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는가?
로드니 스타크 지음, 허성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3월
평점 :
서론
제1부 성탄 전야
"수많은 신들을 섬기긴 했지만 로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회는 신앙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신들에게 각자의 신전이 있었지만, 그 모두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세세하게 통제되던 단일한 국가 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교 신전이 맡은 주된 소임은 국가와 그 지배 귀족이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신전에 갈 뿐이었고, 그곳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특정한 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을 그 신을 믿는 신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자신을 제우스(Zeus)를 믿는 신자 내지 유피테르(Jupiter)를 믿는 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한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필요에 따라 여러 신전과 다양한 신들을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중으로 조직된 종교생활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통된 종교적 구심점과 소속감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모이는 회합이라는 뜻에서 회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22-3)
"로마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국교가 없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데, 로마의 사제집단을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전통적인 신전들조차 전문적인 전임 사제를 두지 않았다." "로마의 사제는 사제 노릇이 그의 주된 역할이 아닌, 다시 말해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로마의 신전은 권력이나 영향력 내지 부가 모이는 독자적 중심이 될 수 없었다.···신전에 배속된 사제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전은 사제들에게 권력의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다.〉" "로마의 이교 신앙은 별도의 재정적 후원이 필요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나면, 신들의 수와 성격과 특화된 역할에 있어 다른 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까닭은 로마의 신들이란 거의 모두 그리스에서 온 것이었고, 그리스의 신들 역시 이집트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신들은 수메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신들이 이동하면서 그냥 이름만 갈아치웠던 것이다." "이렇게 제국의 동부와 이집트에서 유입된 새로운 종교들이 이른바 '동양 종교들'(Oriental faiths)이었다."(27-9)
# 로마에서 동양 종교들이 성공한 이유 (퀴몽+스타크)
1. 동양 종교는 종교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감각에 호소하는 측면이 한층 더 강하다. (감각)
2. 로마의 전통 신들이 도시와 국가의 신들이었다면, 동양 종교의 신은 개인의 신이다. (양심-속죄, 용서와 결부된)
3. 로마의 전통 종교는 '경전'이 없었지만, 동양 종교는 성문화된 경전을 제공한다. (지성)
4. 동양 종교는 여성에게 적극적인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젠더)
5. 동양 종교는 평신도들을 신도단, 즉 활동적인 신도 공동체 안으로 모여들게 한다. (조직화)
"로마의 신들은 그저 고객과 축제만 있었을 뿐, 신도나 정기적 예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양 종교는 〈새로운 공동체 의식과···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소속감을 제공했다.〉" "동양 종교는 분명한 종교적 정체성을 채택했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긴밀하게 결속된 매우 활동적인 종교 공동체, 즉 고객이 아닌 신도단을 필요로 했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동양 종교의 신자들도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을 사회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헌신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헌신의 자세를 통해 훨씬 더 큰 보상을 얻었는데, 그것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헌신에 대해 보답으로 베풀어주는 것이었다. 종교 집단이 최고 수준의 헌신과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신자들을 따로 모아서 친밀한 상호 교제를 가능케 하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이들 간에 끈끈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로마의 통치자들과 쓰라린 갈등을 초래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38-9)
"유일신교와 접촉한 여러 이교 집단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 중 하나를 다신교의 제한된 틀 안에서 가능한 대로 유일신교와 유사하게 변형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장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바로 이시스교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시스를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있는 신〉으로 부른다고 해도, 이시스교가 이교주의에 속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시스를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유일한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시스의 아들인 호로스를 포함하여 여러 신들로 구성된 만신전(pantheon)의 존재를 이교주의의 맥락에서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백한 유사성을 지닌 유대교에 비하면, 이시스 신화는 온통 저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럴 베일리(1871-1957)의 말마따나 〈한편에는 비역사적이고 단지 이야기 속 꼭두각시에 불과한 전설적 인물들이 있었다. 반면에 유대교에는 참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51-3)
