은 치세를 제외하고 나면,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황제의 제위는 줄곧 기독교의 수중에 있었고 이후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내로라하는 이교도가 계속해서 정무직에 임명되고는 했지만 이들의 전망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교회 내에 권력과 재력이 보장된 자리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었다. 성공을 추구하는 개인과 가문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저 브라운의 말마따나 〈기독교를 통해 권력층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이 고조된 것은 반이교주의 법령이나 신전의 폐쇄보다 다신교의 종언을 앞당기는 데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적잖은 이교 철학자들도 이교주의를 이탈하였고, 그 가운데는 기독교의 지도급 주교가 된 이들도 있었다."(284-5)


제4부 중세의 흐름


"역설적이게도 서구문명이 발흥하는 데 가장 유익을 준 요인이 바로 로마의 멸망이었다." "로마는 자유민들조차 대부분 최소한의 생존수준에서 연명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성취할 만한 잠재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약탈적 지배층이 '잉여' 산물을 다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붕괴 덕분에 〈그 동안 세금을 갈취당했던 수백만의 인구가 그들을 마비상태로 몰아가던 억압에서 놓여남에 따라〉 새로운 기술이 다수 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자리 잡으면서 보통 사람들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감소하던 인구가 마침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생산계급의 고혈을 짜내어 지배집단의 엄청난 낭비를 충당하거나, 황제의 자존심을 위해 거대 기념물을 축조하거나 숱한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지원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에 '암흑시대'로의 '몰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348-9)


# 중세의 발전

1. 기술 분야 : 물방앗간과 풍차 보급, 삼포제 경작 시행, 굴뚝과 안경의 발명 등

2. 자본주의 : 이윤, 재산권, 신용, 대출 같은 자본주의적 측면들에 대한 논의들

3. 도덕 분야 : 노예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에 반대함

4. 음악 분야 : 둘 이상의 곡조를 동시에 내어 화음을 만드는 다성음악의 출현

5. 미술 분야 :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 색유리 장식, 회화에 유성 안료 사용 등

6. 문학 분야 : 토착어를 쓴 단테와 초서 및 중세 무훈기를 남긴 무명의 작가들

7. 교육 분야 : 고등 학문을 다루는 대학의 등장으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함

8. 과학 분야 : 수백 년 동안 축적되어온 점진적 진보가 16세기 과학혁명 도출


"중세는 흔히 '신앙의 시대' 내지 '믿음의 시대'라고 기술되곤 하지만, 실제 중세 유럽의 대중은 의외로 회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결여하고 있었다." "중세기의 신앙생활에 대한 통계보고는 극히 적지만,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전해지는 신빙성 있는 보도는 의외로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의 내용 가운데 놀랍도록 일치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은 종종 교회건물 자체를 멋대로 이용했다. 1367년에 요크 대주교였던 존 토레스비는 교회 안에서 시장을 여는 행위, 특히 일요일에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주교들마다 〈기도하는 집을 도둑의 굴혈로 만드는 자들을 질책했지만 허사였다.〉" "중세 유럽인들의 이러한 태도나 저조한 교회출석을 감안할 때,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했던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370-6)


"중세기에 기독교에 대한 낮은 헌신도를 나타낸 것은 일반 대중만이 아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급 성직자도 마찬가지였다." "730년에 가경자 비드(the Venerable Bede)는 장차 주교가 될 에그버트에게, 영국의 사제들과 수도사들 가운데 라틴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으므로 〈나는 수차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공했다〉고 말했다. 1222년에 옥스퍼드 회의는 교구 성직자들을 〈귀 먹은 개들〉이라고 묘사했으며, 1287년에 대주교였던 페첨은 〈사제들의 무식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성직자들이 평신도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은 단지 무식하다는 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비슷하게 방종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몬 더피의 보고에 따르면, 〈성직자들 사이에도 축첩이 만연한 탓에 무일푼의 성직자라도 집안 가득히 자녀들을 거느리고, 일요일마다 허접한 방식으로 전례(liturgy)를 집전하는 꼴이···유럽 전역에서 다반사였다.〉"(379-81)


"15세기가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로마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를 포함하여 유럽의 모든 식자층 가운데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구체(sphere)라는 용어는 13세기 초에 나온 중세 때 가장 인기 있던 천문학 교과서의 제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콜럼버스가 반대에 직면했던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둘레와 관련해서 그가 매우 잘못된 주장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일본까지의 거리가 약 4,500킬로미터라고 추산했는데 실제로는 약 22,400킬로미터에 달한다. 사람들은 지구의 둘레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에 대해 반대한 것은 콜럼버스와 그의 선원들이 전부 해상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와 그의 아들이 남긴 『콜럼버스 제독 이야기』를 포함하여 당시의 기록 어디서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콜럼버스가 증명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400-1)


"'암흑시대'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혁명'이란 것도 없었다." "존 로크는 스콜라학자들을 사소한 일에 골몰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덮기 위한 방편으로 쓸데없는 용어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조폐국장〉과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천사가 바늘 꼭대기에서 춤출 수 있는지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제를 논한다고 조롱했다. 결국 〈스콜라적〉이란 어휘는 대부분의 사전에서 〈진부하고 교조적〉이라는 말로 정의되는 형용사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16,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적 성과는 경건함으로 명망이 높은 일군의 학자들이 내놓은 것이었다." "'과학혁명'의 서막을 연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난데없이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콜라학파에 속한 교수들로부터 지동설에 기초한 태양계 모델을 가능케 하는 기초 개념들을 배웠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져온 발견과 혁신의 긴 경로가 지향하던 그다음 단계로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405-6)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태양계의 중심에 두고 지구를 행성 가운데 하나로 보고서 태양 주위를 돌게 하였다. 그의 업적에 특별히 빛을 더해준 것은 그가 그것을 수학을 통해 표현한 것과 자신의 체계를 기하학을 통해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해당되는 천체가 미래에 오게 될 위치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부활절과 하지 및 동지 등의 날짜를 확정하는 데 매우 긴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 결과가 기원후 2세기부터 전해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토대를 둔 계산 결과보다 더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 내의 궤도들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체계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들의 궤도 안에는 회로(loops)가 있어서 천체들의 움직임을 지연시킨다는 가설을 세워야만 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독일의 개신교도였던 요하네스 케플러가 나타나서 코페르니쿠스의 원형 궤도를 타원형 궤도로 대체했다."(408-9)


"과학은 16세기 불현듯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수 세기 전에 스콜라학자들이 품었던 경험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이들이 혁신을 위한 체계적 노력을 경주함에 따라 새롭게 설립된 대학에서 그 자양분을 얻었다." "과학이 오로지 유럽에서만 발흥했던 까닭은 중세 유럽인들만이 과학을 연구 가능한 바람직한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세적 기풍(medievalism)이 과학운동의 형성에 미친 최대의 기여에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비밀, 즉 인간이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확신이 어떻게 유럽인의 마음에 그렇게 생생하게 뿌리내리게 된 것일까?···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합리성에 대한 중세의 고집스러운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여호와가 지닌 인격적 활기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하는 합리성을 겸하여 지닌 존재로 이해되었다.···따라서 자연에 대한 탐구는 합리성을 통한 신앙의 논증으로 귀결될 뿐이다.〉"(415-6)


"갈릴레이가 로마의 이단심문소에 소환되어 지구가 움직인다고, 즉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하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인해 고발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투옥된 적도, 고문을 당한 적도 없다. 그는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그러던 중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 "갈릴레이 사건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북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도전이 여전했고, 30년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가톨릭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고발에 대해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신학의 수용 범위는 축소되고 있었다."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론을 가설적 내지 수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에 직접적인 신학적 함의가 없다고 주장하는 보다 신중한 전략을 채택했었다. 교황이 갈릴레이에게 요구한 것도 〈자연과학을 통해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422-3)


제5부 분열된 기독교 세계


"수 세기 동안 교회는 대중적인 개혁가들의 활력을 새로운 수도회 창설로 유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험한 대결을 비껴가게 해주었다." "성 프란치스코(1181-1226)가 이단으로 기소되지 않은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결코 성직자로 서품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청빈과 겸손의 덕에 대해 설교하였고, 이는 특별히 성직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1209년, 그는 열한 명의 제자를 데리고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여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로 허락되었다." "도미니코(1170-1221)는 1214년 툴루즈에서 탁발수도회를 설립했는데, (공의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그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이들 역시 창시자의 이름을 따 도미니코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회와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교회개혁을 위한 대중적 설교를 사명으로 출범하여 교황을 지지하는 대중적인 설교로 전환되었다."(447-8)


"최초의 거대한 이단운동인 카타리파(Cathars)는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보고밀(Bogomil) 운동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이 어디였든 간에, 카타리파는 〈가톨릭교회를 대놓고 사탄의 교회라고 부르면서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저돌적인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이 서유럽에서 신속하게 추종세력을 얻게 된 것은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신학은 초기 영지주의의 신학과 매우 유사했다. 두 신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선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신이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물질세계가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끔찍하고 사악하기에, 선한 신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음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카타리파는 세계가 악한 신(타락한 천사)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이 악한 신은 다름 아닌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선한 신이 보낸 천사였으며, 그의 메시지는 이 세상의 악을 거부하고 선한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51)


"카타리파가 일부러 교회 밖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발도파(Waldensians)는 처음부터 교회개혁에 전념했던 수도원 운동의 초기 형태로 시작했다. 이 집단은 피에르 발도 내지 발데스라고 불리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에 의해 창시되었다. 1176년 발도는 자기가 의뢰한 신약성경의 프랑스어 번역을 읽고 난 후 복음서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깨닫게 되었고, 곧이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희사한 후에 사도적 가난(apostolic poverty)을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즉시 그의 주변에는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리용의 빈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179년 발도파의 대표들이 로마로 가서 교황의 공식 승인을 요청한 것은 상당한 염려를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그들의 생활방식은 축복했지만 그들이 설교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454-5)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자신을 인문주의자이자 지성인으로 내세웠지만, 실상 그는 가장 악명 높은 〈게으름뱅이였으며···교회의 필요가 아닌 화려한 볼거리와 도박에 돈을 탕진한 희대의 탕아였다.〉 돈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는 면죄부 판매를 위한 공격적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루터를 격분케 하고 많은 군주들을 루터 편으로 돌아서게 한 요인이었다. 영주들 편에서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 굳이 신학적 반대 가은 것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면죄부 판매로 인해 막대한 양의 부가 그들의 백성들로부터 로마로 유출되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교회는 단연코 유럽에서 최고의 부자이자 최대의 지주였다." "교회는 소유 재산에 대해 일체의 지방세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군다나 교회는 엄청난 양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유럽에서 소작농으로부터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십일조를 부과함으로써 축적한 것이다."(468-9)


