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 2 -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중국근현대사 2
가와시마 신 지음, 천성림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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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구국과 정치 개혁


"지금까지 중국근현대사에서는 혁명을 중시하여 '양무(운동, 중체서용中體西用)-변법(개혁)-혁명'이라는 설명 틀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양무-변법-혁명'의 3단계론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본디 양무란 오랑캐(夷)와 관련한 여러 업무를 의미하는 '이무'(夷務)가 전화한 말이다. 특정 시기의 대외 사무, 외국 관련 업무의 총칭이다. 이러한 대외 사무는 곧 외무라 불리게 된다. 요컨대 1860~1870년대에 갑자기 대외 사무로서 양무(洋務)가 생겨난 것도, 또 양무운동이라는 운동이 제창된 것도 아니다. 또한 양무의 시대라고 하는 시기는 '중체서용'의 특징이 짙은 경우도 있지만, 정치와 제도 변혁을 제창하는 의견, 즉 '중체'의 변혁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혁론은 보수파의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변법의 시대에는 보수파의 후퇴로 정치와 제도의 개혁이 정책으로 채용되었지만, 공업화와 군비 증강이라는 양무의 과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을 거치고 나서도 변법의 과제는 변함없이 중앙정부의 과제였다."(48-9)


2장 왕조 유지와 '중국'의 형성


"의화단전쟁의 패배가 청조에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을 살펴보면, 우선 청조의 권위가 하락하고 정치가 출렁인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홍장의 죽음을 비롯하여 대관들이 타계하고, 그때까지 변법으로 치닫는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체제 유지의 원동력이 된 보수 관료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정치 개혁의 브레이크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후 청은 다소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을 실시해 나가게 된다. 다음으로는 주로 입헌군주정을 지향하는 무술변법의 여러 정책이 다시 채용되어, 재정난 속에서도 근대국가 건설이 추진된 점이다. 거기에는 천황의 강력한 권한을 인정하는 일본 같은 국가가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첫 10년 동안 청 자신의 청이라는 국가 건설과 함께, 점차 형성되고 있던 '중국'이라는 국가 상(像)이 '청'을 대신해 다양한 정치 세력을 아우르는 국가의 결집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 지역을 뛰어넘는 '중국인'으로서의 의식도 성장하기 시작했다."(88-9)


"(의화단전쟁 이후 광서제와 서태후가 추진한) 광서신정은 근대국가 건설로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문제가 깃들어 있었고, 더욱이 번부(藩部)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측면에서 파악될 여지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한인 엘리트층은 우승열패(優勝劣敗) 사상을 통해 세계에서 멸종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승열패의 논리를 국내에 들여와 한인과 중앙을 '우월한 자'(優者)에, 한인이 아니거나 변경의 사람들을 '열등한 자'(劣者)로 인식했다. 우열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근대화'였을 것이다. '서양 근대'는 한편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멸종시키려는 열강의 논리였는데, 중국 내부에서는 그것이 한인의 대내적 우위성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청조가 중시해 온 몽골과 티베트는 이 시기가 되면 중국의 '변경'으로 자리가 바뀌게 된다. 몽골과 티베트인이 사는 광대한 번부도 근대 주권국가 영역의 일부이자 실업 진흥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었다."(104-5)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망국의 위기와 분할의 위기가 문제로 등장하면서 구국은 그야말로 지식인의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분할의 위기'론은 오히려 국토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잡지 《신민총보》의 표지에는 균일하게 붉은색으로 칠해진 중국 지도가 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화이(華夷) 의식이 청산된 것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완전히 평등한 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국제사회를 만국공법 속의 '열국병립'(列國竝立)으로 보는 경향이 지식인 사이에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청이라고 하는 왕조 이름보다도, '중국'을 국가의 명칭으로 의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국'은 이제 왕조를 관통하는 국가의 호칭으로서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 국토의 면에서도 본디 통치에 농담의 차이가 있던 번부(藩部)와 토사(土司)의 공간을 모두 한 국토로 파악하고, 거기에 중국사라는 공통의 역사를 가진 중국인을 상정하게 되었다."(108-10)