"이전에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종교들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나태하고, 현세적인 성격이 되기 때문에, 그 반대 세력은 대부분 이보다 강렬한 신앙을 추구하는 집단 곧 〈소종파〉(높은 헌신도를 지닌 종교단체를 지칭하는 명칭)로부터 나오게 된다. 독점적 종교가 처음에는 강렬한 신앙에 헌신된 이들에 의해 창설되었을지라도, 점차 주변의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독점적 종교가 점점 태만해지는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종교적 강렬함이 결코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물 흐르듯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종파를 이끌던 교인 자녀 중 대다수가 그 부모들보다 긴장감이 덜한 신앙을 선호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러한 과정은 오랫동안 〈종파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sects), 즉 성공적인 종파들이 보다 온건한 종교 집단으로 변모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지칭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나 경제와 같은 현세적 활동에 관여하면서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다."(62-3)
"그러한 종교 기관이 경쟁적 충동을 억누를 만한 강제력을 결여하고 있을 경우, 그 종교는 곧바로 긴장도 높은 신앙을 원하는 이들이 출범시킨 소종파 운동에 의해 포위당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기를 거쳐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에서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대 지도자들이 내세운 유대교는 철저한 율법 준수와 다신교에 대한 절대적 불관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정통주의에 대한 지도 권한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었고 전문화된 세습 제사장 계층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에 따라 성전도 재건되었다. 성전을 유지하고 세습 제사장직을 후원하기 위해 전체 유대인을 대상으로 십일조가 부과되었다.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성전이 재정 기관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성전이 국가의 금고, 심지어 투자 은행 같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환전상들을 유치하기도 했다. 여기서 투자 은행이란 자본의 예치 장소를 말한다."(63)
"이것은 두 집단이 결합된 형태로서, 한편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으며 성전을 관장하는 부유하고 상대적으로 현세적인 제사장 계층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순응을 강요하길 꺼려했던 〈외부인들〉인 정치적 지배자들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다양한 범위의 유대교 종교 집단들(탈무드에서는 24개의 종파를 언급한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종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들의 이름 정도인데,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있다. 논쟁에 휩싸인 유대교 종교 집단들 중에는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알려진 것은 대부분 외부인들이 작성한 것이며, 이것들은 대부분 상당히 비우호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1세기의 유대인 모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약 37-100)였는데, 그는 자기가 적어도 유대교의 세 주요 집단, 곧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에 가담해서 활동했었다고 말한다."(64-5)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 〈마쉬아흐〉(mashiah)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주님〉(그리스어로 christos)이라는 뜻이다. 수 세기 동안─특히 강력한 적들로부터 괴롭힘 당하던 시기에─유대인의 사고 속에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던 주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충만한 영광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을 다스리는 지복의〉 시대를 시작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을 넘어서면, 제이콥 뉴스너의 말마따나 유대교는 〈메시아에 대한 깔끔한 교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실제로 쿰란 문서를 기록했던 유대인들은 심지어 두 명의 메시아, 곧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과 기름 부은 받은 왕〉의 출현을 예견하기도 했다.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아 대망은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한 관념들의 거대한 덩어리〉였다고 하겠다." "메시아의 강림은 종종 종말 곧 〈죽은 의인들의 부활 및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곤 했다."(70-1)
제2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일반 교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운동의 활력은 〈공동 식사를 핵심으로 삼아〉 가정집에서 함께 모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필시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키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그 거룩한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단체의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복음서의 전승을 구성하는 문서자료를 최초로 수집하는 일이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점이 바로 복음서들이 때때로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을 나타내는 이유를 밝혀준다. 맨 처음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운동이 처한 전투적 상황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극히 적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로마인들이 가한 박해보다 이 박해가 기독교 신앙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97-9)