"이 시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 루터의 종교개혁 및 기타 개신교 종교개혁에는 엄청난 역설이 존재한다. 이 '개혁들'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개혁의 각 주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속화된 종교적 독점이 주는 여러 가지 폐해를 노출했던 반면에, 그들이 반기를 들었던 가톨릭교회는 극적인 과정을 거쳐 개혁을 위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신교의 도전으로 인해 경건형 교회가 (권력형 교회를 제치고) 권력에 복귀하게 된 것에 기인하며, 이 교회는 그 후로 다시는 위축되지 않았다. 반종교개혁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진 가톨릭의 종교개혁은 트리엔트 공의회(1551-1552, 1562-1563)를 통해 출범하였다. 성직매매가 근절되었고, 사제에 대한 독신이 강력히 시행되었다. 각국의 언어로 된 공인판 성경이 저렴하게 보급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감이 확실하고 박식한) 사제 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 체제가 확립된 것이라고 하겠다."(479-80)


제6부 신세계와 기독교의 성장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주에서 나타난 매우 낮은 수준의 종교적 참여도는 초기 정착민들이 유럽에 만연하던 현상을 그대로 가지고 왔음을 시사한다. 식민주의자들 가운데 미국에서 시온을 건설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종파에 속한 신자는 거의 없었다." " 그러나 유럽에서 기독교가 누리던 신앙의 게으른 독점은 미합중국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식민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던) 국교회 체제는 지속되지 못했다. 1776년에 이미 다종파적 상황이 실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새롭게 등장함에 따라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교파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교파들은 모두 동등한 조건하에 설립되었으므로 정부의 편파적 지원 같은 것이 없었고, 교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교회들 간에 극심한 경쟁이 유발되었다. 미국인들을 신앙을 위해 동원하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 결과 1850년이 되면 미국인의 삼분의 일이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513-6)


"종교 간의 경쟁이 '값싼' 종교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은 가격을 가치로 오인한 것이다. 소비시장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대개 최저가의 제품을 서둘러 구매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돈에 견주어 최대의 가치를 제공하는 상품을 선택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하려 한다. 종교의 경우, 사람들은 최소한의 것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정당한 희생에 대해 종교적으로 최고의 보상을 제공하는 신뢰성 있는 종교로 몰려간다." "미국에서 번창하는 초교파교회들은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은 교회들이다." "요구하는 것이 많은 종교 집단은 요구하는 것이 적은 종교보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더 많이 끌고 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한 종교 집단은 새로운 교인들을 충원한다. 다시 말해서 그 교인들은 너무나 헌신된 나머지 다른 이들을 교회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려고 애쓴다. 요구하는 것이 덜한 종교의 교인들은 이러한 일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520-5)


"다종파적 상황이 모든 종교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다종파적 상황이 종교적 갈등을 유발하여 심한 경우 전쟁이나 박해로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당연시되어왔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유혈사태가 야기된 것은 바로 단일 종교 체제에 맞서는 도전자들을 진압해온 정책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종교적 갈등은 한 사회 안에 너무 많은 종교 집단이 경쟁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적은 종교 집단[의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상호경쟁적인 종교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이 발달하여 '다종파간의 균형'이 생겨나게 된다.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은 공적인 표현과 행동이 상호 존중의 원리에 따라 통제될 때 생겨난다. 다종파 간의 균형은 일단의 경쟁 집단들 간에 권력이 고르게 분산되어 갈등이 어느 편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생겨난다."(528-30)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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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제1부 부르주아지의 토대


1 부르주아지(들)


"19세기 부르주아지를 정의하기가 더욱 까다로운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부르주아 중 상당수는 부와 위신, 명성, 사회적 상승에 대한 크나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유능한, 운좋은, 또는 매우 파렴치한 사람들의 사회적 상향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존 록펠러나 앤드루 카네기에 필적하겠다는 희망을 품을 만한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 두 사람의 신분상승은 전설로 남아 사람들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모험심 강한 부르주아 중 몇몇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급속하게 출세했다. 평범한 지방 공증인의 아들인 외젠 슈나이데르와 아돌프 슈나이데르 형제는 한 세대 만에 프랑스의 철강왕으로 등극했다. 카네기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도착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된 전설적인 인물이다."(30)


"사회·경제적 성공담을 양산하는 역사적 계기는 특히 미국에서 지속적이고 매혹적으로 작용했다. 전설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이 거대한 나라는 신속한 성공이라는 백일몽을 꿈꾸는 많은 유럽 사람들로 하여금 대륙을 떠나게 만들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빅토리아 시대에 범람했던 성공문학, 즉 언제나 해피엔드로 귀결되는 현대판 동화들은 각국 출판업자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허레이쇼 앨저의 인기 소설들은 주로 무일푼 고아의 신분상승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그는 이런 기적적인 성공담을 100편 넘게 남겼다. 그의 책들은 작가의 창조력에 바치는 찬사와도 같다. 앨저와 그 아류 작가들은 개방된 사회를 묘사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감격시켰던 백일몽, 즉 단숨에 재산을 축적하고 그것은 어떠한 장애물로도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공과 실패의 양극단 사이에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신분상승의 사다리에는 부러진 가로대가 많았던 것이다."(31-2)


"오스트리아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자유의 확대에 소극적이면서도 그 이득을 탐하는 일군의 무기력한 종복 역할에 만족할 때, 다른 나라에서는 정치적 열정을 품은 부르주아들이 정책결정자들의 회의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유럽 각국의 정치 형태는 헌법 없이 통치하는 군주국으로부터 의회와 협상하는 군주국, 대통령제를 표방하는 공화국으로부터 폭력으로 헌법이 흔들리는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은 잠정적으로 라인 강 동쪽에서 중간계급의 정치의식을 확실히 고취시켰는데, 북부 프랑스와 도버해협 저편에서는 이미 그러한 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혁명과 나폴레옹의 시대가 풀어놓은 중간계급의 열망이라는 마귀를 다시 병 속에 가두려고 누구보다도 애썼던 메테르니히는 1820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오만불손이라는 도덕적 타락〉에 빠진 사람들은 〈주로 사회의 중간계급〉이라고 말했다."(50)


"자의식보다는 공포심에서 나온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격렬한 거부감은 중간층에게 현실 상황 못지않게 의식이야말로─비록 내적인 차이나 극복하기 힘든 지속적인 긴장이 있었더라도─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음을 시사한다. 이 정체성은 대체로 부정적인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 "보통 부르주아의 특징은 대체로 중간계급의 일원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말에 대한 금지라고들 한다. 그러나 만일 부르주아의 모토가 자기부정이라면, 이는 그들의 열정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길들여졌기─프로이트의 표현으로는 〈다듬어졌기〉─때문이다. 거친 농민이나 노동자, 혹은 방종한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자면 근대 부르주아지는 그 원시적인 충동을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철저하게, 그리고 특히 19세기에는 가엾게도 노상 억눌렀던 계급이다. 하지만 다듬어졌다는 것이 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의 쾌락은 자제를 통해 통제, 완화, 조정되었다."(52-3)


"또 다른 부정적 요소가 19세기 부르주아로 하여금 공동의 정체성을 갖게 했다. 그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도시에서 확실히 소수 집단이었다." "부르주아는 의복, 음식, 억양, 취향 등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자신들을 '열등한' 사람들과 구별하고, 주변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그러나 이 격동의 시대에─프랑스 대혁명에서 제1차 대전의 발발에 이르는 19세기에는 무수한 바리케이드전이 벌어졌다─대다수 하층계급의 존재는 불길한 징조였다. 그 때문에 부르주아는 사회 불안이 아니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귀족이나 선동가와의 편의상의 협력 같은 방어조치를 취했다. 바로 이 순간 부르주아는 질서당의 주역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반세기 이상 대부분의 부르주아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주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면서, 다양한 색깔의 부르주아를 단합시키는 심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53-5)


"이 시대의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그 적들, 즉 점차 증가하는 일군의 난폭한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정의되었다. 이들 중간계급의 적이야말로 부르주아 내부의 다양성을 근거 없이 간과하게 만든 무책임한 일반화를 야기한 장본인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악역을 맡아서 부르주아의 미덕에는 입을 다문 채 온갖 악덕만을 지적했다. 화가, 소설가, 극작가, 문화평론가, 급진 정치가, 진보적 언론인, 그리고 중간계급의 모반에 격분한 귀족들은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위선적이고 물질을 숭배하며 저속하고 관대함이나 애정 따위는 결여한 존재라고 떠들어댔다. 이 부르주아지의 적들은 기회만 있으면 또 다른 경멸어린 부르주아상을 만들어냈다. 즉, 욕심 많고 파렴치하며 권력에 굶주리고 무정하며 자신을 성장하게 한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존재로서의 모습이다. 이들의 시각대로라면 너그러운 토머스 칼라일이 산업의 지도자로 찬미했던 금융가들과 공장주들은 강도 귀족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55)


