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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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역사의 교차로에서


"18세기에 마침내 지구를 둘러싼 제국을 수립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식민지 중에서도 전설로 가득찬 동방에 대해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의기양양함에는 뜻밖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를 손에 넣어 승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좋았으나, 수송로와 병참선이 지나치게 멀어져 여러 곳에서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러한 취약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나중에 본인 스스로도 주장했듯이, 시리아에서 전설과 영광의 길을 따라 바빌론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내쳐 인도까지 쳐들어갈 계획으로 1798년 이집트 원정에 이어 시리아로 진군해 들어갔다. 이후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러시아 황제 파벨을 꼬드겨 러시아군도 같은 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중동의 토착 정권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이런 팽창을 막으려고 했다. 중동을 지배할 의도는 없었으나 유럽의 경쟁국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 또한 결단코 막으려고 했다."(51)


"영국정부가 19세기 내내 유럽 국가들의 간섭, 전복, 침략에 맞서 쇠락한 이슬람 정권들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자 이윽고 러시아제국이 영국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 계획을 막는 것은 영국 군부와 민관인 관리들의 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은 1829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웰링턴 공작이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인도를 지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 논의에서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접근을 막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이때부터 쇠락한 아시아의 이슬람 정권들을 영국령 인도와 이집트로 가는 통로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영국의 전략이 되었다. 특히 이것은 파머스턴이 오랫동안 외무장관과 총리로 재직할 때 추진했던 관계로, 그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51-3)


"거대한 게임이 특히 격렬하게 진행되던 서아시아에서는 다르다넬스의 좁은 해협 위쪽,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 통로와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북서 통로에 자리하여 수백 년 동안 세계정치의 교차로가 되었던 고대 비잔티움, 곧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콘스탄티노플이 적대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는 한, 강력한 영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들어가 러시아 해안선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러시아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점령하는 날에는, 영국 함대는 해협으로의 진입을 차단당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로 진출하여 영국의 생명선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아시아 대륙 저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접한 드높은 산맥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침략군이 영국령 인도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올 수 있는 요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가 그 고지대에 입지를 마련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영국의 정책 기조가 되었다."(53)


"오스만제국은 제1차 발칸전쟁(1912~1913)에서 발칸동맹(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 패해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제2차 발칸전쟁(1913)에서는 아시아 쪽 터키의 맞은편에 위치한 트라케(트라키아)를 용케 회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붕괴가 계속되는 와중에 찾아든 잠깐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권을 잡고 술탄의 각료로 제국을 지배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청년튀르크당은, 제국의 영토가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고 유럽의 포식자들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마저 분할했고, 이제 그들이 눈길을 돌릴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지표면의 4분의 1은 영국, 6분의 1은 러시아가 차지하여 대부분 지역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고, 서반구도 먼로주의에 포함돼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어서, 유럽 국가들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지역은 중동뿐이었다."(77-8)


"CUP(통일진보위원회) 내의 다양한 분파는 강력한 유럽 국가를 동맹으로 확보하는 것이 터키 의제의 가장 절박한 사안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유럽권의 한 나라, 아니 열강의 하나─영국, 프랑스, 혹은 독일─만 동맹으로 얻으면, 오스만제국은 영토를 침탈당하는 일 없이 안전해지리라고 청년튀르크당은 판단했다. 러시아와 러시아보다는 힘이 다소 약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그리스,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들이었다." "1914년 5월과 7월 사이에는 오스만의 정세가 더욱 악화되어 CUP 지도자들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세 강대국에도 동맹의 개연성 여부를 은밀히 타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프랑스파였던 해상장관 제말은 프랑스에 동맹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했다. 절망에 빠진 탈라트가 고심 끝에 러시아에까지 접근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나, 역시 퇴짜를 맞았다." "오스만제국은 열강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하는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83-4)


"불간섭 정책을 옹호하던 오스만제국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는 1914년 8월 말에 벌어진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해 9월에 시작된 마수리아 호수 전투에서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자, 오스만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하려면 독일이 단독으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러시아는 수십만 명의 병력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상황이어서, 엔베르처럼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도 러시아의 패배가 임박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의 승리 열차는 이제 막 역을 떠나려 했으므로, 엔베르로서는 이번이 기차에 올라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더욱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9월 26일 엔베르는 결국 동료들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외국 배들(사실상 연합국 선박)의 접근을 가로막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 독일 대사 폰 반겐하임에게, 대재상이 더는 오스만의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통보했다."(114-5)


2부 하르툼의 키치너, 장래를 준비하다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와 키프로스 문제를 명확히 해둘 필요를 느꼈다." "카이로의 영국청(이집트 총독 키치너가 근무하는 곳)이 원한 것은, 이름뿐이나마 언젠가는 독립시켜주겠다는 언질이 포함된 보호령이었는데, 영국정부는 두 나라의 병합이라는 본래의 결정을 번복하고 카이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영국 내각의 결정으로 키치너의 영국청은, 키치너와 그의 참모들이 훗날 아랍어권 전역으로 확대시킬 생각이었던 통치 형태의 원형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도에서와 같은 직접통치 방식이 아닌 보호령이 그것이다. 키치너의 이집트에서는 허울뿐이나마 세습군주와 토착 각료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영국 고문관들의 조언으로 결정된 사안이라 해도 모든 법령은 그들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그것이 바로 키치너 사단이 바란 정부 형태였던 것이다. 로널드 스토스의 표현을 빌리면, 〈영국은 명령법에 반대하고, 가정법을 좋아하며, 기원祈願법도 마다하지 않았다.〉"(136-7)


