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 4 -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1945-1971 중국근현대사 4
구보 도루 지음, 강진아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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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전후의 희망과 혼돈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한다는 대의명분이 사라졌음을 의미했고,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간에 격렬한 항쟁이 펼쳐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민중들 사이에는 부흥을 바라며 〈더 이상 전쟁은 사양한다〉는 내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대표로 충칭에 머무르면서 이러한 여론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내전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지금 가장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슬로건이다〉라고 거듭 옌안의 당 중앙에 보고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국제적으로는 국민정부 아래에서 안정된 통일 중국 재건을 기대하는 미국 정부가 필사적으로 국공 양당 사이를 조정하였고, 소련도 중국에서 내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역시 전후 헌정을 실시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전쟁이 끝나면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인 '훈정'을 끝내고 민주적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18-20)


"경제개방 정책의 파탄과 구일본군 점령지 경제 접수 작업의 혼란은 전후 국민정부의 재정경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생산과 유통의 재건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시장에 공급되는 물자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데도,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을 준비할 전비(戰費)를 확보하려고 방대한 적자예산을 편성하고 통화를 남발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 당연히 물가는 폭등했다." "국민정부가 내놓은 인플레이션 대책은 통화를 새롭게 바꿈으로써 물가를 억제한다는 방안이었다. 1948년 8월에 금원권(金圓券)이라는 새로운 통화가 발행되었다. 정부는 종래의 법폐 300만 위안을 금원권 1위안으로 강제로 교환하도록 하여, 물가와 임금 동향을 진정시키려 했다. 금원권이란 신화폐를 유통시켜 표시 가격을 인하하면서 물가와 임금을 동결한 과격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규제를 싫어하는 시장에서 상품이 모습을 감추고, 물물교환이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이 개혁은 실패했다."(31-3)


"1946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헌법제정국민대회가 열렸다. 정당 중에 국민당, 청년당, 민주사회당이 출석했을 뿐이었다. 공산당과 민주동맹은 국민당이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대회 출석을 보이콧했다. 국민당의 강경책은 일시적으로는 국민정부의 통치를 강고한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당의 지지 기반을 좁히고 약화시켰다. 헌법 시행(1947년 12월)에 따른 입법 활동을 위해 1948년 3월에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한층 두드러졌다. 대회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수도 난징에서조차 유권자 147만 명 가운데 80퍼센트가 기권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선거를 둘러싼 매수 사건과 폭력 사태, 대리투표가 끊이지 않아 국민들에게 환멸을 주었다." "대조적으로 공산당은 생계보장과 내전 반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운동에 연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국민정부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되었다."(37-40)


2장 냉전 속의 국가 건설


"1949년 10월, 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의 국가기구를 보면 각 성청(省廳)의 장관에는 민주당파가, 부책임자에는 공산당원이 취임하는 패턴이 많았다. 지방정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얼핏 보면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1911년 신해혁명 때, 성청 장관에는 청의 개혁파 세력이던 입헌파가 취임하고 부책임자로 혁명파가 취임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신해혁명 당시 상황은 현실 정치의 힘 관계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1949년 혁명의 경우 실권은 대부분 공산당이 장악했으면서도 정권 밖의 일반 사회에 대해서 당외(黨外) 세력이 존중받고 있음을 과시하고, 당외 세력들한테서 새 정권이 신뢰와 협력을 얻어 내기 위한 방책으로서 이런 체제가 채용된 면이 강하다. 실제로 그 후 공산당이 사회주의로 조기 이행에 착수하고, 특히 1957년에 잠재적인 정권 비판자를 적발하는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당외 세력 대부분은 정권 밖으로 배제되었다."(63)


"한국전쟁에 따른 재정적·경제적 부담에 대처하고 국민경제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증산과 절약을 호소했다. 그 일환으로 1951년 12월에 3반운동(三反運動)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 운동은 전시경제 체제 아래에서 생겨난 오직(汚職), 낭비, 관료주의 세 가지 부정적 현상을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 적발하고, 세 가지에 반대하여 증산과 절약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3반운동을 거치면서 국민정부 시대부터 계속 일해 온 전문가나 경제 재정 관료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민간 기업에 대한 비판도 확대되었다. 1952년 1월 말부터 시작되어 6월에 일단락되기까지 5반운동(五反運動)이 전개되었다. 5반이란 뇌물 공여, 탈세, 정보 누설, 부실공사, 공공재 절도 등 증산과 절약을 방해하는 민간 기업의 다섯 가지 행위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5반운동으로 개별 민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83-5)


"신민주주의를 내걸고 출발한 공산당 정권은 1952년 후반부터 이듬해 전반까지 사회주의화 강행으로 크게 방향을 선회했다. 왜 공산당 정권은 사회주의화를 서두른 것일까." "무엇보다 공산당 지도부는 현대적 장비를 갖춘 미군과 대결한 한국전쟁에서 자국의 빈약한 장비에 위기감을 통절히 느꼈다. 그래서 소련이 선전하는 군수공업을 축으로 한 급속한 공업화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두 번째로 3반운동과 5반운동이 전시체제하의 증산과 절약을 목표로 전개된 결과, 민간 기업에 대한 통제가 이미 눈에 띄게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상공업의 전반적인 집단화와 국영화를 실시하는 데 수월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세 번째로 농촌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주도한 토지개혁으로 지나치게 영세한 경영이 이뤄지면서 농업 생산이 저조해진 바람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도 (집단화를 추진한) 1930년대 소련이 모델이 되었다."(86-7)


3장 '대약진운동'의 좌절


"중국이 소련형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한 직후인 1956년, 이러한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한 신뢰를 뒤흔든 큰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소련에서는 중국이 모델로 삼으려 한 스탈린 시대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어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에서는 사회주의화 강행에 항의하는 대규모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더해 중국 내에서도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는 농업과 경공업 생산이 저조했기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이 분출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심각한 위기감을 안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소련에 동조하여 동유럽 국가들의 민중운동 탄압을 지지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지만, 실제로는 사태를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련이 동유럽에 개입하는 근거로 삼은 '제한주권론' 주장, 즉 사회주의국가들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해 각국의 국가주권이 제한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강한 불신감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01-4)


"그렇지만 1950년대 중국은 뭐니 뭐니 해도 소련형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고 있었고, 소련의 기술과 경제, 군사원조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1957년 10월 소련과 '국방 신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소련이 원자폭탄의 견본과 원폭 생산의 기술 자료를 제공하기를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사실 중소 국방신기술협정이 체결에서 파탄에 이르는 중간에, 중국군은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6일에 걸쳐 포탄 44만 발을 샤먼 앞바다의 진먼 섬에 퍼부었고, 섬을 수비하는 타이완 정부군을 공격했다. 이때 미군은 타이완에 군수물자를 지원했을 뿐,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편 중국군도 진먼 섬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강행하지 않은 채, 40일 동안 봉쇄와 포격으로 일관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타이완 해방'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소련에 통고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의사를 전달받은 소련의 회답은 국방신기술협정의 파기였다."(111-2)


"공산당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난항을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마오쩌둥 일파가 점차 소련과 대립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종래의 소련 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모색하여 밀어붙인 것이 대약진운동이었다." "소규모 간이 용광로(土法高爐)를 이용한 제철이나 댐 건설에 수많은 민중이 동원되었다. 동시에 땅을 깊게 갈고 작물을 촘촘히 심어 증산을 꾀하는 농사법(深耕密植)이 장려되었으며,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불리는 대규모 집단농장화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토법고로, 심경밀식, 인민공사는 어느 하나도 뜻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아니, 오히려 참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연이은 대흉작 속에 중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 위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차후에 공표된 인구통계에 기초하여 추계해 보면, 식량도 물자도 부족한 이 시기에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적어도 2천만 명 이상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참상이었다."(123-35)


4장 시행착오를 겪는 사회주의


"(지도부가)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실패의 주된 원인은 자연재해였다고 규정함으로써, 대중 동원에 기댄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도 공산당 내에서 당 주석으로 수장의 지위를 계속 지켰다. 1960년 경제계획은 〈세계 과학기술의 정상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그해부터 막대한 자금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개발계획은 조정 정책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화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호소하는 등 다시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에 도전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원래 농업과 경공업 진흥을 중시하는 조정기의 방침 자체가 중화학공업화 노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64년부터 추진된 제3차 5개년계획(1966~1970) 책정 작업에서 특히 중시된 것은 내륙지역에 군수공업 기지를 건설하는 '3선정책'(三線政策)이었다."(144-6)


"조정기의 동향은 단순히 경제정책의 수정에 그치지 않고, 공산당의 통치 방식 그 자체까지 수정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농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표된 1961년 6월 15일의 지시에는 〈농촌 생활에 관여하는 간부나 일반 민중에 대해 우경화니 '좌경화'니 하며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은 앞으로 금지한다. 그들에 대해 정치적 딱지를 붙이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기하였다. 7월 19일의 지시는 더욱 명확하게 〈'반우파' 투쟁 이후, 각 대학이나 기업에서 일부 지식인들에게 가한 비판은 재검토해야 한다. ······ 만약 잘못된 비판이 가해졌다면, 시시비비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쳐야만 한다〉고 하여, 급진적 사회주의의 주도 아래 수많은 당원이나 전문가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비판이 거듭된 1957년 '반우파' 투쟁 이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조정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는 자세를 강화해 가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159)


"그 무렵 안후이 성과 광시 성에서는 농민이 촌(村)에서 농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확한 농작물 일부로 촌에 차지료(借地料)를 지불하는 도급 경작이 확산되고 있었다. 차지료를 지불하고 남은 농작물이 전부 농민의 수입이 되었기 대문에 농민의 경작 의욕을 자극하여 전체 농촌 생산도 증가했다. 그러한 움직임에 기초하여 농촌 증산을 꾀하기 위해 개별 농가의 도급 경작도 인정해야 한다는 방침을 공산당 중앙의 농촌사업부장 덩쯔후이가 제기하자, 이를 받아 덩샤오핑도 〈안후이 성 동지들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라며 도급 경작을 지지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직후 1962년 7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에서 덩샤오핑이 한 발언이 뒷날 유명해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는 어구이다. 이러한 동향에 대해 마오쩌둥은 도급 경작은 집단농업의 해체로 이어지는 조치라면서 강하게 반대했다."(160-1)


5장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의 배후에는 경제조정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다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지향하는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적었고, 당내 다수파는 경제조정 정책의 방향성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이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부인 장칭이 인맥을 가진 당의 문화선전 부문이었다. 이리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항쟁이 '문화혁명'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전개되었다. 또한 국제 환경 아래, 한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국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차이와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분쟁으로 야기된) 소련과의 대립 역시 심화되면서, 중국 지도부가 한층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점도 주의해야 한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은 가혹하고 치열한 정치투쟁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177-8)


"각지에서 혼란이 일어난 배경에는 문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파괴된 가운데 그때까지 억압당해 온 여러 사회계층의 불만이 분출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 일본의 단카이 세대(團塊世代)에 해당하는 중국의 홍위병 세대는, 중국 경제가 계속해서 침체된 가운데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쉽사리 정규직을 찾지 못하고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다. 늘어만 가던 전후 출생 젊은 실업자 내지 반실업자들이야말로 홍위병을 자칭한 학생이나 문혁파 노동자들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한편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이미 대약진 정책의 파탄에 실망하여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문혁파가 내건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은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 경제를 활성화시킨 경제조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을 뿐,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183)


