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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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을 쫓는 측면에서 얘기하자면‘격차 사회’를 조성하고, 사회의 저 꼭대기로 올라가려는 무분별한 욕망에 시달리는 오늘의 인간들, 사회의 보잘 것 없음을 어느 고급주택가에서 벌어지는 가족들의 히스테릭한 모습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사회는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계층의 차별화와 그 고착화를 위해 달려가는 사회를 격차사회라 부르는 모양이다. 여건이 되지 못하는데도 지니고 싶고, 오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부글부글 끓어대는 속물적 갈망은 한국사회의 우리들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의 묘미는 디테일, 즉 등장인물들마다의 심리와 행동,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가족 개체들만의 내면, 서로 다른 계층의 의식과 행위의 적나라한 포착에 있다고 하여야 할까.

‘히바리가오카’는 명문 사립학교들에 인접한 언덕길 위의 고급주택가의 이름이다. 또한 넓은 땅에 고급스럽게 지어진 양옥들이 들어선 이 주택가는 일종의 상류층에 대한 사회적 기호이다. 이 지역에 진입하기만 하면 “나는 이런 곳에 사는 특별한 인간”이라고 믿게 되고 절로 걸 맞는 신분과 사회적 지위라는 사다리에 기어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곳의 자투리땅을 매입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생의 대단한 기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옹색한 면적의 땅을 구입하고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싸구려 주택을 지어 이사한 그 가족에게는 과연 행복의 웃음이 피어날까?
기대와는 달리 이 볼품없는 가족은 불란(不亂)이 그칠 날이 없다. 계집아이의 사립중학교 입학 실패는 콤플렉스가 되어 가족 갈등의 근원이 된다. 엄마에게 ‘당신’이니, ‘그쪽’이니, 아빠에게는 “아저씨는 빠지시지”라고 망발을 거침없이 내뱉는 아이의 폭력적 모습은 읽는 내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울화가 치미는데, 아마 내 옆에 있었다면 싸대기를 올려 부쳐도 한참을 그랬을 것이다. 정말 인내가 필요할 만큼 못된 계집아이가 있다. 

사건은 이 점잖은 고급주택가의 정적을 깨는 계집아이 ‘아야카’의 천박한 소란과는 달리 이 보잘것없는 가족과 마주보는 고급저택에 사는 엘리트 의사와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는 자식들, 현숙한 아내로 구성된 가정에서 들려온 단 한차례의 고성에서 시작된다. 한없이 고상한 부인 같았던 의사의 아내가 남편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한 것인데, 직접 신고하고 살인 당사자임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상류 계층의 상징인 동네의 명성을 둘러싸고, 게다가 사건의 진실에 대한 입방아는 물론이고, 사건 당사자의 자식들, 친척들에게 까지 죄의식을 뒤집어씌우는 악의적이고 치졸한 군중들의 언어폭력, 또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못난 계집아이처럼 “교만한 마음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모습은 더 없이 오늘의 추악한 인간들의 면모를 뚜렷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주택가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의 탈을 쓴 부잣집 사모님”의 주제넘은 오지랖에서, 그 대단함의 위세란 것이 무지하고, 하찮으며 천박한 속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가하면, 허영과 허위의식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온통 빼앗긴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무리들의 구차한 의식이 다시금 까발려 진다. 자신들이 기를 쓰고 축조한 욕망이란 탑이 한 없이 부실하고 불완전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 발밑부터 허물어져 내릴 그 조악한 세상의 실체를 알았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상류와 하류로 구분하고 욕망조차 차별 짓는 세상 둘 다  한 번에 굽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관람차의 설치를 기대하는 사내아이, ‘신지’의 격차 없는 세상의 공존에 대한 희구는 왠지 더욱 간절한 진정함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변덕스럽고 모순적이며 양면적인 심리들을 공감 할 수 있는 언어화하여 들려주는 작가의 역량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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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02 - 김사과 소설집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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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매장」이란 단편에는, 지도로만 이루어진 한 권의 책, “잡지이자, 여행기이자 소설이며(....)일기이자 사진이며 백과사전이 될 그러한 책, 그것은 책이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이상해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눈이 머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는 주인공‘나’와 ‘y'의 기획이 있는데,  ‘김사과’의 작품들에 대한 한 문장의 정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위가 상하는 무심한 살인과 흐르는 피, 그리고 도시와 세상을 향한, 인간인 자신에게, 모든 인간들에게 퍼붓는 증오와 분노는 낯선 괴이함이다. 다만 우린 이토록 이상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겨운 공포 아닌 공포, 고통 아닌 고통과 함께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소설은 이러한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탐색하는 과정이며, 그 실체를 깨닫는 순간, 바로 그 해답을 발견하는 순간에 내닫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타율성에 길들지 않으면, 사회가 요구하는 얽매임에 종속되지 않으면 결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구속적 삶의 존재가 감수해야하는 고통을 벗어나는 것, 즉 완전한 해방이란 것, 그것을 알아버리면 동공이 부채살처럼 확대되고 떡 벌이진 입과 같은 형상을 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평소에는 잊고 지내는 그 공포.