"바울은 혼자 여행하는 법이 없었다. 소수의 조력자들만을 대동하고 여행하는 법도 없었다. 도리어 많을 때는 40명이나 되는 신자들을 수행단으로 삼아 동행하였다. 이 정도 규모면 초기 〈회중〉을 구성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이를 통해 믿음직한 예배 분위기를 유지하고 새 신자를 맞이하여 이들과 더불어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바울의 수행원 가운데는 틀림없이 필경사(scribes)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제작하기 위해 손으로 받아쓰고, 한 번에 하나씩 옮겨 적는 방식을 사용했던 당시에는 필경사를 대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필경사 중에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가 로마서의 말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Tertius, 롬 16:22)─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헬무트 쾨스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사역은 외로운 선교사 한 사람이 벌인 소박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리어 치밀하게 준비된 대규모의 조직적 활동이었다.〉"(105-6)
"이교 세계에서는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고대 영웅 설화의 모든 요소, 곧 어떻게 한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완결판이었다." "더욱이 그리스도 이야기가 지닌 〈이교적 요소〉는 그리스-로마의 이교 신앙과 기독교 간의 문화적 연속성을 극대화시켰다. 이교도 출신의 개종자들은 자기들에게 친숙한 신들과 기적들에 대한 개념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훨씬 더 강한 수준의 헌신과 더 포괄적인 도덕성 및 훨씬 더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다신교로 퇴행하는 경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예수가 신성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인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그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되돌릴 수 없이 갈라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129-31)
"고대 도시에 만연한 불결함과 고통과 질병 및 익명성의 한복판에서 기독교는 긍휼을 베풀고 안전을 보장하는 섬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교 세계에서, 특히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긍휼을 〈성격적 결함〉으로, 동정을 〈병적 감정〉으로 간주했다. 긍휼이란 무상의 도움이나 구호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정의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지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긍휼은 이성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충동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과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긍휼을 간청할 때〉 철저히 〈외면할〉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저지는 계속해서 〈동정은 현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성격적 결함이므로 아직 미성숙한 자들에게만 용납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덕적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가 보여준 참으로 혁명적인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비가 자기 가족뿐 아니라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뻗어나간다는 점이다."(170-1)
"그리스도인 작가들은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혁명적이라는 점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예수에게 있어 남녀는 평등했다는 말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성차별적이지 않은 예수의 말이나 행동이 성차별이 만연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실제 젠더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객관적 증거에 따르면, 의심할 여지 없이 초기 기독교 여성이 이교도 여성이나 유대인 여성에 비해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 훨씬 더 평등한 권리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로마시의 지하에 위치한 지하묘지 중 기독교 구역에 있는 3,733기의 묘실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인 여성에 대한 추모 비문이 그리스도인 남성에 대한 추모 비문과 그 길이에서 차이가 거의 없음을 밝혀냈다. 이렇듯 〈추모 비문에서 남녀 간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유독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징이었고, 이 점은 그들을 도시의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별해주었다.〉"(186-7)
제3부 기독교화된 유럽의 성장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한 한 가지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필시 로마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다수의 시민이 신봉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비약적 성장 곡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수천 명이 개종하게 된 상황을 모르고 지나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를 군중들이 〈진심이 담긴 환호소리와 함께〉 맞이한 것은 그가 단지 승리자로서 입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주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가 예전이 관례대로 유피테르 신전에 올라가 이교의 신들에게 제사 드리기를 거부하자, 로마시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을 것이다."(250-1)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기여한 주요 업적은 성직자들을 부와 권력과 신분이 보장된 고위층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삼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한 것은 기독교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수혜자로 만들어 제국의 재화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누리도록 한 것이었다.〉 법률상의 특권과 권력이 성직자들에게 아낌없이 하사되었다. 주교가 주관하는 교회 법정이 공식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세금을 비롯한 공적 의무를 면제받았다. 