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아저씨 제르맹
마리 사빈 로제 지음, 이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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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난 이 아름다운 작품을 읽으면서 한 젊은 여성을 부정적으로 떠 올렸다. 영어학원 강사로 소위 성공이란 걸 하였다고 자부심 가득한 성공담까지 책으로 펴내면서‘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반추하는 인간은 실패자’라는 얘기를 그 말에 담긴 불행과 어리석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뱉어내는 무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무언가의 “답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의 불쌍함인데, 그럼으로써 비로소 삶이 지니는 귀중한 가치에 조금씩이나마 가까이가게 된다는 진리를 손톱만큼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기 삶에 대해 의문을 하는 것이 생을 얼마나 고귀하고 풍요로우며 아름답게 하는지, 그리고 고요함과 평온함,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대자연의 숭고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게 되면 너무나 안타깝지 않을까?

‘제르맹 샤즈’라는 마흔 다섯 살 남자는 그야말로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면 달려간다는 그 자체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무슨 생각이 필요하며,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차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차는 기름만 넣으면 움직인다. 인생을 이런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어떠한 앎도, 질문도, 반추도 필요치 않다는, 단지 재화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꼭대기로 위만 바라보고 치달으면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쾌락을 획득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는 사람들,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여자와 자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좁쌀만 한 지식으로 아는 채를 하며 타인을 업신여기는 것, 도움이 필요한 애들만 골라서 기막히게 모욕을 주는 이상한 이 땅의 교육 현장 같은 것,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과 주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는 것, 산다는 것과 삶을 이해한다는 것 사이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제르맹이다. 아니 제르맹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일 것이다.

아비의 사랑도, 어미의 사랑이란 것도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 상소리와 음란한 우스개로 술자리를 채우는 그런 사람, 하물며 책을 읽는다는 것,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볼 수 없는 그런 사람, 그를 주변의 친구들은 바보, 어머니는 골칫덩이라 부른다. 그런 그의 일상이란 가끔씩 있는 잡일로 버는 몇 푼의 돈으로 선술집을 오가고, 엄마 집 마당 한 구석에 세워둔 카라반에서 살며, 그리고 공원에 앉아 비둘기를 무심하게 세는 것이 전부이다. 그의 삶에는 어떤 불편도 없다. 그러나 그를 바보라 생각하는 인간들,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인간들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잘났기에 인간을 구별 하는 것일까? 제르맹의 말은 두서도 없고 그래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아 선술집 동료들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저 공허한 울림일 뿐. 그렇다면 주변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무수한 말들은 과연 뜻있는 말들일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은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공원의 비둘기를 세다 우연히 마주한 여든여섯 살의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결코 이런 노인에게 관심이나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제르맹이 아니지만, 할머니 마르게리트와 우연히 비둘기를 같이 세게 된다. 각자 어떻게 세어볼까요? 하는 마르게리트의 제안에“각자 머릿속으로 세어보죠”라는 제르맹을 과학적인 기지가 있다고 칭찬한다. 그 칭찬의 말은 순수한 격려와 진실한 마음의 표현 이상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것은 두 사람 우정의 시작이 된다. 