"1914년 영국인들의 관심은 온통 오스만제국이 참전하면 수에즈운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에 모아졌다. 로널드 스토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럽의 국방부 관리들이 철도 시설을 중심으로 적국의 군사력을 분석하듯, 낙타에 초점을 맞추어 오스만의 군사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실 낙타는 구실이었을 뿐, 스토스의 진짜 목적은 그 편지와 함께 1914년 9월 6일 클레이턴이 건네준, 낙타 이외의 또다른 문제들을 메카의 지도자와 논의해달라는 내용의 극비 비망록을 키치너에게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비망록에서 클레이턴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는 영국에 호의적인 아라비아 지도자를 이슬람의 칼리프로 만들어 오스만 술탄을 대체할 개연성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클레이턴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슬람 성지의 수호자인 메카의 아미르가 칼리프의 명백한 후보자라고 말햇다. 그렇게 되면 성지순례의 면으로도 영국에 중요한 조력자가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157-8)


"키치너는 외무장관 그레이의 승인을 받아 스토스에게 보낸 전문에서, 메카의 지배자에게 〈터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 전쟁에서 아랍이 영국을 도와주면, 영국도 아라비아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아랍인들이 외국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답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여기서 '아랍인'은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아라비아 반도가 술탄으로부터 해방되면 영국은 외세의 모든 침략으로부터 그곳 지배자들을 보호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월권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키치너의 발언이었다. 그는 아라비아의 역할이 전시보다 전후에 더 중요할 것이라고 여긴 자신의 믿음을 반영하듯, 메카에 보내는 메시지를 폭탄선언으로 마감했다. 〈메카나 메디나의 칼리프는 진정한 아랍 종족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지금 벌어지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그 선은 달성될 것입니다.〉"(161-3)


"키치너의 측근들은 그들이 이슬람권에 대해 안다고 믿은 그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슬람권의 불화와 분열상의 정도를 가볍게 본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슬람의 극단적 청교도 운동인 와하브파의 지도자 이븐 사우드에게 수니파인 메카 지배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한 키치너의 계획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수십 개로 쪼개진 이슬람의 종파들이 그랬듯, 그 둘도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키치너와 그의 측근들은 메카의 지배자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드는 오류도 범했다. 메카의 지배자는 그들이 보낸 전문을 보고 영국이 자신에게 거대한 왕국의 지배자를 제의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슬람의 새로운 칼리프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메카의 지배자가 자신의 새로운 왕국의 경계지가 될 곳을 언급할 때 스토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그래서였다. 키치너나 그나 아미르의 통치영역을 확대시켜줄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164)


3부 중동의 진창에 빠진 영국


"1915년 초 (서부전선 병력 차출을 거부하던) 키치너는 돌연 마음을 바꿔 영국의 다르다넬스 공격을 제안했다.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다르다넬스에 대한 양동 공격을 급히 요청해오자, 그 청에 응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렇게 되면 독일이 모든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여할 수 있게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견제 공격을 요청하고, 키치너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 엔베르의 카프카스 고원 지대 공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요청은 1951년 1월 러시아가 엔베르의 튀르크군에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전 영국에 전달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지도자들은 있지도 않은 튀르크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해주겠다며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처칠, 키치너, 애스퀴스, 로이드 조지, 영국, 중동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전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196-7)


"키치너와 처칠의 다르다넬스 작전이 막상 성공할 조짐이 보이자 원조를 요청했던 러시아 정부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작전 성공은 물론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영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할 것이 뻔했고, 그러자 러시아인들 마음속에 지난 1세기 동안 거대한 게임을 벌이며 느꼈던 공포와 시기심이 되살아난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우려한 것은, 영국이 일단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나면 내놓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5년 3월 15일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가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메시지가 담긴 비밀 통전通電을 런던과 파리에 각각 발송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다르다넬스 해협, 그리고 해협에 인접한 지역을 러시아에 인도할 것을 연합국에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의 다른 영토와 그 밖의 지역에 갖고 있는 야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양국의 계획을 호의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207)


"러시아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그레이가 콘스탄티노플 협정을 비밀에 부친 것은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인도의 무슬림 여론에 미칠 파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무슬림 독립국, 따라서 중요성이 적지 않은 오스만제국을 파괴한 장본인으로 비춰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레이는 또, 오스만제국이 파괴되는 데 따른 이슬람교도들의 손실을 다른 곳에 무슬림 국가를 세우는 방식으로 벌충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아라비아가 그 후보지로 가장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은 열강들도 탐내지 않았으므로 약속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훗날, 〈외국 군대가 아라비아 땅을 점령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마른 황무지여서 강대국이 목초지로 욕심 부릴 만한 곳도 아니었다〉고 썼다. 그때만 해도 아라비아에 엄청난 석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211-2)


"한편 사이크스가 외유에서 돌아와 내각에 던진 주요 메시지는, 그동안은 아랍이 전쟁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연합국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메카의 샤리프 아미르 후세인과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사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각료들의 토의 끝에 결국 (카이로에 교섭권을 주어 후세인과 합의해야 한다는) 키치너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헨리 맥마흔이 런던이 부여해준 권한과 지시사항으로 메카와 교신을 재개한 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토록 오랫동안 그 의미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만든 맥마흔 서한이었다."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사뭇 달라진 어조로 후세인에게 답변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원하는 약속을 해주라는 키치너의 지시를 받고 특정 영토와 경계지역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확실한 언질을 주는 데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헷갈리는 용어를 사용했다."(274-5)


"그가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1916년 초 윈덤 디즈가 상황 파악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아랍인이 세 부류로 갈라져 있던 것도 그 힌트가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영국이 그 모든 아랍인들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그중 첫 번째인 시리아인들만 해도 프랑스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겨 그들 영토에는 프랑스가 발을 들이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았고, 그것은 물론 프랑스의 요구와 상반되었다. 두 번째 아랍인인 후세인도 아랍왕국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디즈는 아랍인 대다수와 터키인 모두 그것에 반대한다고 썼다. 〈이 생각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 아랍인 다수, 모든 터키인들의 관점이다.〉 다른 아랍인들도 후세인을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라는 것이 디즈의 생각이었다. 끝으로 이라크의 아랍인들이 있었다. 그들도 (디즈가 보기에는) 독립을 원했지만 인도정부가 그곳을 병합해 지배하려는 것이 문제였다."(277-8)