아울러 주교들은 〈이제 가장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과 동급의 고위층이 되었으며···이에 따라 그들은 국가를 위한 재판관과 지사와 정무관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귀족 가문 출신의 사람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쇄도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한층 더 세속적으로 변질되면서 이전의 활력을 상실한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255-6)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주의를 불법화하지 않았고,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도 용인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가 이교 신전을 용인한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가 계속해서 이교도들을 집정관이나 지사를 비롯한 최고 고위직에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 철학자들이 그의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태양신을 묘사한 그림이 그가 주조한 동전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실로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신랄한 언사를 내뱉은〉 대상은 이교도가 아니라 도나투스파와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 및 발렌티누스파 마르키온파 같은 영지주의 분파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기번 이래로 주요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신실성이 결여된 정치적 꼼수로 격하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진정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치세 동안 이교적 요소를 존치시킨 것을 종교적 화합을 추구하는 그의 의중이 반영된 사례로 인용한다."(261-2)
"통념적인 역사관과는 달리 이교주의는 즉시 소멸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것은 아주 서서히 종적을 감추었다." "초기 무슬림 군대가 639년 하란(Haran)을 공격할 당시 그 도시에서는 아직도 이교도가 그리스도인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아랍인들과 협상하기 위해서 파견된 대표단은 모두 이교도였다. 사실 10세기 말까지도 그리스를 포함하여 그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다수의 이교도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이교의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도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당한 시기 동안 로마의 몇몇 주요 도시를 포함하여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던 종교적 관점과 관행은 이교주의와 기독교가 습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끝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교주의가 유럽에서 결코 완전히 소멸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에 동화된 형태로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교의 축제들이 매우 얄팍한 기독교적 외피를 입고 계속되었으며, 이교의 신들도 그런 식으로 많이 살아남았다."(270-1)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교회에 대한 국가지원을 중단하고 이교의 신전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는 제국의 고위 관직을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교도들로 교체하였다. 그가 시행한 조치 가운데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전을 가르치는 것을 불법화한 것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상류층 부모가 자식을 이교도에게 보내어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전 교육(paideia)의 커리큘럼 안에 무의식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언어 및 표정과 더불어 무수히 코드화된 기호체계를 습득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이러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고대 로마의 엘리트 문화 속에서 경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가 가한 가장 심한 상처〉는 끔찍한 박해의 시대가 또다시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안겨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원주의를 반대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리아누스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276-7)
"이교도의 영향과 세력의 쇠퇴는 매우 서서히 나타났는데,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에 작용한 주요 요인은 다름 아닌 기회주의(opportunism)다. 율리아누스의 짧은 치세를 제외하고 나면,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황제의 제위는 줄곧 기독교의 수중에 있었고 이후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내로라하는 이교도가 계속해서 정무직에 임명되고는 했지만 이들의 전망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교회 내에 권력과 재력이 보장된 자리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었다. 성공을 추구하는 개인과 가문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저 브라운의 말마따나 〈기독교를 통해 권력층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이 고조된 것은 반이교주의 법령이나 신전의 폐쇄보다 다신교의 종언을 앞당기는 데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적잖은 이교 철학자들도 이교주의를 이탈하였고, 그 가운데는 기독교의 지도급 주교가 된 이들도 있었다."(284-5)
제4부 중세의 흐름
"역설적이게도 서구문명이 발흥하는 데 가장 유익을 준 요인이 바로 로마의 멸망이었다." "로마는 자유민들조차 대부분 최소한의 생존수준에서 연명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성취할 만한 잠재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약탈적 지배층이 '잉여' 산물을 다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붕괴 덕분에 〈그 동안 세금을 갈취당했던 수백만의 인구가 그들을 마비상태로 몰아가던 억압에서 놓여남에 따라〉 새로운 기술이 다수 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자리 잡으면서 보통 사람들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감소하던 인구가 마침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생산계급의 고혈을 짜내어 지배집단의 엄청난 낭비를 충당하거나, 황제의 자존심을 위해 거대 기념물을 축조하거나 숱한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지원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에 '암흑시대'로의 '몰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348-9)
