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 4 -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1945-1971 중국근현대사 4
구보 도루 지음, 강진아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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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전후의 희망과 혼돈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한다는 대의명분이 사라졌음을 의미했고,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간에 격렬한 항쟁이 펼쳐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민중들 사이에는 부흥을 바라며 〈더 이상 전쟁은 사양한다〉는 내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대표로 충칭에 머무르면서 이러한 여론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내전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지금 가장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슬로건이다〉라고 거듭 옌안의 당 중앙에 보고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국제적으로는 국민정부 아래에서 안정된 통일 중국 재건을 기대하는 미국 정부가 필사적으로 국공 양당 사이를 조정하였고, 소련도 중국에서 내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역시 전후 헌정을 실시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전쟁이 끝나면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인 '훈정'을 끝내고 민주적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18-20)


"경제개방 정책의 파탄과 구일본군 점령지 경제 접수 작업의 혼란은 전후 국민정부의 재정경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생산과 유통의 재건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시장에 공급되는 물자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데도,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을 준비할 전비(戰費)를 확보하려고 방대한 적자예산을 편성하고 통화를 남발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 당연히 물가는 폭등했다." "국민정부가 내놓은 인플레이션 대책은 통화를 새롭게 바꿈으로써 물가를 억제한다는 방안이었다. 1948년 8월에 금원권(金圓券)이라는 새로운 통화가 발행되었다. 정부는 종래의 법폐 300만 위안을 금원권 1위안으로 강제로 교환하도록 하여, 물가와 임금 동향을 진정시키려 했다. 금원권이란 신화폐를 유통시켜 표시 가격을 인하하면서 물가와 임금을 동결한 과격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규제를 싫어하는 시장에서 상품이 모습을 감추고, 물물교환이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이 개혁은 실패했다."(31-3)


"1946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헌법제정국민대회가 열렸다. 정당 중에 국민당, 청년당, 민주사회당이 출석했을 뿐이었다. 공산당과 민주동맹은 국민당이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대회 출석을 보이콧했다. 국민당의 강경책은 일시적으로는 국민정부의 통치를 강고한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당의 지지 기반을 좁히고 약화시켰다. 헌법 시행(1947년 12월)에 따른 입법 활동을 위해 1948년 3월에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한층 두드러졌다. 대회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수도 난징에서조차 유권자 147만 명 가운데 80퍼센트가 기권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선거를 둘러싼 매수 사건과 폭력 사태, 대리투표가 끊이지 않아 국민들에게 환멸을 주었다." "대조적으로 공산당은 생계보장과 내전 반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운동에 연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국민정부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되었다."(37-40)


2장 냉전 속의 국가 건설


"1949년 10월, 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의 국가기구를 보면 각 성청(省廳)의 장관에는 민주당파가, 부책임자에는 공산당원이 취임하는 패턴이 많았다. 지방정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얼핏 보면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1911년 신해혁명 때, 성청 장관에는 청의 개혁파 세력이던 입헌파가 취임하고 부책임자로 혁명파가 취임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신해혁명 당시 상황은 현실 정치의 힘 관계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1949년 혁명의 경우 실권은 대부분 공산당이 장악했으면서도 정권 밖의 일반 사회에 대해서 당외(黨外) 세력이 존중받고 있음을 과시하고, 당외 세력들한테서 새 정권이 신뢰와 협력을 얻어 내기 위한 방책으로서 이런 체제가 채용된 면이 강하다. 실제로 그 후 공산당이 사회주의로 조기 이행에 착수하고, 특히 1957년에 잠재적인 정권 비판자를 적발하는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당외 세력 대부분은 정권 밖으로 배제되었다."(63)


"한국전쟁에 따른 재정적·경제적 부담에 대처하고 국민경제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증산과 절약을 호소했다. 그 일환으로 1951년 12월에 3반운동(三反運動)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 운동은 전시경제 체제 아래에서 생겨난 오직(汚職), 낭비, 관료주의 세 가지 부정적 현상을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 적발하고, 세 가지에 반대하여 증산과 절약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3반운동을 거치면서 국민정부 시대부터 계속 일해 온 전문가나 경제 재정 관료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민간 기업에 대한 비판도 확대되었다. 1952년 1월 말부터 시작되어 6월에 일단락되기까지 5반운동(五反運動)이 전개되었다. 5반이란 뇌물 공여, 탈세, 정보 누설, 부실공사, 공공재 절도 등 증산과 절약을 방해하는 민간 기업의 다섯 가지 행위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5반운동으로 개별 민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83-5)