"그러나 클레이턴과 그의 동료들은 몰랐지만, (아랍 비밀결사 지도자인) 알 미스리, (영국 관리와 아랍 지도자 간의 매개 역할을 한) 알 파루키, 아미르 후세인도 영국에 위조화폐를 남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세인에게는 군대가 없었고 비밀결사에도 부하들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아랍군을 결집할 수 있다고 장담한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처음에는 아랍 봉기를 약속한 알 파루키도 11월 15일 마크 사이크스를 만났을 때는 태도를 바꿔, 연합국이 시리아 해안지대에 군대를 먼저 상륙시키지 않으면 아랍 봉기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도 영국이 먼저 공격해주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아랍 봉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영국군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않으면 아랍은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이크스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영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281)


"1915년 11월 23일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후속 조치를 위한 협상을 벌였고, 갑론을박 끝에 서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사이크스 쪽에서 보면 프랑스가 확대된 레바논을 지배하고 여타 시리아 지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니, 모술까지 이어지는 세력권을 프랑스에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이고, (프랑스 협상대표) 피코는 피코대로 그것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지방 바스라와 바그다드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걸림돌이 된 것은 팔레스타인이었다." "그리하여 두 항구도시 아크레(아코)와 하니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철도로 연결되는 영토 지대는 영국이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의 여타 지역은 모종의 국제기구 통치를 받도록 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나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중동의 나머지 지역은 아랍국 혹은 독립의 허울은 쓰겠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권을 분할될 국가들이 연합을 만들기로 했다."(289)


# 사이크스-피코 예비 협정(1916년 1월 3일 체결)


4부 전복


"서방권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시간상의 문제일 뿐 쇠락한 오스만제국이 언제든 붕괴되거나 혹은 해체될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으므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벌이는 긴박한 전쟁의 과정에서 오스만제국은 와해될 것이고, 제국 내에서 일어난 분란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16년 중엽의 양상은 그와 다르게 나타났다." "오스만군에 속한 다수의 독일장교들이 명령이 잘 먹히지 않는 것에 좌절과 혐오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국 관계에 균열이 갈 만큼 그것이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전쟁이 승리하는 쪽으로만 힘을 행사했을 뿐, 오스만 정부의 독립이나 혹은 CUP 지도자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독일은 연합국이나 동맹국의 그 어느 강대국보다 능란하게, 전후 아시아에 가진 영토적 야망을 전시 행동에 개입시키지 않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후방을 교란시키는 기회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었다."(309-10)


"우연인지 필연인지 키치너가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과 때를 같이해 메카에서는 아미르 후세인의 봉기가 일어났다. 후세인이 청년튀르크당이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로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것이 키치너 사단의 노력이 가져온 성과로 믿었다." "그러나 후세인이 바란 아랍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오스만군에 속한 아랍부대들 중 후세인 편으로 넘어온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오스만제국을 변절하고 연합국 측으로 넘어온 정치인이나 군인도 없었다. 알 파루키가 후세인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약속한 강력한 비밀 군사조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세인의 병력은 영국 돈에 매수된 수천 명의 부족민이 전부였다. 후세인에게는 정규군도 없었다. 헤자즈와 헤자즈 부족민들이 사는 인근 지역을 벗어나면, 후세인의 봉기를 지원해줄 곳 또한 없었다." "결국 후세인이 아랍 봉기를 선언한 지 1년 뒤에는 데이비드 호가스가 그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상황이 되었다."(327-34)


5부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진 연합국


"행정부에 일어난 변화는 영국의 중동정책에도 우연치 않은 변화를 초래했다. 동방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애스퀴스와 그레이가 내각에서 퇴출되고, 자신의 중동관을 내각에 강요했던 키치너도 죽고 없어진 뒤, 키치너와 모든 면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로이드 조지가 총리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처음부터 동방을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 변수로 보았다는 점에서 키치너와 달랐다." "중동에 관한 로이드 조지의 미래관은 많은 부분 기독교 백성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오스만제국을 혐오한 그의 첫 정치적 스승이자 자유당 출신 총리였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튀르크 정부를 증오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그는 소아시아에 영토적 야망을 가진 그리스에는 호의를 보였고, 성지(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도 지지했다. 다만 두 번째 경우는, 유대인의 조국이 세워지더라도 그것이 영국의 통치를 받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66-7)


"1917년 5월 전쟁에 혐오감을 느낀 프랑스군이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에서는 정치인들이 그간 편안하게 느꼈던 마지막 전시내각마저 붕괴했다. 전통적 지도력이 신뢰를 잃은 탓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총리 후보자였던 조르주 클레망소도 로이드 조지처럼 정치적 '고독자'였다." "클레망소는 그 무엇에 앞서 증오자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한 것이 또 독일이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프랑스에 부과한 가혹한 강화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열린 보르도 국민회의에서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 클레망소였던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힘을 모아야 하고, 그러므로 프랑스가 식민지 사업에 힘을 분산시킨 것은 실책이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따라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에 병합시키려고 하는 프랑스 상·하원의원들에게는 그가 당연히 주적일 수밖에 없었다."(369-70)