# 중세의 발전
1. 기술 분야 : 물방앗간과 풍차 보급, 삼포제 경작 시행, 굴뚝과 안경의 발명 등
2. 자본주의 : 이윤, 재산권, 신용, 대출 같은 자본주의적 측면들에 대한 논의들
3. 도덕 분야 : 노예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에 반대함
4. 음악 분야 : 둘 이상의 곡조를 동시에 내어 화음을 만드는 다성음악의 출현
5. 미술 분야 :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 색유리 장식, 회화에 유성 안료 사용 등
6. 문학 분야 : 토착어를 쓴 단테와 초서 및 중세 무훈기를 남긴 무명의 작가들
7. 교육 분야 : 고등 학문을 다루는 대학의 등장으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함
8. 과학 분야 : 수백 년 동안 축적되어온 점진적 진보가 16세기 과학혁명 도출
"중세는 흔히 '신앙의 시대' 내지 '믿음의 시대'라고 기술되곤 하지만, 실제 중세 유럽의 대중은 의외로 회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결여하고 있었다." "중세기의 신앙생활에 대한 통계보고는 극히 적지만,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전해지는 신빙성 있는 보도는 의외로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의 내용 가운데 놀랍도록 일치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은 종종 교회건물 자체를 멋대로 이용했다. 1367년에 요크 대주교였던 존 토레스비는 교회 안에서 시장을 여는 행위, 특히 일요일에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주교들마다 〈기도하는 집을 도둑의 굴혈로 만드는 자들을 질책했지만 허사였다.〉" "중세 유럽인들의 이러한 태도나 저조한 교회출석을 감안할 때,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했던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370-6)
"중세기에 기독교에 대한 낮은 헌신도를 나타낸 것은 일반 대중만이 아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급 성직자도 마찬가지였다." "730년에 가경자 비드(the Venerable Bede)는 장차 주교가 될 에그버트에게, 영국의 사제들과 수도사들 가운데 라틴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으므로 〈나는 수차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공했다〉고 말했다. 1222년에 옥스퍼드 회의는 교구 성직자들을 〈귀 먹은 개들〉이라고 묘사했으며, 1287년에 대주교였던 페첨은 〈사제들의 무식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성직자들이 평신도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은 단지 무식하다는 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비슷하게 방종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몬 더피의 보고에 따르면, 〈성직자들 사이에도 축첩이 만연한 탓에 무일푼의 성직자라도 집안 가득히 자녀들을 거느리고, 일요일마다 허접한 방식으로 전례(liturgy)를 집전하는 꼴이···유럽 전역에서 다반사였다.〉"(379-81)
"15세기가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로마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를 포함하여 유럽의 모든 식자층 가운데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구체(sphere)라는 용어는 13세기 초에 나온 중세 때 가장 인기 있던 천문학 교과서의 제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콜럼버스가 반대에 직면했던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둘레와 관련해서 그가 매우 잘못된 주장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일본까지의 거리가 약 4,500킬로미터라고 추산했는데 실제로는 약 22,400킬로미터에 달한다. 사람들은 지구의 둘레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에 대해 반대한 것은 콜럼버스와 그의 선원들이 전부 해상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와 그의 아들이 남긴 『콜럼버스 제독 이야기』를 포함하여 당시의 기록 어디서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콜럼버스가 증명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400-1)
"'암흑시대'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혁명'이란 것도 없었다." "존 로크는 스콜라학자들을 사소한 일에 골몰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덮기 위한 방편으로 쓸데없는 용어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조폐국장〉과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천사가 바늘 꼭대기에서 춤출 수 있는지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제를 논한다고 조롱했다. 결국 〈스콜라적〉이란 어휘는 대부분의 사전에서 〈진부하고 교조적〉이라는 말로 정의되는 형용사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16,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적 성과는 경건함으로 명망이 높은 일군의 학자들이 내놓은 것이었다." "'과학혁명'의 서막을 연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난데없이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콜라학파에 속한 교수들로부터 지동설에 기초한 태양계 모델을 가능케 하는 기초 개념들을 배웠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져온 발견과 혁신의 긴 경로가 지향하던 그다음 단계로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405-6)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태양계의 중심에 두고 지구를 행성 가운데 하나로 보고서 태양 주위를 돌게 하였다. 그의 업적에 특별히 빛을 더해준 것은 그가 그것을 수학을 통해 표현한 것과 자신의 체계를 기하학을 통해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해당되는 천체가 미래에 오게 될 위치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부활절과 하지 및 동지 등의 날짜를 확정하는 데 매우 긴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 결과가 기원후 2세기부터 전해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토대를 둔 계산 결과보다 더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 내의 궤도들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체계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들의 궤도 안에는 회로(loops)가 있어서 천체들의 움직임을 지연시킨다는 가설을 세워야만 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독일의 개신교도였던 요하네스 케플러가 나타나서 코페르니쿠스의 원형 궤도를 타원형 궤도로 대체했다."(408-9)
