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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ㅣ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제1부 부르주아지의 토대
1 부르주아지(들)
"19세기 부르주아지를 정의하기가 더욱 까다로운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부르주아 중 상당수는 부와 위신, 명성, 사회적 상승에 대한 크나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유능한, 운좋은, 또는 매우 파렴치한 사람들의 사회적 상향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존 록펠러나 앤드루 카네기에 필적하겠다는 희망을 품을 만한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 두 사람의 신분상승은 전설로 남아 사람들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모험심 강한 부르주아 중 몇몇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급속하게 출세했다. 평범한 지방 공증인의 아들인 외젠 슈나이데르와 아돌프 슈나이데르 형제는 한 세대 만에 프랑스의 철강왕으로 등극했다. 카네기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도착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된 전설적인 인물이다."(30)
"사회·경제적 성공담을 양산하는 역사적 계기는 특히 미국에서 지속적이고 매혹적으로 작용했다. 전설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이 거대한 나라는 신속한 성공이라는 백일몽을 꿈꾸는 많은 유럽 사람들로 하여금 대륙을 떠나게 만들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빅토리아 시대에 범람했던 성공문학, 즉 언제나 해피엔드로 귀결되는 현대판 동화들은 각국 출판업자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허레이쇼 앨저의 인기 소설들은 주로 무일푼 고아의 신분상승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그는 이런 기적적인 성공담을 100편 넘게 남겼다. 그의 책들은 작가의 창조력에 바치는 찬사와도 같다. 앨저와 그 아류 작가들은 개방된 사회를 묘사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감격시켰던 백일몽, 즉 단숨에 재산을 축적하고 그것은 어떠한 장애물로도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공과 실패의 양극단 사이에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신분상승의 사다리에는 부러진 가로대가 많았던 것이다."(31-2)
"오스트리아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자유의 확대에 소극적이면서도 그 이득을 탐하는 일군의 무기력한 종복 역할에 만족할 때, 다른 나라에서는 정치적 열정을 품은 부르주아들이 정책결정자들의 회의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유럽 각국의 정치 형태는 헌법 없이 통치하는 군주국으로부터 의회와 협상하는 군주국, 대통령제를 표방하는 공화국으로부터 폭력으로 헌법이 흔들리는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은 잠정적으로 라인 강 동쪽에서 중간계급의 정치의식을 확실히 고취시켰는데, 북부 프랑스와 도버해협 저편에서는 이미 그러한 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혁명과 나폴레옹의 시대가 풀어놓은 중간계급의 열망이라는 마귀를 다시 병 속에 가두려고 누구보다도 애썼던 메테르니히는 1820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오만불손이라는 도덕적 타락〉에 빠진 사람들은 〈주로 사회의 중간계급〉이라고 말했다."(50)
"자의식보다는 공포심에서 나온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격렬한 거부감은 중간층에게 현실 상황 못지않게 의식이야말로─비록 내적인 차이나 극복하기 힘든 지속적인 긴장이 있었더라도─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음을 시사한다. 이 정체성은 대체로 부정적인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 "보통 부르주아의 특징은 대체로 중간계급의 일원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말에 대한 금지라고들 한다. 그러나 만일 부르주아의 모토가 자기부정이라면, 이는 그들의 열정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길들여졌기─프로이트의 표현으로는 〈다듬어졌기〉─때문이다. 거친 농민이나 노동자, 혹은 방종한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자면 근대 부르주아지는 그 원시적인 충동을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철저하게, 그리고 특히 19세기에는 가엾게도 노상 억눌렀던 계급이다. 하지만 다듬어졌다는 것이 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의 쾌락은 자제를 통해 통제, 완화, 조정되었다."(52-3)
"또 다른 부정적 요소가 19세기 부르주아로 하여금 공동의 정체성을 갖게 했다. 그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도시에서 확실히 소수 집단이었다." "부르주아는 의복, 음식, 억양, 취향 등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자신들을 '열등한' 사람들과 구별하고, 주변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그러나 이 격동의 시대에─프랑스 대혁명에서 제1차 대전의 발발에 이르는 19세기에는 무수한 바리케이드전이 벌어졌다─대다수 하층계급의 존재는 불길한 징조였다. 그 때문에 부르주아는 사회 불안이 아니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귀족이나 선동가와의 편의상의 협력 같은 방어조치를 취했다. 바로 이 순간 부르주아는 질서당의 주역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반세기 이상 대부분의 부르주아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주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면서, 다양한 색깔의 부르주아를 단합시키는 심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53-5)
"이 시대의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그 적들, 즉 점차 증가하는 일군의 난폭한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정의되었다. 이들 중간계급의 적이야말로 부르주아 내부의 다양성을 근거 없이 간과하게 만든 무책임한 일반화를 야기한 장본인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악역을 맡아서 부르주아의 미덕에는 입을 다문 채 온갖 악덕만을 지적했다. 화가, 소설가, 극작가, 문화평론가, 급진 정치가, 진보적 언론인, 그리고 중간계급의 모반에 격분한 귀족들은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위선적이고 물질을 숭배하며 저속하고 관대함이나 애정 따위는 결여한 존재라고 떠들어댔다. 이 부르주아지의 적들은 기회만 있으면 또 다른 경멸어린 부르주아상을 만들어냈다. 즉, 욕심 많고 파렴치하며 권력에 굶주리고 무정하며 자신을 성장하게 한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존재로서의 모습이다. 이들의 시각대로라면 너그러운 토머스 칼라일이 산업의 지도자로 찬미했던 금융가들과 공장주들은 강도 귀족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55)