2 "홈, 스위트 홈”의 그림자


"19세기 중간계급 가정에서 진행된 오이디푸스 갈등극은 부르주아의 재산 증대, 산아제한의 확산, 그리고 노동 영역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뚜렷해진 남녀의 분리, 요컨대 저 유명한 근대 가족의 승리를 반영한다. 근대 가족은 그 부드러운 측면과 권위적인 측면 모두에서 삶의 연습무대였다. 그것은 의식적·무의식적 요구들을 만족시키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도 했다.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조상들보다 자녀들을 더 많이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만, 새롭고 안정된 삶 덕분에 자녀들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 숭배는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늘렸으며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핵가족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가정에 대한 애착 역시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 강도가 높아졌으며 그 의미 또한 전에 없이 이상화되었다. 부르주아 문화는 남성에게 가족을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는 주된 동기로 여기도록 가르쳤다."(69-73)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반(反)권위적인 부르주아 가정은 진보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가정은 평등을 부여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은 아내에게는 피난처인 동시에 감옥일 수 있었다." "여성의 우위는 감성 영역, 즉 심미적 감수성, 여성적 갈망, 어머니의 지혜, 본능적으로 나타난 사회적 미덕 등에 국한되었다. 남녀의 역할분리는 편리하게도 여성을 투표할 권리,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 독립적으로 은행계좌를 개설할 권리, 이혼절차의 평등, 그리고 그 밖에 남성의 영역으로 알려진 다른 권리로부터 배제시켰다. 19세기 말 남편이나 애인 살해로 법정에 선 프랑스 여성들이 통상 무죄 방면되었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이러한 방면의 이유는 대개 피고의 타고난 비합리성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특정 부분에 있어 본래 무능하다는 사고방식은 흔히 신성불가침의 전통으로 생각되는 미신적인 확신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많은 남성들을 만족시켰다."(77-8)


"부르주아 가족의 삶을 변화시킨 빅토리아 시대의 조용한 혁명 중에서도 낭만적 사랑, 혹은 그렇게 간주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듯하다. 대중소설, 감상적 그림, 시와 노래를 통해 대중화된 낭만적 사랑은 재산보다는 사랑으로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낳았다." "세기말에 이르러 여성들은 점차 일자리를 얻고 대학에서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공부했으며 그 법적 지위도 개선되었다. 그리하여 연애결혼을 하려는 노력은 예외라기보다는 법칙이 되었다. 그것은 쉬운 싸움이 아니었으며, 제1차 대전 이전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조화로운 연애결혼은 성적으로도 서로 어울린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성적 만족이 애착이나 영원한 성실만큼이나 진정한 사랑을 정의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긴장을 가정생활과 침대, 육아실, 부엌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89-92)


제2부 욕망 그리고 방어


3 에로스


"동성애에 대한 점잖은 사람들의 태도는 주로 고상한 척 회피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헝가리 의사 카롤리 마리아 벵커트가 1869년 이 교묘한 용어를 만들어낸 후로는 더 이상 비밀스런 주제가 아니었다. 세기말인 1895년 오스카 와일드의 센세이셔널한 재판이 진행된 뒤에 이 주제는 점차 널리 알려졌고 많은 이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비록 '도착증'이라든지 '역(逆)성감' 같은 무화과 잎으로 점잖게 감춰지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말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은 동성애를 신의 계명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러한 성적 행동에 모종의 순수함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그리스 식 사랑에 비유하곤 했다. 플라톤을 읽은, 즉 고전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부르주아에게 고대 아테네 문화의 권위는 결코 퇴색하지 않았다. 나이 든 남성이 미소년을 사랑하는 관행은 특정 상황에서는 사회적으로 용납되기도 했을 만큼 결코 은밀한 행동이 아니었다."(101-2)


"슈니츨러와 '귀여운 아가씨'들의 관계를 보면 그가 소년기의 갈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했다는 의혹이 생긴다." "슈니츨러는 계속해서 '귀여운 아가씨'들과 정의 상 이미 누군가에게서 '순결'을 잃은 유부녀들 사이에서 숫처녀를 찾아 헤맸다." "절대적인 성적 순결에 대한 슈니츨러의 갈망은 이따금 찾아오는 불안이 아니라 중증 질환이었다." "슈니츨러가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의 직·간접적인 여성비하가 전통적인 이중 도덕을 가진 대다수 부르주아 계급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이런 뻔뻔한 일면과 달리 슈니츨러는 불쾌한 남성 주인공들을 창조하여 자신의 너무나도 진부한 남성 이데올로기를 풍자할 만큼 복잡 미묘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뻔뻔한 이기주의자이자 동침한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도 결혼할 생각이라고는 없는 도시 남성, 요컨대 그 자신이었다."(105-9)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저항과 그들의 유례없는 승리는 남성이 여성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전통적인 도덕관에 대해 점증하는 불만의 표시였다." "가장 원칙론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대개 중간계급 출신의 이상주의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보헤미안들이나 부르주아를 증오하는 급진주의자들보다는 오히려 같은 계급의 소수 남성들로부터 충성스런 지지를 받았다. 이들 모두는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지배적인 문화적 행동방식에 도전했다. 여기에는 에로스가 여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포함되었다." "그것은 처절한 투쟁이 되었다. 왜냐하면 성모마리아의 이야기를 동화로 여기는 부르주아에게 처녀성 숭배는 종교적 도그마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들은 이런 도그마를 강화시켰으며 그것을 위반하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것은 중간 계급에게는 사회적 지위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였다."(113-4)


"빅토리아 인을 경멸하는 역사가들은 당시의 부르주아 남편들이 결혼생활에서의 성적 좌절을 보상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매춘업소나 합창단원들에게 의지하거나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비방을 한 세기 이상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대 중간계급의 생활을 특징짓는 풍부한 가능성을 왜곡하는, 악의적이며 근거 없는 또 하나의 전설이었다." "오히려 가장 널리 사용된 치료법은 부부간의 더 잦은, 그리고 보다 나은 성관계였다." "점잖은 부르주아를 만드는 도덕적 훈련은 타고난 야만적 욕구를 사랑의 만족감으로 문명화시키는 작업을 포함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육자들에게 절제와 금욕은 동의어나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였다. 빅토리아 인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승화'라고 불렀던 것을 굳게 믿었다. 말하자면 성욕을 예술적·지적·수공업적 활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부르주아는 훗날의 비판자들이 주장했던 것보다 더 자주 부부의 침대에 금욕보다는 절제라는 단어를 적용시켰다."(118-9)


4 공격성을 위한 변명


"인간이 강한 공격 충동을 타고났다는 것을 의심하는 빅토리아 인은 드물었다. 그러한 논의에 무언가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해도, 1859년에 찰스 다윈이 획기적인 『종의 기원』을 발표한 후로는 사라졌다. 이제는 고전이 된 이 책의 논점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공격욕은 생래적이라는 것이다. 다윈의 무신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살아남는다는 것은 야성적인 생존투쟁의 결과이며, 이런 투쟁은 인간적인 계획에서 벗어남에 따라 더욱 끔찍해진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의 계명은 심각한 경쟁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악덕기업가들은 이 새로운 섭리를 환영했는데, 그것은 다윈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인 사회진화론자들이 정치와 산업, 외교와 사회정책에 나타난 냉혹함을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좀 더 온건한 다윈 추종자들은 완전히 반대로 해석했다. 조직화된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경고로 본 것이다."(139-40)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에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  따르는 쾌감은 점차 사라지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동정심 어린 반론이 여러 부모와 교사, 그리고 작가들 가운데 상당한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가정 폭력이 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진단이 가능하다. 국왕의 총애를 잃은 정치가들의 운명은 특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6~17세기에는 그들 대부분이 단두대로 보내졌다. 18세기에 그들은 자신의 지방 영지로 '추방'되어 정치판에서는 무력하고 무능한 방관자가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그들은 근대적 발명품의 이득을 누렸으나, 공직을 떠나서도 생명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는 공인된 야당을 결성했다. 심지어 그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남았으며 향후에는 관직에 복귀하리라는 실현가능한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150-2)


"1871년 늦은 봄 파리 코뮌에 가해진 프랑스 군대의 보복 행위는 정부의 가혹한 억압에 담겨 있는 공적 복수의 사악함을 잘 보여준다." "코뮌의 운명은 프랑스의 쓰라린 군사적 패배 이후 더욱 잔혹해진 왕당파의 복수심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많은 부르주아로부터 환영받은 계급투쟁이기도 했다. 코뮌 이후 프랑스 작가들이 펼친 부르주아 변호론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시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테오필 고티에는 코뮌 지지자들을 〈야수〉, 〈고릴라〉라고 불렀다. 플로베르의 친구이자 자유주의적 시사평론가이며, 선구적 사진작가이자 파리의 역사를 쓰기도 했던 막심 뒤 캉은 그들을 일러 정치라고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애에 빠진 야심가들이며 권력에 도취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극작가 에르네스트 페도도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이제 야만도 미개함도 아니라 단지 수성(獸性)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야만적인 〈문명의 구세주〉에 반대하는 의견이라고는 한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154-5)


"그러나 미국 독립선언으로 폭발한 진보적 열정은 반세기 동안의 헛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은 수십 년간 지속된 정치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노예제 폐지운동과 사회입법의 역사는 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이 말과 행동으로 인도주의적 개혁을 고무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19세기 중반의 부르주아 다수는 10시간 노동제, 아동노동 금지, 문맹 퇴치, 그리고─용감한 소수는─여성참정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거나 적어도 거기에 동의했다." "노예폐지론자들조차도 마음속으로는 흑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흑인과의 연대 캠페인을 계속했다. 그러나 자신의 인종, 국가, 종교가 진화의 나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 편리한 확신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긴요한 경제적·영토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 인종 간의 위계에 대한 사악한 가르침은 많은 예민한 양심을 무디게 만들었던 것이다."(157)


"슈니츨러가 생각하기에 인종주의적 주장을 낳은 열광과 정치적 기회주의가 혼합되어 발생한 반유대주의적 사건들은 근대 대중정치가 〈대중이 가장 저열한 본능〉에 호소함으로써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는가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치가들은 종교를 불문하여 실제 경제 악화나 정부의 추문에 책임이 있는 개인에게 화살을 겨누는 것보다 유대인들을 원흉으로 선택함으로써 경제적 동요와 정치적 부정행위가 결합된 복잡한 망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니츨러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찰은 공격성을 위한 변명이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보여주는 날카로운 진단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적이 필요했으며, 공격자들은 적의 죄상을 크게 왜곡하거나 심지어 날조하기까지 했다. 한 세기 전 윌리엄 블레이크는 일반화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바보들을 동원하는 수단이기도 했다."(164)


