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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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념을 구성하게 한 것들은 가정과 학교교육, 사회가 쏟아내는 말들과 이미지들, 제도, 법, 담론 등 조직과 체제가 조성하는 보이지 않는 틀, 의식적, 무의적으로 체득된 경험과 지식들의 융합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것들의 실체를 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신념을 어떤 방향이나 궤도로 수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건대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공간적 경계가 없는 초월의 어떤 곳,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무인도 같은 그런 곳이라면 대체 나를 이루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날 것 같기만 하다. 오직 대자연과 나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내 몸과 정신의 관습을 만들어낸 것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이용되는지를 보게 된다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냉엄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와 ‘무인도’를 다시금 배경으로 삼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만 같다. 기독교관에 세뇌되어있으며, 근대문명과 화폐자본주의에 적응된 인간의 습속이란 것의 정체란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절대적 공간으로 제격이라는 얘기다. 나를 포획하고 있는 근대화(modernity)를 규정짓는 요소들이란 지속적이고 급속하게 흐르는 시간을 강박적으로 인식하며, 현재보다는 가능성이라는 미래의 삶을 위해 부단히 부를 축적하고, 각종의 규율장치들을 통해 규격화된 삶을 재단하며, 모든 타인과 물질을 욕망의 대상화 시키는 것들이라 정리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특징짓는 이러한 것들이 과연 나와 우리들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를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깨어난 곳, 무인도를 로빈슨은 ‘탄식의 섬’이라고 명명하듯 그를 길들였던 현대문명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박탈감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식은 꽤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한한 자유와 자연이 펼쳐져 있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평양의 외딴섬에 인간이란 나 혼자란 자각을 한 로빈슨이 착수한 일이란 난파된 선박(버지니아호)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섬의 동굴 속으로 옮겨 저장하는 것이고, 동물들을 잡아 우리에 가두며, 대지를 경작하고 수확하여 미래라는 걸 위해 쌓아두는 행위이다. 즉,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겠다는 의지이며, 현대라는 문명의 습관을 이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성서와 기독교제단을 설치하고, 물시계를 만들며, 자기 한 사람을 위한 섬의 통치체제인 법률을 제정, 선포하는 일련의 통제적 장치들을 설정하는 모습은 희화(戱畵)적이기까지 하다. 무릇 섬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것인데, 문명인이란 것이 이처럼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한편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결정적인 분기점이자 차이랄 수 있는데, 원주민‘방드르디’의 출현이다. 현대적이지 못하기에 야만인일 수밖에 없는 방드르디를 대척점에 두는 현대인 로빈슨이 만들어내는 긴장관계 때문이다. 성서를 읽고 설교하는 로빈슨의 낯설고 기이한 행동에 웃어 재끼는 방드르디에 대한 로빈슨의 분노, 이 야만인을 길들이기 위한 법률과 화폐거래 제도를 통한 훈련은 그 진지함만큼이나 우습다.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반복적 노동을 부여하곤 버지니아 호에서 노획한 금화를 댓가로 주고는 방드르디가 요구하는 물건이나 반일의 휴식을 구매하도록 하는 것인데, 돈에 대한 이러한 종교적 답습은 그의 청교도적 신앙과 결합하여 현대를 포획한 자본주의의 체험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반일의 휴식을 선택하곤 빈둥거리는 방드르디의 늘쩍지근한 게으름에서 이미 로빈슨의 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시간관, 합리주의 지성이라는 미덕, 거래수단으로서의 화폐제도, 각종 법적 제도장치들, 수확물의 축적과 같은 이식은 섬 스페란차에서 무익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로빈슨의 이러한 행위는 근대적 인간관, 문명에 대한 맹신이랄 수 있는데, 이 진보와 야만이라는 기만적 도식관계가 그야말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는 것이, 이 둘의 관계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로빈슨 내면의 갈등은 야만인 방드르디에 대한 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 부정적 관점은 불가피하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어떤 당위를 보이기 시작한다. 무인도 스페란차의 대지에 대한 여성화이고 대자연과 합일화되는 초월적 느낌과 성적 구분의 무위에 대한 비인간화의 깨달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극적인 전환은 동굴에 쌓아둔 화약의 폭발로 인한 문명의 시간과의 결별, 시간 인식의 소멸이다. 더 이상 근대적 시간이 머물지 않는 섬은 그의 신념을 이루고 있던, 그를 장악하고 있던 근대의 찌꺼기들의 위선이다. 방드르디에게서 발견하는 분명하고도 과격한 아름다움, 자연스럽고도 상쾌한 우아함은 로빈슨의 독실한 청교도였던 시절의 번쩍하는 초월의 그 어떤 교감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을 그 어떤 하나의 주제나 관념적 이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사회, 즉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 맥락을 핵으로 하고 있지만, 문장들마다에서 숨 쉬고 있는 철학적 단상들은 인간 본연에 대한 무수한 사색을 말하고 있음에서이다. 또한 금요일, 비너스를 상징하는 방드르디와 같은 다의적 어휘들로 인하여 가히 신화적 상상력이란 의미의 풍성함을 더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니체를 느끼게 되며, 또 어디에서는 루소를, 짐멜을, 보들레르를 보는듯 철학의 대 향연과 같은 도취감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들에 감히 눈길을 고정하기 시작하면 발견하게 되는 그 웅숭깊은 사유와 통찰에 그저 넋을 잃고 마는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가히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오늘의 나와 우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인간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존귀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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