6부 신세계와 약속의 땅


"로이드 조지는 1917년 5월 10일에 열린 하원 비밀회의에서 영국이 전쟁 중에 점령한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를 독일에 반환하지 않을 것이고,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도 터키가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선언을 하여 그의 긴밀한 협력자마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각료들 중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마크 사이크스가 약속한 전후 중동에서의 프랑스 권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이크스-피코 협정도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본 것은 물리적 소유뿐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그는 1917년 4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에게 〈우리는 정복으로 그곳을 차지할 것이고, 이후에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프랑스도 종래에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로이드 조지는 내각에서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획득을 시종일관 원한 인물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조국을 조성하는 안도 지지했다."(412-3)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는 논지를 펼쳐) 정부의 주요 민간인 각료들이 시온주의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전시내각의 레오 에이머리와 마크 사이크스는 전후에 독일이 오스만제국을 독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인도로 가는 길이 적국 수중에 떨어져 영국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튀르크와 독일을 격퇴하고 오스만제국의 남쪽 주변부를 차지하는 것이 첩경이었다. 내각이 개전 초부터 메소포타미아 병합을 염두에 둔 것도 그래서였다. 아라비아도 독립을 주장한 현지 지배자들과 협상을 벌여 보조금도 주고 지원도 약속하여 친영파로 만들어놓았다. 그리하여 그 지역에서 취약지로 남은 곳은 이제 팔레스타인뿐이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다리로서 이집트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가로막는데다, 수에즈운하와도 가까워 운하는 물론이고 운하와 연결되는 해로도 함께 위협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425-6)


"전시내각의 또다른 인물인 옴즈비 고어가 팔레스타인 농업연구소에서 아론손이 거둔 성과에 감격한 것은, 그것이 시온주의 논점의 핵심을 건드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커즌이 의회에서 개진한 시온주의 문제도, 팔레스타인 정착을 원하는 수백만 유대인들을 부양하기에는 그곳의 땅이 지나치게 척박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인 원주민들도 추가 정착민을 받을 여지는 없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나라를 제거하지 않고는 두 번째 나라를 세울 공간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아론손의 발견으로 그 논점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아론손의 연구대로라면 과학적 영농기술로 땅이 비옥해져 팔레스타인의 주민 60여만 명을 쫓아내지 않고도 수백만 명이 추가로 정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옴즈비 고어도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중동의 아랍어권 및 여타 민족들을 도와 그 지역이 갱생되면, 사막이 다시금 번영을 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런던으로 돌아왔다."(429-30)


7부 중동 침략


"영국 지도자들은 중동 아랍어권 지역의 정복이 끝나갈 시점이 다가오자, 후세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1914년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및 다마스쿠스의 분리주의 지도자들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기울였던 클레이턴의 노력도, 비무슬림 통치에 반대하는 현지인들이 저항에 막혀 좌초된 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마스쿠스가 영국군의 진군로에 포함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중동의 미래를 위해 연합국의 대의와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그곳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파이살이 연합국의 계획에 동의한 것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스만 정부가 시리아에 즉각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아랍 민족주의에 선수를 치려 했던 보고서들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영국은 시리아 지방들에서 후세인보다 한층 좋은 평판을 얻을 조짐을 보인 다마스쿠스의 토착 아랍 지도부에 맞서, 후세인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곤혹스런 입장에 빠질 수도 있었다."(503-4)


"마크 사이크스는 1918년 중반 7인위원회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영국의 의도를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이크스의 외무부 상관들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선언문으로도 새로운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사이크스의 필치에서 나온 것들이 그렇듯 그 선언문도 사용된 단어만 달랐을 뿐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아랍권 모두, 이런저런 유럽세력권이나 통치권에 포함되도록 만든 영국의 전후 중동정책을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이크스의 선언이 인정한 완전한 독립은 아라비아 반도에 국한돼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독립된 지역이거나 혹은 아랍인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지역들만 독립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1918년 11월 8일에는 마침내 중동에 토착정부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영국-프랑스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주장에 따라 아랍 '독립'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506-7)


"외무부는 육군성으로 하여금 앨런비에게 새롭고 중요한 지시를 내리게 함으로써, 전부터 징후를 보여온 정치적 논제를 계속 진행시켰다. 앨런비가 점령한 시리아 영토를 점령된 적의 영토가 아닌 〈독립국 지위를 갖는 동맹의 영토〉로 취급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외무부가 〈주요 지역들에 아랍 기를 게양하고 그것에 경례하는 것과 같은 특징적 혹은 형식적 행위를 함으로써 아랍의 토착 지배권을 인정하고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간 수차례 논의되었던 지시를 내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10월 1일 사이크스는 앨런비에게 군정 지역을 최소화하고, 프랑스의 역할도 그에 맞춰 축소시키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듯 외무부는 앨런비에게 형식적으로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따르되 실제로는 다르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고, 그 점에서 외무부의 조치는 더 많은 것을 원한 프랑스, 프랑스에는 아무것도 주고 싶어 하지 않은 파이살, 혹은 카이로 아랍부의 어느 곳도 만족시키지 못한 해법이었다."(512-3)


8부 승리의 떡고물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독일의 입김 아래 있을 것으로만 알았지, 오스만정부와 독일정부의 틈이 어느 정도나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1918년에도 그들은 독일이 아시아 북부 지역 점령을 끝내고, 이제는 중부를 탈취하는 과정에 있으며, 아시아 남부의 영국 입지도 뒤흔들 채비를 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전시에 팽배했던 관점, 다시 말해 독일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야망을 갖고 있고, 그러므로 종전 뒤 아시아의 모든 지역은 독일의 거대한 노예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며, 아시아의 부와 천연자원 또한 독일 산업의 연료가 되어 종국에는 독일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과도 부합했다." "에이머리가 1917년 말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은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전쟁은 이제 문자 그대로 동방으로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국-독일 경계선을 결정짓기 위해 아시아의 남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546)