한 사람을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으로 꺼내는 순간이 되는 것이며, 공원에서 만난 낯선 노인에게 저항 할 수 없는 호감과 그녀의 젠체하지 않는 지적 세계의 덫, 심상치 않은 인생의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접어들게 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일상의 얘기 끝에 마르게리트는 소설의 한 구절을 읽어줘도 될지 조심스럽게 제르맹에게 묻는다. 이를 시작으로 ‘카뮈’의 『페스트』, ‘로맹가리’의 『새벽의 약속』,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쥘 쉬베르비엘’의 『난바다의 아이』가 공원의 벤치에 하얗게 샌 머리를 한 할머니와 거구의 장년남자가 나란히 앉아 읽는 장면은 지극히 아름다운 장면으로 마음에 들어오고,  제르맹의 순박함과 무지에 대한 어떤 내색도 없이 순백색의 사랑, 앎에 대한 빛의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은 그 어떤 고결한 감동으로 스며든다. 급기야 제르맹은 “생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마 그것은 엄청난 혼란과 당혹감, 그리고 앎이 지니는 환희가 뒤섞인 그런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페스트의 쥐들과 그 생생한 삶의 묘사들, 로맹가리가 말하는“삶은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보면서 인간 의식의 동질감과 사유와 삶의 무한한 영역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지식의 우물”같은 존재, 자신의 삶에 “근원과 샘물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깨우치게 하여준 사람, “삶에 대한 허기”를 비로소 알게 해준 사람에게도 불행은 피해가지 않는다. 노화에 따른 망막 퇴화증으로 더 이상 책을 읽어 줄 수 없다는 마르게리트을 위해 제르맹이 처음으로 용기라는 걸 내어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읽기 훈련을 통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데 이르면, 제르맹의 독백인 “책 읽기가 그리워지는 상황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내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오다니...”처럼 누군가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이 어떻게 주어야 하는 것인지, 독서와 앎이란 것은 또 어떻게 쌓아나가는 것인지, 그리고 안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사랑을 나누는 것,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갑자기 연약한 존재가”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과일 잼처럼 달콤한 감동이 되어 잔잔하게 밀려들어 옴을 느끼게 된다.

어눌한 말(語) 같지만 단어와 어휘에 대한 고지식하리만큼 꼼꼼한 정의를 다지는 주인공에게서 말이 지니는 그 진중한 선택의 중요성과 인간을 고립시키는 오만한 지식이 아니라 진짜 지식이란 무엇인지, 책 읽기의 즐거움과 그 세계에 대해서, 그래서 삶의 이해가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며, 생명과 지속성, 존중과 그 무한한 행복을 의미하는 사랑을 나누는 것의 고귀함까지 깨우치게 한다. 해학과 재치 넘치는 문장들, 어수룩한 가운데 톡톡 튀는 풍자와 총명함이 청결한 지식과 감동을 가지고 읽는 내내 즐거운 마음을 떠나지 않게 하는 기분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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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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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결되지 않은 수학의 난제 중 난제,  1과 그 자신으로만 나누어떨어지는 소수의 패턴 함수인 일명 제타함수 “ζ(s)는 s=x+iy에 대해서 생각할 때 x>1/2로 0은 없다.” 라는‘리만 가설’은 신비로움, 경이로움과 어떤 미지세계로 들어가는 은밀한 암호코드 같기만 하다.  리만의 이 가설은 물질세계의 정확한 묘사 도구임이 판명되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하는 직접적 영향이 되기도 하였으니 150년 전의 천재 수학자의 직관력은 마치 신의 영역에 도달한, 아니 우주의 경계를 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상상까지 하게 한다.

리만가설은‘소수’의 일정한 성질을 파악하려는 것이고, 이를 설명하려다보면‘복소수’, 실수 사이에 숨어있지만 존재하는 수가 아닌 '허수i'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너무 추상적인 수가 되어 우리들이 직관하기에는 어려움을 겪는 수이다보니, 현실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이 개념에 대해 무심할 밖에 없기도 하다. 아마 이 소설의 매력은 언뜻 이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용이하지 않은 세계의 비밀스런 그 무엇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왠지 우리의 원초적인 그 무엇, 삶에 본질적으로 숨어있는 어떤 것에 대한 비밀 같은 것, 그런 것 말이다.