5 불안의 이유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신경과민증에 누구보다도 심하게 시달렸다. 그러나 그에게 좋은 동반자들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는 다른 시대의 부르주아보다 더 많이 불안해했다는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겠지만, 불안을 근대의 질병으로 진단하고 그것에 전문용어, 즉 신경쇠약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사람들이 빅토리아 인이었다는 사실은 꽤나 그럴 듯하다." "19세기인은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합리적일 수도 혹은 현실적일 수도 있었고, 내면의 스트레스 혹은 객관적인 경고 신호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완벽한 대담성이라는 빅토리아 시대 남성성의 이상은 현실의 삶을 위해서는 빈약한 준비임이 분명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상황이든, 이념이나 소망이든 말이다."(177-8)


"신경증의 원인으로 제일 먼저 의심받은 것은 산업 시대의 개막과 밀접하게 연관된 전문화였다. 비판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다양한 인간 활동 대신에 나타난 무서운 고독이야말로 공장제가 그들이 장악한 노동자들에게 가한 직접적 결과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난한 노동자들이 그 주된 희생자로 여겨졌다. 근대적 노동 분업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걸작 『국부론』에서 그 야누스적 성격을 명료하게 분석했다.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이 새롭고 효율적인 방법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정신과 영혼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단조로운 임무를 날마다, 해마다 수행하는 것은 공장노동자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존립에 바탕이 되는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능력을 빼앗을 수 있다. 그들은 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로 떨어지고, 풀려날 전망이라고는 없는 냉혹한 메커니즘의 노예로 강등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 역시 암울한 시대의 희생자에 포함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84)


"19세기 사회학자들은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설명하기 위해 난해한 개념들을 동원했다. 헤겔이 처음 받아들였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무기로 사용한 '소외' 개념은 쉴러에게 '파편화'라는 용어가 수행했던 기능을 떠맡았다.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든 책상 앞에서 일하든 자신의 동료와 노동,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 될 운명이었다. 전체성은 영원히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부르주아는 물론 다른 계급도 마찬가지로 탈도덕화─그 말의 모든 의미에서─된다고 주장했다. 또 1900년 무렵 에밀 뒤르켕은 '아노미'라는 신학 용어를 세속화시켰다. 이는 당시 만연했던 개인주의의 위험한 측면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와 같은 자기중심주의가 서구 사회를 건전한 공동체로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견고한 집단적 결속을 이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학적·역사적 평가는 막연한 사회적 불안에 확실한 토대를 제공했다."(185)


"유독 19세기에 신경증 현상이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의사들이 전에 없이 여성 환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예전보다 신경쇠약증이 더 많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의료화라고 불리는 시대현상을 반영하는데, 이는 불편한 기분과 이상한 행동의 원인을 신의 징벌이나 악마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기보다는 정신적 상태로 돌리려는 경향을 뜻했다." "19세기 부르주아의 삶에 내재한 강력한 불안을 증언하는 상세한 기록들은 어쩌면 초보적이고도 진부하게 들리는 근본적 동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변화'였다. 역사가는 과거가 연속성과 변화 사이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간에 연속성의 토대 위에서 그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 대다수는 확실히 연속성을 지배적인 현실로 경험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불안이라고는 없었다."(192)


제3부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


6 신의 죽음 그리고 부활


"세속화의 진전에 대한 반교권주의자들의 희망은 자연의 민주화 과정으로 연결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세기 전환기 무렵 니체의 명성이 심지어 그의 책에 대해서는 그저 몇몇 인용구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을 즈음, 용감하게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908년 토머스 하디는 신의 장례식에 대한 장중한 시를 썼다. 그러나 이런 부음은 다소 성급한 것이었다. 다윈의 시대는 동시에 교황 피우스 9세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적자생존을 이야기했던 반면 다른 경건한 누군가는 성모마리아가 현현했다는 장소를 순례했으니, 양자는 다소 거북스럽지만 공존했다.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선언들, 예컨대 교회 학교, 교회 건축, 정치적 행동, 교의와 의식을 둘러싼 논쟁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지형에서 가장 시끄러운 말썽을 일으켰고, 작은 다툼에서 큰 전쟁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형태의 분쟁을 낳았다."(218-9)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빅토리아 시대가 세속화되고 있었다는 명제는 역사가들의 신중한 검토를 요한다." "이성적이고 정직한 많은 빅토리아 인은 오랫동안 신앙과 불신앙에 대해 똑같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근거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신을 고문했다. 허먼 멜빌도 그중 하나였다. 1857년 가을 그는 친구인 너대니얼 호손의 집에 며칠간 머물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산책하고 시가를 피웠으며 영혼의 불멸성을 포함한 난해한 주제들을 토론했다. 〈멜빌은 확실한 신념을 가질 때까지는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를 알고 지낸 뒤에, 아니 그 훨씬 전부터, 그가 얼마나 이 황량한 지대, 우리가 앉아 있는 모래언덕처럼 단조롭고 음산한 곳에서 흔들리며 방랑을 계속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신앙을 가지지도 못하고, 속편하게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는 둘 중의 하나라도 감행하기에는 너무나 정직하고 용감하다〉고 호손은 일기에 적고 있다."(224-5)


"19세기 초에 '각성'을 깨뜨리는 작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볼테르, 흄, 기번, 디드로, 그리고 나머지 불경한 무리를 포함한 계몽주의자들은 탈도덕적 자연과학, 이교적인 미덕의 개념, 종교적 관용에 대한 무책임한 요구, 교회와 성인, 신의 역사를 교활하게 모독하는 선전을 통해 시를 삶의 밖으로 밀어낸 사람들이었다. 낭만주의에 따르면 계몽주의의 신봉자들은 종교를 가장 사악한 부정행위로 취급했으며 세상의 모든 악덕에 대한 책임이 종교에 있다고 여겼다. 그 무서운 결과는 바로 최근의 역사적 사건에 나타났으니, 무신론적인 프랑스 대혁명의 발생과 진정한 신앙이 사회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비참하게 밀려난 사실이 그것이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따르면 시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공격은 운율의 즐거움에 대한 단순한 공격보다 훨씬 더 지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들면서 종교가 삶에 주는 진실과 위안, 기적적인 은총을 빼앗는 것이었다."(227)


"기독교의 패배가 언제나 무신론자들에게 이익을 준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가 불러일으킨 북유럽 예찬 같은 독특한 신앙은 몇몇 시끄러운 지지자들을 갖고 있었다." "신지학의 창시자인 블라바츠키 부인은 과학과 종교와 철학의 종합에 불과한 자신의 '은밀한 교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독재적으로, 전지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선전했다."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한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명칭 자체가 간결한 자기표현이자 뛰어난 운동구호로서, 과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시대 조류에 현명하게 발맞춘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대안들은 심령론이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데, 그것은 고대에 기원을 두고 새로이 나타난 신앙체계 중에서도 가장 널리 전파된 것들이었다. 많은 빅토리아 인은 교회의 가르침을 더 이상 충실하게 따를 수 없으며 논리적·역사적·도덕적인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차갑고 비인간적이라고 깔보았던 자연과학의 도그마로 대체할 준비 역시 되어 있지 않았다."(232-3)


"당시 농촌 사회와 종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일한 존재는 농민들과 접촉했던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은 농민들의 도덕을 감독했으며 그들을 전도하여 신앙심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보고는 단편적이었지만, 19세기 농민들이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교회에 출석하거나 유서 깊은 의식에 참여하는 일이 결코 신실한 신앙심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로마 가톨릭 지역에서 흔해 행해진 성지순례나 축제행렬은 성직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걱정시켰다. 그것들은 음주가무,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온갖 일들과 더불어 점점 세속화되어 종종 부도덕한 오락이 되었다. 성직자들이 이런 볼썽사나운 행동에 당황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표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심과 탐욕은 종종 한 사람 내부에 공존하며 대체로 분리하기 어려웠다. 이는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였다."(245)


7 의심스러운 노동의 복음


"부르주아 십계명 중 하나인 노동의 복음이라는 이 경건한 표현은 지극히 적절하다. 왜냐하면 중간계급 이론가들에게 노동의 이상은 단지 꾸준한 근면함 이상의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노동은 하나의 윤리적 명령으로서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가 가치를 두었던 것들을 많이 내포했으며, 선량한 시민이라면 지켜야 한다고 느꼈던 원칙이었다. 그것은 기업가, 고객, 경쟁자들과의 정직한 거래, 자기수양, 가족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의무에 대한 경각심에 관한 것이다. 노동은 영혼을 정화하는 존재였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신앙심이 돈독한 빅토리아 인조차 감히 복음을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성경에 따르면 노동은 신이 불복종이라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아담과 이브, 그 후손들에게 내린 엄벌이었다. 반면 19세기 부르주아 이론가들에 따르면, 노동은 죄를 예방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노동하는 것은─물론 이것은 부르주아에게는 은유적 표현일 뿐이었다─기도만큼이나 효과적이리라 여겼다."(254)


"근대 부르주아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노동의 미덕에 대한 찬양은 돈벌이에 대한─확실히 저속한 이상이었다─장려를 내포한다. 그러나 굳이 변명하자면, 이러한 이상을 택한 사람들이 돈벌이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프랑수아 기조의 말, 즉 그가 수상으로 재직할 당시 하원에서 〈부자가 되라〉고 말한 것을 프랑스 인들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의 다음 말은 〈노동하고 검약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그는 의원들에게 노동과 절약을 통해 부를 추구하라고 권고하면서, 또 다른 부르주아의 이상을 호소했다. 그것은 자제(self-control)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지를 가장 열렬히 증오한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심지어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사명에 헌신하고 거기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부르주아의 노동 윤리에 얽매여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258)