3장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청은 러일전쟁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를 전제에 대한 입헌의 승리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재외 공사, 지방 대관 그리고 황족으로부터도 입헌군주제를 위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08년 8월 27일 청조는 예비 헌정에 관한 조서를 발포하여 9년 안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아울러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제시했다." "헌법대강은 황제에게는 법률 발포권, 의원(議院) 소집 및 해산권, 육해군의 통솔권, 선전포고 및 강화권을 비롯한 갖가지 권한이 인정되었고, 의회의 권한이 황제의 대권에 미치지 않도록 조치했다." "반면 의회를 억제하여, 의원법요령(議員法要領) 제1조에 〈의원은 건의할 권한만 갖는다. 행정의 책임은 없다. 모든 의결 조건은 반드시 흠정을 기다린 뒤 정부가 시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헌법대강은 중앙의 황제 권한을 강화해서 의회 권한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 대관을 비롯하여 도시부나 해외의 입헌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144-8)


"청말 지역사회에서는 신상(紳商)을 비롯한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교육 단체와 법정 단체를 결성해 지방 정치에도 관여했다." "청이 '고찰헌정(헌정편사관) 5대신'의 파견을 거쳐 중앙에 국정 자문기관인 자정원,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 단위의 자의국(諮議局)을 설치한다는 방침을 내걸자, 지역사회에서도 여러 단체가 자의국을 둘러싸고 토론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 모인 지역 엘리트들이 현(縣)의 울타리를 넘어 성(省) 단위로 집결하게 된 것이다." "1908년 11월 14일부터 이튿날까지 자금성에서는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달아 서거했다. 12월 2일 광서제의 조카로서 겨우 세 살밖에 안 된 푸이(선통제)가 즉위했다. 한인 대관으로서 그 무렵 최대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즈리 총독 및 북양대신 직위를 사임하고 고향인 허난 성 장더에 은거했다. 1909년 10월 14일 지방의회의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 각 성에 자의국이 개국했다."(150-3)


"1911년 10월에 봉기한 신해혁명은 만주인이 실시하는 입헌에 대한 깊은 실망, 그리고 배만 사상으로 뒷받침된 혁명운동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지만, 정치 과정으로 본다면 중앙정부에 대한 성정부(省政府)의 자립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중앙에 대한 성의 자립이라는 방향성은 분명히 있었지만, 자립한 성이 집합해서 어떻게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1911년 말이 되면 화북에서 동북에 걸쳐 여러 성들이 청을 지지하고, 열강도 청을 승인하고 있었다." "(우창봉기 이후) 12월에는 청과 독립 성들 사이에 정전(停戰)이 성립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의뢰를 받은 영국 공사 조던이 한커우 영사에게 조정을 부탁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청군이 한양을 함락하여 반란군이 불리해진 시점에서 조정을 알선한 것이므로 반란군도 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정치가, '실력자'로서 위안스카이를 평가하고 기대했다."(168-9)


4장 중화민국의 구조와 위안스카이 정권


"열강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안정된 통상 활동을 보장해 줄 인재가 필요했는데, 위안스키아가 거기에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강한 중국'을 바라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입헌제 지지자들 가운데에도 그에게 기대를 건 이들이 있었다. 이 같은 위안스카이에 대한 기대감은 대총통 권한의 제한을 전제로 하는 의회 중심의 공화제 지지자의 지향성과는 달랐다. 중앙집권인가 지방분권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이 무렵 중국에서는 입헌군주인가 공화인가 하는 정치 구상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참의원·중의원 모두 국민당이 압승했다. 쑹자오런은 국민당을 통한 정당 내각을 조직하고, 의회의 힘을 이용해 위안스카이에 맞서려고 했다. 의회의 압력을 경계한 위안스카이는 3월 20일에 쑹자오런을 상하이역에서 암살하게 했다. 이때 쑹자오런의 나이는 31세였다."(185-6)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체를 중시하는 세력과 지방분권을 요구하는 각 성 세력 양쪽 모두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각 성과의 합의 형성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제2혁명 후 의회가 작성한 헌법 초안에 대해 의회 권한이 여전히 너무 강한 '국회의 전제(專制)'라고 비판하면서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이윽고 1914년 초에는 국회와 성의회까지 해산시켰다. 그해 5월에는 임시약법도 폐지하고 새로운 중화민국 약법을 정했다. 여기에서는 대총통의 권한이 강화되고 내각을 대신하여 국무경(國務卿)이 설치되었다(쉬스창이 국무경에 취임). 또 의회인 입법원은 소집하지 않은 채 대총통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정원(參政院)이라고 하는 사실상의 의회를 두었다. 나아가 12월에는 참정원의 의결을 거쳐 대총통 선거법을 개정하고 대총통의 임기를 사실상 철폐했다. 지방 제도에서는 지방의회를 해산시키고 각 성 도독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 성(省) 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187-8)


