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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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각자 그 집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나는 끝내 모를 것이었다. 그들 역시 내가 지나온 시간들의 전모를 알 리 없다. 우리 모두의 모든 순간을 지켜본 건 집뿐이었다.”

- 1<율의 이야기 P23> 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진정 알기위해서는 그 미지의 것에 가닿으려는 정성과 충심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일 게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의 진심이 꼭꼭 눌려 써진 작품이다!’ 라고 느끼게 된다. 소설 혹은 픽션에 대해 이런 설명이 있다. 작가와 독자가 은연중에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묵계에 대한 것인데, “작가의 허구적 진술은 사실과 거짓을 나누는 판단의 체계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이 판단을 요구하며, 진실의 모습을 생각게 한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일 것이다.

 

소설의 표제 알제리의 유령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즉 플롯의 중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비로소 숨이 불어넣어져 생기를 되찾게 하는 중심 제재(題材)로써 다층의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알제리의 유령연극 대본이다. 누가 썼는지, 어떤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 써졌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사건을 만들어냈는지, 사건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말하게 한다.

 

1. 거짓의 이야기

 

연극대본 알제리의 유령자본의 저자 칼 마르크스가 쓴 희곡 작품이다. 실제로 1882년 초, 마르크스는 요양을 위해 알제리의 빅토리아 호텔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국내 출간되었다가 지금은 절판된 알제리에서의 편지(정준성 , 빛나는 전망 )’라는 서간집은 이 시기의 마르크스를 통해 그의 사적(私的)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부터 허구(虛構)와 사실의 관계가 섞이기 시작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대화가 반복되는 대본의 내용과 이에 대한 진정성 넘치는 해석이 진지하게 소개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진실 되다. 그러나 그 진실은 거짓이라는 토대위에 서있다. 거짓이냐, 진실이냐.

 

소설의 둘째 장인 철수의 이야기의 화자는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지향점은 어디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로 가득한 청년이다. 연극무대를 기웃거리는 그에게 알제리의 유령을 쓴 작가에 대한 관심은 그를 연극계의 천재로 알려진 인물 탁오수를 찾아가게 한다. 진실을 찾아서,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이야기 역시 오롯이 사실들만의 나열일까? 게다가 알제리의 유령은 당시 마르크스가 처해있던 궁핍과 실의를 통해 그의 가족들과 그 구성원이 겪게 되는 물질적, 심적 고난과 절망에 대한 상념으로 이끄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 거짓된 이야기에서 삶의 진정함을 길어내는 아이러니에 매혹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진심은 어디에서도 절로 피어나는구나. 허구의 틀에서 허구를 직조하고, 그 허구가 허구가 아닌듯한 허구가 되어 사실로 승화하는 조화(Harmony)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2. 사실의 이야기

 

이렇게 작위적으로 거짓의 이야기와 사실의 이야기로 구분하는 것은 무식한 짓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의 범위에서 40년 전, 매양 매캐한 최루가스가 온 도시의 공기를 짓누르던 1980년은 내겐 지금도 날 것의 생생한 기억이니 예술인들의 한낱 문화적 놀음에 조차 폭력을 행사하여야만 했던 불의한 권력, 그것들의 제물이 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에 포함시켜도 이해가 될 터이다.

 

알제리의 유령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1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율(한은조)과 징(박현가)의 부모들이다. 두 부부가 어울려 술과 농담과 진심이 부조리하게 뒤섞이고, 자신들의 대화를 희곡으로 쓰기로 한다.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전에 이들은 동료배우들에게 멋진 사기극을 연출하는데, 마르크스의 희곡작품이며,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게 하는 유령이란 제목까지, 게다가 그 입수경로조차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무지하고 불온한 권력은 여기에 고문과 죽음으로 답한다. 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곤 또 죽음. 이후 그들의 자녀, 그네들과 관계했던 인물들의 삶이 신산하게 펼쳐진다. 감히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한 사람들의 고통이 어딘가에 있을 터이다. 허구의 세계보다 더 허구 같은 인간사(人間史)란 사실이 어찌 이보다 솔직하게 그려질 수 있겠는가?

 

40년이 지난, 그것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상황에 대한 과정이나 형편이 술술 연결되어 술회되었다면 그건 온전히 허영(虛榮)이요, 허위(虛僞)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 “~었을 것이다.”, “~었을 수도 있다.”, “아니, 모르겠다.” 라는 불명료한 기억의 인출로 시작되어, 단절되어 흐릿하기만 했던 것이 더욱 진정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소설은 황당(荒唐)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시대의 국가 폭력에 스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鎭魂曲;requiem)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네들 이후 세대를 위한 입당송(入堂頌;introitus)일지도.