"노동의 복음은 단연코,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부르주아의 이상이었다. 대체로 귀족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은 그것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거의〉와 〈대체로〉라는 제한적 표현은 단순한 일반화를 막는 데 필요한 장치다." "이 혁신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노동의 복음이 만장일치로 지적받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부를 획득한 유럽의 벼락부자들은 종종 부끄럼 없이, 심지어 간절하게, 자신의 돈을 점잖은 또는 고귀한 신분으로 전환시키려고 획책했다. 그들은 최고의 나태함, 즉 최상의 신분만이 노동의 얼룩을 씻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생애의 대부분을 근면한 노동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무역, 산업, 금융업의 세계로 도피하여 자신 또는 적어도 자녀들이 여가나 값비싼 예술품의 수집을 중시하는 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19세기의 거부들이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낭비〉를 통해 부를 입증하려 했다고 말했다."(262-3)


"중간계급 여성에게 적합한 노동의 장소는 가정이었다. 이들에게 가정 관리는 식량을 구입하고 하인들을 감독하며, 가정 예산 내에서 검소하게 살림하고 자녀양육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아내들은 보통 남편보다 자녀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 그들은 당대인들이 고통스런 향연이라고 부르곤 했던 만찬석상에서 안주인으로서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도록 우아하게 행동해야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남편들 중에는 어느 정도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가정 관리가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기화·기계화되었지만 하인이 없는 우리 시대의 가정과 비교할 때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이 해내야 했던 집안일은 당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엄청난 것이었다." "더러움은 빅토리아 시대의 주부들이 온갖 육체노동을 감수하고라도 사정없이 싸워야 했던 강적이었다." "병원균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자 주부는 의사의 보조자로 임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65-6)


"19세기 초부터 선량한 사람들은 노동계급의 상황을 접하게 될 때마다 노동에 대한 이상화를 고심하게 되었다. 노동이라는 존중받는 행위모델이 단지 소수에게만 도덕적 자극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모델은 단지 새로운 습관과 압력을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도록 엄중한 노동규율을 강요했다." "1870년대에 이런 상황에 대해 듣고 있었던 독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기업가 측에서 나온 미심쩍은 이야기들이나 이기적인 제안들을 제외하면 정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죄책감과 온정주의적 생색, 교조주의적 이론화의 분위기 속에서, 터무니없는 합리화와 노동 기계화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변명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비단 경제적 효용성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즐거움을 찬미했다."(276-8)


8 예술적 취향


"회화와 조각, 시와 연극, 소설과 음악, 건축을 비롯한 예술의 전 분야에서 격정적이고 투쟁적인 성향이 나타났다. 새로운 것에 열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더니즘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는데, 최신 피카소 예술을 흡수하지 못했던 슈니츨러의 무능력도 그중 하나다. 19세기 후반에 진부한 그림에 염증을 느낀 회화수집가들은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인상파 형식은 너무나 평범하고 심지어 조잡하다며 거부했다. 또 인상파의 신봉자들은 후기 인상파의 그림을 원시적이고 혼란스럽다고 평가했다. 반 고흐에 열광한 사람들은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순진한 대중에 대한 사기로 격하시켰을 수도 있다. 슈니츨러가 쇤베르크의 음악을 그 자신과 같은 진지한 음악 애호가들에 대한 기만으로 여긴 것처럼 말이다. 전위예술가와 그 지지자들은 혐오스런 부르주아지가 분수를 지키도록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같은 속물들을 공격하는 것과는 별도로, 자신들의 개성을 열렬히 고집했다."(292-3)


"역사가들은 이러한 관계의 복잡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빅토리아 인의 미적 취향의 발전을 인습적인 예술의 소비자들과 반역적인 모더니스트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편리하게 요약했다. 마치 예술을 만들어내는 긴장이 고급문화의 중심을 겨냥한 노골적인 공격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빅토리아 시대 문화 전쟁의 전선은 명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대에 등장한 회화와 음악의 새로운 양식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셋 혹은 더 많은 무리들 사이의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다툼이 되었다. 점잖은 사람들의 사회에 합류되기를 원했던 진보적 예술가들, 즉 은밀한 부르주아도 있었다. 회화 분야에서 모더니즘의 위대한 선구자인 에두아르 마네는 오로지 레종 도뇌르 훈장만을 갈구했다. 독일에서 인상파 범주에 속했던 가장 유명한 화가 막스 리버만은 1890년대 이후 베를린 분리파 운동을 주도했는데, 그는 지극히 규범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정통 상층 부르주아였다."(293-4)


"결국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화폭을 온갖 악의적인 논쟁으로 덧칠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시장에 긴장과 동요를 야기한 심미적 취향의 급격한 증가였다. 간단히 말하면, 안주를 추구하는 부르주아와 대담한 모험가들 사이의 경계선에는 구멍이 많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무수한 중간계급 회화수집가들이 존재했다. 이들 마이케나스(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의 정치가로서 예술의 후원자를 일컫는 보통명사 '메세나'가 되었다)의 현대 후손들은 대부분 부유한 남성과 소수의 부유한 여성들이었지만, 그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잔의 그림을 최초로 수집한 사람들은 유복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나름대로는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르주아였다. 대(大) 탕기로 알려진 파리 미술계의 선량한 중개인 쥘리앵 프랑수아 탕기는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는데도 수년간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했으며 빌려준 돈 대신에 그림을 받았다. 그는 세잔의 그림을 화랑에 전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294)


"19세기 부르주아는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페라, 음악회, 연극, 공공 전시회와 사설 전시회를 찾았다. 그들은 이런 장소를 휴식을 취하거나 연애하는 곳으로, 또는 사업상의 모임을 갖는 곳으로 여겼다. 장래의 화가들은 낮에 미술관에서 걸작을 모사하며 보냈다. 젊은 연주자들은 거장의 연주를 들으러 몰려들었다. 정신적 즐거움보다는 육체적 쾌락에 열중했던 사람들은 오페라하우스 2층 발코니 그늘에서 창부들을 찾았다." "18세기에 데이비드 흄이 말했던 것처럼, 취향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속적인 반복학습을 통해 조잡하고 성급하며 어리석은 견해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안다는 식의 주장을 세련되기 다듬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학습은 상당한 시간투자가 전제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계를 유지하거나 가게를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즉 여가를 필요로 했다. 요컨대 고급문화를 습득하는 데 있어 돈은 곧 시간이었다."(304)


9 자기만의 방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은 일반적으로 공적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의 접촉은 본질적으로 매우 직접적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플리머스 식민지(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 주에 처음 세운 정착지)의 가족들은 작은 방이 하나, 기껏해야 두 개 정도 있는 집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뒤엉켜 살았다." "대다수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편지는 공문서나 마찬가지였으며, 수줍음 따위는 이웃의 무자비한 호기심 앞에 설 자리가 없었다. 이단자들이나 간통을 저지른 사람들을 당국에 고발하는 것은 사실상 시민의 의무였다. 말하자면 공동체는 개개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던 것이다. 간통자의 가슴에 달린 주홍 글씨 'A'는 예외적이며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가장 내밀한 행위에 대해 알고 판단을 내릴 사회의 권리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 사생활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333-4)


"사생활을 이상화하는 것과 그 이상을 현실로 전환시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주거와 같이 가장 일상적인 문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19세기에 중간계급이 더욱 부유해지자 많은 부르주아는 더 넓은 공간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을 가능케 했다. 집은 외부 세계로부터 가족을,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서로를 분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벽과 커튼, 휘장, 단단한 현관문, 교묘하게 심어진 관목과 담장은 이웃을 포함한 외부인에게 접근을 막는 상징이자 경고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거주자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많은 부르주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참견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요컨대 사생활이란 세부적인 것들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요했다." "가정 내의 사생활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구사항은 물론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이는 빈민들에게는 절대 불가능했다. 이러한 차이는 19세기 부르주아지를 노동계급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350-1)


"사생활의 가치는 충분히 분명했지만, 그것은 모종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했다. 어느 정도의 재산 없이는 사생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생활은 다양한 감정을 포괄했다. 사실 사춘기 청소년에게 사생활의 의미란 분명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청소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이며, 성인과 동등하게 취급받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춘기란 온갖 다양한 감정과 신념, 즉 반항심, 염세주의, 수치감, 독립적 삶에 대한 열망을 포괄하는 그 무엇이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인정해주려는 의지는 의심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정하는 것이었으며, 독자적인 사상과 이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능력을 전제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것은 관용을 요구했다." "검열이나 사법기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19세기 자유주의자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싸웠던 반면, 좀 더 소심하거나 현실적인 사람들은 그 폐지를 요구하지 않고 당국의 족쇄를 느슨하게 하는 데 만족했다."(356-7)


"개성은 전통이나 인습은 물론 종교나 도덕에도 얽매이지 않는 〈르네상스 인〉이라고 불리게 될 존재의 전제조건이었다. 14~15세기에 극도로 발전한 개성이 체사레 보르지아 같은 비도덕적인 괴물로 타락한 것처럼, 19세기에도 개성에 대한 대담한 주장은 심각한 위험을 수반했다. 엄격한 가족과 캐묻기 좋아하는 이웃의 감시를 피해 시골이나 소도시에서 도시로 옮겨온 젊은이들은, 자신이 그렇게도 갈구했던 독립이 종종 원치 않는 익명성, 즉 친구들과 이해심 깊은 공동체의 부재로 전락한 것을 알게 되었다. 집단의 둥지를 떠난 데 대해서 그것은 너무 무거운 대가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외로운 영혼들은 소외되기 위해 답답한 시골을 벗어났던 것이다. 외로움에 시달리고 방향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사생활이라는 번지르르한 구호는 역설적인 느낌을 가져왔다. 당대의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19세기 도시생활의 경향을 특징짓기 위해 〈고립〉, 〈아노미〉, 〈분열〉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만들어냈다."(359)


