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전후
김원우 지음 / 강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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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것이 주제넘고 시건방지다.”라는‘뒤넘스럽다’는 형용사가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소설이다. 이는 우리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구성원인 한국인들의 어리석고 무식하고 허위와 기만에 찬 그 유치하고 저속한 생각과 행위, 또한 “저질스런 엘리트 의식”에 대한 역겨움일 것이다.
소설은 문학평론가로 보이는 한교수라는 이에게 은퇴한 임모교수(임중근이 본명)라는 이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소회와 함께 이메일로 보내온 회고담을 축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담고 있는 엉터리이자 가짜인 인간들과 사회의 냉소뿐 아니라 이의 예외적 인물 일 수 없는 사람으로서 임모를 읽게 되는 것은 어떤 짜증나는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한 때 지방대학 한국어문학과 선생이었던 노년인 은퇴자 술회의 서문격인 글에서 “머릿속에서 뱅글 뱅글 돌고 있건만 선뜻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건망실어증과의 싸움을 표현하는데, 이는 회고담이라는 기억의 진술에 대한 그 진실성의 한계인 것이며, 더구나 “자의의 생략과 삭제기능은 당대의 여러 막강한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흔적이므로 그 결과물은 어차피 생래적인 불구 상태를 못 면하게 됐는지 따위를 한목에 돌아보아야 할 벅찬 작업” 운운하지만, 꼭 막강한 이데올로기의 영향뿐 아니라 출생과 성장, 교육과정의 모든 의식, 무의식적 체험이라는 개별자만의 편벽한 식견이라는 것이 이미 불구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뒤넘스러운 것은 임모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뱅뱅 돌던지 혀끝에서 나오지 못하던지 간에‘키오스크(kiosk)’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갑갑했던 기억을 말하면서, 이와 더불어‘로데오(rodeo)거리’처럼 그 본래의 의미를 이 땅에 엉성하고 조악하게 베끼는 엉터리 의식을 지적하면서,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별것 아닌 일로 여기고, 시끄러운 게 못마땅해서 거론하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이 사회 구석구석에 흔하게 널린 조잡성을 짐짓 식자연하고 조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청장년기인 70,80년대를 중심으로, “이 몸이 세파를, 그것도 여난(女難)과 국난(國難)과 교난(校難)을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술회한다.

여난이란 것은 임모인 자신과 이웃학과 교수인 심모라는 여선생과의 불륜인데, 우발적이고 예상치 못한 돌발사건으로서의 '해프닝'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머리 벗겨진 쿠데타 군인이나 이에 부화뇌동하는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10.26에서 5.17로 이어지던 국난, 소위‘서울의 봄’이라는 가당치도 않던 시대를 희화화하고 있다. 이는 “꼴같잖은 지면을 노가다판의 웃돈 얹은 노임처럼 흔들어대며 아첨을 떨고 지랄”하더라는 어용언론과 그 세력, 그리고 파벌과 계파로 대변되는 대학 내의 줄타기와 무능력, 무기력, 치졸함이 더해져 사회지성이라는 것들의 교활함, 던적스러움으로 그 천박한 바닥을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이 30~40년을 지난 지금은 조금 개선되었을까? “영수증도 없이 혈세 빨아먹는 정황도 대체로 일치”하는 깡패와 세무공무원의 닮은 두 직업에 대한 일화가 요즈음은 더욱 세련되어 좀체 추적키 어렵거나 거대한 정치권력집단에 연결되어있다는 신성불가침의 신화로 되었다는 것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여선생 심모와의 관계에서 그녀의 “교태와 교성은 일종의 포즈 같기만”하다고 하면서, “만부득이한 시늉?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듯이, 그 말이지, 반강제적인 꾸밈? ”이라고 가짜와 허영, 위선, 엉터리로 가득한 이 사회와 구성원들의 은유로 확장되기도 하는데, 이는 글에 있어서 “안 읽히는 글들의 밑바탕에는 추수주의자 내지는 독학자의 그런 만용이나 얌심이 배어있다.”는 뒤넘스러움으로 떡칠을 한 한국인들, 한국의 지성이라는 것들이 그 사회의 조잡한 거짓을 반복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허무맹랑하게도 뒤넘스러움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 엉터리 인간들의 사회를 시정하는 것으로 “사람을 만들게 아니라 제도가 기계처럼 굴러가도록 연구를 해보자 이것이오. 법으로 다스리기에는 사회적 경비도 많이 들고, 이미 그 결과가 형편없는 졸작임이 드러났으니 제도의 정직한 운행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사람이나 관행이나 도구나 기관 같은 제2의 제도가 있다면 즉석에서 감전사를 당하든가”라는 식으로 엉뚱한 진단과 제안을 하고 있다. 임모가 말하는 이러한 ‘제 2의 제도’, 즉 유무형의 장치들이란 것은 결국 인간들의 자의와 무수한 욕망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지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장치가 변화할 수 있겠는가? 마치 자신만은 이 사회의 경계 밖에서 내려다보고 말하는 것 같은 소설 속의 임모나 한모뿐 아니라 이들처럼 객관적 지위에 있듯이 서술하고 있는 이 3인칭 관찰자 시점도 비위가 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뒤넘스러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독자를 자극하는 이 소설적 장치는 성공이라 할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구조적 동일성에 대한 지적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화자의 말처럼 부족한 인간의 언어, 아니 한글이란 우리말로 표현할 길 없는 얄궂은 현상들이 주석까지 달고서 형용되는 이 소설의 노고는 겸허함이란 미덕을 일깨워준다. 작가의 완강(頑剛)한 고집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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