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 1 - 청조와 근대 세계 19세기 중국근현대사 1
요시자와 세이이치로 지음, 정지호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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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번영 속의 위기


"19세기 초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저우에서 주로 차를 매입하고 영국산 모직물을 판매했지만 판매량이 신통치 않아 결국 차 대금을 은으로 결제할 수밖에 없었다." "동인도회사가 영국 본국과 청조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무역 상인(country trader)은 아편을 팔아 은을 획득해도 광저우에서 사들일 상품이 별로 없었다. 이에 지방무역 상인이 은으로 동인도회사가 발행하는 환어음을 구입해서 영국으로 송금하면, 동인도회사는 그 은으로 차를 구입해 영국에서 판매한 대금으로 환어음을 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 미국 상인이 광저우에 등장해 영국인의 버거운 경쟁 상대로 부상하자 동인도회사 무역의 효율성이 문제시되었다. 게다가 영국북부의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여론도 독점을 문제 삼는 태도를 보였다. 자유로운 통상을 무모할 정도로 이상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1832년 영국 의회는 동인도회사가 중국 무역을 독점해 온 특권을 이듬해부터 폐지하기로 결정했다."(57-8)


"청조의 관료와 병사는 아편 밀수를 단속해야 할 처지였음에도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아편 밀무역이 1820년대에는 점점 더 번성해 갔다. 무역 구모가 커지자 동인도회사가 발행하는 어음만으로는 지방무역 상인의 송금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 상인이 개입할 여지가 생겨났다. 그 무렵 미국은 영국에 방적업 원료인 면화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런던에서 지불하는 어음으로 결재를 받았다. 그래서 차를 사려고 미국 상인이 런던에서 지불된 어음(은화가 아니라)을 가지고 광저우에 오면 지방무역 상인은 이 어음을 받아 본국으로 송금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아편 무역은 미국 남부의 노예제 면화 생산, 영국 북부의 방적업, 그리고 런던의 금융시장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아편 무역액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음으로 결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조로부터 은 유출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어 청조 관료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60-1)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 8월 29일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난징조약의 주요 내용은 〈① 다섯 항구(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를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②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③ 청조는 임칙서가 몰수한 아편을 변상하고 아울러 전쟁배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난징조약은 비교적 간략했기 때문에, 영국과 청조는 5항통상장정과 후먼짜이 추가조약(모두 1843년)을 맺어 내용을 구체화했다. 또한 다른 국가들도 청조와 조약 체결을 희망했기 때문에 청조는 미국과 왕샤조약(1844)을, 프랑스와 황푸조약(1844)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영사재판권이다. 영사재판권을 가진 나라의 시민이 청조의 영토에서 범죄 용의로 체포된 경우, 재판은 그 용의자가 소속된 나라의 영사가 담당한다는 규정이다. 또한 통상에 따른 관세율은 협상을 통해 정한다고 함으로써 청조가 자유롭게 변경할 수 없게 했다. 더욱이 청조는 각국에 대해서 최혜국 대우를 인정했다."(72)


"난징조약은 훗날 '불평등 조약'으로 여겨져, 가령 영사재판권의 철폐는 20세기 전반 중국 외교사의 염원이 되었다. 그러나 1840년대 갖가지 조약이 체결될 무렵에는 '불평등 조약'이라는 발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본디 청조의 입장에서 국가 간 평등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없었으며, 오히려 외국인을 달래기 위해 일시적으로 양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약은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상대의 권리로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조 관료들은 이 점을 엄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디 무력으로 밀어붙여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그러한 준법정신이 길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난징조약을 청조의 대외관계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당시 청조 사람들은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또한 아편 무역에 대해서는 난징조약 등 1840년대에 맺은 조약에는 명기되지 않은 채 청조 측이 일정한 범위에서 묵인하는 것으로 되었다."(73-4)


2장 반란과 전쟁의 시대


"1853년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증국번이 조직한 상군(湘軍)은, 그 지역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독서인이나 과거 수험생에게 호소하여 친척과 지인 등 연고 관계를 통해 간부를 선발하고, 될 수 있으면 순박한 농민을 모아 병사를 조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사묘(寺廟) 습격과 우상 파괴는 역사사 비적(匪賊)들이 보인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묘가 불타고 모든 상이 파괴되었다〉는 점에 대한 분노를 조목조목 들추어내며 전례 없는 위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이 격문에는 그러한 이념적 입장 표명만이 아니라 기부를 독려하기 위해 상당히 노골적인 거래 조건도 제시하고 있다. 기부액이 은 1천 량 이상인 자는 상주(上奏)해서 보고하고 그 이하는 영수증을 발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주 보고란 구체적으로는 관위·관직의 추천을 의미하며, 영수증이란 역시 관위·관직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이 전제된 것이다."(88-9)