2 "홈, 스위트 홈”의 그림자
"19세기 중간계급 가정에서 진행된 오이디푸스 갈등극은 부르주아의 재산 증대, 산아제한의 확산, 그리고 노동 영역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뚜렷해진 남녀의 분리, 요컨대 저 유명한 근대 가족의 승리를 반영한다. 근대 가족은 그 부드러운 측면과 권위적인 측면 모두에서 삶의 연습무대였다. 그것은 의식적·무의식적 요구들을 만족시키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도 했다.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조상들보다 자녀들을 더 많이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만, 새롭고 안정된 삶 덕분에 자녀들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 숭배는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늘렸으며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핵가족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가정에 대한 애착 역시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 강도가 높아졌으며 그 의미 또한 전에 없이 이상화되었다. 부르주아 문화는 남성에게 가족을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는 주된 동기로 여기도록 가르쳤다."(69-73)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반(反)권위적인 부르주아 가정은 진보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가정은 평등을 부여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은 아내에게는 피난처인 동시에 감옥일 수 있었다." "여성의 우위는 감성 영역, 즉 심미적 감수성, 여성적 갈망, 어머니의 지혜, 본능적으로 나타난 사회적 미덕 등에 국한되었다. 남녀의 역할분리는 편리하게도 여성을 투표할 권리,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 독립적으로 은행계좌를 개설할 권리, 이혼절차의 평등, 그리고 그 밖에 남성의 영역으로 알려진 다른 권리로부터 배제시켰다. 19세기 말 남편이나 애인 살해로 법정에 선 프랑스 여성들이 통상 무죄 방면되었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이러한 방면의 이유는 대개 피고의 타고난 비합리성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특정 부분에 있어 본래 무능하다는 사고방식은 흔히 신성불가침의 전통으로 생각되는 미신적인 확신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많은 남성들을 만족시켰다."(77-8)
"부르주아 가족의 삶을 변화시킨 빅토리아 시대의 조용한 혁명 중에서도 낭만적 사랑, 혹은 그렇게 간주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듯하다. 대중소설, 감상적 그림, 시와 노래를 통해 대중화된 낭만적 사랑은 재산보다는 사랑으로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낳았다." "세기말에 이르러 여성들은 점차 일자리를 얻고 대학에서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공부했으며 그 법적 지위도 개선되었다. 그리하여 연애결혼을 하려는 노력은 예외라기보다는 법칙이 되었다. 그것은 쉬운 싸움이 아니었으며, 제1차 대전 이전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조화로운 연애결혼은 성적으로도 서로 어울린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성적 만족이 애착이나 영원한 성실만큼이나 진정한 사랑을 정의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긴장을 가정생활과 침대, 육아실, 부엌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89-92)
제2부 욕망 그리고 방어
3 에로스
"동성애에 대한 점잖은 사람들의 태도는 주로 고상한 척 회피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헝가리 의사 카롤리 마리아 벵커트가 1869년 이 교묘한 용어를 만들어낸 후로는 더 이상 비밀스런 주제가 아니었다. 세기말인 1895년 오스카 와일드의 센세이셔널한 재판이 진행된 뒤에 이 주제는 점차 널리 알려졌고 많은 이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비록 '도착증'이라든지 '역(逆)성감' 같은 무화과 잎으로 점잖게 감춰지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말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은 동성애를 신의 계명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러한 성적 행동에 모종의 순수함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그리스 식 사랑에 비유하곤 했다. 플라톤을 읽은, 즉 고전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부르주아에게 고대 아테네 문화의 권위는 결코 퇴색하지 않았다. 나이 든 남성이 미소년을 사랑하는 관행은 특정 상황에서는 사회적으로 용납되기도 했을 만큼 결코 은밀한 행동이 아니었다."(101-2)
"슈니츨러와 '귀여운 아가씨'들의 관계를 보면 그가 소년기의 갈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했다는 의혹이 생긴다." "슈니츨러는 계속해서 '귀여운 아가씨'들과 정의 상 이미 누군가에게서 '순결'을 잃은 유부녀들 사이에서 숫처녀를 찾아 헤맸다." "절대적인 성적 순결에 대한 슈니츨러의 갈망은 이따금 찾아오는 불안이 아니라 중증 질환이었다." "슈니츨러가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의 직·간접적인 여성비하가 전통적인 이중 도덕을 가진 대다수 부르주아 계급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이런 뻔뻔한 일면과 달리 슈니츨러는 불쾌한 남성 주인공들을 창조하여 자신의 너무나도 진부한 남성 이데올로기를 풍자할 만큼 복잡 미묘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뻔뻔한 이기주의자이자 동침한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도 결혼할 생각이라고는 없는 도시 남성, 요컨대 그 자신이었다."(105-9)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저항과 그들의 유례없는 승리는 남성이 여성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전통적인 도덕관에 대해 점증하는 불만의 표시였다." "가장 원칙론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대개 중간계급 출신의 이상주의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보헤미안들이나 부르주아를 증오하는 급진주의자들보다는 오히려 같은 계급의 소수 남성들로부터 충성스런 지지를 받았다. 이들 모두는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지배적인 문화적 행동방식에 도전했다. 여기에는 에로스가 여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포함되었다." "그것은 처절한 투쟁이 되었다. 왜냐하면 성모마리아의 이야기를 동화로 여기는 부르주아에게 처녀성 숭배는 종교적 도그마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들은 이런 도그마를 강화시켰으며 그것을 위반하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것은 중간 계급에게는 사회적 지위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였다."(113-4)