"1918년 여름 전시내각 회의에서 영국군 참모총장은 유럽전의 승리가 1919년 여름에는 힘들고 1920년 여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 내각도 적군이 그토록 신속히 아니 별안간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 (적국들과의 휴전협정을 고려하거나 그 문안을 작성하는 등의)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실제로 며칠 뒤 영국정부의 현안이 되었다. 10월 1일에서 6일 사이에는 오스만제국 정부와 몇몇 튀르크 요인들이 강화를 타진해 오고,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독일이 윌슨 대통령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협상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국의 전시내각은, 영국이 지배하기를 바라는 중동 지역이 행여 영국군에 점령되기 전 전쟁이 끝날까봐 안절부절 속을 태웠다. 레오 에이머리가 종전이 되기 전에 사실상 중동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스뫼츠와 참모총장을 닦달한 것도 그래서였다."(554-6)


"1919년 겨울 총리실은 영국 언론에 파이살의 아랍군이 앨런비 장군의 시리아 정복에 〈현저하게 기여했다〉는 것과, 그들이 〈앨런비의 군대에 앞서 시리아 내륙의 4대 도시(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에 입성했다〉는 취지의 기밀 비망록을 배포했다. 비망록에는 파이살군이 헤자즈의 외국군이 아닌 원주민군으로서 시리아 도시들에 입성했으며, 〈그러므로 시리아를 해방시키는 데 조력한 아랍군의 대부분은 그 지방 원주민들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비망록의 취지는 아랍어권 시리아는 그들 스스로 봉기를 일으켜 해방되었고, 그러므로 (튀르크에 이어) 그곳을 다시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진 서구 민주주의의 원리 또한 그곳과는 맞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실제로는 아랍인들이 기여한 부분이 〈지극히 미미〉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영국의 또 다른 주요 동맹인 파이살에게 불리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자, 파이살과 시리아의 대군이 그들 나라를 직접 해방시켰다고 주장한 것이다."(575-6)


9부 썰물은 빠지고


"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영국제국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중동과 여타 지역에서 점령한 영토를 추가하여, 과거 그 어느 때 혹은 세계의 그 어느 제국보다 광대한 대제국이 된 것이다. 로이드 조지는 전쟁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생이 큰 모험을 치르느라 지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시에 얻은 영토를 하나라도 더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로이드 조지는 중동에 파견된 영국군만 해도 250만 명에 달하고 그중 25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반면, 갈리폴리 전투를 제외하면 프랑스군은 사상자가 거의 없었고 미군 또한 중동에는 발도 디밀지 않았다고 하면서, 영국은 중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평화회의에서도 그는 108만 4000명에 달하는 영국 및 제국 병력이 오스만 영토에 주둔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와 더불어 영국을 제외하면 점령군에 의미 있는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583-7)


"중동의 평화협상은 기본적으로 로이드 조지가 짠 각본에 따라 전개되었다. 이는 미국을 소비에트 러시아나 혹은 소생하여 재무장한 독일이 제기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삼는 동시에, 이탈리아 및 프랑스와도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챙기려는 두 가지 속셈을 가진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1918~1919년에서 1919~1920년으로 협상시점이 넘어가면서 미국이 영국의 동맹도 아니고 어느 나라의 동맹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정세와 '헝클어진 동맹관계'로부터 발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어려워지자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모색하여 예전과 반대되는 길을 걸을 요량으로, 그간 중동에서 취했던 반프랑스 정책을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국-프랑스 동맹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은 뒤였다. 결국 중동 평화협상은 출발도 어설프고 끝은 더욱 어설픈 것이 되고 말았다."(592-3)


"미국은 터키와 싸운 교전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윌슨은 오스만과 관련된 협상에 참여했다. 그가 제안한 14개 조항이 오스만 문제의 타결에는 적용할 수 없었지만, 정치철학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국제문제는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조지도 그것을 알고 우드로 윌슨이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방들의 안건을 심의하려고 하자, 시리아의 독립을 위협하는 프랑스─윌슨의 14개 조항과 원칙에 반하는 위협이었다─로 그의 관심을 바꿔놓았다." "윌슨은 당연히 시리아인 스스로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했다." "아랍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파이살도 회의 참석자들에게, 그가 독립을 주장하는 아랍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은 배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주장에 대해 보이는 파이살의 이런 합리성은, 아랍인들의 독립 주장을 영국의 사주에 의한 속임수로 보고 그에 대해 강경노선을 고수한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600-1)


10부 아시아를 덮친 폭풍우


"중동 지역에서 이윽고 분란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 시작된 독립의 요구가 1919년에 들어서는 소요로 발전해간 이집트를 시작으로, 표면상으로 이집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인도 변경지에서도 1919년 전쟁이 발발했다. 아라비아의 영국 정책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와해되는 조짐을 보였다. 불행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당시 중동의 영국 당국에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형국이었다. 트란스요르단만 해도 부족 간 투쟁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서팔레스타인에서도 1920년 봄 유대인을 향한 아랍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며, 1920년 여름에는 이라크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마도 종전 뒤 (재정난으로 인해) 중동에 주둔한 영국군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들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629)


"전후 영국이 중동에서 갖고 있던 입지에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곳은 수십 년 간 영국이 '임시' 보호령으로 통치했고, 그곳의 영국 통치자들이 처음부터 아랍어권 사람들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영국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이집트였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이집트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한 점에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 정치인들이 그 약속을 믿고, 1차 세계대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영국도 이제는 이집트에 독립의 일정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고 해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술탄과 이집트의 지도부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에 많이 의존했던 영국으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집트 지도부와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마저 실패하여 영국은 결국 현지 정치인들의 동의 없이 군대의 힘으로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631-6)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평원으로 이어지는 고개들이 있는 영국의 또 다른 전략거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도 1세기 동안 여러 차례 유혈낭자한 전쟁을 치르며, 적대국(러시아)이 그 험준한 산악왕국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1907년 영국-러시아 협정 체결로, 아프가니스탄이 영국 보호령임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문제도 일단락된 것으로 여겨졌다." "재차 발발한 제3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결짓는 라왈핀디 조약이 조인된 것은 1919년 8월 8일 오전이었다. 영국이 적대적 외세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악왕국으로부터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보유했던 외교권을 철회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그런데 라왈핀디 조약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아프간 정부는 새롭게 얻은 자국의 독립을 볼셰비키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영국이 지난 십수년 간 아프간을 보호령으로 삼은 결과 얻은 것은 우호가 아닌 원한이었다."(637-40)