다리미로 민 것 같은 얼굴, 실리콘이 박힌 얼굴, “분홍색 푸들”처럼 하고선 뒤뚱거리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 사실은 별 감흥조차 없지만, 잔잔한 멀미와 비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하다.
물질의 풍요, 기계적 편의성, 신체를 한낱 부품정도로 이해하는 인간들에게서 진정“무지는 행복의 충분조건”임을 확신케 한다. “심지어 자신이 행복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괴물들은 “무지가 모든 오류의 충분조건”이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기까지 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말이다.

꿈과 환상으로 지탱되는 이 도시, 서울의 세계, 여기서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매순간 타인들에게 증명되고 갱신되기 위해 사는 삶, 단지 살기위해서 사는 삶에 초점 잃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 초라함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정말 함께하는 것이 싫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고 싶은 충동이 왜 안 일겠는가? 소설 속 인물들의 정신 분열적인 심리와 행동들, 그 가학적이고 충동적인 폭력과 살인은 그 자체로서도 진실이지만, 반대 방향, 즉 오늘의 인간무리들이 보이는 작태 또한 정신병자이기는 매한가지 일 것이다.

차바퀴에 손이 깔려 엎어진 노파의 구원을 무시하고 지갑 속 돈을 훔쳐내곤 살해하여 상자에 구겨 넣고는 “이미 죽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늙어빠진 할머니”이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잖아요?”하는 항변이나 그래서 그건 거의 살인도 아닌 것이고, 거의 살인이니까 정말 살인은 아닌 거라는 주장은 세상에 대한 그 증오의 강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가늠케 하는데, 좁은 골목길의 버려진듯한 국밥집 여주인을 칼을 휘둘러 살해하는 순간 발기한 자신을 깨닫는 소름끼치는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가 난 자신의 감정에만 귀 기울이는 것은 정신분열증의 오늘의, 한국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그래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모든 것을 타인의 의지로 해 왔”으며, “타인의 욕망을 대리”한 것이 ‘나’이니 내가 가책을 느낄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역설의 역설만큼 수록된 8편의 소설은 잔인하게 이 사회를 후려치고 있다. 아니 천연덕스러운 냉혹함으로, 그러나 명료한 사회분석적 통찰을 안고 말이다.

뉴욕의 어느 한 구석을 닮아가려는 그 머저리 같은 지향성의 도시, 서울, 그리고 그 속의 인간들, 과연 그 끝은 어디인지 알고는 있기나 한 것인지,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는 것인지...그녀의 진단처럼 우리가 빠져나갈 그 어떤 구멍도 없다는 절망감은 결국 이 사회를 이루는 역겨운 장치들을 거부하는 발작적 증상, 바로 정신분열의 상태로 터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그녀의 前作 장편『풀이 눕는다』에서 말하고자 했던 세상의 추레함과 비루함, 그리고 삶의 흉물스러움 대한 도발의 생생한 모습들을 이 작품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내겐 충격적인 시간이었다 하겠다. 김사과에 자꾸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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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추구와 발견
파트리크 쥐스킨트.헬무트 디틀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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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 영화감독‘헬무트 디틀’은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한 때, 계시의 한 장면처럼, 아니“연극의 한 장면처럼”, “분명하게 어떤 형상을 이룬 후 내 앞에 떡 버티고”섰던 꿈의 해석으로서 이 시나리오를‘파트릭 쥐스킨트’와 함께 만들었다고 제작의 변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흐릿하여 알 수 없었겠지만 사랑과 죽음과 구원에 대한 암시였을 것이다. 작품은 이 두 사람이 공동 집필한 시나리오로서 사랑하는 아내‘에우리디케’를 위해 지하세계로 뛰어든‘오르페우스’의 신화가 모티브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죽음을 뛰어넘거나 죽음까지도 굴복시키는 그런 사랑, “일생일대의 위대한 사랑”같은 거를 말하면 대개 정신 나간 사람 취급받기가 십상일 게다. 어떤 세상인데 사랑 때문에 죽고, 또 저승을 따라가? 더구나 현실세계에서 그런 사랑은 결코 존재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단지 환상이라고 말이다. 자신의 음악성에 낙심한 여성과 뛰어난 작곡가의 소위 첫 눈에 반한 사랑, 그런 것일 게다. ‘비너스(슈테른헨)’와 ‘미미’의 격정적이고 영원을 약속한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미미는 자신의 모든 예술적 이성을 쏟아 부어 음악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명곡들로 비너스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어 낸다. 그러나 미미의 독백처럼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은 꼭 7년간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2천 5백번의 밤과 낮, 5백번의 밤은 행복했고, 2천 번의 낮에는 자꾸 문제가 생겼다.”