"과학은 16세기 불현듯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수 세기 전에 스콜라학자들이 품었던 경험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이들이 혁신을 위한 체계적 노력을 경주함에 따라 새롭게 설립된 대학에서 그 자양분을 얻었다." "과학이 오로지 유럽에서만 발흥했던 까닭은 중세 유럽인들만이 과학을 연구 가능한 바람직한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세적 기풍(medievalism)이 과학운동의 형성에 미친 최대의 기여에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비밀, 즉 인간이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확신이 어떻게 유럽인의 마음에 그렇게 생생하게 뿌리내리게 된 것일까?···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합리성에 대한 중세의 고집스러운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여호와가 지닌 인격적 활기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하는 합리성을 겸하여 지닌 존재로 이해되었다.···따라서 자연에 대한 탐구는 합리성을 통한 신앙의 논증으로 귀결될 뿐이다.〉"(415-6)
"갈릴레이가 로마의 이단심문소에 소환되어 지구가 움직인다고, 즉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하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인해 고발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투옥된 적도, 고문을 당한 적도 없다. 그는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그러던 중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 "갈릴레이 사건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북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도전이 여전했고, 30년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가톨릭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고발에 대해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신학의 수용 범위는 축소되고 있었다."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론을 가설적 내지 수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에 직접적인 신학적 함의가 없다고 주장하는 보다 신중한 전략을 채택했었다. 교황이 갈릴레이에게 요구한 것도 〈자연과학을 통해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422-3)
제5부 분열된 기독교 세계
"수 세기 동안 교회는 대중적인 개혁가들의 활력을 새로운 수도회 창설로 유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험한 대결을 비껴가게 해주었다." "성 프란치스코(1181-1226)가 이단으로 기소되지 않은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결코 성직자로 서품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청빈과 겸손의 덕에 대해 설교하였고, 이는 특별히 성직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1209년, 그는 열한 명의 제자를 데리고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여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로 허락되었다." "도미니코(1170-1221)는 1214년 툴루즈에서 탁발수도회를 설립했는데, (공의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그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이들 역시 창시자의 이름을 따 도미니코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회와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교회개혁을 위한 대중적 설교를 사명으로 출범하여 교황을 지지하는 대중적인 설교로 전환되었다."(447-8)
"최초의 거대한 이단운동인 카타리파(Cathars)는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보고밀(Bogomil) 운동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이 어디였든 간에, 카타리파는 〈가톨릭교회를 대놓고 사탄의 교회라고 부르면서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저돌적인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이 서유럽에서 신속하게 추종세력을 얻게 된 것은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신학은 초기 영지주의의 신학과 매우 유사했다. 두 신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선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신이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물질세계가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끔찍하고 사악하기에, 선한 신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음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카타리파는 세계가 악한 신(타락한 천사)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이 악한 신은 다름 아닌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선한 신이 보낸 천사였으며, 그의 메시지는 이 세상의 악을 거부하고 선한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51)