"홍위병은 원래 계통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족 당시인 1966년 8월 무렵부터 여러 가지 의견 차이로 분열과 다툼이 거듭되었다." "아무리 문혁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 지도부라 해도 이런 사태에는 당혹감을 느껴 충돌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우한의 7·20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1967년 7월 20일 항쟁 조정에 나선 공산당 중앙의 문혁파 간부 왕리와 셰푸즈가 문혁에 비판적인 '백만웅사'(百萬雄師)라는 현지 민중 단체에게 억류되어, 문혁파 계열 조직을 옹호하는 방침을 철회하도록 압박당한 사건이다. 이 행동에 참가한 2천 명의 주력은 공사용 헬멧을 쓰고 트럭 27대와 소방차 8대에 나눠 탄 채 밀고 들어온 노동자들로,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대에는 1천 명 가까운 군인들까지 가세했다. 이러한 조직적 행동은 당 조직과 군의 지지 없이는 일어나기 어려웠다. 문혁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민중들뿐 아니라 기존의 당 조직과 행정 간부, 군부 사이에도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189-91)


6장 문혁 노선의 불가피한 전환


"1966년에 문혁의 영향으로 대학교 입학생 모집 업무가 정지된 뒤로 1968년까지 3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진로를 정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의 젊은이들이 홍위병 운동의 주된 인력 공급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홍위병 활동을 완전히 봉쇄하려면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정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혁의 혼란으로 생산력은 떨어지고 도시 상공업의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었다. 도시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이나 오지의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을 '하방'(下放)'이라고 불렀다. 1968년 11월 15일 당·정부·군은 연명으로, 문혁 시기에 공부할 시간도 없이 졸업반이 되어 버린 학생들이나 진로를 정하지 못한 졸업생들에게 모두 직장을 정해 주겠다는 방침을 알렸다." "하지만 생산 현장에서 농민과 노동자한테 배우자는 말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허울뿐인 성가신 존재를 쫓아 버린 것이었다."(204)


"문혁이 시작되던 시기의 중국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와 군사 충돌을 대비하면서, 동시에 '인도 반동파'와도 '일본 군국주의'와도 대결한다는, 이른바 사면초가에 가까운 고립감을 느끼며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저지하고, 1969년에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이 일어난 뒤에는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의 위협이 가장 절박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지하 방공호를 건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1969년 가을부터 1970년에 걸쳐 전시체제를 강화한 것도 특히 소련의 공격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검토하고 국제 전략을 논의하면서 얻은 결론은, 미국과 소련 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우선은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 소련의 공격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미국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이익을 찾아내고 있었다."(219-20)


# 1971년 7월, 베이징에서 키신저 국무장관-저우언라이 총리 회담 성사


"1971년 9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국외로 도피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유일한 합법적 대표권을 인정하고, 중국을 다섯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로 맞아들이는 동시에, 타이완을 유엔과 그 관련 기관들에서 배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린뱌오 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중국 국내의 권력투쟁이 어두운 심연을 슬쩍 드러낸 직후에, 나라 바깥에서 화창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셈이다. 물론 이 유엔총회의 결의는 타이완 외교에서는 고난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문혁 시기에 실각한 덩샤오핑이 복귀하여 중국 정부의 부총리로 유엔총회에 참여한 것은 1974년 4월의 일이었다. 이제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는 일은 임박해 있었다. 문혁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문혁 이후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226-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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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3 -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중국근현대사 3
이시카와 요시히로 지음, 손승회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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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국민혁명 시대


"공산당원의 국민당 가입, 즉 국공합작(國共合作)은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막이 올랐다."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세력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직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이 광저우를 비롯한 국민당 지배 지역에서 국민당원이라는 이유로 직책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지방 정권이라 해도 광둥 정권은 어엿한 정부였고 정권이 노농부조(勞農扶助)를 내걸고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박봉이지만 공적 기관에서 월급을 받으며 혁명운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재정 기반이 취약했던 초기 공산당은 전문적으로 당 업무에 종사할 다수의 활동가를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지원 아래 '직업혁명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의미가 컸다. 합작 당시 500명이던 당원 수가 1925년 가을에 2,500~3,000명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국공합작에 따른 이러한 경제적인 간접 효과도 컸다고 할 수 있다."(24-5)


"국공합작은 공산당원이 공산당 당적을 보유한 채 국민당에도 가입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런 사정은 특히 국민당의 고참 당원에게는 공산당원이 국민당을 탈취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즉 공산당 쪽에서는 국민당원 가운데 누가 공산당원인지 파악하고 있었지만, 공산당 명부가 없었던 국민당 쪽은 누가 공산당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국민당 쪽의 의심을 배경으로 쑨원의 측근이기도 했던 다이지타오는 《쑨원주의의 철학적 기초》와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 같은 팸플릿을 통해 공산당의 '기생(寄生) 정책'을 비판하고, 철저한 '순정 삼민주의'를 강하게 주장했다. 국민당에게 골치 아픈 것은 적극적으로 국민당의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이 예외 없이 공산당원이라는 현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국민정부는 연소용공(連蘇容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왕징웨이와 광둥의 군사적 통일에 성과를 올리고 있던 장제스를,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단이 지원하는 체제로 유지되었다."(32-3)


"1927년 4월 12일에 벌어진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와 난징 국민정부 수립(4.18)은 우한의 국민당과 정부를 크게 동요시켰다." "'붉은 도시' 우한의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혼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민중운동에 의해 붕괴된 사회질서였다. 후난과 후베이에서 일어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북벌이 전개되는 과정에 숨은 공로자였지만, 혁명으로 분출된 대중의 에너지는 당초 그것을 조장하고 지원한 공산당의 통제마저 뛰어넘는 '과화'(過火)가 되어 사회질서까지 파괴하고 말았다. 농민운동은 정부가 규정한 지조(地租) 제한이라는 범위를 넘어 토지를 몰수하고 지주를 박해하는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쌀의 유통을 가로막기까지 하였다. 도시에서도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파업이 이어졌다." "이런 현실은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난징정부 지배 아래에 있던 지역의 물가가 안정되어 있는 상황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우한정부는 내부에서 붕괴되고 있었다."(57-9)


2장 난징 국민정부


"상하이 쿠데타에 이은 우한의 분공(分共) 결정은─국민당을 재개조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가 폭로되면서 실행된─공산당에게 혁명운동의 실패 또는 패배를 의미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혁명'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국민당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의 방해자였던 공산당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난징과 우한의 균열을 회복하여 본래의 혁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한의 왕징웨이든, 난징의 장제스든 그 후 자신들을 어디까지나 '혁명파'로 생각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국공합작 체제 아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기층 활동을 담당해 온 공산당원이 당밖에서 제거됨으로써, 국민당이 상대적으로 기층 조직이 약한 간부 중심형 정당에 머물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공산당을 대신하여 국민당을 지원한 것은, 북벌 과정에서 귀순한 여러 군대를 아우른 당군(黨軍)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지역의 상공업자와 민족자본가, 그리고 치안 회복과 중국 통일을 염원하는 여론이었다."(65)


"지난사변은 중일 관계는 물론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치에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첫째, 그때까지 영국을 주요 적으로 여겨 온 중국의 반제 운동이 명확하게 일본을 표적으로 삼게 만들었다. 둘째, 장제스 등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제1차 산둥 출병에 동조를 보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국민정부에 접근하는 입장에 서서 일본을 비판하게 되었다. 또 지난사변은 파견된 기관(현지 군)이 사건을 확대하고 격화시켰다. 거기에 군 중앙과 정부가 추종하여 군 증파를 단행하고, 여기에 다시 '폭지응징(暴支應徵)이라는 여론을 배경으로 호응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그 뒤로 나타나는 일본의 중국 침략 행동의 패턴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에서 일본이 패전하기까지를 중일 15년전쟁이라 하는데, 국민혁명과 국가 통일에 대한 무력간섭이라는 전쟁의 주된 목적과 그 발생 형태를 보면, 지난사변은 훗날 벌어지게 될 전쟁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73-4)


# 지난사변(濟南事變) : 1928년, 제2차 북벌이 재개되자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제2차 산둥 출병을 단행했다. 양측 병력이 산둥 성의 성도 지난(濟南)에서 충돌하면서 중국군인과 민간인 3천 명 이상이 사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28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당내 대립은 '훈정' 체제의 구체적 방법을 둘러싸고 장제스와 대립하는 왕징웨이, 쑨커, 후한민을 비롯한 문민 정치가들의 '이론 투쟁'이 군사 문제에서 장제스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군사 지도자(리쭝런, 펑위샹, 옌시샨·리지선 등) 각파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분의 와중에 발발한 만주사변(1931)은 이듬해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사변(1·28사변)으로 불똥이 번졌고, 이런 급박한 사태에 영향을 받아 국민정부는 1년 정도 뤄양으로 천도했다(그해 12월 난징으로 돌아왔다). 장제스가 3월에 군사 지도자로 중앙에 복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국난을 수습할 수 있는 실력자가 장제스 말고는 없다는 폭넓은 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난에 대처하자는 호소가 커졌고, 그러기 위해서는 훈정 체제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헌정으로 조기 이행,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 설립)이 더욱더 강화되었다."(85-9)


3장 공산당의 혁명운동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모스크바에서 전개된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는 중국 혁명에 대한 인식이 쟁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북벌기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트로츠키는 우한 국민당의 반동화에 경종을 울리고 노농(勞農) 소비에트의 조직화를 주장했지만, 그에 반대한 스탈린은 우한에서 혁명을 추구하여 좌파 정부를 통한 토지혁명을 중국공산당에 요구했다." "그런데 우한 분공에 의해 사태가 공산당의 '패배'로 끝났을 때, 그 책임 소재는 교묘하게 바뀌어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의 '우경 기회주의 노선'으로 돌아갔고 그는 공산당 지도자의 지위에서 쫓겨났다. 그 뒤에도 코민테른의 지시나 정세 판단에 따른 노선과 방침이 실패로 끝났을 때, 모스크바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책임을 추궁당했고 그때마다 지도부가 비판을 받아 교체되었다."(128-9)


"공산당의 중앙 조직은 아주 짧은 시기를 빼면 창당 이래 1930년대 초까지 상하이 조계 안에 있었다. 중국 관헌의 간섭이 직접 미치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계 당국이라고 공산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27년의 난징정부 성립 후 국민정부가 조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에 따라 '안전지대'로서 조계가 지니고 있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국민정부가 주권 회복의 일환으로서 193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상하이 조계에 중국 측 특구법원(재판소)을 설치한 것은 의미가 컸다. 중국의 법률과 재판관이 중국인을 당사자로 삼아 직접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의 그림자와 목소리는 거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공산당의 세력은 늘 실제보다도 확실히 크게 보였다. 그것은 공산당이 선전 작업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어찌 됐든 (공산당은) 자신들을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보이게 하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132-4)