이별 후에 제기하는 절망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그들의 노래처럼 미미는 비너스를 잊지 못하고, 결국은 친구‘테오’와‘헬레나’의 그리스 별장에서 자살하고 만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죽음은 구원의 빛을 던져주고, 비로소 미미에 대한 사랑의 간절함으로 비너스 또한 연인을 쫓아 하데스의 입구인 우물에 몸을 던진다. 지옥의 강 스틱스의 뱃사공 카론과 문지기인 케르베로스조차 매혹시겼던 오르페우스의 릴라의 선율처럼, 비너스의 애절한 노래는 지옥의 신들을 감동시키고 연인들에게 이승으로의 구원을 허락하지만 신화처럼 하찮은 사소함으로 미미는 다시금 지하의 세계로 멀어진다.

 

세월이 지나, 지하세계의 신으로부터 세 시간이란 이승에서의 삶을 허락받은 미미가 오페라극장에서 열연하는 늙은 비너스를 바라보는 장면, 그리고 광장에서 두 사람이 조우하여 과거의 연인들을 그리는 장면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는 숙연한 이미지가 되어 마음에 둥둥 떠다닌다. 어쩌면 그렇게 이별함으로써 이 연인들의 사랑은 가장 위대해질 수 있었는지도...마법에 걸린 것 같고, 시적이며, 낭만적이고, 불가능한 그런 사랑이 되는 것인지도...사랑의 감미로움, 애틋함이 오르페우스의 아리아 선율을 타고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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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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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정신사는‘푸앙카레’와 ‘힐베르트’의 집합론으로 시작된 직관과 증명의 엄밀성의 갈등인‘칸토어 논쟁’이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또는 ‘괴델’의 확실성의 존부(存否)와 같이 이성과 감성의 대결, 추상과 구체의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인간 뇌의 두 반구라는 본래적 이원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는지를 규명한‘이언 맥길크리스트’의 두뇌와 인간세상의 조응관계에 대한 통찰이 상기된다.

진리에 이르는 증명 가능한 명확한 길,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신화, 수학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공리와 같은 항진명제 조차 증명가능 할 것이라는 완전성에 대한 추구, 완전히 논리적으로 엄밀하고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인간의 신념은 과연 도달 할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20세기 초 인류 지성사(知性史)의 중심인물들이 집착했던 소위‘수학적 토대’에 대한 사상적 모험이자, 철학적이며 감성적 갈등의 문화사이다.

특히‘버트런드 러셀’이 『수학 원리』를 통해 그 근원적 해결을 찾으려 했던, 즉 “모든 수학적 진실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시도는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고 마는데, 가장 단순, 명료, 정확하다는 수학조차 이러할 진대, 인간의 이성이 마치 세상 모든 것의 해법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사실 존재의 무지(無知)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만화형식의 소설로 구성된 『로지 코믹스: 러셀의 수학원리』라는 이 저술은 그리 호락호락한 저술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비유와 예시적 장면들 하나하나에 이의 대중적 이해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재미와 몰입으로 인류의 본성과 문화라는 가장 유서 깊은 정신사를 즐겁게 탐구하는 터전을 만들어 준다.