어떤 시절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죽는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문장이 사실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역사이다. 왜 알아야 하느냐고?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설혹 그 과거의 영향을 피할 수 없을 지언정, 약간의 자유라도 있는 편이 낫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라는 말을 진짜배기로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 『공산당 선언(이진우 , 책세상 ) P15 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中略)...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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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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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사물의 흥망성쇠여, 너 영원한 허망(虛妄)이여!”

-안드레아스 그리피우스, Leo Armenius에서

 

 

어떤 작품집을 읽어나가다 보면 불현듯 앞서 읽었던 작품의 문장들에 더해지는 새로운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는 김숨의 단편, 이혼에서였는데, 이혼의사의 확정 판결을 위해 법정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들려온, 터무니없는 언어에 대한 민정에 대한 묘사로 부터였다.

 

1. ‘우리라는 말을 하려면

 

생판 모르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우리라는 말이 낯설다 못해 폭력적으로 들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젓는다.”

 

우리라는 어휘는 단순히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통칭이다. 그런데 이 말은 대개 자기보다 소위 사회적 위계가 높은 사람을 포함하지 않으며, 또한 친밀한관계 사이에 사용한다. 그런데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라니? ‘나를 알아?’

오늘 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타인에게 무심한지는 구태여 주절거릴 필요가 없을 터이다. ‘수전 손택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황정은웃는 남자로 다시금 내 생각이 널뛰기 시작한 것은 이 지점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무신경하기 그지없고 이 맥락 없는 언어 때문에.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어?” , 많은 이들이 떠나고 곳곳에 셔터가 내려진 쇠락한 세운상가에서 낡은 오디오를 수리하는 60대의 남자, ‘여소녀에게 그의 딸이 문득 물어 온 질문이다. 그냥저냥 살아 온, 삶인지 죽음인지 모른 채 지내 오는 동안 얼마나 둔감해졌는지, 알고도 굳이 개의치 않게 되었는지말이다. 나는 내 가족, 이웃, 타자를 모른 척하지 않았어! 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런 내가 그들에게 감히 어찌 우리라는 말로 친근함을 표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겐 파렴치한 언어로만 느껴진다.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여인 'dd'를 잃은 'd', 그가 권태, 환멸, 한 조각의 정나미도 남지 않은 삶.”을 읽어 낸 그의 아버지 얼굴이 내게 덧 씌워지는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곤 d처럼 내 입에도 힘이 들어가고 턱이 벌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웃는 얼굴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웃음일까?”, 웃음 맞다. 자괴의 웃음. 단지 불편하게 구겨진 것일 뿐일 게다.

 

점포들의 택배를 수거하고 상차하는 d와 여소녀의 기억들이 펼치는 시대사(時代史)의 그 부조리하고 부정의(不正義)한 굴곡과 이에 익숙해져 무력하고 무감한 표정이 하나의 패턴이 된 사람들과 사회의 통찰이라는 담론보다는 내겐,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라는 피난시절의 일화를 읊조리는 노파의 주절거림에 외려 매달리고픈 심정이다. 어쩌면 공동화(空洞化)되어버린 거대한 시멘트 건물의 좁고 어둑한 점포 속에서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은 듯한 희미한 빛을 발하는 진공관을 놀라 바라보는 d의 시선과 같은 것인지도. 편리하고 단순하며 무신경한 자백같은 이해라는 말이 아닌, 그저 그냥 하던 대로가 아닌, 자신의 번영과 판단으로서가 아닌, 부끄럽고 놀라워하며 감히 우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겸허함, 타인을, 타자를 알려 하지 않아서, 알지 못해서 송구스러워 하는 그러한 지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2. 자아만 비대해진 인격들

 

이혼민정이 그녀의 직장 선배였던 영미의 부당한 소문과 이혼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 일상화 된 엄마에 대한, 그리고 이혼 확정판결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낯선 타인들에 대한 그 너저분한 이야기들에서 다시금 웃는 남자'd‘의 방백(傍白)이 들려온다. “알아?”라는 기분 나쁜 말의 울림이 반복된다. 자아만 비대해진 형편없어진 인격과 몰이해가 진동하는 이 혐오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를 자문하게 하면서.

 

자기에 대한 이 자문은 이기호최미진은 어디로라는 단편에서 꽤나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자신이 쓴 소설책에 대한 중고 사이트 판매자의 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이라는 코멘트에 대한 적의(敵意)가 바로 그것이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 주려는 심경 말이다.

