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섬앤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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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백년전쟁의 영웅인 동레미의 어린 목녀(牧女)인 성(聖)‘잔 다르크(Jeanne)’와 프랑스군의 원수(元帥)로서 잔과 함께 오를레앙 등에서 전승을 거두었던 전쟁 영웅이었으나 남색과 아동살해로 이어지는 기이한 쾌락의 추구로 악명을 떨쳤던‘질 드 레(Gilles)’백작을 인간의 속죄와 구원이라는 양식에 함께 담아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본원적 의식을 통찰한다. 특히 질드레에 투영된 다층적 인간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악마성과 구도자적 성향의 교착을 보여주고 있어 아찔한 매혹과 성스러움, 그리고 고통스런 충격의 그 어떤 혼합된 모호함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투르니에의‘방드르디’로부터 그가 갈망하는 인간상(像), 근원적으로 회귀하여야 할 자연으로서의 인간, 어떤 의미에선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오르게 하는 그런 궁극적 지향의 이해는 생명과 죽음, 순수성과 열정의 분리 할 수 없는 합일이라는 일관된 의지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상처, 즉 물신숭배라는 인간의 이성과 괴리된 동물적이고도 본능적인 귀결을 생생한 형상으로 축조하여 악성(惡性)과 양성(良性)의 전위를 오가며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란 진정 어려운 물음을 생각게 한다.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여 철학적 사유를 하게하는 투르니에의 작품세계는 이 때문에 발을 빼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다하겠다.

성 미카엘과 성녀 카트린의 음성, 다시 말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잔다르크의 조국 프랑스와 샤를르 황태자의 왕위 복권에 대한 충성과 소명의식은 당시 기독교의 권위에 복종하던 시대로서는 그 자체로 이미 성스러운 것이다. 오를레앙 전투의 승리, 그리고 샤를르에게 대관식을 선사함으로서 신의 음성을 이행하지만, 세상이란 그리 순수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다. 개인과 집단, 국가의 이기적 욕심을 위한 기만적인 협력과 배신, 음모와 질시가 따라 다닌다. 프랑스에서 영국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잔(Jeanne)은 콩피에뉴 전투에서 적에게 사로잡히고 마침내, 루앙에서 마녀로 유죄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다. 이러한 잔의 숭고한 정신, 성스러움에 매료된 질(Gilles)은 그녀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루앙에 잠입한 그는 그녀가 예수를 부르짖으며 화형당하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화형은 양성의 악성으로의 전위이다. 성인을 마녀로 둔갑시킨 이 세계의 사악함, 기독교의 음험함, 바로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다. 신앙심을 상실하고 깊은 상처를 받은 질드레 백작은 이 같은 인류의 도덕적 상처에 대한 치유의 방법을 찾지 못해 갈등한다.

 치유, 구원에 이르는 방법, 그 공정(工程)은 질드레의 기이한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데, 일종의 연금술에 정신을 포획당하는 것이다. 연금술의 등장은 그야말로 투르니에 다운 은유라 할 수 있다. 금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속물적 행위로서 이는 화폐, 금융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르네상스라 불리는 예술과 물질의 풍요를 상징하는 피렌체를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도입함으로써 허영과 욕망의 의미를 더한다. 또한 질드레의 부서진 사랑에 대한 영속화를 위한 구원의 길로의 인도라는 치료과정으로서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처럼 연금술이 내장할 수밖에 없는 탐욕스러움과 사악함의 기운이 신비로운 것은 선과 악, 삶과 죽음, 성덕과 영벌을 오간다는 것이다.

즉 질드레의 연금술이란 사탄인 바론에게 아이들의 피와 심장, 팔다리를 바침으로서 성녀 잔에게 다가가는 구원의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화형대위에서 불타죽은 잔처럼 아이들을 불태우는 것, 또한 아이들의 순진함, 생명력,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합체시켜 동일화하는 것, 즉 영원성으로의 회귀이다. 완벽한 연금술이지 않은가? 또한 질드레 백작은 잔을 불러내는 일종의 위령제로서 엄청난 규모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소위 바타이유가 말하는 비생산적 소비라는 균형적 순환으로서 파괴가 아닌 영속을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호사취향이나 과시가 아니라 더 나쁜 의도인 희생제의(犧牲祭儀)로서 진행된 것이라고 질드레의 보좌신부의 입을 빌려 발설하는 것에서 이미 역설적 표현인 것으로 악이 아니라 선의 행위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질드레의 변태적 쾌락의 추구와 수많은 아이들의 살해 행위라는 악덕이 궁극적으로 자신 또한 화형이라는 속죄의 불을 통해 잔이 있는 세계, 이승의 삶이 아닌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구원을 향한 여정이라는 지독한 역설, 양성적 전위를 낳는다는 데서 거듭 확인된다. 