엄격한 조모(祖母)하에서의 성장과정과 러셀가의 정신병이라는 유산, 실제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 즉 ‘이성’의 존재를 깨우치게 해준 유클리드기하학에서부터, 생각을 기하학처럼 명확하게 하는 방법으로서‘라이프니츠’의 ‘추론 계산법’, 그리고 “논리학의 목표는 계산이 아니다. 실재를 닮은 모형을 만드는 것”이라는 ‘프레게 교수’의 <개념 표기법>이나, ‘게오르그 칸토어’의 무한에의 도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항진명제(tautology, 恒眞命題)를 생산하는 기계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완전성을 향한 도전의 여정이 소개된다. 과연 “1+1=2”이라는 이 당연해 보이는 것을 우리는 증명해낼 수 있을까? 인간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합리적 이성을 뒷받침하는‘논리’란 것은 무엇일까? 그 실체를 보면 고작 “아는 것들을 결합해서 모르는 것에 도달하는 기술”일 뿐이다. 결국 인간 개체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인 실재는“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과 닿는다. 또한 ‘괴델’의 그 유명한‘불완전성의 정리’인, “답이 없는 질문이 항상 존재 할 것!”이라는 산술의 이 필연적 불완전성과 이에 토대를 둔 모든 체계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증명은 수학의 토대에 대한 확고한 존재를 여지없이 허물어 내린다.

단순 명료, 개념화, 자기 확신과 자기인식 과잉이라는 이성의 집착, 다시 말해서 논리라는 추상적이고 범주화하며 일관성과 체계화하려는 자기 폐쇄적 독단성의 경향은 논리학의 거장들이 한결같이 정신병에 시달린 이유를 설명하게 한다. 추상과 구체를 알지 못하는, 현재라는 실재를 조각들로 맞추어 알아내려는 시도에는 이미 한계와 메울 수 없는 틈을 만든다. 대 사상가들의 실재와 같은 모델을 찾겠다는 이 무모한 모험, 토대를 찾겠다는 여정은 작자들의 말처럼 ‘미완성의 오디세이’가 될 수밖에 없는 생래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명 없는'사실(fact)', 정지한 불변의 지식의 누적이 생명성과 포용성, 변화하는 현재성을 담아 낼 길은 없는 것이다.

“확실성의 모범인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완벽한 이성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하물며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사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합리성과 이성의 추구가 그릇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건 최종 도착점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인 것처럼 그 과정에서 우린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들과 의외의 과실을 획득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에서 복수의 윤리와 고대의 신들이 여신 아테나의 민주적 투표라는 합리성으로 비합리적인 전쟁과 인종에 대한 증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살인의 종식을 맺는 장면은 이성과 합리성의 추구는 인간사에 의미 있는 것임에 분명한 것이다.

이 저술은 러셀의 수학의 토대를 찾기 위한 필생의 도전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들의 사상과의 관계성을 흥미롭고 지적으로 그려낸 멋진 철학만화소설이다. 아마 이 한 권의 만화책을 읽게 되면 절로 가장 심오한 철학적 사색의 원천, 논리의 진실을 이해하는 지적 과실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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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전후
김원우 지음 / 강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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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것이 주제넘고 시건방지다.”라는‘뒤넘스럽다’는 형용사가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소설이다. 이는 우리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구성원인 한국인들의 어리석고 무식하고 허위와 기만에 찬 그 유치하고 저속한 생각과 행위, 또한 “저질스런 엘리트 의식”에 대한 역겨움일 것이다.
소설은 문학평론가로 보이는 한교수라는 이에게 은퇴한 임모교수(임중근이 본명)라는 이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소회와 함께 이메일로 보내온 회고담을 축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담고 있는 엉터리이자 가짜인 인간들과 사회의 냉소뿐 아니라 이의 예외적 인물 일 수 없는 사람으로서 임모를 읽게 되는 것은 어떤 짜증나는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한 때 지방대학 한국어문학과 선생이었던 노년인 은퇴자 술회의 서문격인 글에서 “머릿속에서 뱅글 뱅글 돌고 있건만 선뜻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건망실어증과의 싸움을 표현하는데, 이는 회고담이라는 기억의 진술에 대한 그 진실성의 한계인 것이며, 더구나 “자의의 생략과 삭제기능은 당대의 여러 막강한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흔적이므로 그 결과물은 어차피 생래적인 불구 상태를 못 면하게 됐는지 따위를 한목에 돌아보아야 할 벅찬 작업” 운운하지만, 꼭 막강한 이데올로기의 영향뿐 아니라 출생과 성장, 교육과정의 모든 의식, 무의식적 체험이라는 개별자만의 편벽한 식견이라는 것이 이미 불구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뒤넘스러운 것은 임모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뱅뱅 돌던지 혀끝에서 나오지 못하던지 간에‘키오스크(kiosk)’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갑갑했던 기억을 말하면서, 이와 더불어‘로데오(rodeo)거리’처럼 그 본래의 의미를 이 땅에 엉성하고 조악하게 베끼는 엉터리 의식을 지적하면서,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별것 아닌 일로 여기고, 시끄러운 게 못마땅해서 거론하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이 사회 구석구석에 흔하게 널린 조잡성을 짐짓 식자연하고 조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청장년기인 70,80년대를 중심으로, “이 몸이 세파를, 그것도 여난(女難)과 국난(國難)과 교난(校難)을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술회한다.