"19세기 중반은 청조의 처지에서 보면 대규모 반란이 계속된 고난의 시기였다. 물론 각지에서 발생한 반란의 경위는 다양했지만, 모두 지방 사회의 격렬한 생존 경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렬한 생존 경쟁은 전반적으로 18세기의 인구 급증이 불러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전란으로 사람들이 다수 사망함에 따라 이 시기 전국 인구는 상당히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지의 반란은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상호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청조를 곤경에 빠뜨렸다. 태평천국과 염군처럼 어느 정도 협력관계가 있었던 경우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아도 청조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려다 보면 다른 지역에 배치된 군사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지켜냈다는 측면에서 보면, 19세기 중엽부터 청조가 쇠망해 갔다고 보는 시각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종래의 통치 체제를 수정한 것만은 분명하다."(102-4)


"1866년 12월 (전문 외교 기구인) 총리아문(總理衙門)은 서양 언어를 가르치는 동문관(同文館)에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는 특별 과정을 부설할 것을 제언하며 〈서양인이 기계와 무기를 만들고 선박과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모두 천문학과 수학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게 될 학생은 과거 최종 시험에 합겨하기 전 단계인 거인(擧人)의 신분이 대부분이었지만, 얼마 후 진사 자격을 지닌 관료들까지 포함하도록 제안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유교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던 관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치제의 스승을 맡고 있던 대학사 왜인(倭仁, 1804~1871)이 반대의 깃발을 들었다. 〈얼마 전 베이징을 침략하고 원명원을 불태워 원한이 깊은 서양인에게 배우라는 것은 무슨 짓인가.〉 기독교의 확산에 대해서도 독서인이 유교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 지식을 수용하는 것에 관료들이 강한 반감을 표시하면서 결국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116-8)


"무기공장의 신설은 태평천국과 싸운 청조 관료들이 서양식 군대 장비의 위력을 실감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태평천국군조차 서양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한몫했다. 공친왕 혁흔은 상주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아직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중이므로 지금 서양으로부터 무기 제조를 배워서 적을 진압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자강을 추진하고자 하는 진의를 감출 수 있을 것입니다.〉 청조가 서양 국가들을 가상의 적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순순히 군사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군비 증강의 주된 목적이 외국에 대한 방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홍장은 중국에서 기계를 제작하는 것은 마치 곡예라도 부리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고 신랄하게 지적하고, 서양을 본받아 군사기술에 뛰어난 인재를 고관으로 등용할 것까지 제언하고 있다. 유교와 과거라는 국가의 기본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이라는 대담한 견해였다."(119-20)


3장 근대 세계에 도전하다


"1871년, 일본 측은 청조가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조약과 동등한 내용을 희망했지만, 청조는 1860년대 이후 조약 체결 때 자국에 불리한 조항은 되도록 배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청조는 지난날 서양 국가들과 벌인 교섭과는 달리, 처음으로 조약 원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약 교섭을 진행해 나갔다. 9월 13일에 조인된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서로 침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에는 서로 돕는다, ② 양국의 수도에 대신을 파견해 주재시킨다, ③ 양국 개항장에는 서로 영사를 설치해 자국민을 관리하고, 자국민 간의 재산에 관한 재판을 담당하게 한다, ④ 형사 사건의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나라의 관리가 체포하여 영사와 함께 재판한다. 이리하여 청일수호조규는 대체로 두 나라가 대등한 원칙에 따라 체결되었다. 이홍장이 조정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상호불가침 조약 내용은 일본이 조선 등에 침략할 것을 대비한 것이라고 했다."(132-3)


"1872년, 일본 정부는 류큐를 병합할 구체적인 시책을 진행했다. 우선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당시 류큐 국왕 쇼타이(尙泰)를 류큐 번왕에 임명하고 이어서 류큐가 미국 등과 체결한 조약에 대해서는 도쿄 외무성이 관할하는 것으로 했다. 1875년 청조와의 책봉·진공 관계를 일본 정부가 중단시키려고 하자 류큐 사족이 강하게 반발했다. 청조의 번속국이라는 것이 류큐를 존속시키는 열쇠가 되었기 때문이다. 류큐 측은 푸저우로 밀사를 파견해 이 사태를 청조에 전달했다. 또한 일본 정부에게는 '신의'의 존중을 근거로 책봉과 진공을 계속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1879년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류큐에 파견해 류큐 번을 폐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변경했다(류큐 처분). 한편, 청조는 이러한 일본의 류큐 병합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청조는 그 후에도 일본과 외교 교섭의 장에서 류큐 귀속 문제를 거론했지만, 일본 측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138-9)