소설의 구조 또한 은밀하기 짝이 없다. 실종된 수학교수의 컴퓨터 파일에 기록된 내밀한 일기와 작업일지를 훔쳐보는 것 같은 구성이다. 내용 또한 일탈의 열정과 환상, 관능적 향기가 배어있어 그 은밀함을 증폭시키다보니 자못 냉철한 이성만을 요구하는 건조하고 지루한 수학과 수학자의 자취를 좆는 이야기를 저항 없이 따라가게 된다. 비범하기를 희망했지만 어느덧 마흔 세 살의 중년이 된 평범한 수학교수는 자기 성취와 인생의 확신 과정으로서 19세기 독일의 천재 수학자, ‘리만’에 대한 평전 집필에 착수한다. 그러나 인문학적 글쓰기에 서툰 그는 작문수업에 참가하고, 남아있는 기록과 자료가 별반 없는 온통 비밀에 싸인 고독했던 리만의 삶과 수학적 성과를 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고뇌는 단순히‘리만 평전’을 잘 써내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절대적인 추상적인 수인 음수 -1 은 같은 음수인 -1을 곱하면 미지의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에 그 실체인 실수 1을 드러낸다. 그러나 허수i는 결코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 수학교수는 이 미지(未知)의 세계에 동화되고 어쩌면 함몰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허수의 세계로. 그래서 현실의 세계와 저 알지 못하는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그 복소수의 세계, 일탈된 심연의 그 어느 세계를 유영하는 것이다. 작문수업에서 알게 된 여인‘잉빌드’는 이러한 그의 삶과 평전작업에 완벽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20년을 함께한 아내와 나눌 수 없었던 자신의 내면에 담긴 목소리를 단 한차례의 만남에서 들려줄 수 있었고 또한 귀담아 들어주며 스스럼없이 자기 의견을 건네는 여인에게 편안함과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으로 커가고 두 사람은 더욱 농밀(濃密)한 관계로 공고해지는데, 소위 “제곱해서 -1이 되는 허근i 처럼, 양과 음으로 형성된 우리의 인식 가능한 시스템의 경계를 벗어난 불안한 영혼”이란 개념과 어울리면서 잉빌드와의 관계는 과연 현실이며 현실세계의 실체적 상황인지에 대해 의문이 피어나기도 한다.

중년의 지극히 평범한 가장,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 곧 성년이 될 아이, 그리고 작은 몸짓만으로도 상대의 상태를 알게 되는 그런 아내를 둔 남자, 사회적으로는 어떤 성취의 결과를 수확하고 짐짓 안정되고 존경받는 명예를 향해 이동해야 하는 그런 나이여야 한다는 현대사회의 압박감은 이 수학교수를 결코 피해가지 않은 것이다. 그 심리적 동요와 번민들, 공허함과 뒤에 따르는 불안함은 가난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린 괴팅겐의 천재 수학자 리만의 고독한 인생과 겹쳐 시간적, 공간적 인식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을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자기 힘으로 나누어야 하는 가엾은 수, 소수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복소수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위험하고도 불길한 존재로서의 죽음, 저 피안의 세계도 보았을 것이다. 아니 수학을 제외하고는 그 풍경을 묘사하지 못하는 4차원 세계, 그 휘어진 공간, 이도 아니면 잉빌드와 헤어진 역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자신들의 또다른 형상, 즉 평행 우주의 세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 소설은 중년의 현실적 번민과 고통이라는 심리적 갈등을 통해 그 안에 잠재하고 있는 욕망과 일탈의 다양한 모습들을 조명하는가하면,‘베른하르트 리만’이란 천재 수학자의 삶의 기록을 기반으로 그의 수학자로서의 성장에 영향을 끼친 가우스,  베버, 디리클레 같은 대 수학자들과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리만의 가설을 담고 있는 당시에는 관심을 모으지 못했던 <주어진 수보다 작은 소수의 개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 얽힌 사연등 마치 평전의 듬성듬성한 초록을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두 가지 맛을 전해준다. “환상은 미지의 크기에서 오는 것”이라는 이 다의(多義)적 구절처럼 수학적 성취를 향해 내 달렸던 한 천재수학자의 그것이 제시한 가설의 세상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갈망은 어쩜 환상, 이성이 도달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수학교수가 그의 작업파일에 기록하였듯이 “내 생각, 양심, 그리고 모든 죄가 흘러내렸다.”고 되뇔 만큼 설혹 그에게는 믿음에 반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죄악일지언정 복소수의 세계, 차원이 다른 세계의 허구, 상상의 세계가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절반에 이른 자의 자기 삶의 증명을 위한 아주 도발적이고 지적인 도전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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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로부터의 자유 - 행복과 성공을 부르는 공간 창조법
브룩스 팔머 지음, 허수진 옮김 / 초록물고기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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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집안의 여기저기에 처박힌 그야말로 잡동사니, 아니 쓰레기 같은 것들을 치우는데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보자는 지극히 단순한 의도로 집어든 책이다. 그러나 이게 그리 단순한 잡동사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당혹스러움에 직면하게 된다. 잡동사니는 우리의 내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모습이 외부에 표출된 모습, 행동양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당돌한 주장에 다소의 저항감을 가지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방어심리를 가지고 읽어나갔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무슨 필요한 물건 좀 소유하고 있기로서니, 그리고 거의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사는 나 같은 부류에게는 결코 소용에 닿는 말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말이다.