"공산당이 농촌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공산당이 지닌 조직성과 규율성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의 조직성·공동성이 현저하게 낮은 중국 농촌에서 상당히 큰 통합력과 규범성을 지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공산당이 근거지를 구축한 화남의 농촌은 화북에 비해 농촌 사회의 결합력이 강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컨대 근세·근대의 일본 농촌에 견준다면 중국 농촌의 결합력은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공산당은 적어도 자신의 조직 활동이 촌락 내부 집단의 유대감에 저항을 받아 침투할 수 없는 사태를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포위 공격과 토벌에 직면하면서 근거지의 영역은 수시로 변화되었고, 가장 안전하던 근거지의 중심부에서조차 공산당 통치는 불과 4년밖에 실행되지 못했다. 이 짧은 기간에 추진된 토지혁명이 농촌의 기존 질서 해체와 홍군의 확충을 가져왔지만, 홍군의 보충이 지배 영역의 안정화로 연결될 만한 여유를 당시 농촌 근거지에서 전혀 찾을 수 없었다."(141-3)


4장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만주국의 영역 확대를 목표로 1933년 2월 시작된 관동군의 러허(熱河) 작전은 만리장성을 넘어 관내까지 미쳤다. 베이핑·톈진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걱정한 중국 측의 요청으로 5월 말에 허베이성 탕구에서 정전 교섭이 이루어졌다. 결국 일본 측의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정전협정(탕구 협정)이 이루어졌다. 일본 측의 요구는 기동(冀東, 동허베이성 북동부)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앞으로 중국군이 주둔하지 않으며, 일본군은 그 실시 경과를 임의로 사찰할 수 있고 중국이 협정을 준수하는지 확인한 후 만리장성 선까지 철수하기로 했다. 사실 만리장성 선 이북 지역 가운데 일부는 행정구역상 허베이 성과 차하르 성에 속하기 때문에 관동군은 이 협정을 통해 허베이와 차하르 일부까지 점령 아래에 둘 수 있었다. 이로써 9·18사변 이래의 군사행동은 일단락되었고 일본의 만주 영유와 만주국 영역이 '군사 정전' 협정에 의해 사실상 확정되었다."(165)


"〈평화가 절망적이지 않은 때 결코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후 운명의 갈림길이 아니라면 가벼이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화북 분리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인 1935년 11월에 장제스가 천명한 대일 외교의 신조였다. 거듭되는 대일 타협으로 '일본 공포증'(恐日病)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야 했던 장제스였지만, 이러한 대일 타협은 그 나름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눈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지탱되었다. 장제스는 중국과 일본의 분쟁이 곧 태평양의 문제, 이어서 세계의 문제로 확대되어 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국에는 열강의 권익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일본이 계속 중국을 침략할 경우 필연적으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것이고, 장차 예상되는 중일전쟁에서 지구전을 통해 열강의 대일 군사 간섭을 이끌어 내고, 최종적으로 중일전쟁이 원인이 될 세계 전쟁을 통해 일본을 패배시킨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중국이 기대한 바와 달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177)


"다각적인 외교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국내의 공산당 문제와도 밀접한 소련에 대한 대응이었다." "소련은 만주사변을 대소 전쟁을 위한 일본의 준비 활동으로 파악하면서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만주사변에 대해서 중립과 불간섭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관동군이 중동철도를 이용하는 것에 거듭 양보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대두함에 따라 독일과 일본이 동서 양쪽에서 소련을 협공할 수도 있다는 잠재적 위기가 증대했다. 그러자 중국에서 '일치 항일'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일본을 저지시킨다는 구상이 부상하게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노선이 결정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창끝이 소련으로 향할 것이라 기대하는 장제스와, 중국을 후원하여 일본의 압력을 감소시키려는 소련의 판단이 결합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과 소련 양국은 점차 가까워졌다."(178-9)


5장 항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일본 정부(고노에 후미마로 내각)는 사건의 '현지 해결·불확대' 방침을 정했고, 군 중앙에도 '확대'와 '불확대'의 두 파가 있었다. 11일에 중국의 중앙군이 북상한다는 정보(실제로는 약간 지체되었다)가 입수되자, 일본 정부는 이 분쟁을 '북지사변'(北支事變)으로 부를 것을 결정하면서, 사변은 중국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여 화북에 파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여전히 '불확대'를 언급하고 있지만 파병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그저 빈말일 뿐이었다. 11일에는 참모본부도 관동군과 조선군에게 파병을 명령했다. 〈포악무도한 지나를 응징〉하기 위해 일격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군부와 민간에서 높았고 이는 사태의 확대를 압박하였다. 이리하여 이후에도 현지에서는 정전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교섭이 계속되었지만, 전투는 베이핑 주변에서 톈진으로까지 확대되었고, 7월 28일 일본군은 핑진(平津) 지역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203-4)


"1938년 1월 평화 교섭은 깨졌고, 일본 정부는 〈앞으로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신흥 지나 정권의 성립 발전을 기대하며, 그 정권과 양국 교섭을 조정하여 갱생 신지나의 건설에 협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틀 뒤 성명에 나오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라기보다 강경한 '말살'을 뜻한다고 보충 설명까지 했다. 중국군의 〈포악한 행동을 응징〉하고 난징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시작된 전쟁은 이제 장제스 정권을 말살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한다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방의 대일 협력 정권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미 실력과 명성을 상실한 퇴역 군인이나 정객들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이 기대하는 원활한 점령치 통치 따위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점령지에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이런 괴뢰정권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상황이 '전쟁'이 아니라 (선전포고 없는) '사변'이었기 때문이다."(213)


"일본은 우한·광저우를 점령한 1938년 말 시점에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중국에 투입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는 근위 사단만이 남았고 군사 동원력은 이제 분명한 한계에 도달했다." "지난날 청조에서는 일단 외국군이 베이징에 임박하여 황제가 몽진(蒙塵, 피난)하고 수도가 점령당하면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내걸고 굴복했다. 하지만 이번에 국민정부는 수도뿐 아니라 요지 모두를 점령당했지만 항전을 이어 갔다. 일본 점령지에서 도피한 학생과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대학이나 기관과 함께 오지로 들어갔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지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중화민국 25년 사이에 육성된 중국 내셔널리즘이었다. 일본의 침략은 이런 내셔널리즘이 높아지는 데 결정적인 촉매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 할수록 내셔널리즘은 더불어 높아졌고, 저항은 일본의 예상과 반대로 오히려 강화되었다."(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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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2 -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중국근현대사 2
가와시마 신 지음, 천성림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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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구국과 정치 개혁


"지금까지 중국근현대사에서는 혁명을 중시하여 '양무(운동, 중체서용中體西用)-변법(개혁)-혁명'이라는 설명 틀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양무-변법-혁명'의 3단계론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본디 양무란 오랑캐(夷)와 관련한 여러 업무를 의미하는 '이무'(夷務)가 전화한 말이다. 특정 시기의 대외 사무, 외국 관련 업무의 총칭이다. 이러한 대외 사무는 곧 외무라 불리게 된다. 요컨대 1860~1870년대에 갑자기 대외 사무로서 양무(洋務)가 생겨난 것도, 또 양무운동이라는 운동이 제창된 것도 아니다. 또한 양무의 시대라고 하는 시기는 '중체서용'의 특징이 짙은 경우도 있지만, 정치와 제도 변혁을 제창하는 의견, 즉 '중체'의 변혁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혁론은 보수파의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변법의 시대에는 보수파의 후퇴로 정치와 제도의 개혁이 정책으로 채용되었지만, 공업화와 군비 증강이라는 양무의 과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을 거치고 나서도 변법의 과제는 변함없이 중앙정부의 과제였다."(48-9)


2장 왕조 유지와 '중국'의 형성


"의화단전쟁의 패배가 청조에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을 살펴보면, 우선 청조의 권위가 하락하고 정치가 출렁인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홍장의 죽음을 비롯하여 대관들이 타계하고, 그때까지 변법으로 치닫는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체제 유지의 원동력이 된 보수 관료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정치 개혁의 브레이크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후 청은 다소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을 실시해 나가게 된다. 다음으로는 주로 입헌군주정을 지향하는 무술변법의 여러 정책이 다시 채용되어, 재정난 속에서도 근대국가 건설이 추진된 점이다. 거기에는 천황의 강력한 권한을 인정하는 일본 같은 국가가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첫 10년 동안 청 자신의 청이라는 국가 건설과 함께, 점차 형성되고 있던 '중국'이라는 국가 상(像)이 '청'을 대신해 다양한 정치 세력을 아우르는 국가의 결집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 지역을 뛰어넘는 '중국인'으로서의 의식도 성장하기 시작했다."(88-9)


"(의화단전쟁 이후 광서제와 서태후가 추진한) 광서신정은 근대국가 건설로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문제가 깃들어 있었고, 더욱이 번부(藩部)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측면에서 파악될 여지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한인 엘리트층은 우승열패(優勝劣敗) 사상을 통해 세계에서 멸종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승열패의 논리를 국내에 들여와 한인과 중앙을 '우월한 자'(優者)에, 한인이 아니거나 변경의 사람들을 '열등한 자'(劣者)로 인식했다. 우열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근대화'였을 것이다. '서양 근대'는 한편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멸종시키려는 열강의 논리였는데, 중국 내부에서는 그것이 한인의 대내적 우위성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청조가 중시해 온 몽골과 티베트는 이 시기가 되면 중국의 '변경'으로 자리가 바뀌게 된다. 몽골과 티베트인이 사는 광대한 번부도 근대 주권국가 영역의 일부이자 실업 진흥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었다."(104-5)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망국의 위기와 분할의 위기가 문제로 등장하면서 구국은 그야말로 지식인의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분할의 위기'론은 오히려 국토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잡지 《신민총보》의 표지에는 균일하게 붉은색으로 칠해진 중국 지도가 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화이(華夷) 의식이 청산된 것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완전히 평등한 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국제사회를 만국공법 속의 '열국병립'(列國竝立)으로 보는 경향이 지식인 사이에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청이라고 하는 왕조 이름보다도, '중국'을 국가의 명칭으로 의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국'은 이제 왕조를 관통하는 국가의 호칭으로서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 국토의 면에서도 본디 통치에 농담의 차이가 있던 번부(藩部)와 토사(土司)의 공간을 모두 한 국토로 파악하고, 거기에 중국사라는 공통의 역사를 가진 중국인을 상정하게 되었다."(108-10)


3장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청은 러일전쟁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를 전제에 대한 입헌의 승리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재외 공사, 지방 대관 그리고 황족으로부터도 입헌군주제를 위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08년 8월 27일 청조는 예비 헌정에 관한 조서를 발포하여 9년 안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아울러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제시했다." "헌법대강은 황제에게는 법률 발포권, 의원(議院) 소집 및 해산권, 육해군의 통솔권, 선전포고 및 강화권을 비롯한 갖가지 권한이 인정되었고, 의회의 권한이 황제의 대권에 미치지 않도록 조치했다." "반면 의회를 억제하여, 의원법요령(議員法要領) 제1조에 〈의원은 건의할 권한만 갖는다. 행정의 책임은 없다. 모든 의결 조건은 반드시 흠정을 기다린 뒤 정부가 시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헌법대강은 중앙의 황제 권한을 강화해서 의회 권한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 대관을 비롯하여 도시부나 해외의 입헌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144-8)