"빅토리아 인을 경멸하는 역사가들은 당시의 부르주아 남편들이 결혼생활에서의 성적 좌절을 보상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매춘업소나 합창단원들에게 의지하거나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비방을 한 세기 이상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대 중간계급의 생활을 특징짓는 풍부한 가능성을 왜곡하는, 악의적이며 근거 없는 또 하나의 전설이었다." "오히려 가장 널리 사용된 치료법은 부부간의 더 잦은, 그리고 보다 나은 성관계였다." "점잖은 부르주아를 만드는 도덕적 훈련은 타고난 야만적 욕구를 사랑의 만족감으로 문명화시키는 작업을 포함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육자들에게 절제와 금욕은 동의어나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였다. 빅토리아 인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승화'라고 불렀던 것을 굳게 믿었다. 말하자면 성욕을 예술적·지적·수공업적 활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부르주아는 훗날의 비판자들이 주장했던 것보다 더 자주 부부의 침대에 금욕보다는 절제라는 단어를 적용시켰다."(118-9)
4 공격성을 위한 변명
"인간이 강한 공격 충동을 타고났다는 것을 의심하는 빅토리아 인은 드물었다. 그러한 논의에 무언가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해도, 1859년에 찰스 다윈이 획기적인 『종의 기원』을 발표한 후로는 사라졌다. 이제는 고전이 된 이 책의 논점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공격욕은 생래적이라는 것이다. 다윈의 무신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살아남는다는 것은 야성적인 생존투쟁의 결과이며, 이런 투쟁은 인간적인 계획에서 벗어남에 따라 더욱 끔찍해진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의 계명은 심각한 경쟁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악덕기업가들은 이 새로운 섭리를 환영했는데, 그것은 다윈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인 사회진화론자들이 정치와 산업, 외교와 사회정책에 나타난 냉혹함을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좀 더 온건한 다윈 추종자들은 완전히 반대로 해석했다. 조직화된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경고로 본 것이다."(139-40)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에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 따르는 쾌감은 점차 사라지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동정심 어린 반론이 여러 부모와 교사, 그리고 작가들 가운데 상당한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가정 폭력이 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진단이 가능하다. 국왕의 총애를 잃은 정치가들의 운명은 특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6~17세기에는 그들 대부분이 단두대로 보내졌다. 18세기에 그들은 자신의 지방 영지로 '추방'되어 정치판에서는 무력하고 무능한 방관자가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그들은 근대적 발명품의 이득을 누렸으나, 공직을 떠나서도 생명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는 공인된 야당을 결성했다. 심지어 그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남았으며 향후에는 관직에 복귀하리라는 실현가능한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150-2)
"1871년 늦은 봄 파리 코뮌에 가해진 프랑스 군대의 보복 행위는 정부의 가혹한 억압에 담겨 있는 공적 복수의 사악함을 잘 보여준다." "코뮌의 운명은 프랑스의 쓰라린 군사적 패배 이후 더욱 잔혹해진 왕당파의 복수심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많은 부르주아로부터 환영받은 계급투쟁이기도 했다. 코뮌 이후 프랑스 작가들이 펼친 부르주아 변호론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시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테오필 고티에는 코뮌 지지자들을 〈야수〉, 〈고릴라〉라고 불렀다. 플로베르의 친구이자 자유주의적 시사평론가이며, 선구적 사진작가이자 파리의 역사를 쓰기도 했던 막심 뒤 캉은 그들을 일러 정치라고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애에 빠진 야심가들이며 권력에 도취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극작가 에르네스트 페도도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이제 야만도 미개함도 아니라 단지 수성(獸性)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야만적인 〈문명의 구세주〉에 반대하는 의견이라고는 한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154-5)
"그러나 미국 독립선언으로 폭발한 진보적 열정은 반세기 동안의 헛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은 수십 년간 지속된 정치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노예제 폐지운동과 사회입법의 역사는 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이 말과 행동으로 인도주의적 개혁을 고무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19세기 중반의 부르주아 다수는 10시간 노동제, 아동노동 금지, 문맹 퇴치, 그리고─용감한 소수는─여성참정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거나 적어도 거기에 동의했다." "노예폐지론자들조차도 마음속으로는 흑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흑인과의 연대 캠페인을 계속했다. 그러나 자신의 인종, 국가, 종교가 진화의 나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 편리한 확신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긴요한 경제적·영토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 인종 간의 위계에 대한 사악한 가르침은 많은 예민한 양심을 무디게 만들었던 것이다."(157)