이것은 사탄은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어린 이삭을 자신에게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와 같은 발칙한 신성모독의 발언처럼, 선과 악의 심오한 유사성을 제기함으로서 오늘의 우리세계가 이와 같은 정신착란의 시대이며, 의식적 삶과 통합되지 않은 인간의 동물성만이 활개 치는 야만적이고 본능적이며 물신숭배에 몰입하고 있는 마성을 지적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물론 이처럼 명료하기 짝이 없는 어설픈 작품만은 아니다. 인간에게 깊이를 제공하는 죽음, 그 어둠 속에 뛰어들어 어둠에서 빛을 찾으려는 용감한 시도이며, 생명과 죽음이라는 근본적 모호성, 무의식의 중핵인 자기에로의 접근로를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이기도 하다. ‘루앙의 마녀’였던 잔다르크는 오늘날‘성녀 잔다르크’로 불린다. 그러나 질드레 백작은 성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불문(火口)으로 뛰어든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일까? 과연 인간 삶의 정도란 어떤 것일까? 투르니에를 읽으면 번번이 내 본성을 구성하는 것들에는 어떤 이상 징후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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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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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20세기 근대사는 모멸(侮蔑)의 역사다. 인접국에 침탈당하고,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산업화의 명분하에 독재와 민중의 고통스런 희생이 강요되었고, 권력에 눈먼 군부에 의해 민간인의 무참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시기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국가경제의 붕괴로 국제긴급구호자금까지 굴욕적으로 빌려 써야하는 참담함과 민중의 또 한 번의 허리띠 졸라매기라는 고통을 통해서야 가까스로 오욕(汚辱)의 20세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74년 발표되었던 중편을 21세기 초인 2011년 전면 개작하여 발표하는 작가의 의지는 이 모멸과 오욕에 수반되었던 정리되지 못한 찌꺼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은폐하고 오히려 기득세력이 되어 한국사회를 유린하는 인간들에 대한 상기와, 그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아픔이란 것은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까마득한 망각으로 접어두고 다시금 오욕의 길로 달려가는 이 사회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한편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80~90세의 고령자가 된 20세기를 온통 겪어온 우리의 부모세대들에 대한 연민과 그 아픔의 이해에 대한 요청일 것이다. 역사는 결코 단절된 적이 없다. 오늘의 우리와 우리 사회는 역사의 진실들을 자주 잊곤 한다. 가해자가 권력을 가지면 그 사악한 가해의 진실을 숨기고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들의 앞에는 그러한 자들이 활개치고 뻔뻔스럽게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여전히 민중을 기만하고 있다. 동족을 괴롭힌 가장 파렴치한 인간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21세기에 이른 것이다.

소설은 이 오욕의 층위들 모두를 자신의 몸에 그대로 새긴 한 여인을 통해 우리 민중들의 고통과 한(恨)을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는 황국신민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침탈자인 일본인들과 민족을 배신하고 그들의 주구가 되어 동족을 궁지에 몰아넣던 앞잡이들로부터 육신과 정신의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해방의 시기에는 미군정(美 軍政)치하에서 물질과 영혼의 혼란을 겪으며,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만들어낸 폭력을 그대로 뒤집어써야 했다.
아리따운 열일곱 처녀, ‘점례’, 20세기를 이 땅에서 그야말로 버텨냈다고 말 할 밖에 없는 그녀의 일생을 좇는 일은 차마 못할 짓이다. 우리의 20세기가 그랬다는 얘기다.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럽고, 그러나 어디 하소연 할 곳 없었던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인 대다수 민중의 삶이란 것이 오직 상처의 수용자로서만 존재하였다는 말이다.

왜(倭)인의 겁탈에 저항했다하여 모진 고문과 죽음에 내몰리고,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착취당하여 가진 것 없는 민중이, 더구나 어린 여성으로서 이런 궁지를 모면하는 길이란 그 선택의 여지가 극도로 협소해진다. 겁박과 죽음에 몰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일본인 주재소장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원수의 자식을 낳는다. 그리고 맞이한 해방은 그녀에게 외세에 의한 치욕스런 노리개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외려 희생자를 왜놈의 처자로 몰아대고 모욕을 주는 구속과 억압의 연장일 뿐이다.
과거의 흠 아닌 흠을 숨기고 결혼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빼앗기기만 했던 민중의 삶다운 삶을 희망했던 남편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난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이 땅의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남편의 신분은 그녀의 삶을 다시금 파괴 하는데, 권력자들의 탐욕을 이념의 대립이란 것으로 덧씌운 파렴치는 공산주의자의 아내였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의 대상이 된다.