물론 오늘의 물질사회가 지니는 속성, 그 영역에서 생존하는 존재이기에 물질의 소유에 전혀 무감하다거나 완전한 무소유를 지향하는 성자가 아닌 한 물질의 적정한 소유와 필요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질 그 자체의 소유에 혈안이 된, 또한 물질을 팔아대기 위해 무진장 쏟아내는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광고의 환상과 거짓에 기만당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종 물건들을 도처에 쌓아둬서 사용치 않고“쓰레기 사탑, 무용지물 타워, 엉망진창 신전, 뒤죽박죽 언덕을” 만들고 있거나 틈틈이 창고나 이 방 저 방에 처박아 둔 것도 아니니 나는 잡동사니와의 전쟁을 선포할 수준과는 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 방어체계가 읽어 나갈수록 허물어진다. 내 마음 속 진정한 것을 들여다보게 하는데,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어떤 내면적 잡동사니가 혹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이 지금 책상서랍, 기타 수납공간, 아니 책장, 장롱, 창고, 차 트렁크 등에서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그것들이 집안 곳곳, 방에서 거실에서 서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빈 공간을 잠식하는데도 내 잠재된 의식의 어느 곳에서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방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저작은 물질의 소유를 지향하는 현대 자본주의적 행동양식의 통념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지, 그래서 사람들을 피폐한 물질주의 환경에 희생시키고 있는지를, 그래서 그 물질들의 더미에 싸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인생의 의미를 오직 물질 축적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헛되고 일시적일 밖에 없는 그 한시적 마취상태, 불행의 악순환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건이 행복과 안정의 보증수표나 되는 양” 온통 물질에 취해있고 사방에서 경제, 정치, 문화적 논리를 들이대면서 부추긴다. 그런데 정작 그 물건들이 우리들의 인생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주기는 하는 것일까? 타인의 시선이 만든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고작 과시하려하지만 자기 인생에 바쁜 인간들이 남의 과시에 눈 돌릴 틈은 없다. 그리고 그 물건의 소유가 과연 행복을 지속시켜 주는가하면 손에 넣는 순간, 아니 집에 들여놓는 순간 진부해지고 매력을 상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에 처박아둔다. 다시금 공허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행복이라는 감정에 보상을 하기 위해 물질을 손에 넣지만 이 역시 해결되지 않는 욕망의 허기짐에 대한 확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비싼 값을 치러서, 고급 브랜드라서, 소유 그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서, 추억과 사연, 체취가 묻어있는 것이라서, 이 정체모를 욕망의 기운 탓에 처분을 겁낸다. 더구나 아무리“하찮은 것이라도 소유 자체가 의미 있다”고, 그것이 미덕이라고 터무니없는 환상을 배워왔으니 사실 개인의 의식을 탓할 것도 못 된다. 그렇다고 계속 쌓아두고 처박아서 방치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잡동사니가 되고 만 것들을 처분하여야만 하는 것일까? 처분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일까? 버린다는 참 의미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어떤 뜻이 내재하는 것일까?