"슈니츨러가 생각하기에 인종주의적 주장을 낳은 열광과 정치적 기회주의가 혼합되어 발생한 반유대주의적 사건들은 근대 대중정치가 〈대중이 가장 저열한 본능〉에 호소함으로써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는가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치가들은 종교를 불문하여 실제 경제 악화나 정부의 추문에 책임이 있는 개인에게 화살을 겨누는 것보다 유대인들을 원흉으로 선택함으로써 경제적 동요와 정치적 부정행위가 결합된 복잡한 망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니츨러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찰은 공격성을 위한 변명이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보여주는 날카로운 진단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적이 필요했으며, 공격자들은 적의 죄상을 크게 왜곡하거나 심지어 날조하기까지 했다. 한 세기 전 윌리엄 블레이크는 일반화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바보들을 동원하는 수단이기도 했다."(164)
5 불안의 이유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신경과민증에 누구보다도 심하게 시달렸다. 그러나 그에게 좋은 동반자들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는 다른 시대의 부르주아보다 더 많이 불안해했다는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겠지만, 불안을 근대의 질병으로 진단하고 그것에 전문용어, 즉 신경쇠약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사람들이 빅토리아 인이었다는 사실은 꽤나 그럴 듯하다." "19세기인은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합리적일 수도 혹은 현실적일 수도 있었고, 내면의 스트레스 혹은 객관적인 경고 신호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완벽한 대담성이라는 빅토리아 시대 남성성의 이상은 현실의 삶을 위해서는 빈약한 준비임이 분명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상황이든, 이념이나 소망이든 말이다."(177-8)
"신경증의 원인으로 제일 먼저 의심받은 것은 산업 시대의 개막과 밀접하게 연관된 전문화였다. 비판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다양한 인간 활동 대신에 나타난 무서운 고독이야말로 공장제가 그들이 장악한 노동자들에게 가한 직접적 결과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난한 노동자들이 그 주된 희생자로 여겨졌다. 근대적 노동 분업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걸작 『국부론』에서 그 야누스적 성격을 명료하게 분석했다.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이 새롭고 효율적인 방법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정신과 영혼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단조로운 임무를 날마다, 해마다 수행하는 것은 공장노동자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존립에 바탕이 되는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능력을 빼앗을 수 있다. 그들은 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로 떨어지고, 풀려날 전망이라고는 없는 냉혹한 메커니즘의 노예로 강등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 역시 암울한 시대의 희생자에 포함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84)
"19세기 사회학자들은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설명하기 위해 난해한 개념들을 동원했다. 헤겔이 처음 받아들였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무기로 사용한 '소외' 개념은 쉴러에게 '파편화'라는 용어가 수행했던 기능을 떠맡았다.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든 책상 앞에서 일하든 자신의 동료와 노동,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 될 운명이었다. 전체성은 영원히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부르주아는 물론 다른 계급도 마찬가지로 탈도덕화─그 말의 모든 의미에서─된다고 주장했다. 또 1900년 무렵 에밀 뒤르켕은 '아노미'라는 신학 용어를 세속화시켰다. 이는 당시 만연했던 개인주의의 위험한 측면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와 같은 자기중심주의가 서구 사회를 건전한 공동체로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견고한 집단적 결속을 이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학적·역사적 평가는 막연한 사회적 불안에 확실한 토대를 제공했다."(185)
"유독 19세기에 신경증 현상이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의사들이 전에 없이 여성 환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예전보다 신경쇠약증이 더 많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의료화라고 불리는 시대현상을 반영하는데, 이는 불편한 기분과 이상한 행동의 원인을 신의 징벌이나 악마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기보다는 정신적 상태로 돌리려는 경향을 뜻했다." "19세기 부르주아의 삶에 내재한 강력한 불안을 증언하는 상세한 기록들은 어쩌면 초보적이고도 진부하게 들리는 근본적 동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변화'였다. 역사가는 과거가 연속성과 변화 사이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간에 연속성의 토대 위에서 그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 대다수는 확실히 연속성을 지배적인 현실로 경험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불안이라고는 없었다."(192)
제3부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
6 신의 죽음 그리고 부활