보잘것없는 권력까지도 약자의 가녀림과 무지를 이용한다. 상황의 불리는 여성을 쉽게 소유하는 방편이 되고, 점예는 다시금 미군의 아낙네가 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양갈보, 우린 우리의 형제와 자매의 고통을 지나치게 쉽사리 매도하고, 자신들의 무능과 무기력을 권력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회피하려한다. 식민지약탈자의 노리개로서 출산한 아들,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나버린 남편으로부터 얻은 딸, 미군의 쾌락도구로서 낳은 아들, 이 세 명의 자식은 그녀, 아니 우리들이 겪어야 했던 이 땅의 고통과 모멸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린 이 역사의 상처, 흔적, 의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큰 아들‘태순’이 셋째인‘동익’을 향해 내뱉는 빈정거림과 모욕은 그대로 우리와 우리사회의 초상이다. 식민지의 치유되지 않은 태순이란 흔적이 동익이란 서구사대주의를 비난하는 이 아이러니, 또한 혼혈아인 동익의 냉대받는 인간 파편이라는 자기역사의 부정, 어머니 점예와 가족의 부정은 우리의 지배적 의식에 내재하고 있는 몰상식과 몰염치, 은닉된 자기비하의 콤플렉스인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 악을 치유하지 않는 사회, 타인의 탓만을 하는 사회,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안으로 계속해서 곪아가다 끝내는 자멸할 것이다. 20세기를 과거사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에도 그 욕된 역사는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노 작가가 펜을 다시 들어 37년 전의 작품을 오늘에 다시 쓴 이유는 그래서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하다. 이처럼 국민적 기억의 망각을 다시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역사적 이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기억하자, 외면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이라도 청산하자.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덜 고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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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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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념을 구성하게 한 것들은 가정과 학교교육, 사회가 쏟아내는 말들과 이미지들, 제도, 법, 담론 등 조직과 체제가 조성하는 보이지 않는 틀, 의식적, 무의적으로 체득된 경험과 지식들의 융합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것들의 실체를 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신념을 어떤 방향이나 궤도로 수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건대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공간적 경계가 없는 초월의 어떤 곳,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무인도 같은 그런 곳이라면 대체 나를 이루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날 것 같기만 하다. 오직 대자연과 나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내 몸과 정신의 관습을 만들어낸 것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이용되는지를 보게 된다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냉엄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와 ‘무인도’를 다시금 배경으로 삼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만 같다. 기독교관에 세뇌되어있으며, 근대문명과 화폐자본주의에 적응된 인간의 습속이란 것의 정체란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절대적 공간으로 제격이라는 얘기다. 나를 포획하고 있는 근대화(modernity)를 규정짓는 요소들이란 지속적이고 급속하게 흐르는 시간을 강박적으로 인식하며, 현재보다는 가능성이라는 미래의 삶을 위해 부단히 부를 축적하고, 각종의 규율장치들을 통해 규격화된 삶을 재단하며, 모든 타인과 물질을 욕망의 대상화 시키는 것들이라 정리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특징짓는 이러한 것들이 과연 나와 우리들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를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깨어난 곳, 무인도를 로빈슨은 ‘탄식의 섬’이라고 명명하듯 그를 길들였던 현대문명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박탈감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식은 꽤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한한 자유와 자연이 펼쳐져 있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평양의 외딴섬에 인간이란 나 혼자란 자각을 한 로빈슨이 착수한 일이란 난파된 선박(버지니아호)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섬의 동굴 속으로 옮겨 저장하는 것이고, 동물들을 잡아 우리에 가두며, 대지를 경작하고 수확하여 미래라는 걸 위해 쌓아두는 행위이다. 