"1848년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은 중국의 이민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광둥 사람들도 일확천금을 위해 몰려들었다. 광둥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방언의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출신지 별로 동향(同鄕) 회관을 만들었다. 동향 출신이라는 연대감은 새로운 이민자를 불러들여, 특정 장소의 이민은 특정 지역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을 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동향 회관은 돈을 꾸거나 빌려 주는 일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가령 귀국할 경우에는 모든 빚을 변제했다는 증명서를 동향 회관에서 발급받아야만 했다. 이는 이동이 잦은 사회에서 동향 회관이 금전적 신용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동향 회관은 고향과 연락이 닿았기 때문에 채무자는 쉽사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채무자에게 비교적 안심하고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156-7)


"인도주의적 비판에 따라 서양 국가에서 노예제도가 폐기된 일은 19세기 국제적인 노동력 수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여론의 영향으로 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1833년에는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도 뒤를 이었다. 그런데 노예해방은 카리브 해와 신대륙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따라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쿨리 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쿠바와 페루의 쿨리 무역은 심한 학대로 유명했다." "청조도 쿨리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1866년 총리아문은 영국·프랑스와 교섭을 벌인 끝에 중국인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것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지방관의 검사를 통과하지 않으면 노동자의 출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조인에 이르렀지만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비준을 얻지는 못했다. 게다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하튼 청조 중앙정부도 쿨리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관리하고자 한 것이다."(158-9)


4장 청말의 경제와 사회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이어서 185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은 세계 금융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새롭게 산출된 금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으로 흘러들어 가서 화폐 유통량을 증가시키고 경기를 자극했다. 금으로 대체되면서 넘치게 된 은은 아시아 무역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금융 호황을 배경으로 아시아를 주요 무대로 활동하는 영국계 은행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오리엔탈은행, 차타드은행, 홍콩상하이은행(HSBC) 등이다. 이들 은행은 인도에서는 플랜테이션 비롯한 농업 부문에 투자했지만, 중국에서는 무엇보다 무역 금융을 담당했다. 1860년대 이후에는 운수 관련 사업에 투자하거나 청조 정부에 차관을 제공했다." "이들 은행이나 상사의 경영자와 직원은 조계의 사회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중국인 직원은 때때로 매판(買辦)이라고 불리며 개항장 사회의 특징을 규정하는 사회계층을 형성했다."(172-3)


"19세기 강남 지역에서는 지역의 신사(紳士)가 기근 구제 등 사회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구제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방관이 조달하지 못하고 지역의 기부금에 의지한 것이다. 또한 태평천국과 싸운 단련을 편성하는 가운데 지역 유력자가 군비를 조달하고 방어와 전투에 깊이 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유통 과세인 이금(釐金)이 중요한 재원이 되었는데, 이금 징수와 운영에서 각지의 신사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신사라는 말에서 '신'이란 본디 고위직 문인 관료(또는 퇴직 관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란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 특히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생원 자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19세기에 들어와 쓰촨에서는 부가적인 징수를 지역 명망가에게 청부시키는 '공국'(公局)이 등장했다. '공국'은 19세기를 통해 사회 구제, 교육, 치안을 비롯한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공국을 통해 지주층이 지방행정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190-2)


"종족(宗族)은 개별 집안을 뛰어넘은 단위이다. 기본적인 가계 단위인 집안은 가장 단순하게는 부부와 자식으로 구성된다. 예로부터 대가족을 이상화했으나 남자 형제간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화목하게 동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족의 규모는 소가족이었다. 동성(同姓) 간에는 결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부부는 반드시 성이 달라야 했다. 결혼해도 여성이 성을 바꾸는 일이 없었던 것은 성이란 남성의 혈통을 의미한다는 관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성들끼리 대체로 인근에 모여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규모가 큰 종족은 지역사회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일족에서 과거 합격자를 내기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곤궁한 자를 원조하기도 했다." "풍계분은 종족이 개개인을 통합하여 〈다수 세대가 모두 소속을 갖게 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대 관게에 바탕을 두어야만 국가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194)