"세속화의 진전에 대한 반교권주의자들의 희망은 자연의 민주화 과정으로 연결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세기 전환기 무렵 니체의 명성이 심지어 그의 책에 대해서는 그저 몇몇 인용구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을 즈음, 용감하게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908년 토머스 하디는 신의 장례식에 대한 장중한 시를 썼다. 그러나 이런 부음은 다소 성급한 것이었다. 다윈의 시대는 동시에 교황 피우스 9세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적자생존을 이야기했던 반면 다른 경건한 누군가는 성모마리아가 현현했다는 장소를 순례했으니, 양자는 다소 거북스럽지만 공존했다.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선언들, 예컨대 교회 학교, 교회 건축, 정치적 행동, 교의와 의식을 둘러싼 논쟁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지형에서 가장 시끄러운 말썽을 일으켰고, 작은 다툼에서 큰 전쟁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형태의 분쟁을 낳았다."(218-9)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빅토리아 시대가 세속화되고 있었다는 명제는 역사가들의 신중한 검토를 요한다." "이성적이고 정직한 많은 빅토리아 인은 오랫동안 신앙과 불신앙에 대해 똑같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근거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신을 고문했다. 허먼 멜빌도 그중 하나였다. 1857년 가을 그는 친구인 너대니얼 호손의 집에 며칠간 머물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산책하고 시가를 피웠으며 영혼의 불멸성을 포함한 난해한 주제들을 토론했다. 〈멜빌은 확실한 신념을 가질 때까지는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를 알고 지낸 뒤에, 아니 그 훨씬 전부터, 그가 얼마나 이 황량한 지대, 우리가 앉아 있는 모래언덕처럼 단조롭고 음산한 곳에서 흔들리며 방랑을 계속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신앙을 가지지도 못하고, 속편하게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는 둘 중의 하나라도 감행하기에는 너무나 정직하고 용감하다〉고 호손은 일기에 적고 있다."(224-5)
"19세기 초에 '각성'을 깨뜨리는 작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볼테르, 흄, 기번, 디드로, 그리고 나머지 불경한 무리를 포함한 계몽주의자들은 탈도덕적 자연과학, 이교적인 미덕의 개념, 종교적 관용에 대한 무책임한 요구, 교회와 성인, 신의 역사를 교활하게 모독하는 선전을 통해 시를 삶의 밖으로 밀어낸 사람들이었다. 낭만주의에 따르면 계몽주의의 신봉자들은 종교를 가장 사악한 부정행위로 취급했으며 세상의 모든 악덕에 대한 책임이 종교에 있다고 여겼다. 그 무서운 결과는 바로 최근의 역사적 사건에 나타났으니, 무신론적인 프랑스 대혁명의 발생과 진정한 신앙이 사회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비참하게 밀려난 사실이 그것이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따르면 시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공격은 운율의 즐거움에 대한 단순한 공격보다 훨씬 더 지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들면서 종교가 삶에 주는 진실과 위안, 기적적인 은총을 빼앗는 것이었다."(227)
"기독교의 패배가 언제나 무신론자들에게 이익을 준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가 불러일으킨 북유럽 예찬 같은 독특한 신앙은 몇몇 시끄러운 지지자들을 갖고 있었다." "신지학의 창시자인 블라바츠키 부인은 과학과 종교와 철학의 종합에 불과한 자신의 '은밀한 교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독재적으로, 전지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선전했다."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한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명칭 자체가 간결한 자기표현이자 뛰어난 운동구호로서, 과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시대 조류에 현명하게 발맞춘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대안들은 심령론이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데, 그것은 고대에 기원을 두고 새로이 나타난 신앙체계 중에서도 가장 널리 전파된 것들이었다. 많은 빅토리아 인은 교회의 가르침을 더 이상 충실하게 따를 수 없으며 논리적·역사적·도덕적인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차갑고 비인간적이라고 깔보았던 자연과학의 도그마로 대체할 준비 역시 되어 있지 않았다."(232-3)
"당시 농촌 사회와 종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일한 존재는 농민들과 접촉했던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은 농민들의 도덕을 감독했으며 그들을 전도하여 신앙심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보고는 단편적이었지만, 19세기 농민들이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교회에 출석하거나 유서 깊은 의식에 참여하는 일이 결코 신실한 신앙심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로마 가톨릭 지역에서 흔해 행해진 성지순례나 축제행렬은 성직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걱정시켰다. 그것들은 음주가무,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온갖 일들과 더불어 점점 세속화되어 종종 부도덕한 오락이 되었다. 성직자들이 이런 볼썽사나운 행동에 당황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표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심과 탐욕은 종종 한 사람 내부에 공존하며 대체로 분리하기 어려웠다. 이는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였다."(245)
7 의심스러운 노동의 복음
"부르주아 십계명 중 하나인 노동의 복음이라는 이 경건한 표현은 지극히 적절하다. 왜냐하면 중간계급 이론가들에게 노동의 이상은 단지 꾸준한 근면함 이상의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노동은 하나의 윤리적 명령으로서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가 가치를 두었던 것들을 많이 내포했으며, 선량한 시민이라면 지켜야 한다고 느꼈던 원칙이었다. 그것은 기업가, 고객, 경쟁자들과의 정직한 거래, 자기수양, 가족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의무에 대한 경각심에 관한 것이다. 노동은 영혼을 정화하는 존재였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신앙심이 돈독한 빅토리아 인조차 감히 복음을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성경에 따르면 노동은 신이 불복종이라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아담과 이브, 그 후손들에게 내린 엄벌이었다. 반면 19세기 부르주아 이론가들에 따르면, 노동은 죄를 예방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노동하는 것은─물론 이것은 부르주아에게는 은유적 표현일 뿐이었다─기도만큼이나 효과적이리라 여겼다."(254)