"청말 지역사회에서는 신상(紳商)을 비롯한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교육 단체와 법정 단체를 결성해 지방 정치에도 관여했다." "청이 '고찰헌정(헌정편사관) 5대신'의 파견을 거쳐 중앙에 국정 자문기관인 자정원,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 단위의 자의국(諮議局)을 설치한다는 방침을 내걸자, 지역사회에서도 여러 단체가 자의국을 둘러싸고 토론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 모인 지역 엘리트들이 현(縣)의 울타리를 넘어 성(省) 단위로 집결하게 된 것이다." "1908년 11월 14일부터 이튿날까지 자금성에서는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달아 서거했다. 12월 2일 광서제의 조카로서 겨우 세 살밖에 안 된 푸이(선통제)가 즉위했다. 한인 대관으로서 그 무렵 최대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즈리 총독 및 북양대신 직위를 사임하고 고향인 허난 성 장더에 은거했다. 1909년 10월 14일 지방의회의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 각 성에 자의국이 개국했다."(150-3)


"1911년 10월에 봉기한 신해혁명은 만주인이 실시하는 입헌에 대한 깊은 실망, 그리고 배만 사상으로 뒷받침된 혁명운동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지만, 정치 과정으로 본다면 중앙정부에 대한 성정부(省政府)의 자립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중앙에 대한 성의 자립이라는 방향성은 분명히 있었지만, 자립한 성이 집합해서 어떻게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1911년 말이 되면 화북에서 동북에 걸쳐 여러 성들이 청을 지지하고, 열강도 청을 승인하고 있었다." "(우창봉기 이후) 12월에는 청과 독립 성들 사이에 정전(停戰)이 성립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의뢰를 받은 영국 공사 조던이 한커우 영사에게 조정을 부탁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청군이 한양을 함락하여 반란군이 불리해진 시점에서 조정을 알선한 것이므로 반란군도 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정치가, '실력자'로서 위안스카이를 평가하고 기대했다."(168-9)


4장 중화민국의 구조와 위안스카이 정권


"열강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안정된 통상 활동을 보장해 줄 인재가 필요했는데, 위안스키아가 거기에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강한 중국'을 바라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입헌제 지지자들 가운데에도 그에게 기대를 건 이들이 있었다. 이 같은 위안스카이에 대한 기대감은 대총통 권한의 제한을 전제로 하는 의회 중심의 공화제 지지자의 지향성과는 달랐다. 중앙집권인가 지방분권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이 무렵 중국에서는 입헌군주인가 공화인가 하는 정치 구상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참의원·중의원 모두 국민당이 압승했다. 쑹자오런은 국민당을 통한 정당 내각을 조직하고, 의회의 힘을 이용해 위안스카이에 맞서려고 했다. 의회의 압력을 경계한 위안스카이는 3월 20일에 쑹자오런을 상하이역에서 암살하게 했다. 이때 쑹자오런의 나이는 31세였다."(185-6)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체를 중시하는 세력과 지방분권을 요구하는 각 성 세력 양쪽 모두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각 성과의 합의 형성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제2혁명 후 의회가 작성한 헌법 초안에 대해 의회 권한이 여전히 너무 강한 '국회의 전제(專制)'라고 비판하면서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이윽고 1914년 초에는 국회와 성의회까지 해산시켰다. 그해 5월에는 임시약법도 폐지하고 새로운 중화민국 약법을 정했다. 여기에서는 대총통의 권한이 강화되고 내각을 대신하여 국무경(國務卿)이 설치되었다(쉬스창이 국무경에 취임). 또 의회인 입법원은 소집하지 않은 채 대총통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정원(參政院)이라고 하는 사실상의 의회를 두었다. 나아가 12월에는 참정원의 의결을 거쳐 대총통 선거법을 개정하고 대총통의 임기를 사실상 철폐했다. 지방 제도에서는 지방의회를 해산시키고 각 성 도독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 성(省) 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187-8)


"1915년, 위안스카이의 제제(帝制) 채용을 둘러싸고 지방분권과 공화제를 주장하는 쪽의 반발은 강력했다. 더구나 중앙집권적인 입헌군주정체 추진을 위해 굳이 '황제'까지 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1915년 12월 각 성은 중앙정부에 독립을 선언했다. 신해혁명, 제2혁명에 이어 이번에는 남방의 여러 성이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운동을 가리켜 제3혁명이라고도 한다. 1916년 5월까지 10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더욱이 위안스카이 쪽 지방장관들마저 제제를 정지할 것을 권고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결국 3월에 중화제국을 폐지했다. 독립을 선언한 여러 성은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사임을 요구했다.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는 6월 6일 요독증과 신경성 피로로 인해 사망하기에 이른다." "위안스카이의 사망과 리위안훙의 새 정권 성립이 제도적으로는 지방분권과 공화제적인 중화민국을 모색하는 전환점처럼 보이지만, 이후 정국은 극도로 혼미한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200-1)


5장 국제사회의 변모와 중국


"제1차 세계대전은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 1901년 신축화약 이래 열강의 협조에 균열이 생기면서 일본은 단독으로 이권을 확대하여 산둥 이권과 21개조 요구뿐 아니라 푸젠, 장시 등에서 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또 영국이나 프랑스가 일시적이나마 후퇴하고 미국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18년 7월, 미국은 일본, 영국, 프랑스에 신4국차관단(新四國借款團)을 구성하자고 호소했다. 이는 네 나라가 저마다 보유하고 있는 현재와 장래의 대중국 차관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였다. 일본도 찬성의 뜻을 보이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만몽(滿蒙) 지역을 제외시켜, 일본의 특수 권익 전체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영국과 미국이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결국 저마다 제외해야 할 사항을 개별적으로 올려 그 차관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이는 만몽 전체에 대한 일본의 장래 특수 권익이 자동으로 계승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만, 이미 확보하고 있는 특수 권익은 옹호한다는 측면도 있었다."(233-4)


"워싱턴회의로 형성된 영·미·일 협조 체제를 가리켜 '워싱턴 체제'라고 부른다. 중국은 9개국조약을 통해 이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워싱턴회의에 참가한 쪽은 베이징정부이며, 1920년대 전반에 점차 세력을 갖게 된 광둥정부는 거기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또한 국내의 국권회수 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체제야말로 열강의 기득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워싱턴 체제에서 제외된 것은 광둥정부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소련과 독일(뒤에 9개국조약에 가맹)이 그러했다. 따라서 이 체제는 영·미·일 간의 협조 체제였는지는 몰라도, 독일이나 소련과도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관련된 국제 관계의 하나일 뿐이었다. 1926년에 광둥정부가 북벌을 개시했을 때, 이 '체제'는 9개국조약에 조인했던 베이징정부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 결국 베이징정부는 1928년에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워싱턴 체제는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사실상 붕괴되었다."(239)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그 성 출신자가 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성 자치의 경향은 1920년대에도 계속되면서 연성자치로 이어졌다. 여기에 찬성하는 각 성은 〈성 사람이 성을 다스려, 지역을 보위하고 민생을 안정시킨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중앙집권에 부정적이었고, '외성인'(外省人), 즉 다른 성에서 온 군인 등이 '본성'의 내부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성 연합에 기초한 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했다. 이것이 창장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연성자치 운동이다." "이후 1922년 1월 후난성 헌법 발포와 같이 각 자치성은 자치의 경향을 한층 더 강화했다. 또한 연성을 통해 연방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움직임도 거세지면서, 상하이에서 열린 국시(國是) 회의에서 헌법 초안 채택 같은 성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군사 세력과 관계를 조정하지 못한 데다 연방국가의 그림에도 불명확한 점이 있어 베이징, 광둥을 대신할 전국적인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 내지는 못했다."(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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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1 - 청조와 근대 세계 19세기 중국근현대사 1
요시자와 세이이치로 지음, 정지호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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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번영 속의 위기


"19세기 초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저우에서 주로 차를 매입하고 영국산 모직물을 판매했지만 판매량이 신통치 않아 결국 차 대금을 은으로 결제할 수밖에 없었다." "동인도회사가 영국 본국과 청조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무역 상인(country trader)은 아편을 팔아 은을 획득해도 광저우에서 사들일 상품이 별로 없었다. 이에 지방무역 상인이 은으로 동인도회사가 발행하는 환어음을 구입해서 영국으로 송금하면, 동인도회사는 그 은으로 차를 구입해 영국에서 판매한 대금으로 환어음을 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 미국 상인이 광저우에 등장해 영국인의 버거운 경쟁 상대로 부상하자 동인도회사 무역의 효율성이 문제시되었다. 게다가 영국북부의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여론도 독점을 문제 삼는 태도를 보였다. 자유로운 통상을 무모할 정도로 이상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1832년 영국 의회는 동인도회사가 중국 무역을 독점해 온 특권을 이듬해부터 폐지하기로 결정했다."(57-8)


"청조의 관료와 병사는 아편 밀수를 단속해야 할 처지였음에도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아편 밀무역이 1820년대에는 점점 더 번성해 갔다. 무역 구모가 커지자 동인도회사가 발행하는 어음만으로는 지방무역 상인의 송금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 상인이 개입할 여지가 생겨났다. 그 무렵 미국은 영국에 방적업 원료인 면화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런던에서 지불하는 어음으로 결재를 받았다. 그래서 차를 사려고 미국 상인이 런던에서 지불된 어음(은화가 아니라)을 가지고 광저우에 오면 지방무역 상인은 이 어음을 받아 본국으로 송금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아편 무역은 미국 남부의 노예제 면화 생산, 영국 북부의 방적업, 그리고 런던의 금융시장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아편 무역액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음으로 결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조로부터 은 유출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어 청조 관료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60-1)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 8월 29일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난징조약의 주요 내용은 〈① 다섯 항구(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를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②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③ 청조는 임칙서가 몰수한 아편을 변상하고 아울러 전쟁배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난징조약은 비교적 간략했기 때문에, 영국과 청조는 5항통상장정과 후먼짜이 추가조약(모두 1843년)을 맺어 내용을 구체화했다. 또한 다른 국가들도 청조와 조약 체결을 희망했기 때문에 청조는 미국과 왕샤조약(1844)을, 프랑스와 황푸조약(1844)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영사재판권이다. 영사재판권을 가진 나라의 시민이 청조의 영토에서 범죄 용의로 체포된 경우, 재판은 그 용의자가 소속된 나라의 영사가 담당한다는 규정이다. 또한 통상에 따른 관세율은 협상을 통해 정한다고 함으로써 청조가 자유롭게 변경할 수 없게 했다. 더욱이 청조는 각국에 대해서 최혜국 대우를 인정했다."(72)


"난징조약은 훗날 '불평등 조약'으로 여겨져, 가령 영사재판권의 철폐는 20세기 전반 중국 외교사의 염원이 되었다. 그러나 1840년대 갖가지 조약이 체결될 무렵에는 '불평등 조약'이라는 발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본디 청조의 입장에서 국가 간 평등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없었으며, 오히려 외국인을 달래기 위해 일시적으로 양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약은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상대의 권리로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조 관료들은 이 점을 엄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디 무력으로 밀어붙여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그러한 준법정신이 길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난징조약을 청조의 대외관계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당시 청조 사람들은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또한 아편 무역에 대해서는 난징조약 등 1840년대에 맺은 조약에는 명기되지 않은 채 청조 측이 일정한 범위에서 묵인하는 것으로 되었다."(73-4)