혹, 그 잡동사니에는 무언가 감추고 싶은 두렵고 나약한 감정이 내밀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내 현재와 미래를 막아서는 어떤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내면을 허약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뿌리들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그 마음의 잡동사니들, 강박관념, 혼동, 분열, 서툰 언어, 불면증, 우유부단, 방향상실,,.이러한 것들. 바로 가혹한 목표치, 타인으로부터 배워 모방한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가치의 충족, 부정적인 언어들, 미래에 대한 불확실과 그 근심과 걱정들이 물 위에 떠 있는 부표처럼 계속해서 누르고 있어야 집어넣을 수 있는 그 엄청난 힘을 요구하듯이 끊임없이 물건의 형태로 탈출하게 하고 우리의 관심을 일시적으로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것 아닐까? 이것이 내면의 본질적 감정을 회피하고 진정의 가치를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일 게다. 인생에 조건을 다는 이러한 가치들이 잡동사니일 뿐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결코 미래에, 이상에, 남의 시선에 묶여 현재를 만끽하지 못하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스스로를 위장하는 물건에 집착한다.  

결국 치워버려야 할 잡동사니들, 진정 내 눈길을 애원하며, 주목을 끄는 물건이 아닌 것들, 지금의 내 인생에 결코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 아닌 것들은 잡동사니이다. 즉, “회피하고 싶은 내면적 감정이나 가치에서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며, 표면적 생활공간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잡동사니이니, 우리의 내면을 옥죄며, 인생에 장애를 걸쳐놓는 이것들을 치워버려야 하는 당위성은 정말 중대한 것이 된다. 그러니 깔끔하게 정리된 내 책상과 서재와 방과 창고가 잡동사니가 아닌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과거의 유물들이 내가 은폐하고 있는 내면임을 마주하게 되면서 이제라도 내던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치쌓인 책 더미들, 잠자고 있는 무수한 사진들, 사용하게 될 까닭이 없는 서류뭉치들, 옷가지들, 전자제품들... 이젠 치워야 할 것 같다. 그것들이 내게 무엇인지 알게 된 이상, 본질을 뒤덮고 있는 감정의 껍질을 벗겨내야 할 터이다. 더 이상 내게 벌을 줄 필요도, 고통에 담금질을 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물건은 내가 아니다. 결코 나 일 수 없는, 신성한 바로 나의 현존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지니는 의미를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그럼에도 사실 막상 수집한 내 소유의 물건들을 처분하려면, 물질의 집착을 버리려면 심리적 저항이 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막강한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을 느낀다. 그 실체를 진중하게 살펴보면 그 속에 해결되어야 할 내면의 잡동사니가 보인다. 그 내면의 잡동사니가 불러 모은 외면의 잡동사니는 한결 버리기 쉬워진다.
진정한 삶의 가치, 내면을 일깨워주는, 물질로부터, 소유로부터의 탈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는 고마운 저작이다. 내 마음의 잡동사니들이여 안녕, 물질들이여 안녕~ 소박하고 단순한 인생이 삶을 얼마나 명쾌하고 행복하게 해주는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꿔주는 지혜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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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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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셸 우엘벡’이 초지일관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이상향이 있다. 그는 새로운 경쟁과 그칠 줄 모르는 물욕이라고는 없는 새로운 인종, 신인류가 꾸려가는 평화와 자유가 넘치는 미래세계를 희구하는『소립자』같은 작품에 이르기도 했으니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오늘의 인간사회에 지닌 회의와 역겨움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역시 오늘의 서구물질사회가 안고 있는, 나아가 서구화를 맹목으로 지향하는 한국과 같은 사회가 받들고 있는 합리적 이성주의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의견, 취향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포함한 삶의 모든 방식들에 완벽한 표준화를 보장해준 돈에 대한 열정, 그래서 냉정해지고, 지나치게 개인의 존재와 권리에 집착하며,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 같은 것을 강요하고, 그에 열중하며, 마침내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한없이 비안간적이고 잔인해지는 오늘의 사회를, 그 치부들을 거침없이 조롱하고 비웃어댄다.