 

작품은 꼴사납게 부풀기만 한 오늘의 사람들이 자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반향(反響)일 것이다. 모욕을 되돌려 받을 타인, 그 타자의 자아 또한 동색인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아마 서글프고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의 자각이란 지점이 교점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서글프고 부끄럽다는 고백은 소설가의 자조로도 읽힌다. 중고 사이트라는 물질의 거래 공간에서 어찌 정신의 산물, 사람을 찾는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사물화 된 세계에서 사물이 아닌 무엇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이 사물의 세계에서 인간역시 정말 보잘 것 없는 하나의 물적 존재 되어 버린다. 화폐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사물이란 것이 있던가? 오늘날 인간은 사물의 구성 세계에서 하위 존재가 된다. 물질을 가진 자가 곧 권력자가 되고, 인간은 이 물질들의 권력에 머리를 조아린다. 사물화 된 세계에서 개와 인간의 차이란 그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 ‘편혜영의 단편, 개의 밤서글픔이란 감상을 그대로 잇는다. “개는 훈련받은 대로 제 빨리 공을 향해 내달렸다.” 개는 주인의 칭찬을 위해 달린다. 자산을 불려 행세하는 장인을 비롯한 처가식구들의 무신경과 오만에 비위를 맞추며 머리를 조아리는 이라는 인물이 자신과 개의 상황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 개들의 짖는 행위에 그토록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개를 품에 안고 있던 사망자의 노모에게 건설현장 사고처리자인 , 거두절미 보상문제를

매정하게 던지곤 동석한 직원 에게 상황을 맡기곤 나와 버린다. 그리곤 안에게 묻는다. “아까 그 개요. 바닥에 떨어졌을 때 짖었습니까.” 사실 개가 짖었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의 이 물음처럼 무기력한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 어느 지점에서 타자에 대한 무관심, 우리라는 허위의 언어를 끼워 넣을지 찾을 수가 없다. 온통 이것들 뿐인 곳에서.

 

김언수의 소설, 존엄의 탄생은 더욱 비참하다. 떠돌이 개에게 물리곤 동물학대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영화감독을 꿈꾸는 백수 진수의 이야기다. 15만원의 벌금형이 내려지자 판사에게 항변한다.

 

저는 개를 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개에게 물렸지요. 어젯밤 그 개와 소동이 있었던 건 그 개가 저의 존엄을, 아니 인간의 존엄을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됐습니다. 뭔 인간의 존엄이 개에게 훼손된답니까. 다음.”

 

자기 존엄의 주장이란 것이 이처럼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다. ‘d'의 방백에 또다시 가닿는다. 아마 그저 비대해지기만 한 자아와 형편없는 자존심이 뒤죽박죽 섞인 오늘의 인격에 대한 조롱이지 않을까? 벌금이 없어 부른 선배와의 대화에서 이 시대 청년들의 초상을 읽게 된다.

 

잘난 사람이 되는 건 힘들어. 하지만 못난 걸 인정하는 건 쉬운거야. ...(中略)... 내 바람은 그저 못나지 않을 정도로만 사는 거다. 그것도 요즘은 이래 힘이 든다.”

“(前略).... 꿈도 없이 희망도 없이 그렇게 노예처럼 살겠단 말이에요?”

개인의 열정과 세상의 허기를 맞춰가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기형적으로 커지기만 한 자기연민만을 핥아대며, 타자가 있는 세상 바라보기를 하지 않는 이 유아적 사회가 어떻게 성숙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프랑스 소설가 다비드 포앙키노스책을 읽는 행위는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도취라 하였다. 내겐 이 도취가 작위적인 행위가 아니다. 때문에 작품을 읽어나가다 어느 어휘나 문장에 문득 시선이 멈추게 되어 생각이 널을 뛰기 시작하는 것인데, 이 소설집에선 바로 우리라는 단어와 존엄모욕이라는 상대적인 어휘였다. 아마 오늘을 사는 것이 상처를 받고 주는 행위의 연속이고, 그러면서도 감히 우리라는 언어로 소외를 외면하려는 기만의 삶이라는 자각이 내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섬세하고 적나라한 통찰을 들려준,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 조차 연민과 흐릿하지만 희망과 위로를 보여주는 이 작품집에 작은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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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동서문화사 월드북 113
귄터 그라스 지음, 최은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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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내일 있었던 바의 반복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최근에 일어난 이야기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 - 텔크테에서의 만남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고, 당혹스러울 만큼의 광기와 악의로 섬뜩하기도 하며, 야릇한 관능의 향기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도주(逃走)와 검은 마녀에 대한 강박적 번뇌를 반복하는 난쟁이 오스카에 이르면 시대에 대한 죄책감과 무기력, 역사의 망각에 대한 미래의 회의라는 거대한 담론의 서술임에 경외(敬畏)의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소설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있는 오스카 자신의 기원을 술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경찰에 쫓겨 네 겹의 치마를 입고 감자를 캐고 있는 여인의 치마 속으로 기어든 남자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는 오스카의 어머니인 아그네스를 낳고, 네 겹 치마 속에서 과감하게도 방사(房事)를 치룬 할아버지 콜야이체크의 방화범으로서의 이력과 그의 홀연한 사라짐의 전설, 성장을 멈추기 위해 지하창고 계단으로 구르는 세 살 아기 오스카의 발칙한 거부의 행위는 단치히혹은 그다니스크로 불리는 무대가 지닌 고된 역사 - 폴란드, 독일, 스웨덴 등 영토의 각축전장 - 의 배경을 알린다.