"근대 부르주아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노동의 미덕에 대한 찬양은 돈벌이에 대한─확실히 저속한 이상이었다─장려를 내포한다. 그러나 굳이 변명하자면, 이러한 이상을 택한 사람들이 돈벌이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프랑수아 기조의 말, 즉 그가 수상으로 재직할 당시 하원에서 〈부자가 되라〉고 말한 것을 프랑스 인들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의 다음 말은 〈노동하고 검약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그는 의원들에게 노동과 절약을 통해 부를 추구하라고 권고하면서, 또 다른 부르주아의 이상을 호소했다. 그것은 자제(self-control)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지를 가장 열렬히 증오한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심지어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사명에 헌신하고 거기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부르주아의 노동 윤리에 얽매여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258)
"노동의 복음은 단연코,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부르주아의 이상이었다. 대체로 귀족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은 그것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거의〉와 〈대체로〉라는 제한적 표현은 단순한 일반화를 막는 데 필요한 장치다." "이 혁신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노동의 복음이 만장일치로 지적받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부를 획득한 유럽의 벼락부자들은 종종 부끄럼 없이, 심지어 간절하게, 자신의 돈을 점잖은 또는 고귀한 신분으로 전환시키려고 획책했다. 그들은 최고의 나태함, 즉 최상의 신분만이 노동의 얼룩을 씻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생애의 대부분을 근면한 노동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무역, 산업, 금융업의 세계로 도피하여 자신 또는 적어도 자녀들이 여가나 값비싼 예술품의 수집을 중시하는 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19세기의 거부들이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낭비〉를 통해 부를 입증하려 했다고 말했다."(262-3)
"중간계급 여성에게 적합한 노동의 장소는 가정이었다. 이들에게 가정 관리는 식량을 구입하고 하인들을 감독하며, 가정 예산 내에서 검소하게 살림하고 자녀양육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아내들은 보통 남편보다 자녀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 그들은 당대인들이 고통스런 향연이라고 부르곤 했던 만찬석상에서 안주인으로서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도록 우아하게 행동해야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남편들 중에는 어느 정도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가정 관리가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기화·기계화되었지만 하인이 없는 우리 시대의 가정과 비교할 때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이 해내야 했던 집안일은 당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엄청난 것이었다." "더러움은 빅토리아 시대의 주부들이 온갖 육체노동을 감수하고라도 사정없이 싸워야 했던 강적이었다." "병원균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자 주부는 의사의 보조자로 임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65-6)
"19세기 초부터 선량한 사람들은 노동계급의 상황을 접하게 될 때마다 노동에 대한 이상화를 고심하게 되었다. 노동이라는 존중받는 행위모델이 단지 소수에게만 도덕적 자극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모델은 단지 새로운 습관과 압력을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도록 엄중한 노동규율을 강요했다." "1870년대에 이런 상황에 대해 듣고 있었던 독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기업가 측에서 나온 미심쩍은 이야기들이나 이기적인 제안들을 제외하면 정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죄책감과 온정주의적 생색, 교조주의적 이론화의 분위기 속에서, 터무니없는 합리화와 노동 기계화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변명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비단 경제적 효용성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즐거움을 찬미했다."(276-8)
8 예술적 취향
"회화와 조각, 시와 연극, 소설과 음악, 건축을 비롯한 예술의 전 분야에서 격정적이고 투쟁적인 성향이 나타났다. 새로운 것에 열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더니즘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는데, 최신 피카소 예술을 흡수하지 못했던 슈니츨러의 무능력도 그중 하나다. 19세기 후반에 진부한 그림에 염증을 느낀 회화수집가들은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인상파 형식은 너무나 평범하고 심지어 조잡하다며 거부했다. 또 인상파의 신봉자들은 후기 인상파의 그림을 원시적이고 혼란스럽다고 평가했다. 반 고흐에 열광한 사람들은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순진한 대중에 대한 사기로 격하시켰을 수도 있다. 슈니츨러가 쇤베르크의 음악을 그 자신과 같은 진지한 음악 애호가들에 대한 기만으로 여긴 것처럼 말이다. 전위예술가와 그 지지자들은 혐오스런 부르주아지가 분수를 지키도록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같은 속물들을 공격하는 것과는 별도로, 자신들의 개성을 열렬히 고집했다."(292-3)