2장 반란과 전쟁의 시대


"1853년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증국번이 조직한 상군(湘軍)은, 그 지역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독서인이나 과거 수험생에게 호소하여 친척과 지인 등 연고 관계를 통해 간부를 선발하고, 될 수 있으면 순박한 농민을 모아 병사를 조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사묘(寺廟) 습격과 우상 파괴는 역사사 비적(匪賊)들이 보인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묘가 불타고 모든 상이 파괴되었다〉는 점에 대한 분노를 조목조목 들추어내며 전례 없는 위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이 격문에는 그러한 이념적 입장 표명만이 아니라 기부를 독려하기 위해 상당히 노골적인 거래 조건도 제시하고 있다. 기부액이 은 1천 량 이상인 자는 상주(上奏)해서 보고하고 그 이하는 영수증을 발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주 보고란 구체적으로는 관위·관직의 추천을 의미하며, 영수증이란 역시 관위·관직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이 전제된 것이다."(88-9)


"19세기 중반은 청조의 처지에서 보면 대규모 반란이 계속된 고난의 시기였다. 물론 각지에서 발생한 반란의 경위는 다양했지만, 모두 지방 사회의 격렬한 생존 경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렬한 생존 경쟁은 전반적으로 18세기의 인구 급증이 불러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전란으로 사람들이 다수 사망함에 따라 이 시기 전국 인구는 상당히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지의 반란은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상호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청조를 곤경에 빠뜨렸다. 태평천국과 염군처럼 어느 정도 협력관계가 있었던 경우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아도 청조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려다 보면 다른 지역에 배치된 군사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지켜냈다는 측면에서 보면, 19세기 중엽부터 청조가 쇠망해 갔다고 보는 시각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종래의 통치 체제를 수정한 것만은 분명하다."(102-4)


"1866년 12월 (전문 외교 기구인) 총리아문(總理衙門)은 서양 언어를 가르치는 동문관(同文館)에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는 특별 과정을 부설할 것을 제언하며 〈서양인이 기계와 무기를 만들고 선박과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모두 천문학과 수학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게 될 학생은 과거 최종 시험에 합겨하기 전 단계인 거인(擧人)의 신분이 대부분이었지만, 얼마 후 진사 자격을 지닌 관료들까지 포함하도록 제안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유교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던 관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치제의 스승을 맡고 있던 대학사 왜인(倭仁, 1804~1871)이 반대의 깃발을 들었다. 〈얼마 전 베이징을 침략하고 원명원을 불태워 원한이 깊은 서양인에게 배우라는 것은 무슨 짓인가.〉 기독교의 확산에 대해서도 독서인이 유교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 지식을 수용하는 것에 관료들이 강한 반감을 표시하면서 결국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116-8)


"무기공장의 신설은 태평천국과 싸운 청조 관료들이 서양식 군대 장비의 위력을 실감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태평천국군조차 서양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한몫했다. 공친왕 혁흔은 상주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아직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중이므로 지금 서양으로부터 무기 제조를 배워서 적을 진압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자강을 추진하고자 하는 진의를 감출 수 있을 것입니다.〉 청조가 서양 국가들을 가상의 적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순순히 군사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군비 증강의 주된 목적이 외국에 대한 방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홍장은 중국에서 기계를 제작하는 것은 마치 곡예라도 부리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고 신랄하게 지적하고, 서양을 본받아 군사기술에 뛰어난 인재를 고관으로 등용할 것까지 제언하고 있다. 유교와 과거라는 국가의 기본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이라는 대담한 견해였다."(119-20)


3장 근대 세계에 도전하다


"1871년, 일본 측은 청조가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조약과 동등한 내용을 희망했지만, 청조는 1860년대 이후 조약 체결 때 자국에 불리한 조항은 되도록 배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청조는 지난날 서양 국가들과 벌인 교섭과는 달리, 처음으로 조약 원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약 교섭을 진행해 나갔다. 9월 13일에 조인된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서로 침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에는 서로 돕는다, ② 양국의 수도에 대신을 파견해 주재시킨다, ③ 양국 개항장에는 서로 영사를 설치해 자국민을 관리하고, 자국민 간의 재산에 관한 재판을 담당하게 한다, ④ 형사 사건의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나라의 관리가 체포하여 영사와 함께 재판한다. 이리하여 청일수호조규는 대체로 두 나라가 대등한 원칙에 따라 체결되었다. 이홍장이 조정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상호불가침 조약 내용은 일본이 조선 등에 침략할 것을 대비한 것이라고 했다."(132-3)


"1872년, 일본 정부는 류큐를 병합할 구체적인 시책을 진행했다. 우선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당시 류큐 국왕 쇼타이(尙泰)를 류큐 번왕에 임명하고 이어서 류큐가 미국 등과 체결한 조약에 대해서는 도쿄 외무성이 관할하는 것으로 했다. 1875년 청조와의 책봉·진공 관계를 일본 정부가 중단시키려고 하자 류큐 사족이 강하게 반발했다. 청조의 번속국이라는 것이 류큐를 존속시키는 열쇠가 되었기 때문이다. 류큐 측은 푸저우로 밀사를 파견해 이 사태를 청조에 전달했다. 또한 일본 정부에게는 '신의'의 존중을 근거로 책봉과 진공을 계속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1879년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류큐에 파견해 류큐 번을 폐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변경했다(류큐 처분). 한편, 청조는 이러한 일본의 류큐 병합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청조는 그 후에도 일본과 외교 교섭의 장에서 류큐 귀속 문제를 거론했지만, 일본 측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138-9)


"1848년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은 중국의 이민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광둥 사람들도 일확천금을 위해 몰려들었다. 광둥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방언의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출신지 별로 동향(同鄕) 회관을 만들었다. 동향 출신이라는 연대감은 새로운 이민자를 불러들여, 특정 장소의 이민은 특정 지역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을 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동향 회관은 돈을 꾸거나 빌려 주는 일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가령 귀국할 경우에는 모든 빚을 변제했다는 증명서를 동향 회관에서 발급받아야만 했다. 이는 이동이 잦은 사회에서 동향 회관이 금전적 신용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동향 회관은 고향과 연락이 닿았기 때문에 채무자는 쉽사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채무자에게 비교적 안심하고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156-7)


"인도주의적 비판에 따라 서양 국가에서 노예제도가 폐기된 일은 19세기 국제적인 노동력 수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여론의 영향으로 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1833년에는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도 뒤를 이었다. 그런데 노예해방은 카리브 해와 신대륙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따라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쿨리 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쿠바와 페루의 쿨리 무역은 심한 학대로 유명했다." "청조도 쿨리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1866년 총리아문은 영국·프랑스와 교섭을 벌인 끝에 중국인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것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지방관의 검사를 통과하지 않으면 노동자의 출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조인에 이르렀지만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비준을 얻지는 못했다. 게다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하튼 청조 중앙정부도 쿨리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관리하고자 한 것이다."(158-9)


4장 청말의 경제와 사회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이어서 185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은 세계 금융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새롭게 산출된 금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으로 흘러들어 가서 화폐 유통량을 증가시키고 경기를 자극했다. 금으로 대체되면서 넘치게 된 은은 아시아 무역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금융 호황을 배경으로 아시아를 주요 무대로 활동하는 영국계 은행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오리엔탈은행, 차타드은행, 홍콩상하이은행(HSBC) 등이다. 이들 은행은 인도에서는 플랜테이션 비롯한 농업 부문에 투자했지만, 중국에서는 무엇보다 무역 금융을 담당했다. 1860년대 이후에는 운수 관련 사업에 투자하거나 청조 정부에 차관을 제공했다." "이들 은행이나 상사의 경영자와 직원은 조계의 사회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중국인 직원은 때때로 매판(買辦)이라고 불리며 개항장 사회의 특징을 규정하는 사회계층을 형성했다."(172-3)


"19세기 강남 지역에서는 지역의 신사(紳士)가 기근 구제 등 사회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구제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방관이 조달하지 못하고 지역의 기부금에 의지한 것이다. 또한 태평천국과 싸운 단련을 편성하는 가운데 지역 유력자가 군비를 조달하고 방어와 전투에 깊이 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유통 과세인 이금(釐金)이 중요한 재원이 되었는데, 이금 징수와 운영에서 각지의 신사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신사라는 말에서 '신'이란 본디 고위직 문인 관료(또는 퇴직 관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란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 특히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생원 자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19세기에 들어와 쓰촨에서는 부가적인 징수를 지역 명망가에게 청부시키는 '공국'(公局)이 등장했다. '공국'은 19세기를 통해 사회 구제, 교육, 치안을 비롯한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공국을 통해 지주층이 지방행정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190-2)


"종족(宗族)은 개별 집안을 뛰어넘은 단위이다. 기본적인 가계 단위인 집안은 가장 단순하게는 부부와 자식으로 구성된다. 예로부터 대가족을 이상화했으나 남자 형제간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화목하게 동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족의 규모는 소가족이었다. 동성(同姓) 간에는 결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부부는 반드시 성이 달라야 했다. 결혼해도 여성이 성을 바꾸는 일이 없었던 것은 성이란 남성의 혈통을 의미한다는 관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성들끼리 대체로 인근에 모여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규모가 큰 종족은 지역사회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일족에서 과거 합격자를 내기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곤궁한 자를 원조하기도 했다." "풍계분은 종족이 개개인을 통합하여 〈다수 세대가 모두 소속을 갖게 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대 관게에 바탕을 두어야만 국가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194)


"그러나 풍계분이 예상한 것과는 다소 다른 변화도 나타났다." "태평천국이 진압된 후 유교는 지역사회를 재건하는 이념으로 표방되었다. 태평천국과 같은 사악한 가르침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퍼져나간 것이다. 이는 종족에 기반을 두고 지역에서 세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명망가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강조된 유교는 일족의 관혼상제 의례를 중시하는 '예교(禮敎)'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된 지방 여론은 기독교를 비롯한 외국 문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가령 여성이 도시의 공공장소에 등장하는 것을 비판하는 논조도 유교가 이상으로 하는 가족상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교의 이상은 확실히 태평천국 후의 혼란 속에서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데에 유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증국번의 톈진 교안 처리에 대해 비난하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홍장의 주장을 일축하는 보수적인 입장으로도 연결되었다."(195-6)


5장 청조 지배의 전환기


"광둥 성 샹산 현(香山縣)에서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반도의 끝에 자리 잡은 마카오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이 관리해 왔다. 아편전쟁 이전에는 마카오가 대청 무역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영국령이 된 홍콩이 발전하자 별도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한때는 쿨리 무역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1887년 마카오에 대해 청조와 포르투갈이 교섭한 결과 리스본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를 중개한 것은 청조가 고용한 해관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이다." "교섭의 초점은 다름 아닌 마카오의 지위였다. 리스본협정에서 청조는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영구히 머물며 관리하는 것을 인정하고, 포르투갈은 청조와 협의 없이는 제3국에게 마카오를 양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청조의 아편 과세에 협력한다〉는 것을 약속했다. 하트에 따르면, 이 협정이 마카오의 주권을 포르투갈에게 영구히 이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마카오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은 장래의 과제로 넘겨진 것이다."(207-8)