 

성장을 멈추고 94센티미터 단신의 아이가 되어 테이블 밑, 치마 밑처럼 어른들의 시선에서 제외 된 곳에 자리하여 어떤 방해와 장애도 없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행위를 갖게 되는 것은 실로 작가의 명민함으로 여겨진다. 아마 사실성과 객관성에 대한 보장조치 아니었을까?

실제로 어른들은 오스카의 이렇게 성장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그녀의 외사촌인 얀 브론스키가 식탁 밑에서 벌이는 불륜의 행각처럼.

그래서 오스카가 진술하는 것은 그대로 시대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거짓 없는 역사의 증언이 된다.

 

한편, 탯줄이 잘리기도 전부터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던 오스카에게 생의 기대를 심어주었던 양철북을 사주겠다던 어머니의 소망이 실현되던 세 살 생일 이후 혐오스럽기만 한 인간들의 행위에 보내는 보복이 시작된다. 북을 치면서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는 악마적 행위를. 여기에도 작가가 부여한 점진적인 의미의 확장을 읽게 되는데 유리를 깨부수는 개개의 장면들이 방어와 공격이라는 전투적 행태에서 정신 질환적인 분노의 발산이라는 행태로,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실험하는 다분히 유희적이고도 악의적 행태로, 급기야는 인간성의 약탈이라는 권력의 의미로까지 이어진다. 병원 유리를 박살내고, 시립극장의 유리를, 쇼윈도의 유리를, ‘먼지털이단을 위한 노략질의 수단으로. 이 모든 행위가 무력하고 부정한 사회에 대한 혐오와 반항의 은유임은 물론이다.

 

이와 달리 북치는 행위는 유리 깨는 행위와 또 다른 상징으로서 병행한다. 무능하고 비굴하며 무력하면서도 자신들의 집단적 광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기성의 세대와 사회에 대한 반항이라는 사회변혁 의지를 더하기도 한다. 따라서 추정(推定)상 자신의 아들인 쿠르트의 세 번째 생일날 북과 북채를 쥐어주려 하다 얻어터지고 북은 찢어져 내동댕이쳐지는 장면은 전후(戰後) 세대에 대한 믿음의 후퇴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실의는 오스카에게 북을 손에서 놓게 하지만, 쿠르트의 어머니이자 오스카의 의붓어머니이며, 한 때 연인이기도 했던 마리아로부터 이 아이가 버는 돈으로 먹고 살잖아요.”라는 내침은 어머니 아그네스의 남편이었던 마체라트의 죽음과 함께 성장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124센티미터의 꼽추 오스카에게 돈벌이로서의 북으로 다시금 의미를 갖게 만든다.

 

재즈 음악가로서 북을 치는 행위는 전후 독일사회의 자본주의적 흥청거림을 연상케 하는데 오스카는 여기에 또 하나의 우화를 더한다. 술집 양파 켈러에서 양파를 자르면서 짜내는 지식층의 눈물, 이 기만과 허위의 행위를 중단시키고 그들을 지하의 계단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는 음악이 된다. 너희들, 아니 우리들을 돌아봐라. 벌써 잊었는가? 비루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적 태도가 야기한 불의의 광기와 폭력의 어제를! 이라고.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대단원이랄 수 있는 3부에 이르면 재즈 음악가로 명예와 황금을 쥔 성인 오스카의 통렬한 죄책감과 삶의 번뇌로 가득 채워진다. 어머니 아그네스, 추정상 아버지인 얀 브론스키, 어머니의 남편이었던 마체라트, 불륜이라는 부도덕성위에 세워진 이들 세 사람의 긴장된 평화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자신이 아닌가라는 죄의식은 자기혐오와 이로부터의 도주라는 행위로 이행된다. 이 도주의 양식중 하나는 삶의 권태와 고독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놀이로 진행되는데, 자신을 살인자로서 신고하여 고등법원 법정에 피고로 소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서른 번째 생일 날, 이조차 진범이 밝혀지면서 무죄로 석방되기에 이르고, 도주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이 부정하고 청산되어야 할 세계에서 돌아 갈 곳은 어디인가? 아마 그 답변은 이 문장이 아닐까?