"역사가들은 이러한 관계의 복잡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빅토리아 인의 미적 취향의 발전을 인습적인 예술의 소비자들과 반역적인 모더니스트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편리하게 요약했다. 마치 예술을 만들어내는 긴장이 고급문화의 중심을 겨냥한 노골적인 공격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빅토리아 시대 문화 전쟁의 전선은 명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대에 등장한 회화와 음악의 새로운 양식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셋 혹은 더 많은 무리들 사이의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다툼이 되었다. 점잖은 사람들의 사회에 합류되기를 원했던 진보적 예술가들, 즉 은밀한 부르주아도 있었다. 회화 분야에서 모더니즘의 위대한 선구자인 에두아르 마네는 오로지 레종 도뇌르 훈장만을 갈구했다. 독일에서 인상파 범주에 속했던 가장 유명한 화가 막스 리버만은 1890년대 이후 베를린 분리파 운동을 주도했는데, 그는 지극히 규범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정통 상층 부르주아였다."(293-4)
"결국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화폭을 온갖 악의적인 논쟁으로 덧칠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시장에 긴장과 동요를 야기한 심미적 취향의 급격한 증가였다. 간단히 말하면, 안주를 추구하는 부르주아와 대담한 모험가들 사이의 경계선에는 구멍이 많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무수한 중간계급 회화수집가들이 존재했다. 이들 마이케나스(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의 정치가로서 예술의 후원자를 일컫는 보통명사 '메세나'가 되었다)의 현대 후손들은 대부분 부유한 남성과 소수의 부유한 여성들이었지만, 그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잔의 그림을 최초로 수집한 사람들은 유복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나름대로는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르주아였다. 대(大) 탕기로 알려진 파리 미술계의 선량한 중개인 쥘리앵 프랑수아 탕기는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는데도 수년간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했으며 빌려준 돈 대신에 그림을 받았다. 그는 세잔의 그림을 화랑에 전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294)
"19세기 부르주아는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페라, 음악회, 연극, 공공 전시회와 사설 전시회를 찾았다. 그들은 이런 장소를 휴식을 취하거나 연애하는 곳으로, 또는 사업상의 모임을 갖는 곳으로 여겼다. 장래의 화가들은 낮에 미술관에서 걸작을 모사하며 보냈다. 젊은 연주자들은 거장의 연주를 들으러 몰려들었다. 정신적 즐거움보다는 육체적 쾌락에 열중했던 사람들은 오페라하우스 2층 발코니 그늘에서 창부들을 찾았다." "18세기에 데이비드 흄이 말했던 것처럼, 취향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속적인 반복학습을 통해 조잡하고 성급하며 어리석은 견해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안다는 식의 주장을 세련되기 다듬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학습은 상당한 시간투자가 전제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계를 유지하거나 가게를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즉 여가를 필요로 했다. 요컨대 고급문화를 습득하는 데 있어 돈은 곧 시간이었다."(304)
9 자기만의 방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은 일반적으로 공적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의 접촉은 본질적으로 매우 직접적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플리머스 식민지(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 주에 처음 세운 정착지)의 가족들은 작은 방이 하나, 기껏해야 두 개 정도 있는 집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뒤엉켜 살았다." "대다수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편지는 공문서나 마찬가지였으며, 수줍음 따위는 이웃의 무자비한 호기심 앞에 설 자리가 없었다. 이단자들이나 간통을 저지른 사람들을 당국에 고발하는 것은 사실상 시민의 의무였다. 말하자면 공동체는 개개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던 것이다. 간통자의 가슴에 달린 주홍 글씨 'A'는 예외적이며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가장 내밀한 행위에 대해 알고 판단을 내릴 사회의 권리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 사생활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333-4)
"사생활을 이상화하는 것과 그 이상을 현실로 전환시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주거와 같이 가장 일상적인 문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19세기에 중간계급이 더욱 부유해지자 많은 부르주아는 더 넓은 공간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을 가능케 했다. 집은 외부 세계로부터 가족을,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서로를 분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벽과 커튼, 휘장, 단단한 현관문, 교묘하게 심어진 관목과 담장은 이웃을 포함한 외부인에게 접근을 막는 상징이자 경고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거주자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많은 부르주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참견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요컨대 사생활이란 세부적인 것들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요했다." "가정 내의 사생활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구사항은 물론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이는 빈민들에게는 절대 불가능했다. 이러한 차이는 19세기 부르주아지를 노동계급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350-1)
