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 3 -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중국근현대사 3
이시카와 요시히로 지음, 손승회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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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국민혁명 시대


"공산당원의 국민당 가입, 즉 국공합작(國共合作)은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막이 올랐다."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세력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직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이 광저우를 비롯한 국민당 지배 지역에서 국민당원이라는 이유로 직책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지방 정권이라 해도 광둥 정권은 어엿한 정부였고 정권이 노농부조(勞農扶助)를 내걸고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박봉이지만 공적 기관에서 월급을 받으며 혁명운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재정 기반이 취약했던 초기 공산당은 전문적으로 당 업무에 종사할 다수의 활동가를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지원 아래 '직업혁명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의미가 컸다. 합작 당시 500명이던 당원 수가 1925년 가을에 2,500~3,000명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국공합작에 따른 이러한 경제적인 간접 효과도 컸다고 할 수 있다."(24-5)


"국공합작은 공산당원이 공산당 당적을 보유한 채 국민당에도 가입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런 사정은 특히 국민당의 고참 당원에게는 공산당원이 국민당을 탈취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즉 공산당 쪽에서는 국민당원 가운데 누가 공산당원인지 파악하고 있었지만, 공산당 명부가 없었던 국민당 쪽은 누가 공산당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국민당 쪽의 의심을 배경으로 쑨원의 측근이기도 했던 다이지타오는 《쑨원주의의 철학적 기초》와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 같은 팸플릿을 통해 공산당의 '기생(寄生) 정책'을 비판하고, 철저한 '순정 삼민주의'를 강하게 주장했다. 국민당에게 골치 아픈 것은 적극적으로 국민당의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이 예외 없이 공산당원이라는 현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국민정부는 연소용공(連蘇容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왕징웨이와 광둥의 군사적 통일에 성과를 올리고 있던 장제스를,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단이 지원하는 체제로 유지되었다."(32-3)


"1927년 4월 12일에 벌어진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와 난징 국민정부 수립(4.18)은 우한의 국민당과 정부를 크게 동요시켰다." "'붉은 도시' 우한의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혼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민중운동에 의해 붕괴된 사회질서였다. 후난과 후베이에서 일어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북벌이 전개되는 과정에 숨은 공로자였지만, 혁명으로 분출된 대중의 에너지는 당초 그것을 조장하고 지원한 공산당의 통제마저 뛰어넘는 '과화'(過火)가 되어 사회질서까지 파괴하고 말았다. 농민운동은 정부가 규정한 지조(地租) 제한이라는 범위를 넘어 토지를 몰수하고 지주를 박해하는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쌀의 유통을 가로막기까지 하였다. 도시에서도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파업이 이어졌다." "이런 현실은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난징정부 지배 아래에 있던 지역의 물가가 안정되어 있는 상황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우한정부는 내부에서 붕괴되고 있었다."(57-9)


2장 난징 국민정부


"상하이 쿠데타에 이은 우한의 분공(分共) 결정은─국민당을 재개조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가 폭로되면서 실행된─공산당에게 혁명운동의 실패 또는 패배를 의미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혁명'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국민당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의 방해자였던 공산당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난징과 우한의 균열을 회복하여 본래의 혁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한의 왕징웨이든, 난징의 장제스든 그 후 자신들을 어디까지나 '혁명파'로 생각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국공합작 체제 아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기층 활동을 담당해 온 공산당원이 당밖에서 제거됨으로써, 국민당이 상대적으로 기층 조직이 약한 간부 중심형 정당에 머물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공산당을 대신하여 국민당을 지원한 것은, 북벌 과정에서 귀순한 여러 군대를 아우른 당군(黨軍)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지역의 상공업자와 민족자본가, 그리고 치안 회복과 중국 통일을 염원하는 여론이었다."(65)


"지난사변은 중일 관계는 물론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치에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첫째, 그때까지 영국을 주요 적으로 여겨 온 중국의 반제 운동이 명확하게 일본을 표적으로 삼게 만들었다. 둘째, 장제스 등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제1차 산둥 출병에 동조를 보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국민정부에 접근하는 입장에 서서 일본을 비판하게 되었다. 또 지난사변은 파견된 기관(현지 군)이 사건을 확대하고 격화시켰다. 거기에 군 중앙과 정부가 추종하여 군 증파를 단행하고, 여기에 다시 '폭지응징(暴支應徵)이라는 여론을 배경으로 호응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그 뒤로 나타나는 일본의 중국 침략 행동의 패턴을 모두 보여 주고 있다.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에서 일본이 패전하기까지를 중일 15년전쟁이라 하는데, 국민혁명과 국가 통일에 대한 무력간섭이라는 전쟁의 주된 목적과 그 발생 형태를 보면, 지난사변은 훗날 벌어지게 될 전쟁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73-4)