"아라비아에서는 영국의 두 주요 동맹인 헤자즈의 왕 후세인과 나지드의 왕 이브 사우드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분쟁은 후세인의 지배권이 끝나고 이븐 사우드의 지배권이 시작되는 국경지대의 조그만 도시풍 오아시스들이었던 (알)쿠르마와 투라바에 집중되었다. 그곳들의 점유가 보기보다 중요했던 것은 너른 목초지와 더불어 부족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븐 사우드는 선대로부터 18세기의 종교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와하브주의 신봉자였다. 1745년에 맺은 양가의 동맹관계도 두 집안의 잦은 혼인으로 더욱 돈독해졌다. 문제는 이 와하브주의자들(와하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와하비로 불렀다)이 그것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광신도로 보일 만큼 엄격한 청교도적 이슬람을 표방했고, 예리한 감각을 지닌 이븐 사우드가 와하브의 그런 광신적 에너지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 있었다."(642-3)


"후세인이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도 이런 청교도적 이슬람이 부근의 헤자즈 지방으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다. 정통 수니파였던 그에게 와하브주의는 교의적이고 정치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근절시키기 위해 쿠르마와 투라바로 되풀이해서 군대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패하기만 했다." "1921년 말에 이르면, 전투병력만 15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흐완('종교상의 형제들'이라는 뜻)을 선발대로 내세운 이븐 사우드군은 아라비아를 완전히 정복할 기세였다. 1920년 9월 20일에는 《타임스》의 중동 전문 특파원마저, 카이로의 아랍부가 후세인을 이슬람 칼리프로 만들려고 한 정책은 실패작이었음이 드러났다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이븐 사우드가 헤자즈를 점령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그의 말대로 이븐 사우드는 4년 뒤인 1924년 헤자즈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망명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이렇듯 중동제국의 서쪽과 동쪽뿐 아니라 남쪽 경계지에서도 더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644-5)


"한편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19년 말엽 오스만제국에서 실시된 하원 총선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새로 뽑힌 의원들은 하원이 소집되기도 전, 터키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바다와 영국 함대의 대포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고, 서른여덟 살의 민족주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이 새로운 투쟁기지로 삼은 곳이기도 한 앙고라(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에 모여들어, 민족계약National Pact으로 알려진 케말주의적 정치원리가 담긴 선언문을 채택하여 열화와 같은 대중의 성원을 받았다." "1920년 1월 중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원이 소집되고 1920년 1월 28일에는 하원이 비밀회의를 열어 민족계약의 채택을 의결한 뒤 2월 17일 대중에 그 사실을 공표했다." "20세기의 정치적 논제가 유럽 주변 대륙들에 대한 유럽 지배의 종식에 있었다면, 오스만 의회의 독립선언이야말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만했다."(646-7)


"앙고라에 수립된 케말의 터키정부가 처음 결정한 사항은 러시아로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 간에는 우호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약)1921년 3월 16일에 조인된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1년 여의 기간이 걸렸다." "당시 스탈린은 인종문제와 국가통제인민위원이었다. 그랬던 만큼 볼셰비키 이데올로기보다는 러시아의 국가 이익을 우선시했을테고, 그래서 케말이 (볼셰비키 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과는 별개로) 영국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 현실주의적 아니 냉소적 볼셰비키였던 그로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케말을 지원할 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소비에트 자금과 물자가 반볼셰비키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터키 국경지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외국의 정치운동에 제공한 최초의 중요한 군사원조였다."(649-50)


"시리아에서는 세 개의 주요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가 활동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아랍계 오스만군 장교들로 구성되었던 만큼 당연히 메소포타미아 지방들의 미래를 관건으로 삼은 알 하드,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들이어서 파이살이 시온주의자들에게 해준 약속을 철회하도록 압력 넣는 것에 전력투구한 반시온주의 조직인 아랍 클럽, 세 단체들 중 명성이 가장 높았던 알 파타트(청년 아랍협회)가 그들이었다." "시리아 의회는 1919년 중반 소집되기 무섭게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냈다.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 포함되는 대시리아 독립국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방식, 혹은 프랑스의 요구에 맞서 미국, 영국, 시온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파이살의 계획과는 상충하는 요구사항이었다." "1920년 1월 말에는 호전적 민족주의자들이 시리아 의회를 장악한 채 (프랑스의 느슨한 위임통치를 인정한) 파이살-클라망소 협정을 부결시켰다."(658-60)


"그러나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지와 파이살의 입지 모두 영국이 없으면 무너질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1920년 7월 26일에는 프랑스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7월 28일에는 파이살이 망명을 떠났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몇 개의 하부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금의 레바논이 된 대레바논도 그중 하나였다. 1920년 8월 1일 구로 장군이 선언한 대레바논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프랑스의 직접 통치지역으로 명시된 곳과도 대체로 일치했다. 그곳에는 옛 오스만제국의 한 지방이었던 레바논─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전통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드루즈파의 중심지─외에 해안가 도시들인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티레, 그리고 레바논 내륙의 상당 지역에 걸쳐 있던 알비카(베카) 골짜기도 포함되었다. 기독교도 근거지인 레바논에 생경한 지역들이 추가된 것이고, 그에 따라 다수의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인구도 그곳으로 유입되었다."(662-4)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부근의 팔레스타인이 '시온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외교와 선전운동도 함께 펼쳤다." "하지만 1920년 프랑스가 영국의 이익에 직접적 위협을 가한 곳은 그곳들이 아닌, 장차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75퍼센트 정도를 접하게 될 요르단 강 동안의 인구가 적은 트란스요르단이었다. 부족적 삶과 구조로 보면 아라비아에 가깝고, 역사적으로는 많은 지역이 성서의 땅에 속해 있었으며, 과거 한때는 아라비아의 로마 속주에 속해 있기도 했던 복잡다단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가을에는 앨런비 장군이 그곳을 점령한 뒤 파이살이 통치하는 무능한 다마스쿠스 정부에 일임해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곳은 방치돼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실책이었다. 프랑스가 다마스쿠스에서 파이살 세력을 몰아낸 뒤 파이살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트란스요르단의 지배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666-8)