"사생활의 가치는 충분히 분명했지만, 그것은 모종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했다. 어느 정도의 재산 없이는 사생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생활은 다양한 감정을 포괄했다. 사실 사춘기 청소년에게 사생활의 의미란 분명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청소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이며, 성인과 동등하게 취급받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춘기란 온갖 다양한 감정과 신념, 즉 반항심, 염세주의, 수치감, 독립적 삶에 대한 열망을 포괄하는 그 무엇이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인정해주려는 의지는 의심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정하는 것이었으며, 독자적인 사상과 이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능력을 전제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것은 관용을 요구했다." "검열이나 사법기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19세기 자유주의자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싸웠던 반면, 좀 더 소심하거나 현실적인 사람들은 그 폐지를 요구하지 않고 당국의 족쇄를 느슨하게 하는 데 만족했다."(356-7)
"개성은 전통이나 인습은 물론 종교나 도덕에도 얽매이지 않는 〈르네상스 인〉이라고 불리게 될 존재의 전제조건이었다. 14~15세기에 극도로 발전한 개성이 체사레 보르지아 같은 비도덕적인 괴물로 타락한 것처럼, 19세기에도 개성에 대한 대담한 주장은 심각한 위험을 수반했다. 엄격한 가족과 캐묻기 좋아하는 이웃의 감시를 피해 시골이나 소도시에서 도시로 옮겨온 젊은이들은, 자신이 그렇게도 갈구했던 독립이 종종 원치 않는 익명성, 즉 친구들과 이해심 깊은 공동체의 부재로 전락한 것을 알게 되었다. 집단의 둥지를 떠난 데 대해서 그것은 너무 무거운 대가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외로운 영혼들은 소외되기 위해 답답한 시골을 벗어났던 것이다. 외로움에 시달리고 방향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사생활이라는 번지르르한 구호는 역설적인 느낌을 가져왔다. 당대의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19세기 도시생활의 경향을 특징짓기 위해 〈고립〉, 〈아노미〉, 〈분열〉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만들어냈다."(359)
"사생활의 확대를 비롯하여 19세기 부르주아의 삶을 특징짓는 예기치 못한 놀라운 혁신은 자아에 대한 전반적인 매혹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에 대한 열중은 세계의 구성요소들을 발견하려 노력했던 선조들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아테네의 위대한 등에 소크라테스로 소급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몽테뉴, 파스칼, 루소에 이르는 냉혹한 내면 세계 탐구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빅토리아 인의 자아에 대한 관심에는 길고 명예로운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치이론가들은 인간본성론에 기대어 자신들의 사고체계를 수립했다. 토머스 홉스는 걸작 『리바이어던』에서 모든 통치의 열쇠가 되는 성찰을 제시했다.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자는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이해해야 한다.〉 19세기에 '자아'라는 수수께끼에 몰두하는 자기분석이 가능해졌던 것은 사람들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361)
후주
"빅토리아 세계에 대한 정치적·도덕적 비판은 플로베르나 졸라처럼 부르주아의 속물적 문화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멈추었던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내가 부르주아 혐오자라고 지칭했던 화가들과 소설가들은 부르주아 문화 전체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던 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비판자들은 목표들을 훨씬 정확하게 선택했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업톤 싱클레어는 시카고의 정육업에 관한 끔찍한 소설 『정글』에서 큰 통에 짓눌러 소시지가 된 노동자를 묘사함으로써 식품의약규제법(1906)이라는 개혁법안의 제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소위 추문폭로자들 대부분은 급진주의자가 아니었다. 『맥클루어』지의 가장 능력 있는 기고자들 중 하나였던 레이 스태너드 베이커는 이를 단순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우리 세계를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추문을 폭로'했다. 우리는 절망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증오에 차 있지도 않다.〉"(366-8)
"19세기의 위대한 정치·경제·사회 혁명에서 부르주아들이 행한 주도적인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시작된 구체제의 매장이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수십 년 만에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한 빅토리아 사회의 경제 각 부문, 즉 광산, 산업, 금융, 보험 국내교역 및 국제무역에서 진취적인 부르주아의 몫은 당연히 정치에서보다 더 많았으며, 격렬한 갈등을 겪은 후에는 더욱 늘어났다. 이것은 사마리아인과 스크루지를 비교하거나, 착취자보다는 박애주의자를 찾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에너지, 곧 신세계를 창조하는 발명가와 엔지니어와 금융가들이 에너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서정적이면서도 조롱조로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자본가들 중 박애주의자는 거의 없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이룩했다."(368-9)
"사회를 향한 관대한 태도가 가치 있는 평가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이 중간계급 내부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공정한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시회적 자유주의란 단지 이기심을 덮은 가면에 불과하다는 부당한 비난에 가려져 있었다.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수용한 중간계급의 태도에 대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 상당수가 그것을 향유하고 진흥시켰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에게만 제대로 알려져 있다. 자기 시대의 회화를 수집하고 박물관을 후원한 사람들은 고상한 취향을 지닌 백만장자들만이 아니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최초로 구매한 사람들은 부르주아 중간층이었으며, 교향곡 연주회에 충실하게 참석한 사람들은 하급 사무직 종사자들과 그 아내들이었다. 우리는 모든 속물이 부르주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부르주아가 속물은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알 필요가 있다."(3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