"응우옌아인(재위 1802~1820)은 프랑스인 가톨릭 선교사 피뇨 드 베엔과 시암(태국) 왕의 지지를 받아 떠이선(西山朝) 왕조를 격파하고 1802년 제위에 올라 응우옌 왕조를 세웠다. 이때 청조가 정해준 새로운 국명 '월남'(越南)의 현지 발음이 베트남의 어원이 된다." "나폴레옹 3세는 제2차 아편전쟁에 참가하면서 동시에 1858년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다. 에스파냐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선교사가 살해된 것을 이유로 함께 참전했다. 그 결과 1826년 사이공조약이 체결되어 사이공을 포함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동부 3성이 프랑스령으로 할양되었다. 이어 제3공화정의 프랑스 정부도 1873년 베트남을 침공하여 이듬해 체결한 사이공조약에 의해 코친차이나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프랑스에 송꼬이 강 항행권도 인정했다. 사이공조약은 베트남을 자주 독립국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청조와의 종속 관계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209-10)


"타이완을 어떻게 통치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후반 청조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871년 류큐 선박이 표류하다 타이완에 도착했는데, 여기에 타고 있던 미야코지마의 도민이 타이완 원주민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74년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타이완을 침략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청조에서는 타이완 방어에 대한 논의가 높아져 갔다." "최초로 타이완 성의 통치를 맡은 인물은 청불전쟁 때 타이완 방어를 담당했던 유명전(劉銘傳)이다." "타이완 성을 통치하는 관청은 본디 오늘날의 타이중 시 부근에 있었지만, 유명전은 타이베이에 머물면서 통치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상수도와 전기, 쓰레기 처리 설비 등을 타이베이에 도입했다. 타이완에서 인구가 많은 곳은 타이난 지역이었지만, 19세기 말 타이완 북부에서 차업(茶業)이 발전하면서 경제의 중심이 서서히 북부로 이동했다. 유명전이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신규 사업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경제동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29-30)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청일 양국은 각각 조선에 파병하여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우세로 마감되었고, 이듬해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조는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를 포기하고 타이완 등을 일본에 할양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캉유웨이와 그 제자 량치차오 등은 변법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정치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학회라는 정치 결사를 만들고 잡지를 통해 선전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벌였다. 캉유웨이가 생각하는 정치 변혁의 이론적 기초는 공자개제설(孔子改制說)이다. 말하자면 공자는 태고의 성인에 의탁해서 정치제도를 창작한 위대한 인물로서, 오늘날 위기의 시대는 공자가 행한 것과 같은 새로운 제도 구축이 불가결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술년(1889년)의 변볍운동은 2년 전부터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의 신임을 얻었을 뿐 지지 기반이 너무나 취약했다.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는 군사력으로 변법을 중지시키고 광서제를 유페했다."(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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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미래 - 새로운 불안에 맞서다
폴 콜리어 지음, 김홍식 옮김 / 까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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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위기


1장 새로운 불안


"지리적인 위치, 곧 대도시와 지방 간의 불평등 확대가 불만이 일어나는 새로운 차원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활발한 대도시 안에서도 이처럼 대단한 경제적 성취는 심하게 치우쳐 있다. 새롭게 성공을 구가하는 사람들은 자본가도 평범한 노동자도 아니다. 그들은 잘 교육받은 고학력자들로, 새로운 숙련 기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학이 주관하는 회합에서 서로 만나고 능력으로 존중받는 새로운 정체성을 육성하여 그들끼리 공유하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다. 그들은 심지어 소수 민족이나 성적(性的) 지향과 같은 특징들을 피해자라는 집단 정체성으로 치켜세우는 독특한 윤리 규범도 만들어냈다. 피해자 집단들을 배려하는 그들의 남다른 관심사를 바탕으로 그들은 교육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지배 계급의 하나로 자리를 굳힌 이 고학력자들은 정부는 물론 그들 서로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신뢰한다."(12-3)


"공리주의, 롤스주의, 자유 지상주의는 모두 개인을 강조했지, 공동체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리주의 경제학자들과 롤스주의 법률가들은 모두 집단 간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전자는 소득을 기준으로, 후자는 불리한 처지를 기준으로 차이점을 부각했다. 두 이데올로기는 모두 사회민주주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정상적인 윤리적 본능인 호혜와 응분(이를테면, 공정한 상벌)을 무시한 채, (서로 다르기는 해도) 가장 현명한 전위대가 강요하는 단 하나의 이성적 원리를 치켜세운다." "좌파와 우파의 새 이데올로기들은 서로 정면 대치하는 양상으로 등장했지만, 개인에 강조점을 두고 능력주의를 애호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둘의 대결은 윤리성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엘리트와 생산성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엘리트의 경쟁이었다. 좌파 쪽 슈퍼스타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 되었고, 우파 쪽 슈퍼스타들은 아주 부자가 되었다."(29-31)


"우파가 새로 동원한 자유 지상주의는 생각 외로 큰 피해를 유발한 데다가 효율까지 떨어뜨렸음이 입증되었다. 그 덕분에 좌파가 다시 권좌로 복귀했지만, 그들은 공동체주의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번창하는 대도시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국가를 경영했으며, 그들이 가장 절박한 처지의 집단이라고 판단한 이른바 〈피해자들〉을 지원할 표적으로 정했다. 새로운 불안은 그러한 〈피해자〉의 자격 요건에 미달하는─그럼에도 더 인기를 누리는 피해자 집단보다 실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처지가 더 악화되고 있던─사람들을 타격하고 있었다. 〈피해자〉라는 지위에 따라다니는 부수적인 특권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개 피해자의 지위는 백인 노동 계급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명백히 모두 평등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한 사람들이 존재한다."(33-4)


제2부 윤리의 회복


2장 윤리의 토대: 이기적 유전자에서 윤리적 집단으로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경제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육업자와 제빵업자들 단지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윤리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로 생각했다. 컴퓨터는 경제적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 합리적 이기심의 공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육업자와 제빵업자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 우리 자신이 그들의 처지에 놓이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것은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우리가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배려하고 동시에 그의 윤리적 인격을 가늠하게 된다고 인식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공감하고 판단하는 감정이야말로 윤리성의 토대이며,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의무'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경계가 생긴다고 보았다. 윤리성은 우리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성에서 나오지 않는다."(50)


"가장 강력한 의무는 친밀함에서 나온다. 이러한 의무는 우리의 아이들이나 가까운 친척에게 느끼는 가장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인데, 우리가 아는 사람들로도 확장된다. 가장 약한 의무는 어려운 처지에 처한 먼 관계의 사람들에 대해서 느끼는 '구조의 도리'이다." "친밀함과 구조의 도리 사이에 스미스가 같은 책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감정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수치나 존중과 같은 감정인데, 이러한 감정들이 유발하는 온화한 압력 덕분에 우리는 의무를 교환한다. 즉, 〈당신이 도와주면 나도 도우리다〉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서로 의무를 주고받는다. 그에 필요한 신뢰를 뒷받침하는 것은 위반할 의욕을 억제하는 감정들이다. 사람들은 왜 그러한 감정을 느낄까? 그 답은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말이 '사회적 인간(social man)'이라는 데에 있다." "사회적 인간은 합리적이다. 그 역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효용을 소비에서뿐만 아니라 존중에서도 얻는다."(50-1)


"이야기가 수행하는 세 가지 기능─즉 소속과 규범 그리고 인과(관계를 형성하는)─은 상호 보완적으로 조합되고, 그 결과 서로 얽히고설키는 호혜적 의무들의 관계망을 만든다. 규범에 관한 이야기는 공정과 의리의 가치를 불어넣어서 우리가 왜 호혜적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소속감의 공유에 관한 이야기는 호혜적 의무에 누가 참여하는가를 일러준다. 서로 주고받기로 약속하는 호혜성은 당연히 그 의무를 수용하는 사람들로 정의되는 집단 내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인과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행동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가를 일러준다. 이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신념 체계'를 형성하여 우리의 행동을 바꾼다. 신념 체계는 무질서의 지옥을 공동체로 바꾸어놓고, 〈역겹고, 잔인하고, 단명한〉 삶을 〈만개하는〉 삶으로 바꾸어놓는다. 이야기는 현생 인류를 구분하는 독특한 특징이다. 우리는 그저 유인원이 아니다."(62-3)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를 좋아하기 마련인데다가 개인의 선택으로 형성되는 인터넷상의 네트워크 집단은 순식간에 온라인 〈반향실(echo chamber)〉로 진화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네트워크 안에서 누가 말하면 다른 누가 맞장구치는 메아리만을 듣는다. 이야기들은 우리의 신념을 형성하는데, 이 반향실들이 바로 그 프로세스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갈수록 더 생활하는 장소의 공유와 단절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단위(즉, 정치체)들은 여전히 우리가 생활하는 장소로 정의된다. 선거에서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는 장소별로 집계되고, 우리의 정치 과정에서 생겨나는 공공 서비스와 정책도 장소별로 시행되고 전달된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서로 장소가 다른 정치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의 디지털 연결성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정치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70)


"조직의 지휘부가 자신의 네트워크에 이야기를 활용한 아주 최근의 모범적인 사례가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이다." "소속감을 창출하는 ISIS의 이야기들은 정체성이 서로 다른 청년들을 〈믿는 자들(The Faithful)〉이라는 단 하나의 새로운 공동 정체성으로 바꿔놓았다. 호혜적 의무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는 동료 존중의 압력으로 그들을 얽어매서 무자비한 행동으로 몰고 갔다. 새로운 진술들의 이야기로 퍼져나가며 그들의 험악한 행동을 〈칼리프 국가〉라는 중요한 목적과 연결했다. ISIS는 이 인과적 의미를 구축하여 구성원들의 준수에 목적을 부여했다." "하나의 신념체계로서 ISIS는 내적인 정합이 탄탄하고, 따라서 안정적이다. 그 신념 체계의 각 항목을 따로따로 보면 그 하나하나가 대단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들의 집단과 그밖의 모든 사람을 갈라놓지만, 그로 말미암은 그들 집단의 정체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ISIS는 사회를 12세기로 돌려놓기 위해서 이야기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76-7)


3장 윤리적 국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한 대공황 탈출은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소속과 상호 의무의 이야기들을 매개로 이루어진 막대한 공동의 노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각 나라를 커다란 공동체, 즉 정체성을 공유하고 의무와 호혜성을 수용하는 의식이 탄탄한 사회로 바꿔놓는 커다란 유산이 생겼다." "(이 덕분에 국가의 역할을 크게 확장했던) 사회민주주의의 붕괴는 이중의 악재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호혜적 의무가 야금야금 무너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구조의 변화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 호혜적 의무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 절실해진 것이다. 이 기간의 극적인 경제 성장에 동반된 대가는 복잡성이 대단히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복잡성의 증대는 더 전문적인 숙련 기능을 요구했고, 그로 인해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 필요해졌다. 이것이 전례가 없을 만큼 고등 교육의 팽창을 촉진했다. 이 육중한 구조 변화의 물결이 사람들과 사회의 정체성에 충격을 초래했다."(88-9)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상황을 보면, 임금 불평등은 소소하고 나라의 위세와 품위도 높다. 그래서 최상위 고임금 노동자들조차 존중에서 얻는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일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으뜸 정체성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성이 증폭됨에 따라서 특출난 교육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특출날 일자리를 얻으며, 높은 생산성에 상응하는 특출난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고숙련 집단의 최상층은 그들의 으뜸 정체성을 나라에서 그들의 숙련 기능으로 바꾼다." "이제 고숙련 집단이 국민 정체성에서 이탈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출발점에서보다 존중을 더 많이 획득한다. 반면에 국민 정체성을 으뜸 정체성으로 고수한 저숙련 집단은 존중을 상실한다. 가장 많이 존중받는 사람들이 국민 정체성을 으뜸으로 선택하는 집단에서 이탈한 탓에 이 집단에 소속함으로써 얻는 존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92-3)