여난이란 것은 임모인 자신과 이웃학과 교수인 심모라는 여선생과의 불륜인데, 우발적이고 예상치 못한 돌발사건으로서의 '해프닝'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머리 벗겨진 쿠데타 군인이나 이에 부화뇌동하는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10.26에서 5.17로 이어지던 국난, 소위‘서울의 봄’이라는 가당치도 않던 시대를 희화화하고 있다. 이는 “꼴같잖은 지면을 노가다판의 웃돈 얹은 노임처럼 흔들어대며 아첨을 떨고 지랄”하더라는 어용언론과 그 세력, 그리고 파벌과 계파로 대변되는 대학 내의 줄타기와 무능력, 무기력, 치졸함이 더해져 사회지성이라는 것들의 교활함, 던적스러움으로 그 천박한 바닥을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이 30~40년을 지난 지금은 조금 개선되었을까? “영수증도 없이 혈세 빨아먹는 정황도 대체로 일치”하는 깡패와 세무공무원의 닮은 두 직업에 대한 일화가 요즈음은 더욱 세련되어 좀체 추적키 어렵거나 거대한 정치권력집단에 연결되어있다는 신성불가침의 신화로 되었다는 것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여선생 심모와의 관계에서 그녀의 “교태와 교성은 일종의 포즈 같기만”하다고 하면서, “만부득이한 시늉?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듯이, 그 말이지, 반강제적인 꾸밈? ”이라고 가짜와 허영, 위선, 엉터리로 가득한 이 사회와 구성원들의 은유로 확장되기도 하는데, 이는 글에 있어서 “안 읽히는 글들의 밑바탕에는 추수주의자 내지는 독학자의 그런 만용이나 얌심이 배어있다.”는 뒤넘스러움으로 떡칠을 한 한국인들, 한국의 지성이라는 것들이 그 사회의 조잡한 거짓을 반복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허무맹랑하게도 뒤넘스러움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 엉터리 인간들의 사회를 시정하는 것으로 “사람을 만들게 아니라 제도가 기계처럼 굴러가도록 연구를 해보자 이것이오. 법으로 다스리기에는 사회적 경비도 많이 들고, 이미 그 결과가 형편없는 졸작임이 드러났으니 제도의 정직한 운행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사람이나 관행이나 도구나 기관 같은 제2의 제도가 있다면 즉석에서 감전사를 당하든가”라는 식으로 엉뚱한 진단과 제안을 하고 있다. 임모가 말하는 이러한 ‘제 2의 제도’, 즉 유무형의 장치들이란 것은 결국 인간들의 자의와 무수한 욕망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지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장치가 변화할 수 있겠는가? 마치 자신만은 이 사회의 경계 밖에서 내려다보고 말하는 것 같은 소설 속의 임모나 한모뿐 아니라 이들처럼 객관적 지위에 있듯이 서술하고 있는 이 3인칭 관찰자 시점도 비위가 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뒤넘스러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독자를 자극하는 이 소설적 장치는 성공이라 할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구조적 동일성에 대한 지적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화자의 말처럼 부족한 인간의 언어, 아니 한글이란 우리말로 표현할 길 없는 얄궂은 현상들이 주석까지 달고서 형용되는 이 소설의 노고는 겸허함이란 미덕을 일깨워준다. 작가의 완강(頑剛)한 고집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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