"1917~1918년 앨런비 장군의 점령에 이어 팔레스타인에는 군정이 수립되었다. 그와 더불어 평판 나쁘고 수행하기 힘든 짐을 떠맡은 것에 대한 영국정부의 고난도 함께 시작되었다. 벨푸어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조국을 창설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 당사자들끼리 군정 기간 내내 실랑이를 벌인 탓이다." "클레이턴만 해도 시온주의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전 세계 유대인들의 문화·정서적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확장하되, 유대인 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로서의 영국 통치령으로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영국군 장교들은 심지어 그런 한정된 시온주의조차 인정하지 않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을 지지했다." "반면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벨푸어선언이 영국정부의 확고한 정책이고 따라서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군말 없이 그 정책을 따를 것이고, 나아가 그것의 이점에도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672-3)


"로이드 조지는 바스라와 바그다드 그리고 모술에 대한 통치방법을 구상할 때, 그 세 곳이 단일 정치체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라크(영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 아랍식 명칭)는 단일 정치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분열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술을 구태여 이라크에 포함시키려 한 것도, 그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유전을 보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널드 윌슨은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을 메소포타미아의 근본적 문제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200만 명에 달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시아파 무슬림이 소수파인 수니파 무슬림의 지배를 수용하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수니파 지배가 수반되지 않은 정부 형태 또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윌슨의 보고에 따르면 이라크 주민의 75퍼센트는 〈정부에 한 번도 복종해본 적이 없는〉 부족이었다."(679-80)


"페르시아의 스러져 가는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무력한 젊은 군주 아흐마드 샤는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형편인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친영파 인물을 총리에 앉혀두는 조건으로 영국정부의 정례 보조금을 받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커즌의 지휘 아래 테헤란의 영국 공사와 페르시아 총리 및 그의 두 동료 관리들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에서 페르시아 대표들은 조인의 조건으로 영국에 13만 파운드를 요구하여 몰래 받아 챙긴 뒤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영국-페르시아 협정은 이런 협잡 끝에 1919년 8월 9일 조인되었다." "그러나 1921년 2월 21일 대령 레자 칸이 카자크 병력 3,000명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군, 권력을 탈취하고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지 고작 닷새밖에 안 된 2월 26일 테헤란의 신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세 이슬람 국가들(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반영 동맹국이 되었다."(689-96)


11부 러시아, 중동에 돌아오다


"소비에트가 페르시아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터키 민족주의를 후원하고, 이라크 봉기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들 중 어느 것도 그들이 직접 고취하거나 지휘하지는 않았다. 중동 일대를 휩쓴 봉기가 볼셰비키 러시아가 연루된 광범위한 국제 음모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은 것은 영국의 망상이었다. 중동 사태는 일련의 어설픈 봉기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개별적 혹은 지역적 상황에 따라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따라서 그 운동들을 이용은 했을망정, 볼셰비키와 볼셰비키주의가 그 운동들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 것은 없었다." "영국 관리들은 종전 뒤 중동에서 일어난 봉기들을 오래된 음모자들이 꾸민 사악한 음모로 규정했다. 영국 정보부는 볼셰비키와 국제 금융, 범아랍주의와 범튀르크주의, 이슬람과 러시아도 거대한 음모의 공범자들인 국제적 유대인 공동체들과 독일-프로이센이 이용한 재료로 보았다."(701-3)


"1919년 외무장관이 된 조지 커즌은 러시아와의 거대한 게임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답게 러시아의 세력 팽창에 맞서 영국의 군사적 입지를 높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남카프카스와 북부 페르시아에도 확고한 방어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커즌과 외무부 사무차관 하딩은 중동의 어느 한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기면 도미노효과로 나머지 지역도 잃게 될 것이고, 그러다 나중에는 인도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도장관 에드윈 몬터규와 인도 부왕 쳄스퍼드 남작 3세는 볼셰비키 러시아의 위협이 군사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치중될 것이고, 그러므로 러시아와의 경쟁도 이슬람권 아시아 일대의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영국은 중동의 민족주의 세력을 러시아로 돌아서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상황에 영국군까지 주둔시키면 민족주의 세력은 영국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710-1)


12부 1922년의 타결


"1921년 2월 식민장관으로 취임했을 당시 처칠에게는 이미 적은 비용으로도 중동을 지배할 수 있는 광범위한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난날 육군장관과 공군장관을 겸직했을 때도 그는 비행기와 장갑차로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여, 중동의 유지비를 줄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그가 쓴 글에) 방비가 잘된 공군 기지 몇 곳만 있으면 〈병력과 돈만 잡아먹는 기나긴 병참선 없이도〉 영국 공군은 〈보호령들을 충분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된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처칠도 인정했듯이 외부의 침략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내적 안정 유지'를 유일한 목표로 삼은 전략이었다. 처칠이 중동에서의 영국 문제를 외부가 아닌 내부, 내적 분란에서 찾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대에 뒤쳐진 제국주의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처칠의 전략은 토착민의 봉기 진압에 주안점을 두었던 만큼, 동의가 아닌 강압으로 아랍인을 통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51-2)


# 카이로 회의의 네 가지 기본 안건(1921년 3월 21일)

1.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문제 : 파이살에게 왕위를 부여하며,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왕위를 제공한 것처럼 꾸민다.