"국민정체성이 인기를 잃으면서 가치를 중시하는 정체성의 세가 강해졌는데, 그 결과는 추악하다. 이른바 〈반향실〉 현상에 동반하여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교류하기가 대단히 쉬워졌고, 그 덕분에 가치 중심 정체성의 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 가치 기반의 반향실들은 사회의 결속을 회복하는 길이 되기는커녕 구미권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고 있다." "결국 가치가 민족이나 종교와 다를 바 없이 공유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다면, 그밖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장소에 대한 소속감이다." "2장에서 보았듯이,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소속된 장소를 단지 현 상태의 순간적인 이미지만이 아니라, 진화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지금이 모습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겪어온 겹겹의 변화를 이해할수록 장소에 대한 애착은 깊어진다. 이 기억은 그곳에서 성장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지식이고, 그곳 사람들의 공통 정체성을 보강해준다."(114-7)


"소속감을 공유하는 심리적 토대는 장소이지만, 이를 목적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완할 수 있다. 나라는 공공정책의 거반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단위인 만큼, 나라 차원의 공공정책을 통해서 추구하는 공통의 목적에서도 우리의 공유 정체성이 생긴다. 그러한 목적이 호혜적인 행복 증진의 행동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적인 행동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면 어떻게 우리 모두의 후생이 점차 향상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서로에 대한 의무의 이행이 전제하는 바는 당연히 그러한 호혜성의 영역을 정의하는 공유 정체성의 수용이다." "그동안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적대적인 정체성을 가지도록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그러한 정체성들은 사회에 독소로 작용한다. 서로 적대적인 이해관계의 이야기들은 따로따로 보면 모두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이 자꾸 누적되면 사회를 좀먹는 폐해가 너무 커져서 집단적인 행복을 퇴보시킨다."(119-20)


4장 윤리적 기업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본을 내놓은 사람들에게 기업의 소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의 원리는 위험을 떠안은 사람들이 기업을 통제할 필요를 가장 절실히 느낄 뿐만 아니라 경영자들을 꼼꼼이 따져볼 동기도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점차 현실과 멀어지고, 갈수록 더 심하게 괴리되었다." "현대의 공급망에서는 기업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의존하기 때문에 한 회사가 파산하면 바이러스처럼 그 충격이 세계 경제 곳곳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기업은 자신의 장기적인 성과를 중시할 동기가 있는 사람에게 설명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경영의 오류를 포착할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식 소유가 고도로 분산된 상황에서는 무임승차의 문제가 생긴다. 이는 산산이 흩어진 주주들 가운데 아무도 경영진의 장기 전략이 과연 훌륭한지 들여다보려는 동기가 별로 없다는 문제이다."(131-2)


"그동안 최고 경영자의 보수가 갈수록 단기 성과 지표에 더 긴밀하게 연동되는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기업의 보상 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다. 그러한 집단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이 점차 신념 체계를 형성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사회는 국민 정체성이 갈라지면서 숙련 기능 중심의 정체성들로 분열되었다. 이 커다란 과정의 축소판 중 하나가 최고 경영자의 동료 집단이 자사의 노동자들로부터 다른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로 바뀐 것이다." "〈그는 500만 달러를 버는데, 나는 고작 400만 달러밖에 벌지 못한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핵심에는 탐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최고 경영자들의 다수는 쾌락주의자가 아니라 의욕이 넘치는 일 중독자들이다. 그 핵심은 정체성이 새롭게 정의됨에 따라서 그것에서 비롯되는 동료 존중의 근원도 달라졌다는 것이다."(134-5)


"(통상적으로 주주가 아닌) 장기근속 피고용자들과 고객들은 회사 이사회에 대표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집단 중 어느 쪽이든 그들을 이사회에 대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가끔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한 회사를 〈상호 회사(mutuals)〉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이러한 구조를 갖춘 회사들이 많았지만, 이 구조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단 하나의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소유와 통제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회사의 존재 형태를 바꿀 법적인 권한을 누린다는 점이다. 즉, 그 권한으로 그들의 회사를 상호 회사로부터 소유주들이 금융 시장에서 회사 주식을 매매할 수 있는 상장 회사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회사의 형태를 그렇게 바꾸면, 현 세대의 〈소유주들〉은 미래의 수익을 모두 포괄하는 회사의 자본 가치를 통째로 획득한다. 따라서 앞으로 등장할 모든 후속 세대의 참여자들은 그로 인해서 소유와 통제권을 물려받을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한다."(143-4)


"호혜적 의무를 이행하는 기업 행동의 재구축은 정부가 이룩해야 할 막대한 공공재요, 공익이다. 우리는 최소 임계 규모에 도달하는 '윤리적 시민들'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윤리적 시민들은 기업의 목적을 이행하고 기업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러한 목적이 함축하는 규범을 인정하면서 존중과 불신의 두 가지 압력을 통해서 기업이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고무한다." "돌이켜보면, 1945-1970년 시기에 서구 대다수 정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새로운 호혜적 의무를 많이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기억할 것으로, 그 시절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던 급여의 20배 만을 자기 급여로 챙겼다. 지금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급여의 231배를 자기 급여로 챙긴다. 윤리적 기업은 사라지고 흡혈 오징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시대는 계속 변해왔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대로 바뀌어야 한다."(162-5)


5장 윤리적 가족


"1945년의 윤리적 가족에서 중간 세대를 이루는 부부는 그들의 위아래로 부모와 아이들 두 세대를 돌보는 일을 호헤적인 의무로 수용했다. 이는 보통 상당히 큰 부담을 뜻했지만, 누구나 세 세대를 다 거치게 되므로 그것을 당면한 시기에 책임으로 수용해야 할 의무로 생각했다. 그러한 구조는 대단히 안정적인 신념 체계였다." "이제 대다수 고학력 가정에서는 예전의 이 규범이 부부가 개인적 성취를 통한 자아실현을 서로 격려해주는 새로운 규범으로 바뀌었다. 동거와 동류 교배(또는 동질혼) 덕분에 고학력자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 부부로 자리를 잡아갔고, 그 덕분에 그들의 이혼율은 낮아졌다. 성취도가 높은 부모들은 자신의 성공을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예전의 양성 간 교육 불균등을 반영했던 성별 위계질서는 사라지고, 고학력층 부모 양쪽이 합세하여 자식의 조기 영재 교육에 달려드는 조류가 나타났다."(168-71)


"한편 경제적인 이유로 주로 하류층을 타격한 가족 해체 문제에 대처하고자 나선 가부장적 국가는 윤리적 가족이 뒷받침하던 아이들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어린이의 권리〉라는 명분으로 개입했다." "〈어린이의 권리〉를 위한 국가의 의무는 아이가 학대받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으면 오히려 아이를 친부모로부터 격리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결과는 격리는 되었지만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상태(limbo)〉의 아이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상태〉의 아이들을 돌보는 위탁 양육은 육아에 필요한 중요한 기준에서 모두 실패한다. 그처럼 아이와 맺어지는 관계는 상거래와 유사한 반면, 아이들에게는 분명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한 관계는 임시적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데에 반해, 아이들에게는 영구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러한 관계는 아이들에게 소속감을 주지 못한다."(176-8)


"학력 수준이 낮은 인구층에서는 많은 가정이 빈 껍데기로 해체되고 있는 반면, 학력 수준이 높은 인구층에서는 왕조 가족이 번창하고 있다. 새로운 영재 교육 모형을 도입한 고학력자 가정에서는 부모가 양육에 들이는 공이 극적으로 늘어났다. 예전과는 판이하게 고학력자의 아이들은 부모가 분명한 목적의식하에 조성하는 집약적인 상호 작용의 혜택을 누린다." "로버트 퍼트넘은 인지 능력별로 아이들의 집단을 분류해서 대학교에 입학할 승산을 분석했다. 당연히 부모의 높은 인지 능력을 물려받을 공산이 큰 고학력 계급의 아이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승산이 더 클 것이라고 예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퍼트넘은 인지 능력이 미국에서 '최하위 집단에 속하는' 고학력 계급 아이들의 대학 입학 승산이 인지 능력이 미국에서 '최상위 집단에 속하는' 저학력 계급 아이들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로 자리잡은 조기 영재 교육은 전리품 아이뿐 아니라 〈위장된 바보〉도 길러낸다."(179-81)


6장 윤리적 세계


# 윤리적 세계의 핵심 원리

1. 호혜성과는 무관하게 다른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인정한다. 이것은 구조의 도리에 해당하고, 난민, 대규모의 절망, 기초적인 사법질서를 결여한 사회에 대한 의무를 포함한다. (국제난민기구UNHCR, 세계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 등)

2. 더 많이 공헌하고자 하는 나라들은 그들끼리 더 광범위한 호혜적 의무를 건설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3. 이렇게 건설되는 호혜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한 집단에 공동으로 소속한다는 인식을 형성하고, 목적을 의식하는 공동 행동을 통해서 각 참여자의 승화된 이기심을 고무한다.


제3장 포용적 사회의 회복


7장 지리적 분단: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전문화가 극도로 심화되면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가까이 있어야만 생산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전문화가 심화될수록 서로 보완적인 전문가들이 밀집하는 더 커다란 군집체가 필요해지고, 그만큼 잠재적인 고객들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갖가지 전문 인력이 군집을 이루려면 뛰어난 연결성을 제공하는 대도시가 필요하다." "국제무역의 장벽이 제거됨에 따라서 잠재적 시장이 국내 시장에서 세계 시장에서 확대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도로 전문화된 인력의 군집 형성으로 얻는 이득이 한층 더 커졌다. 런던에 군집한 서비스들의 주된 시장은 예전에는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이다." "따라서 대단한 고소득자들이 많이 상주하면서 이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서비스 시장이 생긴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서비스들이 생겨서 군집을 형성하므로 세계의 갑부들이 몰려드는 새로운 유입이 일어난다. 이것이 번영하는 대도시이다!"(215-6)


한편 1960년대의 셰필드처럼, 기업 군집체를 중심으로 한 (지역) 도시들은 세계화가 확산됨에 따라 노동 생산성과 임금 경쟁력이 우월한 타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도시 기반이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 "이런 도시들에 남은 경제 활동은 국지적 권역의 창고라든가, 부동산 비용이 아주 저렴한 조건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저생산성 제조업, 아니면 저렴한 부동산과 저임금, 비정규 노동에 의존하는 콜센터이다. 도시가 그러한 활동들로 채워짐에 따라서 부동산 가격과 임금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내 더 발전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다. 이러한 활동들은 숙련도가 낮고, 따라서 그 노동력은 복잡한 전문화에 의한 지속적인 생산성의 상승에 더는 참여하지 못한다. 대도시에 있는 슈퍼스타급 기업들은 계속 테크놀로지의 최전방을 달리고, 따라서 대도시 인구는 소득이 계속 상승하는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대도시의 테크놀로지와 소득은 망가진 도시로는 흘러내리지 않는다."(218-9)