"신민주주의를 내걸고 출발한 공산당 정권은 1952년 후반부터 이듬해 전반까지 사회주의화 강행으로 크게 방향을 선회했다. 왜 공산당 정권은 사회주의화를 서두른 것일까." "무엇보다 공산당 지도부는 현대적 장비를 갖춘 미군과 대결한 한국전쟁에서 자국의 빈약한 장비에 위기감을 통절히 느꼈다. 그래서 소련이 선전하는 군수공업을 축으로 한 급속한 공업화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두 번째로 3반운동과 5반운동이 전시체제하의 증산과 절약을 목표로 전개된 결과, 민간 기업에 대한 통제가 이미 눈에 띄게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상공업의 전반적인 집단화와 국영화를 실시하는 데 수월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세 번째로 농촌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주도한 토지개혁으로 지나치게 영세한 경영이 이뤄지면서 농업 생산이 저조해진 바람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도 (집단화를 추진한) 1930년대 소련이 모델이 되었다."(86-7)


3장 '대약진운동'의 좌절


"중국이 소련형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한 직후인 1956년, 이러한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한 신뢰를 뒤흔든 큰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소련에서는 중국이 모델로 삼으려 한 스탈린 시대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어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에서는 사회주의화 강행에 항의하는 대규모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더해 중국 내에서도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는 농업과 경공업 생산이 저조했기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이 분출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심각한 위기감을 안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소련에 동조하여 동유럽 국가들의 민중운동 탄압을 지지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지만, 실제로는 사태를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련이 동유럽에 개입하는 근거로 삼은 '제한주권론' 주장, 즉 사회주의국가들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해 각국의 국가주권이 제한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강한 불신감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01-4)


"그렇지만 1950년대 중국은 뭐니 뭐니 해도 소련형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고 있었고, 소련의 기술과 경제, 군사원조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1957년 10월 소련과 '국방 신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소련이 원자폭탄의 견본과 원폭 생산의 기술 자료를 제공하기를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사실 중소 국방신기술협정이 체결에서 파탄에 이르는 중간에, 중국군은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6일에 걸쳐 포탄 44만 발을 샤먼 앞바다의 진먼 섬에 퍼부었고, 섬을 수비하는 타이완 정부군을 공격했다. 이때 미군은 타이완에 군수물자를 지원했을 뿐,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편 중국군도 진먼 섬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강행하지 않은 채, 40일 동안 봉쇄와 포격으로 일관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타이완 해방'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소련에 통고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의사를 전달받은 소련의 회답은 국방신기술협정의 파기였다."(111-2)


"공산당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난항을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마오쩌둥 일파가 점차 소련과 대립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종래의 소련 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모색하여 밀어붙인 것이 대약진운동이었다." "소규모 간이 용광로(土法高爐)를 이용한 제철이나 댐 건설에 수많은 민중이 동원되었다. 동시에 땅을 깊게 갈고 작물을 촘촘히 심어 증산을 꾀하는 농사법(深耕密植)이 장려되었으며,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불리는 대규모 집단농장화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토법고로, 심경밀식, 인민공사는 어느 하나도 뜻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아니, 오히려 참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연이은 대흉작 속에 중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 위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차후에 공표된 인구통계에 기초하여 추계해 보면, 식량도 물자도 부족한 이 시기에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적어도 2천만 명 이상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참상이었다."(123-35)


4장 시행착오를 겪는 사회주의


"(지도부가)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실패의 주된 원인은 자연재해였다고 규정함으로써, 대중 동원에 기댄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도 공산당 내에서 당 주석으로 수장의 지위를 계속 지켰다. 1960년 경제계획은 〈세계 과학기술의 정상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그해부터 막대한 자금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개발계획은 조정 정책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화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호소하는 등 다시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에 도전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원래 농업과 경공업 진흥을 중시하는 조정기의 방침 자체가 중화학공업화 노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64년부터 추진된 제3차 5개년계획(1966~1970) 책정 작업에서 특히 중시된 것은 내륙지역에 군수공업 기지를 건설하는 '3선정책'(三線政策)이었다."(144-6)


"조정기의 동향은 단순히 경제정책의 수정에 그치지 않고, 공산당의 통치 방식 그 자체까지 수정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농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표된 1961년 6월 15일의 지시에는 〈농촌 생활에 관여하는 간부나 일반 민중에 대해 우경화니 '좌경화'니 하며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은 앞으로 금지한다. 그들에 대해 정치적 딱지를 붙이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기하였다. 7월 19일의 지시는 더욱 명확하게 〈'반우파' 투쟁 이후, 각 대학이나 기업에서 일부 지식인들에게 가한 비판은 재검토해야 한다. ······ 만약 잘못된 비판이 가해졌다면, 시시비비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쳐야만 한다〉고 하여, 급진적 사회주의의 주도 아래 수많은 당원이나 전문가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비판이 거듭된 1957년 '반우파' 투쟁 이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조정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는 자세를 강화해 가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159)


"그 무렵 안후이 성과 광시 성에서는 농민이 촌(村)에서 농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확한 농작물 일부로 촌에 차지료(借地料)를 지불하는 도급 경작이 확산되고 있었다. 차지료를 지불하고 남은 농작물이 전부 농민의 수입이 되었기 대문에 농민의 경작 의욕을 자극하여 전체 농촌 생산도 증가했다. 그러한 움직임에 기초하여 농촌 증산을 꾀하기 위해 개별 농가의 도급 경작도 인정해야 한다는 방침을 공산당 중앙의 농촌사업부장 덩쯔후이가 제기하자, 이를 받아 덩샤오핑도 〈안후이 성 동지들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라며 도급 경작을 지지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직후 1962년 7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에서 덩샤오핑이 한 발언이 뒷날 유명해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는 어구이다. 이러한 동향에 대해 마오쩌둥은 도급 경작은 집단농업의 해체로 이어지는 조치라면서 강하게 반대했다."(160-1)