"카타리파가 일부러 교회 밖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발도파(Waldensians)는 처음부터 교회개혁에 전념했던 수도원 운동의 초기 형태로 시작했다. 이 집단은 피에르 발도 내지 발데스라고 불리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에 의해 창시되었다. 1176년 발도는 자기가 의뢰한 신약성경의 프랑스어 번역을 읽고 난 후 복음서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깨닫게 되었고, 곧이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희사한 후에 사도적 가난(apostolic poverty)을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즉시 그의 주변에는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리용의 빈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179년 발도파의 대표들이 로마로 가서 교황의 공식 승인을 요청한 것은 상당한 염려를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그들의 생활방식은 축복했지만 그들이 설교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454-5)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자신을 인문주의자이자 지성인으로 내세웠지만, 실상 그는 가장 악명 높은 〈게으름뱅이였으며···교회의 필요가 아닌 화려한 볼거리와 도박에 돈을 탕진한 희대의 탕아였다.〉 돈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는 면죄부 판매를 위한 공격적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루터를 격분케 하고 많은 군주들을 루터 편으로 돌아서게 한 요인이었다. 영주들 편에서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 굳이 신학적 반대 가은 것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면죄부 판매로 인해 막대한 양의 부가 그들의 백성들로부터 로마로 유출되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교회는 단연코 유럽에서 최고의 부자이자 최대의 지주였다." "교회는 소유 재산에 대해 일체의 지방세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군다나 교회는 엄청난 양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유럽에서 소작농으로부터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십일조를 부과함으로써 축적한 것이다."(468-9)
"이 시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 루터의 종교개혁 및 기타 개신교 종교개혁에는 엄청난 역설이 존재한다. 이 '개혁들'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개혁의 각 주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속화된 종교적 독점이 주는 여러 가지 폐해를 노출했던 반면에, 그들이 반기를 들었던 가톨릭교회는 극적인 과정을 거쳐 개혁을 위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신교의 도전으로 인해 경건형 교회가 (권력형 교회를 제치고) 권력에 복귀하게 된 것에 기인하며, 이 교회는 그 후로 다시는 위축되지 않았다. 반종교개혁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진 가톨릭의 종교개혁은 트리엔트 공의회(1551-1552, 1562-1563)를 통해 출범하였다. 성직매매가 근절되었고, 사제에 대한 독신이 강력히 시행되었다. 각국의 언어로 된 공인판 성경이 저렴하게 보급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감이 확실하고 박식한) 사제 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 체제가 확립된 것이라고 하겠다."(479-80)
제6부 신세계와 기독교의 성장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주에서 나타난 매우 낮은 수준의 종교적 참여도는 초기 정착민들이 유럽에 만연하던 현상을 그대로 가지고 왔음을 시사한다. 식민주의자들 가운데 미국에서 시온을 건설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종파에 속한 신자는 거의 없었다." " 그러나 유럽에서 기독교가 누리던 신앙의 게으른 독점은 미합중국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식민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던) 국교회 체제는 지속되지 못했다. 1776년에 이미 다종파적 상황이 실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새롭게 등장함에 따라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교파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교파들은 모두 동등한 조건하에 설립되었으므로 정부의 편파적 지원 같은 것이 없었고, 교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교회들 간에 극심한 경쟁이 유발되었다. 미국인들을 신앙을 위해 동원하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 결과 1850년이 되면 미국인의 삼분의 일이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513-6)
"종교 간의 경쟁이 '값싼' 종교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은 가격을 가치로 오인한 것이다. 소비시장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대개 최저가의 제품을 서둘러 구매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돈에 견주어 최대의 가치를 제공하는 상품을 선택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하려 한다. 종교의 경우, 사람들은 최소한의 것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정당한 희생에 대해 종교적으로 최고의 보상을 제공하는 신뢰성 있는 종교로 몰려간다." "미국에서 번창하는 초교파교회들은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은 교회들이다." "요구하는 것이 많은 종교 집단은 요구하는 것이 적은 종교보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더 많이 끌고 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한 종교 집단은 새로운 교인들을 충원한다. 다시 말해서 그 교인들은 너무나 헌신된 나머지 다른 이들을 교회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려고 애쓴다. 요구하는 것이 덜한 종교의 교인들은 이러한 일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520-5)
"다종파적 상황이 모든 종교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다종파적 상황이 종교적 갈등을 유발하여 심한 경우 전쟁이나 박해로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당연시되어왔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유혈사태가 야기된 것은 바로 단일 종교 체제에 맞서는 도전자들을 진압해온 정책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종교적 갈등은 한 사회 안에 너무 많은 종교 집단이 경쟁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적은 종교 집단[의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상호경쟁적인 종교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이 발달하여 '다종파간의 균형'이 생겨나게 된다.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은 공적인 표현과 행동이 상호 존중의 원리에 따라 통제될 때 생겨난다. 다종파 간의 균형은 일단의 경쟁 집단들 간에 권력이 고르게 분산되어 갈등이 어느 편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생겨난다."(528-30)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