"집적 이득에 대한 과세는 윤리성과 효율성, 두 가지 근거 모두에서 영리한 정책이다." "윤리성 측면에서 보면 소득(집적의 이득)과 응분(공과 분별) 사이의 괴리를 개선하는 방안이며,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근로 소득으로 포장된) 경제적 지대 추구를 억제하는 방안이다." "집적 이득은 토지주와 고숙련 도시 노동자들에게 나뉘어 돌아간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합당한 출발점은 토지와 건물(토지에 부착된 지상의 모든 정착물 재산)의 가치 상승을 과세 대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토지의 가치와 건물의 가치에 대하여 일정 백분율의 세금을 해마다 부과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도시의 고숙련 집단이 획득하는 집적의 지대를 과세 표적으로 잡는 대도시 가산세가 따라붙는다. 고숙련자 중에서도 최상위 집단에게 돌아가는 집적의 이득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가산세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누진적으로 높아져야 한다."(238-42)


"대도시에 과세하는 목적은 망가진 도시의 주민들을 위한 복지 급여 재원을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들을 생산적인 노동의 군집체로 복원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다. 어느 군집체가 해체되면 시장은 그것을 새로운 군집체로 바꿔놓지 않는다. 그 대신, 도시는 점차 생산성이 낮은 활동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시장의 작용은 왜 새 군집체를 창출하지 못할까?" "우선 다른 기업이 따라붙지 않으면 개척 기업은 파산할 공산이 크다. 게다가 다른 기업들이 따라붙더라도 개척자는 나중에 진입하는 기업들보다 불리한 여건에 놓인다. 개척 기업은 필요한 숙련 노동자를 구하려고 해도 마땅한 인력을 찾을 개연성이 낮다." "따라서 개척 기업은 다른 곳에서 숙련 노동자들을 데려와서 그들을 통해서 그 지역의 피고용자들을 점차 훈련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후발 기업은 필요한 숙련 노동자를 채용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달리 말해서, 군집의 개척자는 이른바 선발주자의 불리에 직면한다."(243-9)


# '선발주자의 불리'를 보완하는 공공 대책

1. 군집체 구축에 투자하는 개발은행 제도 활용

2. 사회간접자본을 마련해주는 기업 단지 조성

3. 투자 유치에 적합한 산업들을 연구하는 투자진흥청 설립

4. 지식 군집을 마련할 지역 대학교와 전문 대학 지원


8장 계급 분단: 모든 것을 누리는 가정과 해체되는 가정


"앨리슨 올프 남작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간 사회들 가운데 아무런 질서도 없는 난장판 성생활을 운영한 사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와 반대로 모든 형태의 인간 사회는 두루 존중받는 결혼제도를 두었다······세월이 흐르며 사회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계속 유지된 규칙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와 결혼하게끔 강제하려고 설계된 것들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규칙을 두어야 할 근거는 충분하다." "텔로미어는 DNA 맨 끝에서 보호 역할을 하는 뚜껑인데, 그것의 길이가 짧을수록 세포가 손상을 더 많이 입고 건강도 나빠진다. 어머니가 불안정한 부부관계에 있으면, 그 어머니의 아이는 9세이 이를 시점에 텔로미어의 길이가 40퍼센트 짧아졌다. 이 파괴 작용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기 위해서 가족 소득의 두 배 향상이 아이의 텔로미어 길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자. 고작 5퍼센트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생활 참여가 결핍됨에 따른 피해는 다른 보상 요인으로 상쇄될 수 없을 만큼 크다."(260-1)


# 사회적 모성주의 접근법

1. 취학전 아동 돌봄 서비스 : 육아에 필요한 직접 자금 지원, 실업 충격을 완화해줄 취업 보조, 10대 부모의 정신건강 관리, 은퇴자를 활용한 돌봄 서비스 등

2. 학교 생활 지원책 : 학생간의 사회적 혼합을 높여 계층화 현상 완화, 신뢰할 만한 조언자 그룹이 열악한 사회 관계망을 보완, 학위보다 숙련 기능 육성 등

3. 장기적 안정성 : 노동자들이 미래 소득을 감안하여 사회적 책무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용 안정성 확대, 애착과 소속감을 안겨주는 사회적 자본 확대 등

4. 사회적 불평등 억제 : 주거 수요보다 자본 소득에 민감한 주택 가격, 고소득 창출에만 초점을 맞춘 일자리(혁신적 재능의 낭비), 제로섬경쟁 제도 제한 등


"노동은 삶의 중추를 이루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목적을 부여해야 한다. 지금, 형편이 좋은 사람들 중에는 노동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얻을 기회가 너무 적은 직무에서 일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일에서 자부심을 얻을 만한 숙련 기능이 불충분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사회에 공헌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단지 급여 봉투의 격차가 아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패이다." "사회적 가부장주의에서는 고집스럽게 엇나가는 가정들을 국가가 감시하고 규율하지만, 사회적 모성주의에서는 국가가 실용적인 지원을 통해서 그러한 가정이 겪는 충격을 덜어준다."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 살든 자존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자본주의를 건설하려면, 그러한 접근이 상류층과 하류층 둘 다에 대해서 필요할 것이다."(319-20)


9장 세계적 분단: 승자와 뒤처진 자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무역은 상호 이득을 가져오기 때문에 각 사회 내부의 '재분배를 통해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면' 모든 사람의 형편이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전문가 집단으로서 우리 경제학자들은 이 올바른 진술을 명백히 잘못된 진술, 즉 사회 내의 모든 사람의 형편이 '나아진다'고 스리슬쩍 바꿔버렸다. 게다가 무역을 다루는 국제 경제학은 지금껏 사회 내부의 보상 메커니즘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은 단순한 모형들이 무시하는 두 가지 특징적인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하나는 무역에 따르는 손실이 대개 노동 시장을 통해서 파급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손실이 지리적으로 집중된다는 것이다. 셰필드가 흥성했던 철강 산업을 상실했을 때, 셰필드 실업자들의 소비 위축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영국의 다른 곳에서 소비가 증가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별 위안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322-3)


"무역과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 무역은 '비교우위'를 동력으로 작동하지만, 노동의 이동은 '절대우위'를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물론 표준 교과서에 등장하는 가정들을 전제할 때에는 이민이 '세계적 차원'에서 효율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절대우위로 작동하는 이민이 이민자 유입국이나 유출국 모두에 이롭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민에서 분명한 이득을 누리는 유일한 주체는 이민자들이다." "이민으로 집적의 지대가 늘어나면 대도시의 고숙련 일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내국인 시민들은 이득을 보지만, 대도시의 고숙련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시민들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취득했을 지대를 상실할 것이다." "또다른 양상으로 이민이 초래하는 비용이 있다. 그것은 사회에 계속 축적되어온 호혜적 의무를 이민이 보통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이민자들은 그 사회의 공유 정체성과 호혜적 의무, 승화된 이기심의 이야기들을 알지 못한다."(327-31)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면, 시장과 이기심이 주도하는 사적인 결정으로 유발되는 이민의 유입량이 사회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물론 이민자 본인뿐 아니라 이민 유입국과 유출국 모두에 이롭게 작용할 이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민 문제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 좌파는 시장이 주도하는 프로세스에 본능적으로 회의적인데도 예외적으로 이민에는 찬성한다. 반면에 시장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열광하는 우파가 예외적으로 이민에는 반대한다. 실용주의와 실용적 추론은 이데올로기보다 더 많은 뉘앙스를 고려한다. 즉, 어느 정도 규모의 이민이 사회에 이로울 것인가를 물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이민을 받아들일 것인가도 묻는다." "이민으로 손해를 보는 집단에게는 그 손실에 상응하는 보상을 공공정책이 마련해야 한다. 또한 쉽게 보상할 방법이 없는 재분배를 유발하는 요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는 공공정책이 억제해야 한다."(332-3)


제4부 포용적 정책의 부활


10장 극단을 파괴하기


"실용주의의 적(敵)은 (사회민주주의가 무너진 정치적 공백을 메운) 이데올로기와 대중 영합주의 두 가지인데, 그 각각이 자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좌우파의 이데올로기 모두 어떤 목적에라도 이용할 수 있는 만능의 분석을 활용함으로써 상황의 맥락, 신중한 접근, 실용적 추론을 전부 건너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만능의 분석으로부터 상황과 시대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타당한 진실이 술술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대중 영합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건너뛰는 우회로를 제시한다. 그것은 금세 손에 잡힐 만큼 명백한 해결책을 훤히 알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이다. 이데올로기와 대중 영합주의가 합쳐질 때도 많은데, 그렇게 되면 효과는 더욱 강력해진다. 한때 신뢰를 잃은 이데올로기들이 새로운 매혹적인 해결책을 팔러 다니는 열정적인 지도자들을 만나서 새롭게 단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에게 환호하는 함성이 인다."(338-9)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소비로부터 효용을 창출하고, 총효용 합산의 거창한 윤리적 산술에 동등하게 포함되는 독자적인 개인이라고 이해하지만, 이와 달리 현실의 사회를 형성하는 원자는 사람들끼리 맺는 인간관계이다. 사회적 가부장주의는 사이코패스와 다름없는 경제적 인간의 이기심을 플라톤적 수호자들이 통제해야 한다고 간주하지만, 이와 달리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인간관계가 의무를 낳는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삶의 목적의식에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플라톤적 수호자와 경제적 인간을 짝짓는 결합이 그동안 공공정책을 장악했고, 그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의 독소 작용이 사람들에게서 윤리적 책임을 걷어내버렸다. 덩달아, 의무는 가부장적 국가로 넘어갔다. 이를 중세 종교에 빗댄 괴상한 풍자극으로 나타내면, 평범한 사람들은 죄인 역을 맡아서 특출난 사람들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351)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가가 획득한 책임은 국가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것은 기업과 가족만이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책임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한 의무감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부장적 국가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마련해주는 온갖 장치보다 월등하다. 그리고 훌륭한 기업은 피고용자들에 대한 의무감이 노사관계의 장기적인 호혜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부장적 국가가 마련해주는 온갖 훈련 프로그램들보다 월등하다. 국가가 수행할 역할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가정과 기업의 의무가 본연의 그 자리에서 이행되도록 복원해주는 정책의 정책(meta-policy)을 고안하는 것이다." "소속감의 공유로 실현되는 호혜적 의무를 촘촘하게 일구어가면 더 신뢰받고 따라서 더 효과적인 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다." "자발적으로 실현되는 호혜성은 공리주의적 가부장주의가 성취한 것보다 더 행복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351-3)


"앞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사람들이 정체성을 공유하면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는 호혜성의 토대가 갖춰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 체계를 잘 구축하는 사회는 개인주의나 복고판 이데올로기들을 중시하는 사회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개인주의적 사회는 공공재라는 광대한 잠재력을 포기한다. 복고판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사회의 다른 일부에 대한 증오를 저변에 깔고 있어서 갈등으로 치닫는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는 사람들이 호혜적 의무의 관계망을 수용하도록 길러진다. 삶이 잘 풀리는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준다. 성공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의무에 부응하는 이유는 의무의 이행에서 생기는 자존감과 동료 존중으로 보상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소수에 대해서는 좀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합당하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가 길잡이로 삼아야 할 윤리적 실용주의이다."(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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