나는 지금도 카슈바이의 감자밭에서 피난처를 제공해 줄 우리 할머니 안나 콜야이체크의 부풀어 오른 네 겹의 치마를 도주 목적지에서 제외 할 수밖에 없다. 하긴 나로서는 막상 도망친다면 할머니의 치마로 숨는 것만이 도주다운 유일한 도주라 할 수 있겠지만.”

 

무지하고 외곬의 단순함, 게다가 자신들의 부도덕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 사회, 이 혐오의 세계임에도 그로서는 유일한 도주처가 네 겹의 치마 밑이라는 것은 번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부정하고 싶은 것, 청산되어야 할 대상임에도 그것이 자신의 뿌리인 것을.

정체성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던 곳, 시련의 반복적 역사를 기록한 곳, 자유시(自由市) ‘단치히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뒤셀도르프로 이어지는 전후(2차 세계대전) 독일의 고된 여정 속에 녹여낸 이 신랄한 꼽추의 시선은 매우 중요한 여러 첫 인상을 참으로 곰팡내 나는 소시민적 환경에서 모았다라는 오스카 그의 말처럼, 거대한 역사의 불길이 휘몰아쳤던 한 시대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기술하는 문장까지 거창 할 이유가 필요가 없음을 입증한다.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낮은 위치의 시선이 모여 거창하기만 한 거대 담론의 공허하고 망각적인 이성의 허위를 들춰내는 것이지 않았을까? 어느 외지(外紙)의 평론처럼 세속적이고, 고약하며, 불경스러운서민의 거친 문장이 역사의 민낯, 그 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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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문관의 비망록 -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소설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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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작인 첫 번째 비망록을 여는 주앙이란 인물의 착란적인 진술을 접했을 때, 이내 이 기묘하게 서술된 내러티브의 작품이 내 손아귀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흥분에 휩싸였다. 그리곤 주앙의 아버지이자 이젠 세상에서 지워진 채 요양원에서 너절한 육신을 마감하는 전직 장관인 프란시스쿠당신에게 부탁하니, 멍청이 내 아들에게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해주기를 부탁하니,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이라는 종료되지 않은 마지막 문장을 곱씹으며 책장을 덮을 때, 내 책꽂이의 중요위치에 보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떤 문학작품을 접했을 때 강렬한 인상이 그대로 마음에 각인되는 흔치 않은 경우를 맞보곤 한다. 전체주의 독재 권력의 한 축을 나누었던 권력자를 중심으로 그와 관계한 주변의 시시콜콜한 인간들을 망라한 진술또는 추가 진술이라는 이름하에 술회되는 자기변명 혹은 기억의 인출(引出)은 무지하거나 몽매한 소시민적 삶에 대한 빛나는 통찰로 빚어진 진수성찬이다.

 

프란시스쿠의 아들 주앙으로부터 가정부, 하녀, 주앙의 아내, 아내의 삼촌, 혼외의 딸, 정부(情婦), 정부의 모(), 주앙의 동거녀와 그 딸, 운전기사, 아파트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사회구성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이들의 진술들은 20세기 후반의 포르투갈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소설은 바로 이들의 진술’, ‘추가 진술이라는 명제로 구성된 진술의 책’, ‘비망록이자, 진짜배기 포르투갈의 현대사(現代史)이며, 민중 생활사이고, 권력과 그 이면의 고통스러운 인간의 비틀린 욕망들이 수놓인 정신분석학적 기록이 된다.

 

그런데, 이 비망록은 소설의 표제처럼 대심문관의 기록물이며, 누군가의 심판을 기대하는, 아마 그 판단의 몫은 오롯이 독자의 것이라는 듯이 모든 진술들은 단지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술회(述懷)이상의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인간들의 보잘 것 없는 자기 삶에 대한 인식의 편협함, 권력과 그 주변에 휘도는 무소불위와 공포, 아부와 아첨, 그리고 예외 없이 결탁한 불의한 금융자본가의 파렴치와 도덕적 몰염치, 소시민들의 무기력과 비굴, 이기심과 탐욕이 그 순수한 형태 그대로 발설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강요되지 않은 담백한 진술의 형식들이 모여 구성원들과 그 사회의 여과 없는 실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소설의 배경은 오랜 전체주의 독재정권을 유지해오던 살라자르 정권의 중심인물인 장관 프란시스쿠의 권력이 혁명에 의해 그 정치적 권력뿐 아니라 가계(家系)가 해체되고 몰락하는 역사과정 이랄 수 있다. 이 거대한 역사 담론을 담아내는 장소이자 그릇은 프란시스쿠의 팔멜라 저택이고, 이것은 권력과 그 몰락의 상징 자체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부서진 석상이 정원에 뒹굴고 수영장은 물 한 방울 없이 텅 비었으며 잡초가 개집을 차츰 뒤덮고 마침내는 화단까지 완전히 망가뜨리면서....”