"사생활의 확대를 비롯하여 19세기 부르주아의 삶을 특징짓는 예기치 못한 놀라운 혁신은 자아에 대한 전반적인 매혹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에 대한 열중은 세계의 구성요소들을 발견하려 노력했던 선조들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아테네의 위대한 등에 소크라테스로 소급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몽테뉴, 파스칼, 루소에 이르는 냉혹한 내면 세계 탐구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빅토리아 인의 자아에 대한 관심에는 길고 명예로운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치이론가들은 인간본성론에 기대어 자신들의 사고체계를 수립했다. 토머스 홉스는 걸작 『리바이어던』에서 모든 통치의 열쇠가 되는 성찰을 제시했다.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자는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이해해야 한다.〉 19세기에 '자아'라는 수수께끼에 몰두하는 자기분석이 가능해졌던 것은 사람들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361)


후주


"빅토리아 세계에 대한 정치적·도덕적 비판은 플로베르나 졸라처럼 부르주아의 속물적 문화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멈추었던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내가 부르주아 혐오자라고 지칭했던 화가들과 소설가들은 부르주아 문화 전체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던 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비판자들은 목표들을 훨씬 정확하게 선택했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업톤 싱클레어는 시카고의 정육업에 관한 끔찍한 소설 『정글』에서 큰 통에 짓눌러 소시지가 된 노동자를 묘사함으로써 식품의약규제법(1906)이라는 개혁법안의 제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소위 추문폭로자들 대부분은 급진주의자가 아니었다. 『맥클루어』지의 가장 능력 있는 기고자들 중 하나였던 레이 스태너드 베이커는 이를 단순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우리 세계를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추문을 폭로'했다. 우리는 절망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증오에 차 있지도 않다.〉"(366-8)


"19세기의 위대한 정치·경제·사회 혁명에서 부르주아들이 행한 주도적인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시작된 구체제의 매장이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수십 년 만에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한 빅토리아 사회의 경제 각 부문, 즉 광산, 산업, 금융, 보험 국내교역 및 국제무역에서 진취적인 부르주아의 몫은 당연히 정치에서보다 더 많았으며, 격렬한 갈등을 겪은 후에는 더욱 늘어났다. 이것은 사마리아인과 스크루지를 비교하거나, 착취자보다는 박애주의자를 찾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에너지, 곧 신세계를 창조하는 발명가와 엔지니어와 금융가들이 에너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서정적이면서도 조롱조로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자본가들 중 박애주의자는 거의 없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이룩했다."(368-9)


"사회를 향한 관대한 태도가 가치 있는 평가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이 중간계급 내부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공정한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시회적 자유주의란 단지 이기심을 덮은 가면에 불과하다는 부당한 비난에 가려져 있었다.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수용한 중간계급의 태도에 대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 상당수가 그것을 향유하고 진흥시켰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에게만 제대로 알려져 있다. 자기 시대의 회화를 수집하고 박물관을 후원한 사람들은 고상한 취향을 지닌 백만장자들만이 아니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최초로 구매한 사람들은 부르주아 중간층이었으며, 교향곡 연주회에 충실하게 참석한 사람들은 하급 사무직 종사자들과 그 아내들이었다. 우리는 모든 속물이 부르주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부르주아가 속물은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알 필요가 있다."(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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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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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문


"초기 기독교 사상은 성경적이었으며, 교부시대의 지속되는 업적 중 하나는 언어와 영감 면에서 성경적으로 사고방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서양 문명에게 성경에 대한 통일되고 일관된 해석을 제공했다. 즉, 이것은 성경의 최초 독자들을 무시하는 해석은 교회의 책도 아니고, 서양 문학, 미술, 음악의 상상력이 풍부한 원천도 아닌, 단지 파편들의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토대로, 기독교 예배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성경(또한 성경에 대한 초기 해석들)으로부터, 곧 역사, 제의, 문헌으로부터 사고한다. 기독교 사상은 교회 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시편 암송 같은 경건 활동으로 유지되고 예배, 특히 정기적인 성찬식 참여로 양분을 얻는다. 이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개념과 관념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대상물 자체인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실천에 더 깊이 침잠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목적은 이해뿐 아니라 사랑이었다."(22-3)


1 기독교 사상의 토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최초의 기독교 문헌들은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2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으로 외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변증가들apologists로 불렸고, 이러한 맥락에서 변증apology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삶과 신앙 방식에 대한 방어와 설명을 의미한다." "최초의 변증가들 중에서 가장 명석한 사람은 2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순교자 유스티누스였다." "유스티누스는 기독교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 사람들을 대상으로 몇 권의 책을 썼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을 위해서도 방대한 책을 한 권 남겼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두 종류의 비판자들을 동시에 다루어야 했다. 하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기원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후자의 성경(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고 부른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성경으로 삼았다."(31-2)


"켈수스가 보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났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한 역사적 인물 속에 나타난 계시의 문제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된 것이었다." "켈수스가 신약성경을 읽음으로써 깨달았듯이, 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내려왔고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면, 세상의 근본적인 질서와 구조는 돌이킬 수 없이 방해를 받을 것이라고 켈수스는 말했다. W. H. 오든의 기억할 만한 시구(詩句)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일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고정되고 불변한다. 영적 실재는 지상의 삶을 지배하는 강제력에 종속될 수 없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당신이 지상에서 대단히 의미없는 어떤 것을 바꾼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뒤집고 파괴할 것이다.〉"(37-8)


"교회사에서 가장 용감하고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켈수수의 『참된 교리』에 대응하여 『켈수스에 대항하여』라는 상세한 반박서를 저술했다." "켈수스는 정신의 고양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감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에서 돌이켜, 일련의 정신적 단계를 거쳐 하나님을 향해 상승해야 한다. 또 다른 비판자의 주장처럼 〈지적인 문제는 지적으로 알 수 있고 감각적인 것은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주장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정신의 고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적 인물 속에서 인간들을 향해 내려오심으로 시작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켈수스가 인용한 플라톤의 주장이 고귀하고 인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로고스)이 모든 인간과 접촉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다고 성경이 주장할 때, 성경이 인류를 위해 더 많은 애정을 보여주는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38-40)


"오리게네스는 두 종류의 보는 방법을 구별한다. 인간이 물리적 대상을 감지하는 일반적 방법과 하나님을 보는, 곧 아는 영적 방법이다. 〈육체적인 것을 보기 위해선 그들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사물에 집중하는 눈〉만 필요하다." "하지만 〈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이 요구된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할 때 그것이 보이려고 의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해야〉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른 예언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바로 은총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의 눈은 그가 하나님을 보는 원인일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된 하나님의 은총이었기 때문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이다.〉"(47)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리니,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싶다.〉 교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뿐 아니라 외부인들에게 쓴 글에서, 가장 초창기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예배와 관행, 기도와 교리 교육, 성경의 말씀과 이미지와 이야기 속에서 전해진 것이 확고한 지적 토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것이 요점이다. 즉, 기독교의 이야기는 일군의 사상이나 원리로 축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개념체계도 복음주의 역사를 대체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5세기 로마의 감독이었던 대 레오가 썼듯이, 기독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신비 위에 세워진 종교〉다. 기독교 사상은 어떤 독창적 사상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며, 어떤 중요한 영적 통찰력에 의해 양분을 공급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한 인간의 삶에서 비롯되었다."(51-2)


2 기독교의 예배: 놀랍고 피 없는 희생제물


"유스티누스는 성찬식에서 교인들이 살아 있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라고, 그들이 먹는 음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 요점은 기독교 예배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축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함께 기억하는 기념 식사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편 22편 설교에서 말했듯이 예배는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며, 이런 식으로 그것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요점은 그 예배가 명백히 삼위일체적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존재하기 전에도, 기독교 기도들은 성삼위일체를 초청했다. 유스티누스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우주의 아버지께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찬양과 영광의 기도를 올려 드린다〉고 말한다. 유스티누스가 말하는 것은 초기 예배에서 빵과 포도주에 대한 기도 속에 메아리친다."(60-1)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제물로 제시되었다." "예배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상상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와 친밀한 관계로 이끌었다.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경험의 명백한 사실로서 말이다. 5세기 로마의 주교였던 대 레오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화해를 위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우리는 단지 과거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알 뿐 아니라 현존하는 사역의 권능 안에서 경험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문이 집필되기 전, 성경에 대한 학문적 주석이 나오기 전, 은총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나 도덕 생활에 대한 저술이 출현하기 전, 교회의 성찬식에 살아서 현존하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바치는 경외와 숭배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에 선행했다."(64-5)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 행사였다. 감독과 다른 성직자들, 이웃과 친구들, 가족 등 모든 사람이 맡은 역할이 있었다. 매년 늦겨울과 봄에 반복될 때마다 엄격한 심사, 혹독한 금식, 낭랑한 신조 낭독, 축귀의식, 침례는 그 경험을 더욱 고양시켰다. 세례식은 장엄한 기독교 행사였다. 그리고 이웃과 친구들이 한 사람씩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을 뿌리거나 붓지 않고 물속에 잠겼다. 기독교는 빵과 포도주, 물, 기름처럼 사물과 관계가 깊다. 기독교 신앙은 사물들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행위 속에 담겨 있다." "세례식의 물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의에서, 하나님은 보고 만질 수 있는 한 인간을 통해 알려진다는 기독교의 핵심적 확신이 이제 물과 기름, 빵과 포도주, 우유와 꿀, 소금과 성인들의 뼈, 그리스도의 몸이 닿았던 성지(聖地), 그리고 성상처럼 만질 수 있는 다른 물건들로 확장된다."(68-9)