# 지난사변(濟南事變) : 1928년, 제2차 북벌이 재개되자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제2차 산둥 출병을 단행했다. 양측 병력이 산둥 성의 성도 지난(濟南)에서 충돌하면서 중국군인과 민간인 3천 명 이상이 사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28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당내 대립은 '훈정' 체제의 구체적 방법을 둘러싸고 장제스와 대립하는 왕징웨이, 쑨커, 후한민을 비롯한 문민 정치가들의 '이론 투쟁'이 군사 문제에서 장제스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군사 지도자(리쭝런, 펑위샹, 옌시샨·리지선 등) 각파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분의 와중에 발발한 만주사변(1931)은 이듬해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사변(1·28사변)으로 불똥이 번졌고, 이런 급박한 사태에 영향을 받아 국민정부는 1년 정도 뤄양으로 천도했다(그해 12월 난징으로 돌아왔다). 장제스가 3월에 군사 지도자로 중앙에 복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국난을 수습할 수 있는 실력자가 장제스 말고는 없다는 폭넓은 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난에 대처하자는 호소가 커졌고, 그러기 위해서는 훈정 체제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헌정으로 조기 이행,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 설립)이 더욱더 강화되었다."(85-9)


3장 공산당의 혁명운동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모스크바에서 전개된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는 중국 혁명에 대한 인식이 쟁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북벌기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트로츠키는 우한 국민당의 반동화에 경종을 울리고 노농(勞農) 소비에트의 조직화를 주장했지만, 그에 반대한 스탈린은 우한에서 혁명을 추구하여 좌파 정부를 통한 토지혁명을 중국공산당에 요구했다." "그런데 우한 분공에 의해 사태가 공산당의 '패배'로 끝났을 때, 그 책임 소재는 교묘하게 바뀌어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의 '우경 기회주의 노선'으로 돌아갔고 그는 공산당 지도자의 지위에서 쫓겨났다. 그 뒤에도 코민테른의 지시나 정세 판단에 따른 노선과 방침이 실패로 끝났을 때, 모스크바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책임을 추궁당했고 그때마다 지도부가 비판을 받아 교체되었다."(128-9)


"공산당의 중앙 조직은 아주 짧은 시기를 빼면 창당 이래 1930년대 초까지 상하이 조계 안에 있었다. 중국 관헌의 간섭이 직접 미치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계 당국이라고 공산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27년의 난징정부 성립 후 국민정부가 조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함에 따라 '안전지대'로서 조계가 지니고 있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국민정부가 주권 회복의 일환으로서 193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상하이 조계에 중국 측 특구법원(재판소)을 설치한 것은 의미가 컸다. 중국의 법률과 재판관이 중국인을 당사자로 삼아 직접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의 그림자와 목소리는 거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공산당의 세력은 늘 실제보다도 확실히 크게 보였다. 그것은 공산당이 선전 작업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어찌 됐든 (공산당은) 자신들을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보이게 하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132-4)


"공산당이 농촌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공산당이 지닌 조직성과 규율성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의 조직성·공동성이 현저하게 낮은 중국 농촌에서 상당히 큰 통합력과 규범성을 지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공산당이 근거지를 구축한 화남의 농촌은 화북에 비해 농촌 사회의 결합력이 강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컨대 근세·근대의 일본 농촌에 견준다면 중국 농촌의 결합력은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공산당은 적어도 자신의 조직 활동이 촌락 내부 집단의 유대감에 저항을 받아 침투할 수 없는 사태를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포위 공격과 토벌에 직면하면서 근거지의 영역은 수시로 변화되었고, 가장 안전하던 근거지의 중심부에서조차 공산당 통치는 불과 4년밖에 실행되지 못했다. 이 짧은 기간에 추진된 토지혁명이 농촌의 기존 질서 해체와 홍군의 확충을 가져왔지만, 홍군의 보충이 지배 영역의 안정화로 연결될 만한 여유를 당시 농촌 근거지에서 전혀 찾을 수 없었다."(141-3)


4장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만주국의 영역 확대를 목표로 1933년 2월 시작된 관동군의 러허(熱河) 작전은 만리장성을 넘어 관내까지 미쳤다. 베이핑·톈진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걱정한 중국 측의 요청으로 5월 말에 허베이성 탕구에서 정전 교섭이 이루어졌다. 결국 일본 측의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정전협정(탕구 협정)이 이루어졌다. 일본 측의 요구는 기동(冀東, 동허베이성 북동부)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앞으로 중국군이 주둔하지 않으며, 일본군은 그 실시 경과를 임의로 사찰할 수 있고 중국이 협정을 준수하는지 확인한 후 만리장성 선까지 철수하기로 했다. 사실 만리장성 선 이북 지역 가운데 일부는 행정구역상 허베이 성과 차하르 성에 속하기 때문에 관동군은 이 협정을 통해 허베이와 차하르 일부까지 점령 아래에 둘 수 있었다. 이로써 9·18사변 이래의 군사행동은 일단락되었고 일본의 만주 영유와 만주국 영역이 '군사 정전' 협정에 의해 사실상 확정되었다."(165)