이런 연유에서 그의 소설은 오늘의 인간들이 위선 속에 은폐시킨 것들을 여과 없이 꺼내들고 마음껏 떠들어댄다. 인종에 대한 속내, 자신의 종교에 대한 편협성, 성적 취향 등까지 마구 쏟아낸다. 나 개인이 싫어하고 짜증나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인 것들을 왜 말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는 오늘의 권위적 담론이 덮고 있는 억압의 기만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누군가인 타자에게 강요하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는 냉정한 합리성이라는 척도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그래서 이를 거대한 규범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을 그 틀 안에 가두어두려는 사회의 암묵적 통념과 가치관, 윤리의식을 깨부수고자 하는 적극적인 저항 수단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소설 『플랫폼』에는 극사실적이고 과감한 성적묘사가 주제를 연결하는 문장이라 할 정도로 빈번하게 그러면서도 평범하게 이야기의 중심 틀을 구성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는 이들은 주인공인 문화부 공무원인 ‘미셸’, 그리고 여행사와 호텔 간부인 ‘발레리’인데, 두 사람의 감각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진정한 행복, 세상이 가야할 길을 상징함과 동시에 무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현대사회의 속성과 절묘하게 대비되는 요소로 이 작품에서 비켜나갈 수 없는 핵심장치이다.
살갗이 직접 부딪히는 섹슈얼리티, 그러나 점점 이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작용과 행동양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기도 하며, 인간의 즐거움, 행복을 위해서 남아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현대의 도시인들이 “이제 무엇이건 교환하고 싶은 욕망도 안 느끼고”, 또한 멘탈리티(mentality)에 맞지도 않게 된 것은 더 이상 타인을 즐겁게 해주는 것, 자신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나르시시즘, 개인성의 강화된 느낌에 침몰되어가는 자본주의 물질사회, 끝도 없이 멈추는 것은 곧 종말이라는 삭막한 형식에서 어쩔 수 없이 출현하는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제각기 유일한 자기만의 감각들에 흠뻑 빠져 자기 살갗 속에 갇혀”지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세상을 보는 오늘의 사람들의 방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타인과 일체화될 가능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행동방식은 고통을 찾고 잔혹해진다. 200여 년 전 꼭‘사드’가 한 말처럼 되어버렸는데, 혹여 우엘벡의 작품이 21세기 판 사드의 계보에 잇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 서로의 살갗을 부딪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저 유혹하고 과시하는 자기도취에 허우적대는 사람들, 그래서 사디스트들인 현대인들은 SM처럼 “모두가 장갑을 끼고 도구를 사용”하며, “결코 살과 살이 맞닿는 일도, 키스나 가벼운 스침, 애무도 없”는 “정확히 섹슈얼리티에 반하는” 행동 양식을 창안했을 것이다.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가 되어 있는 순전히 지적인 세계의 역겨움 속으로. 그래서 이러한 피부 접촉이 없는 이상한 변태행위에 역겨워하는 나는 진정 성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정상인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그저 권태로운 삶에 체념하고 살아가는 미셸을 스스로에게 회의적인 모습이 좋아 사랑에 빠지는 발레리는 완벽한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인물들이다. 판에 박힌 관료 생활에 익숙한 미셸과는 달리 발레리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소위 잘나가는 워킹우먼이다. 그러나 그녀의 선량한 성품과 타인의 즐거움을 우선 배려하는 태도는 일종의 냉정한 현실주의에 종속된 요즘의 여성들과 다르기만 하다. 따라서 그녀는 섹슈얼리티의 근본을 상실한 SM을 싫어하는 지극히 성적이며 동물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이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사랑에 얼굴이 홧홧 달아오른다. 적도의 태양이 작열하는 쿠바의 푸른 바닷가, 그리고 태국의 매혹 넘치는 클럽 등에서 벌어지는 정사는 그 자체 그대로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이요 행복을 확인하는 유일한 것이 된다. 물론 인간의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극단적인 결론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 오늘의 세상에서 다른 무엇이 있는가를 진실 되게 고민해보면 그 답변은 그리 쓸만한 게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반증될 것이다.