5장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의 배후에는 경제조정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다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지향하는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적었고, 당내 다수파는 경제조정 정책의 방향성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이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부인 장칭이 인맥을 가진 당의 문화선전 부문이었다. 이리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항쟁이 '문화혁명'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전개되었다. 또한 국제 환경 아래, 한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국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차이와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분쟁으로 야기된) 소련과의 대립 역시 심화되면서, 중국 지도부가 한층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점도 주의해야 한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은 가혹하고 치열한 정치투쟁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177-8)


"각지에서 혼란이 일어난 배경에는 문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파괴된 가운데 그때까지 억압당해 온 여러 사회계층의 불만이 분출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 일본의 단카이 세대(團塊世代)에 해당하는 중국의 홍위병 세대는, 중국 경제가 계속해서 침체된 가운데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쉽사리 정규직을 찾지 못하고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다. 늘어만 가던 전후 출생 젊은 실업자 내지 반실업자들이야말로 홍위병을 자칭한 학생이나 문혁파 노동자들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한편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이미 대약진 정책의 파탄에 실망하여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문혁파가 내건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은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 경제를 활성화시킨 경제조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을 뿐,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183)


"홍위병은 원래 계통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족 당시인 1966년 8월 무렵부터 여러 가지 의견 차이로 분열과 다툼이 거듭되었다." "아무리 문혁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 지도부라 해도 이런 사태에는 당혹감을 느껴 충돌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우한의 7·20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1967년 7월 20일 항쟁 조정에 나선 공산당 중앙의 문혁파 간부 왕리와 셰푸즈가 문혁에 비판적인 '백만웅사'(百萬雄師)라는 현지 민중 단체에게 억류되어, 문혁파 계열 조직을 옹호하는 방침을 철회하도록 압박당한 사건이다. 이 행동에 참가한 2천 명의 주력은 공사용 헬멧을 쓰고 트럭 27대와 소방차 8대에 나눠 탄 채 밀고 들어온 노동자들로,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대에는 1천 명 가까운 군인들까지 가세했다. 이러한 조직적 행동은 당 조직과 군의 지지 없이는 일어나기 어려웠다. 문혁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민중들뿐 아니라 기존의 당 조직과 행정 간부, 군부 사이에도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189-91)


6장 문혁 노선의 불가피한 전환


"1966년에 문혁의 영향으로 대학교 입학생 모집 업무가 정지된 뒤로 1968년까지 3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진로를 정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의 젊은이들이 홍위병 운동의 주된 인력 공급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홍위병 활동을 완전히 봉쇄하려면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정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혁의 혼란으로 생산력은 떨어지고 도시 상공업의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었다. 도시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이나 오지의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을 '하방'(下放)'이라고 불렀다. 1968년 11월 15일 당·정부·군은 연명으로, 문혁 시기에 공부할 시간도 없이 졸업반이 되어 버린 학생들이나 진로를 정하지 못한 졸업생들에게 모두 직장을 정해 주겠다는 방침을 알렸다." "하지만 생산 현장에서 농민과 노동자한테 배우자는 말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허울뿐인 성가신 존재를 쫓아 버린 것이었다."(204)


"문혁이 시작되던 시기의 중국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와 군사 충돌을 대비하면서, 동시에 '인도 반동파'와도 '일본 군국주의'와도 대결한다는, 이른바 사면초가에 가까운 고립감을 느끼며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저지하고, 1969년에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이 일어난 뒤에는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의 위협이 가장 절박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지하 방공호를 건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1969년 가을부터 1970년에 걸쳐 전시체제를 강화한 것도 특히 소련의 공격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검토하고 국제 전략을 논의하면서 얻은 결론은, 미국과 소련 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우선은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 소련의 공격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미국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이익을 찾아내고 있었다."(219-20)


# 1971년 7월, 베이징에서 키신저 국무장관-저우언라이 총리 회담 성사


"1971년 9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국외로 도피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유일한 합법적 대표권을 인정하고, 중국을 다섯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로 맞아들이는 동시에, 타이완을 유엔과 그 관련 기관들에서 배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린뱌오 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중국 국내의 권력투쟁이 어두운 심연을 슬쩍 드러낸 직후에, 나라 바깥에서 화창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셈이다. 물론 이 유엔총회의 결의는 타이완 외교에서는 고난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문혁 시기에 실각한 덩샤오핑이 복귀하여 중국 정부의 부총리로 유엔총회에 참여한 것은 1974년 4월의 일이었다. 이제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는 일은 임박해 있었다. 문혁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문혁 이후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226-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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