 

이 과정의 상황에서 지껄여지는 19인의 주절거림은 모두 자기 정당화요 합리화며, 또한 세상을 이해하는 개인들의 한계이다. 자기의 목덜미를 누르고 여성을 공략하는 권력이 사랑이라고 하녀는 말하지만 독자는 그것이 폭력임을 알듯이, “나를 사랑하는 거 맞지 이자벨, 그렇지?”라는 문장에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오직 불신과 집착 그리고 불안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또한 알듯이, 의미 없는 문장들이 발산하는 내재된 진실들이 모여 한 시대를 형성하는 인간들의 의식과 그 사회의 실체적 상황들을 읽어내게 된다.

 

이를테면 프란시스쿠의 아내 이자벨의 불륜이 마초적 인간인 프란시스쿠를 무너지게 하는 것은 으레 불의한 권력이 지닌 속성의 자기반향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여자 아직 안 죽었습니다 장관님’ ....‘이 여자는 바닥에 추락하는 순간 죽은 것이 맞겠지요?’.... ‘이 여자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즉사한 것이 맞아요 장관님’” 과 같은 장관과 의사의 대화처럼 불의와 비굴이 야합하는 모양은 간통과 흡사하다. 불륜과 야합의 이 닮은꼴에서 전체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적 부당성이나 경제적 부패와 같은 사회적 부정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도덕적 타락, 윤리적 추오, 파렴치한 탐욕을 직접적으로 양산하는 양태를 띠고 있다는 것일 게다.

 

결국 이 위대한 문학작품은 오늘날의 사회적 위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계층의 자기변명을 통해 거대담론에서 소외되고 가려진 실체적이고 진실한 담론의 모습을 끌어내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진실을 말하는 인간들의 조잡한 내면을 까발리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포르투갈을 이해하는, 아니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섬세한 자화상을 본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안투네스의 서술방식에 그 누가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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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
필 토레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현암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온통 ‘4차 산업혁명의 중축을 이루는 기술-합성생물학, 사물인터넷(적층기술등), 인공지능(AI), 로봇공학-의 낙관론과 함께 인간의 생명과 삶의 질에 획기적인 편의를 제공할 기술 개발에 대한 경제적 경쟁에서 뒤쳐질까 안달을 해댄다. 그런데 내겐 이러한 소음이 왜 그리 어리석게만 여겨질까? 왠지 이번 세기는 우리 인간이 성큼 멸종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 인지적 폐쇄성’, 그 알지 못하는 인류의 무지, 그래서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몽매성이 내 직관을 우울하게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팝 뮤지션이 부르는 노래가 이런 내게 종말적 비애감(悲哀感)까지 더한다.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인류의 대멸종 후 포스트휴먼이 된 듯한 아릿한 기분에 젖어든다. "I'm not discarding you like broken glass ... There's only tears when it's the final dance"라는 그녀의 외침이 유일한 구원의 목소리가 되어.....버려지지 않기를..., 눈물만이 있는 그때가 오지 않기를.... 마침 필 토레스인류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한 세밀화(細密畵)인 이 깊은 통찰의 저술, 디 엔드: THE END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한 외신에서는 사람처럼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감정을 느끼는 베이비 엑스라는 AI(인공지능)의 성과를 발표하면서 급기야 베이비 엑스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소리를 들으며 가상 도파민까지 생성했다고 한껏 들떠 전하기도 했다. 그리곤 기사의 마지막에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면서, “컴퓨터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경우, 그 결정에 인류에 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달았다. (ChosunBiz.com 9.9일자 기사에서)

 

이처럼 기술에는 양면성이 있다. 물론 모든 기술의 귀결이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으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고도의 기술 자체가 인간의 재앙과 관련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 기술의 영향이 가공할만한 수준이고 일부의 경우 더욱 확대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증폭될 수 있는 경우에 말이다. 위의 기사처럼 컴퓨터로 인간의 중추신경 또는 유전체를 디자인하거나 폭탄 하나로 도시 전체를 날려버리는 일도 가능해졌고 생물권을 먹어치우는 미세 로봇까지멀지 않아 등장할 것 같다.

 

필 토레스호모사피엔스가 도도새의 뒤를 이어 멸종할 가능성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번 세기에 인류의 번영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존재론적 위험을 20가지로 꼽고 있다. 세포조작기술(합성생물학), 초지능(AI), 나노기술, 초화산, 인지적 폐쇄성, 핵폭탄, 종교적종말론갈등, 기후변화(온난화), 시뮬레이션 종료, 등등. 이렇듯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을 만들어낼 위험들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에서의 이해에 삶의 경쟁에 매몰된 우리들이 얼마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지, 마치 내일도 오늘처럼 삶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각성(覺醒)하게 된다.