"1915년, 위안스카이의 제제(帝制) 채용을 둘러싸고 지방분권과 공화제를 주장하는 쪽의 반발은 강력했다. 더구나 중앙집권적인 입헌군주정체 추진을 위해 굳이 '황제'까지 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1915년 12월 각 성은 중앙정부에 독립을 선언했다. 신해혁명, 제2혁명에 이어 이번에는 남방의 여러 성이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운동을 가리켜 제3혁명이라고도 한다. 1916년 5월까지 10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더욱이 위안스카이 쪽 지방장관들마저 제제를 정지할 것을 권고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결국 3월에 중화제국을 폐지했다. 독립을 선언한 여러 성은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사임을 요구했다.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는 6월 6일 요독증과 신경성 피로로 인해 사망하기에 이른다." "위안스카이의 사망과 리위안훙의 새 정권 성립이 제도적으로는 지방분권과 공화제적인 중화민국을 모색하는 전환점처럼 보이지만, 이후 정국은 극도로 혼미한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200-1)


5장 국제사회의 변모와 중국


"제1차 세계대전은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 1901년 신축화약 이래 열강의 협조에 균열이 생기면서 일본은 단독으로 이권을 확대하여 산둥 이권과 21개조 요구뿐 아니라 푸젠, 장시 등에서 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또 영국이나 프랑스가 일시적이나마 후퇴하고 미국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18년 7월, 미국은 일본, 영국, 프랑스에 신4국차관단(新四國借款團)을 구성하자고 호소했다. 이는 네 나라가 저마다 보유하고 있는 현재와 장래의 대중국 차관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였다. 일본도 찬성의 뜻을 보이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만몽(滿蒙) 지역을 제외시켜, 일본의 특수 권익 전체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영국과 미국이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결국 저마다 제외해야 할 사항을 개별적으로 올려 그 차관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이는 만몽 전체에 대한 일본의 장래 특수 권익이 자동으로 계승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만, 이미 확보하고 있는 특수 권익은 옹호한다는 측면도 있었다."(233-4)


"워싱턴회의로 형성된 영·미·일 협조 체제를 가리켜 '워싱턴 체제'라고 부른다. 중국은 9개국조약을 통해 이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워싱턴회의에 참가한 쪽은 베이징정부이며, 1920년대 전반에 점차 세력을 갖게 된 광둥정부는 거기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또한 국내의 국권회수 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체제야말로 열강의 기득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워싱턴 체제에서 제외된 것은 광둥정부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소련과 독일(뒤에 9개국조약에 가맹)이 그러했다. 따라서 이 체제는 영·미·일 간의 협조 체제였는지는 몰라도, 독일이나 소련과도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관련된 국제 관계의 하나일 뿐이었다. 1926년에 광둥정부가 북벌을 개시했을 때, 이 '체제'는 9개국조약에 조인했던 베이징정부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 결국 베이징정부는 1928년에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워싱턴 체제는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사실상 붕괴되었다."(239)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그 성 출신자가 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성 자치의 경향은 1920년대에도 계속되면서 연성자치로 이어졌다. 여기에 찬성하는 각 성은 〈성 사람이 성을 다스려, 지역을 보위하고 민생을 안정시킨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중앙집권에 부정적이었고, '외성인'(外省人), 즉 다른 성에서 온 군인 등이 '본성'의 내부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성 연합에 기초한 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했다. 이것이 창장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연성자치 운동이다." "이후 1922년 1월 후난성 헌법 발포와 같이 각 자치성은 자치의 경향을 한층 더 강화했다. 또한 연성을 통해 연방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움직임도 거세지면서, 상하이에서 열린 국시(國是) 회의에서 헌법 초안 채택 같은 성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군사 세력과 관계를 조정하지 못한 데다 연방국가의 그림에도 불명확한 점이 있어 베이징, 광둥을 대신할 전국적인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 내지는 못했다."(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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