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섬앤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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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백년전쟁의 영웅인 동레미의 어린 목녀(牧女)인 성(聖)‘잔 다르크(Jeanne)’와 프랑스군의 원수(元帥)로서 잔과 함께 오를레앙 등에서 전승을 거두었던 전쟁 영웅이었으나 남색과 아동살해로 이어지는 기이한 쾌락의 추구로 악명을 떨쳤던‘질 드 레(Gilles)’백작을 인간의 속죄와 구원이라는 양식에 함께 담아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본원적 의식을 통찰한다. 특히 질드레에 투영된 다층적 인간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악마성과 구도자적 성향의 교착을 보여주고 있어 아찔한 매혹과 성스러움, 그리고 고통스런 충격의 그 어떤 혼합된 모호함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투르니에의‘방드르디’로부터 그가 갈망하는 인간상(像), 근원적으로 회귀하여야 할 자연으로서의 인간, 어떤 의미에선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오르게 하는 그런 궁극적 지향의 이해는 생명과 죽음, 순수성과 열정의 분리 할 수 없는 합일이라는 일관된 의지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상처, 즉 물신숭배라는 인간의 이성과 괴리된 동물적이고도 본능적인 귀결을 생생한 형상으로 축조하여 악성(惡性)과 양성(良性)의 전위를 오가며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란 진정 어려운 물음을 생각게 한다.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여 철학적 사유를 하게하는 투르니에의 작품세계는 이 때문에 발을 빼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다하겠다.

성 미카엘과 성녀 카트린의 음성, 다시 말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잔다르크의 조국 프랑스와 샤를르 황태자의 왕위 복권에 대한 충성과 소명의식은 당시 기독교의 권위에 복종하던 시대로서는 그 자체로 이미 성스러운 것이다. 오를레앙 전투의 승리, 그리고 샤를르에게 대관식을 선사함으로서 신의 음성을 이행하지만, 세상이란 그리 순수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다. 개인과 집단, 국가의 이기적 욕심을 위한 기만적인 협력과 배신, 음모와 질시가 따라 다닌다. 프랑스에서 영국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잔(Jeanne)은 콩피에뉴 전투에서 적에게 사로잡히고 마침내, 루앙에서 마녀로 유죄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다. 이러한 잔의 숭고한 정신, 성스러움에 매료된 질(Gilles)은 그녀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루앙에 잠입한 그는 그녀가 예수를 부르짖으며 화형당하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화형은 양성의 악성으로의 전위이다. 성인을 마녀로 둔갑시킨 이 세계의 사악함, 기독교의 음험함, 바로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다. 신앙심을 상실하고 깊은 상처를 받은 질드레 백작은 이 같은 인류의 도덕적 상처에 대한 치유의 방법을 찾지 못해 갈등한다.

 치유, 구원에 이르는 방법, 그 공정(工程)은 질드레의 기이한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데, 일종의 연금술에 정신을 포획당하는 것이다. 연금술의 등장은 그야말로 투르니에 다운 은유라 할 수 있다. 금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속물적 행위로서 이는 화폐, 금융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르네상스라 불리는 예술과 물질의 풍요를 상징하는 피렌체를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도입함으로써 허영과 욕망의 의미를 더한다. 또한 질드레의 부서진 사랑에 대한 영속화를 위한 구원의 길로의 인도라는 치료과정으로서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처럼 연금술이 내장할 수밖에 없는 탐욕스러움과 사악함의 기운이 신비로운 것은 선과 악, 삶과 죽음, 성덕과 영벌을 오간다는 것이다.

즉 질드레의 연금술이란 사탄인 바론에게 아이들의 피와 심장, 팔다리를 바침으로서 성녀 잔에게 다가가는 구원의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화형대위에서 불타죽은 잔처럼 아이들을 불태우는 것, 또한 아이들의 순진함, 생명력,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합체시켜 동일화하는 것, 즉 영원성으로의 회귀이다. 완벽한 연금술이지 않은가? 또한 질드레 백작은 잔을 불러내는 일종의 위령제로서 엄청난 규모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소위 바타이유가 말하는 비생산적 소비라는 균형적 순환으로서 파괴가 아닌 영속을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호사취향이나 과시가 아니라 더 나쁜 의도인 희생제의(犧牲祭儀)로서 진행된 것이라고 질드레의 보좌신부의 입을 빌려 발설하는 것에서 이미 역설적 표현인 것으로 악이 아니라 선의 행위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질드레의 변태적 쾌락의 추구와 수많은 아이들의 살해 행위라는 악덕이 궁극적으로 자신 또한 화형이라는 속죄의 불을 통해 잔이 있는 세계, 이승의 삶이 아닌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구원을 향한 여정이라는 지독한 역설, 양성적 전위를 낳는다는 데서 거듭 확인된다. 

이것은 사탄은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어린 이삭을 자신에게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와 같은 발칙한 신성모독의 발언처럼, 선과 악의 심오한 유사성을 제기함으로서 오늘의 우리세계가 이와 같은 정신착란의 시대이며, 의식적 삶과 통합되지 않은 인간의 동물성만이 활개 치는 야만적이고 본능적이며 물신숭배에 몰입하고 있는 마성을 지적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물론 이처럼 명료하기 짝이 없는 어설픈 작품만은 아니다. 인간에게 깊이를 제공하는 죽음, 그 어둠 속에 뛰어들어 어둠에서 빛을 찾으려는 용감한 시도이며, 생명과 죽음이라는 근본적 모호성, 무의식의 중핵인 자기에로의 접근로를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이기도 하다. ‘루앙의 마녀’였던 잔다르크는 오늘날‘성녀 잔다르크’로 불린다. 그러나 질드레 백작은 성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불문(火口)으로 뛰어든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일까? 과연 인간 삶의 정도란 어떤 것일까? 투르니에를 읽으면 번번이 내 본성을 구성하는 것들에는 어떤 이상 징후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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