사실 부분마다에서 비틀린 우엘벡의 시선이 제어되지 않은 채 극단을 치닫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서구 백인들의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지역서 벌이는 성적탐닉을 위한 만연한 관광이 마치 서구사회의 현대화가 만들어낸 건조하고 개인화된 세계를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제3세계의 순진한 관능을 찾는 보상심리라고 합리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더해 이슬람에 대해서는 “일신론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비인간적이고 잔인해집니다. 이슬람은 모든 종교들 가운데 가장 철저한 일신론을 강요”하고 있다면서,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더구나 미셸의 연인, 발레리를 이슬람 테러범들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하여 그 증오심을 확인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그의 주장처럼 내 생각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냐! 식의 항변은 사상의 자유라는 기본권의 발휘정도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개인의 행복을 도저히 보장 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상, 지금 우리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자주 의심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그 근원을 드러내고 대안을 찾는 진심의 여정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물적 과시에 몰입하고 있는 현대인들, 근본주의적 교조적인 종교와 정치사상이 뿜어내는 광기, 이것에 휘둘려 성과 종족보존의 본능마저 이탈케 하는 현대사회는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녀의 육체가 내 몸 아래에서 전율하는 것이 느껴졌을 때 나는 종종 모든 악이 소멸된,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의식세계에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中略) 유보된 순간, 평안과 격동을 조장하는 신이 된 것 같은...”.... “이 몇 개월간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내가 행복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내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섹슈얼리티를 문학으로, 그리고 사회비평으로 마침내 철학으로 인도하는 그러면서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이 있는 그런 정말 기묘한 걸작이다. 우엘벡은 결코 그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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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화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새로운 방법
유예진 지음, 유재길 감수 / 현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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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대체 이러한 묘사와 비유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는데, 많은 부분이 이 한 권의 책으로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어떻게 예술역량을 쌓아갔는지, 특히나 프루스트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기까지 그리곤 마침내 완성하기까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작품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묘사되는 회화들, 그리고 등장인물들조차 명화(名畵)속 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라든가, 많은 소재들 또한 그림에서 차용된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호하게 여겨졌던 많은 구절들이 절로 선명해진다. 더구나 화자(話者)인‘마르셀’에게 예술적 영감은 물론 작가로서의 의지와 자신감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인 인상파 화가 ‘엘스티르’가 ‘휘슬러, 모네, 르누아르, 마네’등의 이론이 혼합되어 구축된 인물임을 알게 되면서, 마르셀의 예술론에 대한 지향점을 보다 명료하게 확인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무엇보다 제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를 펼치면 뒤죽박죽의 기억이 두서없이 전개되고 지루하게 긴 문장과 일관된 서사도 없어 아예 2권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질려버릴 정도로 곤혹스러운 독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 이 작품의 출간을 모든 출판사들이 거절하여 자비로 출판한 것이나, 출간되자마자 ‘개인적 인상의 나열이자 고작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예술과는 동떨어진 아무것도 아닌 시간 남아도는 사람들이 정말 시간을 잃어버리고 싶으면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한 혹독한 비평처럼 낭패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2권 「게르망트 쪽으로」,제4권「소돔과 고모라」등으로 이어지면 제법 사건같은 것이 발생해서 흥미를 만들기는 하지만 역시 여느 기성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과 내용 탓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제1권을 출간한 후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머리로 사고해서 쓴 것이 아니라 책에 언급되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저의 감수성에 의해 느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듯이 그의 오감에 의해 촉발된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어느 하나 극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기억들이 아닌 것이기에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 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읽어내기가 만만찮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지만, 이 작품의 대부분이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예술은 회화, 즉 화가에 의한 회화감상법으로 이것이 곧 작가를 꿈꾸는 마르셀이 추구하는 그만의 작가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바탕이었다는 점에서 가능한 것이다. 