 

1. 인류의 존재론적 위기란?

 

이 저작은 종말의 공포를 확산하여 우리네 삶의 균형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무력과 허무를 증폭시키자는 것이거나 기독교 세대신학처럼 종교적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번영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즉 인류의 운명을 가를 유력한 위협들의 실체를 인지함으로써 사전 대응과 예방 역량을 수립하고 어떻게 실천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제안이자, 요구라 할 수 있다.

 

존재론적 위기란 현재의 인류나 미래의 자손들에게 발생 할 수 있는 최악, 즉 멸종의 시나리오라는 직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이 위기는 아주 특별하다. 다른 재난처럼 거기서 교훈을 발견할 수도 없는, 위기가 닥치면 그 한번으로 끝나는 게임이다. 존재론적 위기란 다음 기회같은 게 없다는 얘기다. 그저 끝일뿐이다.

 

때문에 인류의 생존과 번영은 바로 지금의 인간들이 존재론적 재앙을 막아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의미가 된다. 지금까지 지구가 겪었던 다섯 차례의 대멸종 이후 여섯 번째 멸종이 될 이 위기는 전혀 성질이 다른 위기다. 자연적 사건이었던 이들 멸종과 달리 인간에 의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다.

 

2. 실존적 위기에 대해서

 

위기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자 그 결과로 문제가 더욱 증폭될 수 있는 일이라 정의된다. 그런데 여기에 실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인류 이외의 타자가 아닌 바로 우리로서의 인류, 그 자신의 존속에 관련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속으로 지금 인류가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고? 라는 반문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필 토레스는 인류 종말의 숙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상에서 인류의 지적 능력이 차지하는 몫이 급속하게 줄고 있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실존 위기학이다. 우리는 오늘의 과학기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실제로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안다고 하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나 아마 그것은 타고난 무지 때문일 것이다.

 

2-1. 과학의 비정상성, 탈숙련화

 

그러나 고도화되어 가는 기술은 역설적으로 소위 과학의 비정상성이라 일컬어지는 접근성과 조작성이 단순화되어가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검지 손가락으로 한번 스치듯 문질러 대기만 해도 완전히 다른 정보로 넘어가는 것처럼,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서 누구나 천연두 바이러스 유전체를 확보할 수 있는 세상인 것처럼. 전문지식가와 비전문가의 기술적 수준의 차이도 대폭 감소하는 탈숙련화현상이 점점 심화되어 간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 재앙(災殃)적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천년 왕국을 기다리는 어느 기독교 복음주의자가 신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날을 당기고자 핵폭탄을 터뜨릴 수도 있으며, 합성된 전혀 새로운 치명적인 바이러스 세균을 퍼뜨릴 수도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북한의 김정은이 협박하는 핵폭탄보다 더욱 예측 할 수 없는 위협이 너무도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인류는 지금의 국제 정치와 경제적, 종교적 사건에서 비롯되는 갈등보다 이러한 재앙으로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는 이 같은 세계 속에 있다.

 

2-2. 실존적 위기를 재촉하는 기술들

 

기술의 양면성을 새삼 되뇔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자력 발전을 중지하는 것은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원천을 봉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원자력공학을 가르치는 어느 대학 교수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을 우린 매양 보고 듣고 있으니 말이다. 모두에서 인용한 기사의 AI도 이 점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의 양면성은 인간의 인지적 폐쇄성과 어울려 언제 인류의 통제력을 벗어날지 알 수 없는 그 임계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자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고 설명하는 위기들을 모두 열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처럼 기술에 대한 광신적 믿음과 인간의 무수한 불완전성이 불러올 그 미지의 사태에 대한 불신에 직접적인 점화를 하는 몇몇의 특정 기술, 특히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의 연장선에 있는 것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나노기술은 기술의 꽃이라고 한다. 분자의 자가 결합에 의존하는 기술, 분자제조기술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순식간에 자가 복제를 할 수도 있으며, 뇌의 미세구조를 완벽하게 포착하여 인지적 클론이 생겨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클론이 인간에 복종하는 존재일까? 인간은 이 클론을 통제할 능력을 지닐 수 있을까?