즉,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겠다는 의지이며, 현대라는 문명의 습관을 이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성서와 기독교제단을 설치하고, 물시계를 만들며, 자기 한 사람을 위한 섬의 통치체제인 법률을 제정, 선포하는 일련의 통제적 장치들을 설정하는 모습은 희화(戱畵)적이기까지 하다. 무릇 섬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것인데, 문명인이란 것이 이처럼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한편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결정적인 분기점이자 차이랄 수 있는데, 원주민‘방드르디’의 출현이다. 현대적이지 못하기에 야만인일 수밖에 없는 방드르디를 대척점에 두는 현대인 로빈슨이 만들어내는 긴장관계 때문이다. 성서를 읽고 설교하는 로빈슨의 낯설고 기이한 행동에 웃어 재끼는 방드르디에 대한 로빈슨의 분노, 이 야만인을 길들이기 위한 법률과 화폐거래 제도를 통한 훈련은 그 진지함만큼이나 우습다.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반복적 노동을 부여하곤 버지니아 호에서 노획한 금화를 댓가로 주고는 방드르디가 요구하는 물건이나 반일의 휴식을 구매하도록 하는 것인데, 돈에 대한 이러한 종교적 답습은 그의 청교도적 신앙과 결합하여 현대를 포획한 자본주의의 체험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반일의 휴식을 선택하곤 빈둥거리는 방드르디의 늘쩍지근한 게으름에서 이미 로빈슨의 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시간관, 합리주의 지성이라는 미덕, 거래수단으로서의 화폐제도, 각종 법적 제도장치들, 수확물의 축적과 같은 이식은 섬 스페란차에서 무익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로빈슨의 이러한 행위는 근대적 인간관, 문명에 대한 맹신이랄 수 있는데, 이 진보와 야만이라는 기만적 도식관계가 그야말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는 것이, 이 둘의 관계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로빈슨 내면의 갈등은 야만인 방드르디에 대한 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 부정적 관점은 불가피하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어떤 당위를 보이기 시작한다. 무인도 스페란차의 대지에 대한 여성화이고 대자연과 합일화되는 초월적 느낌과 성적 구분의 무위에 대한 비인간화의 깨달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극적인 전환은 동굴에 쌓아둔 화약의 폭발로 인한 문명의 시간과의 결별, 시간 인식의 소멸이다. 더 이상 근대적 시간이 머물지 않는 섬은 그의 신념을 이루고 있던, 그를 장악하고 있던 근대의 찌꺼기들의 위선이다. 방드르디에게서 발견하는 분명하고도 과격한 아름다움, 자연스럽고도 상쾌한 우아함은 로빈슨의 독실한 청교도였던 시절의 번쩍하는 초월의 그 어떤 교감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을 그 어떤 하나의 주제나 관념적 이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사회, 즉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 맥락을 핵으로 하고 있지만, 문장들마다에서 숨 쉬고 있는 철학적 단상들은 인간 본연에 대한 무수한 사색을 말하고 있음에서이다. 또한 금요일, 비너스를 상징하는 방드르디와 같은 다의적 어휘들로 인하여 가히 신화적 상상력이란 의미의 풍성함을 더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니체를 느끼게 되며, 또 어디에서는 루소를, 짐멜을, 보들레르를 보는듯 철학의 대 향연과 같은 도취감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들에 감히 눈길을 고정하기 시작하면 발견하게 되는 그 웅숭깊은 사유와 통찰에 그저 넋을 잃고 마는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가히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오늘의 나와 우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인간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존귀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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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앙투안 콩파뇽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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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회학적 비평이기에는 논의의 범주가 지극히 협소하다. 산업자본주의의 유의어로서의 모더니티를 총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지만, 예술사적 범주에 국한하면, 특히 모더니티가 지닌 한계 - 근대적 시간관, 물신주의 및 소비주의, 인간의 소외 등 - 를 극복하기 위한 사조들의 또 다른 한계성을 갈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특수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 자국 및 서구중심주의의 기술이며, 일부 문학이나 건축, 음악분야를 거론하기는 하지만 미술사에 편중되어있어 보편성으로 확대하여 이해하기에는 그 결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티에 이르면 극단적으로 프랑스적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어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혼란스러움을 조장하여 그 의미를 애써 초기 모더니즘이나 전위주의에 휘감기게 하여 퇴행적 의지로까지 읽힌다.