작품 전체에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주요 인물들은 예외 없이 어느 실존의 예술가이거나 그림 속 등장인물을 모델로 창조된 인물이며, 인물의 성격역시 여러 회화 속 실재인물, 또는 신화가 말하는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 만큼 작품에서 직접 언급되는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언급되는 문장을 통해 연관되는 화가나 그림을 떠올리면 이야기의 선명한 윤곽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제 1권의 제목이기도 한‘스완’은 어린‘마르셀’에게 최초로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는 인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부유한 유대인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바로 인상파 화가‘르누아르’의 잘 알려진 <뱃놀이 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에 유별나게 검은 정장을 하고 뒷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 당시 유명 미술잡지인 <가제트 데 보자르>의 편집장이자 미술수집가인‘샤를 에르퓌시’로, 르누아르가 자신의 후원자인 그에 대한 예의로 그려 넣은 것이다. 따라서 실존인물과 소설 속 허구인물은 이름만 다를 뿐, 유대인이며 미술품 수집가인 것 하고, 그 자신은 단지 예술의 감상자로서 진정한 예술가가 되지못한‘예술 미혼자’로 남는 것은 소설 그대로이다. 또한 스완이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엉뚱하게도 ‘보티첼리’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인 <모세의 삶>에 그려진 양치기의 딸‘시포라’의 표정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오데트’의 이미지나, 그녀의 동성애나 창부로서의 기질 등이‘바토’가 그린 한 쌍의 그림인 <무관심>과 <소녀>에서 차용되는 것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나 회화작품이 인물의 성격과 창조에만 차용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진정한 주제와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소설의 외형적인 측면인 서사적 주제는 진정한 소설가로서 확신을 갖기까지의‘마르셀’에 대한 성장기로서 예술적 자기 능력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 그리곤 사랑과 예술의 열정 사이에서의 갈등, 마침내 일상적 소박함과 평범함에서조차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적 발견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정은 바로 무수한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으로 은유되어 표현되고 있는데, 거대한 예술의 도시 베네치아는 도시 자체가 회화가 되어 예술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특히 “샤르댕, 베르메르, 램브란트”는 거의 절대적인 이상이 된다. 이들은 바로 “사물에서 초시간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 낸”사람들이며, 내재적 측면으로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듯이 “시간의 공간화, 즉 소설이라는 정해진 틀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한다. 즉 소설 속 인상주의 화가 ‘엘스티르’로 대변되는 프루스트의 인상주의적 시선으로 “영혼의 안식처”는 ‘잃어버린 시간’이자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삶이 모험으로 가득 차 있지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극적인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지향은 항상 의기소침하고 회의적인 것과의 갈등이었기에 마침내 하찮은 소재인 정물들을 그린 ‘샤르댕’의 그림은 소재와 상관없이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소화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되는 것이며, ‘베르메르’의 <델프트의 풍경>에 그려진 “덧칠에 덧칠을 하고 여러 겹을 입혀 완성한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자신의 소설이 “다양한 원고 조각을 이어서 만든 수정에 수정을 가하여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해야 하는 작품”이 되어야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비의도적인 기억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회화예술에 대한 프루스트의 이해는 실로 상당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프루스트가 소설가,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궁극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되는 인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한 작가가 있다.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인데, 그의 저술 중 『아미앵의 성서』와 『참께와 백합』이라는 두 권을 번역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중추를 이루는 화가, 소설가들과 그들의 그림과 작품이 직간접적으로 소설의 흐름과 인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례가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루스트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적취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프스적 사랑이 어떻게 작품 속 회화에 녹아있는지도 발견하게 된다. ‘프루스트와 회화’에 대한 이 미학적이고 문학적인 저술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독해하는데 더 할 수 없는 긴요한 참고가 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한 권의 책이 프루스트를 해설하는 여느 백 권의 책보다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덮어두었던 제5권 「갇힌 여인」을 다시 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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