 

그리고 인공지능(AI) 개발의 현실이 어디에 와 있는지는 인터넷을 한 번 쓰윽 서핑하는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지원하고 보완하여 인류의 번영에 이롭기만 한 존재일 것인가? 지금의 과학자들은 AI가 인간과 같은 욕구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추정하기만 한다. 하지만 AI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인간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은 것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인간의 인지적 특성과는 전혀 다른 성향이 나타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래서 우리가 인공지능을 인간과 동일시하려는 욕구에 빠질 경우 세상의 종말을 앞당기는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런데 더욱 인간인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있다. ‘인지적 폐쇄성이라고 하는 인간 종()으로서의 사유(思惟)의 한계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질문할 수 있으나 그 대답을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더욱 무지한 것은 질문을 생각해 낼 수조차 없는 문제, 혹은 아예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것의 문제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그 거리를 걷던 개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때 그 개의 문제처럼 말이다. 그 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부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 인지적 페쇄성의 문제는 AI, 로봇, 나노기술, 합성생물학에 걸쳐 지금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는 모든 기술의 근저(根底)에 자리한 중대한 자기반성의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아마 이러한 인간의 자기 한계의 인지가 초지능의 요구를 절실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모든 불가지(不可知)에 대해 초지능은 해결하게 될 것이고, 우주의 실체를, 인간이 봉착한 난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대한 동일시 욕구의 함정은 초지능에도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그 위기를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을까? 지금의 과학기술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저명한 미래학자와 위기학자, 윤리학자들은 모두 ‘NO!'라고 답한다.

 

2-3. 또 다른 위기들

 

2-2.에서 기술(記述)한 실존을 위협하는 기술(Science & Technology)들을 세속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와는 인식론적 토대가 완전히 다른 종말론이 있다. 세상의 끝에 관한 이야기는 신의 계시에 담긴 예언에 대한 믿음이라는 종교적 종말론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아마겟돈 종말을 신봉하는 IS와 같은 집단들의 응용종말론은 종말을 그들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절대 필요조건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들의 천년왕국을 위해 존재론적 위기를 구성하는 과학기술들이 결합할 때 인류는 부재, 그것일 것이다. 오직 광신적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자들이나 이들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인류는 이러한 종말적 시계를 통제할 수 있을까?

 

3. 결 어(대응을 위한 사유)

 

지금 인류가 몰두하고 있는 고도의 과학기술들은 점점 강력해지는 동시에 접근성도 증대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생명공학 기술과 합성 생물학, 나노기술 분야에서 이와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더구나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열린 2008지구재난 위기협의회의 조사는 분자나노기술과 초지능 AI로 인한 인류의 멸종이 핵전쟁으로 인한 그것의 10배에 달하는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아마 여기에 종교적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과 결합한 기술의 재앙은 더욱 증대 될 것이다. 이러한 시급한 전 세계적 아니, 지구적, 혹은 우주에까지 미치는 우주적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가 아무런 실질적인 대책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데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린 무얼 준비해야 하는가? 우린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의 한 방법론에는 어느 학자의 말을 인용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다 멸종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을 위해 현 인류가 퇴장해야 하는 거대한 합의가 있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보다 실질적인 접근을 해보자. 지금까지와 같은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방안들. “인공지능의 우호성과 적대감, 무관심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연구의 투자를 얘기하고 있다. 이 연구의 결과가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있게 될까?

 

그래서인지 저자는 초지능을 최우선으로 개발하자고 한다. 그렇게 되면 초지능이 이 방안을 마련해주지 않겠느냐는 기대 같다. 그러나 이 초지능 역시 인간의 통제력이 미칠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초지능에 대한 믿음이 기초가 된다면 나노기술의 개발은 인류를 생산의 족쇄에서 해방시키고 그야말로 풍요의 유토피아가 성취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위한 우주식민지 개척의 방법은 초지능이 개발된다면 이 역시 가능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공감하게 된 대책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 인간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반지성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잃은 오늘의 인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능력이 바로 분석적 사고의 필요, 즉 비판적 사고라는 점이다. 인식론적 기본원리를 실제 세상에서 실행할 수 있는 비판능력, 이를 위해 교육과정에 응용인식론 기초과목을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간의 육성은 오늘의 우리 세계에 중대한 필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 불완전함이 야기할 수 있는 무수한 위기들이 있다. 부주의, 실수, 사고, 기술적 결함, 합당한 사유로 인한 순간적 실책, 어설픈 기술, 그리고 불가지까지...

기술 낙관주의만큼 인류를 위협하는 것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와있다. 냉정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집대성한 존재론적 위기에 대한 이 저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중대한 사고의 전환을 모색케 한다. 위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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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9-15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블로거들한테 필리아 님의 윗글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님 인공지능이나 인류 종말론 같은 논제에는 관심이 좀 덜한 것일까요? 필리아 님의 윗글 혹은 서평 대상인 『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깊이 생각해볼 만한 논제를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필리아 2017-09-15 05:54   좋아요 0 | URL
당면 과제가 아닌듯한 문제 제기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qualia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