2. 쿠르드족 지역 문제 : 이라크 편입 또는 쿠르디스탄 독립 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현행 독립체 상태를 유지한다.

3. 트란스요르단 문제 : 파이살의 형 압둘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하여 반프랑스 운동과 반시온주의 운동을 억제한다.

4. 이븐 사우드 문제 : 하심가 왕족(파이살, 압둘라)의 승승장구에 반발할 여지가 있으므로 연간 보조금을 인상해준다.


"파이살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임통치령에 반대하고 이라크('뿌리가 튼튼한 나라'라는 뜻)의 정식 독립을 요구하여 영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라크와 영국의 관계를 국제연맹의 결정이 아닌, 양국 간의 조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에 대해 영국은 국제연맹의 승인 없이 이라크의 지위를 바꿀 법적 권한이 자신들에게는 없다고 맞섰다. 다만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것이면 조약 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파이살은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조약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런 식으로 협상은 런던에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며 1년 넘게 지지부진 계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라크와 이집트가 얻은 것은 제한된 자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국가의 지위는 갖게 되었다. 이라크와 이집트 모두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 영국에 의해 임명된 군주들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764-6)


"압둘라를 트란스요르단 지배자로 남겨둠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처칠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것은, 그로 인해 영국이 사우드가와 하심가가 벌이는 아라비아의 극렬한 종교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식민성이 트란스요르단에 잠정적으로 취한 일련의 행정적 조치들로 그곳은 영속적인 정치적 실체로 굳어져 갔다. 아라비아 왕자가 외국 수행원들과 암만에 정착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라는 복잡한 통치체제 속에 항구적 요소로 뿌리내린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본래 그곳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간 되풀이된 제안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영토의 75퍼센트가 이미 그곳 사람도 아닌 아랍 왕조에 돌아가 버린 형국이었다. 훗날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트란스요르단은 이렇게 팔레스타인에서 분리된 개별 정치체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요르단이 지난날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는 사실마저도 잊을 정도가 되었다."(772-3)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과 요르단 하심 왕국의 대립


"1921년 아민 알 후세이니가 예루살렘의 대 무프티(최고의 법률적 권위자) 겸 팔레스타인 무슬림 지도자가 되었을 때 리치먼드는 그로 인해 시온주의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타격을 받은 쪽은 오히려 아랍인들이었다. 대 무프티가 아랍인들을 피투성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감으로써, 시온주의에 가하려던 것보다 오히려 더 끔찍하고 파괴적인 피해를 그들에게 입힌 탓이었다. 아만 알 후세이니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모험가였다. 그러다 보니 아랍인-유대인 문제도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어느 한쪽이 쫓겨나거나 소멸되어야 끝장이 나는 극단으로 몰고 가 아랍 영토와 아랍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런 극단적 행보를 이어가던 끝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결국은 나치 독일에 가서 아돌프 히틀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랍권 팔레스타인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아민 알 후세이니와 지도자 자리를 놓고 겨룬 여러 명의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779-80)


"아랍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는 벨푸어선언을 구체화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위임통치령 내용과 시온주의에 대한 영국의 공약이 대폭 축소된 영국정부의 백서도 거부한다는 전문을 런던 식민성에 보낸 아랍회의 집행위원회와 달리, 하임 바이츠만 박사는 일단 그것으로 유대인들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에서 발전을 이루어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틀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영국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시간이 가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으로 처칠이 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아랍회의 집행위원회는 시간이 가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처칠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거부한 것이다. 1922년 7월 22일에는 국제연맹이, 영국이 요르단 강 서안에 (처칠이 고쳐 쓴) 벨푸어선언을 실행하도록 명시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을 최종 승인했다."(791-2)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역은 튀르크의 지배를 더는 받지 않게 되었다. 동쪽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라비아 왕자(파이살)가 지배하고 쿠르드족,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유대인 인구가 뒤섞인 신생국가 이라크가 세워졌다. 독립국의 외양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이라크에 접한 시리아와 크게 확대된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강 동안에는 앞으로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신생 아랍국이 수립되고, 요르단 강 서안은 유대민족의 조국이 들어설 때까지 당분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따라서 처칠이 원했던 오스만제국의 재건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재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식민장관 처칠이 설정했던 주요 목표들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가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비용절감을 관철시킨 것만 해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체계를 확립한 것도 처칠이 거둔 큰 성과였다."(795)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전시와 종전 뒤 영국과 연합국은 중동의 구질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숴놓았다. 아랍어권 지역에서의 오스만 체제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시킨 뒤 그 자리에 나라들을 세우고, 지배자들을 임명하며, 국경선을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시스템 비슷한 것을 도입했으나, 그것에 반발하는 현지인들의 저항까지 죄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동 분규가 여타 지역의 분규와 비교하여 특별했던 것은, 1922년 초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내용에 따라 그 즉시 모습을 드러냈거나 혹은 종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나라들의 규모와 경계는 물론이고 그 나라들의 존립권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었다."(863-4)


"유럽의 정치 가설은 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중 하나, 세속적 문민정부에 대한 현대적 믿음만은, 정치를 포함해 삶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는 이슬람 율법을 1,000년 넘게 신봉해온 사람들이 사는 중동에서는 이질적 존재였다." "종교적 이유로든 그밖의 또 다른 이유로든, 1922년의 타결 혹은 그것의 토대가 된 근본적 가설에 맞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중동 정치의 특징이 된 것도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에는 합법성에 대한 인식─게임의 규칙이 없다는 것─이 없고,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믿음도 없으며, 경계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든 나라로 부르면 나라가 되고, 지배자를 칭하면 지배자가 되는 곳이었다. 그 점에서 연합국이 제아무리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오스만제국의 계승자들을 들어앉혔다고 주장한다 한들, 중동에는 아직 술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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