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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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각자 그 집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나는 끝내 모를 것이었다. 그들 역시 내가 지나온 시간들의 전모를 알 리 없다. 우리 모두의 모든 순간을 지켜본 건 집뿐이었다.”

- 1<율의 이야기 P23> 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진정 알기위해서는 그 미지의 것에 가닿으려는 정성과 충심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일 게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의 진심이 꼭꼭 눌려 써진 작품이다!’ 라고 느끼게 된다. 소설 혹은 픽션에 대해 이런 설명이 있다. 작가와 독자가 은연중에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묵계에 대한 것인데, “작가의 허구적 진술은 사실과 거짓을 나누는 판단의 체계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이 판단을 요구하며, 진실의 모습을 생각게 한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일 것이다.

 

소설의 표제 알제리의 유령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즉 플롯의 중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비로소 숨이 불어넣어져 생기를 되찾게 하는 중심 제재(題材)로써 다층의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알제리의 유령연극 대본이다. 누가 썼는지, 어떤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 써졌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사건을 만들어냈는지, 사건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말하게 한다.

 

1. 거짓의 이야기

 

연극대본 알제리의 유령자본의 저자 칼 마르크스가 쓴 희곡 작품이다. 실제로 1882년 초, 마르크스는 요양을 위해 알제리의 빅토리아 호텔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국내 출간되었다가 지금은 절판된 알제리에서의 편지(정준성 , 빛나는 전망 )’라는 서간집은 이 시기의 마르크스를 통해 그의 사적(私的)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부터 허구(虛構)와 사실의 관계가 섞이기 시작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대화가 반복되는 대본의 내용과 이에 대한 진정성 넘치는 해석이 진지하게 소개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진실 되다. 그러나 그 진실은 거짓이라는 토대위에 서있다. 거짓이냐, 진실이냐.

 

소설의 둘째 장인 철수의 이야기의 화자는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지향점은 어디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로 가득한 청년이다. 연극무대를 기웃거리는 그에게 알제리의 유령을 쓴 작가에 대한 관심은 그를 연극계의 천재로 알려진 인물 탁오수를 찾아가게 한다. 진실을 찾아서,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이야기 역시 오롯이 사실들만의 나열일까? 게다가 알제리의 유령은 당시 마르크스가 처해있던 궁핍과 실의를 통해 그의 가족들과 그 구성원이 겪게 되는 물질적, 심적 고난과 절망에 대한 상념으로 이끄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 거짓된 이야기에서 삶의 진정함을 길어내는 아이러니에 매혹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진심은 어디에서도 절로 피어나는구나. 허구의 틀에서 허구를 직조하고, 그 허구가 허구가 아닌듯한 허구가 되어 사실로 승화하는 조화(Harmony)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2. 사실의 이야기

 

이렇게 작위적으로 거짓의 이야기와 사실의 이야기로 구분하는 것은 무식한 짓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의 범위에서 40년 전, 매양 매캐한 최루가스가 온 도시의 공기를 짓누르던 1980년은 내겐 지금도 날 것의 생생한 기억이니 예술인들의 한낱 문화적 놀음에 조차 폭력을 행사하여야만 했던 불의한 권력, 그것들의 제물이 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에 포함시켜도 이해가 될 터이다.

 

알제리의 유령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1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율(한은조)과 징(박현가)의 부모들이다. 두 부부가 어울려 술과 농담과 진심이 부조리하게 뒤섞이고, 자신들의 대화를 희곡으로 쓰기로 한다.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전에 이들은 동료배우들에게 멋진 사기극을 연출하는데, 마르크스의 희곡작품이며,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게 하는 유령이란 제목까지, 게다가 그 입수경로조차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무지하고 불온한 권력은 여기에 고문과 죽음으로 답한다. 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곤 또 죽음. 이후 그들의 자녀, 그네들과 관계했던 인물들의 삶이 신산하게 펼쳐진다. 감히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한 사람들의 고통이 어딘가에 있을 터이다. 허구의 세계보다 더 허구 같은 인간사(人間史)란 사실이 어찌 이보다 솔직하게 그려질 수 있겠는가?

 

40년이 지난, 그것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상황에 대한 과정이나 형편이 술술 연결되어 술회되었다면 그건 온전히 허영(虛榮)이요, 허위(虛僞)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 “~었을 것이다.”, “~었을 수도 있다.”, “아니, 모르겠다.” 라는 불명료한 기억의 인출로 시작되어, 단절되어 흐릿하기만 했던 것이 더욱 진정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소설은 황당(荒唐)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시대의 국가 폭력에 스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鎭魂曲;requiem)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네들 이후 세대를 위한 입당송(入堂頌;introitus)일지도.

어떤 시절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죽는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문장이 사실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역사이다. 왜 알아야 하느냐고?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설혹 그 과거의 영향을 피할 수 없을 지언정, 약간의 자유라도 있는 편이 낫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라는 말을 진짜배기로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 『공산당 선언(이진우 , 책세상 ) P15 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中略)...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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