저자의 시선을 대변하는 서문을 보면‘현대적 전통’이라는‘현대’와‘전통’이 결합한 괴이한 이 언어가 내재하고 있는 모순어법을 통해 모더니티라는 새로움의 시작이 곧 과거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이 현대라는 언어가 지닌 과거와의 단절을 통찰하고, 그래서 그 단절 자체가 전통을 구성해버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관점은 19세기 보들레르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모더니티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자각과 변화를 도모했는지를 관찰하는데 핵심적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 하겠다.

보들레르와 마네가 활동하는 19세기는 새로운 시간관의 인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속도가 만들어낸 미래성과 미결성, 파편성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맥락의 파악은 진부하기조차 한 분석이지만, 1800년대 중반의 예술이 모더니스트틀이 모던에 대해 어떤 비판적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비교적 심층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한 예로써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식사」나 「올랭피아」가 역사성을 관심 밖으로 한 것이나 그림의 의미를 그림 자체 안에서만, 즉 표면에 머물도록 의도하였음을 통해 전통적 아카데미즘의 조롱과 시간성을 무시간대로 몰아넣은 일종의 반항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나름 의미를 지니는 독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전위주의(아방가르드), 추상파와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비평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동어 반복적으로 거듭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들의 현실에 대한 반발로서 탈현실화를 외치며 나선 전위주의자들의 공허한 초월, 침묵, 비개인화, 나아가 산업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예술과 시장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해독하지만 이 역시‘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인식의 갈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새로움이란 시간관에 대한 갈등, 내면의 시간과 외면의 시간을 타협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추상화의 대두로 이어지고, 다분히 실험적이고 지금에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브루통과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조건적인 현실세계에 대한 위반의 가치에서 이상한 것에 대한 숭배라는 미학적 모순, 그리고 그 대표주자인 마그리트가 빠진 상투성과 소비사회의 상표처럼 전락하는 운명에서 그 한계를 폭로하기도 한다.

한편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이전된 세계대전 전후시기에 시장의 전폭적 지원 하에 태어난 잭슨 폴록으로 대변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이미지의 거부, 즉석 실행의 창조행위, 배경과 형상의 구분을 없애는 기획과 바로 그러함으로서 대형 캔버스에 서서 물감을 흘려대는 육체성에서 외부적 관습의 배제라는 의도를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엘리트 예술과 대중예술의 일대 교란, 상호 위치 바꿈으로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팝아트의 형식을 낳는다. 이것은 예술성의 파괴를 통해 제도와 시장으로 환원되어버린 예술을 부정하겠다고 나선 라우선버그와 같은 팝아티스트가 소비사회에 의존하는 경향이 되고 마는 역설로 이어지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비판적 예술사조의 발생을 탐사하는 시선에는 어쩔 수 없는 산업자본과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그 내재적 한계를 들추어내는 사례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난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훌륭한 통찰력을 발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획기적이거나 단절적인 대전환의 방법론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더니티가 발생시킨 인간의 파편화와 소외, 물신지상주의가 가져온 폭력적 폐해를 최소한 점진적으로나마 축소시키고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틈새나 지향점을 발견해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낳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저자는 소비사회의 물신화에 포섭된 단절의 전통에 실망한 예술, 즉 모던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포스트모던이란 용어가 모더니티와 단절인지, 연속인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혼돈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모던과 결별하겠다는 의미라면 이처럼 모순이 어디있는가고 묻는다. 즉 단절이라는 현대(모던)의 특징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구별하려는 것처럼 역설이 어디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이 혁신의 논리, 이미 새로움을 표상하는 의미이기에 모던의 반복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버릴 수 없기도 하다. 어찌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만 하다. 포스트모던을 지향한 건축물들은 절충주의로 나타났고, 단절의 단절을 통합한다는 우스꽝스런 말처럼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없는 모순이 드러남을 알아차리게 된다.  

 

단절을 의미하는 모던을 단절한다면 그것은 바로 모던의 극치 아니냐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퇴행, 복고를 의미한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하버마스, 리요타르, , 잔니 바티모등을 인용하면서 포스트모던에 대한 대립된 이론들을 소개하지만, 저자는 보들레르로 회귀한다. 그리고 현대적 환상의 특징이 사상과 예술 사이의 시차라고 말하면서 이 연속적인 사조들의 궁지(窮地)를 인식하는 역사적 의식과 진보의 교리의 존재를 인정할 도리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패러독스를 외친다. 결국 모더니티의 초기, 19세기 보들레르가 “자유와 숙명이라는 두 개의 모순된 개념이 결국 동일하다는” 신념에 만족해야만 한다는 것인지?  하나의 담론으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결론이 지극히 취약하고 산만하다는 단점은 못내 아쉽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서 예술 사조들의 다양한 변주의 모습을 파악한 예술비평론으로서는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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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가득한 심장
알렉스 로비라 셀마.프란세스 미라예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비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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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은 영원의 상징이다.
시간의 모든 의미를 쓸어버리고
시작의 모든 기억과
끝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파괴한다.         - 마담 스탈