"〈평화가 절망적이지 않은 때 결코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후 운명의 갈림길이 아니라면 가벼이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화북 분리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인 1935년 11월에 장제스가 천명한 대일 외교의 신조였다. 거듭되는 대일 타협으로 '일본 공포증'(恐日病)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야 했던 장제스였지만, 이러한 대일 타협은 그 나름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눈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지탱되었다. 장제스는 중국과 일본의 분쟁이 곧 태평양의 문제, 이어서 세계의 문제로 확대되어 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국에는 열강의 권익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일본이 계속 중국을 침략할 경우 필연적으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것이고, 장차 예상되는 중일전쟁에서 지구전을 통해 열강의 대일 군사 간섭을 이끌어 내고, 최종적으로 중일전쟁이 원인이 될 세계 전쟁을 통해 일본을 패배시킨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중국이 기대한 바와 달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177)


"다각적인 외교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국내의 공산당 문제와도 밀접한 소련에 대한 대응이었다." "소련은 만주사변을 대소 전쟁을 위한 일본의 준비 활동으로 파악하면서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만주사변에 대해서 중립과 불간섭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관동군이 중동철도를 이용하는 것에 거듭 양보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대두함에 따라 독일과 일본이 동서 양쪽에서 소련을 협공할 수도 있다는 잠재적 위기가 증대했다. 그러자 중국에서 '일치 항일'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일본을 저지시킨다는 구상이 부상하게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노선이 결정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창끝이 소련으로 향할 것이라 기대하는 장제스와, 중국을 후원하여 일본의 압력을 감소시키려는 소련의 판단이 결합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과 소련 양국은 점차 가까워졌다."(178-9)


5장 항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일본 정부(고노에 후미마로 내각)는 사건의 '현지 해결·불확대' 방침을 정했고, 군 중앙에도 '확대'와 '불확대'의 두 파가 있었다. 11일에 중국의 중앙군이 북상한다는 정보(실제로는 약간 지체되었다)가 입수되자, 일본 정부는 이 분쟁을 '북지사변'(北支事變)으로 부를 것을 결정하면서, 사변은 중국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여 화북에 파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여전히 '불확대'를 언급하고 있지만 파병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그저 빈말일 뿐이었다. 11일에는 참모본부도 관동군과 조선군에게 파병을 명령했다. 〈포악무도한 지나를 응징〉하기 위해 일격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군부와 민간에서 높았고 이는 사태의 확대를 압박하였다. 이리하여 이후에도 현지에서는 정전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교섭이 계속되었지만, 전투는 베이핑 주변에서 톈진으로까지 확대되었고, 7월 28일 일본군은 핑진(平津) 지역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203-4)


"1938년 1월 평화 교섭은 깨졌고, 일본 정부는 〈앞으로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제국과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신흥 지나 정권의 성립 발전을 기대하며, 그 정권과 양국 교섭을 조정하여 갱생 신지나의 건설에 협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틀 뒤 성명에 나오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라기보다 강경한 '말살'을 뜻한다고 보충 설명까지 했다. 중국군의 〈포악한 행동을 응징〉하고 난징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시작된 전쟁은 이제 장제스 정권을 말살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한다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방의 대일 협력 정권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미 실력과 명성을 상실한 퇴역 군인이나 정객들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이 기대하는 원활한 점령치 통치 따위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점령지에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이런 괴뢰정권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상황이 '전쟁'이 아니라 (선전포고 없는) '사변'이었기 때문이다."(213)


"일본은 우한·광저우를 점령한 1938년 말 시점에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중국에 투입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는 근위 사단만이 남았고 군사 동원력은 이제 분명한 한계에 도달했다." "지난날 청조에서는 일단 외국군이 베이징에 임박하여 황제가 몽진(蒙塵, 피난)하고 수도가 점령당하면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내걸고 굴복했다. 하지만 이번에 국민정부는 수도뿐 아니라 요지 모두를 점령당했지만 항전을 이어 갔다. 일본 점령지에서 도피한 학생과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대학이나 기관과 함께 오지로 들어갔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지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중화민국 25년 사이에 육성된 중국 내셔널리즘이었다. 일본의 침략은 이런 내셔널리즘이 높아지는 데 결정적인 촉매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 할수록 내셔널리즘은 더불어 높아졌고, 저항은 일본의 예상과 반대로 오히려 강화되었다."(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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