"그러나 풍계분이 예상한 것과는 다소 다른 변화도 나타났다." "태평천국이 진압된 후 유교는 지역사회를 재건하는 이념으로 표방되었다. 태평천국과 같은 사악한 가르침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퍼져나간 것이다. 이는 종족에 기반을 두고 지역에서 세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명망가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강조된 유교는 일족의 관혼상제 의례를 중시하는 '예교(禮敎)'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된 지방 여론은 기독교를 비롯한 외국 문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가령 여성이 도시의 공공장소에 등장하는 것을 비판하는 논조도 유교가 이상으로 하는 가족상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교의 이상은 확실히 태평천국 후의 혼란 속에서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데에 유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증국번의 톈진 교안 처리에 대해 비난하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홍장의 주장을 일축하는 보수적인 입장으로도 연결되었다."(195-6)


5장 청조 지배의 전환기


"광둥 성 샹산 현(香山縣)에서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반도의 끝에 자리 잡은 마카오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이 관리해 왔다. 아편전쟁 이전에는 마카오가 대청 무역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영국령이 된 홍콩이 발전하자 별도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한때는 쿨리 무역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1887년 마카오에 대해 청조와 포르투갈이 교섭한 결과 리스본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를 중개한 것은 청조가 고용한 해관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이다." "교섭의 초점은 다름 아닌 마카오의 지위였다. 리스본협정에서 청조는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영구히 머물며 관리하는 것을 인정하고, 포르투갈은 청조와 협의 없이는 제3국에게 마카오를 양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청조의 아편 과세에 협력한다〉는 것을 약속했다. 하트에 따르면, 이 협정이 마카오의 주권을 포르투갈에게 영구히 이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마카오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은 장래의 과제로 넘겨진 것이다."(207-8)


"응우옌아인(재위 1802~1820)은 프랑스인 가톨릭 선교사 피뇨 드 베엔과 시암(태국) 왕의 지지를 받아 떠이선(西山朝) 왕조를 격파하고 1802년 제위에 올라 응우옌 왕조를 세웠다. 이때 청조가 정해준 새로운 국명 '월남'(越南)의 현지 발음이 베트남의 어원이 된다." "나폴레옹 3세는 제2차 아편전쟁에 참가하면서 동시에 1858년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다. 에스파냐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선교사가 살해된 것을 이유로 함께 참전했다. 그 결과 1826년 사이공조약이 체결되어 사이공을 포함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동부 3성이 프랑스령으로 할양되었다. 이어 제3공화정의 프랑스 정부도 1873년 베트남을 침공하여 이듬해 체결한 사이공조약에 의해 코친차이나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프랑스에 송꼬이 강 항행권도 인정했다. 사이공조약은 베트남을 자주 독립국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청조와의 종속 관계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209-10)


"타이완을 어떻게 통치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후반 청조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871년 류큐 선박이 표류하다 타이완에 도착했는데, 여기에 타고 있던 미야코지마의 도민이 타이완 원주민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74년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타이완을 침략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청조에서는 타이완 방어에 대한 논의가 높아져 갔다." "최초로 타이완 성의 통치를 맡은 인물은 청불전쟁 때 타이완 방어를 담당했던 유명전(劉銘傳)이다." "타이완 성을 통치하는 관청은 본디 오늘날의 타이중 시 부근에 있었지만, 유명전은 타이베이에 머물면서 통치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상수도와 전기, 쓰레기 처리 설비 등을 타이베이에 도입했다. 타이완에서 인구가 많은 곳은 타이난 지역이었지만, 19세기 말 타이완 북부에서 차업(茶業)이 발전하면서 경제의 중심이 서서히 북부로 이동했다. 유명전이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신규 사업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경제동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29-30)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청일 양국은 각각 조선에 파병하여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우세로 마감되었고, 이듬해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조는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를 포기하고 타이완 등을 일본에 할양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캉유웨이와 그 제자 량치차오 등은 변법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정치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학회라는 정치 결사를 만들고 잡지를 통해 선전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벌였다. 캉유웨이가 생각하는 정치 변혁의 이론적 기초는 공자개제설(孔子改制說)이다. 말하자면 공자는 태고의 성인에 의탁해서 정치제도를 창작한 위대한 인물로서, 오늘날 위기의 시대는 공자가 행한 것과 같은 새로운 제도 구축이 불가결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술년(1889년)의 변볍운동은 2년 전부터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의 신임을 얻었을 뿐 지지 기반이 너무나 취약했다.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는 군사력으로 변법을 중지시키고 광서제를 유페했다."(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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