3 성경: 현재를 위한 하나님의 얼굴


"자신의 대표작인 『잡록』Stromateis에서 클레멘스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유사성에 대한 논의는 현재 알려진 모습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알려줌으로써, 예기치 못한 주장을 시작한다. 그는 플라톤의 유사함이 형상이라는 성경적 개념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가 읽은 창세기에서 〈형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될 때 인간이 받은 것을 가리키며, 〈모양·유사함〉은 인간의 삶이 열망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이 가능하다. 유사함(모양)이라는 주제를 도입함으로써 클레멘스는 자신이 철저히 그리스인임을 보여주고, 최고의 철학자 플라톤에 대한 당대의 철학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하지만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클레멘스는 논의를 성경의 하나님께로 전환한다."(86-7)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변형을 요구한다. 클레멘스는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을, 특히 〈그리스도 따르기〉라는 측면에서 해석함으로써, 논의 전체에 독특한 성경적 광택을 부여한다. 그는 사도 바울을 인용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목적, 곧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절은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레니즘 정신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에 대한 증거로 여겨져 왔다. 전체 구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헬레니즘 도덕 전통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 닮기(모양)란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클레멘스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그의 손에서 헬레니즘의 개념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빌려온 새롭고 이국적인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유사함〉은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뜻이다."(87-8)


"성경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자 기둥〉이라고 이레나이우스는 말한다. 성경이 기이한 신학 프로그램을 위해 분할되고, 성경 본문이 영지주의자들처럼 자의적으로 사용된다면, 성경은 폐쇄적인 책으로 남을 것이며 〈그것들 안에서 진리를 찾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붙들고 있는 뼈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성경은 마치 설계도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배열된 모자이크처럼, 혹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임의로 가져온 구절들을 함께 묶은 후 그것을 호메로스의 작품이라고 상상하면서 재구성한 시처럼 모호하다." "이레나이우스의 개요는 매우 담대하게 설정되어 있다. 성경해석에 대한 그의 접근이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것은 후대의 모든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아리우스에 대항하는 아타나시우스, 펠라기우스에 대항하는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네스토리우에 대항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읽든, 우리는 각 구절들을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95)


4 삼위일체: 항상 그의 얼굴을 구하라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성경에서 주어진 언어와 교회의 관행, 특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식에 의해 형성된 확신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탐구하면서 힐라리우스는 하나님을 먼저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알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야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힐라리우스의 다소 수수께끼 같은 언어 배후에 모든 기독교 사상에 스며 있는 하나의 진리가 놓여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신 것, 초대교회가 경륜economy이라고 불렀던 것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질서와 정리를 뜻하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신학적 담론에서 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 성경적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 있는 자기노출을 의미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힐라리우스의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115-6)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없다.〉 힐라리우스는 부활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무언가를,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부활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는 보다 충격적인 주장도 제기했다. 일단 예수가 부활하자 도마는 〈신앙의 모든 신비를 이해했다.〉 이제 부활의 관점에서, 도마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oneness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쉐마를 계속 암송할 수 있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은 〈제2의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나 신적 본성의 통일성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독한 하나님〉이나 〈외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힐라리우스는 말한다."(118)


"삼위일체에 대한 책을 집필했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삶의 특정한 행위들과 성령의 사역을 연결하는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태어났고, 성령은 그의 선구자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성령은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고, 성령은 그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고, 성령은 그와 동행한다. 그리스도는 승천하고, 성령이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성자만의 활동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의 현존을 통해 확증되고 중개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신적 본성에 관해······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성부께서 아들과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 어떤 일을 행하시거나, 아들이 성령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행동한다고 배우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와 관련되고 우리의 상이한 개념에 따라 지칭된 모든 신적 행동은 아버지 안에서 기원하며, 아들을 통과하고, 성령에 의해 완성된다.〉"(128)


"하지만 성령의 개별성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성경이 두 가지 〈보냄〉, 곧 아들의 보냄과 성령의 보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핵심 본문은 갈라디아서 4:4-6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보냄이 아들의 보냄 못지않게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이 본문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듯이,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보냄을 받거나 오순절 날에 교회 위에 부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영원부터 감추어진 것이 시간 속에 나타났다.〉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성령은 역사적 자료요 경험적 사실이었다."(128-9)


5 그리스도 인성의 비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설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난 인간이었고, 동시에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런 주장의 어떤 것을 불쾌하게 여긴 이들 중에서 가현설주의자들Docetists은 그리스도가 오직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그의 인간적 외모는 단지 겉모양만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극단에서, 에비온파 같은 집단은 그리스도가 단지 고대의 현인들이나 예언자들처럼 고귀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중심 전통은 그리스도가 온전히 신이며 온전히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5세기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은 교회의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확히 하려고 살았던 사상가들의 진정한 노력이었다."(140-1)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키릴로스는 힐라리우스와 다른 차원에서 부활을 바라보았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독특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인류의 첫 열매로 드렸다.·····그는 우리를 위해 인류가 예전에 알지 못했던 길을 열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 〈인간 본성은 죽음을 파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세상의 환란보다 우월하고 죽음보다 〈강하다.〉 따라서 그는 죽음과 부패를 정복할 수 있었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자신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능을 우리에게까지 확대한다. 그런 후에, 키릴로스는 다음 문장을 추가한다.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정복했다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으로서 정복했다면, 우리도 그 안에서 정복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오신 두 번째 아담이기 때문이다.〉 키릴로스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이 그리스도를 독특하게 만든다."(146-7)


"이전 작가들은 예수께서 탄원하신 말씀, 곧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를 가설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진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 기도의 두 번째 부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가 이해되느냐고 묻는다. 동시에, 이 설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가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이라고 그는 언급한다. 막시무스가 보기에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저항이나 공포가 아니라 〈완벽한 동의와 일치〉를 표현한다.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고, 이런 식으로 〈신적인 의지에 대한 그의 인간적 의지의 최고 동의〉를 보여주었다."(154)


"막시무스는 복음서에 또 다른 명령, 곧 또 다른 〈내게 이루어지이다〉가 있다고 제안한다. 즉, 인간 그리스도의 고통 말이다.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의도한다." "고통의 잔을 받은 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영원한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연합하여 의도했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의도하신 것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인간임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의지는 신적인 의지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덜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더 인간적이다. 키릴로스처럼 막시무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인간이 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새롭다고 막시무스는 말한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놀라우며,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낯설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의 새로운 에너지를 그 자체 안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156-7)


6 천지창조 이야기: 처음에 주어진 끝


"창세기에 대한 기독교 주석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중, 〈태초에〉라는 단어였다." "4세기 후반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는 〈태초에〉라는 단어에 그리스어 arche의 의미를 이용한다. 〈그것은 적절한 시작이다. 세상의 형성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은 가시적 사물들의 질서 속에서 지배적 영향을 행사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어 arche는 단지 〈시작〉, 곧 〈때〉를 의미할 뿐 아니라,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원리〉도 의미한다. 서론도 없이 바실리우스는 청중을 그 원리로 이끈다. 창세기의 설명은 누군가 상상하듯이 세계가 자발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먼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친교 및 친밀함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없다.〉 우주론 연구는 영과 관련된 것으로 시작한다."(164-7)


"시작은 또한 목적end을 내포한다. 단지 세상이 끝날end 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가 〈유용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창조는 〈독단적 힘〉이나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예술적 이성〉의 작업이다. 즉, 창조에 목적이 있다는 것보다 더 도전적인 교리는 성경에 없다. 바실리우스도 창조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업이며, 세계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에 따라 섭리적으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창조는 마지막 순간에 사물들에 영향을 끼친다. 태초에 하나님이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고 바실리우스는 말한다. 창세기는 자체 내에 성장과 발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생명계의 탄생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땅의 흙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적절한 시간 내에 새로운 피조물들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도록 만들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다."(168-9)


"그레고리우스는 신약성경에서 직접 인용한 인간의 세 가지 특성을 소개한다. 첫째는 로고스(말씀) 혹은 이성이다. 이것은 그가 요한복음 1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썼던 사도 바울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셋째는 사랑이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요한복음과 〈하나님은 사랑이자 사랑의 원천이시다〉라는 요한1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다면 〈그 형상의 흔적은 뒤틀린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인성의 회복뿐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일체의 온전한 설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끝은 시작 속에서 주어진다〉라는 그의 말에서 완성과 시작이 상보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창조는 선물이자 약속이며,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민 태초에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된다."(180-1)


"〈인간의 창조〉에 대한 모든 온전한 설명은 인간의 파괴,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타락과 악의 완고함을 다루어야 한다. 그의 논문 중간 부분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경험에 관심을 보이고, 비록 간략하지만 인간의 비극적 삶을 논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생생한 언어로 죄의 결과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안에 불순종이란 잡초의 씨를 뿌린 삶의 교활함 때문에, 우리 본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보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죄 때문에 변형되고 흉하게 되었다. 우리 본성은 악한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 본성은 죄의 아비가 거느리는 악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인간 본성은 악에 의해 〈약해졌고, 무기력해졌다.〉 인간은 〈악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쉽게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인간은 죄를 짓기 쉬우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죄는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안에 존재한다.〉"(181-2)


7 인식의 길: 믿음의 합리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증인의 정직에 의존하는 역사적 지식과 확실하고 명백한 수학적 지식을 구별한다. 7X7=49는 구구단을 암기한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지식은 우리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항상 간접적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한다. '믿는다'라는 단어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개연성 있는 지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역사적 지식에 대한 적절한 단어는 〈믿음〉이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역사적 지식을 위해서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간의 차이도 유지하고 싶었다. 역사적 지식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인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martyr가 기독교 사전에서 거룩한 단어가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martyr는 자신의 말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다."(195-6)


"역사적 지식은 증인을 요구한다. 그리고 증언은 증거하는 사람의 말에서 믿음과 확신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대한 토론에 '권위'라는 단어를 도입한다. 그는 〈우리는 권위에 우리의 믿음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절에, 권위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의 용법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라틴어에서 권위auctorita는 auctor(이 단어는 영어의 author에 해당한다)에서 기원했고, 원래의 의미는 유언장이나 다른 법적 서류의 타당성과 진정성을 보증했던 사람을 가리켰다. 권위는 어떤 사람, 예를 들어 행정관이나 유언장 작성자의 그러한 특성, 곧 어떤 사람이 말한 것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특성을 가리켰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는 인간 삶과 사회에 공통되는, 없어서는 안 될 측면이다. 우리가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성실과 신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96-7)