경주하듯 달려야만 하는 일상은 내가 속한 이 사회가 잃어버릴 것을 강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게 한다. 타인을 향해 진지한 마음, 관심을 보낸다는 것은 어느덧 사치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고, 감성 속에서조차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무심하고 냉담한 얼굴을 하고, 경계하며, 대기의 작은 동요에도 화를 내는 성마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누군가를 위해, 모든 생명과 대자연에 사랑 가득한 그윽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태초의 숭고한 감성들을 기억내기 어려운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랑을 얘기하면 이상한 표정을 짓게 된다. 낯설고 기이한 얼굴...,다름 아닌 내 얼굴인지도...

그래서 내 손에 쥐어진 동화 같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정말 뜻밖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저 뒤편으로 사라져 잊고 있던 것, 진정 소중한 것인 사랑하는 법, 삶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이 수용된 고아원, 세상에 대한 기대가 없는 아이들만큼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도 없을 것이다. ‘미셸’의 의지이자 사랑인 소녀‘에리’, 그러나 에리는 어둠의 심연, 코마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이 상황은 소년 미셸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두려움이 된다.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는 방기의 상태, 그녀의 생명, 심장의 박동은 꺼져 들어가고 있다.

실의에 잠긴 소년에게 다가온 구원의 빛은 열흘 내에 사랑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별을 가져올 것을 주문한다. 내가 상실한 믿음과 순수성으로는 착수조차 할 수 없는 일일게다. 커다란 잿빛 외투에 작은 몸이 감추어진 소년,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의 옷에서 별을 오려내고,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알프스의 소도시‘슬롱스빌’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이 행위로 흉흉해지기만 한다. 가위를 든 소년, 사랑의 별을 제한된 기간 내에 모으기 위해서는, 언제 멈출지 모르고 약해지기만 하는 에리의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라도 각기 다른 사랑의 별을 모아야 한다. 아홉 개 씩이나 다른 사랑이 있다니, 난 그 사랑의 유형을 상상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낭만적 사랑, 오래 지속되는 사랑,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우정, 동물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책과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이들 사랑을 온화하게 발산하는 사람들을 오늘의 우리세계에서, 내가 사는 도시에서 구별하고 찾아낼 수 있을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생텍쥐베리’의 말은 자기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백마 탄 왕자, 아름다운 공주는 우리 내면에 살고 있을 뿐인데, 우린 환영을 만들어내고 터무니없는 물질에 정신을 희생시키곤 불행해한다. 맹인과 추녀의 낭만적 사랑에서 허영과 표피에 현혹을 부추기는 몽매한 우리 사회의 온갖 소음들이 더없이 수치스러워진다. 사랑의 별을 오리기 위해 찾아가는 사랑의 형태들에서 이 처럼 사랑의 고귀한 가치들과 숭고함을 목격하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불속에 나무를 집어넣는 것”,  그래서 불길을 살리기 위해서 장작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남자는 그저 사랑이 변했다고 말하는 편의성과 단순성의 오늘의 우리들이 망각한 것을 깨우치게 한다. 하나의 편지지 안에도 시간, 공간, 땅, 비, 구름, 태양, 만물, 우리의 모든 정신,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의 인식, 피보다 강하게 연결되는 우정이란 관계 등의 일화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깊은 감동을 뿜어낸다.

그러나 모두 모아진 아홉 개의 별, 이것들로 만들어진 심장, 이것만으로 멈추어가는 에리의 생명을 되살릴 수 있을까? 우리의 너무 인색한 사랑한다는 행동과 표현, “사랑해, 에리”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그 간절함의 순간 심장이 멈추어졌던 소녀는 새로운 삶의 생기를 되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별 사냥꾼이 된 소년, 미셸이 보여주는, 그리고 그가 실행하는 사랑의 여정 모두가 그렇게 안온하고 아름다운 기운에 휩싸이게 할 수가 없다. 기적 같은 일화에는 늘 사랑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나와 우리들 모두가 이 사랑의 어느 한 쪽만이라도 회복하고 품으려고 노력한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어떤 심오한 사회이론과 사상적 세뇌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아홉 개의 사랑 이야기, 이 사랑 이야기를 전했던 걸출한 명인들의 경구와 싯구, 명언들이 또 하나의 장으로 수록되어 사랑 복음서를 더욱 완성도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잃어버렸던 내 한 쪽의 기억들, 감성들이 되 살아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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