8 지상과 천상의 나라: 하나님이 주님인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평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가 이해했듯이, 평화는 이생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인류가 자신들 안에 건설할 수 있는 평화는 항상 부서지기 쉽고 불안정하며 덧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 땅 위의 평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약속도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평화는 항상 소망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도성이 열망하는 평화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선지자 하박국에 따르면, 우리가 소망하는 목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추구할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선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에 뛰어난 매력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땅에 평화를 성취하려는 노력(비록 그것이 연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223-4)


"하나님의 도성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마음의 갈망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해결될 수 있고, 평화에 대한 희망도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성이 아직 순례 중인 이 삶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온전한 시민이었다. 다른 시민들처럼 그들도 법, 안정, 일치를 존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은 특정한 형태의 강제력 없이는 더불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의 권력, 판사가 휘두르는 칼의 권력, 집행관의 발톱, 군인의 무기, 주인의 징계, 그리고 선한 아버지의 엄격함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들만의 방법과 명분, 이유와 유용함을 지닌다.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동안, 사악한 사람들은 특정한 울타리 안에 갇히고, 선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다만 모든 정치제도는 임시적이며, 그것들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228-9)


"『하나님의 도성』 제2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국가론』에서 정치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한 문장을 인용했다. 〈시민은 공통된 법 정신과 집단적 이익으로 연합된 다수의 사람들〉로 정의된다. 이 정의에서 법으로 사용된 단어가 jus다. 이 단어에서 라틴어 단어 justitia가, 영어 단어 justice가 각각 유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가 정의justice없는 정치 공동체, 공화국,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 정의(定義)를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진정한 정의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jus, 곧 어떠한 법, 평등,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단지 한 이익공동체일 수 없다. 그래서 공화국은 jus로 함께 묶여야 한다. 단지 공통된 이익에 기초해서 연합된 사회는 기껏해야 폭도나 해적 집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정의는 없고 오직 도둑질과 무법과 착취만 있다면,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의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정의와도 관련이 있다."(230)


9 초기 기독교 문학: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행동


"몇몇 기독교 시인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전통적 시로 다시 쓰려고 했다. 잘 맞춘 운율과 시적 어휘를 사용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낯익은 표현으로 종교적 시를 제공하고 싶어했다." "가령, 요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초기 기독교 시는 성경의 단어 〈예언자〉 대신, 라틴어 단어 〈점쟁이〉를 사용한다. 증인에 해당하는 성경의 단어인 〈순교자〉 대신, 라틴어 단어 〈목격자〉를 사용한다. 〈천사〉 대신 〈전령〉을 선택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그 시인은 〈부활〉이라는 단어는 피하고 대신 〈죽음을 목격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란 표현을 사용했다. 성경의 단어 〈성전〉은 이교적 단어 〈성소〉로 대체되었고, 〈요구하다〉라는 멋진 라틴어 단어가 〈기도하다〉란 성경적 단어를 대체했다. 이런 변화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늘날 〈이번 주일에 나는 제1침례교회의 컬트에 참석할 예정이다〉라는 표현에서, 기독교 예배를 〈컬트〉라고 지칭할 때처럼 그것은 고대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꺼림칙한 것이었다."(243)


10 초기 기독교 미술: 이것을 다르게 만들다


"고대 기독교 도시들에서 가장 경멸받던 관행 중 하나는 죽은 자를 예배하는 것, 특히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뼈를 숭배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강력한 적이었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를 죽은 자들의 무덤과 비석으로 가득 채웠다〉고 불평했다. 4세기 말 로마 세계의 도시들에는 유물들, 곧 거룩한 사람들의 뼈를 보관하는 성소들이 흩어져 있었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기 위해 이런 거룩한 장소들을 경건하게 방문했다. 2세기 초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와 중보기도를 위해 무덤에 모임으로써 죽은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에, 〈여기에 베드로가 있다〉라는 비문이 적힌 장식판을 걸기 위해서 벽에 벽감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런 성소에서 성인들의 고귀한 몸을 담은 석관을 바라보기 위해 신자들이 앉아 있던 의자와 제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뼈들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사람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주었다."(265)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의 견해에 따르면 성상금지는,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역사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살았던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진 성육신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 신앙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가능했다. 〈몸도 없고 형태도 없이 그의 본성은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하며,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그가 자기를 비우고 본질과 본성에서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육신의 몸으로 발견될 때, 당신은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놀라운 낮아짐,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요단강 세례, 다볼산에서의 변화, 우리를 고난에서 자유롭게 했던 그의 고통, 죽음, 기적을 묘사하라. 그의 구원의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을 보여주라.〉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묘사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요하네스는 말했다."(271-2)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 모두 물질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성상파괴론자들의 경우, 물질이 거룩하게 되는 최고의 예는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다. 성찬식에 사용되는 그 물질들을 사제가 축복함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된다.〉 하지만 성상은 보다 흔하고, 축성기도를 통해 축성되거나 성화되지 않았다.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상이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축성기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테오도르는 말한다. 〈그것의 모양만으로도 성화聖化되기에 충분하다.〉 나무와 물감은 나무와 물감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것은 나무 위에 그려진 형상이며, 성상에 의해 묘사된 인격이다. 그것이 그 성상을 귀하게 만든다. 그 형상이 닳거나 지워지면, 그것은 더 이상 성상이 아니고 더 이상 거룩한 물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인격의 형상을 담고 있는 한, 그 성상은 거룩하다."(288)


11 윤리의 삶: 하나님 닮기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잘 발달된 도덕 형성체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것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이 의미했던 행복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말은 〈좋은 느낌〉이나 특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환경이 변하거나 행운이 개입하면 왔다가 떠나는 일시적인 상태다. 고대인들에게 행복은 영혼의 소유물이었다. 즉, 사람이 획득한 어떤 것, 한번 획득하면 쉽게 빼앗길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행복은 인간 삶의 최고 목적, 고대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가리켰다. 도덕철학은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가능한 것을 다루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 윤리학은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 개념에 따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보다는, 특정한 방식의 삶을 통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303)


"그리스인들에게 도덕 생활의 목적은 〈신 닮기〉이고, 기독교 사상가들은 〈하나님 닮기〉나 〈신화〉(神化)라는 언어를 환영했다." "클레멘스의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 닮기〉는 덕의 실천을 의미했다. 기독교 작가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을 향한 안내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는 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닮기 위해 주어진 모델은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한 인간이자 인간의 육신을 입은 하나님인 예수의 완전한 삶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은 모방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가 선택한 하나의 신적 속성은 팔복 중에서 예수가 언급한 가난이다." "겸손 역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정말로 그것은 참된 덕의 징표다. 오직 겸손을 통해, 우리는 오만과 자만이라는 독특하게 인간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짐으로써 〈하나님을 닮는다〉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한다."(306-7)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인내에 대한 글을 썼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인과 죄인 모두에게 빛을 비추신다. 하나님은 땅이 가치 있는 자와 무가치한 자 모두에게 열매를 맺도록 허락하신다. 그는 인간의 죄와 잘못을 참으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 때도 자신의 진노를 참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내의 가장 가시적인 징표는 성육신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한 여인의 자궁 속에 잉태되도록 허락하셨고, 그리스도의 탄생 전까지 인내 속에 여러 달을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인내의 특이한 징표는 참을성이나 용기가 아니라 희망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인내심이 없는 것은 희망 없이 사는 것이다. 인내는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미래를 지향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의 징표는 현재의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선을 기대하는 열망이다. 따라서 인내는 사랑을 포함한 다른 덕들의 열쇠가 된다."(313-5)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기독교적 삶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종점)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다른 기독교 사상가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행복이 〈하나님 닮기〉 안에서 발견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처럼 그도 하나님 닮기가 신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산다는 뜻임을 잘 알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의 생명과 빛과 성결로 충만해진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도전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삶의 원천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그의 저작들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돌이켜서 선을 꼭 붙들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주목한다. 또한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그리스도인의 삶의 끈질긴 내적 갈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십계명, 산상수훈, 자유의지는 한 사람을 덕스럽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사랑의 밧줄로 하나님께 묶여 있어야 한다."(316-7)


12 영의 삶: 감각적 지성의 지식


"초대교회에서 읽었던 그리스어 역본 아가서에서, 신부가 자신의 연인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사랑에 상처 받는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신랑의 〈화살〉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관통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 박힌 멋진 화살은 바로 그리스도, 예언자 이사야의 〈갈고 닦은 화살〉(선택된 화살)이라고 그는 썼다. 영혼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상처 입을 때 그것은 불타오르고, 그 행복한 구절에서 〈보답하는 사랑〉을 제공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런 정서를 수세기 후에 다시 되살렸다. 〈사랑은 보답으로 사랑을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하나님께 데려간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는 불이 붙었고, 위로 상승했다. 우리는 더욱 붉게 타오르며 위로 상승했다. 우리의 마음이 상승한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의 제단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사랑의 타오르는 불〉이라고 말한다."(323)


"『신곡』 '천국편Paradiso'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정확히 이런 길〉, 곧 성육신을 의도하셨느냐고 묻는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자신이 지금 그에게 설명하려는 것이 사랑의 불꽃 속에서 지성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려져 있다〉고 상기시켜 주면서 자신의 답변을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투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도 못하고, 관음증 환자나 구경꾼, 호기심 추구자로 남는다. 하니님에게 모순은 신성모독이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하나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물의 진리를 관통할 수 있다. 사랑이 부재하면 우리 마음은 진리를 단단히 붙잡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씩만 시도하면서 유치하고 미성숙한 채로 남는다. 단테가 말했다. 인간은 〈지성과 사랑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이 마지막 장의 주제는 사랑임에 틀림없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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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jsdirtjdwjs 2022-02-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단계
http://www.godnara.co.kr/bbs/board.php?bo_table=03_01&wr_id=119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단계를 배워야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서 참 하나님께 나아 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섯단계을 모두 깨달으신분들은 참 하나님을 알게되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비밀들과 구원의 해를 알게 되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